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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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쇄원은 1530년경부터 양산보가 조성한 조선시대의 정원으로, 스승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인해 유배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과 더불어 살기 위해 만들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재건되었으며, 현재는 명승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쇄원은 내원과 외원으로 구분되며, 제월당, 광풍각 등 건물과 대나무, 소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숲, 자연스러운 담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갑오개혁 이후 애국충신들의 활동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했으며, 2024년 현재 양산보의 15대손이 소쇄원을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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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담양 소쇄원 |
한자 표기 | 潭陽 瀟灑園 |
로마자 표기 | Soswaewon |
종류 | 정원 |
위치 | 전라남도 담양군 가사문학면 소쇄원길 17, 등 (지곡리)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 | 국유, 사유 |
면적 (지정구역) | 4,399m² |
면적 (보호구역) | 117,051m² |
문화재 정보 | |
지정 유형 | 명승 |
지정 번호 | 40 |
지정일 | 2008년 5월 2일 |
문화재청 번호 | 15,00400000,36 |
과거 문화재 정보 | |
지정 유형 | 사적 |
지정 번호 | 304 |
지정일 | 1983년 7월 20일 |
해제일 | 2008년 5월 2일 |
문화재청 번호 | 13,03040000,36 |
과거 문화재 정보 (전라남도) | |
지정 유형 | 기념물 |
지정 번호 | 5 |
지정일 | 1972년 8월 7일 |
해제일 | 1983년 7월 20일 |
문화재청 번호 | 23,00050000,36 |
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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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양산보는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죽자,[1] 1520년(중종 15) 고향 지석동 창암촌으로 낙향하여 소쇄원을 짓기 시작했다.[4]
1597년 (선조 30) 정유재란 때 소쇄원 건물이 불에 탔으나, 1614년 (광해군 6) 양산보의 손자 천운이 종손을 도와 재건하였다. 1755년 (영조 31)에는 소쇄원도가 판화로 만들어졌다.[6]
1897년 갑오개혁 이후 소쇄원은 애국충신들의 은신처 및 토론 장소로 제공되었고, 1905년에는 친일 세력에 의해 소쇄원의 본가인 창암촌과 황금정 등의 건물이 불타는 등 수난을 겪었다. 이후 소쇄원은 소유권 분쟁, 학술 연구, 문화재 지정 등 여러 과정을 거쳤다.
1981년 국가 사적 제30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 제40호로 변경되었다. 2024년 현재 양산보의 15대손 양재혁이 소쇄원에 거주하며 관리하고 있다.[13]
2. 1. 조성 배경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처형당하자, 제자였던 양산보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소쇄원을 건립하였다.[1] 이는 1520년대 후반부터 1530년대 중반에 걸쳐 이루어졌다. 소쇄원은 세속과 단절하고 싶은 양산보의 마음이 담긴 공간이었다.2. 2. 소쇄원 조성 및 중수
정유재란 때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1614년(광해군 6) 양산보의 손자 천운이 종손을 도와(1568~1637) 재건하였다.[3] 1755년(영조 31)에는 소쇄원도가 판화로 만들어졌다.[6]소쇄원은 조선 중기 호남 사림 문화를 이끈 인물들의 교류처였다. 송순, 임억령, 김인후, 김윤제, 고경명, 정철 등이 드나들며 정치, 학문, 사상 등을 논하였다.[3]
소쇄원 조성 및 중수와 관련된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사건 내용 |
---|---|
1503년 (연산군 9) | 소쇄원 주인 양산보 출생 |
1517년 (중종 12) | 양산보, 조광조에게 가르침을 받음 |
1519년 (중종 14) | 양산보, 과거(현량과) 합격,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 사망 |
1520년 (중종 15) | 양산보, 낙향 |
1530년 (중종 25) | 양산보, 소쇄원 조경 시작[4] |
1534년 (중종 29) | 소쇄원에 관한 최초 기록 등장[5] |
1548년 (명종 3) | 김인후, 소쇄원48영 지음 |
1557년 (명종 12) | 양산보 사망 |
1597년 (선조 30) | 정유재란으로 건물 소실 |
1614년 (광해군 6) | 양산보 손자 천운, 재건 |
1674년 | 양산보의 5대손 양응지, 소쇄원 본가 창암촌도 그림 |
1755년 (영조 31) | 소쇄원도 판화 제작[6] |
1897년 | 소쇄원 종손 양현묵, 친일 세력에 의해 살해 |
1901년 | 양재구 종손, 친일 세력에 의해 독살 |
1902년 | 최씨 종부, 친일 세력의 보쌈 위기 |
1905년 | 소쇄원 본가 창암촌 등, 친일 세력에 의해 불탐 |
1907년 | 최씨 종부, 두 번째 보쌈 위기 |
1919년 | 문중원들, 소쇄원 궐석 재판 승소 |
1926년 | 문중원들, 소쇄원 부지 등기, 종손 양동호, 소쇄원 일부 매매 |
1927년 | 종손 양동호, 소쇄원 지분 회복 |
1970년 | 양동호 종손 사망, 14대 종부 심효경, 소쇄원 명의 변경 시도 |
1973년 | 소쇄원 최초 학술 논문[7] |
1979년 | 소쇄원 최초 단행본 서적(사진집)[8] |
1981년 | 국가 사적 304호 지정 |
1983년 | 소쇄원 보존 보고서[9] |
1990년 | <소쇄원 시선> 출판 |
1991년 | 양씨 종중, 입장권 유료화 시도 |
1993년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에 소개[10][11] |
1995년 | 소쇄원 최초 석사학위 논문[12] |
2005년 | 소쇄원 입장료 징수 시작 |
2007년 | 양씨 종중, 소송 제기 |
2008년 | 명승 제40호 지정 (사적 지정 해제) |
2010년 | 종손 양원로, 재판 패소, 담양군, 소쇄원 입장료 징수 조례 제정 |
2017년 | 소쇄원종합정비계획 연구용역 (전남대학교) |
2018년 | 소쇄원종합정비계획 연구용역 (문화재청, 전남대학교) |
2024년 | 양재혁, 소쇄원 거주 및 관리, 최신 단행본[13] 및 박사학위 논문[14] 출간, 소쇄원 알기 모임(1차) 개최 예정[15] |
2. 3. 일제강점기와 그 이후
1897년 소쇄원에서는 갑오개혁으로 인해 애국충신들이 모여 창평지역 유림들의 세력을 규합했는데, 이때 소쇄원은 숙소와 토론 장소를 제공하였다. 당시 소쇄원의 종손 양현묵은 기우만 등과 을미의병에 동참하고 친일 배척에 앞장섰으나, 만 42세에 친일 세력에 의해 살해당했다.[6] 1901년에는 양재구 종손이 아버지를 이어 애국충신들의 규합에 힘쓰다 창평 고씨 상가에서 친일 세력에게 만 28세에 독살당했다.[6] 1902년에는 임진왜란 의병장 최경회 장군의 종가에서 소쇄원으로 시집온 최씨 종부가 남편의 뜻을 따라 창암촌의 숙소와 소쇄원을 애국충신의 규합 장소로 제공하다가 친일 세력에게 보쌈당할 위기를 겪었다.[6]1905년, 소쇄원의 본가인 창암촌과 황금정 등의 건물이 친일 세력에 의해 불탔고, 소쇄원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6] 1907년, 최씨 종부는 창암촌이 불탄 후 고암정사 터에 만 9세의 어린 아들과 함께 임시 종가를 짓고 살면서도, 애국지사들에게 소쇄원을 규합 장소로 계속 제공하다가 두 번째 보쌈 위기를 겪었으나, 광산 김씨 며느리 집안 하인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6]
1919년, 젊은 종부와 어린 종손 양동호의 종가 재산을 관리하던 문중원들은 양동호가 만 21세가 되자 소쇄원을 선조의 공동재산이라 주장하며 궐석재판을 통해 승소했다.[6] 1926년, 문중원들은 소쇄원 부지를 소쇄공의 둘째 아들 양고암 허무인 외 42인의 공동명의로 등기했다.[6] 같은 해 4월, 종손 양동호는 문중원들의 강요로 제월당, 광풍각 부지 등 소쇄원 일부 부지를 박찬규에게 매매했다.[6] 8월, 양동호는 문중원들과 결의서를 작성하고 자신의 명의로 된 선산을 창평제주양씨창암공파종중으로 명의 이전하여 소쇄원을 돌려받기로 했다.[6] 1927년 10월, 빚 변제를 통해 박찬규에게 매매했던 소쇄원 지분을 양고암 외 42인으로 다시 명의 이전 후 차명 관리했다.[6]
1970년, 양동호 종손이 사망하고 양산보의 14대 종부 심효경은 특별조치법 시행을 계기로 차명 관리되던 소쇄원 부지 중 일부를 제주양씨소쇄원종중으로 명의 변경했다.[6] 1973년, 소쇄원이 최초로 학술논문에서 다뤄졌고,[7] 1979년에는 소쇄원을 다룬 단행본 서적(사진집)이 최초로 출간되었다.[8] 1981년에는 국가 사적 제304호로 지정되었으며, 1983년에는 소쇄원 보존을 다룬 정부 당국 보고서가 출간되었다.[9]
1990년, 양산보의 15대 종손 양재영은 소쇄원 관련 한시를 모아 <소쇄원 시선>을 출판했다.[6] 1991년, 양씨 종중은 소쇄원 관리비 마련을 위해 입장권 유료화를 추진했으나 담양군의 반대로 무산되었다.[6] 1993년, 유홍준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에 소쇄원이 소개되면서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었다.[10][11] 1995년에는 소쇄원을 다룬 석사학위 논문이 최초로 출간되었다.[12]
2005년, 소쇄원은 입장료(어른 기준 1000KRW)를 받기 시작했다.[6] 2007년, 양씨 종중은 문화재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6] 2008년, 소쇄원은 명승 제40호로 지정되며 국가 사적 지정이 해제되었다.[6] 2010년, 종손 양원로는 대법원 재판에서 패소했고,[6] 같은 해 담양군은 소쇄원 입장료를 직접 징수하기 위한 조례를 통과시켰다.[6]
소쇄원 부실공사로 인해 후손 양재혁의 항의가 있었고, 문화재 보수 설계 심의와 공사 진행 방식이 개선되었다.[6] 2017년과 2018년에는 소쇄원 종합정비계획 연구용역이 진행되었다.[6] 2024년, 양산보의 15대손 양재혁은 소쇄원을 지키라는 선조들의 유언에 따라 소쇄원에 거주하며 관리하고 있다.[6]
3. 건물 및 정원
양산보(梁山甫, 1503~1557)는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를 당하여 죽게 되자 출세에 뜻을 버리고 소쇄원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소쇄원'이라는 이름은 양산보의 호인 소쇄옹(蘇灑翁)에서 비롯되었으며, 맑고 깨끗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16]
오곡문(五曲門) 담장 밑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물은 폭포가 되어 연못에 떨어지고, 계곡 가까이에는 제월당(齊月堂,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집)과 광풍각(光風閣, 비온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뜻의 사랑방)이 들어서 있다.[16]
영조 31년(1755) 당시 모습을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있어 소쇄원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다. 이곳은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토론하고 창작활동을 벌인 선비정신의 산실이기도 했다. 지금의 소쇄원은 양산보의 5대손 양택지에 의해 보수된 모습이다.[16]
3. 1. 개요
소쇄원은 1905년에 소실된 창암촌 본가의 후원으로 크게 내원과 외원으로 구분하는데, 흔히 말하는 소쇄원은 내원을 말한다. 창암촌과 소쇄원 사이에는 황금정 행정 건물이 있었고, 외부에는 방암촌 관덕재, 죽림재, 활터 등의 건물이 있었다.[16]정원은 계곡을 중심으로 하는 기다란 사다리꼴 형태로, 4060m2 면적이다. 기능과 공간 특성에 따라 애양단구역, 오곡문구역, 제월당구역, 광풍각구역으로 나뉜다. 이는 본가 창암촌과 연계하여 오곡문까지 자연지형으로 이루어진 산과 언덕, 담장으로 경계를 둔, 아버지(양산보)가 지은 본가 창암촌 후원 일부 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정원 내에는 대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숲이 있다. 주위에는 흙과 돌로 쌓은 자연스러운 담이 있고, ‘애양단’, ‘오곡문’, ‘소쇄처사양공지려’ 석판과 목판글씨가 담벽에 박혀있다. 소쇄원 안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 모습을 목판에 새긴 그림과, 양산보의 5대손 양응지가 그린 본가 창암촌도 그림이 남아있어, 원래 규모에서 축소된 현재 모습을 알 수 있다.[16]
소쇄원은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정원 중 하나이다.
3. 2. 주요 건물
소쇄원은 1905년에 소실된 창암촌 본가의 후원으로, 크게 내원과 외원으로 구분된다. 흔히 말하는 소쇄원은 내원을 가리킨다. 창암촌과 소쇄원 사이에는 황금정, 행정 등의 건물이 있었고, 외부에는 방암촌, 관덕재, 죽림재, 활터 등의 건물이 있었다.- 정원
- 광풍각
- 매대
- '''추월정'''
추월정은 주인을 위한 건물로 "비 온 뒤 밝은 달"이라는 뜻이다.
- '''광풍정'''
광풍정은 손님을 위한 건물로 "비 온 뒤 밝은 해와 신선한 바람"이라는 뜻이다.
- '''대봉정'''
대봉정은 소쇄원의 높은 언덕에 있는 건물이다. 봉황의 행운을 좋은 소식으로 여긴다는 의미이다.
3. 3. 정원 구성
소쇄원은 현재 1905년에 소실된 창암촌 본가의 후원으로, 크게 내원과 외원으로 구분되는데 일반적으로 소쇄원은 내원을 말한다. 창암촌과 소쇄원 사이에는 황금정 행정 등의 건물이 있었고, 외부에는 방암촌 관덕재, 죽림재, 활터 등의 건물이 있었다.정원은 계곡을 중심으로 하는 기다란 사다리꼴 형태이며, 4060m2의 면적이다. 기능과 공간의 특성에 따라 애양단구역, 오곡문구역, 제월당구역, 광풍각구역으로 나뉜다. 본가 창암촌과 연계하여 오곡문까지 자연지형으로 이루어진 산과 언덕, 담장으로 경계를 둔, 아버지가 지은 본가 창암촌의 후원 일부 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정원 내에는 대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들로 된 숲이 있다. 주위에는 흙과 돌로 쌓은 자연스러운 담이 있는데, ‘애양단’, ‘오곡문’, ‘소쇄처사양공지려’ 석판과 목판글씨가 담벽에 박혀있다. 소쇄원 안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의 모습을 목판에 새긴 그림과 양산보의 5대손 양응지가 그린 본가 창암촌도 그림이 남아있어, 원래의 규모에서 축소된 현재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정원이다.[16] 오곡문 담장 밑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 물은 폭포가 되어 연못에 떨어지고, 계곡 가까이에는 제월당(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집)과 광풍각(비 온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뜻의 사랑방)이 들어서 있다.[16]
소쇄원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모습을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가 남아있어 원형을 추정할 수 있다. 이곳은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토론하고 창작활동을 벌인 선비정신의 산실이기도 했다. 지금의 소쇄원은 양산보의 5대손 양택지에 의해 보수된 모습이다.[16]
- '''추월정'''
추월정은 주인을 위한 집으로 "비 온 뒤 밝은 달"이라는 뜻이다.
- '''광풍정'''
광풍정은 손님을 위한 집으로 "비 온 뒤 밝은 해와 신선한 바람"이라는 뜻이다.
- '''대봉정'''
대봉정은 소쇄원의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으며, 봉황의 행운을 좋은 소식으로 여긴다는 의미이다.
4. 문화적 의의
소쇄원은 조선 중기 호남 사림 문화를 이끈 인물들의 교류처였다. 송순, 임억령, 김인후, 김윤제, 고경명, 정철 등이 드나들며 정치, 학문, 사상 등을 논하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2021년에는 '소쇄'라는 이름이 송순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지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3]
소쇄원은 많은 학자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고 창작활동을 벌인 선비 정신의 산실이기도 했다.[16] 1548년(명종 3)에는 김인후가 소쇄원48영을 짓기도 했다.
1993년 유홍준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에 '담양 소쇄원: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라는 한 장으로 소개되어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었다.[10][11]
5. 갤러리
참조
[1]
웹사이트
기묘사화(己卯士禍 ), Gimyo sahwa
http://www.aks.ac.kr[...]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2]
웹사이트
18th-century map of Soswaewon
http://www.soswaewon[...]
2023-03-24
[3]
웹인용
명승 지정 별서정원 11개소 역사성 검토 결과 공개
https://www.cha.go.k[...]
문화재청
2021-09-02
[4]
일반텍스트
[5]
일반텍스트
[6]
일반텍스트
[7]
논문
양산보의 소쇄원에 대하여
한국조경학회지
1973
[8]
논문
한국의 고정원 소쇄원
광장
1979
[9]
간행물
담양소쇄원 보존정비계획 및 설계
문화재관리국
1983
[10]
서적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
창비
1993
[11]
일반텍스트
[12]
논문
별서 소쇄원에서의 공간구조상의 조직체계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대학원
1995
[13]
서적
천국을 거닐다, 소쇄원: 김인후와 유토피아
사람의무늬
2014
[14]
논문
소쇄원 오곡문 담장 구조형태 해석에 관한 연구 : 담장 축석(築石)을 중심으로
상명대학교
2014
[15]
일반텍스트
[16]
일반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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