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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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킬 조약은 1814년 나폴레옹 전쟁 중 덴마크와 스웨덴 간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덴마크는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하고,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를 획득할 예정이었으나, 노르웨이의 반발로 인해 완전히 이행되지 못했다. 덴마크는 영국과도 킬 조약을 통해 동맹을 맺고 노예 무역 폐지 등에 합의했다. 킬 조약은 이후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의 성립과 노르웨이의 독립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빈 회의에서도 논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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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4년 1월 - 1814년 1월 21일 일식
킬 조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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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정보 | |
이름 | 킬 조약 |
종류 | 평화 조약 |
긴 이름 | |
서명일 | 1814년 1월 14일 |
서명 장소 | 홀슈타인 공국 킬 |
관련 사건 | 나폴레옹 전쟁 중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언어 | 프랑스어 |
조약 당사국 | |
조약 내용 | |
주요 내용 | 덴마크는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하고, 프로이센 왕국이 대가로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구 포메라니아 공국)를 영유함 |
관련 링크 | 프랑스어 정문, 스웨덴어 번역문 |
2. 배경
나폴레옹 전쟁 초기, 덴마크-노르웨이와 스웨덴 왕국은 중립을 지키려 했으나,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서로 다른 편에 서게 되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는 1805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맞서 영국 및 러시아 제국과 손을 잡고 프랑스 제1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4] 영국은 스웨덴에 전쟁 지원금을 제공했다.[4] 구스타브 4세 아돌프는 스웨덴령 포메라니아에서 군대를 움직이기 전, 프로이센이 이 지역을 넘보지 않도록 외교적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4] 반면, 덴마크는 중립을 유지했다.[4]
하지만 전세는 스웨덴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1807년, 나폴레옹 군대는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를 점령하고, 프로이센과 러시아에게 틸지트 조약을 강요했다.[5] 이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적들을 공격해야 했고,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영국과의 동맹을 포기하지 않자 러시아 차르는 핀란드를 침공했다. 결국 핀란드 전쟁(1808-1809) 끝에 핀란드는 프레드릭스함 조약으로 스웨덴에서 분리되었다.[5] 스웨덴은 더 이상 반프랑스 외교 노선을 유지하기 어려워졌고, 1810년에는 프랑스 원수였던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왕위 계승자로 선출되는 상황에 이르렀다.[5] 한편, 덴마크-노르웨이는 1807년 영국의 코펜하겐 공격 이후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6]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참패하면서 전세는 다시 한번 뒤바뀌었다.[7] 스웨덴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812년 8월 러시아, 1813년 3월 영국, 1813년 4월 프로이센과 차례로 동맹을 맺으며 반나폴레옹 동맹에 합류했다.[8][9] 스웨덴은 1813년 3월 23일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9]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 베르나도트는 동맹 참여의 대가로 노르웨이 획득을 요구했고, 영국과 러시아는 1813년 5월 이를 승인했다.[9] 프로이센은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7월 22일 결국 스웨덴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스웨덴은 라이헨바흐 동맹에 가입했다.[10]
베르나도트가 이끄는 북부군을 포함한 연합군은 북독일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스웨덴의 노르웨이 요구 때문에 나폴레옹과의 동맹을 유지했던 덴마크는[9] 점차 고립되었고,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파탄 상태에 이르렀다.[11]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결정적으로 패배하자 베르나도트는 덴마크를 직접 공격할 기회를 잡았다. 스웨덴-러시아 연합군은 1813년 12월 말, 수적으로 열세인 덴마크군을 빠르게 격파하고 홀슈타인과 슐레스비히를 점령했다.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6세는 베르나도트가 윌란반도와 셸란섬까지 점령하여 노르웨이 할양을 강요할 것이 분명해지자, 결국 평화 조약을 맺기로 동의했다.[12] 이러한 배경 속에서 킬 조약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2. 1. 덴마크-영국 조약
덴마크 왕국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 사이의 조약은 덴마크 외교관 에드먼드 버크와 스웨덴 주재 영국 특사 에드워드 손턴이 협상했다.[19] 이 조약은 총 14개 조항으로 이루어졌으며, 이후 4월 7일 브뤼셀에서 2개의 조항이 추가되었다.[19]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영토 조정 (제3조): 영국은 점령했던 모든 덴마크 영토를 덴마크 국왕에게 반환하기로 했다. 다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헬골란트 섬은 예외적으로 "완전하고 무제한적인 주권" 하에 영국 국왕에게 넘어갔다.[19]
- 군사 동맹 및 지원 (제6조): 덴마크 국왕은 반나폴레옹 동맹에 가담하여 10,000명의 군대를 파견하기로 약속했다. 이 군대는 스웨덴의 칼 요한 황태자의 지휘 아래 북독일에서 연합군에 합류하게 되었다. 영국은 이 병력 유지 비용으로 덴마크에 매년 40만파운드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13]
- 노예 무역 폐지 (제8조): 덴마크는 노예 무역을 폐지하는 데 동의했다.[13]
- 추가 보상 약속 (제10조): 영국 국왕은 덴마크가 스웨덴에 노르웨이를 할양한 것에 대한 추가적인 보상을 최종 평화 협정에서 논의할 것을 약속했다.[13]
- 기존 조약 확인 (제13조): 이전에 체결된 덴마크-영국 간의 조약들이 유효함을 재확인했다.[13]
브뤼셀에서 추가된 조항들은 주로 전쟁 이후의 처리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식민지나 할양된 영토에 거주하는 덴마크 국민의 재산은 향후 3년간 영국에 의해 침해받지 않도록 보장되었으며, 전쟁 중 서로 다른 편에 섰거나 정치적, 종교적 신념을 가졌다는 이유로 덴마크, 영국, 하노버 국민이 박해받지 않도록 동등하게 대우할 것을 규정했다.[13]
2. 2. 덴마크-스웨덴 조약

덴마크 왕국과 스웨덴 왕국 사이의 조약은 덴마크 외교관 에드먼드 보크와 스웨덴 특사 남작 구스타프 아프 베테르스테트가 영국의 중재 아래 협상했다.[14] 이 조약은 총 28개의 조항과 하나의 별도 조항으로 구성되었다.[14]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덴마크의 대프랑스 동맹 참여: 제3조에 따라 덴마크 국왕은 나폴레옹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에 참여하고, 덴마크-영국 조약에 따라 군대의 일부를 스웨덴의 지휘 아래 두기로 약속했다.[15][16]
- 노르웨이 할양: 제4조에서 덴마크 국왕은 자신과 후계자들의 이름으로 노르웨이 왕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영원히, 철회할 수 없도록" 포기하고, 노르웨이를 스웨덴 국왕에게 할양하기로 했다.[16][17] 할양되는 노르웨이 영토는 크리스티안산, 베르겐, 아케르스후스, 트론헤임의 주교구와 해안 섬들, 그리고 러시아 국경까지의 노르란과 핀마르크 북부 지역으로 정의되었다.[16] 그러나 노르웨이의 옛 영토였던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는 덴마크의 영유로 남았다.[16] 노르웨이 국민들은 덴마크 국왕에 대한 의무에서 해방되었다.[16]
- 부채 인수: 제6조에 따라 스웨덴 왕실은 노르웨이의 부채와 재정적 의무를 인수하기로 했으며, 구체적인 내용은 양국 공동 위원회에서 결정하기로 했다.[16]
-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양도: 제7조는 스웨덴이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를 덴마크에 양도하도록 규정했다.[16] 제13조에서는 스웨덴 국왕이 향후 평화 조약에서 노르웨이 할양에 대한 완전한 보상을 덴마크 국왕에게 확보해주겠다고 약속하며, 포메라니아 양도는 그 "증거"라고 명시했다.[16][18]
- 영토 인도: 제15조는 조약 비준 즉시 스웨덴 군대가 노르웨이 요새들을 인수하고, 프레드릭스테인, 프레드릭스타드, 콩스빙거, 아케르스후스 요새가 스웨덴에 인도되는 즉시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를 포기하도록 규정했다.[18]

기타 조항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했다:
- 스웨덴 국왕은 노르웨이의 크리스티아니아 대학교와 덴마크로 넘어갈 포메라니아의 그라이프스발트 대학교를 유지하고 기부를 확인하기로 약속했다 (제12조).[16]
- 양국의 신민들은 향후 6년 이내에 노르웨이 또는 덴마크(포메라니아 포함) 중 최종 정착지를 선택할 수 있으며, 재산 처분에 관한 규정도 마련되었다 (제20조).[18]
- 교환된 영토의 총독과 외국 출신 관리들은 해당 지역에 남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해임되었다 (제16조).[18]
- 덴마크 행정부는 노르웨이 관련 모든 민간 및 군사 행정 문서와 기록 보관소를 스웨덴에 넘겨야 했다 (제21조).[19]
- 모든 전쟁 포로의 상호 교환이 규정되었다 (제17조).[18]
- 연합군은 덴마크령 슐레스비히 공국에서는 철수하지만, 독일 연방 소속인 홀슈타인 공국에는 함부르크 포위를 위해 남을 수 있었다 (제15조).[18]
- 이전의 덴마크-스웨덴 평화 조약들(코펜하겐 조약 (1660년), 스톡홀름 조약 (1720년 6월), 프레데릭스보르 조약 (1720년 7월), 옌셰핑 조약 (1809년))은 킬 조약과 상충하지 않는 한 유효함이 확인되었다 (제27조).[19]
- 별도의 조항은 적대 행위의 종식을 다루었다.[19]
그러나 이 조약은 실제로 완전히 이행되지 않았다. 스웨덴이 덴마크에 양도하기로 했던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는 결국 프로이센 왕국이 차지하게 되었고(폰메른 주),[11] 노르웨이에서는 조약 소식에 반발하여 부왕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후의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8세)가 독립 움직임을 보였다. 노르웨이는 1814년 5월 17일 독립을 선언하고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를 국왕으로 선출했다. 스웨덴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왕태자 칼 요한이 이끄는 스웨덴군이 노르웨이군을 굴복시켰다(스웨덴-노르웨이 전쟁). 결국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왕위를 포기하고 노르웨이를 떠났으며, 8월에 모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노르웨이 국왕으로 스웨덴 국왕 칼 13세가 즉위하면서, 1905년까지 이어지는 스웨덴-노르웨이 동군 연합이 시작되었다. 킬 조약의 내용은 이후 빈 회의의 빈 의정서에도 포함되어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빈 체제를 구성하는 일부가 되었다.
3.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킬 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노르웨이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당시 노르웨이 부왕이었던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조약 이행을 거부하고 저항을 주도했다. 노르웨이는 1814년 5월 17일 에이즈볼에서 제헌 의회를 소집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자체 헌법을 제정했으며,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를 노르웨이 국왕으로 선출했다. 크리스티아니아에 거주하던 스웨덴계 엘리트들조차 노르웨이의 저항을 지지했으며, 주교 요한 노르달 브룬은 동료들에게 무장 저항을 촉구하기도 했다.[20]
그러나 스웨덴은 노르웨이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웨덴 왕세자이자 실권자였던 칼 요한은 킬 조약의 이행을 강제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노르웨이를 침공했다(스웨덴-노르웨이 전쟁). 스웨덴 국민 대다수는 이 침공을 지지했다. 짧은 전쟁 끝에 노르웨이군은 수적 열세와 전력 부족으로 스웨덴군에게 굴복했다.
결국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왕위를 포기하고 노르웨이를 떠났으며, 1814년 8월 모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노르웨이 의회는 스웨덴 국왕 칼 13세를 노르웨이 국왕으로 받아들였다. 이로써 덴마크의 노르웨이에 대한 주권은 스웨덴으로 넘어갔으며, 1905년까지 지속된 스웨덴-노르웨이 동군 연합이 성립되었다.[20]
연합 성립 이후 노르웨이 내부에서는 '진정한 노르웨이인'과 소위 '비(非) 노르웨이인' 사이의 구분이 생겨났다. 노르웨이 엘리트들은 이러한 정체성 구분을 통해 스웨덴의 영향력 확대, 즉 '스웨덴화'에 저항하며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투쟁을 벌였다.[21]
3. 1. 스웨덴령 포메라니아의 운명
노르웨이가 스웨덴 국왕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함에 따라, 킬 조약에서 합의된 노르웨이와 스웨덴령 포메라니아의 교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22] 칼 13세는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를 덴마크의 프레데릭 6세에게 넘겨주지 않았다.[22]이 문제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열린 빈 회의에서 다루어졌다. 회의에서 강대국들은 프로이센 왕국의 수상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가 제안한 해결책을 채택했다.[22] 하르덴베르크의 계획은 관련된 덴마크 왕국, 하노버 왕국(당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동군연합 상태), 프로이센 왕국, 스웨덴 왕국 사이의 복잡한 영토 교환과 금전적 보상을 포함했다.[22]

하르덴베르크의 계획에 따라 다음과 같은 조정이 이루어졌다:[22]
- 프로이센은 엠덴을 포함한 동프리슬란트를 하노버 왕국에 양도했다.
- 그 대가로 하노버는 라우엔부르크 공국을 프로이센에 넘겼다.
- 프로이센은 다시 이 라우엔부르크 공국을 덴마크 왕국에 넘겨주면서, 추가로 350만 탈러를 덴마크에 지불했다.
- 프로이센은 스웨덴에 대한 덴마크의 부채 60만 탈러를 대신 떠안았다.
- 프로이센은 스웨덴에 200만 탈러를 추가로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이러한 거래의 결과로, 덴마크와 스웨덴은 스웨덴령 포메라니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프로이센에게 포기했다.[22] 스웨덴의 칼 13세는 1815년 10월 1일, 포메라니아 주민들을 스웨덴 국왕에 대한 충성 의무에서 해방시켰다. 이후 10월 23일,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는 프로이센령 포메라니아의 총독 폰 잉거슬레벤(von Ingersleben)에게 공식적으로 인계되었다.[22]
4. 동 그린란드 사건
1931년부터 1933년까지 노르웨이는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그린란드 전체에 대한 덴마크의 소유권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3] 이는 현재까지 극지 영토의 소유권이 국제 법원에 의해 결정된 유일한 사례로 남아있다.[3]
노르웨이 측은 덴마크가 실질적인 주권을 행사하지 않는 그린란드 일부 지역에 대해서는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를 근거로 1931년 7월 10일, 노르웨이는 한 달 전에 점령했던 동부 그린란드 지역에 에이리크 라우데스 랜드라는 이름의 노르웨이 영토를 선포했다.[23]
그러나 1933년 4월 5일, 국제사법재판소는 킬 조약 및 이후 체결된 여러 조약들을 근거로 하여 덴마크가 그린란드 전체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판결했다.[23][24] 이 판결로 노르웨이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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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plomatisches Handbuch: Sammlung der wichtigsten europaeischen Friedensschluesse, Congressacten und sonstigen Staatsurkunden, vom westphaelischen Frieden bis auf die neueste Z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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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nadotte: Prince and King 1810–1844
John Mur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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