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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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빌라이 칸은 1215년 칭기즈 칸의 손자로 태어나 몽골 제국의 칸이 되었다. 그는 중국식 제도를 도입하여 통치 효율성을 높이고, 1271년 국호를 '대원'으로 정하고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는 등 중국화 정책을 추진했다. 1279년 남송을 정복하여 중국을 통일했지만, 일본, 베트남 등지 원정에는 실패했다. 그는 파스파 문자를 제정하고 티베트 불교를 후원하는 등 문화 정책을 펼쳤으며, 상업을 장려하고 경제 발전을 도모했다. 말년에는 카이두와의 대립과 내분, 건강 악화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1294년 사망 후 손자 테무르가 뒤를 이었다. 쿠빌라이 칸은 몽골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힌 군주로 평가받지만, 중국화 정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그는 고려를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만들고 일본 원정을 시도하는 등 한국과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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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 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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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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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쿠빌라이 칸 |
다른 이름 | 쿠빌라이, 쿠빌라이 카안, 세첸 칸 |
출생일 | 1215년 9월 23일 |
출생지 | 몽골 제국 |
사망일 | 1294년 2월 18일 (78세) |
사망지 | 칸발리크, 원나라 |
매장지 | 불명, 추정상 부르칸 칼둔 |
종교 | 불교 |
칸 호칭 | 세첸 칸 (; ) |
묘호 | 세조 () |
시호 | 성덕신공문무황제 () |
재위 기간 | 1260년 4월 15일 ~ 1294년 2월 18일 |
즉위일 | 1260년 5월 5일 |
전임자 | 몽케 칸, 아리크 부케(주장자) |
후임자 | 테무르 칸 |
황제 즉위 | 1271년 12월 18일 |
원나라 황제 재위 | 1271년 12월 18일 ~ 1294년 2월 18일 |
후임 황제 | 테무르 칸 |
아버지 | 툴루이 |
어머니 | 소르칵타니 베키 |
왕가 | 보르지긴 가문 |
왕조 | 원나라 |
연호 | 중통 (; 1260년–1264년) 지원 (; 1264년–1294년) |
정식 이름 | 헌천술도인문의무대광효황제 () |
가족 관계 | |
배우자 | 테굴렌 카툰 (사망) 차비 (사망) 남부이 (실종) |
자녀 | 진킴, 망갈라, 노무간, 쿠틀루크-케르미시 외 다수 |
기타 정보 | |
참고 | 쿠빌라이 칸은 몽골 제국의 카안이자 원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몽골 제국은 중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
구글 지도 검색어 | 칸발리크 |
2. 생애
쿠빌라이 칸은 1215년 칭기즈칸의 넷째 아들 툴루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케레이트 부족 출신 툴루이의 정실 부인 소르칵타니 베키이며, 툴루이와 소르칵타니 베키 사이에서 태어난 네 명의 적출자 중 둘째 아들이다. 형은 4대 황제가 된 몽케, 아우는 일한국을 세운 훌레구, 쿠빌라이와 몽골 황제(카안) 자리를 놓고 다툰 아리크부카가 있다.
1251년 형 몽케 칸이 몽골 제국의 칸이 되자, 쿠빌라이는 중국 지역의 통치를 위임받았다.[13] 1253년 쿠빌라이는 운남의 대리국을 공격하여 항복시켰다.[14] 1258년 몽케 칸은 쿠빌라이를 동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쓰촨 공격을 지원하도록 소환했다. 1259년 쿠빌라이가 도착하기 전에 몽케 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쿠빌라이는 형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양자강 근처 우한 공격을 계속했다. 송나라의 장관 가사도는 몽골이 양자강을 국경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매년 은 2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공물로 바치겠다는 제안을 비밀리에 쿠빌라이에게 했다.[22] 쿠빌라이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나중에 가사도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1260년 쿠빌라이 칸은 즉위 후 몽골 왕조 최초로 중국식 연호인 중통(中統)을 사용하고, 중서성(中書省)을 설치하여 육부(六部)를 두어 상서성(尚書省)의 기능을 겸하게 했다. 이는 화북의 일반 행정을 총괄하는 최고 행정 기관이었다. 또한 군사를 담당하는 추밀원(枢密院), 감찰을 담당하는 어사대(御史台)등의 기관을 설치하여 중국식 정부 기관을 갖추었다. 화폐로는 제로통행중통원보교초(諸路通行中統元宝交鈔)를 발행하여, 이전까지 몽골이나 한족 제후들이 발행하던 화폐를 통일하였다.
1271년 12월 18일 주역(周易)의 대재건원(大哉乾元)이라는 구절에서 따와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정하고, 수도를 대도(大都, 현재의 베이징)로 옮겼다.[141]
1279년 3월 19일 애산 전투에서 남송을 완전히 정복하여 중국을 통일하였다.
고려를 복속시키고, 일본, 베트남, 미얀마 등지에 원정을 시도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287년 카이두는 만주와 동몽골을 영지로 하는 카사르의 후손 식투르, 카치운의 후손 카다안, 테무게 옷치긴의 후손 나얀과 동맹을 맺고 쿠빌라이에 대항했다.[181][182] 이후로도 카이두는 쿠빌라이의 종주권에 반발하며 끊임없이 쿠빌라이와 갈등했다.
잦은 원정과 내분, 재정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281년 차브이 카툰이 죽고, 1286년에는 장남 친킴이 알코올중독으로 사망하자, 그는 우울감과 고독에 시달렸다.[177] 1294년 2월 18일 대도 황궁 자단전(紫檀殿)에서 7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2. 1. 초기 생애
쿠빌라이 칸은 1215년 칭기즈칸의 넷째 아들 툴루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케레이트 부족 출신 툴루이의 정실 부인 소르칵타니 베키이며, 툴루이와 소르칵타니 베키 사이에서 태어난 네 명의 적출자 중 둘째 아들이다. 형은 4대 황제가 된 몽케, 아우는 일한국을 세운 훌레구, 쿠빌라이와 몽골 황제(카안) 자리를 놓고 다툰 아리크부카가 있다.
할아버지 칭기즈 칸의 조언에 따라 소르칵타니는 아들의 유모로 불교도인 탕구트 여성을 선택했고, 쿠빌라이는 후에 그녀에게 큰 존경을 표했다. 1224년 일리 강 근처에서 첫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칭기즈 칸은 손자 몽케와 쿠빌라이에게 의식을 거행했다.[10] 당시 아홉 살이었던 쿠빌라이는 형과 함께 토끼와 영양을 사냥했다. 칭기즈 칸은 몽골 전통에 따라 사냥한 동물의 기름을 쿠빌라이의 가운데 손가락에 문지르며 "이 소년 쿠빌라이의 말에는 지혜가 가득하니, 그 말을 잘 새겨들어라. 너희 모두 그 말을 잘 새겨들어라."라고 말했다. 늙은 칭기즈 칸은 이 사건 3년 후인 1227년에 죽었고, 쿠빌라이는 열두 살이었다. 쿠빌라이의 아버지 툴루이는 칭기즈 칸의 뒤를 이어 쿠빌라이의 삼촌인 오고타이가 1229년에 카간으로 즉위할 때까지 2년 동안 섭정을 맡았다.
1236년 몽골의 금나라 정복 이후 오고타이는 1232년에 사망한 툴루이의 가족에게 허베이성(8만 호가 딸린)을 주었다. 쿠빌라이는 1만 호를 포함한 자신의 영지를 받았다. 경험이 부족했던 쿠빌라이는 지역 관리들에게 자유재량권을 주었다. 관리들의 부패와 과도한 세금으로 인해 많은 한족 농민들이 도망쳤고, 그 결과 세수가 감소했다. 쿠빌라이는 허베이성의 자신의 식읍으로 급히 가서 개혁을 명령했다. 소르칵타니 베키는 그를 돕기 위해 새로운 관리들을 파견했고, 세법이 개정되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도망쳤던 많은 사람들이 돌아왔다.
쿠빌라이 칸 초기 삶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부분은 당시 한족 문화에 대한 그의 연구와 강한 매력이었다. 쿠빌라이는 중국 북부의 유명한 불교 승려인 해운을 몽골의 오르다로 초청했다. 1242년 카라코룸에서 해운을 만났을 때, 쿠빌라이는 불교 철학에 대해 질문했다. 해운은 1243년에 태어난 쿠빌라이의 아들에게 진진(중국어: 真金)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11] 해운은 또한 쿠빌라이에게 예전에는 도교도였고 당시에는 불교 승려였던 유병중을 소개했다. 유병중은 화가이자 서예가, 시인, 수학자였으며, 해운이 현 베이징의 사찰로 돌아갔을 때 쿠빌라이의 고문이 되었다.[12] 쿠빌라이는 곧 산시성 학자 조비를 자신의 수행원에 추가했다. 쿠빌라이는 지역과 제국의 이익, 몽골인과 튀르크계 사람들의 균형을 맞추고자 다른 국적의 사람들도 고용했다.
2. 2. 몽케 칸 시대
1251년, 쿠빌라이의 형인 몽케 칸이 몽골 제국의 칸이 되자, 쿠빌라이는 중국 지역의 통치를 위임받았다.[13] 쿠빌라이는 중국 북부의 총독직을 받아 자신의 오르도(유목민의 이동식 거주지)를 중앙 내몽골로 옮겼다.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쿠빌라이는 자신의 영토를 잘 다스렸고, 허난의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켰으며, 서안을 점령한 후 사회 복지 지출을 늘렸다.1253년, 쿠빌라이는 운남의 대리국을 공격하여 항복시켰다.[14] 몽골군은 세 갈래로 나뉘어 공격을 진행했다. 우량카다이가 이끄는 부대는 쓰촨 서부 산악 지대로 진군했고, 쿠빌라이는 초원을 지나 남쪽으로 진격하여 첫 번째 부대와 합류했다. 우량카다이가 북쪽에서 호숫가를 따라 이동하는 동안 쿠빌라이는 대리의 수도를 점령했다. 달리의 마지막 왕인 단흥지(段興智)(段興智)는 몽골에 항복했고, 몽케 칸에 의해 최초의 ''토사'' 지역 통치자로 임명되었다.[15]
1254년 쿠빌라이는 련희선을 평정 위원회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쿠빌라이는 티베트 불교 승려들의 능력에 매료되었다. 1253년 그는 사캬파의 파그파를 자신의 수행원으로 삼았다.
1258년 초, 쿠빌라이는 도교와 불교 지도자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도교의 주장은 공식적으로 반박되었고, 쿠빌라이는 237개의 도교 사찰을 강제로 불교로 개종시키고 모든 도교 경전을 파괴했다.[19][20][21]
1258년, 몽케 칸은 쿠빌라이를 동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쓰촨 공격을 지원하도록 소환했다. 쿠빌라이는 통풍을 앓고 있었지만, 몽케 칸을 돕기 위해 이동했다. 1259년 쿠빌라이가 도착하기 전에 몽케 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쿠빌라이는 형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양자강 근처 우한 공격을 계속했다. 송나라의 장관 가사도는 몽골이 양자강을 국경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매년 은 2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공물로 바치겠다는 제안을 비밀리에 쿠빌라이에게 했다.[22] 쿠빌라이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나중에 사도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쿠빌라이는 아내로부터 그의 동생 아릭 보케가 군대를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몽골 고원으로 북상했다.[23] 쿠빌라이가 도착하기 전에, 아릭 보케는 수도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몽골의 대회의)를 열고 칭기즈칸의 후손 대부분의 지지로 자신을 대칸으로 추대했다. 쿠빌라이와 그의 네 번째 형제인 훌라구 칸(훌라구)은 이에 반대했다.
1260년 4월 15일, 쿠빌라이는 자신의 쿠루르타이를 소집하여 대칸으로 선포되었다.
2. 3. 즉위와 통치
1260년 쿠빌라이 칸은 즉위 후 몽골 왕조 최초로 중국식 연호인 중통(中統)을 사용하고, 중서성(中書省)을 설치하여 육부(六部)를 두어 상서성(尚書省)의 기능을 겸하게 했다. 이는 화북의 일반 행정을 총괄하는 최고 행정 기관이었다. 또한 군사를 담당하는 추밀원(枢密院), 감찰을 담당하는 어사대(御史台)등의 기관을 설치하여 중국식 정부 기관을 갖추었다. 화폐로는 제로통행중통원보교초(諸路通行中統元宝交鈔)를 발행하여, 이전까지 몽골이나 한족 제후들이 발행하던 화폐를 통일하였다.1271년 12월 18일, 주역(周易)의 대재건원(大哉乾元)이라는 구절에서 따와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정하고, 수도를 대도(大都, 현재의 베이징)로 옮겼다.[141]
쿠빌라이 칸은 티베트 불교 승려 파스파를 국사로 삼아 불교를 관리하게 하고, 몽골어 표기를 위해 티베트 문자를 바탕으로 파스파 문자를 제정하는 등 몽골 고유의 문화 정책을 추진했다. 파스파 문자는 원나라에서 “국자(国字)” 또는 “몽골자(蒙古字)” 등으로 불렸다.
1279년 3월 19일 애산 전투에서 남송을 완전히 정복하여 중국을 통일하였다.
고려를 복속시키고, 일본, 베트남, 미얀마 등지에 원정을 시도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쿠빌라이 칸은 색목인을 등용하고, 상업을 장려하여 경제 발전을 도모하였다.
2. 4. 카이두와의 대립과 내분
1287년 카이두는 만주와 동몽골을 영지로 하는 카사르의 후손 식투르, 카치운의 후손 카다안, 테무게 옷치긴의 후손 나얀과 동맹을 맺고 쿠빌라이에 대항했다.[181][182] 카이두는 몽골 동부 지역의 부족장들과도 결탁, 군사를 이끌고 상도로 진격했다. 쿠빌라이는 카이두 정벌을 선언하고 옛 남송 지역에서 병력을 징발해 직접 가마를 타고 정벌에 나섰다.1288년 몽골 동부 군대의 맹주였던 나얀은 쿠빌라이의 친위대와 결전을 벌였으나 패배했고, 쿠빌라이에게 처형당했다. 쿠빌라이 칸은 카이두에게 협조했던 몽골 동부지역의 칸들을 몰살시키고, 친히 카이두를 상대했다. 나얀 등이 패한 이후 대부분의 반란 가담 세력들은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쿠빌라이 일행이 몽골 동부로 간 사이 카이두의 군사가 우세했다.
동쪽 반란군과 함께 상도로 진군했던 카이두는 쿠빌라이의 손자인 진왕 카말라를 격파하는 등 우세한 전황을 유지했지만, 나얀을 평정한 쿠빌라이가 본군을 이끌고 상도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회군했다. 이 원정이 실패한 후 카이두는 산발적인 전투를 몇 번 더 벌였으나 바얀의 방어에 막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로도 카이두는 쿠빌라이의 종주권에 반발하며 끊임없이 쿠빌라이와 갈등했다.
1289년 쿠빌라이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카이두를 상대했지만, 체포하지 못하고 원나라 국경 밖으로 쫓아낸 뒤 철수했다.
2. 5. 말년과 죽음
잦은 원정과 내분, 재정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281년 차브이 카툰이 죽고, 1286년에는 장남 친킴이 알코올중독으로 사망하자, 그는 우울감과 고독에 시달렸다.[177] 1283년 남부이 카툰과 재혼하였다. 일본 원정과 베트남 정벌 실패 역시 그에게 실의를 안겨주었다. 그는 남부이 카툰과 두 딸에게 정치 업무를 맡기고, 포도주를 즐겨 마시며 알콜에 중독되었다.만년의 쿠빌라이는 폭음과 폭식으로 인한 소화불량과 위장질환, 통풍, 알콜중독, 무기력증, 불안,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혈전을 앓았다.[177] 1294년 2월 18일 대도 황궁 자단전(紫檀殿)에서 7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시신은 1294년 2월 20일 발인, 영여는 대도를 떠나 현재의 몽골 켄티 주의 부르칸칼둔에 매장되었다. 원사에 의하면 기련곡(起輦谷)에 매장되었다고도 한다. 쿠빌라이의 사후, 1294년 5월 10일 손자 테무르가 상도에서 즉위, 그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차가타이 한국의 두아 등 서북의 칸들의 반란은 계속되고, 제국의 북방은 쿠빌라이 사후 한동안 혼란에 빠졌다. 반란을 일으킨 서북의 칸국들은 1303년 손자 테무르와 최종 협상, 형식적인 종주국의 지위를 회복했다.
몽골식 존호는 세첸 카안(ᠡᠴᠡᠨ ᠬᠠᠭᠠᠨ, Сэцэн хаан), 설선황제(薛禪皇帝)로 이는 몽골어로 현명함, 총명함, 예지(睿智)를 뜻한다.
3. 정책
1263년 6월 13일 쿠빌라이는 추밀원을 최고 기관이자 최고 군사 기관으로 정했다. 둘째 아들 연왕 친킴(眞金)에게 중서령(守中書令) 겸 추밀원 판사(兼樞密院判事)를 겸직하게 하여 추밀원과 중서성을 장악하게 했다. 황실 요리 전담 관직인 음선태의(飮膳太醫)를 설치하여 황궁 음식을 관리하게 했다.
1264년 여름,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카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8월 21일 상도(上都, 현 시린궈러 맹 정란 기)에서 아리크 부케는 쿠빌라이에게 항복하였다. 승리 직후 쿠빌라이 칸은 쿠릴타이 회의를 다시 소집했지만, 4개의 소(小) 울루스 지도자들은 불참하였다. 이는 칭기즈 칸의 유언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서부 몽골 지역 및 정복지의 지도자들은 쿠빌라이를 대칸으로 인정하였다.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카가 관할하던 영토를 분할하였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는 항복을 번복하고 저항했으나, 2년 뒤에 죽었다.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케를 지지한 지도자들을 처형하였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를 지지했던 카이두와 두아가 제국 서부에서 반기를 들어 몽골 제국은 동부와 서부로 분열되었다. 카이두는 차가타이 한국의 지지를 받아 몽골 타르박타이 산맥 근처에 정착, 원나라를 공격했다.
1267년 2월 25일 금나라의 중도(中都, 현 베이징 시)를 도읍으로 정하고, 금나라의 이궁(離宮)이었던 대녕궁(大寧宮)을 황궁 정전으로 하였다. 1271년 12월 18일 조칙을 내려, 금나라 금 장종(金章宗)의 법률 태화율(泰和律) 사용 금지를 명하고, 몽골의 법률을 적용하게 하는 한편, 태화율을 참고로 법령 정비에 나섰다. 1272년 3월 4일 수도의 이름을 중도에서 대도(大都, 현 베이징 시)로 바꾸고, 금나라의 구 성곽인 남성(南城) 외에 새로운 성곽 북성(北城)을 축성하였다.
쿠빌라이는 케시그의 기능을 제한했지만, 처음에는 한족으로만 구성되었지만 나중에는 킵차크, 알란(아수드), 그리고 러시아 부대를 강화하여 새로운 황실 근위대를 창설했다.[88][89][90] 1263년 자신의 케시그가 조직된 후, 쿠빌라이는 원래 케시그 중 세 개를 징기스칸의 보좌관인 보로훌라, 부르추, 그리고 무갈리의 후손들에게 맡겼다. 쿠빌라이는 케시그의 네 명의 고위 귀족들이 자르리그(칙령)에 서명하는 관행을 시작했는데, 이 관행은 다른 모든 몽골 칸국으로 확산되었다.[91]
3. 1. 중국화 정책
1260년 쿠빌라이 칸은 몽골 왕조 최초로 중국식 연호인 중통(中統)을 사용하고, 한족 관료들을 중심으로 하는 행정 기구인 중서성(中書省)을 신설하였다. 중서성에는 육부를 두어 기존의 상서성(尚書省)의 기능을 겸하게 하여, 화북의 일반 행정을 총괄하는 최고 행정 기관으로 삼았다. 이어서 군사를 담당하는 추밀원(枢密院), 감찰을 담당하는 어사대(御史台) 등 여러 기관이 설치되어 중국식 정부 기관이 대체로 정비되었다. 화폐로는 제로통행중통원보교초(諸路通行中統元宝交鈔)를 발행하여, 그 전까지 다른 몽골이나 한족의 제후들도 발행하던 화폐를 통일하였다.1262년 산둥성을 지배하던 한족 군벌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를 계기로 화북 각지의 지방 군벌을 해체하였다. 지방에는 로(路), 주(州), 현(縣)의 3계층 행정구역을 설치했다. 1267년부터는 중도 교외에 중국식 도성인 대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271년 12월 18일 국호를 한어인 “대원(大元)”으로 개칭하였다.[141]
이러한 개혁은 몽골 왕조의 중국 왕조화를 의미했지만, 쿠빌라이 칸의 궁정은 여전히 유목민의 이동 생활을 유지하며 대도와 상도 사이를 계절 이동하고 있었고, 원은 아직 유목 국가로서의 성격도 짙었다. 중서성의 고관들은 쿠빌라이 칸의 부인 차비의 조카인 안퉁(安童) 등 몽골 귀족의 지배하에 있었고, 주와 현의 대부분도 몽골의 왕족이나 귀족의 영지로 나뉘어 있어 쿠빌라이 칸의 직접적인 지배는 제한적이었다.
쿠빌라이 칸은 파스파를 국사로 삼아 티베트 불교를 관리하게 하고, 파스파 문자를 제정하는 등 몽골 고유의 문화 정책을 추진했다. 파스파 문자로 쓰인 몽골어 문서는 몽골 제국의 공식적인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원나라에서는 파스파 문자 자체를 “국자(国字)” 또는 “몽골자(蒙古字)” 등으로 불렀다. 쿠빌라이 칸은 한족 출신 제후나 지식인의 등용에도 적극적이었지만, 유교는 특별히 중시하지 않아 과거제는 부활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학의 필요성은 인식하여 몽골 왕족 자제들에게 한학을 배우도록 명령하였고, 자신도 유교 경전과 사서의 좋은 말과 선정을 몽골어로 번역하게 하였다. 또한 위징과 같은 인물을 등용하려 했으며, 역대 몽골 궁정에서는 “전대 황제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볼 수 있는 문서” 수집에 열심이었고, 정관정요, 제범, 효경 등 유교 관련 한적의 몽골어 번역을 장려했다. 이러한 노력은 후대 황제들의 한학 애호 풍조로 이어졌다.[142][143]
3. 2. 경제 정책
쿠빌라이 칸은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수리 시설을 정비하고 새로운 농업 기술을 도입했다. 상업을 장려하고 해상 무역을 활성화하여 경제 발전을 꾀하였다. 또한, 교초라는 지폐를 발행하여 상품 유통을 원활하게 하려 했으나, 인플레이션 등의 부작용도 나타났다.[141]쿠빌라이는 곽수경(郭守敬)을 등용하여 관개, 곡물 운송, 홍수 통제 등 물 관리에 힘썼다. 곽수경은 대도(현재 베이징)에 새로운 물 공급을 위해 의 수로를 건설하고, 여러 강 유역을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여 수위를 조절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1264년에는 감숙성(Gansu)의 관개 시설 복구에 힘쓰는 등 국가 전역의 수리 시설 정비에 기여했다.[118]
3. 3. 문화 정책
쿠빌라이 칸은 파스파 문자를 제정하여 몽골어를 표기하도록 하였다.[142] 티베트 불교 승려인 파스파를 국사로 삼아 불교를 관리하게 하고, 다양한 종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3. 4. 대외 정책
쿠빌라이는 유교 사상의 영향을 받은 일부 자문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부 몽골인 측근과 관리들의 제안에 따라 일본, 미얀마, 베트남, 자바 정벌을 단행한다.[101]고려 국왕인 충렬이 그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고, 이후 고려의 역대 군주들은 원나라의 공주 혹은 종실의 딸과 결혼하여, 원나라의 부마국인 동시에 외손이 된다.
1267년 쿠빌라이 칸은 일본에 사신을 보냈으나 일본은 쿠빌라이 칸의 친서를 무시하였다. 이후 쿠빌라이는 고려에게 공물의 양을 줄이는 대신,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 고려의 협력을 종용하였다.
1274년 쿠빌라이는 900척의 함대를 편성하여 고려로 보냈다. 이어 중국 남부에서 온 10만 명의 선원을 태운 배를 약 74m 간격으로, 3,500척을 보내고, 고려에서도 장정을 징발하여 일본으로 보냈다. 그해 10월 일본 근처에 도착했다.[101]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은 쓰시마섬, 이키섬, 규슈의 다자이후 주변을 석권하는 것만으로 끝났다. 이때 몽골의 선박은 다소 악천후 용골이 없는 강 보트를 기반으로 설계된 선박이라, 풍랑과 해일에 견디지 못하고 그의 함대는 파괴되었다. 일본에 대한 첫 공격 이후 일본 수군 와우코가 보복으로 고려의 남부, 남동부를 습격했다가 잔류 몽골군에 의해 퇴각했다.
쿠빌라이의 일본원정은 실패로 끝났으나,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일본 정벌 준비를 통해 원정 준비를 위해 설치한 출선기관인 정동행성과 고려정부가 일체화되어, 새로 속국이 된 고려는 원나라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281년 다시 일본에 군대를 보냈으나 이번에도 실패로 끝났다. 1285년과 1288년에는 베트남에 침공한 군대가 차례로 패배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북방 지역을 차지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1281년 5월 전함 900척에 몽골인 및 한인으로 연합한 부대 및 고려인으로 편성된 동로군(東路軍) 5만 명, 전함 3,500척에 남만(南蠻)의 범문호(范文虎)가 이끄는 강남군(江南軍) 10만 명을 황해상으로 일본에 보냈다. 그러나 그해 6월 2차 일본 정벌 중 쓰시마 주변에서 허리케인이 발생, 여원 연합군 함대 다수가 침몰했다. 원나라 군 약 10만~20만 명, 고려인은 7,000여 명이 해상에서 익사했다. 일본은 허리케인이 자신들을 지켜주었다 하여 신풍(神風)이라고 불렀다.
1281년 6월 23일 배를 타고 하카타 만에 도착한 고려군은 중국, 몽골에서 온 배가 도착하지 않아 단독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멸하였다.
그런데도 쿠빌라이는 3번째 일본원정을 계획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추진하였으나, 1287년 즉위 때 지지모체였던 동쪽 3왕가가 나얀을 지도자로 삼아 반기를 들었으며, 중국 내에서도 반란이 빈발했기 때문에 만년의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포기했다. 또한 1292년 참파원정을 시도하였으나, 이것도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참파 공략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대한 원정은 상업루트의 개척에 뜻을 둔 경우가 강해, 최종적으로는 해상루트의 안전이 확보되는 성과를 올렸다.
1293년에 다시 원나라 군대를 보내 오키나와를 공격, 일본인 100명을 체포하였다.
1277년 쿠빌라이는 군사를 보내 미얀마를 공략했으나 실패하고 되돌아왔다. 1283년, 1287년에 다시 몽골 군을 보내 미얀마를 원정하여 이라와디 삼각주까지 점령했다. 일단 쿠빌라이군은 버마의 수도 바간을 점령하고, 새 정권을 세운 뒤 종주권만 인정받는 선에서 회군, 퇴각하였다.
1283년 태국을 공격, 크메르 제국의 자야바르만 8세는 몽골에 복속, 종주권을 거부했다. 1273년 자야바르만 8세는 쿠빌라이에게 경의를 표하길 거부하고 몽골 사절을 수감하였다. 1275년 쿠빌라이는 혹시 모를 남송 황제와 귀족들의 탈출로를 막기 위해 운남 성에 국경 지대를 확보하라고 명령했고, 태국에서 국경지대의 원나라 군대 주둔에 이의를 제기하자, 칸은 전쟁을 선포한다. 쿠빌라이는 군사를 보냈고, 1283년 자야바르만 3세는 쿠빌라이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공물을 바치기로 약속하였다. 1283년에 참파에서 육로를 통해 캄보디아 남쪽으로 진출을 시도, 캄보디아 북부를 점령했다. 1284년 캄보디아는 원나라에 속국이 되고, 조공을 바쳤다. 1286년 6월 나라 티하파테가 이를 거절했으나, 논의 끝에 버마는 1287년 1월 원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조약에 동의하고 대도로 보냈다.
쿠빌라이는 1293년 자와섬 정벌을 기획, 2만~3만명의 해군을 징발하여 원정을 시작했지만, 인도네시아를 침략 한 몽골 군은 더위로 인한 열사병, 탈수, 고열, 말라리아 등으로 3000~여 명 이상의 병력이 상당한 손실을 입은 후 철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빌라이가 죽은 해인 1294년에 태국의 수코타이 왕국과 치앙마이 왕국은 확실히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1284년 6월 쿠빌라이는 아들 토곤을 진남왕(鎭南王)에 봉했다.[183] 그리고 7월 참파를 정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84]
1285년 1월 토곤의 군사는 방 키에프(하노이 북동쪽)와 탕롱(현, 하노이)를 점령했고, 소케투가 이끄는 토곤의 제2진 부대는 참파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베트남의 중북부 지역을 점령했다. 쩐 성종은 일단 그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쩐흥다오는 '항복을 하려거든 신(臣)의 목부터 먼저 베소서'라며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쩐 성종과 대월군 총사령관 쩐흥다오는 그들의 전술을 방어에서 공격으로 바꾸고 몽골을 공격했다. 4월에 쩐쾅가이(陳光啓)가 소게투를 전사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군을 크게 대패했다. 쩐흥다오 군도 함투(Hàm Tử, 현재의 흥옌)에서 전투에서 토곤 군대를 격파하였다. 베트남군의 기습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토곤은 대월의 궁수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 청동 파이프 안에 숨었다. 토곤이 청동 파이프로 숨은 일은 몽골 제국과 토곤 자신에게 굴욕감을 가져다 주었다.[186]
안남의 패전에 분노한 쿠빌라이 칸은 죽을 때까지 토곤이 대도로 알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187]
1288년 4월 초 쿠빌라이는 해군을 베트남 원정에 파병, 오마르가 이끄는 보병을 딸려 보냈다. 몽골의 해군 함대는 박당강을 거쳐 대월을 공격했다. 곧 교량과 도로가 파괴되고 대월 부대가 공격을 개시하자, 몽골 군은 보병 호위없이 박동에 도착했습니다. 대월은 미리 병력 일부를 매복한 뒤, 작은 소 함대가 전투에 참여하고 후퇴하는 척했고 몽골 인들은 대월 군대를 추격했다. 매복해 있던 수천 대의 작은 베트남 함대가 양면에서 몽골 함대를 공격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몽골군은 다시 바다로 나가려 했고, 중간에 좌초되어 침몰하였다. 강둑으로 패주하던 몽골군은 육지에서 기다리던 쩐흥다오가 이끄는 군대에게 격파당했다.
1288년 말에는 토곤은 안남(대월 쩐 왕조)에 이르러 군을 나누어 대월을 침공했다.[188] 그러나 대월의 장군 진국준(陳国峻)의 활약으로 원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1288년 박당강 전투에서 토곤이 이끄는 원군은 대패를 당했으며, 오마르가 포로로 잡혔습니다. 1288년 말 토곤은 몽골군을 이끌고 베트남에서 퇴각하였다. 그럼에도 쩐 성종은 몽골과의 갈등을 피하려고, 일단 원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약속하였다.
1291년 패퇴한 토곤은 명을 받아 몽골군 500명과 한인 병력 1,000명과 함께 양주에 출진했다. 하지만 안남의 패전에 분노한 쿠빌라이는 죽을 때까지 토곤이 알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189] 토곤은 쿠빌라이가 사망할 때까지 양주로 추방당했다.
4. 평가
쿠빌라이 칸은 몽골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히고 중국을 통일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몽골에서는 제국의 영토를 최대한 넓힌 영웅 중 한 명으로 존경받는다.[27] 마르코 폴로는 그를 지구 역사상 최대의 지도자이자 최고의 부자라고 유럽에 소개하기도 했다.[70][71]
쿠빌라이 칸은 중국식 통치 방식을 도입하고 문화와 경제 발전에 기여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는 대운하를 재건하고 공공 건물을 수리하며 고속도로를 확장하여 경제 성장을 촉진했다. 또한 아시아 예술을 장려하고 종교적 관용을 보였다. 경극은 원나라 시대에 번성했다.
그러나 몽골의 전통을 버리고 중국 제도를 시행한 점,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베이징으로 옮긴 점 등은 몽골 내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8] 잦은 원정과 무리한 정책 추진으로 인해 재정난을 초래하고 제국의 분열을 가속화시켰다는 비판도 받는다.
중국에서는 애산 전투 직후 남송의 군사들과 귀족들을 학살하고, 남송을 잔인하게 멸망시킨 학살자로 기억된다. 그러나 탐원공정과 동북공정 이후에는 그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어서 평가가 달라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까지 고려를 복속시킨 침략자로 부정적인 시각이 주류였으나, 1990년대 이후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려는 시각이 나타나고 있다.
5. 가족 관계
'''형제'''
; 제1오르도
- 첩고륜 대황후(帖古倫 大皇后) 옹기라트씨 또는 퇴그렌 - 쿠빌라이의 원비(元妃)
; 제2오르도
; 제3오르도
- 탈랄해 황후(塔剌海 皇后)
- 노한 황후(奴罕 皇后)
; 제4오르도
- 오식진 황후 허올신씨(烏式眞 皇后 許兀愼氏), 후슈친 보로클 노얀의 딸
; 그 외
- 속가답사 황후(速哥答思 皇后)
- 백요올진 황후(伯要兀眞 皇后)
- 활활륜 황후(闊闊倫 皇后)
- 알자사 황후(斡者思 皇后)
- 욱실진 황후(旭失眞 皇后)
- 타로별진 황후(朶魯別眞 皇侯)
- 살불홀 비자(撒不忽 妃子)
- 팔팔한 비자(八八罕 妃子)
- 살불홀 비자(撒不忽 妃子)
- 아속진 비자(阿速眞 妃子)
- 올내홀내 비자(兀乃忽乃 妃子)
; 아들
순서 | 이름 | 생모 | 비고 |
---|---|---|---|
1 | 도르지 황자 | 소예순성황후 차브이 | 요절 |
2 | 진금 | 소예순성황후 차브이 | 원나라 제2대 황제 성종의 아버지 |
3 | 망갈라 | 소예순성황후 차브이 | 1280년 사망 |
4 | 노무간 | 소예순성황후 차브이 | 1292년 사망 |
5 | 코리다이 | ? | 페르시아계 사서 집사에만 등장, 원사, 신원사에는 등장하지 않음. 망갈라, 노무간보다 연장자로 추정 |
6 | 후게치 | ? | 1271년 사망 |
7 | 아야치 황자 | 오식진 황후 허올신씨 | 1324년 사망(?) |
8 | 오그룩치 | ? | 1306년 사망 |
9 | 쿠쿠추 | 오식진 황후 허올신씨 | 1313년 사망 |
10 | 토곤 | ? | 1301년 사망 |
11 | 쿠틀루크 테무르 황자 | ? | 1324년 사망(?) |
12 | 테미치 황자 | 남브이 황후 | 요절 |
; 딸
이름 | 생모 | 비고 |
---|---|---|
미상 | 미상 | 불교 여승, 베이징 탄제 사원에 묻힘 |
조국대장공주 월렬 | 미상 | 조무양왕 애불화에게 하가 |
창국공주 오로진 | 미상 | 패화에게 하가 |
창국대장공주 다륜 | 미상 | 첩감간에게 하가 |
노국장공주 완택 | 미상 | 알라진에게 하가 |
노국대장공주 낭가진 | 미상 | 알랄진, 첩목아, 만자태에게 하가 |
제국대장공주 홀도로게리미실 | 아속진 비자 | 고려 충렬왕 왕거에게 하가 |
공주 | ? | 남송 공제 조현에게 하가 |
베케친 황녀 | 남브이 카툰 |
6. 기타
쿠빌라이 칸은 소설,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작품의 소재로 다루어졌다. 쿠빌라이 칸은 고려와 깊은 관계를 맺었는데,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여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다.[169] 쿠빌라이 칸은 일본 원정을 추진하면서 고려에 협력을 종용하였고, 정동행성 설치를 통해 고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6. 1. 쿠빌라이 칸을 다룬 작품
忽必烈汗중국어를 다룬 작품에는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이 있다.-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풍도》, 반노 아키라의 소설 《원구》
- 드라마 《호조 토키무네》 (2001년, NHK 대하드라마) - 배우 파삼찰포
- 드라마 《무신》(2012년, MBC) - 배우 김명국
- 드라마 《마르코 폴로》(2014년-, 미국 넷플릭스) - 배우 베네딕트 웡
- 영화 《마르코 폴로의 모험》(1938년, 미국)
- 영화 《쿵후 동방견문록》(1975년, 홍콩)

6. 2. 한국과의 관계
고려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고, 이후 고려의 역대 군주들은 원나라의 공주나 종실의 딸과 결혼하여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다.[169]1267년 쿠빌라이 칸은 기거사인(起居舍人) 반부(潘阜)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 친서를 전달하게 했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였다. 반부의 귀환 후 쿠빌라이 칸은 고려 원종에게 조서를 보내 사신과 군사를 일본에 보낼 것이니 중신(重臣)들을 보내 일본으로 인도할 것이며 원정을 방해하지 말라고 통지하였다. 이후 쿠빌라이 칸은 고려에 공물의 양을 줄이는 대신,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 고려의 협력을 종용하였다.
1274년 쿠빌라이 칸은 900척의 함대를 편성하여 고려로 보냈다. 이어 중국 남부에서 온 10만 명의 선원을 태운 배를 약 74m 간격으로 3,500척을 보내고, 고려에서도 장정을 징발하여 일본으로 보냈다. 그해 10월 일본 근처에 도착했다.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은 쓰시마섬, 이키섬, 규슈의 다자이후 주변을 석권하는 데 그쳤다. 이때 몽골의 선박은 다소 악천후에 약한, 용골이 없는 강 보트를 기반으로 설계된 선박이라 풍랑과 해일에 견디지 못하고 파괴되었다. 일본에 대한 첫 공격 이후 일본 수군 왜구가 보복으로 고려의 남부, 남동부를 습격했다가 잔류 몽골군에 의해 퇴각했다.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은 실패로 끝났으나, 일본 원정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일본 정벌 준비를 통해 원정 준비를 위해 설치한 출선기관인 정동행성과 고려정부가 일체화되어, 새로 속국이 된 고려는 원나라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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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vargīya Padmabhūshaṇa Paṇḍita Kuñjīlāla Dube smr̥ti-grant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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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va. Padmabhūshaṇa Paṇḍita Kuñjīlāla Dube Smr̥ti-Grantha Sami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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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 Emer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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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blo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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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an ulsiin uyiin mongolchuudiin hyatadaar bichsen shulgiin songom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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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と歩む世界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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覇帝フビライ 世界支配の野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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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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学習漫画中国の歴史 6モンゴル帝国と東西交流 元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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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シドマイヤーズ シヴィライゼーション VI」、シーズンパスDLC第5弾「ベトナム&フビライ・ハンパック」1月29日配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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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詳 世界史探究|帝国書院 高等学校新課程情報サイ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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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解 歴史総合|帝国書院 高等学校新課程情報サイ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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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blai Khan: The Mongol King Who Remade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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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고려 무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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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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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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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역사를 바꾼 중국 황제 10인의 통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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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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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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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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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元史 권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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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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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史 권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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