석중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석중귀는 오대 십국 시대 후진의 2대 황제이다. 석경당의 조카이자 양자로서, 942년 석경당 사후 황위에 올랐다. 즉위 후 요나라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취하며 신하를 칭하지 않았으나, 요나라의 침략으로 946년 수도 개봉이 함락되어 항복하고 요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이후 요나라에서 부의후로 봉해져 유배 생활을 하다 974년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후진 (오대)의 황제 - 석경당
석경당은 사타족 출신으로 후당 시대에 활약하며 이종가의 견제를 받다가 거란과의 동맹을 통해 후진을 건국했지만, 요나라에 연운 16주를 할양하고 조공을 바치는 외교 정책을 펼치다 매국노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 914년 출생 - 이종후
이종후는 후당 명종 이사원의 아들로, 933년 황제에 즉위했으나 이종가의 반란으로 폐위되어 살해당했으며, 후진의 석경당에 의해 추존되었다. - 914년 출생 - 다풀라 5세
- 974년 사망 - 후지와라노 요시타카
후지와라노 요시타카는 헤이안 시대의 귀족이자 시인으로, 고전 36가선 중 한 명이며 《오구라 백인일수》에 시가 수록되었고, 젊은 나이에 사망했으나 불교 신앙심과 예술적 재능으로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 974년 사망 - 올라프 코눙그
9세기 아일랜드에서 활동한 바이킹 지도자 올라프 코눙그는 853년 아일랜드에 도착하여 "외국인들의 왕"으로 불리며 아버지 로클란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확장했고, 아일랜드 최고 왕과 전쟁을 벌이거나 브리튼 지역을 원정하기도 했으나, 생애와 사망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부족하며 올라프 백색왕과의 동일성 여부에 대한 논쟁이 있다.
석중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칭호 | 진왕(晉王) |
출생일 | 914년 7월 22일(천우 11년 6월 27일) |
출생지 | 태원(太原) |
사망일 | 974년 7월 10일(보녕 6년 6월 18일) |
묻힌 곳 | 안진성(安晉城), 건주, 요나라(현대 차오양 시, 랴오닝 성) |
아버지 | 석경유(石敬儒) (친부), 석경당(石敬塘) (양부, 친척) |
어머니 | 안태비(安太妃) (친모), 이황후(李皇后) (양모, 숙모) |
배우자 | 장씨(張氏) 봉황후(馮皇后) (942년 결혼) |
주요 후궁 | 조비(趙妃) 섭비(聶妃) |
자녀 | 석연후(石延煦) (양자) 석연보(石延寶) (양자) |
직함 | |
재위 기간 | 942년 7월 28일 - 947년 1월 11일 |
이전 | 석경당 |
이후 | 왕조 멸망 요 태종(요나라 황제)가 중원 황제로 즉위 |
시호 | 출황제(出皇帝) |
묘호 | 없음 |
연호 | |
연호 | 천복(天福) (석경당에게 계승) (942년–944년) 개운(開運) (944년–946년) |
가문 | |
가문 | 석씨(石氏) |
왕조 | |
왕조 | 후진 |
2. 생애
석중귀는 후진 고조(석경당)의 조카로 타이위안(太原)에서 태어났다.[5] 936년 석경당을 따라 낙양에 들어갔고, 북도유수를 지낸 후 제왕(齊王)에 봉해졌다.[9]
942년 석경당이 사망하자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개운(開運)으로 고쳤다.[1] 재위 중에는 메뚜기떼로 인한 피해가 컸으며, 경연광의 건의로 요나라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1] 이로 인해 요나라의 침공을 받았으나, 두 차례 막아냈다.[1] 그러나 946년 요나라의 세 번째 침공으로 개봉(開封)이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었고, 이후 건주(建州)에서 사망하였다.[18]
2. 1. 초기 생애 및 배경
석중귀는 후진 고조(석경당)의 형 석경유의 아들로 태원에서 태어났다. 그 후 석경당의 양자가 되었다.[5] 석중귀는 외모가 석경당과 비슷했지만 키가 더 작았다고 전해진다.[9]932년, 석경당이 하동 절도(河東, 태원)를 맡게 된 후,[11] 왕진(王震중국어)에게 석중귀에게 예기를 가르치도록 했지만, 석중귀는 이해하지 못하고 왕진에게 "이것은 우리 집안의 일과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5] 석경당이 하동을 지휘하는 동안 석중귀는 장군 장종훈()의 맏딸과 결혼했다.[12]
936년, 석경당은 당시 후당 황제인 이종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 결과 석경당의 여러 친척들이 이종가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그의 두 아들도 포함되었다.[9] 그 후 후당 장군 장경달의 태원 포위 공격 당시, 석중귀는 석경당을 직접 돕는 데 참여했다.[5] 이후 거란 제국의 요 태종의 구원군이 석경당을 지원하여 장경달의 군대를 격파하고 태원에 대한 포위 공격을 풀었다. 요 태종은 그 후 석경당을 중원의 황제(새로운 후진 건국자로서)로 선포했다.[9]
천복 원년, 석중귀는 석경당을 따라 낙양에 들어가 북경 유수, 태원윤, 하동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천복 3년 11월, 석중귀는 정왕, 개봉윤에 임명되었다.
천복 6년에는 제왕, 광진윤, 공덕사로 전임되었다.
2. 2. 석경당 통치 시기
석경당이 황제로 즉위한 직후, 양광원이 장경달을 암살한 후 후당군이 거란/후진 군대에 항복했다. 태종과 석경당은 후당의 수도 낙양으로 진격할 준비를 했다. 석경당은 태원에 명목상 수비수로 아들 한 명을 남겨두려 했고, 태종이 선택할 수 있도록 모든 아들을 불렀다. 태종은 석중귀를 선택하며 "이 눈 큰 아이가 적임이다."라고 말했다. 석경당은 석중귀를 태원에 남겨두고, 북경(태원) 수비, 태원 시장, 하동 절도사 직함을 주었다.[9] 거란/후진 연합군이 낙양으로 접근하자, 이종가(후당)는 절망적인 상황을 인지하고 가족과 함께 자결하여 후당을 멸망시켰다. 이후 석경당은 저항 없이 낙양에 입성했다.[9]천하는 평정되지 않았고, 937년 장총빈의 반란으로 석경당의 아들 석중신과 석중애가 죽었다.[13] 석경당의 또 다른 아들 석중고는 어린 시절에 사망하여, 석중귀 외에 석중예만 남았다.[10] 937년 후반, 석경당은 석중귀를 수도 개봉으로 소환하여 황실 호위 대장으로 임명했다. 938년, 석중귀는 개봉 시장, 정왕(鄭王)에 봉해졌다.[13]
941년 말, 석경당은 안중영 성덕 절도사(成德, 스자좡)의 반란 가능성을 예상하고, 반란 발생 시 작전 조율을 위해 예도(鄴都, 한단)로 가기로 결정했다. 석중귀는 개봉 수비수로 남았다. 안Congjin 산남동도 절도사(山南東道, 샹양)의 반란도 염려한 석경당은 재상 하녕의 조언에 따라 서명된 백지 조칙을 남겨 석중귀가 신속히 대처하게 했다. 석경당이 개봉을 떠난 후 안중진이 반란을 일으키자, 석중귀는 고흥주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공격했다. 얼마 후, 석경당은 석중귀를 예도로 소환하고 이덕충을 개봉 수비로 임명했다. 석중귀는 예도 수비, 제왕(齊王)으로 변경되었다.[14] 안중영과 안중진은 패배했다. 안중영은 부하들에게 살해당했고, 안중진은 자결했다.[1]
942년 여름, 석경당은 병에 걸려 원로 재상 봉도에게 석중예를 부탁했다. 그러나 석경당 사후, 봉도는 황실 호위 대장 경연광과 상의하여 더 나이 많은 황제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석중귀를 지지하여 왕위에 올렸다.[1]
2. 3. 황제 즉위 (942년)
942년 여름, 석경당은 심각한 병에 걸렸다. 그는 원로 재상 봉도를 소환하고 석중예를 불러 봉도에게 절을 하게 한 후 석중예를 봉도의 무릎에 앉혀 어린 황제를 봉도가 이끌며 석중예가 왕위를 계승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러나 석경당이 사망한 후, 봉도는 황실 호위 대장 경연광과 상의하여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므로 더 나이 많은 황제가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석중귀를 지지하여 그가 왕위에 올랐다.[1]천복 7년 6월에 고조(석경당)가 붕어함에 따라, 석중귀는 후진의 2대 황제에 즉위하여 개운으로 연호를 고쳤다.
2. 4. 통치 기간 (942년 ~ 947년)
942년 석경당이 사망하자 그의 조카인 석중귀가 타이위안(太原)에서 즉위하였고, 연호를 개운(開運)으로 고쳤다. 석중귀는 즉위 초 경연광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하였다. 재위 중에 메뚜기떼가 각지에서 발생하여 피해를 입은 백성이 많았다. 또한 경연광의 건의로 요나라를 섬기지 않겠다고 하여, 요나라에 대하여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1]이러한 후진의 도발적인 자세에 대해, 요 태종은 944년 초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후진 영토로 쳐들어왔으나, 석중귀가 사신을 보내 강화를 시도하자 이를 거절했다.[1]
2. 4. 1. 내부 문제
석중귀는 양어머니인 이 황후를 황태후로, 생모인 안 부인을 태비로 존경했다. 그는 두 어머니 모두에게 지극한 효성을 다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석경당의 상을 치르는 중에도 자신의 죽은 생숙부이자 양형제인 석중윤의 미망인 풍씨 부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이 황태후를 불쾌하게 했다. 그는 이후 풍씨 부인을 황후로 봉했다.[1]경연광은 석중귀가 즉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졌고, 재상으로 임명된 경연광은 그의 치세 초기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연광의 옹호 아래 석중귀는 거란(후에 요로 국명을 변경)에 대한 석경당의 공손한 복종을 버리고 더욱 대항적인 입장을 취했다. 거란의 주요 장군인 조연수는 이전에는 후당의 주요 장군이었으며 중원의 황제로 후진의 황제를 대체하길 원했기에, 태종에게 후진에 대한 군사 행동을 고려할 것을 옹호했다. 경연광이 석중귀를 설득하여 요나라의 무역 연락관 교영을 체포하고 거란 상인들을 처형하여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게 한 것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 이는 태종이 후진에 대항할 결심을 굳히게 했다.[1]
945년 후반, 두 위가 반란을 두려워하여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순국을 떠나 개봉으로 향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처음에는 수도에 많은 불안감을 조성했다. 상위한은 이 사건을 고려하여 두 위를 은퇴시키도록 주장했지만, 석중귀는 두 위가 삼촌이라는 사실을 들어 이를 거절하고, 그렇게 제안한 상위한에게 매우 불쾌함을 드러냈다. 실제로, 두 위 부인인 송 공주(석중귀의 고모)의 요청에 따라 석중귀는 두 위를 천웅절도사(천웅, 본부는 야두)로 임명했다. 상위한은 이 시점 이후 주요 정책 제안을 감히 하지 못했고 발 부상을 이유로 은퇴를 요청했다고 전해진다. 석중귀는 값비싼 물건을 수집하고 궁궐을 짓는 데 점점 더 오만하고 사치스러워졌으며, 상위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총애하는 오페라 배우들에게 상을 주었다.[15]
945년 어느 시점에 석중귀가 심각하게 병에 걸렸다. 그 당시 상위한이 시녀를 보내 석경당의 부인 이 황후를 문안했는데, 그 문안의 일부는 "황제의 동생 중루는 공부를 잘하고 있습니까?"였다. 석중귀는 이 소식을 듣고 풍 황후의 오빠 풍유 (또한 참모장의 한 명)와 논의했고, 풍유는 이후 상위한이 석중귀를 폐위하고 석중루로 대체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수정 또한 상위한을 싫어했기에, 그는 풍유, 이연도와 함께 석중귀에게 상위한을 제거할 것을 제안했다. 석중귀는 동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위한은 재상과 참모장 자리에서 해임되어 개봉 시장이 되었다. 당시 개봉 시장이었던 조영이 재상으로 임명되었고, 이송이 참모장이 되어 그를 대신했다.[17]
946년, 조연수가 후진에 투항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은 이송과 풍유가 믿었다.
942년(천복 7년) 6월에 고조(석경당)가 붕어함에 따라, 석중귀는 후진의 2대 황제에 즉위하여 개운으로 연호를 고쳤다.
석중귀의 재위 기간 동안 메뚜기 피해가 각지에서 발생하고, 도망가는 호적과 굶주린 백성이 대량으로 발생했다.
2. 4. 2. 요나라와의 갈등
942년 석경당이 사망하자 석중귀가 즉위하였고, 연호를 개운(開運)으로 하였다. 재위 중에 메뚜기떼가 각지에서 발생하여 피해를 입은 백성이 많아졌다.[1] 경연광의 건의로 요나라에게 신하로 칭하지 않겠다고 하여, 요나라에 대하여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1]이러한 후진의 도발적인 자세에 대해, 요 태종은 944년 초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후진 영토로 쳐들어왔다.[1] 석중귀가 사신을 보내 강화를 시도하자, 태종은 이를 거절했다.[1] 당시 평로절도사(본부는 현재 산둥 성 유방) 양광원은 요나라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1] 석중귀는 요나라의 공격에 저항하기 위해 여러 장군을 임명했고, 자신도 군대를 지휘했다. 고행주, 부언경, 석공패가 기성(현재 허난 성 박주)에서 요나라 군대에 포위되었고, 경연광이 구원군을 보내는 것을 거부했을 때, 석중귀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세 장군을 구출했다.[1] 다른 장군들의 경연광에 대한 증오 때문에 석중귀는 그를 재상 자리에서 해임했고, 상위한이 참모장(''추밀사'')으로서 군대의 전반적인 작전을 지휘하게 되었다.[1] 요나라 군대가 격퇴되고 철수한 후, 석중귀는 이수정을 양광원에 대항하여 파견했고, 양광원의 아들 양승훈이 강제로 양광원을 체포하여 항복했다.[15] (양광원은 이후 석중귀의 명령으로 은밀히 살해되었다.)[15]
944년 말, 요나라는 다시 대규모 침공을 감행하여 야두 지역까지 진격했지만, 곧 다시 철수했다.[15] 석중귀는 외삼촌이자 누이동생(석경당의 누이이자 석경주의 누이)의 남편인 두 위 (당시 순국절도사)에게 이수정을 부관으로 하여 징벌적 반격을 이끌도록 했다.[15] 그들은 요나라 영토로 진격하여 기주와 태주(둘 다 현재 보정)를 점령했지만, 곧 요나라 군대가 자신들을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15] 철수하려 했지만, 양성(현재 보정) 근처에서 포위되었다.[15] 두중위는 당황하여 교전하는 것을 꺼렸지만, 부언경의 옹호로 부언경, 장언택, 요원복, 황보우가 요나라 군대를 맹렬히 공격하여 요나라 군대가 당황하여 도주하게 만들었다.[15]
945년 후반, 두중위가 반란을 두려워하여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순국을 떠나 개봉으로 향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수도에 많은 불안감을 조성했다.[15] 상위한은 두중위를 은퇴시키도록 주장했지만, 석중귀는 두중위가 삼촌이라는 사실을 들어 거절하고, 상위한에게 불쾌함을 드러냈다.[15] 두중위 부인인 송 공주(석중귀의 고모)의 요청에 따라 석중귀는 두중위를 천웅절도사(본부는 야두)로 임명했다.[15] 상위한은 이후 주요 정책 제안을 하지 못했고 발 부상을 이유로 은퇴를 요청했다.[15] 그러나 상위한의 제안에 따라 석중귀는 사신 장휘를 요나라 조정에 보내 사과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다시 요청했다.[15] 태종은 상위한과 경연광을 직접 만나게 해달라고 답했다[15] (상위한이 처음 동맹을 협상했고, 경연광이 이를 깨뜨렸다는 이유로)[16] 그리고 순국과 의무(현재 허베이 성 보정)를 요나라에 할양하면 평화를 다시 맺을 수 있다고 했다.[15] 석중귀는 이 요구를 모욕적으로 여겨 추가 협상을 중단했다.[15]
946년, 조연수가 후진에 투항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은 이송과 풍유가 믿었다.[3] 두중위에게 조연수에게 편지를 쓰도록 하여 격려했고, 조연수의 밑에서 일했던 관리 조행실이 편지를 전달했다.[3] 조연수는 (후진 군대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나는 오랫동안 외국에 있었고, 중국 본토로 돌아가고 싶다. 나를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출동시켜 내가 스스로 탈출하여 함께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라고 답했다.[3] 이후, 태종의 명령에 따라 요나라 영주(현재 창저우, 허베이성) 지사 유연조 또한 후진에 투항하겠다고 제안했다.[3] 석중귀는 두중위와 이수정을 북쪽 공격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는데, 목표는 먼저 석경당이 요나라에 할양한 절도사(16주)를 되찾고, 요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이었다.[3] 두중위와 이수정이 진격했을 때, 태종이 직접 지휘하는 대규모 군대와 마주했다. 요나라 군대는 결국 후진 군대를 중도교(현재 보정)에서 포위했다.[3] 태종은 두중위에게 항복하면 황제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한 후, 두중위와 이수정은 군대를 항복시켰다.[3] 태종은 남쪽으로 진격할 준비를 했다. 거의 모든 후진 군대가 이 북방 원정을 위해 두중위와 이수정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개봉은 무방비 상태였고, 석중귀는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3]
2. 5. 후진 멸망과 포로 생활 (947년 ~ 974년)
946년 요나라의 3차 침공으로 개봉(開封)이 함락되어, 석중귀는 요나라의 포로가 되었다.[18] 태종은 석중귀에게 "의리에 어긋난 후작"이라는 뜻의 부의후(負義侯) 작위를 내리고, 석중귀와 그의 가족을 황룡부(黃龍府, 현재의 장춘, 지린)로 유배 보냈다. 이때 이씨 태후는 석중귀와 함께 유배가지 않을 수 있었지만, 석중귀가 자신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양어머니로서 그를 따라가야 한다고 말하며 함께 유배를 떠났다.[18] 유배 행렬에는 석중귀, 이씨 태후, 안씨 태비, 펑황후, 석총예, 석연서, 석연보가 포함되었다. 가는 길에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때로는 석중귀와 이씨 태후조차 식량이 떨어졌다고 한다. 도중에 그를 만난 후진(後晉) 지방 관리는 이지 자사(磁州, 현재의 한단)의 이지 뿐이었으며, 그는 가진 모든 것을 그에게 제공했다.[18]석중귀 일행이 요나라 영토로 들어서자, 호위하던 요나라 군대는 더 이상 보급품을 제공하지 않아 시종들과 대기자들이 과일과 잎을 따서 식량을 해결해야 했다. 진주(錦州, 현재의 진저우, 랴오닝성)에 도착했을 때 태조의 묘 앞에서 강제로 절을 해야 했다. 석중귀는 너무나 굴욕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설초가 나를 망쳤다!"라고 말했다. 펑황후는 함께 자결할 수 있도록 독약을 구하려 했지만 실패했다.[18]
세종 즉위 후, 석중귀의 가문은 랴오양(遼陽, 현재의 랴오양, 랴오닝성)에 정착하게 되었고, 다시 보급을 받기 시작했다.[20] 948년, 세종은 석중귀를 위로했지만, 랴오양을 떠나면서 석중귀의 환관 15명과 시종 15명, 그리고 양자 석연서(石延煦)를 데려갔다. 세종의 처남인 소선노(蕭禪奴)가 석중귀의 딸을 원했지만 석중귀는 그녀를 넘겨주고 싶어하지 않자, 세종은 그녀를 빼앗아 소선노에게 주었다. 세종은 석중귀 가문을 건주(建州, 현재의 차오양, 랴오닝성)에 재정착시켰다. 건주의 군정관인 조연휘(趙延暉)는 그들이 살 수 있도록 자신의 관청을 내주었다. 석중귀는 추종자들에게 땅을 일구고 농업 정착지를 건설하게 했다. 그러나 곧, 세종의 사촌인 야율경이 석중귀가 가장 총애하는 후궁 조씨와 섭씨를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10][21]
950년, 이씨 태후가 병에 걸렸으나 건주에는 의사나 약이 없어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그녀는 이수진을 저주하며 곧 사망했다.[22] 석중귀에 대한 마지막 전통적인 중국 역사적 언급은 후주의 ''현덕'' 연간(954-962) 동안, 요나라 땅에서 온 사람들이 석중귀와 펑황후가 여전히 비교적 좋은 상태로 살고 있지만, 그의 시종의 절반 이상이 도망치거나 죽었다고 보고했다는 것이다.[22]
이후 석중귀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유일한 정보는 그의 묘비와 석연서의 묘비가 발견된 것이다. 그의 묘비에 따르면 그는 경종의 통치 기간인 974년에 사망했다. 묘비에는 그가 펑황후와 함께 묻혔다는 내용이 있어, 그녀가 그의 사망 이전에 이미 사망했음을 암시한다. 그는 죽을 무렵 요나라 조정에서 진왕(晉王)이라는 칭호로 매우 존경받았으며, 그의 사망 당시 조정에서 공식적인 조문이 거행되었다.[6]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
조부 | 헌조(憲祖) 효원황제(孝元皇帝) 석소옹(石紹雍) | |||||
조모 | 효원의황후(孝元懿皇后) 하씨(何氏) | |||||
부친 | 송왕(宋王) 석경유(石敬儒) | |||||
모친 | 황태비(皇太妃) 안씨(安氏) | |||||
양부 | 고조(高祖) 석경당(石敬瑭) | 생물학적 삼촌 | ||||
양모 | 황후(皇后) 이씨(李氏) | |||||
봉호 | 시호 | 이름(성씨) | 별칭 | 재위년도 | 생몰년도 | 비고 |
국부인(國夫人) | 황후(皇后) | 장씨(張氏) | 위국부인(魏國夫人) | (추존) | 출제 즉위 후 황후로 추존. | |
황후(皇后) | 풍씨(馮氏) | 오국부인(吳國夫人) | 943년 ~ 947년 | |||
아들 | 석연후(石延煦) | 제주방어사(齊州防御使), 양자, 석경당의 생물학적 손자 | ||||
아들 | 석연보(石延寶) | 정주자사(鄭州刺史), 양자, 석경당의 생물학적 손자 | ||||
딸 | 공주(公主) 석씨(石氏) |
4. 연호
5. 평가 및 영향
석중귀는 후진의 마지막 황제로, 그의 통치 기간과 그 이후의 평가는 여러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권280부터 289까지 석중귀와 관련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2] 그의 통치 기간은 942년부터 947년까지로, 석경당의 뒤를 이어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결국 후진은 멸망했고 석중귀는 황제 지위를 잃었다.[2]
석중귀의 통치 기간 동안, 후진은 여러 지역에서 권력을 유지하거나 상실했다. 천수 지역에서는 942년부터 947년까지 통치했지만, 이후 후촉의 맹창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2] 중앙 지역에서는 942년부터 947년까지 통치하다가 요 태종에게 권력을 빼앗겼다.[2] 복건성 북동부 지역에서는 945년부터 947년까지 실질적인 군주로 군림했지만, 이 지역 역시 오월의 전홍좌에게 넘어갔다.[2]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sinocal.sinic[...]
[3]
서적
Zizhi Tongjian
[4]
문서
[5]
서적
Old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6]
논문
后晋石重贵石延煦墓志铭考
https://www.docin.co[...]
2004
[7]
서적
辽金历史与考古(第四辑)
https://www.doc88.co[...]
2013
[8]
문서
[9]
서적
Zizhi Tongjian
[10]
서적
New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11]
서적
Zizhi Tongjian
[12]
서적
Old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13]
서적
Zizhi Tongjian
[14]
서적
Zizhi Tongjian
[15]
서적
Zizhi Tongjian
[16]
서적
New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17]
서적
Zizhi Tongjian
[18]
서적
Zizhi Tongjian
[19]
서적
Zizhi Tongjian
[20]
서적
Old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21]
서적
Zizhi Tongjian
[22]
서적
Zizhi Tongjian
[23]
문서
석중귀묘지명(石重貴墓誌銘)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