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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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맹자는 공자 사상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인물로, 기원전 4세기 추나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선설을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주장하며, 민본주의와 혁명론을 제기했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사덕과 사단을 통해 도덕적 수양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맹자의 사상은 경제 사상에도 영향을 미쳐, 자유 무역과 평등한 세금 분담을 옹호했다.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주자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맹자의 생몰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지 약 100년 후 추나라(鄒) (현재 산둥성 쩌우청시)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노나라 환공(桓公)의 서장자(庶長子)인 경보(慶父)의 후손으로, 경보의 아들 오(敖) 대에 이르러 가문을 새로 세우고 맹(孟), 맹손(孟孫), 또는 중손(仲孫) 씨로 불렸다. 기원전 408년, 제나라가 맹씨의 식읍(食邑)이었던 성성(郕城)을 공격하면서 일가가 흩어졌고, 그중 일부가 노나라에서 추나라로 이주하여 맹자가 추나라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맹자의 저서로는 《맹자》 7편이 전해지나, 이는 맹자 본인보다는 그의 제자들이 편찬했을 가능성이 높다. 맹자 사상의 핵심에는 하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있다. 그는 하늘이 만물을 창조하고 만물을 지배하는 영원한 법칙을 세웠으며, 이 법칙을 인간 본성에 내재시켰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목적은 하늘이 부여한 이 선한 본성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2. 생애
맹자가 주로 활동한 시기는 기원전 4세기 전반기로 여겨진다. 맹자의 어머니 급(伋) 씨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고사로 유명하다. 이 이야기는 전한 시대 학자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에 실려 널리 알려졌으나, 역사적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처음에는 묘지 근처에 살았는데 맹자가 장례 흉내를 내자 시장 근처로 옮겼고, 그곳에서 상인 흉내를 내자 다시 학문소 근처로 이사하여 비로소 안심했다는 내용이다. 현재 쩌우청시에는 맹모삼천사가 세워져 있다. 또한, 맹자가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짜던 베를 칼로 끊으며 "네가 학문을 중도에 그만두는 것은 내가 이 베를 끊는 것과 같다"고 꾸짖어 다시 학문에 정진하게 했다는 맹모단기(孟母斷機) 고사도 전해진다. 이 역시 한나라 시대의 《한시외전》과 《열녀전》에 나오는 전설이다.
맹자는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로 가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기원전 481년경 ~ 402년경)의 문하(혹은 그 학파)에서 육경을 배웠다. 《사기》 「맹자순경열전」에는 자사에게 직접 배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연대가 맞지 않아 자사의 제자에게서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 자사의 학파는 공자에게서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던 '천(天)'의 관념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제자백가가 경쟁하던 시대에 맹자는 묵자와 양주의 사상에 맞서 유가 사상을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40세 이후에는 인정(仁政)과 왕도정치를 주장하며 천하를 주유했다.[4] 그는 자신을 왕의 스승이자 빈객으로 여겨 수십 대의 수레와 수백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며 제후와 동등하다는 자부심을 보였다. 그러나 법가나 종횡가가 득세하던 당시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고,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은퇴했다. 60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맹자는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자신의 정치 이상을 설파했다. 전국 시대(기원전 475년경 ~ 221년) 동안, 기원전 319년부터 312년까지 제나라의 직하 학궁에서 관료이자 학자로 일했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제나라에서 공식적인 직무를 3년 동안 휴직하며 효도를 실천했다. 당시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한 것에 실망하여 공직에서 물러났다.[5]
위나라의 혜왕이 진나라와 제(齊)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을 방법을 묻자, 맹자는 인자무적(仁者無敵), 즉 인정을 베풀면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다고 답했다. 인정이란 형벌을 줄이고 세금을 가볍게 하며, 백성들이 농사에 힘쓰도록 하고 젊은이들에게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정치를 받은 백성은 나라를 위해 용감히 싸우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의 백성은 임금을 배반하게 된다는 것이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인(仁)을 확장했는데,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제자 유자의 말 "효도와 공경은 인의 근본이다(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중국어)"를 바탕으로, 『맹자』 「이루편」에서 "인의 실천은 부모를 섬기는 것이고, 의의 실천은 형을 따르는 것이다(仁之實 事親是也 義之實 從兄是也중국어)"라고 하여 효제(孝悌)를 인의(仁義)의 구체적인 실천 덕목으로 강조했다. 그는 스스로 공자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부했다.
혜왕 사후 아들 양왕이 즉위하자, 맹자는 그를 보고 "임금의 풍모가 아니다(望之不似人君중국어)"라고 평하며 실망하여 제(齊)나라로 떠났다. 당시 제나라에는 선왕이 즉위해 있었다. 맹자는 제나라에서도 국빈 대우를 받기를 원했으며, 단순히 봉급만 받는 직하의 학사들과 동등하게 취급받기를 거부했다. 그는 『맹자』 「만장편」에서 "문지기나 야경꾼도 정해진 직책이 있어 녹을 받는데, 직책 없이 녹을 받는 것은 불경하다(守門擊柝者 皆有常職以食於上 無常職而賜於上者 不恭也중국어)"고 주장하며,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왕이 직접 찾아오기를 요구했다. 그는 자신을 "불려가지 않는 신하(所不召之臣중국어)"로 여겼다. 심지어 춘추 시대 제나라 환공을 도와 패자로 만든 명재상 관중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었다며, "관중조차도 함부로 부를 수 없는데, 하물며 관중만 못한 자를 어찌 부르겠는가?(管仲且猶不可召 而況不爲管仲者乎중국어)"라고 말하며 자신은 관중이나 은나라 탕왕을 보좌했던 이윤보다도 높게 평가했다.
한때 제나라에 머물던 시기, 인접국 연나라에서 자지가 난을 일으키자 제 선왕에게 이를 보고하여 난을 진압하도록 조언하기도 했다.
어느 날 선왕이 은나라의 신하였던 무왕이 군주인 주왕을 토벌하고 주나라를 세운 사건에 대해 묻자, 맹자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20]
: 인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하며, 잔적(殘賊)한 자를 일개 필부(一夫)라고 한다. 나는 일개 필부인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賊仁者謂之賊 賊義者謂之殘 殘賊之人 謂之一夫 聞誅一夫紂矣 未聞弑君也중국어)
이는 인의(仁義)를 잃은 군주는 더 이상 군주가 아니며, 폭군을 제거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혁명 사상을 보여준다.
또한 선왕이 대신의 역할에 대해 물었을 때, 맹자는 왕족인 귀족 경(卿)과 타성(他姓)인 이성 경(卿)의 역할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귀족 경은 군주에게 큰 잘못이 있으면 간언하고, 거듭해도 듣지 않으면 군주를 교체해야 한다(君有大過則諫 反覆之而不聽 則易位중국어)고 주장했다. 왕족으로서 나라를 바로잡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선왕은 얼굴색이 변할 정도로 놀랐다. 반면 이성 경은 군주에게 간언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 나라를 떠나야 한다(君有過則諫 反覆之而不聽 則去중국어)고 말했다. 전국 시대에는 신하가 자유롭게 다른 나라 군주를 섬기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맹자와 선왕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7~8년이 지난 어느 날, 선왕은 병을 핑계로 맹자를 불렀으나, 맹자 역시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다음 날 맹자가 조문을 위해 외출하자, 이를 알게 된 제자 공손추는 왕명을 거절한 다음 날 외출하는 것은 오해를 살 수 있다고 만류했다. 하지만 맹자는 "어제는 병이었지만 오늘은 나았으니 가야 한다(昔者辭以病 今日弔 或者不可乎중국어 ... 昔者疾 今日癒 如何不弔중국어)"며 외출했다. 이 사이 선왕이 병문안 사자와 의사를 보냈고, 집에 있던 제자 맹중자는 당황하여 맹자가 입궐했다고 둘러댔다. 이후 사자를 보내 맹자에게 귀가하지 말고 바로 입궐하라고 전했으나, 맹자는 친구 경추의 집에 머물렀다. 이 일로 왕명을 따르지 않은 맹자를 경추가 비난했고, 맹자와 선왕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맹자는 제나라를 떠날 결심을 굳혔다.
맹자가 떠나려 하자 선왕이 직접 찾아와 다시 만날 수 있겠냐고 물었고, 맹자는 "감히 청하지는 못하지만 원래 바라는 바입니다(不敢請耳 固所願也중국어)"라고 답했다. 선왕은 희망을 가지고 제자 진자를 통해 맹자에게 도성 내 큰 저택과 문하생 양성을 위한 만 종(鍾)의 녹봉을 제안하며 조정 대신들에게 맹자를 존경하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그러나 맹자는 이를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를 부유하게 하려 한다면 십만 종을 사양하고 만 종을 받겠는가? 이것이 어찌 부유해지려는 것이겠는가? (如使予欲富 比辭十萬而受萬 是爲欲富乎중국어)
이는 진정으로 자신의 능력을 써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그에 합당한 대우(십만 종)를 해야 하며, 만 종 정도로는 자신의 뜻을 펼 수 없다는 의미였다. 또한 시장의 이익을 독점하려는 비천한 상인의 예를 들며 자신은 그런 이익을 탐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강조했다.[21]
: 옛날 시장에서는 물물교환을 통해 서로 필요한 것을 얻었다. 그런데 비천한 자가 나타나 높은 곳에 올라 시장의 이익을 독점하려 하니 사람들이 모두 천하게 여겨 세금을 매기게 되었다. (古之爲市也 以其所有 易其所無者 有司者治之耳 有賤丈夫焉 必求龍斷而登之 以左右望 而罔市利 衆人皆以爲賤 故從而征之중국어)
결국 맹자는 제나라를 떠났다. 떠나는 길에 주(晝)라는 곳에서 사흘이나 머물렀는데, 이를 두고 제나라 사람 윤자는 맹자가 선왕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해놓고 미련을 두는 것처럼 보인다며 실망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맹자는 윤자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22]
: 내가 사흘을 머물다 주(晝)를 떠난 것도 내 마음에는 오히려 빠르다고 생각했다. 왕께서 마음을 고쳐 나를 다시 부르시기를 바랐다. 왕께서 만약 나를 다시 부르셨다면 어찌 내가 왕을 버렸겠는가? 주(晝)를 나왔는데도 왕이 나를 뒤쫓아오지 않았으므로 나는 비로소 돌아갈 뜻을 굳혔다. (夫晝 我三宿而後出晝 是以猶遲 以俟夫王之改行也 王如改行 則必反予 夫出晝而王不予追也 吾然後浩然有歸志 我雖然 豈舍王哉중국어)
이는 선왕이 마음을 바꿔 자신을 다시 등용하여 제나라 백성들에게 이로움을 주기를 기다렸으나, 결국 부름이 없었기에 떠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윤자는 여전히 맹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선비는 참으로 소인배로다(士誠小人也중국어)"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맹자는 쩌우청시 중심부에서 북동쪽으로 약 12km 떨어진 맹자림(孟子林|멍쯔린중국어)에 묻혔다. 그의 무덤 앞에는 거대한 돌거북이 용 모양으로 장식된 비석을 지고 서 있다.[6]
3. 맹자의 사상
공자가 인(仁)과 예(禮)를 통한 인간의 주체적 덕성을 강조했다면, 맹자는 이를 하늘의 법칙성이 내재된 인간의 '본성'으로 파악하고,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다. 이는 전통적인 하늘 숭배 사상을 바탕으로 공자의 사상에 종교적 기초를 더한 것으로 평가된다. 맹자는 성선설의 근거로 인간 마음에 선천적으로 내재된 사단(四端), 즉 측은지심(惻隱之心, 인), 수오지심(羞惡之心, 의), 사양지심(辭讓之心, 예), 시비지심(是非之心, 지)을 제시했다. 이는 공자의 '인' 개념을 구체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맹자는 인간 관계의 기본 원리로 '오륜(五倫)'(부자유친 父子有親, 군신유의 君臣有義, 부부유별 夫婦有別, 장유유서 長幼有序, 붕우유신 朋友有信)을 제시했다.
정치적으로는 공자의 덕치주의를 계승하여 하늘의 뜻(천명, 天命)과 백성의 뜻(민본주의, 民本主義)에 기반한 왕도(王道) 정치를 주장했다. 통치자는 백성의 민생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고 인륜(人倫) 교육을 통해 인정(仁政)을 베풀어야 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천명관(天命觀)에 근거하여, 백성의 뜻을 저버리고 폭정을 행하는 군주는 이미 군주가 아니므로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을 긍정했다. 상나라 주왕의 예를 들며, 주나라 무왕의 토벌은 군주 시해가 아니라고 정당화했다. 다만 이러한 혁명론은 주나라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맹자 스스로 강조한 군신유의(君臣有義) 원칙과 상충될 수 있다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10]
맹자는 500년마다 성인이 출현한다는 순환론적 역사관을 통해 요·순에서 탕왕, 문왕을 거쳐 공자로 이어지는 도통(道統)을 설명하고, 자신이 공자의 도를 계승한다고 자임했다. 교육에 있어서는 단순 암기보다 타고난 능력을 일깨우고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중시했으며, 운명은 정해진 숙명이 아니라 올바른 길을 갈 때 열리는 가능성으로 보았다.
3. 1. 성선설 (性善說)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다. 그는 하늘이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낳고 만물에 영원불변의 법칙을 부여했으며, 인간에게는 이 하늘의 법칙성, 즉 선한 본성이 내재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목적은 하늘이 정한 이 선한 본성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자가 인(仁)을 강조하고 '예(禮)'를 실천하는 인간의 주체성에서 덕성(德性)을 찾았다면, 맹자는 이를 인간이 본래 갖춘 하늘의 법칙성, 즉 '본성'으로 규정했다. 맹자는 공자의 '인'을 계승하면서도, '의(義)'를 함께 강조하여 '''인의(仁義)'''를 설파했다. '인'이 충서(忠恕)(진심과 배려, 이타주의)라면, '의'는 이성에 따라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마땅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간의 마음에는 선천적으로 사덕(四德)의 네 가지 실마리, 즉 사단(四端)이 갖추어져 있다고 설명했다.사단(四端) 설명 연결되는 덕(德) 측은지심(惻隱之心) 남의 어려운 처지를 그냥 보아넘기지 못하는 마음, 사회적 약자를 동정하는 마음 인(仁) 수오지심(羞惡之心)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의(義) 사양지심(辭讓之心) 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 예(禮)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 지(智)
맹자는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누구든 순간적으로 구하려는 마음이 드는 것을 예로 들며, 이는 이익이나 명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본래 측은지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단은 공자가 말한 '인'을 보다 구체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맹자는 이 네 가지 마음을 잘 보존하고 키워나가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음을 다하는 자는 자신의 본성을 안다"[7]고 했으며, "학문의 길은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과 같다"[8]고 하여 수양을 통해 본성을 회복할 것을 강조했다.
당시 사상가였던 고자는 인간의 본성이란 정해진 것이 없으며(성무선악설, 性無善惡說), 물이 흐르는 방향이 제방이 터지는 곳에 따라 달라지듯 외부 환경이나 통치자의 영향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행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인간에게 선천적인 공통된 본성은 없거나 알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맹자는 물이 동서로는 흘러도 아래로 흐르는 본성은 변하지 않듯[23], 인간의 행동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은 외부의 영향(외물) 때문일 뿐, 인간에게는 선한 '본성'이 존재한다고 반박했다. 이기적인 행위는 자연재해나 사회적 혼란 같은 외부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한 본성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맹자는 "대인(덕이 높은 사람)이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적자지심, 赤子之心)을 잃지 않는 자이다[20]"라고 말하며, 학문과 수양을 통해 잃어버린 선한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23]
맹자의 성선설은 종종 순자의 성악설과 비교된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욕망이며, 그대로 두면 다툼이 일어나므로 교육과 예의와 같은 후천적인 노력("위(僞)", 인위적인 것)을 통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공공선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맹자 역시 인간이 사단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이를 노력하여 기르지 않으면 금수(사회성을 갖지 못한 동물)와 다를 바 없다고 보았다. 즉, 인간이 가진 선성을 절대적으로 긍정한 것은 아니며, 학문과 도덕 수양을 통해 군자가 되어야 백성을 지도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맹자와 순자 모두 교육과 수양을 통해 덕을 함양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에 두고 있다는 점은 같다. 차이점은 맹자가 인간의 주체적인 노력과 내면의 선한 본성 발현을 통해 사회 전체를 개선할 수 있다는 유심주의적이고 낙관적인 입장을 취한 반면, 순자는 군주가 먼저 제도와 예라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인간을 선하게 이끌어야 한다는 사회 체제 중시의 입장을 취했다는 점이다. 맹자의 사상은 후대에 주자학과 같은 주관 중심주의 철학으로 이어졌고, 순자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인 한비 등에 의해 법가 사상으로 발전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성선설은 맹자의 정치 사상인 왕도론과 민본주의의 기초가 된다. 모든 인간이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통치자는 백성들의 선한 본성이 잘 발현될 수 있도록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인정, 仁政)고 주장했다. 또한 백성(민, 民)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라고 보아, 민의를 배반하는 폭군은 역성혁명을 통해 교체될 수 있다는 사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는 서경에서 나타나는 천명관(天命觀)을 계승하면서도 백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원문 소스에서는 맹자가 제시한 역성혁명의 논리가 주나라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으며 이는 맹자 스스로 주장한 군신유의(君臣有義) 원칙과 상충될 수 있다는 비판적 시각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3. 2. 왕도정치 (王道政治)와 민본주의 (民本主義)
맹자는 공자의 덕치주의 사상을 계승하여 하늘의 천명(天命) 사상과 결부시켜 발전시켰다. 그는 하늘이 만민을 낳고 그 통치자로서 덕 있는 자(유덕자)를 천자(天子)로 임명한다는 서경 이래의 천명관(天命觀)을 통해 정치권력의 정통성을 설명했다. 특히 하늘의 뜻은 백성의 소리를 통해 알 수 있다고 보아 민본주의(民本主義) 사상을 강조했다.[10]
맹자는 백성의 농사를 방해하는 노역이나 전쟁을 피하고, 먼저 백성의 생활(민생, 民生) 안정을 꾀한 뒤 도덕 교육을 통해 인륜(人倫)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정치를 '인정(仁政)'이라 불렀으며, 이것이 바로 옛 성왕(聖王)들이 행했던 '왕도(王道)' 정치라고 주장했다. 맹자는 이러한 왕도 정치를 통해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이 천하를 얻는 길이라고 설파했다.
그는 당시 군주들의 정치를 '왕도'와 '패도'로 나누어 설명했다. 패도(覇道)는 무력에 의존하여 일시적으로 인(仁)을 행하는 척하는 정치로, 강대한 국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반면 왕도(王道)는 덕(德)으로써 참된 인정을 베푸는 정치이며, 작은 나라라도 백성과 다른 나라들이 그 덕을 사모하여 마음으로 복종하게 된다고 보았다. 맹자는 춘추 오패는 삼왕(하의 우, 은의 탕, 주의 문왕 또는 무왕)의 죄인(즉, 삼왕의 이상을 제대로 잇지 못한 이들)이라고 평가하고, 당시 전국 시대 제후들을 비판하며 요·순과 삼왕이 행했던 왕도 정치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양나라 혜왕이 이익을 통해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 묻자, 맹자는 군주는 이익(리, 利)이 아닌 인(仁)과 의(義)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답했다. 왕도 정치를 실현하면 자국 백성뿐 아니라 다른 나라 백성들까지 왕을 따르게 되어 아무도 그 나라를 침략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며, 백성에게 이로운 것을 베풀고 해로운 것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그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인정을 베푸는 군주에게는 천하에 적이 없다고 말하며, 결국 천하의 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10] 제나라 선왕에게는 왕도를 행하면 천하의 관리, 농부, 상인, 여행객들이 모두 모여들 것이며, 억압받는 다른 나라 백성들까지 그에게 와서 호소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나라는 부유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된 후에야 효, 제, 충, 신과 같은 유교적 덕목을 가르칠 수 있다고 보았다.
맹자는 국가 운영에서 백성의 중요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다. 그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국가)은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중국어)고 단언했다.[11] 이는 백성이 존재하기에 군주가 있는 것이지, 군주를 위해 백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급진적인 주장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백성의 필요를 무시하고 폭정을 일삼는 군주는 더 이상 진정한 군주가 아니므로, 백성이 그를 몰아내거나 심지어 죽이는 것까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으로 이어졌다. 맹자는 상나라의 폭군 주왕의 몰락을 예로 들며, "나는 필부(匹夫)인 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군주를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하여,[10] 민의를 배반한 통치자는 군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고 보았다.
다만 이러한 역성혁명론은 왕조 교체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주관적 해석의 여지가 있으며, 신하가 군주를 몰아내는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될 수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맹자 자신이 강조한 오륜(五倫) 중 하나인 군신유의(君臣有義)와 충돌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10] 그럼에도 맹자의 민본주의와 왕도정치 사상은 군주의 절대 권력을 상대화하고 백성의 권리와 민생 안정을 정치의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맹자는 또한 군주가 의(義)를 추구하는 군자(君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익(利)만을 좇는 소인(小人)과 구별했다. 그는 군자가 도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안정적인 생업을 유지할 수 있는 "항산(恒産)", 즉 영구적인 재산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보았다.[11] 이를 위해 자유 무역, 낮은 세율, 공평한 세금 부담 분담 등을 통해 백성의 경제적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2] 특히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자유방임주의), 독점을 방지하며,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없애 교역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보았다.[13] 토지세는 누진세 방식으로 부과하여 공평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13] 또한 천연자원은 미래 세대를 고려하여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5]
3. 3. 혁명론 (革命論)
맹자는 공자의 덕치주의 사상을 하늘이 만민을 낳고 그 통치자로서 덕 있는 자를 천자(天子)로 임명한다는 《서경》 이래의 천명관(天命觀)으로 뒷받침했다. 이는 하늘에 대한 신앙을 통해 정치 권력의 정통성에 기초를 부여하는 사상이다. 맹자는 하늘의 뜻은 백성(民)의 소리와 천지의 제신(諸神)의 승인을 통해 알 수 있다고 보아 민본주의(民本主義)적 요소를 더했다.
그는 농사에 방해가 되는 노역이나 전쟁을 피하고, 먼저 백성의 삶(民生)을 안정시킨 뒤 도덕 교육을 통해 인륜(人倫)의 길을 가르치면 천하 사람들이 기뻐하며 복종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옛 성군(聖王)들의 정치, 즉 '인정(仁政)'이자 '왕도(王道)'라는 것이 맹자의 '왕도론'이다.
또한 맹자는 《서경》에서 강조된 은·주 교체기의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을 긍정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백성의 뜻(民意)을 저버리고 인(仁)과 의(義)에 어긋난 행위를 한 은나라 주왕은 이미 군주가 아니라 한 명의 필부(匹夫)에 불과하다. 따라서 은나라의 신하였던 주나라 무왕이 필부인 주왕을 토벌한 것은 군주를 시해(弑逆)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군신의 관계보다 상위의 가치로서 천명(天命)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맹자는 정치 원리로서 하늘의 역할을 명확히 설명함으로써 이 부분에서는 공자보다 더 나아갔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백성을 배반하고 인(仁)과 의(義)에 어긋났다'는 판단이 주관적일 수 있으며, 왕이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는 신하들에게 쿠데타의 명분을 제공할 수 있다는 비판도 있다. 이는 맹자 스스로 강조한 오륜 중 하나인 '군신유의(君臣有義)'와 충돌할 여지가 있으며, 역성혁명 사상이 쿠데타 세력에게 자기 합리화의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맹자 자신은 '혁명'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천명설은 후대 역성혁명 이론의 중요한 기초를 마련했다.
맹자에 따르면, 순이 천하를 다스리게 된 것은 요로부터 직접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천하를 주는 것은 오직 하늘만이 할 수 있으며, 천자라 할지라도 하늘의 뜻(천명)을 거슬러 천하를 주고받을 수는 없다. 하늘의 뜻은 백성들의 지지를 통해 나타난다. 즉, 백성이 특정 인물을 천자로 인정하고 그의 통치에 만족하는지가 천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은의 탕왕이 하의 걸왕을 몰아내고, 주의 무왕이 은의 주왕을 정벌한 것 역시 신하가 군주를 시해한 사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걸왕과 주왕이 비록 천자의 혈통을 이었더라도, 통치자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않고 폭정을 일삼았기 때문에 이미 통치자로서의 정당성, 즉 천명을 잃었다는 것이다.
제자 만장이 우 이후 현자인 익 대신 아들 계가 왕위를 계승하여 세습이 시작된 것이 덕이 쇠퇴했기 때문이 아니냐고 묻자, 맹자는 이를 명확히 부정했다. 현자가 자리를 잇든 아들이 잇든 모두 천명에 따른 것이며, 둘 사이에 우열은 없다고 설명했다. 맹자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당의 요는 선양하고, 하후·은·주는 잇는 것도, 그 의리는 하나이다"(만장장구상)라고 말했다. 따라서 세습된 자리라 할지라도 하늘에 의해 폐위되는 경우는 걸왕이나 주왕과 같은 잔적(殘賊)뿐이라고 한정했다.
이러한 맹자의 논리는 당시의 종교적 권위를 논증에 개입시키고 있지만, 그 내용과 목적 면에서는 약 2000년 후 유럽의 계몽주의 시대에 등장한 '''사회 계약론'''과 유사한 측면을 지닌다.
3. 4. 경제 사상
맹자의 경제 사상은 그의 왕도 정치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백성들의 기본적인 삶, 즉 민생의 안정을 정치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맹자는 통치자가 농사를 방해하는 과도한 노역이나 잦은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먼저 백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안정시킨 후에야 인륜에 따른 도덕 교육을 효과적으로 시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안정된 삶 속에서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통치자를 신뢰하고 따르게 되며, 이것이 바로 성왕들이 펼쳤던 인정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는 백성의 경제적 안정을 중시하는 민본주의적 관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4. 영향
맹자는 국가 운영에서 백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유교에서는 통치자를 높이 평가하지만, 맹자는 백성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가혹하게 다스리는 통치자는 백성들이 몰아내거나 심지어 죽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의롭지 못한 통치자는 더 이상 진정한 통치자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포악한 주(상)왕의 몰락을 언급하며 "나는 폭군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지만,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10]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유교 철학의 적용으로 이해해야 한다. 유교는 각 사회적 관계에서 기대되는 역할을 명확히 한다. 통치자는 백성에게 자비를 베풂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정당화해야 하며, 그래야 백성으로부터 충성을 기대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왕은 백성을 위한 관리자와 같다. 공자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왕을 존경했지만, 맹자는 인간 사회의 올바른 위계질서를 강조하며 왕 역시 백성과 사회의 자원에 의존하는 존재임을 분명히 했다.
맹자는 의(義)와 인(仁)의 덕을 알고 실천하는 군자(君子)와 그렇지 못한 소인(小人)을 구분했다. 그는 군자는 이익이 아닌 의로움만을 생각한다고 보았다. 또한 백성들의 기본적인 생활 안정을 위해 "항산(恒産)", 즉 영구적인 재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1] 이를 바탕으로 그는 사회적 약자와 노인을 위한 복지를 보장하기 위해 자유 무역을 장려하고, 세율을 낮추며, 보다 공평하게 세금 부담을 나누는 정책을 옹호했다.[12]
맹자는 시장에 대해 정부가 최소한으로 개입하는 방식을 선호했다.[13] 이는 국가가 운영하는 독점을 막고, 장차 발생할 수 있는 민간 독점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시장은 부족한 물건을 교환하는 곳이므로 수입품에 세금을 매기는 것은 결국 백성들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이는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선하고 합리적이어서 스스로 규제할 수 있으며, 가격 담합이나 사기와 같은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한다. 재산세는 인정되었으며, 국가가 세금을 거두는 주요 수단이 되어야 했다. 세금은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는 용도로만 사용되어야 하므로 많이 걷을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13] 또한, 세금은 누진적으로 부과되어 더 넓고 비옥한 토지를 가진 사람이 균일하게 토지를 분배받은 사람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했다. 맹자는 자원의 희소성 문제에 대해, 자원을 부족한 것이 아니라 풍부한 것으로 여기고, 근면한 노동을 통해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14] 천연자원은 다음 세대를 위해 성장이나 재생산 주기에 맞춰 사용하고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5]
맹자의 유교 해석은 후대 중국 철학자들, 특히 송나라 시대 신유학자들에게 정통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제자 중에는 여러 제후국의 군주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공자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평가도 있다.[16]
맹자는 주희(1130–1200)에 의해 사서 중 하나로 묶여 신유학 사상의 핵심 경전이 되었다. 간결한 어록 형식의 논어와 달리, 『맹자』는 긴 대화와 논쟁 형식의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기 예수회 선교사들은 신유학을 불교와 도교의 영향으로 변질된 유교로 여겨 『맹자』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특히 마테오 리치는 맹자가 독신주의를 비판한 것을 불효(不孝)로 오해하여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프랑수아 노엘은 주희의 사상이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라고 보고, 1711년 프라하에서 『맹자』 완역본을 출판했으나 당시 중국 전례 논쟁으로 예수회의 입지가 약화되어 그의 번역본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중국 내에서 맹자의 지위는 송나라 이전까지는 그리 높지 않았다. 당나라 중기 한유가 『원도(原道)』에서 맹자를 전국 시대 유학자 중 유일하게 공자의 도통(道統)을 계승한 인물로 평가하면서 그의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북송 신종 희녕 4년(1071년)에는 『맹자』가 처음으로 과거 시험 과목에 포함되었고, 원풍 6년(1083년)에는 '추국공(鄒國公)'으로 추증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공자묘에 배향되었다. 남송의 주희는 『맹자』를 『대학』, 『중용』과 함께 사서로 묶어 그 지위를 오경보다 높게 평가했다. 원나라 지순 원년(1330년)에는 '아성공(亞聖公)'으로 추증되어 공자 다음가는 성인, 즉 '아성(亞聖)'으로 불리게 되었다.
맹자의 혁명 사상은 일본의 만세일계(万世一系) 국체관과 맞지 않아 기피되기도 했다. 명나라 시대 중국 항해자들 사이에서는 맹자 책을 싣고 일본으로 가면 배가 침몰한다는 속설이 돌기도 했다. 일본에서 맹자의 지위는 에도 시대 이전까지 높지 않았으며, 일본의 연호 중 『맹자』를 출전으로 삼은 사례는 아직 없다. 그러나 에도 시대 이후 하야시 라잔,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토 진사이, 요시다 쇼인, 사이고 다카모리 등 일부 지식인들이 맹자를 탐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4]
1978년에 출간된 한 책에서는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을 선정했는데, 맹자는 92위에 올랐다.[17]
5. 비판
공자나 후대의 주희, 왕양명 등과 달리, 맹자는 무인이 아니었고 병학(兵學)을 배우지 않았으며 군사 지휘 경험이 없다. 그의 저서에는 육예(六藝)와 같은 실학적 교양에 대한 언급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 또한, "맹모삼천(孟母三遷)" 고사가 사실이라면, 이는 공자가 군자의 교양으로 강조했던 육예를 모욕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묘지에서의 예(禮)는 육예의 첫 번째이고 시장에서의 수(數)는 여섯 번째인데, 맹자의 어머니가 이를 천한 것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맹자가 특정 가치관에 편중된 교육을 받았을 수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맹자의 천명사상, 특히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이론은 공자 사상에도 그 뿌리가 있어 반드시 유교의 도통에서 벗어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일본의 만세일계(万世一系)로 대표되는 국체관(国体観)과 충돌하는 측면이 있었다. 이 때문에 명나라 시대 중국 항해자들 사이에서는 맹자의 책을 싣고 일본으로 향하는 배는 침몰한다는 속설이 돌기도 했다.
실제로 일본에서 맹자의 지위는 에도 시대 이전까지 그리 높지 않았으며 오히려 기피되는 경향이 있었다. 일본의 연호(元号)는 대부분 사서오경을 출전으로 삼지만, 『맹자』에서 유래한 연호는 아직까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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