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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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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패커드는 1899년 제임스 워드 패커드와 윌리엄 다우드 패커드 형제가 설립한 미국의 고급 자동차 제조사이다. 1900년대 초 롤스로이스, 르노 등 유럽 브랜드와 경쟁하며 미국과 해외 부유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는 중형차 시장에도 진출했지만, 브랜드 이미지 변화와 경영 위기를 겪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항공기 엔진을 생산했으며, 종전 후 재정적으로는 안정적이었으나, 경영상의 실수로 인해 쇠퇴했다. 1954년 스터드베이커를 인수 합병했으나, 스터드베이커의 재정 악화로 어려움을 겪었고, 1958년 패커드 브랜드는 단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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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커드 - [회사]에 관한 문서

2. 역사

패커드는 1899년 오하이오주 워런에서 '오하이오 자동차 회사'로 시작하여, 초창기부터 고품질의 고급 자동차 생산에 집중했다. 1902년 디트로이트로 본사를 옮기고 '패커드 모터카 컴퍼니'로 사명을 변경하며 본격적인 성장을 시작했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는 피어스-애로우, 피어리스와 함께 미국 최고급 자동차 브랜드 "3P" 중 하나로 꼽혔으며,[18] 앨번 매컬리 사장의 리더십과 제시 빈센트의 기술 개발 아래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소유자에게 물어보세요(Ask the Man Who Owns One)"라는 슬로건은 브랜드의 자신감을 상징했다.[75] 팩커드 트윈 식스와 패커드 에이트 등 혁신적인 모델을 선보이며 기술력을 과시했고, 국내외 부유층과 유명 인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대공황 시기에는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고급 모델 생산을 유지하는 한편, 생존을 위해 패커드 120, 패커드 식스 등 중가 모델 시장에 진출했다. 이는 단기적인 판매량 증가에는 기여했지만, 장기적으로는 패커드의 고급 브랜드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31][36]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군수 생산에 전념하여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을 V-1650으로 라이선스 생산하는 등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했다.[40][41] 그러나 전쟁 후 민간 자동차 생산을 재개하면서 경영상의 어려움에 직면했다. 전후 신차 개발이 늦어졌고, 구식 디자인과 기술(특히 V8 엔진 도입 지연)로 인해 캐딜락 등 경쟁사에 비해 경쟁력이 약화되었다.[46] 중가 모델 판매 비중 증가는 브랜드 이미지 하락을 가속화했다.

1950년대 초, 제임스 낸스 사장의 주도로 브랜드 이미지 회복과 기술 혁신(V8 엔진, 토션 레벨 서스펜션)을 시도했지만, 차체 공급 문제와 품질 관리 실패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49][50] 결국 1954년 스터드베이커와의 합병을 통해 위기를 타개하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재정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51] 합병 이후 생산된 패커드 모델은 스터드베이커 기반의 차량으로 전락하며 '스터드패커드(Studepackard)'라는 오명을 얻었고, 결국 1958년 모델을 마지막으로 패커드 브랜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1. 1899–1905: 창업과 초기

패커드는 1899년 오하이오주워런에서 제임스 워드 패커드(James Ward Packard)와 그의 형 윌리엄 다우드 패커드(William Doud Packard), 그리고 동업자 조지 루이스 바이스(George Lewis Weis)에 의해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오하이오 자동차 회사'(Ohio Automobile Company)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으며, 1899년부터 1903년까지 워런 공장에서 400대의 자동차를 생산했다.[3][4]

창업 계기는 기계 기술자였던 제임스 패커드가 당시 유명했던 윈턴 모터 캐리지 컴퍼니(Winton Motor Carriage Company)의 자동차를 구입한 뒤 품질에 실망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는 윈턴 자동차의 소유주 알렉산더 윈턴(Alexander Winton)에게 직접 개선점을 제안했지만, 윈턴은 "불만 있으면 직접 차를 만들어보라"며 그의 제안을 무시했다.[3] 이에 자극받은 패커드는 더 나은 자동차를 만들기로 결심했고, 1899년 11월 6일 워런에서 첫 번째 패커드 자동차를 선보였다.[4]

1902년 10월 2일,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의 부유한 가문 출신인 헨리 본 조이(Henry Bourne Joy)가 패커드 자동차의 신뢰성에 감명받아 투자를 결정했다. 그는 트루먼 핸디 뉴베리(Truman Handy Newberry), 러셀 A. 알저 주니어(Russell A. Alger Jr.) 등 다른 투자자들과 함께 회사의 자금을 재조달하고, 회사 이름을 패커드 모터카 컴퍼니(Packard Motor Car Company)로 변경했다. 이때 제임스 패커드가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으며, 알저는 부사장을 맡았다.[5] 이후 회사는 운영 기반을 디트로이트로 옮겼고, 헨리 본 조이가 총괄 관리자(나중에는 이사회 의장)를 맡아 회사 운영을 주도했다.

제임스 패커드는 감사의 표시로 자신이 만든 첫 번째 패커드 자동차를 모교인 리하이 대학교에 기증했으며, 이 차량은 현재 대학 내 패커드 연구소에 보존되어 있다.[6] 또 다른 초기 패커드 자동차는 오하이오주 워런에 있는 패커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7]

패커드는 창립 초기부터 2600USD 이상의 고가 자동차 시장에 집중하는 전략을 세웠다. 당시 올즈모빌(Oldsmobile)의 런어바웃 모델이 650USD였고,[10] 콜 모터카 컴퍼니(Cole Motor Car Company)의 자동차가 1500USD 정도였던[11][12] 것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가격대였다. 이러한 고급화 전략을 통해 패커드는 미국 내 부유층은 물론, 해외 시장에서도 롤스로이스(Rolls-Royce Limited), 르노, 이소타 프라스키니(Isotta Fraschini), 메르세데스-벤츠(Mercedes-Benz)와 같은 유럽의 고급 브랜드와 경쟁하는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2. 2. 1906–1930: 고급차 시장에서의 성장

앨번 매컬리 (1929년 타임지 표지). 패커드의 전성기를 이끈 사장으로 "소유자에게 물어보세요"라는 슬로건을 만들었다.


1921년 4월 15일 발행된 팩커드 모터 카 컴퍼니의 골드 본드 표본


패커드는 1930년대까지 고급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매우 높은 경쟁력을 가진 브랜드로 인정받았다.[17] 당시 패커드는 뉴욕주 버팔로의 피어스-애로우 및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피어리스와 함께 미국 자동차 업계의 최고급 브랜드 그룹인 "3P" 중 하나로 꼽혔다.[18]

이 시기 패커드의 성장은 사장 겸 총괄 매니저였던 앨번 매컬리의 역할이 컸다. 그는 국립 자동차 제조 협회 회장을 오랫동안 역임했으며, 패커드를 미국 최고의 고급 자동차 설계 및 생산 기업으로 만들었다. 매컬리는 또한 패커드의 유명한 슬로건인 "소유자에게 물어보세요(Ask the Man Who Owns One)"를 만들었다.[75] 기술 부문에서는 책임자였던 제시 빈센트가 고성능 엔진과 섀시 개발을 주도했다.

패커드 식스 (1913년)


1916년 팩커드 트윈 식스 투어링 (1-35)


1927년 팩커드 4시리즈 식스 모델 426 런어바웃 로드스터


1930년형 7세대 디럭스 에이트 모델 745 로드스터


패커드 식스는 1913년부터 3년간 고급차 플랫폼으로 처음 출시되었으며, 1916년부터는 당시 드물었던 V형 12기통 엔진을 탑재한 팩커드 트윈 식스로 업그레이드되어 고급차 제조사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1912년 이후 주력 엔진은 직렬 6기통이었으나, 1924년부터는 부드러운 회전과 풍부한 토크를 자랑하는 직렬 8기통 엔진을 도입했으며(패커드 에이트는 1925년 등장), 이는 이후 30년간 패커드의 주력 엔진이 되었다.

패커드의 상징적인 보닛 장식도 이 시기에 변화를 겪었다. 1925년 팩커드 에이트에 처음 등장한 "스피드의 여신(Goddess of Speed)" 장식은 곧 모든 모델에 적용되었으며, 1920년대 후반에는 아도니스 장식이 잠시 사용되기도 했다.[2] 1930년대에는 코모란 또는 백조 장식이 등장했다.

케그레스 트랙이 장착된 1916년형 팩커드 트윈 식스 모델 1-35 투어링 세단으로, 러시아 황제 소유 (1917)


패커드는 해외 시장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어 61개국에 진출했다. 1920년대에는 동급 가격대의 다른 어떤 미국 자동차 회사보다 더 많은 차량을 수출했으며, 1930년에는 1930년 기준 2,000달러 이상 가격대의 다른 어떤 브랜드보다 거의 두 배나 많은 자동차를 해외에 판매했다.[19] 1928년 회사의 총수입은 2,188만 9천 달러에 달했다. 1921년에는 새로 취임한 워런 G. 하딩 미국 대통령이 패커드를 타고 취임식에 참석했다. 미국 내에서는 앨 졸슨, 루돌프 발렌티노 같은 영화배우와 존 제이콥 애스터, 헨리 루스 등의 부호들이 패커드를 애용했다.

미국 외에도 벨기에, 이집트, 인도, 노르웨이, 루마니아, 사우디아라비아, 스웨덴, 유고슬라비아, 칠레, 엘살바도르, 멕시코 등 여러 나라에서 정부 관용차나 귀빈용 차량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정부 관용차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쇼와 시대 이전에는 황실과 화족도 애용하는 최고급차로 인식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궁(宮)님이나 주식 투기꾼이 타는 차"로 불릴 정도로 부유층이나 특별한 계층만이 탈 수 있는 차로 여겨졌으며, 다케히사 유메지의 1930년 화장품 광고 문구에도 등장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다. 1931년에는 일본 황실이 10대의 패커드를 소유하고 있었다.[20] 1924년부터 1930년까지 패커드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고급 브랜드이기도 했다.[21]

아이오와주 월컷에 있는 아이오와 80 트럭 박물관에 전시된 1922년형 팩커드 EX 트럭


패커드는 고급 승용차 외에도 트럭을 생산했다. 1912년에는 3톤 화물을 실은 패커드 트럭이 7월 8일부터 8월 24일까지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운행하는 기록을 세웠다. 같은 해 패커드는 이미 104개 도시에 서비스 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다.[22]

필라델피아에 있는 팩커드 모터 코퍼레이션 빌딩은 유명 건축가 앨버트 칸이 설계하여 1910년에서 1911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1980년 미국 국립 역사 등록재에 등재되었다.[23] 또한 1931년까지는 캐나다에서도 패커드 자동차가 생산되었다.[24]

2. 3. 1931–1936: 대공황 시기의 도전과 대응



1930년대 초, 대공황의 여파 속에서 패커드는 생존을 위해 새로운 전략을 모색해야 했다. 1929년 10월 주식 시장 붕괴 이후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패커드는 역설적으로 이전보다 더 호화롭고 비싼 자동차를 선보이는 동시에, 다양한 가격대의 모델을 출시하여 시장 변화에 대응하고자 했다. 이는 회사가 더 넓은 고객층을 확보하고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기존의 주력 모델은 에이트 5인승 세단이었으나,[25] 변화하는 시장 요구에 맞춰 라인업을 확장했다.

1931년형 8세대 스탠다드 에이트 모델 833


1931년, 패커드는 자동차 내부에서 유압식 쇼크 업소버를 조절할 수 있는 '라이드 컨트롤'(Ride Control) 시스템을 선보이며 기술 혁신을 이어갔다.[29] 이듬해인 1932년에는 수석 엔지니어 제시 G. 빈센트가 설계한 V12 엔진의 초호화 모델 트윈 식스를 출시했다. 이 모델의 가격은 당시 기준으로 3650USD부터 시작했으며,[27] 1933년에는 패커드 트웰브로 이름을 변경하여 1939년까지 생산되었다.[28] 같은 해(1932년), 패커드는 중가 시장을 겨냥한 라이트 에이트를 출시했다. 기본 가격은 1750USD로, 기존 스탠다드 에이트보다 735USD 저렴했지만,[30] 높은 제조 비용 문제로 인해 단기간만 생산되었다.

1932년형 9세대 디럭스 에이트 모델 904 세단 리무진


당시 패커드는 GM 산하의 캐딜락이나 포드 산하의 링컨과 같은 거대 기업의 지원을 받는 경쟁사들과 달리 독립적인 회사로서 자원의 한계에 직면했다. 1920년대의 호황 덕분에 1932년 기준으로 약 2000만달러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많은 고급차 제조사들이 파산 위기에 몰렸다. 피어리스는 1932년에 자동차 생산을 중단하고 공장을 칼링 맥주 생산 시설로 전환했으며, 1938년까지 프랭클린, 마몬, 럭스턴, 스턴스-나이트, 스튜츠, 듀센버그, 피어스-애로우 등 유수의 고급차 브랜드들이 문을 닫았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패커드는 단일 생산 라인을 유지하고 모델 간 부품 호환성을 높여 생산 비용을 절감하는 전략을 취했다. 또한, 매년 신모델을 출시하는 대신, 1923년부터 GM의 계획적 진부화 전략을 참고하여 '시리즈' 개념을 도입했다. 새로운 시리즈는 엄격하게 연 단위로 출시되지 않았고, 일부는 2년 가까이, 다른 일부는 7개월 정도만 유지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패커드는 연평균 약 하나의 새로운 시리즈를 선보였다. 1930년 모델은 7세대 시리즈였고, 1942년에는 20세대 시리즈에 도달했다. (숫자 13에 대한 서양의 미신 때문에 13세대 시리즈는 건너뛰었다.)

1934년형 11세대 에이트 모델 1101 컨버터블 세단


대공황이 심화되면서 고급차 수요는 급감했고, 구매 여력이 있는 소수의 부유층조차 20%가 넘는 실업률 속에서 호화로운 차를 타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이에 패커드는 생존을 위해 중가 시장 공략을 본격화했다. 1935년, 패커드는 처음으로 1000USD 미만의 가격표를 단 패커드 120을 출시했다. 이 모델은 기존 패커드의 고급스러움과 품질을 유지하면서도 GM의 상위 양판차인 뷰익, 캐딜락보다 약간 저렴한 고급차 라살(La Salle)과 경쟁하는 시장에 진입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1935년 한 해 동안 120 모델은 24,995대가 판매되어 회사 전체 판매량을 전년 대비 3배 이상 끌어올렸고, 이듬해인 1936년에는 다시 2배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동안 기존의 고급 모델('시니어' 라인: 트웰브, 슈퍼 에이트, 에이트) 판매량은 총 7,000대 수준에 머물렀다. 패커드는 120 모델 생산을 위해 별도의 대량 생산 공장을 건설했다. 1936년에는 패커드의 노동력이 시니어 라인과 중가 모델인 '주니어' 라인(120 등)으로 거의 양분되었지만, 생산량 면에서는 주니어 모델이 시니어 모델보다 10배 이상 많았다. 이는 주니어 모델이 현대적인 대량 생산 기술로 제작된 반면, 시니어 모델은 여전히 많은 수작업과 전통적인 장인 정신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1939년 (17번째 시리즈) Twelve


120과 같은 주니어 모델의 성공은 패커드가 대공황을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31] 장기적으로는 패커드의 고급 브랜드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1935년형 패커드 120은 독립형 전면 서스펜션과 유압 브레이크를 먼저 탑재하는 등,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시니어 모델보다 오히려 더 현대적이었다. (시니어 모델에는 1937년에야 해당 기술들이 적용되었다.) 1937년에는 더 낮은 가격대의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6기통 엔진을 탑재한 패커드 식스(모델명 115C)를 약 1200USD에 출시했다.[34][35] 이 모델은 1938년의 경기 침체기에 회사의 경영을 지탱하는 데 기여했지만, 패커드를 대중적인 브랜드로 인식하게 만들면서 최고급 자동차 제조사로서의 명성을 더욱 약화시켰다는 비판도 받는다.[36] 패커드 120과 식스의 광고는 "한때 동경했던 패커드를 이제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판매를 촉진했지만, 이는 최고급 브랜드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양날의 검이었다. 동시대 다른 고급차 제조사들이 하위 모델 출 시 시 별도 브랜드를 사용(GM의 라살, 포드의 제퍼 등)하여 기존 브랜드 이미지를 지키려 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한편, 패커드는 이 시기 캐나다 온타리오주 윈저에서도 'Packard Motor Company of Canada'를 통해 자동차를 생산했다.[32] 1931년부터 1939년까지 이루어진 캐나다 생산은 제국 특혜를 활용하고 수출용 우측 운전 차량을 제작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937년에는 2,500대 이상을 생산하며 정점을 찍었다.[32] 타이어, 실내 장식, 라디에이터 코어, 헤드램프, 스프링, 휠 등은 캐나다 현지에서 조달했으며 엔진은 현지에서 조립했다.[33] 생산은 1939년에 중단되었지만, 윈저 사무실은 이후에도 수년간 유지되었다.[32]

2. 4. 1937–1941: 중형차 시장 진출과 브랜드 이미지 변화



패커드는 여전히 고급 자동차 브랜드로서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생산량의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은 패커드 원-투애니티와 패커드 슈퍼 에이트 모델이 차지하고 있었다. 더 넓은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패커드는 1937년에 6기통 엔진을 탑재한 패커드 식스(모델명 115C)를 출시했다. 이 모델은 약 1,200달러 (1937년 기준)에 판매되었는데,[34][35] 이러한 중형차 시장 진출 결정은 1938년의 경기 침체 시기와 맞물렸다. '패커드 식스'의 출시는 대중들에게 패커드가 이전보다 덜 고급스러운 브랜드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장기적으로 미국 최고의 고급차 생산자라는 패커드의 명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36] 패커드 식스는 1940년부터 1941년까지 110으로 이름이 바뀌어 생산되었다.

1941년 180 Formal 세단


1941년 110 2-도어 투어링 세단


기술 혁신으로는 1939년에 '이코노-드라이브'('Econo-Drive')라는 이름의 오버드라이브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 장치는 엔진 회전수를 27.8%까지 줄여 연비 향상에 기여했으며, 시속 30mph 이상에서 작동시킬 수 있었다.[37] 같은 해, 패커드는 다섯 번째 횡방향 쇽 업소버를 추가하여 승차감을 개선했고, 120과 식스 모델에는 컬럼 시프트 방식의 변속기인 '핸디시프트'('Handishift')를 옵션으로 제공했다.[38]

1941년 모델에는 완전히 새로운 차체 디자인인 패커드 클리퍼가 도입되었다. 클리퍼는 처음에는 160 모델의 약 322.58cm 휠베이스를 사용하는 4도어 세단으로만 출시되었으며, 120 모델에 사용된 직렬 8기통 엔진을 개량하여 125hp의 출력을 내는 엔진을 탑재했다.[39]

2. 5. 1942–1945: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군수 생산

1942년, 패커드 모터 카 컴퍼니(Packard Motor Car Company)는 100% 군수 생산 체제로 전환했다.[40]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패커드는 항공기 엔진을 다시 제작했는데, 롤스로이스로부터 멀린 엔진을 V-1650으로 라이선스 생산하여 P-51 머스탱 전투기에 장착했다. P-51 머스탱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 병사들에게 아이러니하게도 "하늘의 캐딜락"으로 알려지기도 했다.[41][42] 패커드는 또한 미국 PT 보트(각 보트에는 3개의 엔진이 사용됨)와 일부 영국의 순찰정에 사용될 1350, 1400, 1500마력 V-12 해양 엔진을 제작했다. 전시 생산 계약 가치 기준으로 패커드는 미국 기업 중 18위를 기록했다.[43]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날 무렵, 패커드 모터 카 컴퍼니는 55,000대 이상의 전투기 엔진을 생산했다. 1944년 매출은 4.551186억달러였으며, 1945년 5월 6일까지 패커드는 5.68억달러 규모의 전쟁 주문 잔고를 가지고 있었다.[40]

2. 6. 1946–1956: 전후 복구와 경영 위기

1950~1955년경 뉴욕 주 휴렛 1137 브로드웨이에 위치한 팩커드 딜러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당시 팩커드는 약 3,300만 달러의 자산을 보유하며 재정적으로 건실했지만, 이후 경영상의 판단 착오가 누적되기 시작했다. 다른 미국 자동차 회사들처럼 팩커드도 1945년 말 민간 차량 생산을 재개했으나, 1942년 모델을 약간 수정한 차량을 1946년 모델로 출시하는 데 그쳤다. 당시 클리퍼 모델의 생산 설비만 가동 가능했기 때문에, 고급 모델인 시니어 시리즈는 단종되었다. 시니어 시리즈의 금형이 야외에 방치되어 녹슬었다거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스탈린에게 넘겨주었다는 설도 있지만, 소련의 ZiS-110 리무진은 별개의 디자인이었다.[44]

1949년 팩커드 컨버터블 쿠페


1950년 팩커드 에이트 클럽 세단


스터드베이커와 카이저-프레이저 등이 새로운 디자인의 차체를 선보이자 클리퍼는 구식이 되었다. 팩커드는 전쟁 직후 재정 상태가 양호했음에도 1941년 디자인의 생산 비용을 회수할 만큼 충분한 판매량을 올리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쟁사들이 1948년과 1949년에 신차를 출시했지만, 팩커드는 1951년까지 신차를 내놓지 못했다. 대신 기존 차체에 새로운 판금을 덧대는 방식으로 차량을 업데이트했는데, 이로 인해 차량 중량이 약 90.72kg 증가하는 결과를 낳았다.[46] 6기통 모델은 미국 시장에서 단종되었고, 컨버터블 모델이 추가되었다. 이 새로운 디자인은 기존 클리퍼와의 연관성을 감추려 했으며, '클리퍼'라는 이름도 잠시 사용되지 않았다.

1948년 모델에 채택된 디자인은 소위 폰톤("욕조") 스타일이었다. 이는 전쟁 중에는 미래지향적으로 여겨졌고, 1949년 내쉬에서 더욱 발전했으며 유럽의 사브 92–96 모델에서 수십 년간 유지되었지만, 1948년부터 1950년까지의 팩커드 스타일링은 시장의 반응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세련되고 고전적인 멋과 현대적인 감각의 조화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임신한 코끼리"라는 조롱 섞인 별명도 얻었다. 자동차 평론가 톰 맥캐힐은 ''모던 메카닉스'' 1948년 1월호에서 새로 디자인된 팩커드를 "염소", "메리 여왕 모자를 쓴 노부인"에 비유하며 혹평했다. 팩커드는 1949년 모델을 총 116,000대 판매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신차 수요가 폭발적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시적인 호황이었다.

캐딜락이 1948년에 선보인 세련되고 항공기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은 팩커드의 "욕조" 스타일을 즉시 구식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또한 캐딜락은 1949년에 새로운 OHV V8 엔진을 도입하며 기술적 우위를 점했지만, 팩커드는 여전히 구식 직렬 8기통 플랫헤드 엔진에 의존하고 있어 경쟁력 약화가 두드러졌다.

1950년 팩커드 에이트 4도어 세단


팩커드는 1950년경까지 캐딜락보다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지만, 이는 대부분 중가 모델 덕분이었다. 이 시기 캐딜락은 자동 변속기(1941년 Hydramatic)를 미국에서 가장 먼저 제공한 제조사 중 하나였다. 팩커드는 1949년 최고급 모델에, 1950년부터는 모든 모델에 자체 개발한 Ultramatic 자동 변속기를 제공하며 기술 격차를 줄이려 했으나,[45] 시장에서는 이미 뷰익의 경쟁자로 인식되는 등 브랜드 위상이 하락하고 있었다.[46] 팩커드가 자체 설계하고 제작한 울트라매틱은 2단 토크 컨버터에 록업 기능을 갖춘,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설계였으나, 변속 부드러움, 가속력, 신뢰성 면에서 GM의 하이드라매틱에는 미치지 못했다. 울트라매틱 개발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하면서 현대적인 V8 엔진 개발은 더욱 지연되었다. 또한, 캐딜락의 인기 모델인 쿠페 드 빌에 대응하기 위해 2도어 하드탑 대신 스테이션 세단을 선보였는데, 강철 차체에 나무 장식을 덧댄 이 왜건형 모델은 3년간 총 3,864대 판매에 그쳤다.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의 팩커드는 전통적인 장인 정신과 고급 재료로 만들어졌지만, 저가 모델 판매 비중 증가, 의문스러운 마케팅 결정 등이 겹치며 고급차 시장의 강자로서의 지위가 흔들렸다. 1950년 판매량은 42,000대로 급감했다. 당시 사장이었던 조지 T. 크리스토퍼는 1951년 페이스리프트에서 점진적인 스타일 변화를 고수하려 했으나, 급진적인 새 디자인을 요구하는 내부 의견에 밀려 결국 사임했다. 후임으로는 재무 담당 임원이었던 휴 페리가 임시 사장을 맡았으나, 그는 영구적인 사장직을 원치 않았고 외부 인사를 물색했다.

1951년 팩커드 300


1951년, 팩커드는 디자이너 존 라인하르트의 주도로 재설계되었다. 허리선이 높고 각진 윤곽은 당시 유행하던 유선형 디자인과 차별화되는 현대적인 스타일을 추구했다. 주요 특징으로는 일체형 앞 유리, 랩어라운드 뒷 유리, 긴 휠베이스 모델의 작은 테일핀, 전통적인 수직 그릴을 대체한 전폭 그릴, 보닛과 앞 펜더 높이를 맞춘 둔탁한 "가이드라인 펜더" 등이 있었다. 약 309.88cm 휠베이스 모델은 200 시리즈(스탠더드, 디럭스 2/4도어), 250 시리즈 메이페어 2도어 하드탑(팩커드 최초) 및 컨버터블에 사용되었다. 고급형인 300 및 패트리션 400 모델은 약 322.58cm 휠베이스로 제작되었다. 200 시리즈는 저가형 모델이었고 비즈니스 쿠페도 포함되었다. 새로운 외관은 올즈모빌과 유사하다는 평을 받았는데, 올즈모빌은 더 저렴한 가격에 훨씬 많이 팔리는 브랜드였다.

250, 300, 400/패트리션 모델이 그 해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패트리션은 기존의 커스텀 에이트 라인을 대체하는 최고급 모델이었다. 원래 356CID 엔진을 탑재할 계획이었으나, 판매량 부족을 우려하여 보어를 줄인 327CID 엔진(이전 중간급 엔진)을 사용했다. 이 엔진이 356 엔진과 거의 동일한 성능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정은 팩커드의 고급차 이미지를 더욱 훼손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1951년에는 경쟁사들의 신차 출시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팩커드의 재설계된 라인업은 약 101,000대의 판매고를 올리며 일시적으로 반등했다. 그러나 1951년형 팩커드는 자동 변속기라는 현대적인 요소와, OHV V8 엔진이 표준이 되어가던 시기에 여전히 구식 직렬 8기통 플랫헤드 엔진을 사용한다는 한계를 동시에 안고 있었다. 팩커드의 직렬 8기통 엔진은 캐딜락 V8 엔진보다 힘은 부족했지만 진동이 적다는 장점이 있었고, 울트라매틱 변속기와 결합하여 조용하고 부드러운 주행 경험을 제공했다. 하지만 고압축 단행정 엔진을 중심으로 한 마력 경쟁에서는 명백히 뒤처지고 있었다.

팩커드의 이미지는 점차 고루하고 구식으로 인식되어 젊은 고객들에게 매력을 잃어갔다. 조사에 따르면 팩커드 고객의 약 75%가 기존 팩커드 소유주였으며, 신규 구매자 유입은 거의 없었다. 회사의 노령화된 경영진도 문제였다. 1950년대 초 팩커드 이사회의 평균 연령은 67세였으며, 임원 연금 제도가 없어 고령 임원들의 은퇴를 유도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임시 사장 휴 페리는 외부에서 새로운 리더를 영입하기로 결정했고, 가전제품 회사 핫포인트 출신의 제임스 낸스를 영입했다. 당시 52세였던 낸스는 팩커드의 가장 젊은 임원보다도 10년 이상 젊었다. 낸스는 취임 후 임원 연금 제도를 도입하여 경영진의 세대교체를 유도하고, 한국 전쟁 군수 계약을 확보하는 한편, 희석된 팩커드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1953년 팩커드 카리비안 컨버터블


낸스는 팩커드가 중가 모델 생산을 중단하고 캐딜락과 직접 경쟁할 고급 모델에만 집중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전략의 일환으로 1953년 소량 생산 모델인 카리비안 컨버터블(750대 한정)을 선보였다. 이는 같은 해 출시된 다른 특별판 컨버터블(뷰익 스카이락, 올즈모빌 98 피에스타, 캐딜락 엘도라도, 크라이슬러 뉴요커 딜럭스)과 경쟁하며 호평을 받았고, 경쟁 모델들보다 더 많이 팔렸다. 패트리션 400 세단, 데르함의 맞춤형 리무진 등 한정판 고급 모델들은 과거 팩커드의 명성을 되살리는 데 일부 기여했지만, 1951년에 도입된 "하이 포켓" 스타일은 더 이상 대중적인 모델의 구매자들을 끌어들이지 못했고, 1953년 전체 판매량은 오히려 감소했다. 게다가 이 시기 직원 사기 저하로 인해 팩커드의 조립 품질도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다.

한편, 미국의 독립 자동차 제조사들은 전후 초기 호황 이후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빅 3"의 거센 공세에 직면하며 어려움을 겪었다.[47] 1953년에서 1954년 사이 포드와 GM은 가격 인하와 물량 밀어내기식의 극심한 판매 경쟁을 벌였는데, 이는 독립 제조사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생존을 위해 독립 제조사들은 합병을 모색했다. 1953년 카이저는 윌리스와 합병하여 카이저-윌리스가 되었고, 내쉬와 허드슨은 합병하여 아메리칸 모터스 공사 (AMC)가 되었다.[48] 내쉬의 사장 조지 W. 메이슨은 팩커드, 스터드베이커까지 포함하는 4개사 합병을 구상하며 낸스와 접촉했고, AMC가 팩커드의 울트라매틱 변속기와 V8 엔진(당시 개발 중)을 구매하는 데 합의하기도 했다. 이 부품들은 실제로 1955년형 허드슨과 내쉬 모델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메이슨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AMC의 새로운 리더 조지 롬니의 신중한 태도로 인해 완전한 합병에는 이르지 못했다. 게다가 1950년대 초반 크라이슬러와 포드가 팩커드 딜러들을 자사 네트워크로 빼가는 공세를 펼치면서 팩커드의 판매망은 더욱 약화되었다. 한국 전쟁 특수로 확보했던 군수 계약마저 1953년 종전 이후 GM 사장 출신인 찰스 E. 윌슨 국방장관에 의해 대폭 삭감되면서 팩커드의 재정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팩커드는 기술 개발을 지속하여, 빌 앨리슨이 개발한 토션 레벨 서스펜션인 ''토션 레벨 라이드''를 선보였다. 차량 각 측면의 앞뒤 서스펜션을 긴 토션 바로 연결하여 차체 기울어짐(피칭)을 줄이면서도 부드러운 승차감을 구현했고, 하중 변화에 따라 차체 수평을 자동으로 유지하는 전기 기계식 보상 장치("레벨라이저")까지 갖춘 혁신적인 기술이었다.[49][50]

그러나 1953년 말, 차체 공급업체인 브리그스사가 경영난 끝에 경쟁사인 크라이슬러에 인수되면서 팩커드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크라이슬러는 1954년형 모델까지만 차체 생산을 허용했고, 이후 공급을 거절했다. 결국 팩커드는 브리그스사의 빈 공장을 임대하여 1955년형 모델부터 차체를 자체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자금 부족으로 완전한 신형 개발은 어려웠고, 1951년형 차체를 디자이너 딕 티그가 대폭 수정한 마이너 체인지 모델을 내놓았다. 이 1955년형 모델에는 마침내 자체 개발한 V8 엔진과 혁신적인 토션 레벨 서스펜션이 탑재되었다. 판매는 일시적으로 증가했지만, 급조된 생산 라인과 미숙한 인력으로 인해 초기 품질 불량이 속출했고, 이는 팩커드의 명성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품질 문제는 점차 개선되었지만, 실추된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낸스는 독립 생존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1954년 10월 중견 자동차 제조사인 스터드베이커를 흡수 합병하여 스터드베이커-팩커드 코퍼레이션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이는 패착으로 드러났다. 스터드베이커는 높은 인건비 등으로 만성적인 고비용 구조와 재정 부실 상태에 있었으며, 합병 직후 스터드베이커 측이 손익분기점을 낮춰 보고했다는 회계 부정이 드러났다. 사전 실사 없이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된 합병은 결국 팩커드의 부담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막대한 설비 투자와 방위 산업 수주 실패까지 겹치면서 1956년에는 회사가 파산 위기에 몰렸다.

최종기 패커드의 후면부. 스터드베이커의 마크가 붙어 있어 '스터드패커드'라고 불렸다.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결국 1956년 8월 항공기 제조사 커티스-라이트와 3년 기한의 경영 고문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커티스-라이트의 진짜 목적은 스터드베이커-팩커드의 막대한 적자를 이용하여 자사의 세금을 줄이는 데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실질적인 경영 개선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계약 기간이 끝나자 커티스-라이트는 손을 뗐고, 회사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 시기 팩커드는 과거의 명성과 품질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1955년에는 "클리퍼"라는 차명 사용을 두고 팬 아메리칸 항공으로부터 상표권 침해 소송을 당했고, 1956년형 모델은 후차축 결함으로 리콜 사태를 겪었다. 브랜드 이미지 추락과 품질 문제로 인해 시장의 신뢰는 급격히 하락했고, 판매량은 곤두박질쳤다. 실망한 고객들은 캐딜락이나 링컨 등 경쟁 브랜드로 이탈했고, 딜러들도 취급 브랜드를 바꾸기 시작했다.

판매량 급감으로 인해 독자적인 차체와 섀시 유지가 불가능해지자, 1956년 모델을 끝으로 디트로이트 공장에서의 팩커드 생산과 자체 V8 엔진 사용은 중단되었다. 1957년형부터 팩커드는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의 스터드베이커 공장에서 생산되었으며, 스터드베이커의 차체와 엔진을 공유하고 내외장만 고급스럽게 꾸민 모델로 전락했다. 이 차들은 "스터드패커드(Studepackard)", "팩베이커(Packbaker)"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불렸다. 회사의 미래가 불투명해지자 인재 유출도 심각해졌다. 기술자 존 델로리언은 1956년 GM으로 이직했고, 디자이너 딕 티그는 1959년 AMC로 옮겨 디자인 부문 부사장까지 올랐다.

경영진은 타사 지원 유치, 차기 모델 개발 등 브랜드 유지를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팩커드 브랜드의 존속은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958년 모델을 마지막으로 팩커드 브랜드의 자동차 생산은 중단되었고, 브랜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62년에는 회사명마저 스터드베이커 코퍼레이션으로 변경되면서 자동차 제조사로서 팩커드의 역사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2. 7. 스터드베이커-패커드 (1954-1958)

1954년 10월 1일, 패커드 모터 카 컴퍼니는 경영 부실 상태였던 스터드베이커 기업을 인수하여 미국 4위의 자동차 회사를 만들었지만, 이는 당시 상황에 대한 완전한 이해나 재정적 파급 효과에 대한 고려 없이 이루어진 결정이었다.[51] 스터드베이커-패커드(S-P)의 사장 제임스 낸스는 과거 켈비네이터와 핫포인트 대표 시절 경쟁 관계였던 아메리칸 모터스(AMC)의 조지 메이슨과 함께 자동차 산업 '빅 4' 구상을 논의했었다. 그러나 메이슨이 1954년 10월 8일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내시, 허드슨, 스터드베이커, 패커드를 통합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메이슨의 후임인 AMC의 조지 W. 로메니 사장은 합병 논의는 없다고 선언하며,[52] 메이슨이 약속했던 S-P로부터의 부품 구매는 이행했지만, S-P가 AMC로부터 부품을 구매하기로 했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패커드의 엔진과 변속기가 상대적으로 고가였기 때문에 AMC는 자체 V8 엔진 개발에 착수하여 1956년 중반까지 외주 부품을 대체했다.[53] 결국 패커드의 스터드베이커 인수는 치명적인 실수로 드러났다. 패커드는 재정적으로 비교적 안정적이었지만, 스터드베이커는 높은 간접비와 생산 비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손익분기점을 맞추기 위해 연간 25만 대 생산이라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합병 과정에서 실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합병 이후 스터드베이커의 악화된 재정 상황과 회계상의 문제점(손익분기점 과소 추산)이 드러나면서 패커드의 생존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에 지원 요청이 거절되자, 1956년 8월 항공기 제조사 커티스-라이트와 3년 기한의 경영 고문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커티스-라이트의 주된 목적은 스터드베이커-패커드의 누적 적자를 이용한 세금 감면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실질적인 경영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계약 종료 후 커티스-라이트가 손을 떼면서 회사의 재정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낸스는 1954년에 완전한 디자인 변경을 기대했지만, 필요한 시간과 자금이 부족했다. 그 해 패커드 라인업(총 생산량 89,796대)은 주력 모델인 클리퍼 라인(250 시리즈 단종), 메이페어 하드탑 쿠페 및 컨버터블, 그리고 새로운 엔트리 레벨 롱 휠베이스 세단인 캐벌리어로 구성되었다. 클리퍼 중에는 하드탑과 유사한 스타일의 스포츠스터라는 필러 쿠페도 있었다. 1954년형 스타일은 헤드라이트와 테일라이트 수정 등 본질적으로 트림 변경 외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플래그십 패트리션 시리즈에는 새로운 하드탑 모델인 퍼시픽이 추가되었고, 모든 고급 패커드에는 보어를 확대한 359CID 엔진이 탑재되었다. 1930년대에 에어컨을 도입했던 패커드는 1942년 이후 처음으로 에어컨을 다시 제공하기 시작했다. 클리퍼는 슈퍼 파나마라는 하드탑 모델로도 출시되었지만, 판매량은 31,000대로 감소했다(클리퍼는 전체 생산량의 80% 이상을 차지했다).

1955년형 패커드 패트리션


낸스가 기대했던 새로운 모델은 스터드베이커 합병 문제로 1955년형으로 지연되었다. 패커드의 스타일리스트 딕 테이그가 디자인한 1955년형 라인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차체는 완전히 업데이트되고 현대화되었고, 서스펜션도 전후 토션 바와 전기 모터를 사용한 전후 연동식 차고 자동 조정 장치(토션 레벨 서스펜션)를 갖춘 혁신적인 방식이었다. 이 서스펜션은 적재량이나 도로 상태에 관계없이 차체의 수평을 유지해주었다. 새로운 디자인과 함께 패커드는 수십 년간 사용해 온 직렬 8기통 엔진을 대체하는 352CID 배기량의 새로운 오버헤드 밸브 V8을 선보였다. 파워 스티어링과 브레이크는 물론 전동 창문 등 다양한 편의 장비도 제공되었다. 당시 에어컨은 모든 자동차 제조사에서 제공되었지만, 고급차를 표방했음에도 1955년과 1956년형 패커드에는 소수의 차량에만 장착되었다. 1955년 모델 연도 판매량은 업계 전체가 호황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클리퍼를 포함하여 55,000대에 그쳤다.

1955년 모델 생산이 시작되면서 차체 공급 문제가 불거졌다. 1953년 말, 패커드 차량의 차체 제조를 맡고 있던 브릭스 제조 회사가 경영 문제로 경쟁사인 크라이슬러에 인수되면서 패커드는 차체 공급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브릭스는 1953년 말 계약 만료 후 차체 공급 중단을 통보했고, 패커드는 1954년형 생산까지만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패커드는 브릭스의 빈 공장을 임대하여 디트로이트 코너 애비뉴에 있는 작은 공장에서 차체 생산 및 최종 조립을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이 시설은 너무 작아서 생산 지연과 품질 문제를 끊임없이 야기했다. 급조된 라인에서 미숙한 인력으로 생산된 차량의 낮은 품질 관리는 회사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손상시켰고, 이는 1956년 판매량 급감으로 이어졌다. 품질 문제는 1년 이상이 지나서야 대부분 해결되었지만, 패커드의

3. 콘셉트 카

1956년 프레딕터, 스터드베이커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50년대 동안 패커드는 미국 자동차 구매 대중의 관심을 끌고 브랜드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여러 '드림 카', 즉 콘셉트 카를 제작했다. 이러한 시도는 단순히 디자인 실험에 그치지 않고, 때로는 실제 양산 모델로 이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1952년 캐리비안은 이후 양산형 팬 아메리칸으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캐리비안이 출시된 직후, 패커드는 발보아라는 이름의 프로토타입 하드탑 모델을 선보였다.[56] 이 차는 환기를 위해 창문을 내릴 수 있는 독특한 역경사 뒷유리 디자인을 특징으로 했는데, 이는 훗날 1957년 머큐리가 양산차에 처음 적용하여 1966년까지 생산한 디자인 요소이다. 1954년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팬서(데이나라고도 불림) 역시 이 시기의 주요 콘셉트 카 중 하나이다.

1955년에는 400 하드탑 모델을 기반으로 한 리퀘스트가 등장했다. 이 차는 과거 모델을 연상시키는 클래식한 수직형 패커드 플루티드 그릴을 다시 채택하여 전통적인 디자인으로의 회귀를 시도했다. 총 10대가 제작되었으나, 쇼룸에서 실제로 판매된 것은 4대에 불과했다.

1957년에는 '블랙 베스'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엔지니어링 시험차가 제작되었다. 공식 명칭은 아니었지만, 이 차는 미래 자동차에 적용될 새로운 기능들을 시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디자인적으로는 1958년 에드셀과 유사한 면이 있었으며, 패커드의 특징인 좁은 소 멍에 모양의 수직 그릴과 당시 크라이슬러 차량을 연상시키는 듀얼 헤드라이트가 달린 앞 펜더 디자인이 적용되었다. 안타깝게도 블랙 베스는 패커드 공장이 문을 닫은 직후 회사에 의해 폐기되었다.

딕 티그가 디자인한 프레딕터는 1956년에 공개된 패커드의 마지막 쇼 카였다. 1957년형 양산차 디자인의 방향을 제시한 이 하드탑 쿠페는 여러 혁신적인 기능을 선보이며 당시 큰 주목을 받았다. 문을 열거나 스위치 조작으로 지붕 일부가 열리는 루프 섹션은 이후 등장하는 T-탑보다 훨씬 앞선 시도였으며, 승객의 편안한 승하차를 돕기 위해 회전하는 좌석은 이후 크라이슬러GM의 일부 고급 모델에 적용되었다. 또한 동시대 선더버드에서 볼 수 있었던 오페라 윈도우(포트홀), 양산형 아반티에 적용된 오버헤드 스위치, 후드 라인을 따라 유려하게 이어지며 중앙 콘솔 영역에 다이얼을 배치한 미래지향적인 대시보드 디자인 등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들이 대거 적용되었다. 프레딕터는 다행히 파괴되지 않고 보존되어, 현재 사우스벤드, 인디애나의 센터 포 히스토리 내 스터드베이커 국립 박물관 구역에 전시되어 있다.

아래는 패커드가 제작한 주요 콘셉트 카 목록이다.

패커드의 주요 콘셉트 카
연도모델명비고
1944패커드 팬텀브라운 폭격기, 매콜리의 어리석음으로도 불림
1951패커드 팬 아메리칸매콜리 스피드스터로도 불림 (에드워드 매콜리의 이름을 땀)
1952패커드 팬 아메리칸 / 팬더-데이토나
1953패커드 발보아역경사 뒷유리 특징
1954–1955패커드 팬서
1955패커드 리퀘스트클래식 그릴 복귀, 10대 제작
1956프레딕터마지막 쇼 카, 혁신적 기능 다수 탑재
1957패커드 블랙 베스엔지니어링 시험차 (비공식 명칭), 주행 가능한 디자인 제안


4. 엔진

패커드는 우수한 성능과 신뢰성을 갖춘 엔진을 설계하고 제작했다. 자동차, 항공기, 선박 등 다양한 용도의 엔진을 생산했다.

'''자동차 엔진'''

패커드는 초기에 12기통 엔진인 "트윈 식스(Twin Six)"와 저압축 직렬 8기통 엔진을 제공했으나, 16기통 엔진은 출시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성공적인 직렬 8기통 플랫헤드 엔진을 계속 사용했다. 이 엔진은 GM나 크라이슬러의 새로운 OHV V8 엔진만큼 빠르지는 않았지만, 진동이 없는 부드러운 작동감을 특징으로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구매자들에게는 구식으로 여겨졌다.[46]

패커드는 자동 변속기인 Ultramatic[45]을 자체적으로 설계하고 제작했다. 이로써 패커드는 GM 외에 자체적으로 완전한 자동 변속기를 개발한 유일한 미국 자동차 제조사가 되었다. 울트라매틱은 1949년 최상위 모델에서 제공되었고, 1950년 이후에는 모든 모델에서 제공되었다. 울트라매틱은 변속의 부드러움, 가속, 신뢰성 면에서 GM의 하이드라매틱에 미치지 못했다. 울트라매틱에 투자된 자원은 패커드가 현대적인 V8 엔진을 개발할 기회를 박탈했다.[46]

1955년이 되어서야 패커드는 고압축 V8 엔진을 도입했는데, 이는 미국 자동차 회사 중 가장 늦은 축에 속했다. 이 엔진은 물리적으로 크고 완전히 전통적인 설계로, 초기 캐딜락, 뷰익, 올즈모빌, 폰티악, 스터드베이커 케터링(Kettering) 엔진의 여러 특징을 모방했다. 320cuin 및 352cuin 배기량으로 생산되었다. 카리비안 모델은 2개의 4배럴 기화기를 장착하여 275hp의 출력을 냈다. 1956년에는 374cuin 버전이 시니어 모델에 사용되었고, 카리비안의 2개의 4배럴 기화기는 305hp의 출력을 냈다.

'''항공기 엔진'''

패커드는 항공기 엔진 분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석 엔지니어 제시 G. 빈센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 공군에서 널리 사용된 V12 항공기 엔진인 "리버티 엔진"을 개발했다.

전간기 동안 패커드는 세계 최초의 디젤 항공 엔진 중 하나인 225hp DR-980 레이디얼 엔진을 제작했다. 이 엔진은 스틴슨 SM-8D와 같은 항공기에 동력을 공급했으며, 84시간 이상 비행하는 기록적인 지구력 비행에서 벨랑카 CH-300의 동력으로 사용되었다. 이 기록은 50년 이상 유지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패커드는 다시 항공기 엔진 생산에 주력했다. 롤스로이스(Rolls-Royce Limited)로부터 멀린 엔진을 V-1650으로 라이선스 생산했다.[40] 이 엔진은 P-51 머스탱 전투기에 성공적으로 사용되었으며, P-51 머스탱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 병사들에게 아이러니하게도 "하늘의 캐딜락"으로 알려졌다.[41][42]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날 무렵, 패커드 모터 카 컴퍼니는 55,000대 이상의 전투기 엔진을 생산했다.[40]

전후에는 미국 공군을 위해 XJ41과 XJ49라는 두 가지 터빈 항공기 엔진을 개발하기도 했다. 1956년 커티스-라이트가 인수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패커드가 자체 제트기를 판매하려 했기 때문이다.[65]

'''선박 엔진'''

패커드의 엔진은 해상에서도 활약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리버티 엔진은 해상용으로 개조되어 발명가이자 보트 개척자인 가 우드 아래에서 191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여러 세계 기록을 세웠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패커드는 또한 미국 PT 보트 (각 보트에는 3개의 엔진이 사용됨)와 일부 영국의 순찰정에 1350hp, 1400hp, 1500hp V-12 해양 엔진을 제작했다.[40] V12 리버티의 후속 모델의 해상 버전은 세 가지 버전( M3-2500, M4-2500 및 M5-2500 )으로 개조되어 전쟁의 상징인 PT 보트의 동력을 공급했다.

노스 아메리칸 P-51 머스탱의 후기형 모델은 롤스로이스 멀린의 라이선스 생산 버전인 팩커드 V-1650 멀린으로 구동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패커드는 자동차 버전을 기반으로 하고 전쟁 생산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플랫헤드 디자인의 새로운 6기통(모델 1M-245) 및 8기통(모델 1M-356) 해상 엔진 라인을 생산했다. 1M-245형 엔진은 1947년 봄부터 1951년 1월까지 1,865대만 생산되었으며, 현재 생존한 것은 소수에 불과하다.[62] 1M-356형 엔진은 1947년과 1950년 사이에 약 1,525대가 생산되었다.[63] 더 희귀한 것은 실험적인 "R"형 레이싱 버전(1M-245 "R")으로, 현재 1936년 가 우드 스피드스터에 동력을 공급하는 1M-245 R 6기통 엔진 1대만 생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총 10대가 생산되었다.[64]

5. 모델



패커드는 초기에 단기통 모델(A, B, C, E, F, M)과 2기통 모델(G)을 생산했으며, 이후 4기통 모델(K, L, N, 24, 18, 30)로 발전했다. 1910년대를 거치며 패커드는 점차 고급 자동차 시장의 강자로 자리 잡았다.

1913년에는 고급차 플랫폼으로 패커드 식스가 처음 출시되었고, 1916년에는 V-12 엔진을 탑재한 패커드 트윈 식스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이 시기 패커드는 뉴욕주 버팔로의 피어스-애로우,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피어리스와 함께 미국 자동차 업계의 "3P" 중 하나로 불리며 최고급 브랜드로 인정받았다.[18] 제임스 앨번 매컬리 사장의 지휘 아래 패커드는 고급 자동차의 디자인과 생산에서 최고 수준을 달성했으며, "소유자에게 물어보세요(Ask the Man Who Owns One)"라는 유명한 슬로건을 만들었다. 1925년 패커드 에이트에 처음 등장한 "스피드의 여신(Goddess of Speed)" 보닛 장식은 이후 패커드의 상징이 되었고, 1930년대에는 가마우지(Cormorant) 또는 백조 장식이 사용되기도 했다.[2]

1920년대에 패커드는 동급 가격대에서 가장 많은 자동차를 수출했으며, 특히 1930년에는 당시 2000USD 이상 가격대의 다른 어떤 브랜드보다 거의 두 배나 많은 자동차를 해외에 판매했다.[19] 1931년에는 일본 황실이 10대의 패커드를 소유할 정도였다.[20] 1924년부터 1930년까지 패커드는 미국 내에서도 최고 판매 고급 브랜드였다.[21] 고급 승용차 외에도 패커드는 트럭도 제작했으며, 1912년에는 3톤 트럭이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운행하기도 했다.[22]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자 패커드는 어려운 시장 상황에 대응해야 했다. 회사는 에이트를 주력으로 유지하면서도, 1932년에는 제시 G. 빈센트 수석 엔지니어가 설계한 새로운 V-12 엔진 모델 패커드 트윈 식스를 다시 출시했다. 이 모델의 시작 가격은 3650USD (1932년 기준)였다.[27] 1933년에 이 모델은 패커드 트웰브로 이름이 바뀌어 1939년까지 생산되었다.[28] 또한 1931년에는 유압식 쇼크 업소버를 조절할 수 있는 '라이드 컨트롤(Ride Control)' 시스템을 선보였고,[29] 1932년에는 중간 가격대의 라이트 에이트를 기본 가격 1750USD (1932년 기준)에 출시하여 가격 경쟁력을 높였다. 이는 스탠다드 에이트보다 735USD 저렴한 가격이었다.[30]

패커드는 단일 생산 라인을 유지하고 모델 간 부품 호환성을 높여 비용을 절감했으며, 매년 모델을 바꾸는 대신 '시리즈' 개념을 도입하여 모델 변경 주기를 유연하게 관리했다. 이는 GM의 계획적 진부화 전략에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대공황 심화에 따라 고급차 수요가 급감하자, 패커드는 1935년에 1000USD 미만의 첫 모델인 120을 출시했다. 이 모델은 큰 성공을 거두어 판매량이 급증했지만, 별도 공장에서 대량 생산 방식으로 만들어져 수작업 비중이 높은 기존 '시니어' 모델(트웰브, 슈퍼 에이트, 에이트)과는 차이가 있었다. 120 모델은 독립식 전륜 서스펜션과 유압 브레이크 등 시니어 모델보다 앞선 기술을 먼저 적용하기도 했다. 성공적인 '주니어' 모델 덕분에 패커드는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 거의 확실하지만,[31] 이는 패커드의 고급 브랜드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937년에는 6기통 엔진을 탑재한 더 저렴한 모델인 패커드 115C(이후 110으로 변경)를 약 1200USD (1937년 기준)에 출시하며 대중적인 시장으로 더욱 확장했다.[34][35][36] 1939년에는 연비 향상을 위한 오버드라이브 기술인 '이코노-드라이브(Econo-Drive)'를 도입했는데, 이는 시속 30mph 이상에서 작동하여 엔진 속도를 27.8%까지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37] 같은 해 컬럼 시프트 방식인 '핸디시프트(Handishift)'를 120과 식스 모델에 제공했다.[38]

1941년에는 현대적인 디자인의 패커드 클리퍼가 160 모델의 약 322.58cm 휠베이스를 사용하는 4도어 모델로 출시되었다. 이 차는 120에 사용된 직렬 8기통 엔진의 125hp 버전으로 구동되었다.[39]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패커드는 클리퍼를 중심으로 라인업을 재편했다.

1956년 패커드 클리퍼


패커드의 푸시 버튼 울트라매틱 변속기 제어 팟


1954년 패커드는 스터드베이커를 인수하여 스터드베이커-패커드 코퍼레이션(SPC)을 설립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패커드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정이 되었다.[51] 스터드베이커의 재정난은 패커드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1955년, 딕 테이그가 디자인한 새로운 모델이 출시되었다. 이 모델은 완전히 새로워진 차체와 함께 전후륜 토션 바 서스펜션, 자동 차체 수평 유지 장치, 그리고 새로운 오버헤드 밸브 V8 엔진(352CID)을 특징으로 했다. 고급 모델인 패커드 패트리션, 포 헌드레드, 패커드 캐리비안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차체 생산을 담당하던 브릭스 제조 회사가 크라이슬러에 인수되면서 자체 공장으로 생산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품질 문제가 발생하여 브랜드 이미지가 손상되었다.

1956년에는 클리퍼를 별도 브랜드로 분리하고, 패커드 라인에는 패커드 이그제큐티브와 같은 중간 가격대 모델을 추가하는 등 복잡한 라인업을 운영했다. V8 엔진은 시니어 모델에서 374CID로 확대되어 당시 업계 최대 배기량을 자랑했으며, 최고급 캐리비안 모델은 310hp를 생산했다. 클리퍼는 352 엔진을 계속 사용했다. 하지만 자동 변속기(푸시 버튼식 울트라매틱)의 신뢰성 문제와 품질 관리 실패로 판매량은 계속 감소했다.

1958년 패커드


결국 재정난으로 인해 1957년부터 패커드는 디트로이트 생산을 중단하고, 사우스벤드의 스터드베이커 공장에서 스터드베이커 프레지던트를 기반으로 한 모델을 생산하게 되었다. 이 모델들은 "패커드 클리퍼"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으나, 기존 패커드와는 거리가 멀어 "패커드베이커"라는 비판을 받았다. 스튜드베이커의 289CID V8 엔진에 슈퍼차저를 장착하여 275hp의 출력을 냈다. 1958년에는 패커드 호크(스터드베이커 골든 호크 기반) 등 새로운 모델을 내놓았지만 판매 부진을 면치 못했다. 1958년 모델은 유리 섬유 부품을 사용하여 헤드라이트 하우징과 테일 핀 등을 스터드베이커 차체에 접목한 초기 사례 중 하나였다. 모든 패커드는 프로필을 낮추기 위해 약 35.56cm 휠을 장착했다. 결국 1958년 7월 16일, 마지막 패커드 자동차가 생산 라인을 떠났고, 1959년에 패커드 브랜드는 폐지되었다. 프랑스 파젤 베가의 엑셀런스 모델을 패커드로 판매하려는 제안도 있었으나, 메르세데스-벤츠와의 유통 계약 문제로 무산되었다.

=== 주요 모델 목록 ===

1907년 ''The New York Times'' 광고


다음은 패커드가 생산했던 주요 모델 라인업이다.

  • 단기통 모델:
  • 모델 A (1899–1900)
  • 모델 B (1900)
  • 모델 C (1901)
  • 모델 E (1901)
  • 모델 F (1901–1903)
  • 모델 M (1904)
  • 2기통 모델:
  • 모델 G (1902)
  • 4기통 모델:
  • 모델 K (1903)
  • 모델 K 그레이 울프 (1903)
  • 모델 L (1904)
  • 모델 N (1905)
  • 모델 24 (시리즈 S) (1906)
  • 모델 18 (시리즈 NA-NC) (1905–1907)
  • 모델 30 (시리즈 U) (1907–1912)
  • 6기통 모델:
  • 패커드 도미넌트 식스 (1912–1915)
  • 싱글 식스 (1921–1924)
  • 패커드 식스 (1925–1929)
  • 110 / 115 / 식스 (1937–1949)
  • 8기통 모델 (패커드 에이트):
  • 싱글 에이트 & 에이트 (1924–)
  • 패커드 커스텀 에이트
  • 패커드 라이트 에이트
  • 120 (1935–1942)
  • 160
  • 180
  • 패커드 슈퍼 에이트
  • V-12 모델:
  • 패커드 트윈 식스 / 905 (1916–1923)
  • 트윈 식스 / 트웰브 (1932–1939)
  • 전후 모델 (클리퍼 포함):
  • 200 / 250
  • 300
  • 400
  • 캐리비안
  • 캐벌리어
  • 클리퍼
  • 클리퍼 콘스텔레이션
  • 이그제큐티브
  • 호크 (1958)
  • 메이페어
  • 퍼시픽
  • 패트리션
  • 스테이션 세단 (1949–1950)
  • 슈퍼 파나마
  • 1957년 및 1958년 모델 (스터드베이커 기반)

  • 기타 명칭: 발보아, 리퀘스트, 팬서, 팬 아메리칸 등 (일부 쇼카 또는 특별 모델 포함)

6. 브랜드 명칭


  • '''Ultramatic|울트라매틱영어''': 패커드가 자체 개발한 자동 변속기이다.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사용되었으며, 이후 '기어-스타트 울트라매틱'(1954년), '트윈 울트라매틱'(1955–1956년)으로 개선되었다.
  • '''Thunderbolt|썬더볼트영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패커드의 직렬 8기통 엔진 라인에 붙여진 이름이다.
  • '''Finger Tip Shift|핑거 팁 시프트영어''': 서보 및 원격 제어 장치를 이용한 변속 시스템으로, 해양 엔진 변속기를 조작하는 데 사용되었다 (1947–1951년). 크리스-오-매틱 시프트(Chris-O-Matic Shift)와 유사한 방식이다.
  • '''토션 레벨 라이드'''(Torsion Level Ride|토션 레벨 라이드영어): 통합 레벨라이저가 장착된 패커드의 토션 바 서스펜션 시스템이다 (1955–1956년).
  • '''이즈매틱'''(Easamatic|이즈매틱영어): 1952년부터 선택 사양으로 제공된 벤딕스 공사(Bendix Corporation)의 트레들백(TreadleVac) 파워 브레이크에 대한 패커드의 명칭이다.
  • '''Electromatic|일렉트로매틱영어''': 전기로 제어되는 진공 작동식 자동 클러치에 대한 패커드의 명칭이다.
  • '''트윈 트랙션'''(Twin Traction|트윈 트랙션영어): 패커드의 선택 사양이었던 차동 제한 장치 리어 액슬이다. 세계 최초로 양산차에 적용된 기술 중 하나이다 (1956–1958년).
  • '''Touch Button|터치 버튼영어''': 1956년 트윈 울트라매틱 변속기를 제어하기 위해 사용된 패커드의 전기식 버튼 패널 명칭이다.

7. 일본에서의 판매

삼화자동차(三和自動車)(후에 미쓰와 자동차로 사명 변경)는 1931년 미쓰비시 재벌이나 가와사키 재벌 등에 의해 도쿄 아카사카에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후지와라 도시오가 유라쿠초에서 운영하던 후지와라 상회를 기원으로 하며, 내외흥업을 거쳐 삼백상회[76]다이쇼 시대 말기에 수입 판매를 시작하면서 패커드의 일본 총 대리점(조선 반도를 포함한 식민지 포함)[78]이 되었다. 삼화자동차는 패커드 브랜드가 단종될 때까지 대리점 역할을 수행했으며, 만주국의 총 대리점도 겸했다. 1950년경 서일본 지역 판매권은 웨스턴 자동차(야나세의 자회사, 후에 메르세데스-벤츠 수입권을 획득)로 넘어갔다.

중일 전쟁이 격화되고 일본 내 국산차 보호 정책이 시행되면서 1940년 외국 자동차 수입이 중단되기 전까지, 많은 수의 패커드 자동차가 일본과 그 통치 지역으로 수입되었다. 당시 패커드는 황족, 화족, 군부, 정계, 재계의 상류층 인사들이 선호하는 고급 자동차였다[79].

8. 유산

패커드는 우수한 성능과 신뢰성을 갖춘 엔진을 설계하고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기통 엔진인 "트윈 식스(Twin Six)"와 저압축 직렬 8기통 엔진을 제공했지만, 16기통 엔진은 출시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패커드는 성공적인 직렬 8기통 플랫헤드 엔진을 계속 사용했다. 이 엔진은 새로운 제너럴 모터스(GM)나 크라이슬러의 OHV V8 엔진만큼 빨랐지만, 구매자들에게는 다소 구식으로 여겨졌다. 패커드는 1955년이 되어서야 고압축 V8 엔진을 도입했는데, 이는 미국 자동차 회사 중 가장 늦은 편에 속했다. 이 엔진은 물리적으로 크고 전통적인 설계였으며, 초기 캐딜락, 뷰익, 올즈모빌, 폰티악, 스튜드베이커 케터링 엔진의 여러 특징을 모방했다. 320cuin 및 352cuin 배기량으로 생산되었다. 카리브(Caribbean) 모델은 2개의 4배럴 기화기를 장착하여 275마력(hp)의 출력을 냈다. 1956년에는 374cuin 버전이 시니어 모델에 사용되었고, 카리브 모델은 2개의 4배럴 기화기로 305마력(hp)의 출력을 발휘했다.

패커드가 개발한 전기 커넥터는 제너럴 모터스에서 자동차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최초의 커넥터 시리즈는 패커드 56이었고, 그 뒤를 이어 웨더 팩(Weather Pack)이 나왔으며,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사용되는 메트리 팩(Metri Pack)이 등장했다.[66] GM의 전 패커드 일렉트릭 사업부는 이후 델파이 코퍼레이션(Delphi Corporation)으로 분사되었고, 나중에 앱티브(Aptiv)로 사명을 변경했다.

오하이오주 워렌에 위치한 국립 패커드 박물관(National Packard Museum)은 원래 패커드 모터카 컴퍼니(Packard Motor Car Company)와 패커드 일렉트릭 컴퍼니(The Packard Electric Company)의 공식 박물관이다.[67] 이 박물관은 지역 사회와의 교류 및 봉사 활동을 통해 패커드의 유산을 보존하고, 교통 및 산업 역사에서 패커드가 미친 영향력을 알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아메리카의 패커드 박물관(America's Packard Museum)에는 패커드 자동차 컬렉션이 전시되어 있다.

미시간주 셸비 타운십에 위치한 패커드 시험장(Packard Proving Grounds)은 패커드 모터카 재단(Packard Motor Car Foundation)이 소유했던 이전 시험장의 일부로 남아있다.[68] 패커드 시험장 역사 유적지의 임무는 시험장의 복원과 보존을 통해 패커드 모터카 컴퍼니의 유산을 보존하는 것이다.

코로나19 범유행 이후 포트 로더데일 골동품 자동차 박물관(Fort Lauderdale Antique Car Museum)[69][70][71]이 문을 닫으면서, 소장하고 있던 패커드 자동차 및 기념품 전체 컬렉션이 한 지역 사업가에게 인수되었다. 이 컬렉션은 2021년에 경매에 부쳐졌다.[72][73]

1977년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는 약 50대의 빈티지 패커드 자동차가 파쇄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특수 관심 자동차 잡지에 의해 "크러쉬톤(Crushton)"으로 불렸다. 이 자동차들은 사망한 패커드 수집가의 소유였으며, 그의 사후 경매에 부쳐졌다. 당시 SoCal 패커드 팬 클럽 간의 경매 조건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경매에 나온 자동차의 약 절반이 책정된 가격에 미치지 못했고, 결국 이 자동차들은 훌륭한 기계적 상태와 녹슬지 않은 상태에도 불구하고 파괴되었다.[7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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