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국 동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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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국 동맹 전쟁은 1717년 스페인이 이탈리아 영토 회복을 위해 사르데냐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전쟁이다. 스페인은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으로 약화된 오스트리아를 공격했고, 이에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는 사국 동맹을 결성하여 스페인에 대항했다. 전쟁은 스페인의 시칠리아 침공, 영국 해군의 해전, 프랑스의 스페인 침공 등으로 전개되었으며, 1720년 헤이그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스페인은 점령지를 반환하고 파르마 공국의 계승권을 인정받았으며, 사보이아 공국은 사르데냐 섬을 얻고 사르데냐 왕국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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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국 동맹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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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개요 | |
분쟁 명칭 | 사국 동맹 전쟁 |
일부 | 앵글로-스페인 전쟁 및 프랑스-스페인 전쟁의 일부 |
![]() | |
시기 | 1717년 (사실상) - 1720년 2월 17일 |
장소 | 이베리아 반도 사르데냐 시칠리아 스코틀랜드 스페인령 플로리다 바하마 |
결과 | 헤이그 조약 (1720년) |
영토 변경 | 오스트리아가 사르데냐를 사보이에 할양 사보이가 시칠리아를 오스트리아에 할양 |
교전 세력 | |
사국 동맹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프랑스 왕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공화국 사보이아 공국 |
반대 세력 | 스페인 자코바이트 (1719년) |
지휘관 | |
사국 동맹 | 리처드 템플 조지 빙 제임스 피츠제임스 클로드 드 메르시 |
반대 세력 | 장 드 베테 호세 데 알보르노스 안토니오 가스타녜타 조지 카모크 |
병력 규모 | |
스페인 | 15,000-20,000명 |
사국 동맹 | 35,000명 |
사상자 | |
스페인 | 약 4,350명 |
사국 동맹 | 오스트리아: 약 11,250명 영국: 약 6,000명 프랑스: 약 3,000명 사르데냐: 약 2,250명 네덜란드: 약 1,500명 |
2. 배경
카를로스 2세가 1700년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결과,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 필립이 펠리페 5세로 스페인 왕위를 계승했으나, 위트레흐트 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이탈리아와 저지대 국가의 영토를 모두 잃었다. 스페인령 네덜란드,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사르데냐섬은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카를 6세에게, 시칠리아섬은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마데우스 2세에게 넘어갔다.[23]
13년 간의 전쟁 이후에도 스페인의 국력은 쥘리오 알베로니 추기경의 활약으로 회복될 수 있었다. 알베로니는 펠리페 5세와 엘리사베타 파르네세의 결혼을 성사시키고, 총리가 되어 스페인의 재정을 개혁하고 경제를 안정시켰다.[24][25]
펠리페 5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야심을 드러냈고, 이에 맞서 영국, 네덜란드 공화국, 프랑스 왕국은 1717년 1월 4일 삼국 동맹을 맺었다. 영국은 스페인이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려는 것을 우려하여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26]
1717년 8월, 스페인 군은 사르데냐에 상륙하여 11월까지 섬을 장악했다. 1718년 7월에는 시칠리아에 3만 명의 병력을 상륙시켰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오스만 제국과 파사로비츠 조약을 체결하고, 8월 2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와 함께 사국 동맹을 맺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3]
2. 1.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위트레흐트 조약
카를로스 2세가 1700년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 필립이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이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원인이 되었고, 결국 앙주 공 필립이 스페인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고, 왕위 계승 조건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하나의 왕 아래 통일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23]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스페인은 이탈리아와 저지대 국가(지금의 네덜란드, 벨기에 지역)의 영토를 모두 잃었다. 스페인령 네덜란드,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사르데냐섬은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카를 6세에게 넘어갔고, 시칠리아섬은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마데우스 2세에게 넘어갔다. 프로이센 또한 스페인령 상 겔더 지역을 차지했다.[23]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종결지은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과 1714년 라슈타트 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네덜란드,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사르데냐를 신성 로마 황제 카를 6세에게, 시칠리아 왕국을 사보이아 공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에게 넘겨주었다.[7][8] 프랑스 출신인 필립 5세 (이전에는 앙주 공 필립으로 불렸으며, 프랑스 부르봉 왕가 출신이다.)[1]에게 이 영토들을 되찾는 것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위트레흐트 조약은 스페인이 프랑스 또는 오스트리아와 통합될 수 없음을 명시했고, 그 조건에 따라 필립은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1713년부터 1715년 사이에 프랑스 왕실 가족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필립은 5세의 루이 15세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생겼고, 이제 그는 이 권리 포기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다. 황제 카를 6세 또한 이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새로 얻은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에서 장벽 조약의 이행을 미루었는데, 이는 네덜란드 공화국이 거의 파산할 정도로 노력했던 목표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걱정한 영국과 프랑스는 이러한 조건을 시행하기 위해 1716년 영불 동맹에 합의한 다음, 1717년 1월 네덜란드와 함께 삼국 동맹을 맺었다.[2]
2. 2. 알베로니 추기경의 개혁과 스페인의 국력 회복
쥘리오 알베로니는 이탈리아의 추기경이자 플라젠샤 대주교의 간사였다.[24] 1714년 알베로니는 펠리페 5세와 엘리사베타 파르네세의 결혼을 성사시켰고, 이후 왕비의 개인 자문관 역할을 맡았다.[25] 1715년 총리가 되어 스페인의 재정과 육군을 개혁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 함대를 재건했다. 1718년에만 전열함 50척을 건조했다. 1717년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이 되었다.13년간의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으로 황폐해진 스페인의 국력 회복은 이탈리아 출신 추기경인 Giulio Alberoni영어가 추진했다.
2. 3. 삼국 동맹과 사국 동맹의 결성
펠리페 5세는 프랑스 왕국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야심을 드러냈고, 이에 맞서 영국, 네덜란드 공화국, 프랑스 왕국은 1717년 1월 4일 삼국 동맹을 맺었다.[26] 영국은 스페인이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려는 것을 우려하여 프랑스와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26]1713년 우트레히트 조약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났지만, 스페인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영토를 오스트리아에, 시칠리아를 사보이아에 넘겨줘야 했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1]는 이 영토들을 되찾고 싶어했고, 그의 두 번째 부인 엘리자베트 파르네세와 수상 알베로니 추기경도 이를 지지했다.
카를 6세는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에서 장벽 조약 이행을 늦췄고, 이는 네덜란드 공화국을 힘들게 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1716년 영불 동맹을 맺고, 1717년 1월 네덜란드와 함께 삼국 동맹을 맺었다.[2]
사보이아와 오스트리아는 시칠리아와 사르디니아를 교환하기로 했지만, 스페인은 사르데냐와 시칠리아 섬을 되찾기로 결정했다.
1717년 8월, 스페인 군은 사르데냐에 상륙하여 11월까지 섬을 장악했다.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중이었고,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경제 재건을 위해 평화가 필요했다. 외교적 해결 시도가 실패하고, 1718년 6월 영국 해군이 서지중해에 도착했다. 스페인은 1718년 7월 시칠리아에 3만 명의 병력을 상륙시켰지만, 오스트리아가 오스만 제국과 파사로비츠 조약을 체결하고, 8월 2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와 함께 사국 동맹을 맺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3]
3. 전쟁의 경과
스페인의 사르데냐와 시칠리아 침공, 그리고 이에 맞선 사국 동맹의 참전과 주요 전투들은 유럽의 정세를 뒤흔들었다.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 체결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6세는 삼국 동맹에 참여하였다. 그해 7월, 스페인은 시칠리아섬을 침공하여 팔레르모와 메시나를 점령하고, 9월에는 몬테마 공작이 섬 전체를 정복했다. 8월 11일, 조지 빙 경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파사로 곶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은 10월 15일 밀라초 전투에서 패배했다.
알베로니 추기경은 프랑스 왕위 교체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되어 추방되었고, 프랑스는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1719년 4월, 오를레앙 공작은 베르빅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에게 스페인 영토 침공을 지시했고, 같은 해 8월 네덜란드 공화국도 동맹에 합류하며 전쟁에 참전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프랑스군이 플로리다의 펜사콜라를 점령했다.
시칠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은 프란차빌라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이후 제2차 밀라초 전투에서 승리하고 메시나를 탈환했다. 1719년 초, 오르몽 공작의 영국 왕위 교체 시도는 실패했고, 엘리언 도난 전투와 글렌셸 전투에서 스페인군이 패배하며 스페인의 영국 침공은 좌절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 함대는 비고를 함락시키고 퐁테베드라로 진격하여 스페인에 큰 충격을 주었다. 프랑스군은 펜사콜라를 점령하고, 스페인은 사우스캐롤라이나를 공격했다. 스페인군은 쿠바에서 영국령 바하마의 나사우를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스페인의 야망과 유럽 강대국들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보여주며, 이후 벌어질 전쟁의 향방을 예고했다.
3. 1. 스페인의 사르데냐와 시칠리아 침공
1717년 8월, 펠리페 5세는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으로 약해진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다. 그해 11월, 스페인은 사르데냐섬을 침공하여 섬을 스페인 영토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사부아 공자 외젠이 오스만 제국과의 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탈리아에서의 다른 전쟁을 치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군대와 물자는 이탈리아 방면으로 지원되지 않았고, 이는 스페인의 침공에 오스트리아가 늦게 대응하는 원인이 되었다.1718년 7월, 스페인군은 시칠리아섬을 침공해 7월 7일 팔레르모를 점령하고 7월 18일 메시나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9월 30일 몬테마 공작이 시칠리아섬을 완전히 정복했다. 같은 해 8월 11일 파사로 곶 해전에서 조지 빙 경이 이끄는 영국 해군이 시칠리아를 떠난 스페인 함대를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위트리히 필리프 폰 다운 경이 나폴리에 집결해 오스트리아군을 시칠리아섬에 상륙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1718년 10월 15일 밀라초 전투에서 스페인군에게 패배하면서 오스트리아군의 상황은 어렵게 되었다.
3. 2. 사국 동맹의 참전과 주요 전투
1718년 7월 스페인군은 시칠리아섬을 침공하여 7월 7일 팔레르모를 점령하고 7월 18일 메시나를 점령했으며, 9월 30일 몬테마 공작은 시칠리아섬을 완전히 정복했다. 같은 해 8월 11일 파사로 곶 해전에서 조지 빙 경이 이끄는 영국 해군이 스페인 함대를 공격했다. 이후 위트리히 필리프 폰 다운 경이 오스트리아군을 시칠리아섬에 상륙시켰지만, 1718년 10월 15일 밀라초 전투에서 스페인군에게 패배했다.[12]같은 해 알베로니 추기경은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섭정인 필리프 2세 도를레앙 공작을 펠리페 5세로 대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는 켈라마르 음모로 알려졌으며, 발각 후 알베로니는 프랑스에서 추방되었고, 프랑스는 스페인에 선전포고했다. 1718년 12월 17일까지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는 모두 공식적으로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고, 네덜란드 공화국은 1719년 8월에 합류했다.[18]
1719년 4월, 오를레앙 공작은 베르윅 공작휘하의 프랑스군을 파병해 스페인의 서부 바스크 지방을 침공했다. 베르윅 공작은 산세바스티안 공방전에서 승리하였고 북부 카탈루냐에도 진입했다. 두 지역 모두에서 주요 지역 지도자들로부터 침략자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고, 그들 중 일부는 프랑스에 영구적으로 합병될 것을 로비하기도 했다.
시칠리아에서는 클라우드 플로리몽 드 메르시 백작 지휘 아래 오스트리아군이 새로운 공세를 개시했다. 먼저 프란차빌라 전투(1719년 6월 20일)에서 패배했지만, 스페인군은 영국 함대에 의해 본국과 차단되었고, 메르시는 그 후 두 번째 밀라초 전투에서 승리하고, 10월에 메시나를 점령하고 팔레르모를 포위했다.
1719년 초, 아일랜드 망명 귀족인 오르몽 공작은 조지 1세 국왕을 제임스 스튜어트로 대체하기 위한 원정을 조직했다. 그러나 그의 함대는 1719년 3월 갈리시아 근처 폭풍으로 해산되어 영국에 도착하지 못했다. 마리샬 백작이 이끄는 300명의 스페인 해병대 소규모 부대가 에일런 도난 근처에 상륙했지만, 에일런 도난 전투와 글렌셸 전투에서 패배했다.[21]
3. 3. 북아메리카와 카리브 해에서의 전투
프랑스군은 1719년 5월 스페인 식민지였던 플로리다의 펜사콜라를 점령했다.[22] 이는 스페인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지역을 공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스페인군은 펜사콜라를 탈환했으나, 그해 말 프랑스군이 다시 점령하여 도시를 파괴한 후 철수했다.[22]한편, 쿠바에서 출발한 스페인군이 영국령 바하마의 나사우를 공격했으나, 지역 민병대에 의해 격퇴되었다.[22]
4. 전쟁의 결과와 영향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의 군사적 성과에 불만을 품고 1719년 12월 알베로니 추기경을 해임하고, 1720년 2월 17일 헤이그 조약을 통해 연합군과 평화를 맺었다.[13][18] 이 조약에서 펠리페 5세는 전쟁 중 점령했던 모든 영토를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세 번째 아들(카를로스 3세)은 엘리자베타의 자녀가 없는 삼촌인 안토니오 파르네세가 사망한 후 파르마 공국을 상속받을 권리를 인정받았다. 프랑스는 상업적 이익을 대가로 펜사콜라와 스페인 북부의 나머지 정복지를 반환했다. 스페인의 승산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알베로니는 책임을 지고 1719년 12월 실각했다.[13]
1719년 10월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는 스페인이 사국 동맹의 강화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카를로스 왕자의 파르마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 계승권을 박탈하기로 결정했고, 펠리페 5세는 굴복하여 헤이그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이 종결되었다.[18]
4. 1. 헤이그 조약
펠리페 5세는 스페인 왕국의 군사적 성과에 불만을 품고 1719년 12월 알베로니 추기경을 해임하고, 1720년 2월 17일 헤이그 조약을 통해 연합군과 평화를 맺었다.[13][18]이 조약에서 펠리페 5세는 전쟁 중 점령했던 모든 영토를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세 번째 아들(카를로스 3세)은 엘리자베타의 자녀가 없는 삼촌인 안토니오 파르네세가 사망한 후 파르마 공국을 상속받을 권리를 인정받았다.
프랑스는 상업적 이익을 대가로 펜사콜라와 스페인 북부의 나머지 정복지를 반환했다. 이 조약에는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가 덜 중요한 사르데냐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맞바꾸도록 강요받은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페인의 승산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알베로니는 책임을 지고 1719년 12월 실각했다.[13]
1719년 10월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는 스페인이 사국 동맹의 강화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카를로스 왕자의 파르마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 계승권을 박탈하기로 결정했고, 펠리페 5세는 굴복하여 1720년 2월 17일 헤이그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이 종결되었다.[18] 그 결과, 스페인은 모든 점령지를 반환했고, 그 대신 파르마 공국의 계승권이 인정되었다. 사보이아 공국의 빅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6세에게 시칠리아 왕국을 할양했고, 그 대가로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사르데냐 섬을 할양받았다.[18]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사르데냐 왕의 칭호도 인정받아 사르데냐 왕국이 성립되었다.
4. 2. 사르데냐 왕국의 탄생
헤이그 조약의 결과, 사보이아 공국의 비토리오 아마데우스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6세에게 시칠리아 왕국을 넘겨주고, 그 대가로 사르데냐 섬을 받았다.[18] 이와 함께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사르데냐 왕의 칭호도 인정받아 사르데냐 왕국이 성립되었다.[18]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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