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푸스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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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이푸스 호 전투는 1242년 4월 5일, 튜튼 기사단을 포함한 서방 세력과 노브고로드 공화국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13세기 초 북방 십자군 운동의 일환으로, 덴마크 왕국, 튜튼 기사단, 도르파트 주교령 등이 노브고로드를 침공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이끄는 노브고로드 군은 십자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서방 세력의 루스 지역 진출을 막았다. 이 전투는 루스와 서방 국가들 간의 국경선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튜튼 기사단의 쇠퇴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위상 강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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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푸스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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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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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얼음판 전투 |
별칭 | 페이푸스호 전투 추드호 전투 |
현지 명칭 | Schlacht auf dem Eise (독일어) Ledovoye poboishche (러시아어, Ледовое побоище) Jäälahing (에스토니아어) |
장소 | 페이푸스호, 에스토니아와 러시아 사이 |
전투 정보 | |
날짜 | 1242년 4월 5일 |
관련 | 북방 십자군 |
결과 |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승리 |
교전 세력1 | 노브고로드 공화국 블라디미르 대공국 |
교전 세력2 | 리보니아 기사단 도르파트 주교령 |
지휘관 | |
교전 세력1 지휘관 |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안드레이 야로슬라비치 |
교전 세력2 지휘관 | 헤르만 폰 북스회프덴 |
병력 규모 | |
교전 세력1 병력 | 400–800명에서 6,000–7,000명 |
교전 세력2 병력 | 200–400명에서 1,800명 |
사상자 및 피해 | |
교전 세력1 사상자 | 정확한 수치 없음 |
교전 세력2 사상자 | 리보니아 운문 연대기: 기사 20명 사망, 기사 6명 포로 노브고로드 제1 연대기: 독일인 400명 사망, 독일인 50명 포로, 에스토니아인 "무수히" 사망 |
영향 | |
결과 | 평화 협정, 포로 교환, 리보니아 군대 철수 |
2. 배경
13세기 초, 튜튼 기사단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세력이 프로이센 및 리보니아 지역을 장악하면서 북방 십자군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230년대 중반, 발트해 연안에는 다신교를 믿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정교회를 믿는 노브고로드 공화국이 남아 있었다. 이 중 리투아니아는 시울라이 전투에서 리보니아 기사단을 격파하고 내부 통합을 통해 강대해진 반면,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지속적인 내부 분쟁과 정치적 혼란으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으로 인해 동방과 서방 교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로마 교회는 노브고로드에 가톨릭 의례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237년 로마 교회는 노브고로드에 대한 성전을 요구했고, 1240년 덴마크 왕국, 튜튼 기사단, 도르파트 주교령이 주축이 된 십자군이 결성되어 노브고로드를 침공했다.
한편, 노브고로드에서는 네바 강 전투에서 스웨덴 왕국을 격파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정치적 분쟁으로 실각한 상태였다. 군사적 지도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노브고로드는 이즈보르스크 전투에서 패배하고 프스코프 시를 함락당하는 등 십자군에게 연패했다. 십자군은 핀란드만 연안 도시들을 함락시키며 노브고로드의 교역로를 차단했다.
노브고로드 시민들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를 다시 불러들여 반격을 준비했다. 1242년 페이푸스 호 전투를 초래한 갈등의 기원은 불분명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영향력 있는 역사 기술 전통은 이 지역에서 발생한 세 번의 이전 충돌과 이 전투를 연결하려 했다. 즉, 1240년 7월의 네바 전투, 9월 1240년 이즈보르스크와 프스코프 원정, 겨울 1240–1241년 보티아 원정이다.
1241년 원정에서 알렉산드르는 보티아와 프스코프를 모두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알렉산드르는 이어서 에스토니아-독일 영토로 진격했다. 1242년 봄, 튜튼 기사단은 타르투 요새에서 약 20km 떨어진 남쪽에서 노브고로드 군대의 분견대를 격파했다. 그 결과 알렉산드르는 1242년 4월 5일에 전투가 벌어질 페이푸스 호에 위치를 잡았다.
2. 1. 13세기 초 북방 십자군의 발트해 진출
13세기 초, 튜튼 기사단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세력이 프로이센 및 리보니아 지역을 장악하면서 북방 십자군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230년대 중반, 발트해 연안에는 다신교를 믿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정교회를 믿는 노브고로드 공화국이 남아 있었다. 이 중 리투아니아는 시울라이 전투에서 리보니아 기사단을 격파하고 내부 통합을 통해 강대해진 반면,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지속적인 내부 분쟁과 정치적 혼란으로 쇠약해진 상태였다.1204년 제4차 십자군으로 인해 동방과 서방 교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로마 교회는 노브고로드에 가톨릭 의례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237년 로마 교회는 노브고로드에 대한 성전을 요구했고, 1240년 덴마크 왕국, 튜튼 기사단, 도르파트 주교령이 주축이 된 십자군이 결성되어 노브고로드를 침공했다.
한편, 노브고로드에서는 네바 강 전투에서 스웨덴 왕국을 격파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정치적 분쟁으로 실각한 상태였다. 군사적 지도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노브고로드는 이즈보르스크 전투에서 패배하고 프스코프 시를 함락당하는 등 십자군에게 연패했다. 십자군은 핀란드만 연안 도시들을 함락시키며 노브고로드의 교역로를 차단했다.
노브고로드 시민들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를 다시 불러들여 반격을 준비했다. 1242년 페이푸스 호 전투를 초래한 갈등의 기원은 불분명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영향력 있는 역사 기술 전통은 이 지역에서 발생한 세 번의 이전 충돌과 이 전투를 연결하려 했다. 즉, 1240년 7월의 네바 전투, 9월 1240년 이즈보르스크와 프스코프 원정, 겨울 1240–1241년 보티아 원정이다.
1241년 원정에서 알렉산드르는 보티아와 프스코프를 모두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알렉산드르는 이어서 에스토니아-독일 영토로 진격했다. 1242년 봄, 튜튼 기사단은 타르투 요새에서 약 20km 떨어진 남쪽에서 노브고로드 군대의 분견대를 격파했다. 그 결과 알렉산드르는 1242년 4월 5일에 전투가 벌어질 페이푸스 호에 위치를 잡았다.
2. 2.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의 갈등 심화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간의 갈등은 매우 심화되었다. 로마 교회는 동방 교회에 가톨릭 의례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으나,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이를 거부하였다. 13세기 북방 십자군은 튜튼 기사단을 중심으로 프로이센 및 리보니아 지역을 가톨릭 세력으로 지배하며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당시 발트해 연안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정교회의 노브고로드 공화국이 남아있었는데,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지속적인 내부 분쟁과 정치적 혼란으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237년 로마 교회는 노브고로드에 대한 성전을 요구했고, 1240년 덴마크 왕국, 튜튼 기사단, 도르파트 주교령이 주축이 된 십자군이 결성되어 노브고로드를 침공했다.1242년 페이푸스 호 전투를 초래한 갈등의 기원은 불분명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다. 1240년 7월의 네바 전투는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노브고로드가 카렐리안 모피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보호하고 핀란드 만에 접근하기 위해 스웨덴의 침략에 맞선 경제적인 이유로 발생했다.[3] 1030년부터 노브고로드인들은 이교도 에스토니아인들을 정복하고 약탈하며 개종시키려 시도했고, 12세기 후반부터 독일-리보니아 선교 및 십자군 활동으로 인해 노브고로드 공화국과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1240–1241년 겨울, 외젤–비크 주교령과 리보니아 기사단의 연합군은 1240–1241년 보티아 원정을 시작했는데, 이는 '이교도' 지역의 선교적 정복이라는 의미에서 십자군으로 간주될 수 있다.
2. 3.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위기
13세기 무렵 북방 십자군이 프로이센 및 리보니아 지역을 장악하면서 발트해 연안에는 다신교의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정교회의 노브고로드 공화국이 남게 되었다. 리투아니아는 내부 통합으로 강대해진 반면,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지속적인 내부 분쟁과 정치적 혼란으로 쇠약해져 있었다.1204년 제4차 십자군 이후 동서방 교회 간 갈등이 심화되었고, 로마 교회는 노브고로드에 가톨릭 의례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1237년 로마 교회는 노브고로드에 대한 성전을 요구했고, 1240년 덴마크 왕국, 튜튼 기사단, 도르파트 주교령이 십자군을 결성하여 침공했다.
노브고로드는 네바 강 전투에서 스웨덴 왕국을 격파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추방된 상태였다. 십자군은 이즈보르스크 전투에서 승리하고 프스코프 시를 함락시켰으며, 핀란드만 연안 도시들을 점령하여 노브고로드의 교역로를 차단했다. 이에 노브고로드 시민들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를 다시 불러들여 반격에 나섰다.
1242년 페이푸스 호 전투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연루된 세 번의 충돌(1240년 7월 네바 전투, 9월 1240년 이즈보르스크와 프스코프 원정, 겨울 1240–1241년 보티아 원정)과 연결짓기도 한다.[3] 노브고로드는 카렐리안 모피 무역 독점권과 핀란드 만 접근을 위해 스웨덴의 침략에 맞섰다.[3]
3. 서막
군세를 편성한 네프스키는 즉각 반격에 나섰다. 그는 우선 북쪽 해안을 위주로 한 십자군 군세에 대해 반격을 시도했고, 남쪽의 군세에 비해 미약했던 십자군 세력은 쉽게 와해되어 점령지의 거의 대부분은 노브고로드 측에 돌아왔다.
북쪽의 십자군을 격파한 네프스키는 남쪽 프스코프를 중심으로 한 십자군 세력을 격파하기 위해 군세를 더 끌어모았다. 그는 아버지인 야로슬라프 대공에게 도움을 청해, 자신의 동생인 수즈달 공국의 안드레이 2세의 수즈달 군대를 지원군으로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십자군 측의 국가 중 하나인 덴마크 왕국이 내부 왕권 다툼으로 십자군에 대한 지원을 끊어버리고, 십자군 측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었던 튜튼 기사단 본부가 성전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십자군의 군세는 오히려 약화된 상태에 있었다.
이에 따라, 1242년, 네프스키는 프스코프를 재탈환하는데 성공하였고, 곧 십자군의 영토인 도르파트 주교령을 역으로 위협하게 된다. 도르팟의 주교인 헤르만은 이에 반격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세를 편성하였고, 곧 노브고로드 측과 맞먹는 수의 십자군 군대가 헤르만의 지휘 하에 반격에 나섰다. 십자군 측이 반격하자, 네프스키는 페이푸스호를 건너 노브고로드 영내로 철수하려 했다. 이를 십자군 군대가 추격하였고, 두 군세가 얼어붙은 페이푸스호 위에서 맞닥뜨리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3. 1.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반격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군대를 편성하여 즉각 반격에 나섰다. 우선 북쪽 해안을 중심으로 한 십자군에 반격을 가했고, 남쪽에 비해 약했던 십자군은 쉽게 무너져 점령지 대부분이 노브고로드에 돌아왔다.북쪽의 십자군을 격파한 네프스키는 남쪽 프스코프를 중심으로 한 십자군을 격파하기 위해 군대를 더 모았다. 아버지 야로슬라프 대공에게 도움을 청해 동생인 수즈달 공국의 안드레이 2세가 이끄는 수즈달 군대를 지원받았다. 또한 십자군 국가 중 하나인 덴마크 왕국이 내부 왕권 다툼으로 지원을 끊고, 튜튼 기사단 본부가 성전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십자군의 군세는 오히려 약화된 상태였다.
1242년, 네프스키는 프스코프를 재탈환하고, 십자군의 영토인 도르팟 주교령을 역으로 위협했다. 도르팟의 주교 헤르만은 반격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편성했고, 노브고로드와 맞먹는 수의 십자군이 헤르만의 지휘 아래 반격에 나섰다. 십자군이 반격하자 네프스키는 페이푸스호를 건너 노브고로드 영내로 철수하려 했다. 십자군이 추격하여 두 군대는 얼어붙은 페이푸스호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3. 2. 십자군 내부의 분열
덴마크 왕국은 내부 왕권 다툼으로 십자군에 대한 지원을 끊어버렸고, 십자군 측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었던 튜튼 기사단 본부가 성전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십자군의 군세는 오히려 약화된 상태에 있었다.3. 3. 양측 군대의 집결
네프스키는 군세를 편성하여 즉각 반격에 나섰고, 북쪽 해안을 위시로 한 십자군 군세를 격파하여 점령지 대부분을 노브고로드 측에 복귀시켰다. 남쪽 프스코프를 중심으로 한 십자군 세력을 격파하기 위해, 네프스키는 아버지 야로슬라프 대공에게 도움을 청해 동생인 안드레이 2세의 수즈달 군대를 지원받았다. 덴마크가 왕권 다툼으로 십자군 지원을 끊고, 튜튼 기사단 본부가 성전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십자군의 군세는 약화된 상태였다.1242년, 네프스키는 프스코프를 재탈환하고 도르파트 주교령을 역으로 위협했다. 도르팟의 주교 헤르만은 반격을 위해 대규모 군세를 편성했고, 십자군 군대가 네프스키를 추격하여 양측 군대는 얼어붙은 페이푸스 호 위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4. 전투의 경과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정찰대를 통해 십자군의 추격을 예측하고, 유리한 위치를 선정해 대기하고 있었다. 양측 군대의 포진은 서로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십자군은 덴마크와 튜튼, 리보니아 기사단을 중심으로 한 중무장 기사들을 중앙에, 에스토니아 출신 보병들을 후방에 배치했다. 특히 중앙에는 튜튼 기사들이 핵심 전력으로 포진했고, 좌우에는 덴마크 및 리보니아 기사들이 위치했다. 이는 전형적인 서구식 중장기병 돌격 대형으로, 기사들을 통한 정면 돌파를 노린 것이었다.
반면 노브고로드 군은 중앙 전면에 노브고로드 민병대를, 좌우 양익에 경기병대를 배치하고, 민병대 후방에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를 포함한 드루지나 중장기병들을 배치했다. 이는 좌우 기병을 통한 포위 전술을 위한 포진이었다. 전투는 십자군이 중앙을 돌파하거나, 노브고로드 군이 포위하는 형태로 승패가 결정될 상황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십자군 기사들은 노브고로드 중앙 민병대를 향해 돌격했다. 그러나 노브고로드 군은 고지에 위치했고, 얼어붙은 호수 위의 날카로운 얼음들이 기사들의 돌격을 방해했다. 노브고로드 군의 궁수들과 기마 궁수들이 쏜 화살도 피해를 입혔다. 그럼에도 기사들은 민병대 전열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하지만 기사들의 돌격력이 약화된 틈을 타 노브고로드 기병들이 십자군 좌우를 공격하면서 난전이 벌어졌다. 이때 후방의 에스토니아 보병들은 겁에 질려 달아나 버렸다. 고립된 십자군 기사들은 포위되었고, 덴마크 및 리보니아 기사들부터 무너졌다. 튜튼 기사들도 전멸했고, 헤르만 주교 등 소수만이 탈출했다. 에스토니아인들은 노브고로드 기병대에 추격당해 다수가 전사하거나 익사했다. 노브고로드 군의 피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중앙 민병대의 피해가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1242년 4월 5일, 알렉산드르는 십자군을 얼어붙은 호수로 유인하기 위해 퇴각했다. 십자군과 노브고로드군의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정치가 존재한다. 데이비드 니콜레(David Nicolle)는 십자군 병력이 2,600명(800명의 덴마크 및 독일 기사, 100명의 튜튼 기사, 300명의 덴마크인, 400명의 독일인, 1,000명의 에스토니아 보병)으로 추산한다. 노브고로드군은 약 5,000명(알렉산드르와 안드레이의 드루지나 1,000명, 노브고로드 민병대 2,000명, 핀-우그리아 부족민 1,400명, 기마 궁수 600명)이었다.
튜튼 기사단과 십자군은 호수를 가로질러 돌격했지만, 노브고로드 민병대에 저지당해 공격 기세가 둔화되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2시간이 넘는 근접전투 후 알렉산드르는 좌익과 우익 기병에게 전투 참여를 명령했다. 지쳐있던 십자군은 혼란 속에 후퇴했고, 노브고로드 기병대의 출현에 공황 상태에 빠졌다.
4. 1. 십자군의 전술과 배치
십자군은 전형적인 서구식 중장기병 돌격 대형을 취했다. 덴마크와 튜튼, 리보니아 기사단을 중심으로 한 중무장 기사들을 중앙에, 에스토니아 출신 보병들을 후방에 배치했다. 이들은 정면 돌격을 통해 노브고로드 군의 중앙을 돌파하려 했다. 반면,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노브고로드 민병대를 중앙 전면에, 경기병대를 양익에 배치하고, 드루지나 중장기병들을 민병대 후방에 배치하여 십자군의 돌격을 저지하고 포위하는 전술을 구상했다.전투가 시작되자 십자군 기사들은 노브고로드 민병대를 향해 돌격했다. 그러나 노브고로드 군은 십자군보다 고지에 위치했고, 얼음들이 십자군과 노브고로드 군 사이에 있어 기사들의 돌격을 방해했다. 노브고로드 군의 궁수와 기마 궁수들이 쏜 화살도 피해를 입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은 민병대의 전열을 무너뜨리고 백병전에서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기사들의 돌격력이 약화된 탓에 민병대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고, 노브고로드 기병들이 십자군을 덮치면서 난전이 벌어졌다. 이때 에스토니아 보병들이 달아나면서 십자군은 고립되어 포위되었고, 덴마크 및 리보니아 기사들부터 무너져 내렸다. 튜튼 기사들 또한 전멸했고, 헤르만 주교를 포함한 소수의 기사들만이 탈출했다.
4. 2. 노브고로드 군의 전술과 배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정찰대를 통해 십자군의 추격을 예측하고 유리한 위치를 선정해 대기하고 있었다. 노브고로드 군은 중앙 전면에 노브고로드 민병대를, 좌우 양익에 경기병대를 배치해 놓았으며, 민병대의 후방에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를 포함한 드루지나 중장기병들을 배치하였다. 이는 좌우 기병을 통한 포위 전술을 추구한 것이었다.전투가 시작되자 십자군 측 기사들은 노브고로드 중앙 민병대를 향해 돌격하였다. 그러나 노브고로드 군은 십자군에 비해 고지에 위치해 있었고, 날카로운 얼음들이 얼어붙은 호수 위에 잔뜩 위치해 있어 기사들의 돌격을 크게 방해하였다. 노브고로드 군의 중앙 궁수들과 양익에 위치한 기마 궁수들이 쏘는 화살 또한 기사들에게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
많은 장애물로 인해 십자군 기사들의 돌격력이 상쇄되었지만, 이들은 곧 중앙의 민병대 전열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기사들은 우수한 무기와 중장비를 바탕으로 노브고로드 측 민병대들을 상대로 우세한 백병전을 벌였다. 그러나 민병대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고, 곧이어 노브고로드 측 기병들이 십자군의 좌우를 덮치면서 난전이 벌어졌다.
4. 3. 전투의 전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정찰대를 통해 십자군의 추격을 예측하고, 유리한 위치를 선정해 대기하고 있었다. 양측 군대의 포진은 서로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십자군은 덴마크, 튜튼, 리보니아 기사단을 중심으로 한 중무장 기사들을 중앙에, 에스토니아 출신 보병들을 후방에 배치했다. 특히 중앙에는 튜튼 기사들이 핵심 전력으로 포진했고, 좌우에는 덴마크 및 리보니아 기사들이 위치했다. 이는 전형적인 서구식 중장기병 돌격 대형으로, 기사들을 통한 정면 돌파를 노린 것이었다.반면 노브고로드 군은 중앙 전면에 노브고로드 민병대를, 좌우 양익에 경기병대를 배치하고, 민병대 후방에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를 포함한 드루지나 중장기병들을 배치했다. 이는 좌우 기병을 통한 포위 전술을 위한 포진이었다. 전투는 십자군이 중앙을 돌파하거나, 노브고로드 군이 포위하는 형태로 승패가 결정될 상황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십자군 기사들은 노브고로드 중앙 민병대를 향해 돌격했다. 그러나 노브고로드 군은 고지에 위치했고, 얼어붙은 호수 위의 날카로운 얼음들이 기사들의 돌격을 방해했다. 노브고로드 군의 궁수들과 기마 궁수들이 쏜 화살도 피해를 입혔다. 그럼에도 기사들은 민병대 전열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하지만 기사들의 돌격력이 약화된 틈을 타 노브고로드 기병들이 십자군 좌우를 공격하면서 난전이 벌어졌다. 이때 후방의 에스토니아 보병들은 겁에 질려 달아나 버렸다. 고립된 십자군 기사들은 포위되었고, 덴마크 및 리보니아 기사들부터 무너졌다. 튜튼 기사들도 전멸했고, 헤르만 주교 등 소수만이 탈출했다. 에스토니아인들은 노브고로드 기병대에 추격당해 다수가 전사하거나 익사했다. 노브고로드 군의 피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중앙 민병대의 피해가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1242년 4월 5일, 알렉산드르는 십자군을 얼어붙은 호수로 유인하기 위해 퇴각했다. 십자군과 노브고로드군의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정치가 존재한다. 데이비드 니콜레(David Nicolle)는 십자군 병력이 2,600명(800명의 덴마크 및 독일 기사, 100명의 튜튼 기사, 300명의 덴마크인, 400명의 독일인, 1,000명의 에스토니아 보병)으로 추산한다. 노브고로드군은 약 5,000명(알렉산드르와 안드레이의 드루지나 1,000명, 노브고로드 민병대 2,000명, 핀-우그리아 부족민 1,400명, 기마 궁수 600명)이었다.
튜튼 기사단과 십자군은 호수를 가로질러 돌격했지만, 노브고로드 민병대에 저지당해 공격 기세가 둔화되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2시간이 넘는 근접전투 후 알렉산드르는 좌익과 우익 기병에게 전투 참여를 명령했다. 지쳐있던 십자군은 혼란 속에 후퇴했고, 노브고로드 기병대의 출현에 공황 상태에 빠졌다.
4. 4. 전투의 결과
십자군은 포위되어 궤멸되었고, 노브고로드 군이 승리했다. 십자군 측 기사들은 노브고로드 군의 중앙 민병대를 향해 돌격했지만, 여러 장애물로 인해 돌격력이 상쇄되었다. 노브고로드 군은 고지에 위치해 있었고, 날카로운 얼음들이 기사들의 돌격을 방해했다. 또한, 노브고로드 군의 궁수와 기마 궁수들이 쏜 화살도 피해를 입혔다.민병대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상황에서 노브고로드 측 기병들이 십자군 측의 좌우를 공격하면서 난전이 벌어졌다. 이때 에스토니아 보병들은 겁에 질려 달아나 버려 십자군 측 기사들은 고립되었다. 덴마크 및 리보니아 기사들이 먼저 무너졌고, 튜튼 기사들도 전멸했다. 헤르만 주교를 포함한 소수의 기사들만이 탈출했다. 달아나던 에스토니아인들은 노브고로드 기병대의 추격으로 인해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얼음이 깨져 익사했다. 노브고로드 군의 피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중앙 민병대 측에서 상당한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5. 영향
이 전투의 결과로 튜튼 기사단을 포함한 서방 세력의 루스 지역 진출은 좌절되었다.[7] 덴마크는 이 전투 이후 더 이상 발트 해 연안으로의 진출을 꺼리게 되었으며, 달아났던 도르파트 주교 헤르만 또한 노브고로드와의 분쟁을 더 이상 일으키지 않게 되었다. 이 전투의 주축이었던 리보니아 기사단은 전쟁의 결과로 많은 인적 손실을 보았고, 전쟁의 패배로 튜튼 기사단 내부에서의 발언권 또한 약해지게 되어 리보니아에 대한 튜튼 기사단의 통제력이 강해지게 되었다. 또한 발트 해 지역에서 무적으로 군림하던 십자군의 패배가 알려지면서 리보니아 지역 원주민들의 반란이 촉발되게 되었고, 이는 발트 해 이남으로까지 영향을 미쳤다.
튜튼 기사단은 이 전쟁으로 인해 일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노브고로드에 대한 성전의 주축은 어디까지나 리보니아 기사단이었으며, 튜튼 기사단 본부에서는 이에 소극적인 상태였기 때문에 전쟁에 많은 자원을 소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리보니아 기사단의 발언권이 약해지면서 그에 대한 튜튼 기사단의 통제력이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페이푸스호에서의 패배가 튜튼 기사단이 지배하고 있던 프로이센 지역 원주민들을 크게 자극하였으며, 이에 따라 이들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장기적인 전쟁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페이푸스호 전투는 튜튼 기사단의 쇠퇴를 불러왔다.
십자군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노브고로드 내에서의 그의 입지도 확고해졌다. 그는 이후 서방 세력과의 지속적인 분쟁을 우위로 이끌었으나, 당시 루스를 지배하고 있던 몽골에 대해서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여러 반몽골 봉기를 진압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통치는 루스의 안정을 불러왔고, 이후 그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성인으로서 추앙받게 된다.
결과적으로 페이푸스호에서의 전투는 루스와 서방 국가들간의 국경선을 확립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페이푸스호를 기점으로 한 국경선은 대개 유지되어 왔다. 현재에도 페이푸스호는 에스토니아와 러시아 간의 자연적인 국경으로 유지되고 있다. 기사단의 알렉산드르의 군대에 대한 패배는 십자군이 동방 십자군의 핵심인 프스코프를 탈환하는 것을 막았다.[6] 그 후, 나르바강과 페이푸스 호수는 동방 정교회와 서방 가톨릭교회를 나누는 안정적인 경계선을 나타내게 되었다.[8]
일부 역사가들은 동시기에 발트해 동부에서 캠페인이 시작된 것이 계획된 캠페인의 일부였다고 주장했다. 핀란드 역사가 구스타프 A. 도너는 1929년 모데나의 윌리엄에 의해 조직되었고 교황청에서 시작된 공동 캠페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해석은 이고르 파블로비치 샤스콜스키와 다수의 서유럽 역사가들과 같은 러시아 역사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더 최근의 역사가들은 결정적인 증거 부족으로 인해 스웨덴인, 덴마크인, 독일인 사이의 계획된 공격과 교황의 마스터 플랜이라는 생각을 거부했다. 대신, 일부 학자들은 스웨덴의 네바 강 전투를 러스와 스웨덴이 핀란드와 카렐리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의 연장선으로 간주했다. 안티 셀라트는 또한 1240년부터 1243년까지의 교황 칙서는 "러시아인"에 대한 전쟁이 아닌 비기독교인에 대한 전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1983년, 역사학자 존 L. I. 페넬에 의해 제안된 역사 수정주의적 관점은 전투가 종종 묘사된 만큼 중요하지도 않고 규모가 크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페넬은 그 당시 대부분의 튜턴 기사단이 발트해 지역에서 다른 곳에 관여하고 있었고, 기사단의 사상자가 자체적으로 보고한 바에 따르면 그 수가 적은 것은 교전의 규모가 작았음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그에 따르면 '대규모 전투'가 많은 정기적인 충돌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라고 말하며, ''수즈달 연대기''(라브렌티예프스키)나 어떤 스웨덴 자료에도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말했다. 도널드 오스트로스키(2006)는 라우렌티안 코덱스에 있는 ''수즈달 연대기''가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전투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한다"고 지적했다.
5. 1. 서방 세력의 동방 진출 좌절
이 전투의 결과로 튜튼 기사단을 포함한 서방 세력의 루스 지역 진출은 좌절되었다.[7] 덴마크는 이 전투 이후 더 이상 발트 해 연안으로의 진출을 꺼리게 되었으며, 달아났던 도르파트 주교 헤르만 또한 노브고로드와의 분쟁을 더 이상 일으키지 않게 되었다. 이 전투의 주축이었던 리보니아 기사단은 전쟁의 결과로 많은 인적 손실을 보았고, 전쟁의 패배로 튜튼 기사단 내부에서의 발언권 또한 약해지게 되어 리보니아에 대한 튜튼 기사단의 통제력이 강해지게 되었다. 또한 발트 해 지역에서 무적으로 군림하던 십자군의 패배가 알려지면서 리보니아 지역 원주민들의 반란이 촉발되게 되었고, 이는 발트 해 이남으로까지 영향을 미쳤다.튜튼 기사단은 이 전쟁으로 인해 일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노브고로드에 대한 성전의 주축은 어디까지나 리보니아 기사단이었으며, 튜튼 기사단 본부에서는 이에 소극적인 상태였기 때문에 전쟁에 많은 자원을 소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리보니아 기사단의 발언권이 약해지면서 그에 대한 튜튼 기사단의 통제력이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페이푸스호에서의 패배가 튜튼 기사단이 지배하고 있던 프로이센 지역 원주민들을 크게 자극하였으며, 이에 따라 이들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장기적인 전쟁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페이푸스호 전투는 튜튼 기사단의 쇠퇴를 불러왔다.
십자군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노브고로드 내에서의 그의 입지도 확고해졌다. 그는 이후 서방 세력과의 지속적인 분쟁을 우위로 이끌었으나, 당시 루스를 지배하고 있던 몽골에 대해서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여러 반몽골 봉기를 진압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통치는 루스의 안정을 불러왔고, 이후 그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성인으로서 추앙받게 된다.
결과적으로 페이푸스호에서의 전투는 루스와 서방 국가들간의 국경선을 확립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페이푸스호를 기점으로 한 국경선은 대개 유지되어 왔다. 현재에도 페이푸스호는 에스토니아와 러시아 간의 자연적인 국경으로 유지되고 있다. 기사단의 알렉산드르의 군대에 대한 패배는 십자군이 동방 십자군의 핵심인 프스코프를 탈환하는 것을 막았다.[6] 그 후, 나르바강과 페이푸스 호수는 동방 정교회와 서방 가톨릭교회를 나누는 안정적인 경계선을 나타내게 되었다.[8]
일부 역사가들은 동시기에 발트해 동부에서 캠페인이 시작된 것이 계획된 캠페인의 일부였다고 주장했다. 핀란드 역사가 구스타프 A. 도너는 1929년 모데나의 윌리엄에 의해 조직되었고 교황청에서 시작된 공동 캠페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해석은 이고르 파블로비치 샤스콜스키와 다수의 서유럽 역사가들과 같은 러시아 역사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더 최근의 역사가들은 결정적인 증거 부족으로 인해 스웨덴인, 덴마크인, 독일인 사이의 계획된 공격과 교황의 마스터 플랜이라는 생각을 거부했다. 대신, 일부 학자들은 스웨덴의 네바 강 전투를 러스와 스웨덴이 핀란드와 카렐리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의 연장선으로 간주했다. 안티 셀라트는 또한 1240년부터 1243년까지의 교황 칙서는 "러시아인"에 대한 전쟁이 아닌 비기독교인에 대한 전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1983년, 역사학자 존 L. I. 페넬에 의해 제안된 역사 수정주의적 관점은 전투가 종종 묘사된 만큼 중요하지도 않고 규모가 크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페넬은 그 당시 대부분의 튜턴 기사단이 발트해 지역에서 다른 곳에 관여하고 있었고, 기사단의 사상자가 자체적으로 보고한 바에 따르면 그 수가 적은 것은 교전의 규모가 작았음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그에 따르면 '대규모 전투'가 많은 정기적인 충돌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라고 말하며, ''수즈달 연대기''(라브렌티예프스키)나 어떤 스웨덴 자료에도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말했다. 도널드 오스트로스키(2006)는 라우렌티안 코덱스에 있는 ''수즈달 연대기''가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전투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한다"고 지적했다.
5. 2. 튜튼 기사단의 쇠퇴
튜튼 기사단은 페이푸스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리보니아 기사단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는 일시적인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이 전투는 프로이센 지역 원주민들의 대규모 반란을 촉발시키는 등 장기적으로 튜튼 기사단의 쇠퇴를 불러왔다. 리보니아 기사단은 페이푸스호 전투에서 많은 인적 손실을 보았고, 전쟁의 패배로 튜튼 기사단 내부에서의 발언권이 약해졌다.기사단의 알렉산드르의 군대에 대한 패배는 십자군이 동방 십자군의 핵심인 프스코프를 탈환하는 것을 막았다.[6] 따라서 전투는 튜턴 기사단의 동진 확장을 막았다.[7] 그 후, 나르바 강과 페이푸스 호수는 동방 정교회와 서방 가톨릭교회를 나누는 안정적인 경계선을 나타내게 되었다.[8]
일부 역사가들은 동시기에 발트해 동부에서 캠페인이 시작된 것이 로마 교황청에서 시작된 공동 캠페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 부족으로 인해 스웨덴, 덴마크, 독일인 사이의 계획된 공격과 교황의 마스터 플랜이라는 생각은 거부되기도 한다.
5. 3.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위상 강화
페이푸스호 전투의 결과, 튜튼 기사단을 포함한 서방 세력의 루스 진출은 좌절되었다.[6][7] 덴마크는 발트 해 연안 진출을 꺼리게 되었고, 도르파트 주교 헤르만도 노브고로드와의 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리보니아 기사단은 인적 손실을 보았고, 튜튼 기사단 내부에서의 발언권이 약해져 튜튼 기사단의 통제력이 강해졌다. 발트 해 지역에서 십자군의 패배는 리보니아 지역 원주민들의 반란을 촉발했고, 이는 발트 해 이남으로까지 영향을 미쳤다. 튜튼 기사단은 리보니아 기사단에 대한 통제력이 강해지는 일시적인 이익을 얻었으나, 장기적으로 페이푸스호에서의 패배는 프로이센 지역 원주민들의 대규모 반란을 야기하여 튜튼 기사단의 쇠퇴를 불러왔다.십자군의 침공을 막아낸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노브고로드 내에서 그의 입지는 확고해졌다.[8] 그는 서방 세력과의 분쟁을 우위로 이끌었으나, 몽골에 대해서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여러 반몽골 봉기를 진압했다. 그의 통치는 루스의 안정을 가져왔고, 그는 러시아의 성인으로 추앙받게 된다.[11] 모스크바의 마카리우스는 1547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를 성인으로 성인으로 추대했다.
페이푸스호 전투는 루스와 서방 국가들간의 국경선을 확립한 사건이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페이푸스호를 기점으로 한 국경선은 대체로 유지되었다. 현재 페이푸스호는 에스토니아와 러시아 간의 자연적인 국경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이미지는 독일 점령에 맞선 투쟁의 국가적 소련 러시아 상징이 되었다.[9] 1942년 소련에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훈장이 군사 훈장으로 제정되었다.[12] 노브고로드의 승리는 현대 러시아 연방에서 군사적 영광의 날 중 하나로 기념된다.[13] 2010년 러시아 정부는 국가에 대한 탁월한 민간 봉사에 대한 포상으로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의 규정을 개정했다.
이 사건은 1938년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역사 드라마 영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에서 미화되었다. 영화는 튜턴 기사단을 나치 독일으로 묘사하는 등 선전적인 알레고리를 담고 있다.[10]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는 영화 악보를 칸타타로 만들었다.
5. 4. 루스와 서방 국가들 간의 국경선 확립
페이푸스호 전투는 루스와 서방 국가들 간의 국경선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6][7] 이 전투의 결과, 튜튼 기사단을 포함한 서방 세력의 루스 진출이 좌절되었고, 덴마크는 발트 해 연안 진출을 꺼리게 되었다. 리보니아 기사단은 인적 손실을 겪고 튜튼 기사단 내 발언권이 약화되어 튜튼 기사단의 통제력이 강해졌다. 십자군의 패배는 리보니아 지역 원주민들의 반란을 촉발했고, 이는 발트 해 이남까지 영향을 미쳤다.튜튼 기사단은 일시적으로 이익을 얻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프로이센 지역 원주민들의 대규모 반란을 겪으며 쇠퇴를 맞이했다. 십자군을 막아낸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영웅으로 추앙받고 루스의 안정을 가져왔으며, 러시아의 성인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페이푸스호를 기점으로 한 국경선은 대체로 유지되어 왔으며, 현재에도 에스토니아와 러시아 간의 자연적인 국경으로 유지되고 있다. 나르바 강과 페이푸스 호수는 동방 정교회와 서방 가톨릭교회를 나누는 안정적인 경계선이 되었다.[8]
일부 역사가들은 이 전투가 모데나의 윌리엄에 의해 조직된 로마 교황청의 공동 캠페인의 일부였다고 주장하지만, 결정적인 증거 부족으로 인해 계획된 공격과 교황의 마스터 플랜이라는 생각은 거부되기도 한다. 스웨덴의 네바 강 전투는 러스와 스웨덴이 핀란드와 카렐리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의 연장선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역사학자 존 L. I. 페넬은 전투의 중요성과 규모에 대해 역사 수정주의적 관점을 제시하며, 튜튼 기사단의 적은 사상자와 ''수즈달 연대기''(라브렌티예프스키) 및 스웨덴 자료에 언급이 없는 점을 들어 교전 규모가 작았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도널드 오스트로스키는 라우렌티안 코덱스에 있는 ''수즈달 연대기''가 간략하게나마 전투를 언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6. 역사적 유산 및 평가
6. 1. 역사적 의의
페이푸스호 전투는 튜튼 기사단을 포함한 서방 세력의 루스 진출을 좌절시킨 중요한 사건이다.[6][7] 덴마크는 이 전투 이후 발트해 연안 진출을 꺼리게 되었고, 도르파트 주교 헤르만도 노브고로드와의 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리보니아 기사단은 인적 손실을 보았고, 튜튼 기사단 내부 발언권이 약해져 튜튼 기사단의 통제력이 강해졌다. 발트해 지역 십자군의 패배는 리보니아 원주민들의 반란을 촉발했고, 이는 발트해 이남까지 영향을 미쳤다.튜튼 기사단은 일시적으로 이익을 얻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프로이센 원주민들의 대규모 반란을 야기하여 쇠퇴를 불러왔다. 십자군의 침공을 막아낸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노브고로드 내 입지가 확고해졌다. 그는 서방 세력과의 분쟁에서 우위를 점했고, 몽골에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반몽골 봉기를 진압했다. 그의 통치는 루스의 안정을 가져왔고, 그는 러시아의 성인으로 추앙받게 된다. 모스크바의 마카리우스는 1547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를 성인으로 추대했다.
페이푸스호 전투는 루스와 서방 국가들 간의 국경선을 확립한 사건으로, 이후 현대까지 페이푸스호는 에스토니아와 러시아 연방 간의 자연적인 국경으로 유지되고 있다. 나르바 강과 페이푸스 호수는 동방 정교회와 서방 가톨릭교회를 나누는 안정적인 경계선이 되었다.[8]

노브고로드의 승리는 현대 러시아 연방에서 군사적 영광의 날 중 하나로 기념된다.[12] 2010년, 러시아 정부는 국가에 대한 탁월한 민간 봉사에 대한 포상으로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의 규정을 개정했다.[13]
일부 역사가들은 이 전투가 모데나의 윌리엄에 의해 조직되고 로마 교황청에서 시작된 공동 캠페인의 일부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역사가들은 결정적인 증거 부족으로 이러한 주장을 거부하고, 네바 강 전투를 러스와 스웨덴의 경쟁 연장선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안티 셀라트는 1240년부터 1243년까지의 교황 칙서는 "러시아인"에 대한 전쟁이 아닌 비기독교인에 대한 전쟁을 언급한다고 지적한다. 역사학자 존 L. I. 페넬은 전투의 중요성과 규모가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며, 수즈달 연대기나 스웨덴 자료에 언급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도널드 오스트로스키는 라우렌티안 코덱스에 있는 ''수즈달 연대기''가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전투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한다"고 지적했다.
6. 2. 대중문화 속의 페이푸스 호 전투
1938년에 개봉된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역사 드라마 영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이 전투를 미화했다.[9] 영화는 나치 독일인을 묘사한 튜턴 기사단이 제1차 세계 대전 독일 슈탈헬름 헬멧을 착용하는 등 선전적인 알레고리를 담고 있어 실제 사건과 자주 혼동되는 대중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으며, 특히 기사들이 얼음이 깨져 익사하는 장면이 유명하다.[9]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는 영화 악보를 칸타타로 만들었는데, 그중 가장 긴 악장이 "얼음 위의 전투"이다.[10]도널드 오스트로프스키는 논문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얼음 위의 전투": 전설의 창조''에서 얼음이 깨지고 기사들이 익사했다는 이야기는 비교적 최근에 추가된 것이며, 1차 자료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가장 초기의 기록은 죽은 병사들이 "풀밭에 쓰러졌다"고 언급하며,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세부 사항이 추가되면서 얼음 위에서의 전투가 묘사되었다. 그는 많은 학자들이 얼음이 깨지거나 익사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얼음이 깨지는 장면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영화에서 처음 나타났다고 결론 내렸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이미지는 독일 점령에 맞선 투쟁의 상징이 되었고,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훈장이 제정되기도 했다.[11]
6. 3. 논란과 재평가
7. 각주
-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생애 ( 1450).
- 리보니아 운율 연대기 (LRC, 1290년대).
- * 리보니아 운율 연대기(주석, 이름 색인 및 용어집 포함, Leo Meyer 편집)/Livländische Reimchronik, mit Anmerkungen, Namenverzeichniss und Glossar herausgegeben von Leo Meyerde (재판: 힐데스하임 1963). 2235–2262행.
- * 리보니아 운율 연대기(역사적 서론, 지도 및 부록과 함께 번역됨)/The Livonian rhymed chronicle: translated with a historical introduction, maps, and appendices영어
- 프스코프 제3 연대기 (1567).
- * 프스코프 제3 연대기(제2판, David Savignac 편집, 번역 및 주석)}} 1240–1242년 항목. 1955년 나소노프의 ''프스코프 연대기'' 비평판 2000년 재판본을 기반으로 한 번역.
- 모스크바 학술 연대기 (MAk, {{circa/The Pskov 3rd Chronicle. 2nd edition. Edited, translated, and annotated by David Savignac영어 1500)의 "로스토프-수즈달 편집본".
- 수즈달 연대기, 라브렌티 계속 (1377), s.a. 6750 (1242).
- * 라브렌티 연대기}}
- 시노드 두루마(구 편집) 노브고로드 제1 연대기 ({{circa/Лаврентьевская летопись [라브렌티 연대기]cu 1275), s.a. 6750 (1242).
- * 노브고로드 연대기 1016–1471/The chronicle of Novgorod, 1016-1471.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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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gal Library of the USS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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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ree of the President of the Russian Federation of September 7, 2010 No 1099
http://www.rg.ru/201[...]
Russian Gazette
2010-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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