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헤스타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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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헤스타드 전투는 1813년 12월 10일, 나폴레옹 전쟁 중 덴마크-노르웨이와 연합군(러시아, 프로이센, 독일)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1807년 코펜하겐 해전 이후 나폴레옹 편에 섰던 덴마크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고립되었고, 연합군은 덴마크군을 고립시키기 위해 함부르크를 포위하려 했다. 덴마크군은 세헤스테드로 이동했으나, 연합군에게 공격받아 격전을 벌였다. 전투 결과 덴마크군은 렌츠부르크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했고, 이후 덴마크는 킬 조약을 통해 나폴레옹 전쟁에서 물러났다.

세헤스타드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 세헤스타드 전투
일부나폴레옹 전쟁제6차 대프랑스 동맹
날짜1813년 12월 10일
장소홀슈타인 세헤스타드
결과덴마크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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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노르웨이
교전국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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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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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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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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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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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렌부르크-슈베린
지휘관 및 지도자
덴마크-노르웨이헤센 공작 프레데리크
샤를 랄르망
동맹군루트비히 폰 발모덴김보른
병력 규모
덴마크-노르웨이9,000–11,000명
동맹군10,000–10,500명
사상자 및 피해
덴마크-노르웨이사망: 50–69명
부상: 273–319명
실종: 146명
총합: 500명
동맹군사망 또는 부상: 522명
포로: 600명
총합: 1,100명
시각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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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aget ved Sehested, Jørgen V. Sonne 그림
지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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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은 1807년 코펜하겐 해전 이후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영국은 거대한 덴마크-노르웨이 함대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코펜하겐을 공격하여 정박해 있던 함선을 파괴했다. 덴마크-노르웨이는 나폴레옹에 가담할 의사가 없었다. 게다가 덴마크-노르웨이 해군이 프랑스 손에 들어가기 전에 장악하기로 한 결정은 코펜하겐에서 첩보원으로 활동하던 영국군 장교가 보낸 잘못된 보고서를 바탕으로 내려졌다. 이 보고서는 덴마크-노르웨이 해군이 실제로 동원되고 있다고 증언했지만, 실제로는 정비 중이었다. 그 군 장교는 해상 물류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인해 덴마크-노르웨이 해군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 왕국은 그 전까지 프랑스와 영국 간의 갈등에서 위태로운 중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그 이후 프랑스 편을 공개적으로 들었다. 이 동맹을 지키면서 신중한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6세는 가능한 한 국가를 빈번한 군사 작전에서 제외하려 했고, 덴마크군은 독일 북부 지역에서 점령군으로 일반적인 임무 이상을 수행하지 않았다.

러시아 원정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후, 1813년 초 덴마크-노르웨이는 공식적으로 중립 상태를 선언했다. 국가는 파산 상태였고, 재앙적인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의 복귀가 필요했다. 그러나 프레데리크 6세가 제6차 반프랑스 동맹국들과 시작한 협상은 실패했다. 동맹국들은 노르웨이 병합에 대한 스웨덴의 주장을 지지했고, 1813년 3월 국왕은 프랑스와의 동맹 조약을 갱신하기로 결정했다. 헤세의 프레데리크 왕자 (국왕의 매형)의 지휘하에 13,000명 규모의 덴마크-노르웨이 원정군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에 배치되었고, 루이 니콜라 다부 원수의 군대가 함부르크 지역에서 러시아군 루드비히 폰 발모덴-김보른 장군의 다국적 군대와 싸우는 것을 지원했다.

1813년 10월 19일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한 직후, 다부 원수는 진격하는 동맹군에 대항하여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다부 원수는 함부르크 방어를 성공적으로 준비하고 슈테크니츠 강 뒤에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보병 사단은 방어선의 남쪽 부분을 방어하도록 배치되었고, 프레데리크 왕자의 지휘를 받는 덴마크 지원군은 트라베뮌데에서 묄른 북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방어선의 북쪽 부분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발모덴은 프랑스군에 대한 공격 작전을 시작할 책임을 맡은 동맹군을 지휘했다. 동맹군의 계획은 프랑스 사단을 함부르크에 포위하고 포위하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이 함부르크에 포위되면 공격은 북쪽으로 진격하여 덴마크 지원군을 고립시키고 파괴하여 덴마크 침공을 열 것이다. 덴마크군의 패배 또는 항복은 스웨덴이 노르웨이를 점령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발모덴 군대는 스웨덴 군단을 증원받아 스웨덴의 칼 요한 왕세자의 전반적인 지휘를 받았다.

11월 말, 다부 원수는 주요 적 공격이 곧 있을 것을 깨달았다. 그는 즉시 프랑스군이 함부르크로 철수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홀슈타인의 방어는 덴마크 지원군에게 맡겨졌다. 11월 30일, 다부 원수는 프랑스 사단을 함부르크로 철수시켰다. 12월 9일, 동맹군은 알스터 강을 건너 함부르크와 홀슈타인 사이의 통로를 차단하고 덴마크군을 고립시켰다. 얼마 후, 프레데리크 왕자는 프랑스 군단이 함부르크에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함부르크에 도달할 방법이 없었던 덴마크군은 뤼베크에서 방어 진지를 떠나 북쪽으로 본호베드로 철수했다. 동시에 발모덴의 지휘를 받는 동맹군은 덴마크군의 퇴각로를 막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덴마크군은 아이더 운하를 건너 게토르프와 린다우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그 당시 발모덴 군단의 일부가 세헤스테드에 도달했다. 덴마크군은 발모덴이 그들을 추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두 가지 대안을 가지고 있었다. 북쪽으로 계속 행진하면 속도가 느린 호송대가 비텐제에 있는 스웨덴 기병 사단의 공격을 받을 것을 두려워했다. 서쪽으로 행진하여 렌츠부르크에서 방어 진지에 도달하려 하면 발모덴의 보병과 마주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12월 10일, 프레데리크 왕자는 결정을 내리고 세헤스테드 방향으로 서쪽으로 행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1. 덴마크-노르웨이의 상황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은 1807년 코펜하겐 해전 이후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영국은 덴마크-노르웨이 함대가 프랑스 제국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코펜하겐을 공격하여 정박해 있던 함선을 파괴했다. 덴마크-노르웨이는 프랑스 편을 들었고, 프레데리크 6세는 국가를 빈번한 군사 작전에서 제외하려 했지만, 덴마크군은 독일 북부 지역에서 점령군 임무를 수행했다.

러시아 원정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후, 1813년 초 덴마크-노르웨이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프레데리크 6세는 제6차 반프랑스 동맹국들과의 협상에 실패하고 1813년 3월 프랑스와의 동맹 조약을 갱신했다. 헤세의 프레데리크 왕자 지휘 하의 13,000명 규모의 덴마크-노르웨이 원정군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에 배치되어 루이 니콜라 다부 원수의 군대를 지원했다.

1813년 10월 19일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한 직후, 다부 원수는 동맹군에 대항하여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함부르크 방어를 준비하고 슈테크니츠 강 뒤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덴마크 지원군은 방어선의 북쪽 부분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루드비히 폰 발모덴-김보른 장군이 지휘하는 동맹군은 프랑스군을 함부르크에 포위하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덴마크 지원군을 고립시켜 덴마크 침공을 계획했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발모덴 군대는 스웨덴 군단을 증원받아 칼 요한 왕세자의 지휘를 받았다.

11월 말, 다부 원수는 프랑스군이 함부르크로 철수할 계획을 세웠고, 12월 9일 동맹군은 덴마크군을 고립시켰다. 프레데리크 왕자는 덴마크군을 뤼베크에서 본호베드로 철수시켰고, 발모덴의 동맹군은 덴마크군의 퇴각로를 막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덴마크군은 아이더 운하를 건너 게토르프와 린다우 근처에 자리를 잡았고, 발모덴 군단의 일부가 세헤스테드에 도달했다. 덴마크군은 스웨덴 기병 사단의 공격을 피해 서쪽으로 행진하여 렌츠부르크에서 방어 진지에 도달하려 했으나, 발모덴의 보병과 마주칠 가능성이 높아 12월 10일 세헤스테드 방향으로 서쪽으로 행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2.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의 전투

2.3. 연합군의 전략

3. 전투 경과

3.1. 홀트세와 하비에서의 전투

덴마크군 선두 부대가 홀트세 마을에 접근했을 때, 프랑스군 랄르망 장군의 선봉대는 전투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덴마크 선봉대는 적을 마을에서 몰아내기 위해 멈춰섰다. 홀트세를 점령하고 있던 연합군 지휘관 바움베르크 소령은 덴마크군을 발견했지만, 3개 대대로는 적 전체 군단을 상대할 의도가 없었다. 그는 남동쪽 하비 마을로 서서히 후퇴했다.

덴마크군 주력이 도착하자 프레데리크 왕자는 홀슈타인 기병 연대와 폴란드 기병 연대 2개 기병대를 하비 동쪽에서 바움베르크의 움직임을 관찰하도록 파견했다. 동시에 홀슈타인 연대 2개 대대, 여왕 연대 대대, 그리고 1개 훌란 기병대를 홀트세 북동쪽 지역을 방어하도록 보냈다.

바움베르크의 느린 후퇴로 발모덴이 세헤스테에서 나머지 병력을 데려올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덴마크군의 행군이 계속되면서, 그는 마을 쪽으로 밀려났다. 덴마크군이 하비를 통과하는 둑길의 남쪽 끝을 지나자, 베르거 소령 휘하의 분견대가 호송대의 후방을 공격하는 바움베르크를 막기 위해 배치되었다. 몇 분 안에 바움베르크의 부대가 선봉대를 공격하려 했으나, 폭이 좁아 8명 종대로 편성될 수밖에 없었고, 큰 피해를 입고 격퇴되어 바움베르크는 전열에서 이탈되었다. 하비 동쪽에서 그를 추적하도록 남겨진 부대에는 홀트세에서 온 4개 기병대가 합류했고, 이 공격으로 이 부대들은 세헤스테 도로와 선봉대 후방으로 행군을 시작할 수 있었다.

3.2. 세헤스테드 공격

발모덴은 덴마크군에 맞서기 위해 세헤스테드로 물러나 자리를 잡았다. 렌츠보르크 도로가 급격하게 우회전하는 지점 바로 남쪽이자 마을 서쪽의 늪지대가 아이더 강을 따라 뻗어 있는 지점 바로 북쪽에 그의 좌익을 배치했다. 메클렌부르크 예거 대대는 홀트세 방향으로 강을 건너 덴마크 선봉대를 원거리 사격으로 괴롭힐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덴마크군은 적군이 이러한 위치를 잡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멈춰 전투를 준비했다. 올덴부르크 연대 제1, 4 대대가 열을 지어 세헤스테드를 공격했고, 곤너와 코예 포대의 지원을 받았으며, 제1 대대의 머스킷병 중대와 제4 대대의 예거 중대가 이를 엄호했다. 러시아-독일 군단의 제6, 7 대대는 즉시 반격을 가해 제5 대대의 지원을 받아 덴마크군을 이전 위치로 물러나게 했다.

프레데리크 왕자는 공격을 재개하여 연합군을 세헤스테드 북쪽으로 밀어냈다. 러시아-프로이센 제6, 7 대대가 새로운 방어를 준비했지만 곧 포위되었다. 오전 10시가 되자 세헤스테드는 완전히 덴마크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덴마크군은 마을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일렬로 정렬했고, 푸넨 보병 연대 제1 대대와 프리이스 포대로 구성된 비 소령 지휘 하의 부대가 연합군 좌익이 후퇴한 세헤스테드와 호헨펠데 사이의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발모덴은 세헤스테드를 탈환하라고 명령했고, 군단의 제5, 6 대대는 안할트-데사우 대대와 함께 KGL 및 하노버 포대의 지원을 받으며 열을 지어 공격을 재개했다.

3.3. 발모덴의 반격과 후퇴

레기온 제5대대의 선두 부대는 퓐 드라군 연대의 공격을 받아 제때 사각형 대형을 갖추지 못하고, 생존자들은 포로로 잡혔다. 2문의 KGL 포와 한노버 포대도 덴마크군에게 넘어갔다. 다른 두 대대는 붕괴되어 도주했고, 노획된 포병은 덴마크 진영으로 끌려갔다. 연합군은 오스테로데 도로를 따라 500미터 후퇴하여 새로운 위치를 잡았는데, 왼쪽은 호헨펠데, 오른쪽은 아이더 강에 접했다. 좌익에서는 러시아-독일 레기온 제1대대와 제2대대, 그리고 비 부대 간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수적으로 열세인 덴마크군이 고전했다. 비는 부하들의 탄약이 다 떨어진 것을 깨닫고 선봉대와 함께 렌드보르 도로 중간 지점으로 후퇴했다. 덴마크군에게 다행히도, 홀슈타인 기병 연대와 하비에서 온 폴란드 기병 연대가 도착하여 연합군 좌익을 본대로 밀어냈다.

발모덴은 덴마크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메클렌부르크 기마 예거에게 세헤스테드의 남쪽 부분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지만, 퓐 연대 제2대대와 슐레스비히 연대 제1대대의 머스킷 사격에 의해 격퇴되었다. 발모덴은 더 이상 자신의 위치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스테로데 주변의 낮은 고지에 있는 아이더 강을 건너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프레데리크 왕자는 홀슈타인 기병 연대에 이 후퇴를 궤주로 전환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들의 공격은 압도적인 연합군 머스킷 사격에 의해 격퇴되었고 아이더 강 북쪽 둑으로 후퇴했다. 그곳에서 연합군 위치에 대한 포격을 시작했고, 막 도착하여 바켄도르프와 보베나우 사이 운하 서쪽에 위치하고 있던 베게작 사단에 대한 정찰도 실시했다. 격렬한 포격 아래, 발모덴은 이제 클루벤지크 다리를 건너 후퇴하기 시작하여 운하 반대편을 향한 방어 위치를 잡았다.

3.4. 전투 종료

샤를 14세 요한이 현장에 도착하여 발모덴 및 베게삭과 짧은 논의를 거친 후, 부상자를 수습하고 사망자를 매장하기 위해 24시간의 휴전을 제안하는 전령을 프레데리크 공자에게 보냈고, 프레데리크는 이에 동의했다. 덴마크군은 선봉대를 따라 행군했으며, 추격을 막기 위해 후위 부대가 뮐레네르크 좌측에 배치되었다. 전투는 끝났다. 덴마크군은 렌츠부르크로 가는 길을 확보하는 목표를 달성했고, 연합군은 예상 밖의 패배를 겪었다. 연합군은 총 1,100명의 사상자를 냈고, 덴마크군은 약 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4. 전투의 결과

다노-노르웨이군은 더 이상의 사건 없이 렌츠부르크에 도착하여 아이더 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패배하여 프랑스로 도망치자, 국왕 프레데릭 4세는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연합국과 휴전을 맺어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은 결국 1814년 1월 14일에 킬 조약이 체결되면서 마무리되었고, 이로써 덴마크-노르웨이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5. 전투의 의의

다노-노르웨이군은 렌츠부르크에 도착하여 아이더 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패배하여 프랑스로 도망치자, 국왕 프레데릭 4세는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연합국과 휴전을 맺어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은 결국 1814년 1월 14일에 킬 조약이 체결되면서 마무리되었고, 이로써 덴마크-노르웨이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6. 양측 병력

6.1. 덴마크군

프랑수아 A. "샤를" 랄르망 장군이 이끄는 선봉 부대는 제2 슐레스비히 예거 대대, 제1 및 제2 홀슈타인 사격병 대대, 제3 (유틀란트) 보병 연대 제1 대대, 홀슈타인 중기병 연대(4개 기병대대), 제17 폴란드 란서 연대(2개 기병대대), 폰 게르스텐베르크 6파운더 야포대(8문)로 구성되었다.

그라프 슐렌부르크 장군이 지휘하는 제1 여단은 제1 및 제4 올덴부르크 보병 연대 대대, 제2 올덴부르크 보병 연대 3개 중대, 제3 및 제4 홀슈타인 보병 연대 대대, 제2 및 제6 덴마크 후사르 연대 기병대대, 폰 고너 3파운더 야포대(8문), 코예 6파운더 야포대(8문)를 포함했다.

라손 장군이 지휘하는 제2 여단은 제1 및 제2 퓐 보병 연대 대대, 제1 및 제2 슐레스비히 보병 연대 대대, 퓐 경룡 기병 연대(3개 기병대대), 프리이스 6파운더 야포대(10문)로 구성되었다.

호송대는 여왕 보병 연대 제1 대대, 제2 올덴부르크 보병 연대 2개 중대, 퓐 경룡 기병 연대(1개 기병대대)로 구성되었다.

덴마크군의 총 병력은 9,000명이었다.

6.2. 연합군

세헤스타드 전투에 참전한 연합군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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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병력
제1 러시아-독일 군단 대대910
제2 러시아-독일 군단 대대760
제5 러시아-독일 군단 대대834
제6 러시아-독일 군단 대대808
제7 러시아-독일 군단 대대643
Hannoversche/하노버독일어 라우엔부르크 대대638
Hannoversche/하노버독일어 랑그레 대대638
Hannoversche/하노버독일어 베니히젠 대대638
안할트-데사우(독일) 대대600
KGL 경보병(영국-독일) 분견대150
Hannoversche/하노버독일어 예거 중대40
메클렌부르크(독일) 보병 예거375
제1 러시아-독일 기병 연대487
브레멘-페르덴(독일) 기병 연대300
메클렌부르크(독일) 기병 예거384
제1 러시아-독일 기마 포병대6문
제2 러시아-독일 기마 포병대6문
Hannoversche/하노버독일어 보병 포병대4문
KGL(영국-독일) 기마 포병대-1개 소대2문
제3 러시아-독일 군단 대대
제4 러시아-독일 군단 대대
Hannoversche/하노버독일어 킬만세게 야전 예거 군단
총계10,500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