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아스트리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스웨덴의 아스트리드는 베스테르예틀란드 공작 칼과 덴마크의 잉보르 공주의 셋째 딸로, 1905년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1926년 벨기에의 브라반트 공작 레오폴드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으며, 1934년 레오폴드 3세가 벨기에 국왕이 되면서 왕비가 되었다. 왕비로서 여성, 어린이, 소외 계층을 위한 사회 활동에 헌신했으나, 1935년 스위스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녀를 기리기 위해 다양한 기념물과 추모 행사가 이루어졌으며, 자녀들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왕족으로 활동했다.
스웨덴 국왕 오스카르 2세의 셋째 아들 베스테르예틀란드 공작 카를과 그의 아내이자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의 둘째 딸인 잉게보르 사이에서 셋째 딸로 태어난 아스트리드는, 1926년 벨기에의 레오폴 3세와 결혼하여 벨기에 왕가와 인연을 맺었다.
2. 유년 시절
아스트리드는 스웨덴과 노르웨이 왕족 가문에서 태어나, 엄격한 교육과 검소한 생활 방식으로 성장했다. 프랑스어로 수업이 진행되는 학교에 다녔고, 재봉, 피아노, 발레, 육아 등을 배웠다. 학교 졸업 후에는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2][3][4]
2. 1. 가족 배경
아스트리드 공주는 1905년 11월 17일, 스톡홀름 중심부의 구스타프 아돌프 광장에 위치한 아르브푸르스텐스 팔라츠에서 베스테르예틀란드 공작 칼과 그의 아내 덴마크의 잉보르 공주 사이에서 셋째이자 막내딸로 태어났다.[2] 그녀의 아버지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 오스카르 2세와 그의 아내 나사우의 소피아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이었으며, 스웨덴의 구스타프 5세 국왕의 동생이었다. 아스트리드의 어머니는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8세 국왕과 그의 아내 스웨덴의 루이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으며,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0세와 노르웨이의 호콘 7세 국왕의 여동생이었다.[3]
아스트리드에게는 두 명의 언니인 마르가레타(덴마크의 악셀 왕자와 결혼), 노르웨이의 마르타 왕세자비, 그리고 남동생인 칼 베르나도트 왕자(전 스웨덴의 칼 왕자, 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가 있었다.[4]
아스트리드는 1923년까지 스톡홀름 중심부의 유르고르덴 섬에 있는 '비스트룀의 빌라'(칼 왕자의 궁전이라고도 알려짐)에서 언니, 남동생과 함께 자랐다. 그 해 가족은 재정적인 이유로 이 집을 떠나야 했다. 1909년 이후, 휴가는 노르셰핑 근처의 발트해 연안의 브로비켄에 있는 가족의 여름 별장인 '빌라 프리드헴'에서 보냈다. 아스트리드는 엄격한 교육과 검소한 생활 방식으로 자랐다. 그녀는 프랑스어로 수업이 진행되는 신트 보트비드 기숙학교에 다녔고, 이후에는 아케르스트롬-쇠데르스트룀 finishing school에 진학하여 재봉, 피아노, 발레, 육아를 공부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아스트리드는 스톡홀름의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2. 2. 성장 환경
아스트리드 공주는 1905년 11월 17일 스톡홀름 중심부 구스타프 아돌프 광장의 아르브푸르스텐스 팔라츠에서 베스테르예틀란드 공작 칼과 잉보르 공주의 셋째이자 막내딸로 태어났다.[2] 아버지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 오스카르 2세와 나사우의 소피아의 셋째 아들이자 스웨덴의 구스타프 5세의 동생이었고, 어머니는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8세와 스웨덴의 루이세의 딸이자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0세와 노르웨이의 호콘 7세의 여동생이었다.[3]
아스트리드는 두 언니 마르가레타(덴마크의 악셀 왕자와 결혼), 마르타 왕세자비와 남동생 칼 베르나도트 왕자(전 스웨덴의 칼 왕자, 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와 함께 1923년까지 스톡홀름 중심부 유르고르덴 섬의 ''비스트룀의 빌라''(칼 왕자의 궁전)에서 자랐다.[4] 1909년부터 가족은 노르셰핑 근처 발트해 연안 브로비켄의 여름 별장 ''빌라 프리드헴''에서 휴가를 보냈다. 아스트리드는 엄격한 교육과 검소한 생활 방식으로 성장했다. 프랑스어 수업이 진행되는 신트 보트비드 기숙학교와 아케르스트롬-쇠데르스트룀 finishing school에서 재봉, 피아노, 발레, 육아를 배웠고, 졸업 후에는 스톡홀름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봤다.
3. 벨기에 왕자와의 결혼
아스트리드는 결혼 선물로 벨기에 정부로부터 보석상 반 베버가 제작한 티아라를 받았다. 이 티아라는 11개의 큰 다이아몬드가 뾰족한 부분에 얹혀진, 그리스 열쇠 모티프의 유연한 다이아몬드 밴도 형태였다. 큰 돌들은 총 100캐럿 정도였으며, 벨기에의 9개 주와 당시 벨기에 식민지였던 콩고를 상징했다.[5] 이후 그녀는 11개의 독립적인 돌 각각을 감싸는 다이아몬드 아치를 추가했다. 이 티아라는 아스트리드 사후 레오폴드 국왕, 릴리안, 레티 공주(일부 착용), 파비올라 여왕, 파올라 여왕을 거쳐 마틸드 여왕에게 전해졌다.[5]
1934년 알베르 1세가 사망하고 남편 레오폴 3세가 즉위하면서 벨기에 왕비가 된 아스트리드는 대공황 속에서 고통받는 국민들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35년 8월 29일, 아스트리드는 레오폴 3세가 운전하던 패커드 120 차량이 스위스 루체른 호수 기슭의 계곡으로 추락하는 사고로 사망했다. 유해는 라켄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 매장되었으며, 레오폴 3세는 사고 현장에 그녀의 이름을 딴 교회를 세웠다. 1983년 레오폴 3세가 사망했을 때, 아스트리드 왕비와 함께 라켄의 노트르담 드 라켄 교회에 매장되었다. 아프리카의 옛 벨기에 식민지였던 르완다-우룬디에 있던 아스트리다(현재의 부타레)는 아스트리드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3. 1. 약혼과 결혼
아스트리드는 왕족 신분 때문에 미래의 영국 국왕 에드워드 8세와 미래의 노르웨이 국왕 올라프 5세를 포함한 여러 왕자들의 신붓감으로 거론되었다.
1926년 9월, 아스트리드는 벨기에 브라반트 공작 레오폴 3세와 약혼을 발표했다. 국왕은 "여왕과 나는 브라반트 공작 레오폴 3세와 스웨덴의 아스트리드 공주의 결혼이 임박했음을 발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공주가 우리 아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레오폴드와 아스트리드는 어떠한 압력이나 국가적 이유 없이 삶을 함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결합입니다."라고 말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것은 사랑의 결혼입니다... 국민들에게 말하십시오. 어떤 것도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들의 결정에는 정치적 고려 사항이 전혀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1926년 11월 4일, 아스트리드 공주는 스톡홀름에서 레오폴드 공자와 시민 결혼을 하였고, 1926년 11월 10일 브뤼셀의 성 미카엘과 성 구둘라 대성당에서 종교적인 결혼을 했다. 시민 결혼 후 부부는 따로 안트베르펜으로 이동하여 벨기에에서 재회했다. 종교 결혼에는 덴마크의 페오도라 공주, 벨기에의 마리 조제 공주, 스웨덴의 마르타 공주, 스웨덴의 잉그리드 공주, 알피드 에켈룬트, 스웨덴의 칼 공자,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 노르웨이의 올라프 왕세자, 마가레타 스텔, 클라스 스파레 백작, 안나 아델스워드, 벨기에의 샤를 공자, 폴케 베르나도트 백작, 시그바르드 베크-프리스 남작, 안네 마리 폰 에센, 칼 스트룀펠트 남작 등 젊은 친구들과 친척들로 구성된 대규모 결혼 파티가 참석했다.
아스트리드 공주는 벨기에 정부로부터 결혼 선물로 벨기에 보석상 반 베버가 제작한 티아라를 받았다. 이 티아라의 원래 버전은 11개의 큰 다이아몬드가 뾰족한 부분에 얹혀진, 스타일리쉬한 그리스 열쇠 모티프의 유연한 다이아몬드 밴도이다. 이 큰 돌들은 그 자체로 총 100캐럿 정도였으며, 벨기에의 9개 주와 당시 벨기에 식민지였던 콩고를 상징했다. 이후 그녀는 11개의 독립적인 돌 각각을 감싸는 다이아몬드 아치를 추가했다. 아스트리드가 죽은 후, 그 티아라는 레오폴드 국왕의 소유가 되었고,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릴리안, 레티 공주는 티아라의 일부를 착용했지만, 릴리안은 여왕의 칭호를 한 번도 얻지 못했으므로 보석 전체를 착용하지는 않았다. 레오폴드는 아들 보두앵을 위해 왕위를 포기했고, 보두앵이 결혼했을 때 레오폴드는 이 티아라를 새로운 왕비인 파비올라 여왕에게 주었고, 파비올라는 결혼식 날 이 티아라를 착용했다. 그녀는 보두앵이 죽은 후 이 보석을 파올라 여왕에게 넘겨주었고, 파올라는 남편 알베르 2세의 퇴위 후 새로운 벨기에 여왕인 마틸드 여왕에게 넘겨주었다.[5]
1926년 11월 4일, 아스트리드는 브라반트 공작 레오폴드와 결혼했다. 왕족 간의 결혼이었지만 열렬한 사랑에 의한 결혼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2남 1녀가 태어났다.
아스트리드가 성장한 스웨덴 왕가는 다른 유럽 왕가에 비해 격식이 훨씬 적었기 때문에, 브라반트 공작 부인 시절 국왕이 사는 라켄 궁전에서 멀지 않은 저택에 살았을 때, 아스트리드는 아이들을 위해 가능한 한 평범한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다. 상류층에서는 그녀가 의례에 익숙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국민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루이즈 거리를 산책하는 아스트리드를 존경했다.
결혼 후 아스트리드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벨기에 왕가가 가톨릭이기 때문이라는 동기였지만, 그녀의 기질과 매우 잘 맞아 경건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3. 2. 결혼 선물
아스트리드 공주는 벨기에 정부로부터 결혼 선물로 벨기에 보석상 반 베버가 제작한 티아라를 받았다. 이 티아라의 원래 버전은 11개의 큰 다이아몬드가 뾰족한 부분에 얹혀진, 스타일리쉬한 그리스 열쇠 모티프의 유연한 다이아몬드 밴도이다. 이 큰 돌들은 그 자체로 총 100캐럿 정도였으며, 벨기에의 9개 주와 당시 벨기에 식민지였던 콩고를 상징했다.[5] 이후 그녀는 11개의 독립적인 돌 각각을 감싸는 다이아몬드 아치를 추가했다.
4. 브라반트 공작 부인 시절
1926년 11월 4일, 브라반트 공작 레오폴드와 결혼하여 브라반트 공작 부인이 되었다. 이 결혼은 왕족 간의 결혼이었지만 열렬한 사랑에 의한 것이었다.
결혼 후 아스트리드는 루터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처음에는 벨기에 왕가가 가톨릭이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였지만, 이후 신앙심이 깊어져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9]
1934년 알베르 1세가 사망하고 남편 레오폴드 3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아스트리드는 벨기에 왕비가 되었다.
4. 1. 소탈한 행보
브라반트 공작 부부는 프랑스 남부에서 신혼여행을 보낸 후 브뤼셀 왕궁의 한 별관으로 이사했다. 신혼여행이 끝난 후, 아스트리드 공주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스트리드는 아름다움, 매력, 그리고 소탈함으로 벨기에 국민들에게 열렬히 환영받았다. 브라반트 공작 부인으로서, 그녀는 다양한 형태의 역경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아스트리드가 성장한 스웨덴 왕가는 다른 유럽 왕가에 비해 격식이 훨씬 적었기 때문에, 아스트리드는 브라반트 공작 부인 시절 국왕이 사는 라켄 궁전에서 멀지 않은 저택에 살면서 아이들을 위해 가능한 한 평범한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다. 상류층에서는 그녀가 의례에 익숙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국민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루이즈 거리를 산책하는 아스트리드를 존경했다.
4. 2. 자녀 출산

1927년 10월, 아스트리드는 딸 조세핀-샬롯 공주를 낳았다. 조세핀-샬롯은 훗날 룩셈부르크 대공비가 되었으며 앙리 룩셈부르크 대공의 어머니가 되었다.[4] 당시 여성은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조세핀-샬롯의 출산은 아스트리드에게 어려운 시기였다.[4] 1930년 9월, 아스트리드는 보두앵 왕자를 낳았으며, 보두앵은 훗날 벨기에 국왕이 되었다.[4]
4. 3. 해외 순방
1928년, 아스트리드와 남편은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 (현재의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그들은 선박 ''인술린데''를 타고 도착했다. 수라카르타를 방문했을 때,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로부터 금으로 된 크리스가 들어있는 상자를 선물로 받았다. 아스트리드는 금으로 상감된 부채가 들어있는 상자를 선물로 받았다. 현지인들은 아스트리드의 따뜻하고 열정적이며 격식 없는 태도에 감탄했다. 부부는 라디오 푸스토코 박물관과 소시에테 하비프로조를 방문하여 와양 공연을 관람했다. 그들은 또한 수라바야와 발리를 방문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5개월을 보낸 후, 부부는 선박 ''체르마이''를 타고 벨기에로 돌아왔다.1932년, 아스트리드와 남편은 아시아와 콩고로 여행했다. 1933년 5월 ''데 로코모티프''의 인쇄물에 따르면, 네덜란드령 동인도 방문 사진은 ''레오폴드 왕자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여행''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 출판되었다. 콩고 방문 후, 아스트리드는 친구 안나 스파르 백작부인( née 안나 아델스바르드 남작 부인)에게 콩고 땅의 장엄한 풍경과 콩고인들이 직면한 고통, 빈곤, 유아 사망률에 대한 그녀의 우려에 대해 편지를 썼다.
4. 4. 가톨릭 개종
루터교 신자로 자란 아스트리드는 레오폴드와 결혼한 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5] 처음에는 벨기에 왕가가 가톨릭이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였지만, 이후 그녀의 기질과 잘 맞아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9] 벨기에의 공식 종교가 가톨릭이었기에 아스트리드는 더 일찍 개종할 것을 고려했으나, 윌리엄 헴믹 신부와 상담한 후 진정으로 가톨릭이 참된 종교라고 믿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5] 1930년 가톨릭으로 개종한 아스트리드는 가까운 어린 시절 친구에게 "내 영혼이 평화를 찾았습니다."라고 털어놓았다.[5] 아스트리드의 개종 날, 시아버지인 알베르 1세 국왕은 "기쁘고 매우 기쁩니다. 이제 모든 가족이 같은 종교로 하나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5]5. 벨기에 왕비 시절
1926년 11월 4일, 브라반트 공작 레오폴드와 결혼했다. 왕족 간의 결혼이었지만 열렬한 사랑에 의한 결혼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2남 1녀가 태어났다.
아스트리드가 성장한 스웨덴 왕가는 다른 유럽 왕가에 비해 격식이 적었기 때문에, 브라반트 공작 부인 시절 국왕이 사는 라켄 궁전에서 멀지 않은 저택에 살면서 아이들을 위해 가능한 한 평범한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다. 상류층에서는 그녀가 의례에 익숙하지 않다고 비판했지만, 많은 국민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루이즈 거리를 산책하는 아스트리드를 존경했다.
결혼 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처음에는 벨기에 왕가가 가톨릭이기 때문에 개종했지만, 이후 경건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5. 1. 즉위
1934년 2월 17일, 벨기에 알베르 1세 국왕이 마르슈레담에서 등산 사고로 사망하면서 남편 레오폴드 3세가 즉위하여 벨기에의 왕비가 되었다.[12] 그해 늦가을, 레오폴드와 아스트리드의 셋째 아이가 태어났는데, 아이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알베르라고 이름 지어졌으며, 훗날 형인 보두앵의 뒤를 이어 벨기에 국왕이 되었다. 현재 벨기에 국왕인 필리프는 알베르의 아들이다.[12]아스트리드는 대공황 속에서 고통받는 국민들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12]
5. 2. 사회 활동
벨기에 왕비로서 아스트리드는 자녀 양육과 벨기에 국민들과의 소통을 증진하는 사회적 대의에 헌신했다. 그녀는 여성, 어린이 및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에 관심을 가졌다. 1935년 벨기에의 경제 위기 동안, "여왕의 호소"라는 공개 서한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의류, 돈, 음식 수집을 조직했다. 아스트리드 왕비는 벨기에의 빈민 정착촌을 방문하기도 했다.[12]아스트리드는 특히 여성들에게 아동 돌봄 및 의료 분야에서 정식 교육을 시키는 데 관심을 가졌다.[13] 그녀는 또한 젊은 소녀들이 재봉사가 되어 직업 기회를 향상시키도록 지원했다.[13] 생 빈센트 드 폴 수녀회와 같은 가톨릭 자선 단체와 ''벨기에 가정 연맹''과 같은 자유주의 단체를 지원했으며,[13] 여성 권리 옹호자들에게 알현을 허락했는데, 예를 들어 마르트 보엘 남작 부인은 벨기에 여성 전국 위원회 회장이었다.[13]
1935년 5월, 아스트리드 왕비는 벨기에 국민들에게 건강 음료를 마시도록 장려하는 활동인 우유 주간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녀는 측근 중 한 명인 가티엥 뒤 파르크에게 엄격한 조사를 거쳐 외국 우유 규정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임무를 맡겼다.[13] 아스트리드 왕비는 종종 구호 위원회의 일환으로 자선 사업을 수행했다.[14]
6. 갑작스러운 죽음
1935년 8월, 아스트리드는 남편 레오폴드 3세와 함께 스위스 루체른 호수로 휴가를 떠났다. 8월 29일, 레오폴드 3세가 운전하던 차가 스위스 루체른 호수 기슭의 계곡으로 추락하면서 아스트리드는 사고로 사망했다. 아스트리드는 라켄 성모 교회의 왕실 묘소에 안치되었다.
6. 1. 사고 경위
1935년 8월, 국왕과 왕비는 스위스 루체른 호수 기슭의 호르브에 있는 별장인 ''빌라 하슬리호른''으로 익명으로 휴가를 떠났다. 조세핀-샬롯과 보두앵은 부모와 함께 여행을 갔고, 한 살 된 알베르 왕자는 브뤼셀에 남았다.1935년 8월 29일, 국왕과 왕비는 귀국하기 전 마지막 하이킹을 하러 산에 갔다. 그들의 운전기사는 패커드 원-투애니 컨버터블 뒷좌석에 앉아 있었고, 국왕이 운전하고 왕비는 지도를 보고 있었다. 오전 9시 30분경, 왕비가 남편에게 무언가를 가리키자 국왕은 도로에서 눈을 뗐다. 차는 도로를 벗어나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내려가 배나무와 충돌했다. 아스트리드 왕비는 차에서 뛰어내리려고 문을 열었지만 충돌 시 튕겨져 나가 나무 줄기에 머리를 부딪혀 즉사했다. 그녀는 불과 29세였고, 넷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기에 이 사고는 이중의 비극이었다.
6. 2. 장례와 애도
1935년 8월 29일, 레오폴드 3세가 운전하는 패커드 120 차량이 스위스 루체른 호수 기슭의 계곡으로 추락하여 동승했던 아스트리드는 사고사했다. 당시 아스트리드는 29세였고 넷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기에 이 사고는 이중의 비극이었다.
유해는 라켄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 매장되었다. 슬픔에 잠긴 레오폴드 3세는 사고 현장에 아스트리드의 이름을 딴 교회를 세웠다. 1983년 레오폴드 3세가 붕어했을 때, 노트르담 드 라켄 교회에 아스트리드 왕비와 함께 매장되었다.
7. 유산
레오폴 3세가 운전하는 차가 스위스 루체른 호수 기슭의 계곡으로 추락하여 아스트리드는 1935년 8월 29일에 사고사했다. 유해는 라켄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 매장되었고, 레오폴 3세는 슬픔에 잠겨 사고 현장에 아스트리드의 이름을 딴 교회를 세웠다.[20][21]
아프리카의 옛 벨기에 식민지였던 르완다-우룬디에 있던 아스트리다(현재의 부타레)는 아스트리드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룩셈부르크의 마리 아스트리드 공주, 벨기에의 아스트리드 공주, 리히텐슈타인의 마리 아스트리드 공주, 오스트리아-에스테의 안나 아스트리드 대공녀, 노르웨이의 아스트리드 공주 등이 그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7. 1. 추모 기념물
1935년, 벨기에 우체국은 그녀의 초상이 검은색으로 윤곽이 그려진 우표를 발행했는데, 이는 ''아스트리드 추모'' 우표로 알려져 있다. 같은 해 말, 같은 디자인으로 결핵 퇴치 기금 우표 시리즈를 발행했다.[18] 파리 8구에 있는 Place de la Reine-Astrid|여왕 아스트리드 광장프랑스어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19]''아스트리드 예배당''[20][21]이라는 기념 예배당이 사고 현장인 스위스에 세워졌다. 스위스 정부는 아스트리드 사망 1년 후 벨기에에 땅을 기증했고, 예배당은 왈롱 시골 교회의 양식으로 지어졌다.[22] 이 예배당은 스웨덴과 벨기에 관광객들의 목적지가 되었다.[25] 남편의 품에서 여왕이 사망한 곳에 세워진 ''왕의 십자가''는 스웨덴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23][24] 근처 박물관에는 사고 당시의 사진과 기념품이 보관되어 있으며, 앞 유리 조각과 배나무의 트렁크 조각도 포함되어 있다. 나무 자체는 1992년 폭풍 이후 쓰러졌다. 자동차는 국왕의 요청에 따라 피어발트슈테터 호의 깊은 곳에 침몰했다.[25]

벨기에 라켄에는 건축가 폴 본듀엘이 설계한 기념관이 1938년 7월 21일에 문을 열었다.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의 건물은 라켄 성모 교회를 마주보고 있으며 라켄 궁전을 등지고 있다. 같은 해, 지역 참전용사 전선의 주도로 조각가 빅토르 루소가 벨기에 코르 생테티엔의 위스테르제 공원에 여왕의 청동 흉상을 세웠다.
인도네시아 보고르 식물원의 아스트리드 애비뉴는 1928년 그녀가 남편과 그곳에서 신혼여행을 보내는 동안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길은 다양한 색상의 칸나 백합으로 장식되어 있다.[26][6] 스웨덴의 레이어 케이크 공주 케이크는 아스트리드와 그녀의 두 자매가 어렸을 때 그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27][28]
7. 2. 민간 전승
스위스 역사가 알렉세이 슈바르첸바흐|Alexei Schwarzenbach프랑스어는 아스트리드 왕비가 벨기에와 스위스에서 어떻게 민간 전승에 등장하게 되었는지 설명한다.[17] 그녀가 사망한 지 몇 달 후, 신혼부부들은 왕비가 죽은 장소에 꽃을 가져왔다.[17] 예배당을 방문한 사람들은 화환과 촛불을 가져오기도 했다.[17] 방문은 만성절과 위령의 날에 절정에 달했다.[17] 왕비는 아름다움, 친절, 로맨스, 결혼의 상징이자 모범적인 가톨릭교 신자로 묘사되었다.[17] 퀴스나흐트 시장은 스위스 주재 벨기에 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부부들은 스위스 전역에서 순례하러 이곳에 옵니다. 아스트리드 여왕이 세상을 떠난 곳을 방문하는 신부 차림의 젊은 신혼부부들은 그녀의 보호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젊은 여왕은 스위스 전설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우리 국민에게 어머니의 사랑과 부부의 신의의 상징이며, 그들은 마음속으로 그녀를 성녀로 여깁니다."[17]7. 3. 이름을 딴 것들
룩셈부르크의 마리 아스트리드 공주, 벨기에의 아스트리드 공주, 리히텐슈타인의 마리 아스트리드 공주, 오스트리아-에스테의 안나 아스트리드 대공녀는 아스트리드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29] 노르웨이의 아스트리드 공주(페르너 부인)와[29] 레오폴 3세 국왕과 릴리안 바엘스 사이에서 태어난 벨기에의 마리-크리스틴 다프네 아스트리드 엘리자베스 레오폴딘 공주(1951년 출생)도 아스트리드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아프리카의 옛 벨기에 식민지였던 르완다-우룬디에 있던 아스트리다(현재의 부타레)는 아스트리드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7. 4. 후손
아스트리드를 기리기 위해 그녀의 후손 4명이 아스트리드라는 이름을 받았다. 손녀인 룩셈부르크의 마리 아스트리드 공주, 벨기에의 아스트리드 공주, 증손녀인 리히텐슈타인의 마리 아스트리드 공주와 오스트리아-에스테의 안나 아스트리드 대공녀이다. 그녀의 조카인 노르웨이의 아스트리드 공주(후에 페르너 부인) 역시 그녀를 기리기 위해 이름 지어졌다.[29] 레오폴 3세 국왕과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릴리안 바엘스 사이에서 태어난 첫 딸인 벨기에의 마리-크리스틴 다프네 아스트리드 엘리자베스 레오폴딘 공주(1951년 출생)도 그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8. 자녀
참조
[1]
서적
Burke's Royal Families of the World
Burke's Peerage
[2]
웹사이트
Princess Astrid
https://www.kungahus[...]
2022-08-11
[3]
웹사이트
Ingeborg of Denmark (1878–1958) {{!}} Encyclopedia.com
https://www.encyclop[...]
2024-02-21
[4]
웹사이트
Astrid of Sweden (1905–1935) {{!}} Encyclopedia.com
https://www.encyclop[...]
2023-06-26
[5]
웹사이트
Mathilde, queen of Belgium {{!}} Facts, Biography, & Children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3-06-26
[6]
웹사이트
Kisah Cinta Putri Belgia Masih Tersimpan di Kebun Raya Bogor
https://m.cnnindones[...]
2016-03-16
[7]
웹사이트
Kunjungan Putra Mahkota Belgia Leopold dan Putri Astrid ke Hindia Belanda
https://historia.id/[...]
2020-06-17
[8]
서적
More Joy Than Pain
[9]
인용
Astrid mon amie
[10]
인용
Albert and the Belgians: Portrait of a King
[11]
서적
Astrid mon amie
[12]
서적
Astrid mon amie
[13]
서적
Astrid: 1905-1935
[14]
Youtube
Koningin Astrid van België (1935)
https://www.youtube.[...]
2019-04-18
[15]
서적
Astrid mon amie
[16]
웹사이트
Princess Astrid celebrates her 80th birthday
http://www.royalcour[...]
2024-08-08
[17]
문서
'Réactions à la mort de la reine Astrid, 1905-1935'
[18]
간행물
Stanley Gibbons Simplified catalogue. Stamps of the World
[19]
웹사이트
LA PLACE DE LA REINE ASTRID
https://www.paristor[...]
2021-04-15
[20]
웹사이트
ASTRID KAPELLE KÜSSNACHT AM RIGI
https://www.zug-tour[...]
2021-04-15
[21]
웹사이트
Astrid Kapelle, Küssnacht am Rigi
https://www.rigi.ch/[...]
[22]
뉴스
Bericht über den Besuch des Belgischen Königs Albert II. in Küssnacht
https://www.nzz.ch/b[...]
2010-08-29
[23]
서적
Rêves Royaux. Réactions à la mort de la reine Astrid, 1905-1935
[24]
웹사이트
Mort de la reine Astrid: le roi des Belges sur les lieux du drame
https://www.tdg.ch/s[...]
2015-08-29
[25]
뉴스
Der belgische König kommt nach Küssnacht
http://mobile.nzz.ch[...]
[26]
뉴스
Taman Astrid - Kebun Raya Bogor
http://www.lovelybog[...]
[27]
웹사이트
Traditionsenlig tårtfrossa - Prinsessyra bäddar för prinsesstårtans vecka
http://www.cisionwir[...]
Cisionwire
2009-09-17
[28]
웹사이트
Swedish Princess Cake
http://www.bakingobs[...]
2009-02-24
[29]
웹사이트
Princess Astrid celebrates her 80th birthday
https://www.royalcou[...]
2012-02-1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