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철 (북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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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철은 북송 시대의 문인으로, 형 소식과 함께 당송팔대가로 꼽힌다. 1039년 쓰촨성 메이산에서 태어났으며, 1057년 형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다.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다가 유배를 겪었으며, 철종 때 복귀하여 문하시랑까지 올랐으나, 이후에도 여러 지역을 좌천당했다. 만년에는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다가 1112년에 사망했다. 소철은 유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문학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수필에 능하여 '황제에게 올리는 글'과 같은 작품을 통해 사회 비판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형 소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문학적, 사상적으로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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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9년 출생 -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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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순은 북송 시대의 문장가이자 정치 사상가로, 아들 소식, 소철과 함께 3소로 불리며 육경과 제자백가에 통달했고 전국시대풍의 문체와 유가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사상, 자주적인 국가 운영을 주장한 진보적인 정치 사상이 특징이다. - 당송팔대가 - 증공
증공은 북송 시대의 문인이자 당송팔대가 중 한 명으로, 지방관을 역임하며 민생 안정에 힘쓰고 국가 재정 문제에 날카로운 지적을 했으며, 실질적인 논의 전개가 특징인 문장으로 서발과 잡기 분야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소철 (북송)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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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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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소철 |
자 | 자유 |
호 | 동숙 |
출생 | 1039년 |
출생지 | 메이산 |
사망 | 1112년 |
직업 | 수필가, 역사가, 시인, 정치인 |
부모 | 소순 (아버지) |
친척 | 소식 (형) |
2. 생애
소식의 동생 소철은 1039년 2월 20일 현재의 쓰촨성 메이산 시에서 태어났다.[3] 1057년 19세에 형과 함께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 학위를 받았는데,[4] 이는 고위 관직에 오르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소철은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여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고 비판적인 글을 썼다.[5] 이로 인해 유배를 가기도 하고, 형 소식이 필화 사건에 휘말리면서 함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6] 철종 즉위 후 복귀하여 고위 관직을 역임했지만, 다시 지방으로 좌천되는 등 순탄치 않은 관직 생활을 보냈다.
1104년 소철은 허주에 거처를 마련하여 영빈유로(潁浜遺老)라 칭하며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경사제자(經史諸子) 연구에 전념했다.[7] 1112년 쉬저우에서 74세로 사망했다.[16] 사후 단명전학사를 추증받았으며, 남송 순희 연간에 문정(文定)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 1. 초기 생애
소식의 동생인 소철은 1039년 2월 20일에 현재의 쓰촨성 메이산 시에서 태어났다.[3] 1057년 19세에 형 소식과 함께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 학위를 취득했는데,[4] 이는 고위 관직에 오르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아버지인 소순을 수도에서 봉양하기 위해 형 소식이 임지(봉상부)에서 돌아온 후에야 대명부 추관이 되었다.2. 2. 관직 생활과 신법 반대
소철은 1057년 19세에 형 소식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 학위를 받았다.[4] 이는 고위 관직 진출의 필수 조건이었다. 상주 군사추관이 되었으나, 아버지 소순을 수도에서 봉양하기 위해 형 소식이 임지에서 돌아온 후에 대명부 추관이 되었다. 신종 때 삼사조례사의 속관이 되었으나, 왕안석의 청묘법에 반대하여 하남추관으로 전출되었으며, 제주 장서기를 거쳐 저작좌랑이 되었다.[5]1070년, 소철은 황제에게 법이 불변하기 때문에 법을 바꾸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이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왕안석의 개혁을 비판했다.
철종 즉위 후 비서성 교서랑으로 복귀했고, 우사간, 기거랑, 중서사인, 호부시랑을 역임했다. 이후 한림학사가 되어 권리부상서, 어사중승, 상서우승을 거쳐 문하시랑까지 승진했다.
소식은 왕안석이 이끄는 정치 파벌과 자주 대립하여 그를 비판하는 시를 썼는데, 정적들은 그가 황제를 비판한다고 주장하여 소식은 유배되었다. 소철은 형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오대의 시안"으로 형 소식이 죄를 얻었을 때 연좌되어, 균주 염주세, 적계 지현으로 좌천되었다.[6] 그 후 20년 동안 여주, 원주, 화주, 뇌주 등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좌천되는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종종 상소를 올려 간언했으나 황제의 뜻에 맞지 않아 여주 지주로 좌천되기도 했다. 원주 지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지에 도착하기 전에 조의대부로 강등되어, 난징을 거쳐 균주로 갔다. 휘종으로 교체된 후에도 영주, 악주 등 지방을 전전했다.
2. 3. 유배와 복귀
1070년, 소철은 황제에게 개혁이 현명하지 않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고 왕안석에게 새 법률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5] 이로 인해 소철은 산시성 준저우로 첫 번째 유배를 가게 되었다.[5] 1079년, 형 소식이 왕안석이 이끄는 정치 파벌과 대립하여 그를 비판하는 시를 썼다가 황제를 비판한다는 명목으로 감옥에 갇히고 유배되는 사건(오대의 시안)이 발생했다.[6] 소철은 형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연루되어 자신도 준저우로 유배되었다.[6]철종 즉위 후, 소철은 비서성 교서랑으로 복귀하여 우사간, 기거랑, 중서사인, 호부시랑을 역임하고 한림학사가 되었다. 이후 권리부상서, 어사중승, 상서우승을 거쳐 문하시랑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황제에게 올린 상소가 황제의 뜻에 맞지 않아 여주 지주로 좌천되었다.[16] 원주 지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지에 도착하기 전에 조의대부로 강등되어 난징을 거쳐 균주로 가게 되었다. 이후 화주, 뇌주, 순주 등 여러 지방을 전전했다.
휘종으로 교체된 후에도 영주, 악주 등 지방을 전전하다가 대중대부로 복귀하여 제거봉상상청, 태평궁으로 허주로 옮겨갔다. 숭녕 연간(1102년~1106년)에 관직을 사임하고 허주에 거처를 마련하여 영빈유로(潁浜遺老)라 칭하며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경사제자(經史諸子) 연구에 몰두했다. 1104년, 소철은 쉬저우에서 생활하며 1112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16]
2. 4. 은퇴와 죽음
1104년 소철은 인촨에 정착하여 사회적 소란 없이 평화로운 삶을 누렸다.[7] 숭녕 연간 (1102년 - 1106년)에 관직을 사임하고, 허주에 거처를 마련하여 영빈유로(潁浜遺老)라 칭하며 교류를 끊고, 종일 경사제자(經史諸子)를 연구했다. 1112년 쉬저우의 농장에서 사망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16] 향년 74세로, 단명전학사를 추증받았으며, 남송 순희 연간에 문정(文定)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후손 중 한 명인 쑤쉐린은 현대 중국의 유명한 수필가이자 소설가였다.3. 사상과 정치적 입장
소철의 작품은 그의 형인 소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소식 또한 유명한 작가였다. 소철의 작품은 항상 유교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는 맹자를 가장 존경했지만, 다양한 사람들에게서도 배웠다.[8]
아버지와 형처럼 소철은 당시 사회의 주요 문제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선배들의 경험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 했다. 이는 소철이 애국적인 작가였음을 보여준다.[8]
그는 '황제에게 올리는 글'에서 "요즘 가장 시급한 것은 재물이 없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는 아버지의 작품 '육국론'(六 國 論)과 같은 제목의 글을 썼다.[9] 그의 저서 '삼국지'에서 그는 유비와 유방을 비교했다. 그는 유비가 지혜와 용기가 부족했으며, 그 부족함으로 인해 승리했음을 알지 못했다고 생각했다.[10]
4. 문학적 업적
소철은 작품이 기(氣)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으며, 배움만으로는 작품을 쓸 수 없고, 기를 길러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기가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있는 핵심이라고 보았다. 내면의 수양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경험을 통해서도 기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철의 시는 형인 소식에 미치지 못하지만, 웅장하고 담박하며 침착하고 간결한 인품을 나타낸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글씨에도 능했다.
그의 저작은 다음과 같다.
제목 | 권수 |
---|---|
『집(集)』 | 50권 |
『후집(後集)』 | 24권 |
『삼집(三集)』 | 10권 |
『응조집(應詔集)』 | 12권 |
『시집전(詩集傳)』 | 20권 |
『춘추집해(春秋集解)』 | 12권 |
『논어습유(論語拾遺)』 | 1권 |
『맹자해(孟子解)』 | 1권 |
『고사(古史)』 | 60권 |
『용천략지(龍川略志)』 | 10권 |
『별지(別志)』 | 8권 |
『도덕경해(道德經解)』 | 2권 |
또한, 형인 소식을 사모하여, 형과 관련된 작품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형이 세상을 떠나 유해를 장례할 때, 장문의 묘지명 「망형자첨단명묘지명(亡兄子瞻端明墓誌銘)」을 지었다[22]。
4. 1. 산문
소철은 정치 평론과 역사 에세이에 능했다. 그는 '황제에게 올리는 글'에서 "요즘 가장 시급한 것은 재물이 없는 것이다"라고 썼다.[8] 그는 책 《신론(新論)》에서 "오늘날 세상의 일은 다스려져도 반드시 평안에 이르지 못하고, 혼란스러워도 반드시 위태로움에 이르지 않는다. 기강이 대략 세워져 시행되지 않으면, 급작스러운 변란은 없더라도 완만한 병폐가 있다."라고 썼다.그는 아버지의 작품 '육국론'(六國論)과 같은 제목의 글을 썼다.[9] 그의 저서 '삼국지'에서 유비와 유방을 비교했다. 그는 유비가 지혜와 용기가 부족했으며, 그 부족함으로 인해 승리했음을 알지 못했다고 생각했다.[10]
그의 에세이 스타일은 그의 생애 시기에 따라 변화했다. 정치 참여 전에는 '육국론'처럼 날카롭고, '삼국론'처럼 생생했다.[11] 지방 관리가 되면서 점차 논평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쪽으로 바뀌었고, 구조에 덜 신경 썼다. 당시 그의 열정은 숨겨져 있었고, 풍경과 인물을 생생하게 묘사했다.[12]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에세이는 정치 개혁 제안에 관한 것이었고, 실용적인 용도로 만들어졌다.[13] 말년에는 독서와 경험의 핵심 아이디어를 따랐다.[14]
소철은 수필가로서 특히 책론(策論)에 능했으며, 이는 그가 송나라에서 특별한 지위를 갖게 된 요인이었다. 그의 형 소식에 비하면 몇몇 면에서 부족했지만, 소식은 수철의 수필 업적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했다. 소철은 책론 외에도 정치 평론과 역사적 수필에도 능했다. "황제에게 올리는 편지"에서 그는 사회 혼란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백성들의 빈곤이라고 지적했다.[18] 아버지와 형처럼, 그의 모든 역사적 수필은 황제의 관심을 끌어 더 나은 발전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사회 상황을 비판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소철은 시, 사, 부의 시 형식에도 뛰어났지만, 글을 쓸 때 형을 따라잡으려 했으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소철의 두 저서 "춘추집기"와 "사기전"은 "시경" 연구에 중요한 혁신을 가져왔다.[19]
4. 2. 시와 기타
소철의 작품은 그의 형인 소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소식 또한 유명한 작가였다. 소철의 작품은 항상 유교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는 맹자를 가장 존경했지만, 다양한 사람들에게서도 배웠다.[8]아버지와 형처럼 소철은 당시 사회의 주요 문제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선배들의 경험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 했다. 이는 소철이 애국적인 작가였음을 보여준다.[8]
그는 '황제에게 올리는 글'에서 "요즘 가장 시급한 것은 재물이 없는 것이다"(今世之患,莫急于無財)라고 썼다.
그는 아버지의 작품 '육국론'(六 國 論)과 같은 제목의 글을 썼다.[9] 그의 저서 '삼국지'에서 그는 유비와 유방을 비교했다. 그는 유비가 지혜와 용기가 부족했으며, 그 부족함으로 인해 승리했음을 알지 못했다고 생각했다.[10]
소철은 수필가로서 특히 책론(策論)에 능했으며, 이는 그가 송나라에서 특별한 지위를 갖게 된 요인이 되었다. 그의 형 소식의 재능에 비하면, 그는 몇몇 면에서 부족한 점이 있었다.[17] 하지만 소식의 평에 따르면, 소철의 수필 업적은 결코 끝나지 않을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소철은 책론 외에도 정치 평론과 역사적 수필에도 능했다. 예를 들어, 그의 저서 "황제에게 올리는 편지"에서 그는 사회 혼란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오랫동안 백성들이 빈곤에 시달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今世之患, 莫急于无财).[18] 그의 아버지와 형과 마찬가지로, 그의 모든 역사적 수필은 황제의 관심을 끌어 더 나은 발전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사회 상황을 비판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소철은 시, 사, 부의 시 형식에도 뛰어났지만, 글을 쓸 때 형을 따라잡으려 했으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소철의 두 저서 "춘추집기"와 "사기전"은 "시경" 연구에 중요한 혁신을 가져왔다.[19]
5. 저작
소철의 작품은 그의 형인 소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소식 또한 유명한 작가였다. 소철의 작품은 항상 유교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는 맹자를 가장 존경했지만, 다양한 사람들에게서도 배웠다.[8]
아버지와 형처럼 소철은 당시 사회의 주요 문제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선배들의 경험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 했다. 이는 소철이 애국적인 작가였음을 보여준다.[8] 그는 '황제에게 올리는 글'에서 "요즘 가장 시급한 것은 재물이 없는 것이다"(今世之患,莫急于無財)라고 썼다.
그는 아버지의 작품 '육국론'(六 國 論)과 같은 제목의 글을 썼다.[9] 그의 저서 '삼국지'에서 그는 유비와 유방을 비교했다. 그는 유비가 지혜와 용기가 부족했으며, 그 부족함으로 인해 승리했음을 알지 못했다고 생각했다.[10] 소철의 시는 형인 소식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웅장하고 담박하며 침착하고 간결한 인품을 나타낸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글씨에도 능했다.
소철의 저작은 다음과 같다.
제목 | 권수 |
---|---|
『집(集)』 | 50권 |
『후집(後集)』 | 24권 |
『삼집(三集)』 | 10권 |
『응조집(應詔集)』 | 12권 |
『시집전(詩集傳)』 | 20권 |
『춘추집해(春秋集解)』 | 12권 |
『논어습유(論語拾遺)』 | 1권 |
『맹자해(孟子解)』 | 1권 |
『고사(古史)』 | 60권 |
『용천략지(龍川略志)』 | 10권 |
『별지(別志)』 | 8권 |
『도덕경해(道德經解)』 | 2권 |
또한, 형인 소식을 사모하여, 인생에서 형과 관련된 작품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형이 세상을 떠나 유해를 장례할 때, 장문의 묘지명 「망형자첨단명묘지명(亡兄子瞻端明墓誌銘)」을 지었다.[22]
6. 평가 및 영향
소철의 시는 형인 소식에 비해 웅장하고 담백하며, 침착하고 간결한 인품을 나타낸다고 평가받는다. 글씨에도 능했다.
소철의 저작은 다음과 같다.
제목 | 권수 |
---|---|
『집(集)』 | 50권 |
『후집(後集)』 | 24권 |
『삼집(三集)』 | 10권 |
『응조집(應詔集)』 | 12권 |
『시집전(詩集傳)』 | 20권 |
『춘추집해(春秋集解)』 | 12권 |
『논어습유(論語拾遺)』 | 1권 |
『맹자해(孟子解)』 | 1권 |
『고사(古史)』 | 60권 |
『용천략지(龍川略志)』 | 10권 |
『별지(別志)』 | 8권 |
『도덕경해(道德經解)』 | 2권 |
소철은 형인 소식을 사모하여 형과 관련된 작품을 남겼다. 특히 소식이 세상을 떠난 후 유해를 장례할 때 장문의 묘지명 「망형자첨단명묘지명(亡兄子瞻端明墓誌銘)」을 지었다.[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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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三苏祠博物馆
http://www.msxh.com/[...]
Msx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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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苏辙集
中华书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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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通史》(白寿彝主编)
http://www.xiexingcu[...]
Xiexingcun.com
2012-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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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诗人:苏辙-汉典诗词
http://sc.zdic.net/s[...]
Sc.zdic.net
2012-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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苏辙简介|生平
http://www.gushiwen.[...]
Gushiwen.org
2012-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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清明祭奠 苏辙-清明-四川文明网
http://jswm.newssc.o[...]
Jswm.newss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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苏 辙
http://www.jinan.gov[...]
Jinan.gov.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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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国学网-苏辙·六国论
http://www.confucian[...]
Confucianism.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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苏辙生平简介_苏辙资料_人物搜索_偶社
http://www.oushe.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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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浅论苏辙散文的演变和特色
福建论坛. 人文社会科学版
2006
[12]
논문
浅论苏辙散文的演变和特色
福建论坛. 人文社会科学版
2006
[13]
논문
浅论苏辙散文的演变和特色
福建论坛. 人文社会科学版
2006
[14]
논문
浅论苏辙散文的演变和特色
福建论坛. 人文社会科学版
2006
[15]
간행물
苏辙文章论
长沙大学学报
1993-03
[16]
웹사이트
http://www.zbjn.com/[...]
[17]
서적
中国通史第七卷 中古时代 五代辽宋夏金时期 (下册) 第四十章
上海人民出版社
[18]
서적
苏辙集, 栾城集卷二十一
[19]
서적
颖滨遗老传下
上海古籍出版社
[20]
서적
蘇潁濱年表
[21]
서적
蘇潁濱年表
[22]
역사
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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