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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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묘사화는 조선 중종 때 사림파 조광조와 그의 개혁 정치를 지지하던 세력이 훈구파의 반발로 인해 숙청된 사건이다. 중종은 반정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 등 신진 사림을 등용하여 개혁을 추진했으나,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과 훈구파의 모함으로 인해 중종의 신임을 잃게 되었다. 훈구파는 '주초위왕' 사건을 조작하여 조광조를 제거하려 했고, 결국 조광조는 유배 후 사사되었으며, 사림파는 대거 숙청되었다. 기묘사화는 사림파의 정치적 좌절을 가져왔지만, 성리학 학문 발전에 영향을 미쳤으며, 후대 사림파에게 큰 교훈을 주었다.
기묘사화는 중종 재위 기간에 발생한 사화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파가 훈구파에 의해 숙청된 사건이다. 이 사화의 원인은 복합적이었는데,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517년(중종 12년) 조광조는 소격서 폐지와 향약 보급을 시작으로 보수 세력에 대한 개혁을 추진했고, 1519년(중종 14년)에는 현량과를 실시하여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샀다.[1]
2. 원인
연산군 때의 무오·갑자사화로 김종직의 제자들이 피해를 입어 유학이 쇠퇴하고 기강이 문란해졌다. 중종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惡政)을 개혁하고, 중종 반정 이후 권력을 남용하던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사류를 등용하고 성리학을 크게 장려하였다. 이때 조광조 등 젊은 선비들이 대거 등용되었다. 조광조는 김종직의 제자 중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가장 깊었던 김굉필의 제자로 한국 성리학의 정통(正統)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1515년(중종 10년) 성균관 유생 200여 명이 연명(連名)하여 그를 천거하였고, 안당도 그를 추천하여 6품 관직에 임명되었다.
사림파는 김종직이 출사한 이래 계속 중앙으로의 진출을 꾀하였고, 중종의 영입 노력을 적극 수용하였다. 1506년 이복형 연산군의 폭정에 대한 정변(중종반정 또는 박원종의 난)으로 국왕이 된 중종은 즉위 초에는 반정 공신 세력에 억눌려 정치 주도권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1510년(중종 5) 반정의 1등 공신인 훈구파 박원종이 죽자,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연산군 시대의 사화를 겪어낸 지방 출신의 젊은 사림파를 등용하였다. 중종은 아버지 성종을 본받아 신구 세력의 균형 위에 선 이상적인 정치를 지향하게 되었다.
중종의 신임을 얻은 조광조는 사헌부 대사헌에까지 발탁되어, 1515년(중종 10)부터 1519년(중종 14)까지 4년 동안 ‘도학 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급진적인 개혁을 실행했다. 1517년(중종 12) 소격서 폐지와 향약 보급을 시작으로 보수 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개혁을 단행했고, 1519년(중종 14)에는 현량과를 실시하여 훈구파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위훈 삭제 사건(僞勳削除事件)”이다. 1519년 가을, 조광조 등은 정승공신(反正功臣)의 수가 너무 많으니, 그중 76명의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국왕에게 주장했다. 위훈 문제를 통해 개혁 대상이 훈구파의 핵심 부분에 이르게 되자, 위기감을 느낀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파는 중종의 심리를 파악하면서 조광조 일파의 붕당 정치의 해악을 반복해서 상소했다. 또한 후궁을 이용하여 궁중 뽕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이라는 낙서를 하는 등의 공작을 통해 중종의 마음을 조광조로부터 떼어놓으려고 애썼다. 중종 자신도 경연(經筵) 자리에서 조광조가 장황하게 “도학 정치(道學政治)”의 이상을 이야기하고, 군주로서의 성인 통치(聖人統治) 실천을 요구하는 등, 그의 타협 없는 정치 자세를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다.[2]
2. 1.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
중종반정으로 집권한 훈구파는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고,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는 성리학적 이상 정치를 추구하며 훈구파의 권력 남용과 부패를 비판하여 대립하였다.[4]
연산군 때의 무오·갑자사화로 김종직의 제자들이 피해를 입어 유학이 쇠퇴하고 기강이 문란해졌다. 중종은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개혁하고, 중종 반정 이후 재산을 축적하고 권력을 남용하던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연산군 때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하고, 성리학을 크게 장려하였다.
이때 조광조 등 젊은 선비들이 대거 등용되었다. 조광조는 김종직의 제자 중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가장 깊었던 김굉필의 제자로 한국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사람이었다. 1515년(중종 10년) 성균관 유생 200여 명이 연명하여 그를 천거하였고, 이조판서 안당도 그를 추천하여 6품 관직에 임명되었다.
김종직이 출사한 이래 사림파는 중앙 진출을 꾀하였고, 중종의 영입 노력을 적극 수용하였다. 중종 반정으로 공신이 된 박원종, 유자광, 유순정, 성희안, 홍경주 등은 권력을 장악하여 세력을 확장했고, 이들의 권력 남용은 왕권을 넘보는 수준에 이르렀다.
훈구파 공신들의 월권행위에 제동을 걸 필요성을 느꼈던 중종은 새로운 대안 세력을 모색하게 된다. 중종 반정 이후 신료들 사이에 왕을 선택할 수 있다는(택군) 사상이 은연중에 조성되어 중종 등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사림파가 성리학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고려 이래 수 백 년간 장려하여 온 사장(詞章)의 학을 배척하자 남곤·이행 등의 사장파(詞章派)와 서로 대립하였다. 또한 현실을 돌보지 않고 주자학에 따라 종전의 제도를 급진적으로 혁파하려 하였고, 풍속·습관까지 바꾸려 했기 때문에 남곤, 심정, 정광필 등 보수파 훈구재상과 대립하였다.
정광필, 안당 등은 사림파에 우호적이었고 사림파 발탁에 힘을 기울였지만, 사림 인사들의 지나친 공세로 사이가 틀어졌다. 같은 사림인 김종직의 문인 남곤 역시 이들의 과격한 급진 개혁에 염증을 느꼈다.
당시 훈구 재상으로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모두 세력을 잃고 불평을 품게 되었다. 조광조 등이 '정국공신(靖國功臣) 가운데 공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니 공신호를 박탈하자'고 건의하여,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공신호를 박탈하자 훈신(勳臣)들은 모략·중상에 나섰고, 이는 조광조 일파가 화를 당하게 된 직접적 원인 중 하나였다.
2. 2.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
중종의 신임을 얻은 조광조는 1515년(중종 10)부터 1519년(중종 14)까지 사헌부 대사헌으로 재직하며 '도학 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2]
조광조는 1517년(중종 12) 소격서(도교 제사 담당 부서) 폐지와 향약 보급을 시작으로, 1519년(중종 14)에는 현량과(과거가 아닌 인재 추천 제도)를 실시하여 훈구파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4]
조광조 등은 성리학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고려 이래 장려된 사장(詞章)의 학을 배척했고,[3] 현실과 관계없이 주자학에 따라 기존 제도를 급진적으로 바꾸려 했다. 이로 인해 남곤, 심정, 정광필 등 훈구파 재상들과 대립했다.
2. 3. 중종의 변심
중종은 즉위 초, 중종 반정 공신 세력에 억눌려 정치 주도권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1510년(중종 5) 반정의 1등 공신인 훈구파의 박원종이 죽자,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등용하였다. 중종은 아버지 성종을 본받아 신구 세력의 균형 위에 선 이상적인 정치를 지향하게 되었다.[2]
조광조는 1510년 진사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중종은 그의 명성을 듣고 한눈에 매료되었다. 중종의 신임을 얻은 조광조는 단기간에 사헌부 대사헌에까지 발탁되어, 1515년(중종 10)부터 1519년(중종 14)까지 4년 동안 '도학 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여러 급진적인 개혁을 실행했다.
그러나 중종은 점차 조광조의 강경한 태도와 도학적인 언행에 부담을 느꼈다. 경연 자리에서 조광조가 장황하게 '도학 정치'의 이상을 이야기하고, 중종에게 군주로서의 성인 통치의 실천을 요구하는 등, 그의 타협 없는 정치 자세를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또한,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파는 중종의 심리를 파악하면서 조광조 일파의 붕당 정치의 해악을 반복해서 상소했다. 이들은 후궁을 이용하여 궁중 뽕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이라는 낙서를 하는 등의 공작을 통해 중종의 마음을 조광조로부터 떼어놓으려고 애썼다. 결국 이러한 훈구파의 모략과 참소는 중종의 변심을 부추겼고, 조광조를 숙청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3. 과정
조광조 등이 정국공신 중 76명의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한 "위훈 삭제 사건"은 훈구파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1]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은 중종에게 조광조 일파의 붕당 정치의 폐해를 계속해서 알리고, 후궁들을 이용하여 주초위왕 사건을 조작하여 조광조를 모함했다.[1]
중종은 조광조가 도학 정치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자신에게 성인(聖人) 통치를 실천하라고 요구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1] 1519년 11월, 조광조 등이 국왕에게 직접 상소하기 위해 농성을 시작하자, 중종은 조광조, 김정, 김식 등을 투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
3. 1. 주초위왕 사건
훈구파 세력인 홍경주, 김전, 고형산, 심정, 남곤 등은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와 경빈 박씨 등의 후궁들을 이용하여, 궁궐 안팎의 나뭇잎에 꿀을 발라 벌레들이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파먹게 했다. 이는 '조(趙)'씨 성을 가진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도록 꾸민 교묘한 함정이었다.
이 사건으로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잡아 가두었다. 이장곤(李長坤), 안당, 정광필 등이 이들을 변호하였으나, 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균관 유생 천여 명이 조광조 등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광화문 밖에 모였지만, 주모자들이 체포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3. 2. 사림파 숙청
훈구파인 홍경주, 김전, 고형산 등과 심정, 남곤 등은 조광조 일파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경빈 박씨 등 후궁들을 이용하여 조광조를 모함하는 소문을 퍼뜨리고,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새겨 중종에게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1]
북문으로 들어온 고관들은 비밀 회의를 열었고, 홍경주는 조광조 등이 당파를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중종에게 밀고하였다.[1]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을 잡아 가두었다.[1]
병조판서 이장곤과 좌의정 안당, 영의정 정광필 등이 조광조를 변호했지만, 중종은 듣지 않았다. 남곤은 유배나 파면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고, 이장곤과 안당은 오히려 옥에 갇혔다.[1]
성균관 유생 천여 명이 조광조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시위했지만, 주동자들이 체포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1]
결국 중종은 조광조를 능주로 유배 보낸 후 사사(賜死)하였고, 김정, 김식 등 핵심 인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 보냈다.[1]
4. 결과
기묘사화로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림파 인물들이 숙청되었다.[6]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갔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김정, 기준, 한충, 김식 등은 귀양 후 사형되거나 자살했다. 김구, 박세희, 박훈 등은 귀양을 갔다. 이들은 모두 30대의 젊은 인재들이었다. 이들을 옹호하던 안당과 김안국, 김정국 형제, 김세필은 파면되었다.
김전은 영의정, 남곤은 좌의정, 이유청은 우의정이 되었고, 현량과는 폐지되었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을 기묘명현이라 불렀다.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훈구파와 함께 조광조 일파 숙청에 가담했던 남곤은 훗날 사림에게서 인정받지 못하고 간신으로 매도되었다.
이 사건으로 사림들의 정치적 진출은 막혔으나, 성리학의 학문적 발전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4. 1. 정치적 영향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은 지지자였던 중종의 이반과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의한 사림파 탄압으로 좌절되었지만, 그의 이상주의적인 도학 정치 주장은 후대에 큰 교훈과 영향을 주었다.[6] 기묘사화는 사림파의 사상과 정치적 실천 자체가 문제되었던 사화(士禍)로, 사림파에 대한 영향 또한 광범위하고 심각했다.개혁 실패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당시 정치 체제가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고, 향약 실시 당시와 같이 상부의 개혁을 받아들일 토대가 지방에 아직 갖춰지지 않았던 점, 조광조의 정치 사상 자체가 경학 일변도의 답답한 것이었고 충분히 심화되지 못했던 점, 중종 자신의 군주로서의 정치 능력이 전대의 세종이나 성종에는 훨씬 못 미쳤던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조광조의 사상은 차세대 두 거유(巨儒)인 이황과 이이에 의해 성리학으로서 학문적 진화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선조 때 사림파가 정치 중추를 장악하게 되면서 조광조의 사상과 그 실천은 높이 평가되었고, 스승인 김굉필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정통적인 계승자로서 존경받고 제사를 받게 되었다.
4. 2. 학문적 영향
기묘사화는 사림파의 사상과 정치적 실천 자체가 문제되었던 사건으로, 사림파에 광범위하고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6] 개혁 실패의 원인으로는 미성숙한 정치 체제, 지방의 개혁 수용 기반 부족, 조광조 사상의 경학 일변도 및 미성숙, 중종의 정치 능력 부족 등이 꼽힌다.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은 중종의 지지 철회와 기묘사화로 인한 사림파 탄압으로 좌절되었지만, 그의 이상주의적인 도학 정치 주장은 후대에 큰 교훈과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에 의해 성리학(性理学)으로서의 학문적 진화 발전이 이루어졌다.
선조(宣祖) 때 사림파가 정치 중추를 장악하면서 조광조의 사상과 실천은 높이 평가되었고, 스승인 김굉필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정통적인 계승자로 존경받게 되었다.
5. 평가
기묘사화는 사림들의 정치적 진출을 막았지만, 성리학의 학문적 발전을 가져온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사림파의 사상과 정치적 실천 자체가 문제시되었던 만큼, 그 영향은 광범위하고 심각했다.[2]
개혁 실패의 원인으로는 당시 정치 체제의 미성숙, 지방의 개혁 수용 기반 미비, 조광조 정치 사상의 경학 일변도, 중종의 정치 능력 부족 등이 거론된다.[2]
이러한 평가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로 나뉘어 상세하게 다루어진다.
5. 1. 긍정적 평가
중종의 이반과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의한 사림파 탄압으로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은 좌절되었지만, 그의 이상주의적인 도학 정치 주장은 후대에 큰 교훈과 영향을 주었다.[2] 특히 선조 때 사림파가 정치 중추를 장악하게 되면서 조광조의 사상과 그 실천은 높이 평가되었고, 스승인 김굉필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정통적인 계승자로서 존경받고 제사를 받게 되었다. 그의 개혁 정신은 후대 사림파에게 계승되어 조선 사회의 개혁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5. 2. 부정적 평가
사림파는 성리학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고려 이래 수백 년간 장려해 온 사장(詞章)[3]의 학을 배척했고, 이는 남곤 등 사장파와의 대립을 불렀다. 또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주자학에 따라 기존 제도를 급진적으로 개혁하려 했으며, 풍속과 습관까지 바꾸려 했기 때문에 남곤, 심정, 정광필 등 훈구 재상들과 대립했다.정광필, 안당 등은 사림파에 우호적이었으나, 사림 인사들의 지나친 공세로 사이가 틀어졌다. 같은 사림이자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남곤 역시 이들의 과격한 급진 개혁에 염증을 느꼈다. 당시 훈구 재상 대부분은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아 불만을 품었다. 특히 정국공신(靖國功臣)[4] 중 자격 없는 이들의 공신호를 박탈하자는 조광조 등의 건의로 76명[5]의 공신호가 박탈되자, 훈신들은 모략에 나섰다.
조광조의 정치가 혁신성을 잃고 도학적 언행만 되풀이하자 중종의 총애도 식어갔다. 불만 많은 훈구파의 홍경주, 김전, 고형산 등과 심정, 남곤 등은 조광조 일파를 타도할 계획을 세웠다.
개혁 실패의 원인으로는 당시 정치 체제의 미성숙, 지방의 개혁 수용 기반 미비, 조광조 정치 사상의 경학 일변도, 중종의 정치 능력 부족 등이 꼽힌다.
6. 기타
참조
[1]
논문
안처겸 獄事와 정치범 伸寃 관행의 정착
부산경남사학회
[2]
문서
하나라·은나라·주나라
[3]
문서
시와 산문
[4]
문서
중종 반정 공신
[5]
문서
심정 (1471년)
[6]
문서
2년 후에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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