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최씨정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최씨 정권은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시작되었다. 최충헌은 강종을 옹립하고 권력을 강화했으며, 민란과 시해 시도를 겪었지만 교정 도감을 설치하여 권력을 유지했다. 이후 최충헌 사후 그의 아들 최우가 정권을 이어받아 개혁 정치를 펼쳤으나,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하고 대몽 항쟁을 벌였다. 최우 사후 최항, 최의로 이어지는 동안 몽골의 침입이 계속되었고, 결국 김준, 임연, 류경 등에 의해 최의가 살해되면서 60여 년 만에 최씨 정권은 종말을 맞이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고려-몽골 제국 관계 - 강동성 전투
    강동성 전투는 1219년 고려에서 고려-몽골 연합군이 강동성을 근거지로 저항하던 거란족 잔당을 격파한 전투로, 고려-몽골 관계의 시작점이자 여몽 관계 전개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 고려의 역사 - 위화도 회군
    위화도 회군은 1388년 이성계가 요동 정벌군을 이끌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을 점령,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시킨 사건으로, 고려 말 조선 왕조 개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 고려의 역사 - 삼별초의 항쟁
    삼별초의 항쟁은 최씨 무신정권의 군사조직인 삼별초가 원종의 친몽 정책과 해산 명령에 반발하여 1270년 강화도에서 시작, 배중손을 중심으로 왕족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며 진도와 제주도에서 3년간 고려-원 연합군에 맞서 싸웠으나 1273년 진압되어 고려의 몽골 지배 강화와 원의 제주도 직접 통치를 가져왔으며, 민족적 저항의 상징으로 평가되지만 무신정권의 잔재라는 비판도 있다.
  • 무신정권 - 원종 (고려)
    원종은 고려 고종의 장남으로 몽골과의 강화 조약을 위해 원나라에 갔다가 즉위하여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으며, 임연의 쿠데타와 삼별초의 항쟁을 겪고 개경으로 환도한 후 1274년에 사망했다.
  • 무신정권 - 삼별초의 항쟁
    삼별초의 항쟁은 최씨 무신정권의 군사조직인 삼별초가 원종의 친몽 정책과 해산 명령에 반발하여 1270년 강화도에서 시작, 배중손을 중심으로 왕족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며 진도와 제주도에서 3년간 고려-원 연합군에 맞서 싸웠으나 1273년 진압되어 고려의 몽골 지배 강화와 원의 제주도 직접 통치를 가져왔으며, 민족적 저항의 상징으로 평가되지만 무신정권의 잔재라는 비판도 있다.
최씨정권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나라이름고려
현지 이름최씨정권
존속 기간 시작1196년
존속 기간 끝1258년
고려
고려
수도개경
강도(1232년 강도 천도)
공용어중세 한국어
정부 형태군사 정부
지도자 정보
지도자 칭호교정별감
1196년 ~ 1219년최충헌(초대)
1219년 ~ 1249년최우
1249년 ~ 1257년최항
1257년 ~ 1258년최의(말대)
사건
성립1196년
붕괴1258년

2. 최충헌 정권의 성립

이지민 정권이 몰락하고 최충헌이 새로운 무신정권을 수립하였다.

2. 1. 이의민 정권의 몰락

이의민이지순, 이지영, 이지광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은 유부녀를 훔치거나 백성의 재산을 약탈하는 악행을 일삼았다. 어느 날, 이지영의 하인이 최충수집비둘기를 훔치자 최충수는 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지영은 오히려 최충수를 밧줄에 묶고 볼기를 때린 후 이틀 간 가두었다. 풀려난 최충수는 형 최충헌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분노한 최충헌은 때를 기다렸다.

고려 명종이 보제사로 행차하고 이의민이 미타산 별장에 머무르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최충헌은 이의민과 그의 부하 및 세 아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백존유한휴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봄놀이를 하던 명종을 불러 정권을 장악했다.

2. 2. 최충헌 형제의 난

최충헌이 집권하자, 최충수는 신종 원년에 태자비를 내쫓으라고 요청했다. 신종은 어쩔 수 없이 태자비를 쫓고, 최충수의 딸과 혼인하게 했다. 최충헌은 이를 알고 이의방의 태자비 사건을 떠올려 말렸으나, 최충수는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어머니까지 나서서 이를 말렸으나, 화가 난 최충수는 어머니를 밀쳐버리고 폭행까지 하는 등의 악행을 저질렀다. 최충헌은 이 보고를 받고 불효를 명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최충수에게 쳐들어 갔다. 둘은 밀고 밀리는 싸움을 했으나, 최충수가 패하여 파주까지 달아났으나 최충헌에게 잡혀 죽으면서 전투는 막을 내렸다.

3. 최충헌 정권의 통치

1209년 청교역리 3인이 최충헌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고려의 모든 업무를 관장하게 했다. 이는 최씨정권의 핵심 권력 기구가 되었다. 또한 신변 보호와 사병 양성을 위해 도방을 설치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3. 1. 권력 강화와 민란 진압

최충헌은 권력을 독점했고, 여러 민란이 일어났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이 중 최충헌의 노비 만적개경에서 나무를 하다가 미조이•연복•성복•소삼•효삼과 난을 도모했다. 그들의 계획은 다음과 같다.

  • 흥국사에 모인 후 궁으로 잠입해 소란을 일으키면서, 자연스럽게 같은 상황의 관노와 내시들을 같은 편으로 만든다.
  • 그 후 관노와 내시의 각각 군사와 연합을 맺어 5만의 대군을 형성하고, 최충헌을 시해한다.
  • 뒤에 모두 흩어져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서 각각 자신의 주인을 살해한다.
  • 다시 흥국사에 모여 종 문서를 태우고 권력을 잡는다.


다음 날 흥국사로 집합했으나, 계획했던 1만은커녕 1천도 되지 않자 거사일을 연기한다. 이때 한충유의 노비 순정은 실패할 것이 두려워 한충유에게 사실을 털어 놓는다. 한충유는 급히 최충헌에게 이를 알렸고, 최충헌은 반란군을 사전에 포획하여 강에 빠트려 죽인다.

3. 2. 최충헌 시해 미수 사건

1209년(희종 5년) 청교역리의 3명이 최충헌을 죽이기 위해 모의했으나 사전에 발각됐다. 최충헌은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고려의 모든 업무를 맡게 했다. 희종 7년에 내시 왕준명이 주모가 되어 우승경, 홍적, 왕익 등과 함께 희종의 허락을 받고 계획을 짰다. 그 해 12월 최충헌이 옥새를 찾자, 희종은 옥새를 가지러 간다면서 나오지 않았다. 그 후 무사와 승려 각각 10명이 최충헌의 부하를 죽인 후 최충헌을 죽이려 했고, 희종의 방으로 피신을 하려 했으나 열어 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최충헌은 지주사 다락에 숨어 화를 면하고 김약진이 와서 그를 구했다. 결국 최충헌 시해 계획은 모두 무너졌다.

3. 3. 몽골과의 관계

고종 무렵, 테무친이 몽골을 통일하고 칭기즈 칸으로 즉위하면서 금나라의 국력이 약화되었다. 이로 인해 거란후요(대요수국)를 건국했으나, 몽골의 침략으로 요동에서 압록강 쪽으로 밀려나 의주와 삭주를 휩쓸며 약탈을 일삼았다. 최충헌은 이러한 상황에 소극적으로 대처하여 백성들은 정처 없이 피난을 떠나야 했다.

이때 압록강에서 고리짝을 만드는 천민인 양수척들이 거란의 침입에 협조하여, 개경으로 가는 길과 각 의 군사 수를 알려주며 앞잡이 노릇을 했다. 거란군은 물밀듯이 쳐들어왔고, 최충헌상장군 노원순을 중군병마사로, 상장군 오응부를 우군병마사로, 대장군 김취려를 후군병마사로 임명하여 대응했다. 김취려의 활약으로 거란군을 몰아냈으나, 거란군은 여진과 연합하여 다시 침입했다. 김취려조충이 이끄는 고려군은 거란군을 강동성으로 몰아넣었고, 이 상황에서 몽골이 협조를 제안했다. 고종 6년(1219년), 고려는 몽골군과 함께 거란의 항복을 받았다. 그해 9월 최충헌은 병으로 사망했고, 몽골과의 협력은 훗날 원의 지배로 이어지게 되었다.

4. 최우 정권

최우최충헌의 아들로, 아버지의 권력을 이어받아 무신정권을 이끌었다.

4. 1. 최우의 개혁 정치

최우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충헌이 불법으로 빼앗은 , , 노비 등을 모두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최충헌이 소유했던 국보를 고종에게 바치는 등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또한, 무신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문신들을 많이 등용하는 등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 정치는 권력을 오래 유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 최항, 최의 정권

1249년 고종 36년에 최우가 병으로 죽자, 그의 아들 최항이 권력을 계승했다. 1257년 고종 44년에는 최항이 죽고 그의 아들 최의가 권력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이 시기 무신정권은 점차 쇠퇴해갔다. 한편, 몽골은 고려에 태자를 입조시키라는 명령을 계속해서 내렸으나, 고려는 왕족을 태자로 속여 보내는 등 몽골의 요구에 제대로 응하지 않았다.

5. 1. 계속되는 몽골의 침입

몽골은 고려를 지속적으로 침략했다. 1232년 살리타이가 이끄는 제2차 침입을 감행하여 서경개경을 거쳐 용인까지 진격했으나, 김윤후가 이끄는 의병이 이를 막아냈다. 몽골군은 다음날 다시 공격을 시도했으나, 김윤후는 산에 매복해 있다가 살리타이에게 활을 쏘아 죽였다. 이로 인해 몽골군은 후퇴했다.

1235년 몽골군은 경주까지 진격하여 황룡사 9층 목탑과 대구 부인사 초조대장경을 불태우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253년에 이루어진 5차 침입에서는 몽골에 의해 체포되거나 사망한 고려인이 10만 명을 돌파했다. 1254년 즈음에는 6차 침입이 있었고, 고려는 이전과 같은 피해를 입었다.

5. 2. 최씨 정권의 몰락

1258년 김준, 임연, 류경 등이 최의를 살해하여 최씨정권이 몰락했다. 1259년 고려는 몽골에 조건부 항복하였는데, 왕의 출륙과 입조를 약속하고 태자 전(倎) 등 40여 명을 몽골에 보내는 한편 강화도의 성을 헐어 항복 의사를 확실히 하였다. 이로써 28년간의 대몽항쟁은 막을 내렸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