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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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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군비는 고려 시대의 무신으로, 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몽골과 일본 간의 외교에 관여했으며, 무신정권 붕괴 이후 삼별초 항쟁 시기에는 고려 조정에 협력한 인물이다. 1256년 몽골의 침입 당시에는 이광과 함께 수군을 이끌고 몽골군을 격퇴했으며, 1266년에는 몽골의 요청에 따라 일본과의 수교를 위해 파견되었으나 실패했다. 무신정권이 붕괴된 후 삼별초의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고려 조정에 협력하였다.

2. 생애

1256년(고종 43년) 1월, 몽골의 제6차 고려 침공 당시 장군(將軍) 이광(李廣)과 함께 주사(舟師, 수군) 300명을 거느리고 한반도 남해안 지역에서 몽골군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1] 영광에서 몽골군을 유인하여 격파하고, 몽골 관인(官人) 4명을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다.[2]

이광과 송군비는 영광에서 길을 나누어 몽골군을 공격하기로 했는데, 몽골군이 이를 알아차리고 대비 태세를 갖추자 이광은 섬으로, 송군비는 장성현입암산성으로 들어갔다.[1] 당시 산성 안에는 강건한 장수들은 모두 몽골에 투항해버리고 노약자만 남아 있었는데, 송군비는 체구가 여윈 사람 몇 명을 일부러 성 밖으로 내보내 몽골군이 산성 안에 식량이 바닥난 것으로 오인하고 성 아래까지 오도록 유인한 다음 정예병을 이끌고 나가서 승리했다.[2] 몽골군은 9월에 이르러 고려에서 철수했다.

강화도로 천도하고 각지 주민들을 바닷섬이나 산성으로 입보시켜 가며 몽골과의 항쟁을 주도했던 최씨정권1258년(고종 45년) 정권의 수장 최의가 류경, 김준 등의 무신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무너졌다.[3]

1266년(원종 7년) 11월, 쿠빌라이 칸은 병부시랑 카라치(黑的)와 예부시랑 은홍(殷弘) 등을 파견하여 일본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몽골과 일본의 수교를 주선하라고 요구하였다.[4] 고려 조정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송군비와 시어사(侍御史) 김찬(金贊)에게 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도록 명하였으나,[5] 이듬해인 1267년 정월 거제도 송변포(松邊浦)에서 풍랑으로 인해 귀환하였다.[6] 송군비는 몽골로 돌아가는 카라치와 동행하여 바다가 거세어 항해하기 어렵고 일본은 고려와 수교한 적이 없음을 알렸다.[6]

쿠빌라이 칸이 고려에 일본과의 수교를 주선할 것을 요구한 배경은 당시 몽골에 머무르던 고려인 조이(趙彝)가 남송을 공략하려면 우선 남송과 교역하는 일본을 몽골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하며, 고려가 일본과 교역하고 있으므로 고려를 통해 일본이 몽골과 통교하도록 해야 한다고 진언한 데에 있었다.[7] 그러나 일본이 몽골과의 통교를 거부하고 몽골이 일본을 공격할 경우 고려가 전란에 휩싸일 위험이 있었기에, 고려의 재상 이장용은 일본이 과거로부터 외부와 공식적으로 교류한 적이 없으며 일본으로 가는 길은 풍랑이 심해 건너가기 어려움을 강조하며 일본이 먼저 수교를 원하면 받아주고 그렇지 않으면 외따로 떨어져 살도록 내버려두자고 주장하였다.[8]

1267년 8월, 쿠빌라이 칸은 다시 카라치와 은홍을 고려에 보내 "고려가 일부러 핑계를 대며 몽골과 일본 사이의 국교를 주선하기를 거부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재차 일본과의 통교 주선을 요구하였다.[9][10]

1258년 류경, 김준 등이 정권의 수장 최의를 살해함으로써 최씨 정권은 무너졌지만, 무신 정권 자체는 무너지지 않았다. 무신들은 몽골 측이 고려 조정에 대해 화친 조건으로써 이행할 것을 요구하던 출륙환도(出陸還都) 즉 고려 조정의 군신들이 강화도를 나와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을 기조로 하는 몽골과의 화의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3] 최의를 대신해 김준이 무신정권을 수립하고 집정한 뒤에도 출륙환도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강화도를 떠나서 훨씬 먼 제주로 천도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3] 원종 9년(1268년) 김준을 죽이고 집권한 무신 임연도 출륙환도를 미루는 한편 원종을 폐위하고 영종을 옹립하기도 하였다. 이는 쿠빌라이 칸이 개입하여 원종이 복위하였으나, 임연은 원의 친조(親朝) 요구를 거부했다.

원종이 몽골군의 호위를 받아 귀국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임연은 다시 몽골과의 항쟁을 결정하고 각지에 야별초를 파견해 해도입거를 명하였으나 원종 11년(1270년) 등창으로 사망하였다. 5월 14일, 고려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가 될 임유무가 원종의 밀명을 받은 어사중승(御史中丞) 홍문계(洪文系) 및 직문하(直門下) 송송례(宋松禮) 등이 이끄는 삼별초 군사들의 공격을 당해 처형되고, 임유무의 장인 이응렬(李應烈)이나 족부(族父) 송방예(宋邦乂)와 이성로(李成老), 외제(外弟) 이황수(李黃綬)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11]

한편 무신정권이 붕괴된 뒤 출륙환도 및 삼별초 해산을 결정한 고려 조정에 맞서 삼별초의 수장 배중손, 노영희 등이 출륙환도를 반대하며 강화도를 떠나 진도로 내려갔으며, 고려의 왕족인 승화후 온을 옹립한 삼별초 세력은 진도를 중심으로 제주를 포함한 한반도 서남 육지부 연안을 경략하면서 2년에 걸쳐 반몽 - 반고려(개경 정부) 항쟁을 벌였다.

2. 1. 몽골과의 항쟁

1256년(고종 43년) 1월, 몽골의 제6차 고려 침공 당시 장군(將軍) 이광(李廣)과 함께 주사(舟師, 수군) 300명을 거느리고 한반도 남해안 지역에서 몽골군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1] 영광에서 몽골군을 유인하여 격파하고, 몽골 관인(官人) 4명을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다.[2]

이광과 송군비는 영광에서 길을 나누어 몽골군을 공격하기로 했는데, 몽골군이 이를 알아차리고 대비 태세를 갖추자 이광은 섬으로, 송군비는 장성현입암산성으로 들어갔다.[1] 당시 산성 안에는 강건한 장수들은 모두 몽골에 투항해버리고 노약자만 남아 있었는데, 송군비는 체구가 여윈 사람 몇 명을 일부러 성 밖으로 내보내 몽골군이 산성 안에 식량이 바닥난 것으로 오인하고 성 아래까지 오도록 유인한 다음 정예병을 이끌고 나가서 승리했다.[2] 몽골군은 9월에 이르러 고려에서 철수했다.

강화도로 천도하고 각지 주민들을 바닷섬이나 산성으로 입보시켜 가며 몽골과의 항쟁을 주도했던 최씨정권은 1258년(고종 45년) 정권의 수장 최의가 류경, 김준 등의 무신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무너졌다.[3]

2. 2. 대일 외교 활동

1266년(원종 7년) 11월, 쿠빌라이 칸은 병부시랑 카라치(黑的)와 예부시랑 은홍(殷弘) 등을 파견하여 일본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몽골과 일본의 수교를 주선하라고 요구하였다.[4] 고려 조정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송군비와 시어사(侍御史) 김찬(金贊)에게 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도록 명하였으나,[5] 이듬해인 1267년 정월 거제도 송변포(松邊浦)에서 풍랑으로 인해 귀환하였다.[6] 송군비는 몽골로 돌아가는 카라치와 동행하여 바다가 거세어 항해하기 어렵고 일본은 고려와 수교한 적이 없음을 알렸다.[6]

쿠빌라이 칸이 고려에 일본과의 수교를 주선할 것을 요구한 배경은 당시 몽골에 머무르던 고려인 조이(趙彝)가 남송을 공략하려면 우선 남송과 교역하는 일본을 몽골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하며, 고려가 일본과 교역하고 있으므로 고려를 통해 일본이 몽골과 통교하도록 해야 한다고 진언한 데에 있었다.[7] 그러나 일본이 몽골과의 통교를 거부하고 몽골이 일본을 공격할 경우 고려가 전란에 휩싸일 위험이 있었기에, 고려의 재상 이장용은 일본이 과거로부터 외부와 공식적으로 교류한 적이 없으며 일본으로 가는 길은 풍랑이 심해 건너가기 어려움을 강조하며 일본이 먼저 수교를 원하면 받아주고 그렇지 않으면 외따로 떨어져 살도록 내버려두자고 주장하였다.[8]

1267년 8월, 쿠빌라이 칸은 다시 카라치와 은홍을 고려에 보내 "고려가 일부러 핑계를 대며 몽골과 일본 사이의 국교를 주선하기를 거부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재차 일본과의 통교 주선을 요구하였다.[9][10]

2. 3. 무신정권과의 관계

1258년 류경, 김준 등이 정권의 수장 최의를 살해함으로써 최씨 정권은 무너졌지만, 무신 정권 자체는 무너지지 않았다. 무신들은 몽골 측이 고려 조정에 대해 화친 조건으로써 이행할 것을 요구하던 출륙환도(出陸還都) 즉 고려 조정의 군신들이 강화도를 나와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을 기조로 하는 몽골과의 화의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3] 최의를 대신해 김준이 무신정권을 수립하고 집정한 뒤에도 출륙환도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강화도를 떠나서 훨씬 먼 제주로 천도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3] 원종 9년(1268년) 김준을 죽이고 집권한 무신 임연도 출륙환도를 미루는 한편 원종을 폐위하고 영종을 옹립하기도 하였다. 이는 쿠빌라이 칸이 개입하여 원종이 복위하였으나, 임연은 원의 친조(親朝) 요구를 거부했다.

원종이 몽골군의 호위를 받아 귀국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임연은 다시 몽골과의 항쟁을 결정하고 각지에 야별초를 파견해 해도입거를 명하였으나 원종 11년(1270년) 등창으로 사망하였다. 5월 14일, 고려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가 될 임유무가 원종의 밀명을 받은 어사중승(御史中丞) 홍문계(洪文系) 및 직문하(直門下) 송송례(宋松禮) 등이 이끄는 삼별초 군사들의 공격을 당해 처형되고, 임유무의 장인 이응렬(李應烈)이나 족부(族父) 송방예(宋邦乂)와 이성로(李成老), 외제(外弟) 이황수(李黃綬)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11]

한편 무신정권이 붕괴된 뒤 출륙환도 및 삼별초 해산을 결정한 고려 조정에 맞서 삼별초의 수장 배중손, 노영희 등이 출륙환도를 반대하며 강화도를 떠나 진도로 내려갔으며, 고려의 왕족인 승화후 온을 옹립한 삼별초 세력은 진도를 중심으로 제주를 포함한 한반도 서남 육지부 연안을 경략하면서 2년에 걸쳐 반몽 - 반고려(개경 정부) 항쟁을 벌였다.

2. 4. 삼별초 항쟁

1256년 몽골의 제6차 고려 침공 당시, 송군비는 장군 이광과 함께 수군 300명을 이끌고 남해안 지역에서 몽골군을 방어했다.[1] 이광과 송군비는 영광에서 몽골군을 공격하려 했으나, 몽골군이 이를 눈치채고 대비하자 이광은 섬으로, 송군비는 장성현입암산성으로 들어갔다. 송군비는 몽골군을 유인하여 격파하고 몽골 관인 4명을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다.[2]

1258년 최씨 정권이 무너진 후에도 무신정권은 유지되었고, 무신들은 몽골과의 화친 조건인 출륙환도(개경 환도)를 반대했다.[3] 1268년 김준을 죽이고 집권한 임연도 출륙환도를 미루고 원종을 폐위하기도 했다.

1266년 11월, 몽골의 쿠빌라이 칸은 고려에 일본과의 수교를 주선하라고 요구했다.[4] 고려 조정은 송군비를 일본에 파견했으나,[5] 1267년 정월 거제도 송변포에서 풍파로 귀환했다. 송군비는 몽골 사신에게 일본과의 수교가 어렵다고 전했다.[6] 쿠빌라이 칸은 고려가 일본과의 수교를 주선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재차 요구했다.[9][10]

1270년 임연이 사망하고, 임유무가 살해되면서 무신정권은 붕괴되었다. 이후 고려 조정은 출륙환도와 삼별초 해산을 결정했으나, 배중손노영희 등이 이끄는 삼별초는 이에 반발하여 진도로 근거지를 옮겨 항쟁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고려 왕족인 승화후 온을 옹립하고 진도를 중심으로 제주도를 포함한 한반도 서남 해안 지역을 장악하며 2년간 반몽골, 반고려(개경 정부) 항쟁을 벌였다. 송군비는 삼별초의 항쟁에 가담하지 않고 고려 조정에 협력하였다.

3. 역사적 평가

3. 1. 긍정적 평가

3. 2. 부정적 평가

3. 3. 종합적 평가

4. 각주

5. 외부 링크

참조

[1] 서적 고려사
[2] 서적 고려사
[3] 서적 고려사절요
[4] 서적 고려사
[5] 서적 고려사
[6] 서적 고려사
[7] 서적 고려사
[8] 서적 고려사절요
[9] 서적 고려사
[10] 서적 고려사
[11] 서적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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