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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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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비스는 기원전 3세기에 활동한 스파르타의 통치자이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지역의 세력 확장을 시도하며, 아카이아 동맹, 마케도니아 왕국, 로마 등 주변 강대국들과 복잡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나비스는 기원전 207년 스파르타의 권력을 장악한 후, 부유층의 토지를 재분배하고 노예를 해방하는 등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스파르타 최초로 요새를 건설하고, 자신의 초상을 새긴 동전을 주조하기도 했다. 나비스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암살당하며, 스파르타는 아카이아 동맹에 병합되어 독립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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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스
기본 정보
나비스의 흉상
나비스의 흉상
통치 기간기원전 207년 ~ 기원전 192년
이전 통치자펠롭스
다음 통치자불명
개인 정보
출생불명
사망기원전 192년
배우자아페가
스파르타 왕
즉위기원전 207년
폐위기원전 192년
이전펠롭스
이후군주제 폐지

2. 가계와 배경

나비스는 기원전 225년 클레오메네스 3세가 아르고스를 장악했을 때, 아리스토마코스 2세의 조카인 아피아와 결혼하여 두 도시 간의 동맹을 굳건히 했다.[22] 나비스와 아피아 사이에는 아들 아르메나스를 포함하여 적어도 두 아들과 한 딸이 있었다.[23][24]

2. 1. 출생과 혈통

고대 자료에는 나비스의 출생에 대한 언급이 없어, 전직 헬로트, 용병, 페리오이코이, 가난한 스파르테, 또는 귀족 출신으로 묘사하는 등 다양한 이론이 제기되었다.[16] 19세기 말 델로스에서 발견된 비문에서 "데마라토스의 아들 나비스"가 언급되면서, 비문학자 테오필 홈몰은 나비스가 에우리폰티드 스파르타 왕 데마라토스(기원전 515~491년 재위)의 후손이라고 결론지었다. 데마라토스는 다른 왕, 아기아드 클레오메네스 1세에 의해 기원전 491년경 추방당했었다.[16][17] 전직 왕은 아시아에 정착했고, 그의 후손은 3세기까지 간헐적으로 추적되었으며, 그 후 가족은 스파르타로 돌아왔다.[18]

나비스는 기원전 250~45년경에 태어났다.[19] 에우리폰티드 왕조의 일원으로서, 젊은 나비스는 클레오메네스 3세의 통치(235~222) 동안 생존하기 위해 아기아드 왕 클레오메네스 3세와 협력했어야 했는데, 클레오메네스는 지속적으로 반대자들을 살해하거나 추방했기 때문이다.[20]

나비스라는 이름은 특이하며 스파르타 이름 중 유일하게 발견되는 이름이다. 이는 아마도 히브리어 단어 ''나비''의 그리스어 버전일 수 있으며, 이는 예언자를 의미한다. 장 조르주 텍시에는 나비스가 이집트에서 유대인들과 접촉하면서 얻은 추가적인 이름이라고 제안하는데, 그는 기원전 222년 셀라시아에서 패배한 후 클레오메네스 3세와 함께 그곳으로 도망갔을 수도 있다.[19][21]

기원전 225년, 클레오메네스 3세는 그의 폭군 아리스토마코스 2세의 공모에 힘입어 아르고스 도시를 장악했다. 아마도 이때 나비스는 두 도시 간의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해 아리스토마코스의 조카 아피아와 결혼했을 것이다.[22] 나비스와 아피아는 적어도 두 아들과 한 딸을 두었으며, 그중 아들 아르메나스만이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23][24]

2. 2. 초기 생애와 성장

고대 자료에는 나비스의 출생에 대한 언급이 없어, 전직 헬로트, 용병, 페리오이코이, 가난한 스파르타 출신, 또는 귀족 출신 등 다양한 이론이 제기되었다.[16] 19세기 말 델로스에서 발견된 비문에서 "데마라토스의 아들 나비스"가 언급되면서, 비문학자 테오필 홈몰은 나비스가 에우리폰티드 스파르타 왕 데마라토스(기원전 515~491년 재위)의 후손이라고 결론지었다. 데마라토스는 아기아드 클레오메네스 1세에 의해 기원전 491년경 추방당했다.[16][17] 전직 왕은 아시아에 정착했고, 그의 후손은 3세기까지 간헐적으로 추적되었으며, 그 후 가족은 스파르타로 돌아왔다.[18]

나비스는 기원전 250~45년경에 태어났다.[19] 에우리폰티드 왕조의 일원으로서, 젊은 나비스는 클레오메네스 3세의 통치(235~222) 동안 생존하기 위해 아기아드 왕 클레오메네스 3세와 협력했어야 했는데, 클레오메네스는 반대자들을 살해하거나 추방했기 때문이다.[20]

나비스라는 이름은 스파르타 이름 중 유일하게 발견되는 특이한 이름이다. 이는 아마도 히브리어 단어 ''나비''(예언자를 의미)의 그리스어 버전일 수 있다. 장 조르주 텍시에는 나비스가 이집트에서 유대인들과 접촉하면서 얻은 추가적인 이름이라고 제안하는데, 그는 기원전 222년 셀라시아에서 패배한 후 클레오메네스 3세와 함께 그곳으로 도망갔을 수도 있다.[19][21]

기원전 225년, 클레오메네스 3세는 아리스토마코스 2세의 공모에 힘입어 아르고스를 장악했다. 아마도 이때 나비스는 두 도시 간의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해 아리스토마코스의 조카 아피아와 결혼했을 것이다.[22] 나비스와 아피아는 적어도 두 아들과 한 딸을 두었으며, 그중 아들 아르메나스만이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23][24]

2. 3. 혼인과 가족

나비스의 출생에 대한 고대 자료는 없어, 전직 헬로트, 용병, 페리오이코이, 가난한 스파르테, 또는 귀족 출신 등 다양한 이론이 제기되었다.[16] 19세기 말 델로스에서 발견된 비문에서 "데마라토스의 아들 나비스"가 언급되면서, 비문학자 테오필 홈몰은 나비스가 에우리폰티드 스파르타 왕 데마라토스(기원전 515~491년 재위)의 후손이라고 결론지었다. 데마라토스는 아기아드 클레오메네스 1세에 의해 기원전 491년경 추방당했다.[17][16] 전직 왕은 아시아에 정착했고, 그의 후손은 3세기까지 간헐적으로 추적되었으며, 그 후 가족은 스파르타로 돌아왔다.[18]

나비스는 기원전 250~45년경에 태어났다.[19] 에우리폰티드 왕조의 일원으로서, 젊은 나비스는 클레오메네스 3세의 통치(235~222) 동안 생존하기 위해 아기아드 왕 클레오메네스 3세와 협력했어야 했는데, 클레오메네스는 지속적으로 반대자들을 살해하거나 추방했기 때문이다.[20]

나비스라는 이름은 특이하며 스파르타 이름 중 유일하게 발견되는 이름이다. 이는 아마도 히브리어 단어 ''나비''의 그리스어 버전일 수 있으며, 이는 예언자를 의미한다. 장 조르주 텍시에는 나비스가 이집트에서 유대인들과 접촉하면서 얻은 추가적인 이름이라고 제안하는데, 그는 기원전 222년 셀라시아에서 패배한 후 클레오메네스 3세와 함께 그곳으로 도망갔을 수도 있다.[19][21]

기원전 225년, 클레오메네스 3세는 그의 폭군 아리스토마코스 2세의 공모에 힘입어 아르고스 도시를 장악했다. 아마도 이때 나비스는 두 도시 간의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해 아리스토마코스의 조카 아피아와 결혼했을 것이다.[22] 나비스와 아피아는 적어도 두 아들과 한 딸을 두었으며, 그중 아들 아르메나스만이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23][24]

3. 스파르타 통치

나비스는 기원전 207년 만티네아 전투에서 마카니다스가 사망하자 펠로프스의 후임으로 스파르타의 권력을 잡았다. 그는 클레오메네스 3세의 개혁 노선을 따라 부자들을 추방하고 토지를 재분배했으며, 많은 노예를 해방하여 시민으로 만들었다. 이는 병력 증강을 통해 스파르타를 부흥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리비우스와 폴리비오스는 나비스를 군사력과 잔인함으로 권력을 장악한 폭군으로 묘사한다. 폴리비오스는 나비스의 지지자들을 "살인자 집단, 밤도둑, 소매치기와 노상강도"라고 표현했으며[65], 추방된 부자의 아내들이 산적과 전 노예와 결혼했다고[66] 기록하고 있다.

3. 1. 권력 장악

기원전 207년, 만티네아 전투에서 스파르타 왕 펠롭스의 후견인 마카니다스가 사망하자 나비스가 그 후임이 되었다.[29] 그러나 나비스는 에우리폰 왕조의 왕 데마라토스의 후손을 자칭하며 펠롭스를 폐위시키고, 기원전 206년에 처형했다.[30][31][32] 이렇게 나비스는 스파르타의 지배자 자리에 올라 (바실레우스)을 칭했다. 그러나 리비우스나 폴리비오스는 그를 왕이라고 부르지 않고, 참주라고 불렀다.

권력을 장악한 나비스는 기원전 3세기 말의 개혁자 클레오메네스 3세의 노선을 따랐다. 그는 부유한 자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토지를 재분배했으며, 많은 노예를 해방하여 시민 계급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시민의 증가는 병력의 증가를 의미하며, 그의 스파르타 부흥을 위한 발판이었다. 한편, 나비스에 대해 리비우스와 폴리비오스는 군사력과 잔혹함으로 권력을 장악한 피에 굶주린 폭군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예를 들어 폴리비오스는 나비스의 지지자들을 "살인자 집단, 야적, 소매치기, 강도"라고 하거나[65] (폴리비오스, 『세계사』, 13, 6), 추방된 부유한 자들의 아내를 산적이나 전 노예와 결혼시켰다고[66] (ibid, 13, 6-7) 말했다.

3. 2. 개혁 정치

기원전 207년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 왕 펠롭스의 후견인 마카니다스가 사망하자 나비스가 그 후임이 되었다. 그러나 나비스는 에우리폰 왕조의 왕 데마라토스의 후손을 자칭하며 펠롭스를 폐위시키고, 기원전 206년에 처형했다. 이렇게 나비스는 스파르타의 지배자 자리에 올라 을 칭했다. 그러나 리비우스나 폴리비오스는 그를 왕이라고 부르지 않고, 참주라고 불렀다.[41]

권력을 장악한 나비스는 기원전 3세기 말의 개혁자 클레오메네스 3세의 노선을 따랐다. 그는 부유한 자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토지를 재분배했으며, 많은 노예를 해방하여 시민 계급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시민의 증가는 병력의 증가를 의미하며, 그의 스파르타 부흥을 위한 발판이었다.[41] 한편, 리비우스와 폴리비오스는 나비스를 군사력과 잔혹함으로 권력을 장악한 피에 굶주린 폭군으로 묘사한다. 예를 들어 폴리비오스는 나비스의 지지자들을 "살인자 집단, 야적, 소매치기, 강도"라고 하거나, 추방된 부유한 자들의 아내를 산적이나 전 노예와 결혼시켰다고 말했다.[41]

나비스의 개혁 중 가장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노예 해방이었다. 클레오메네스 3세는 기원전 222년에 6,000명의 헬로트를 대량으로 해방시켰지만, 이는 셀라시아 전투 직전 마케도니아의 대군에 맞서기 위한 절박한 조치였다.[42] 나비스는 권력을 잡자마자 많은 헬로트를 해방시킨 것으로 보이나, 추방된 적들의 땅에 살고 있던 헬로트만 해방시켰을 수 있다. 그의 통치 이후에도 라코니아에 헬로트가 남아 있었고, 전통적인 재산 노예는 해방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해방된 사람 중 일부를, 스파르타 여성이 종종 막대한 양의 토지를 소유했기에, 금지된 사람들의 아내와 딸과 결혼시켰다.[43][44] 스파르타의 두 번째 계층 시민인 페리오이코이 역시 시민권을 보상받았다.[45]

고전 시대 동안 스파르타는 성벽이 없기로 유명했지만, 부차적인 세력이 된 후 상황이 바뀌었다. 최초의 방어 시설은 기원전 315년경부터 시작되었지만, 주로 말뚝 울타리였다.[38][39] 나비스는 스파르타 최초의 완전한 요새를 건설했는데, 돌과 벽돌로 된 벽으로 약 200헥타르의 넓은 지역을 둘러쌌다. 이 벽은 다섯 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완전히 통합되지 못했던 스파르타의 도시화를 완성했다. 지붕 타일에는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나비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기원전 200년경의 비문에는 포위 공격에 대비하여 저수지를 만드는 역할을 하는 물 관리인에 대한 언급도 있다.[40]


3. 3. 개혁에 대한 평가

나비스는 기원전 3세기 말의 개혁자 클레오메네스 3세의 노선을 따랐다. 그는 부유한 자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토지를 재분배했으며, 많은 노예를 해방하여 시민 계급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시민의 증가는 병력의 증가를 의미하며, 그의 스파르타 부흥을 위한 발판이었다. 한편, 리비우스와 폴리비오스는 나비스를 군사력과 잔혹함으로 권력을 장악한 피에 굶주린 폭군으로 묘사했다. 예를 들어 폴리비오스는 나비스의 지지자들을 "살인자 집단, 야적, 소매치기, 강도"라고 하거나[65], 추방된 부유한 자들의 아내를 산적이나 전 노예와 결혼시켰다고[66] 말했다.

4. 대외 정책

나비스는 아이톨리아, 엘리스, 메세네와 동맹을 맺고 아카이아 동맹마케도니아 왕국에 대립하는 대외 정책을 펼쳤다.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이후 라코니아와 메세네 대부분을 정복하며 세력을 확장했지만, 기원전 204년 메갈로폴리스 공략에는 실패했다. 한편, 크레타 동맹국의 도움을 받아 해군력을 강화하고 성벽을 쌓아 스파르타 시의 방비를 강화했다.

기원전 201년, 메세네를 침공하여 일시 점령했으나, 필로포이멘이 이끄는 아카이아 동맹군에게 테게아에서 패배하고 퇴각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부를 지배하는 아카이아 동맹, 특히 장군 필로포이멘은 나비스의 영토 확장을 저지했다. 나비스는 필로포이멘에게 여러 번 패했지만, 다른 장군들을 상대로는 승리하기도 했다.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그는 마케도니아와 동맹을 맺고 (기원전 199년) 아르고스를 얻었지만, 전황이 불리해지자 로마로 망명했다.

4. 1. 주변국과의 관계

나비스는 아이톨리아, 엘리스, 메세네와 동맹을 맺고 아카이아 동맹마케도니아 왕국에 대항했다.[47] 이로 인해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동안 로마와 동맹을 맺었고, 기원전 205년 포이니케 평화에서 로마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48][49]

이후 나비스는 라코니아와 메세네의 상당 부분을 재정복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기원전 204년, 메갈로폴리스 공략에 실패했지만,[50] 크레타 동맹국의 도움을 받아 함대를 재건하고(폴리비우스는 이를 "해적"이라고 묘사했다),[51][52] 라코니아 해안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재확립했다. 또한 스파르타 시를 요새화했다.

기원전 201년, 나비스는 메세네 영토를 침략하여[47][53] 한때 점령했지만, 필로포이멘의 군대 개입으로 테게아에서 패배하고 후퇴했다.[47][54]

나비스의 영토 야망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부를 통제하는 아카이아 동맹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그는 필로포이멘에게 여러 번 패했지만, 아카이아인들에게는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기원전 200년, 아카이아인들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나비스는 필리포스 5세와 로마 사이의 갈등을 이용하여, 마케도니아와의 동맹 대가로 아르고스를 얻은 후 로마에 귀순하여 정복지를 유지했다.

4. 2.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과 로마와의 관계

나비스는 아이톨리아, 엘리스, 메세네와 동맹을 맺고 아카이아 동맹과 마케도니아에 대항하는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47]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동안 로마와 동맹을 맺었고, 기원전 205년 포이니케 평화에서 로마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48][49]

이후 나비스는 라코니아와 메세네의 상당 부분을 재정복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기원전 204년, 메갈로폴리스를 습격했지만,[50] 202년까지 전쟁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그는 크레타 동맹국의 도움을 받아 함대를 재건하고(폴리비우스는 이를 "해적"이라고 묘사했다),[51][52] 라코니아 해안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재확립했다. 또한 스파르타 시를 처음으로 요새화했는데, 이전에는 스파르타인들이 도시 방어를 호플리테스의 용맹에 의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201년, 나비스는 메세네 영토를 침략했는데,[47][53] 이는 기원전 4세기 중반까지 스파르타가 통제했던 지역을 재확립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메세네는 함락되었지만, 필로포이멘의 군대 개입으로 스파르타인들은 후퇴해야 했다. 나비스의 군대는 테게아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그는 한동안 팽창주의적 야망을 억제해야 했다.[47][54]

나비스의 영토 야망은 펠로폰네소스 북부를 통제하는 아카이아 동맹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아카이아의 스트라테고스인 필로포이멘에게 여러 번 패했지만, 아카이아인들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남아 있었다. 이는 덜 유능한 장군들이 이끌었을 때 그에게 덜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200년, 아카이아인들은 나비스가 그들의 영토를 쉽게 유린하는 것에 놀라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필리포스 5세는 도움을 주지 않았다. 이후 나비스는 필리포스 5세와 로마 사이의 갈등을 이용하여, 마케도니아와의 동맹 대가로 아르고스를 장악한 다음, 곧 승리할 로마에 귀순하여 정복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4. 3. 로마와의 전쟁

나비스는 대외 정책에서 아이톨리아인, 엘리스, 메세네와 동맹을 맺어 아카이아 동맹과 마케도니아에 대항했다.[47] 이로 인해 그는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동안 로마와 동맹을 맺었고, 기원전 205년 포이니케 평화에서 로마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48][49]

이후 몇 년 동안 나비스는 스파르타의 세력을 확장하여 라코니아와 메세네의 상당 부분을 재정복했다. 기원전 204년, 그는 메갈로폴리스를 습격했지만,[50] 202년까지 전쟁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그는 또한 함대를 재건했고(폴리비우스가 "해적"이라고 묘사한 크레타 동맹국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51][52] 이를 사용하여 라코니아 해안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재확립했다. 그는 또한 처음으로 스파르타 시를 요새화했다.

기원전 201년, 그는 메세네 영토를 침략했는데,[47][53] 필로포이멘의 군대가 개입하자 스파르타인들은 후퇴해야 했다. 나비스의 군대는 테게아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그는 한동안 팽창주의적 야망을 억제해야 했다.[47][54]

나비스의 영토 야망은 아카이아 동맹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필로포이멘에게 여러 번 패했지만, 아카이아인들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남아 있었다. 기원전 200년, 아카이아인들은 필리포스 5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는 도움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나비스는 필리포스와 로마인 사이의 갈등을 이용하여, 아르고스를 장악한 다음 로마인에게 귀순하여 정복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195년, 로마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는 아카이아인들에게 펠로폰네소스에서 나비스의 세력을 제어해야 한다는 설득을 받았다.[55] 플라미니누스는 나비스에게 아르고스를 아카이아인들에게 돌려주거나 로마와의 전쟁에 직면하라고 명령했다.[56] 나비스는 거부하자 플라미니누스는 라코니아를 침공했다.[56] 결정적인 결과를 내지 못한 작전 이후 스파르타는 패배했고, 나비스는 아르고스와 항구 기테이움을 넘겨주어야 했는데, 이로 인해 그는 바다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57][58]

5. 최후

나비스는 스파르타의 마지막 왕이자 그리스의 주요 세력으로서 스파르타를 이끈 마지막 통치자였다. 나비스가 암살된 후, 라코니쿠스가 스파르타의 왕이 되었다. 아카이아 동맹은 지도자를 잃은 스파르타의 혼란을 틈타 필로포이멘에게 대군을 맡겨 스파르타를 공격했고, 결국 스파르타는 아카이아 동맹에 강제로 가입(흡수)되었다.[61] 이로써 스파르타는 독립 국가로서의 지위를 잃었고, 기원전 192년에 라코니쿠스는 왕위에서 물러났으며, 스파르타 왕의 지위는 폐지되었다.

5. 1. 재기와 암살

여행자들의 재물을 갈취할 정도로 무도하였던 나비스는 아카이아 인의 침략을 받아 기원전 201년에 스코티타스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기원전 195년에 플라미니누스가 이끄는 로마 군에게 참패한 후 아르고스에 항복하였으나 부장에게 피살되었다.[67] 이후 스파르타는 192년에 아카이아 연맹에 병합되고 만다.

스파르타 시와 그 주변 지역만 통치하게 되었지만, 나비스는 여전히 예전의 권력을 되찾기를 희망했다. 기원전 192년, 나비스는 로마와 동맹국인 아카이아 동맹이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 안티오코스 3세와 아이톨리아 동맹과의 임박한 전쟁으로 정신이 팔린 틈을 타 기테이온과 라코니아 해안을 탈환하려 했다.[59] 처음에는 성공하여 항구를 점령하고 소규모 해전에서 아카이아 동맹을 격파했다.[59]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군대는 필로포이멘에게 패배하여 스파르타 성벽 안에 갇혔다. 필로포이멘은 주변 시골을 황폐화시킨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59] 몇 달 안에 나비스는 로마와 아카이아 동맹으로부터 자신의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아이톨리아 동맹에게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59]

아이톨리아인들은 스파르타에 보병 1,000명과 기병 3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보냈다.[60] 그러나 그곳에서 아이톨리아인들은 폭군을 배신하여 그가 도시 밖에서 군대를 훈련시키는 동안 암살했다.[60] 아이톨리아인들은 그 후 도시를 장악하려 했지만 시민들의 봉기로 인해 실패했다.[60]

혼란을 틈타 아카이아인들은 필로포이멘을 대규모 군대와 함께 스파르타로 파견했다. 그곳에서 그는 스파르타인들에게 아카이아 동맹에 가입하도록 강요했다.[61] 나비스는 독립적인 스파르타의 마지막 지도자였으며, 스파르타인들이 그리스에서 주요 세력이었던 마지막 통치자였다.

5. 2. 스파르타의 몰락

기원전 201년 스코티타스(scotitas)전투에서 아카이아 인에게 대패하고, 기원전 195년에는 플라미니누스(Flamininus)가 이끄는 로마 군에게 패배하여 아르고스에 항복했지만 부장에게 살해당했다.[67] 이후 스파르타는 기원전 192년 아카이아 연맹에 합병되었다.

나비스는 스파르타 시와 그 주변 지역만 통치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예전의 권력을 되찾기를 희망했다. 기원전 192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 안티오코스 3세와 아이톨리아 동맹과의 전쟁으로 로마와 아카이아 동맹이 정신이 팔린 틈을 타 기테이온과 라코니아 해안을 탈환하려 했다.[59] 처음에는 성공하여 항구를 점령하고 소규모 해전에서 아카이아 동맹을 격파했다.[59]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군대는 필로포이멘에게 패배하여 스파르타 성벽 안에 갇혔다. 필로포이멘은 주변 시골을 황폐화시킨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59] 몇 달 안에 나비스는 자신의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아이톨리아 동맹에게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59]

아이톨리아인들은 스파르타에 보병 1,000명과 기병 3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보냈다.[60] 그러나 그곳에서 아이톨리아인들은 나비스를 배신하여 그가 도시 밖에서 군대를 훈련시키는 동안 암살했다.[60] 아이톨리아인들은 그 후 도시를 장악하려 했지만 시민들의 봉기로 인해 실패했다.[60]

혼란을 틈타 아카이아인들은 필로포이멘을 대규모 군대와 함께 스파르타로 파견했다. 그곳에서 그는 스파르타인들에게 아카이아 동맹에 가입하도록 강요했다.[61] 나비스는 독립적인 스파르타의 마지막 지도자였으며, 스파르타인들이 그리스에서 주요 세력이었던 마지막 통치자였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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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서적 Sparta between Empire and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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