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키 앤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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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파키 앤더슨은 1934년 미국에서 태어나 선수와 감독으로 활동한 야구인이다. 1959년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마이너 리그 감독을 거쳐 1970년 신시내티 레즈 감독으로 취임했다. 레즈를 이끌고 월드 시리즈 2회 우승을 달성했으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으로 1984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추가하여 통산 3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기록했다. 2000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1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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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키 앤더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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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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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지 리 "스파키" 앤더슨 |
출생일 | 1934년 2월 22일 |
출생지 | 사우스다코타주 브리지워터 |
사망일 | 2010년 11월 4일 (향년 76세) |
사망지 | 캘리포니아주 사우전드오크스 |
포지션 | 2루수 / 감독 |
타격 | 우타 |
투구 | 우투 |
선수 경력 | |
데뷔 리그 | MLB |
데뷔일 | 1959년 4월 10일 |
데뷔 팀 | 필라델피아 필리스 |
마지막 리그 | MLB |
마지막 경기일 | 1959년 9월 27일 |
마지막 팀 | 필라델피아 필리스 |
선수팀 | 필라델피아 필리스 () |
통계 (MLB) | |
타율 | .218 |
타점 | 34 |
감독 경력 | |
감독팀 | 신시내티 레즈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
코치팀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 |
감독 기록 | 2,194승 1,834패 |
승률 | .545 |
수상 및 영예 | |
월드 시리즈 우승 | 3회 (, , ) |
AL 올해의 감독상 | 2회 (1984, 1987) |
영구 결번 | 신시내티 레즈 No. 10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No. 11 |
명예의 전당 | 신시내티 레즈 명예의 전당 국립 야구 명예의 전당 (2000년) |
명예의 전당 입성 방법 | 베테랑 위원회 |
기타 정보 |
2. 생애
앤더슨은 1934년 2월 22일 사우스다코타주 브리지워터에서 태어나, 8세에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1] 수잔 밀러 도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3년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했다.[3] 1953년 10월 3일 캐롤 발레와 결혼했다.[4]
선수 은퇴 후 감독으로서는 빅 레드 머신이라 불리는 신시내티 레즈를 이끌며 1975년과 1976년 2년 연속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1979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으로 취임하여 1984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며 양대 리그에서 모두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33]
1994년 파업 당시 선수노조의 대체 선수 기용에 반대하며 구단과 대립했고, 1995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7] 통산 2194승 1834패, 승률 .545를 기록했으며,[19] 이는 당시 메이저 리그 감독 중 역대 세 번째였다.[20] 이후 토니 라 루사, 바비 콕스, 조 토레에 의해 갱신되어 역대 6위이다.
2000년 메이저 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1] 2007년에는 '캐나다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23] 신시내티 레즈 감독 시절 등번호 '10번'은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 시절 등번호 '11번'은 앤더슨 은퇴 이후 사용하는 선수가 없어, 향후 타이거즈 구단에서 정식으로 영구 결번 지정될 가능성이 있다.
2010년 11월 4일, 치매와 노환으로 캘리포니아주 사우전드옥스 자택에서 타계했다.[6]
2. 1. 유년 시절 및 선수 경력
1934년 사우스다코타주 브리지워터에서 태어나 8세 때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어린 시절 USC 대학교에서 배트 보이로 야구와 인연을 맺었다.[1] 수잔 밀러 도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2] 1953년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3]유격수로 뛰다가 2루수로 전업한 그는 브루클린 다저스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가 1958년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되었다. 1959년 필라델피아 필리스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주전 2루수로 풀타임 출장했지만, 152경기에서 타율 0.218, 홈런 0개, 34타점으로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고 한 시즌 만에 마이너리그로 돌아갔다.[3] 이후 인터내셔널 리그의 트리플A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에서 4시즌을 더 뛰었지만,[5] 메이저 리그 승격 기회는 없었다.
Sparky영어라는 별명은 1955년 마이너 리그 시절, 그의 맹렬한 플레이를 본 라디오 아나운서가 붙여준 것이다.[6]
2. 2. 지도자 경력
앤더슨은 선수 시절 유격수와 2루수로 뛰었다.[5] 마이너 리그를 거쳐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되어, 1959년에 메이저 리그에서 풀 시즌을 보냈으나, 152경기에서 .218의 타율에 그치며 다시 마이너 리그로 돌아갔다.[3]잭 켄트 쿡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 구단주는 앤더슨의 리더십과 젊은 선수들을 가르치는 능력을 보고 감독 경력을 제안했고, 앤더슨은 1964년부터 토론토 블루제이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 감독을 시작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40]
1969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3루 코치로 메이저 리그에 복귀한 후,[40]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를 거쳐 1969년 10월 8일 신시내티 레즈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9] 당시 35세로 야구계에서 가장 젊은 감독이었던[9] 앤더슨은, 첫 해에 팀을 102승으로 이끌며 내셔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10] 이후 1970년대에 빅 레드 머신이라 불리는 강력한 팀을 이끌며, 1975년과 1976년 2년 연속 월드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1978년 시즌 후 레즈에서 해고되었지만,[11][1] 1979년 6월 14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5년 안에 팀을 우승시키겠다고 선언했고,[12] 1984년에 그 약속을 지켜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로써 앤더슨은 양대 리그에서 모두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33]
1994년 파업 당시, 앤더슨은 대체 선수 사용에 반대하며 구단과 대립했고, 결국 1995년 시즌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은퇴했다.[7] 감독 재임 기간 동안 앤더슨은 선수들에게 과한 칭찬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커크 깁슨을 "다음 미키 맨틀"이라고 칭하기도 했다.[16]
앤더슨의 통산 감독 성적은 다음과 같다.
팀 | 연도 | 정규 시즌 | 포스트시즌 | |||||||
---|---|---|---|---|---|---|---|---|---|---|
경기 | 승 | 패 | 승률 | 최종 순위 | 승 | 패 | 승률 | 결과 | ||
CIN | 1970 | 162 | 102 | 60 | .630 | 4 | 4 | .500 | 월드 시리즈 패배 (BAL) | |
CIN | 1971 | 162 | 79 | 83 | .488 | - | - | - | ||
CIN | 1972 | 154 | 95 | 59 | .617 | 6 | 6 | .500 | 월드 시리즈 패배 (OAK) | |
CIN | 1973 | 162 | 99 | 63 | .611 | 2 | 3 | .400 | NLCS 패배 (NYM) | |
CIN | 1974 | 162 | 98 | 64 | .605 | - | - | - | ||
CIN | 1975 | 162 | 108 | 54 | .667 | 7 | 3 | .700 | 월드 시리즈 우승 (BOS) | |
CIN | 1976 | 162 | 102 | 60 | .630 | 7 | 0 | 1.000 | 월드 시리즈 우승 (NYY) | |
CIN | 1977 | 162 | 88 | 74 | .543 | - | - | - | ||
CIN | 1978 | 161 | 92 | 69 | .571 | - | - | - | ||
CIN 합계 |1449 | 863 | 586 | .596 | 26 | 16 | .619 | ||||
DET | 1979 | 106 | 56 | 50 | .528 | - | - | - | ||
DET | 1980 | 162 | 84 | 78 | .519 | - | - | - | ||
DET | 1981 | 52 | 31 | 26 | .544 | rowspan=2| - | - | - | rowspan=2| | |
57 | 29 | 23 | .558 | AL 동부 지구 2위 | ||||||
DET | 1982 | 162 | 83 | 79 | .512 | - | - | - | ||
DET | 1983 | 162 | 92 | 70 | .568 | - | - | - | ||
DET | 1984 | 162 | 104 | 58 | .642 | 7 | 1 | .875 | 월드 시리즈 우승 (SD) | |
DET | 1985 | 161 | 84 | 77 | .522 | - | - | - | ||
DET | 1986 | 162 | 87 | 75 | .537 | - | - | - | ||
DET | 1987 | 162 | 98 | 64 | .605 | 1 | 4 | .200 | ALCS 패배 (MIN) | |
DET | 1988 | 162 | 88 | 74 | .543 | - | - | - | ||
DET | 1989 | 162 | 59 | 103 | .364 | - | - | - | ||
DET | 1990 | 162 | 79 | 83 | .488 | - | - | - | ||
DET | 1991 | 162 | 84 | 78 | .519 | - | - | - | ||
DET | 1992 | 162 | 75 | 87 | .463 | - | - | - | ||
DET | 1993 | 162 | 85 | 77 | .525 | - | - | - | ||
DET | 1994 | 115 | 53 | 62 | .461 | - | - | - | ||
DET | 1995 | 144 | 60 | 84 | .417 | - | - | - | ||
DET 합계 |2579 | 1331 | 1248 | .516 | 8 | 5 | .615 | ||||
총계[19] |4030 | 2194 | 1834 | .545 | 34 | 21 | .618 |
2. 2. 1. 마이너리그 감독 시절
1964년 토론토 블루제이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 감독을 시작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마이너리그 감독 시절, 그는 모든 면에서 의욕이 넘쳤고 강경한 성격으로 밀어붙여, 툭하면 심판들과 다툼을 벌였다. 늘 문제를 일으키는 '젊은 감독'이라는 오명을 썼지만, 훗날 스파키는 그 당시를 '그 경험이 자신에게는 가장 소중했던 실패'라고 회고했다.[40]잭 켄트 쿡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 구단주는 앤더슨의 리더십 자질과 젊은 선수들을 가르치는 능력을 보고, 그에게 감독 경력을 쌓도록 권유하며, 메이플 리프스의 감독직을 제안했다. 1964년, 30세의 앤더슨은 쿡의 제안을 받아들여 감독이 되었다. 이후 그는 A급 및 더블 A급에서 마이너 리그 클럽을 지도했으며, 특히 1968년에는 레즈의 마이너 리그 시스템에서 한 시즌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4시즌 연속으로 4개의 페넌트 우승팀을 이끌었다.
연도 | 리그 | 팀 |
---|---|---|
1965년 | 웨스턴 캐롤라이나스 리그 | 록힐 카디널스 |
1966년 | 플로리다 주 리그 | 세인트피터스버그 카디널스 |
1967년 | 캘리포니아 리그 | 모데스토 레즈 |
1968년 | 더블 A 서던 리그 | 애쉬빌 투어리스트 |
1966년 시즌에 앤더슨의 팀은 마이애미에게 29이닝 4-3으로 패했는데, 이는 중단 없이 진행된 프로 경기 중 최장 시간 경기(이닝 기준)로 남아있다.[7]
1969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3루 코치로 메이저 리그에 복귀했다.[40]
2. 2. 2. 신시내티 레즈 감독 시절 (1970-1978)
1969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3루 코치를 맡아 메이저 리그에 복귀했다. 1969년 시즌 후,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감독 레프티 필립스는 10대 시절 앤더슨과 첫 프로 계약을 체결했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스카우트였는데, 1970년 코칭 스태프에 앤더슨을 임명했다.[8]애너하임에 고용된 지 하루 만에, 데이브 브리스톨의 후임으로 신시내티 레즈 감독이 될 기회를 제안받았다. 앤더슨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신시내티 구단에서 마이너 리그 감독으로 고용했던 레즈의 단장 밥 하우삼과 재회하게 되었다. 1969년 10월 8일 레즈 감독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스포츠계에서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고용 다음 날 헤드라인은 "스파키는 누구?"였다.[9] 당시 35세로, 야구에서 가장 젊은 감독이었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인 감독으로서 100승을 거둔 세 번째 감독이 되었으며, 레즈를 이끌고 1970년에 102승과 내셔널 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10] 1970년 월드 시리즈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5경기 만에 패했다. 이 시즌 동안 레즈는 앤더슨의 재임 기간 동안 널리 알려진 별명인 빅 레드 머신으로 불리게 되었다.
1971년 신시내티 레즈 시즌에 부상으로 4위로 마감했지만,[10] 레즈는 1972년에 다시 앤더슨 감독 하에 또 다른 우승을 차지하여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1972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5경기 만에 꺾었지만,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게 1972년 월드 시리즈에서 7경기 만에 패했다. 1973년에 다시 내셔널 리그 서부 디비전 타이틀을 차지했지만 뉴욕 메츠에게 1973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5경기까지 가는 치열한 시리즈 끝에 패했다.
1974년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근소한 차이로 2위를 한 후, 1975년에 레즈는 108승을 거두며 디비전을 제패했다. 1975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승리했고, 드라마틱한 7경기 1975년 월드 시리즈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를 꺾었다. 1976년에 102승을 거두며 1976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필리스를 3경기 만에 꺾고, 뉴욕 양키스를 1976년 월드 시리즈에서 스윕하면서 재현했다. 디비전 플레이가 시작된 이후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와 월드 시리즈에서 팀이 모두 스윕한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 이 두 시즌 동안 앤더슨의 레즈는 파이리츠, 필리스, 레드삭스, 양키스를 상대로 포스트시즌에서 14승 3패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으며, 1975년 월드 시리즈 7차전에서 레드삭스를 이긴 후 포스트시즌에서 8연승을 거두고, 1976년 포스트시즌에서 7연승을 기록했다. 1969년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가 시작된 이후 전체 포스트시즌을 스윕한 유일한 팀으로 남아있다.

이 기간 동안 앤더슨은 약점이 보이기 시작하면 선발 투수를 빼고 불펜으로 교체하는 경향 때문에 "캡틴 훅"으로 알려졌으며,[6][11] 클로저 윌 맥에나니와 로울리 이스트윅에 크게 의존했다.
레즈가 노쇠화되면서 다음 두 시즌에서 다저스에게 2위를 하자, 앤더슨은 1년 전에 하우삼을 대신한 단장 딕 와그너에 의해 1978년 11월 27일에 해고되었다.[11][1] 와그너는 레즈의 코칭 스태프를 "흔들고" 싶어했고, 앤더슨은 이에 반대하여 해고되었다.[11]
레즈 감독 취임 당시 수염을 금지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콧수염이 특징이었던 레즈의 마스코트 캐릭터 "미스터 레즈"가 수염 없는 것으로 모델 체인지되었다.
2. 2. 3.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 시절 (1979-1995)
1979년 6월 14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앤더슨을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했다. 앤더슨은 팀의 젊은 선수들을 보고 언론에 자신의 팀이 5년 안에 우승할 것이라고 대담하게 선언했다.[12] 타이거스는 곧바로 좋은 성적을 내기 시작했고, 앤더슨 감독 부임 후 처음 세 번의 정규 시즌 동안 5할 이상의 승률을 기록했다. 1983년에는 92승을 거두며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이어 아메리칸 리그 동부에서 2위를 차지했다.1984년, 디트로이트는 시즌을 9-0으로 시작했고, 40경기 만에 35-5를 기록하며(메이저 리그 기록) 결국 104-58(팀 최다승)로 시즌을 마쳤다. 그해 9월 23일, 앤더슨은 두 개의 다른 팀에서 한 시즌에 100승을 거둔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7] 타이거스는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꺾고, 월드 시리즈에서 샌디에이고 파드레스를 5경기 만에 이기며 앤더슨의 세 번째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1984년 타이거스는 1927년 뉴욕 양키스 이후 개막일부터 월드 시리즈 종료일까지 리그 선두를 유지한 최초의 팀이 되었다. 앤더슨은 시즌 후 타이거스에서 두 번의 올해의 감독상 중 첫 번째 상을 받았다.[6]
타이거스가 1984년에 AL 동부 지구 우승을 확정 짓자, 앤더슨은 일기에 "솔직히 말해야 한다. 나는 신시내티에서 해고된 날부터 이 날을 기다려왔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이제 아무도 나에게 다시 의문을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썼다.[13]
앤더슨의 타이거스는 1985년과 1986년 모두 3위를 차지했다. 1986년 7월 29일 밀워키 브루어스를 9-5로 이기면서, 앤더슨은 아메리칸 리그와 내셔널 리그 모두에서 감독으로 600승을 달성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7]
앤더슨은 1987년에 타이거스를 메이저 리그 최고 기록으로 이끌었지만, 팀은 ALCS에서 미네소타 트윈스에 패했다. 그는 그 해 두 번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6] 1988년에도 우승 경쟁을 펼쳤지만(AL 동부에서 보스턴 레드삭스에 1경기 차로 2위), 팀은 1년 후 103패를 기록하며 무너졌다. 1989년 시즌 동안 앤더슨은 패배에 대한 스트레스로 한 달 동안 팀에서 휴가를 보냈다. 1루 코치 딕 트라체프스키가 임시로 팀을 지휘했다.[14]
1991년, 타이거스는 타율에서 최하위를 기록했고, 타자 삼진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대부분의 투구 부문에서 리그 최하위에 가까웠지만, 8월 말까지 여전히 지구 선두를 달리다가 라이벌 토론토 블루제이스에 밀려 2위를 차지했다.
1992년 9월 27일, 타이거스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13-3으로 이겨 앤더슨은 팀에서 1,132승을 거두며 휴이 제닝스를 넘어 타이거스 감독 역대 최다 승 기록을 세웠다. 앤더슨은 타이거스에서 1,331승을 거두며 이 기록을 계속 보유하고 있다. 1993년 4월 15일, 그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3-2로 꺾고 감독으로서 2,000번째 승리를 거두며 그렇게 한 일곱 번째 감독이 되었다.[15]
감독 경력 동안 앤더슨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선수들에게 과한 칭찬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커크 깁슨을 "다음 미키 맨틀"이라고 했는데, 그는 나중에 깁슨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줬을 수도 있다고 인정했다. 그는 1984년에 그를 위해 뛰었던 마이크 라가에 대해 "우리에게 이 세상 모든 파워 히터를 잊게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16] 그는 또한 조니 벤치(신시내티에서 그를 위해 뛴)에 대해 "절대 마이크 히스만큼 강하게 공을 던질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디트로이트에서 그를 위해 뛴 포수).
앤더슨은 현재까지 몰수로 경기를 이긴 마지막 아메리칸 리그 감독이다. 이는 디트로이트에 고용된 지 한 달 만에 시카고에서 디스코 철거의 밤의 결과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더블헤더 두 번째 경기가 반 디스코 시위가 잘못되어 코미스키 파크의 경기 표면이 심하게 손상된 후 취소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화이트삭스 그라운드 키퍼들이 경기장에서 잔해를 제거한 후에도 앤더슨은 타이거스가 경기장에 나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선수들의 안전을 걱정했을 뿐만 아니라, 경기장이 경기를 할 수 없는 상태라고 믿었다. 아메리칸 리그 관계자들이 처음에는 다음날 오후로 경기를 연기할 계획을 세웠지만, 앤더슨은 경기를 타이거스에게 몰수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홈팀인 화이트삭스가 적절한 경기 조건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 날, 아메리칸 리그 회장 리 맥페일은 앤더슨의 주장을 대체로 지지하고 두 번째 경기를 타이거스에게 9–0으로 몰수했다.[17][18]
앤더슨은 1995년 10월 2일에 감독직에서 은퇴했는데,[7] 이는 1994년 파업 이후 리그의 상황에 환멸을 느껴서라고 전해지며, 이 파업으로 인해 1995년 시즌 시작도 지연되었다. 앤더슨이 1995년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에 대체 선수를 감독하는 것을 거부하여 타이거스가 그를 은퇴하도록 압박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다. 은퇴 후 디트로이트의 WJR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앤더슨은 그 시즌에 아내에게 "이게 야구가 된 거라면, 이제 나 같은 사람은 필요 없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2. 3. 은퇴 이후
1995년 시즌이 끝나고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서 해고되자, 다른 팀 감독직 제안이 없어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당시 통산 2194승으로 역대 감독 최다승 3위에 랭크되었으며, 이후 토니 라 루사, 보비 콕스, 조 토리 감독 등이 더 많은 승수를 쌓아 6위로 기록되어 있다.[19][20]2000년 메이저 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헌액 당시 그는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겼다.[1]
> 감독은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아둔한 감독으로 형편없는 선수들을 데리고 많은 경기에 패하면서 결국 해고되는 감독이다. 또 하나는 나같이 천재적인 감독이 있다. 나처럼 좋은 선수들을 많이 데리고, 가능하면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비켜있으면서 그들이 많은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감독이다. 그러면서 나는 25년이나 감독직을 할 수 있었다.
2007년에 '캐나다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23] 신시내티 레즈 시절 감독 등번호였던 '10번'은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 시절 등번호 '11번'은 스파키 은퇴 이후 이 등번호를 사용하는 선수가 없기 때문에 향후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구단으로부터 정식으로 영구 결번 지정될 가능성이 있다.
2010년 11월 4일, 치매와 노환으로 건강 상태가 나빠진 앤더슨은 캘리포니아주 사우전드옥스 자택에서 타계했다.[6]
그는 통산 2,194승 1,834패, 승률 .545를 기록했다.[19]
디트로이트에 있는 동안, 앤더슨은 1987년에 자선 단체인 CATCH(Caring Athletes Teamed for Children's and Henry Ford hospitals)를 설립했는데, 이 단체는 부모가 건강 보험이 없거나 치료 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심각한 질병을 앓는 어린이들을 돕는 데 기여했다. 그는 은퇴 후에도 이 자선 단체를 계속 지원하고 참여했다.[21] 2008년 인터뷰에서 앤더슨은 CATCH가 "디트로이트에서 내가 한 최고의 일"이라고 말했다.[22]
앤더슨은 2000년 감독 자격으로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디트로이트에서 17시즌, 신시내티에서 9시즌을 감독했지만, 명예의 전당에 있는 그의 명판에는 신시내티 레즈 유니폼을 입고 있다. 그는 명예의 전당 입회식에서 앤더슨에게 메이저 리그 감독직을 맡을 기회를 준 전 단장 밥 하우삼을 기리기 위해 레즈 모자를 착용하기로 결정했다.[1] 입회 전 앤더슨은 "나는 자격이 없는 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며 자격이 없다고 느껴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었다.[6] 그는 수락 연설에서 선수들에게 많은 공을 돌리며 다음과 같이 말 했다.[1]
> 감독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한 종류는 별로 똑똑하지 않아요. 그는 나쁜 선수를 얻고 경기에 지고 해고당합니다. 저와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천재였죠. 저는 좋은 선수들을 얻어 방해하지 않고 그들이 많이 이기도록 했고, 26년 동안 그저 주변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명예의 전당 헌액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며 "저는 월드 시리즈 링을 착용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이 반지를 착용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1]
앤더슨은 같은 해 신시내티 레즈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2005년 5월 28일, 신시내티에서 열린 경기 전 행사에서 앤더슨의 유니폼 번호 10번이 신시내티 레즈에 의해 영구 결번되었다. 2000 시즌 중 디트로이트의 코메리카 파크에서도 앤더슨을 기리는 날이 열렸다.
2006년 6월 17일, 앤더슨의 등번호는 앤더슨이 1955년에 선수로 활약했던 포트 워스 캣츠에 의해 영구 결번되었다.[23] 2007년 앤더슨은 캐나다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11 시즌 내내 타이거스는 오른쪽 소매에 앤더슨을 기리는 패치를 부착했다. 2011년 6월 26일, 코메리카 파크 벽에 그의 등번호 11번을 공식적으로 영구 결번했다.[24]
3. 감독 스타일 및 리더십
스파키 앤더슨은 선수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데 뛰어난 감독이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선수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는 선수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16] 예를 들어, 커크 깁슨을 "다음 미키 맨틀"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16]
앤더슨 감독은 약점이 보이면 선발 투수를 빠르게 교체하고 불펜 투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략을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캡틴 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한 선수단 전체를 하나로 묶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팀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4. 논란 및 비판
앤더슨은 1994-95년 메이저 리그 파업 당시 대체 선수 기용에 반대하여 구단과 갈등을 빚었다.[7] 그는 파업 대체 선수를 감독하는 것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타이거스가 그를 은퇴하도록 압박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다. 앤더슨은 은퇴 후 인터뷰에서 "이게 야구가 된 거라면, 이제 나 같은 사람은 필요 없어"라고 말하며 당시 상황에 대한 환멸감을 드러냈다.[7]
일부 선수들을 지나치게 칭찬하여 오히려 부담을 주었다는 비판도 있었다. (예: 커크 깁슨을 '다음 미키 맨틀'로 언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