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리아노스 고나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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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틸리아노스 고나타스는 그리스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1892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발칸 전쟁, 소아시아 원정 등에 참여했다. 1922년 군사 반란을 주도하여 총리가 되었으며, 1929년 상원 의원에 당선되어 상원 의장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으며, 이후 정당을 창당하여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점, 반대파 숙청, 보수 정당과의 연합 등으로 비판을 받았으며, 한국의 5.16 군사정변과 비교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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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리아노스 고나타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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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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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스틸리아노스 고나타스 |
로마자 표기 | Stylianos Gonatas |
원어 이름 | Στυλιανός Γονατάς |
출생일 | 1876년 8월 18일 |
사망일 | 1966년 3월 29일 |
출생지 | 파트라스, 그리스 왕국 |
사망지 | 아테네, 그리스 왕국 |
안장지 | 아테네 제1 묘지 |
경력 | |
소속 | 그리스 왕국 제2차 그리스 공화국 |
복무 기간 | 1892년-1922년 |
계급 | [[File:GR-Army-OF8-1912.svg|15px]] 중장 |
참전 | 마케도니아 투쟁 발칸 전쟁 제1차 발칸 전쟁 제2차 발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마케도니아 전선 러시아 내전 러시아 내전의 연합군 개입 남부 전선 남러시아 개입 그리스-터키 전쟁 (1919-1922) |
모교 | 그리스 육군 사관학교 |
훈장 | [[File:Order of the Redeemer Ribbon bar.svg|30px]] 구세주 훈장 [[File:GRE Order of George I - Commander BAR.png|30px]] 조지 1세 훈장 사령관 [[File:GRE Commander's Medal of Valour ribbon.svg|30px]] 용맹 십자훈장 [[File:GRE War Cross 1940 ribbon.svg|30px]] 전쟁 십자훈장 [[File:Greek Medal of Military merit ribbon.png|30px]] 군사 공로 훈장 [[File:Legion Honneur Chevalier ribbon.svg|30px]] 레지옹 도뇌르 훈장 |
정치 경력 | |
직함 | 그리스의 총리 |
임기 시작 | 1922년 11월 14일 |
임기 종료 | 1924년 1월 11일 |
전임 | 소티리오스 크로키다스 |
후임 |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
군주 | 요르요스 2세 |
직함1 | 환경, 도시 계획 및 공공 사업부 장관 |
임기 시작1 | 1946년 4월 18일 |
임기 종료1 | 1947년 1월 24일 |
총리1 | 콘스탄티노스 차다리스 |
군주1 | 요르요스 2세 |
2. 초기 생애와 군 경력
고나타스는 파트라스에서 태어났다.[1] 그는 1892년 헬레니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897년에 졸업했다. 소위로 그는 마케도니아 투쟁(1907–1909)에 참여했으며, 1909년 구디 반란 직후 니콜라오스 조르바스 대령의 부관이 되었다. 또한 1912-13년 발칸 전쟁과 1919년 우크라이나 연합군 원정에도 참여했다. 이후 그는 대령 계급으로 소아시아 원정에 참여하여 처음에는 참모 장교로, 나중에는 사단장으로 활동했다.
2. 1. 초기 생애
고나타스는 파트라스에서 태어났다.[1] 그는 1892년 헬레니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897년에 졸업했다. 소위로 그는 마케도니아 투쟁(1907–1909)에 참여했으며, 1909년 구디 반란 직후 니콜라오스 조르바스 대령의 부관이 되었다.2. 2. 군 경력
고나타스는 1892년 헬레니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897년에 졸업했다.[1] 소위로 마케도니아 투쟁(1907년–1909년)에 참여했고, 1909년 구디 반란 직후 니콜라오스 조르바스 대령의 부관이 되었다.[1] 1912년~1913년 발칸 전쟁과 1919년 우크라이나 연합군 원정에 참전했다.[1] 대령 계급으로 소아시아 원정에 참여하여 처음에는 참모 장교로, 나중에는 사단장으로 활동했다.[1]3. 1922년 9월 혁명
그리스군은 소아시아 원정에서 패배하여 1922년 8월 아나톨리아에서 철수해야 했다. 이 재앙으로 그리스는 정치적 위기를 맞았고, 9월에 테살로니키, 키오스 및 레스보스에서 베니젤로스주의자 장교들이 주도하는 군사 반란이 일어났다.
레스보스 군 병력은 고나타스 대령이 이끄는 혁명 위원회를 결성하고 아테네에 정부 해임, 의회 해산, 새 선거 실시, 콘스탄티노스 1세의 게오르기오스 2세에게 양위 등을 요구했다. 혁명 운동은 구 그리스와 신 그리스의 다른 중심지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내각은 즉시 사임했고, 9월 27일 콘스탄티노스 1세는 두 번째로 왕위에서 물러났으며, 게오르기오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9월 28일,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 대령과 고나타스가 이끄는 혁명군은 아테네에 입성했다. 혁명 위원회는 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를 총리로 선출했지만, 그가 국외에 있었기 때문에 소티리오스 크로키다스가 임시 총리로 임명되었다.
4. 총리 재임
혁명 위원회 정권 하에서 구성된 첫 번째 내각은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를 허수아비로 세우고 그리스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이 내각은 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가 총리직을 거부하고,여섯 명 재판으로 인한 내부 갈등으로 1922년 11월 24일에 사임했다. 영국 정부는 피고인들을 관대하게 대우할 것을 촉구했지만, 내각의 일부는 이를 그리스 내정에 대한 외세 개입으로 간주하여 거부했다.
1922년 11월 27일, 혁명 위원회 위원과 공화주의 그룹 구성원으로만 구성된 새 내각이 임명되었다. 스틸리아노스 고나타스 대령은 총리로 임명되었고, 콘스탄티노스 렌티스가 외무부 장관 대행으로 임명되었다.
고나타스 정부는 1924년 1월 11일까지 재임했으며,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고나타스는 구세주 훈장 대십자장을 받았고, 1924년 5월 31일,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와 함께 중장으로 진급했다.
5. 총리 퇴임 이후 정치 경력
고나타스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육군에서 사임했다. 같은 해에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입법부는 상원을 포함하도록 확장되었다. 고나타스는 1929년 선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아티카, 보이오티아를 대표하여 상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재선되었고, 1932년부터 1935년 상원이 해산될 때까지 상원 의장을 역임했다.
나치 독일의 그리스 점령 동안 고나타스는 하이자리 강제 수용소에 4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독일군이 철수한 후, 고나타스는 석방되어 정치에 다시 참여했다. 테미스토클리스 소풀리스 자유당 대표와 불화를 겪은 그는 자신의 정당인 국민 자유당 (Κόμμα Εθνικών Φιλελευθέρων)을 창당하여 보수적인 인민당과 연합하여 1946년 총선에 출마했다. 고나타스 정당은 국회의원 30명을 선출했다. 군주주의 정당과 연합한 고나타스는 1946년 국민 투표에서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의 복위를 지지했다.
1946년부터 1947년까지 콘스탄티노스 차르다리스 정부에서 그는 공공 사업부 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총선에서 고나타스 정당은 처음에는 나폴레옹 제르바스의 그리스 국민당과 연합했지만, 그가 나치와의 협력으로 신뢰를 잃자 고나타스는 자유당과 연합하기로 결정했다. 이 선거에서 고나타스는 정치 경력상 처음으로 당선되지 못했다. 그는 더 이상 공직을 추구하지 않았고, 1966년 3월 29일 아테네에서 사망할 때까지 국왕에게 조언하는 전직 총리로서 국무회의 위원으로만 활동했다.
6.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 활동
나치 독일의 그리스 점령 기간 동안 고나타스는 하이자리 강제 수용소에 4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독일군이 철수한 후 석방되어 정치에 다시 참여했다. 테미스토클리스 소풀리스 자유당 대표와 불화를 겪은 그는 자신의 정당인 국민 자유당 (Κόμμα Εθνικών Φιλελευθέρων)을 창당하여 보수적인 인민당과 연합하여 1946년 총선에 출마, 국회의원 30명을 당선시켰다. 군주주의 정당과 연합한 고나타스는 1946년 국민 투표에서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의 복위를 지지했다.
1946년부터 1947년까지 콘스탄티노스 차르다리스 정부에서 공공 사업부 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총선에서 고나타스 정당은 처음에는 나폴레옹 제르바스의 그리스 국민당과 연합했지만, 그가 나치와의 협력으로 신뢰를 잃자 고나타스는 자유당과 연합하기로 결정했다. 이 선거에서 고나타스는 정치 경력상 처음으로 당선되지 못했다. 그는 더 이상 공직을 추구하지 않았고, 1966년 3월 29일 아테네에서 사망할 때까지 국왕에게 조언하는 전직 총리로서 국무회의 위원으로만 활동했다.
7. 평가 및 비판
그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육군에서 사임했다. 같은 해에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입법부는 상원을 포함하도록 확장되었다. 고나타스는 1929년 선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아티카, 보이오티아를 대표했다. 그는 재선되었고, 1932년부터 1935년 상원이 해산될 때까지 상원 의장을 역임했다.
나치 독일의 그리스 점령 동안 고나타스는 4개월 동안 하이자리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독일군이 철수한 후, 고나타스는 석방되어 정치에 다시 참여했다. 테미스토클리스 소풀리스 자유당 대표와 불화를 겪은 그는 자신의 정당인 국민 자유당을 창당하여 보수적인 인민당과 연합하여 1946년 총선에 출마했다. 고나타스 정당은 국회의원 30명을 선출했다. 군주주의 정당과 연합한 고나타스는 1946년 국민 투표에서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의 복위를 지지했다.
1946년부터 1947년까지 콘스탄티노스 차르다리스 정부에서 그는 공공 사업부 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총선에서 고나타스 정당은 처음에는 나폴레옹 제르바스의 그리스 국민당과 연합했지만, 그가 나치와의 협력으로 신뢰를 잃자 고나타스는 자유당과 연합하기로 결정했다. 이 선거에서 고나타스는 정치 경력상 처음으로 당선되지 못했다. 그는 더 이상 공직을 추구하지 않았고, 1966년 3월 29일 아테네에서 사망할 때까지 국무회의 위원으로만 활동했다.
고나타스는 1922년 군사 혁명을 통해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고, 민주적 정부로의 이양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정 운영 능력과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 안정에 기여했다.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비판을 받는다. '6인 재판' 등 반대파 숙청 과정에서 인권 침해 문제가 발생했다는 지적도 있다. 보수적인 인민당과 연합하고 왕정 복고를 지지한 것은 시대착오적인 행보라는 비판을 받았다. 나폴레옹 제르바스와의 협력 시도는 나치 부역자 옹호라는 비판을 받았다.
7. 1. 긍정적 평가
고나타스는 1922년 군사 혁명을 통해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고, 민주적 정부로의 이양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정 운영 능력과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 안정에 기여했다.7. 2. 부정적 평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비판을 받는다. '6인 재판' 등 반대파 숙청 과정에서 인권 침해 문제가 발생했다는 지적도 있다. 보수적인 인민당과 연합하고 왕정 복고를 지지한 것은 시대착오적인 행보라는 비판을 받았다. 나폴레옹 제르바스와의 협력 시도는 나치 부역자 옹호라는 비판을 받았다.8. 한국 현대사와의 비교
스틸리아노스 고나타스의 군사 쿠데타는 한국의 5.16 군사정변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정치 역정은 한국 현대 정치사의 격동기를 반영하는 듯하며, 군 출신 정치인으로서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과 민주주의 원칙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고나타스는 1929년 그리스 상원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나치 독일의 그리스 점령 기간 동안 하이자리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석방 후에는 국민 자유당을 창당, 인민당과 연합하여 1946년 그리스 입법 선거에 출마하는등 활동을 하였다. 그의 정치적 선택은 진보와 보수,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다는 평가를 받는다.(더불어민주당 관점)
9. 외부 링크
10. 각주
참조
[1]
서적
1915: Ο Εθνικός Διχασμός
Patakis Publishers
[2]
문서
아테네를 장악하지 못한 대립 정부의 수반
[3]
문서
군사/독재 정권 수반
[4]
문서
비상시 또는 과도 정부 수반
[5]
문서
제2차 세계 대전 때 추축국이 그리스를 점령할 당시 점령군에 협조한 그리스국의 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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