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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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비야 조약은 1729년 스페인, 영국, 프랑스 간에 체결된 조약으로, 영국-스페인 전쟁을 종결하고 유럽의 외교적 긴장을 완화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이 조약으로 엘리자베트 파르네세의 아들 카를로스의 파르마와 토스카나 공작위 계승권을 영국과 프랑스가 지지하고, 카디스에서 영국 및 프랑스 상인에 대한 무역 특권이 회복되었으며, 아메리카 대륙의 상업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또한 영국은 마온 항과 지브롤터를 유지했다. 세비야 조약은 엘 파르도 조약과 수아송 회의의 협상을 바탕으로 체결되었으며, 이후 유럽의 세력 균형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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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 조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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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개요 | |
이름 | 세비야 조약 |
정식 명칭 | (제공된 문서에 정식 명칭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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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내용 | 스페인 본토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무역 특권 회복 아메리카 대륙의 상업 분쟁 해결을 위한 영국-스페인 위원회 설립 카를로스 3세의 파르마 공국과 토스카나 대공국에 대한 권리 확인 |
체결 날짜 | 1729년 11월 9일 |
체결 장소 | 세비야 |
발효 조건 | (정보 없음) |
만료 날짜 | (정보 없음) |
협상 및 서명 | |
중재자 | (정보 없음) |
협상가 | 벤저민 킨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윌리엄 스탠호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서명자 | 윌리엄 스탠호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벤저민 킨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호세 파티뇨 (스페인) 마르케스 데 라 파스 (스페인) 마르케스 드 브랑카스 (프랑스 왕국) |
당사국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스페인 왕국 프랑스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1729년 11월 29일부터) |
비준 | (정보 없음) |
기탁자 | (정보 없음) |
기탁처 | (정보 없음) |
기타 정보 | |
인용 | (정보 없음) |
언어 | (정보 없음) |
위키소스 | 세비야 조약 (영어) |
각주 | (정보 없음) |
2. 역사적 배경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펠리페 5세는 부르봉 왕가 출신 첫 스페인 국왕이 되었지만, 나폴리, 시칠리아, 밀라노, 사르데냐를 포기해야 했다. 또한 영국은 전쟁 중 점령한 지브롤터와 마온을 유지했다.[1]
세비야 조약은 여러 유럽 외교 문제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그중 하나는 엘리자베트 파르네세가 아들을 위해 이탈리아 왕국을 원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1716년 영불 동맹이었다. 양측은 서로에 대해 점점 더 의심했지만, 1714년 조지 1세의 즉위와 그가 하노버에 대해 품은 관심은 이전보다 영국에게 이 동맹을 더 중요하게 만들었다. 황제 카를 6세는 다른 강대국들이 1713년 국사 조칙을 지지하여 딸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보장해주기를 원했다. 상업적 문제로는 오스트리아 소유의 오스텐데 회사가 있었는데, 이 회사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상인들과 동인도 무역을 놓고 경쟁했으며, 영국이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침략하는 것에 대한 스페인의 우려도 있었다.
1714년 엘리자베트 파르네세가 펠리페 5세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는데, 펠리페 5세는 이미 스페인 왕위 계승 서열에 있는 두 아들이 있었다. 엘리자베트 파르네세는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이탈리아 상속 재산을 확보하고자 했고, 펠리페 5세는 이탈리아 영토 회복이 자신의 위신을 높이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1] 스페인은 1717년 사르데냐를 다시 점령했고, 1718년 시칠리아 상륙으로 사국 동맹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 해군은 8월 파사로 곶 해전에서 승리하여 스페인 침략군을 고립시켰고, 결국 1719년에 오스트리아 군대에 항복했다.[1]
1720년 헤이그 조약에서 스페인은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파르마의 파르마 공작이 사망하면 엘리자베트의 맏아들 카를로스에게 파르마가 귀속된다는 보장을 받았다. 조지 1세는 "유리한 기회"에 의회에서 지브롤터 반환 문제를 제기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진전이 부족했고, 상업적 긴장까지 겹쳐 1727년부터 1729년까지 영-스페인 전쟁이 발발했다.[1]
주요 군사 작전은 영국군의 파나마 포르토벨로 공격과 스페인군의 지브롤터 포위 실패였고, 스페인은 영국 상인에 대한 제한을 가했다. 양국은 1728년 2월 휴전에 합의했다. 영국 특사 벤자민 킨은 스페인이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는 것을 막기 위해 3월에 엘 파르도 조약을 협상했다. 그러나 런던에서 너무 관대하다고 여겨져 거부되었고, 수아송 회의로 이어졌다. 영국은 이 회의에서 강력한 입장에서 협상했고, 이는 성공적인 전략으로, 스페인-오스트리아 동맹이 영국에 대항하는 것을 막는 데 특히 성공했다.[1]
영국과 스페인의 예비 협상은 전년의 엘 파르도 회의와 수아송 회의에서 이미 이루어졌으며, 세비야에서 체결된 조약 내용은 대략 이러한 회의에서의 합의에 기반을 두었다.[1]
3. 조약의 내용
이러한 상황은 1720년부터 1724년까지의 캄브레 회의와 1721년 마드리드 조약을 포함한 거의 끊임없는 일련의 회의와 협약으로 이어졌다.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간의 1725년 빈 조약에 이어 프랑스, 영국, 하노버, 프로이센이 서명한 하노버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랑스 수석 장관 플뢰리 추기경이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을 수아송 회의에 초청했을 때 유럽은 전쟁 직전에 있었지만 스페인은 제외되었다.
하지만 이 조약은 1739년 젠킨스의 귀 전쟁과 1740년 더 광범위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어진 근본적인 긴장을 해결하지 못했다.
3. 1. 주요 당사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은 1729년 11월 9일에 세비야 조약을 체결했으며, 네덜란드 공화국은 11월 29일에 조약에 참여했다.
3. 2. 핵심 내용
1727년부터 1729년까지 이어진 영국-스페인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한 조약이다. 1729년 11월 9일 영국, 프랑스, 스페인 간에 체결되었으며, 네덜란드 공화국은 11월 29일에 조약에 참여했다.
이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엘리자베트 파르네세의 아들 카를로스의 파르마와 토스카나 공작위 계승권을 지지했으며, 스페인은 공국에 6,000명의 군대를 미리 파견할 수 있었다. 카디스에서 영국 및 프랑스 상인에 대한 무역 특권이 회복되었고, 손실에 대한 보상이 지급되었으며, 아메리카 대륙의 상업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영-스페인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영국은 마온 항과 지브롤터를 보유했다.
4. 조약의 체결 과정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펠리페 5세는 부르봉 왕가 출신 첫 스페인 국왕이 되었지만, 나폴리, 시칠리아 등 이탈리아 영토를 잃었다. 영국은 지브롤터와 마온을 차지했다. 펠리페 5세의 두 번째 부인 엘리자베트 파르네세는 자기 자녀들을 위해 이탈리아 영지를 원했고, 펠리페 5세는 이 영토 회복을 중요하게 여겼다.[1]
1718년 시칠리아 상륙으로 사자 동맹 전쟁이 발발, 영국 해군이 파사로 곶 해전에서 승리하여 스페인 군은 고립되었고 결국 항복했다. 1720년 헤이그 조약에서 스페인은 이탈리아 영토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파르마가 엘리자베트 파르네세의 맏아들 카를로스에게 돌아간다는 보장을 받았다. 조지 1세는 지브롤터 반환 문제를 의회에서 제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진전이 없어 1727년부터 1729년까지 영-스페인 전쟁이 일어났다.[1]
군사 작전은 영국의 파나마 포르토벨로 공격, 스페인의 지브롤터 포위 실패 등으로 제한되었고, 스페인은 영국 상인에 대한 제한을 가했다. 1728년 2월 휴전 후, 영국 특사 벤자민 킨은 스페인이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지 못하도록 3월에 엘 파르도 조약을 협상했다. 그러나 런던에서 너무 관대하다는 이유로 거부되어, 수아송 회의가 열렸다. 영국은 이 회의에서 강력한 입장이었고, 스페인-오스트리아 동맹을 막는 데 성공했다.[1]
세비야 조약은 엘리자베스 파르네세의 이탈리아 왕국 확보, 1716년 영불 동맹, 황제 카를 6세의 국사 조칙 지지, 오스트리아 오스텐데 회사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상인 간의 동인도 무역 경쟁, 영국이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침략하는 것에 대한 스페인의 우려 등 복잡한 외교 문제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1]
1720년부터 1724년까지 캄브레 회의, 1721년 마드리드 조약, 1725년 빈 조약 등 많은 회의와 협약이 있었다. 프랑스, 영국, 하노버, 프로이센은 하노버 조약을 체결했다. 프랑스 수상 플뢰리 추기경은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을 수아송 회의에 초청했지만, 스페인은 제외되었다.[1]
카디스에서 영국 및 프랑스 상인에 대한 무역 특권이 회복되었고, 손실 보상이 지급되었으며, 아메리카 대륙 상업 문제를 논의할 영-스페인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엘리자베스의 아들 카를로스의 파르마에 대한 권리를 지지했으며, 토스카나 공국이 추가되었다. 스페인은 공국에 6,000명의 군대를 파견할 수 있었다.[1] 이 조건은 1729년 11월 9일에 스페인에 제시되었고, 네덜란드 공화국은 11월 29일에 조약에 참여했다.[1]
영국과 스페인의 예비 협상은 엘 파르도 회의와 수아송 회의에서 이미 이루어졌으며, 세비야에서 체결된 조약 내용은 이 회의들에서의 합의에 기초했다.[1]
윌리엄 스탠호프와 로버트 월폴이 협상에 참여했다. 스탠호프는 칭찬을 받아 1730년 1월 해링턴 남작이 되었고, 월폴은 그를 북부 담당 국무 대신으로 임명했다.[1]
조약으로 영국은 마온 항과 지브롤터를 보유하는 대신 엘리자베타 파르네세의 상속권을 지지했다. 이는 1731년 빈 조약과 영오 동맹으로 이어졌다.[1]
펠리페 5세와 엘리자베타 파르네세는 조약 체결을 확인하러 세비야에 왔고, 엘리자베타는 조약 체결 1주일 후 딸 마리아 안토니에타를 낳았다.[1]
5. 조약의 결과 및 영향
세비야 조약은 마온과 지브롤터 상실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위원회는 거의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영국-프랑스 동맹은 1731년에 만료되었고,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1731년 빈 조약에 합의했지만, 1732년 카를로스가 파르마를 상속받도록 프랑스와 협력했다. 1733년부터 1735년까지의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그는 이를 나폴리 왕국과 교환했고, 1759년에는 스페인 국왕이 되었다.[1]
1732년에 영국 식민지 조지아가 설립되면서 영국-스페인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는데, 스페인은 이를 스페인령 플로리다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스페인령 플로리다는 본토 스페인과의 해상 운송로를 보호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한편, 영국은 1733년 루이 15세와 그의 삼촌 펠리페 5세 사이의 ''가족 조약''을 스페인의 최대 교역 파트너로서 프랑스에게 대체될 첫 단계로 보았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1739년 젠킨스의 귀 전쟁과, 1740년부터 1748년까지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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