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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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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제루스는 13세기 파리 대학교의 철학자로,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파리 대학교에서 활동하며 피카르디 동향단의 지도자로 활동했고, 학장 선거에서 분열을 겪기도 했다. 이중 진리설을 가르쳤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이단 혐의로 소환되어 이탈리아로 도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저작으로는 '지성적 영혼에 관하여' 등이 있으며, 단테의 '신곡'에서 긍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시제루스는 1283-1284년경 오르비에토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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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시제루스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266년 파리 대학교 문학부 소속으로, 프랑스 학생과 피카르 "국가" (느슨하게 조직된 학생 단체) 사이의 폭동에서 피카르 측 주동자로 지목되어 교황 사절에게 처형 위협을 받았다.[1]

1272년 문학부 학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대립 후보 랑스의 알베리크가 과반수 표를 얻었다. 그러나 시제루스 지지자들은 부정행위가 있었다며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시제루스를 자체 학장으로 선출해 문학부가 둘로 분열되었다. 1275년 교황 마르티노 4세가 된 교황 특사 브리오니의 시몬에 의해 학부 분열이 해소되고, 시제루스는 리에주로 돌아갔다.[1]

시제루스는 "이중 진리설"을 가르쳤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중 진리설은 신앙을 통해 밝혀지는 진리와 별개로, 자연 관찰과 분석에 의한 이성으로 도출할 수 있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다만, 시제루스는 철학적 결론이 신앙과 모순될 경우 교회의 교리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명시했다.[1]

1276년 보에티우스 드 다키아, 니베르의 베르니에와 함께 이단 혐의로 소환장을 받았다. 시제루스 등은 출두를 거부하고 교황청 법정에 상소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도망쳤다고 전해지지만, 소환에 응한 후 무죄로 풀려났다는 연구도 있다.[1]

2. 1. 초기 활동과 파리 대학교

1266년, 파리 대학교 문학부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프랑스 학생과 피카르 "국가" (느슨하게 조직된 학생 단체) 사이의 폭동에서 피카르 측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교황 사절로부터 처형 위협을 받기도 했다.[1] 1271년, 파리 대학교 총장 선거에서 "국가" 중 소수파의 지지를 받아 총장으로 선출되었으나, 다수파의 반대로 3년 동안 갈등이 지속되었다. 이 갈등은 아베로이즘 신봉자인 시제루스와 보다 정통적인 스콜라 학자 간의 대립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1275년, 교황 사절 시몽 드 브리옹(후일 교황 마르티노 4세)에 의해 갈등이 해결되었고, 시제루스는 파리를 떠나 리에주로 은퇴했다.[1]

2. 2. 리에주 시기, 이단 혐의와 죽음

시제루스는 '이중 진리'(이성이 옳다고 하는 것과 반대로 믿음을 통해 반대되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를 가르쳤다는 혐의를 받았다. 스콜라 철학자였던 시제루스는 신앙과 이성의 화해를 추구했을 것으로 보인다.[1]

1277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금지령에서 다키아의 보에티우스와 함께 특별히 언급되며 이단 혐의로 소환되었다. 시제루스는 베르니에 드 니벨과 함께 의 존재에 대해 논하는 ''불가능한 것들''과 관련하여 이단 혐의를 받았다. 시제루스는 이탈리아로 도피한 것으로 보이며, 캔터베리 대주교 존 펙햄에 따르면 비참하게 죽었다고 한다.

브라반트 연대기에는 정신이 나간 비서에게 칼에 찔려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테는 《천국편(Paradiso)》 (x.134–6)에서 그의 죽음이 "죽음이 천천히 찾아왔다"고 묘사했다. 13세기 소네트 작가인 듀란테(xcii.9–14)는 그가 오르비에토에서 처형되었다고 말한다. "a ghiado il fe' morire a gran dolore, Nella corte di Roma ad Orbivieto." 교황 마르티노 4세가 오르비에토에 거주하던 1283–1284년 경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사상

시제루스는 아베로에스의 사상을 수용하여 급진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주장했다. 이로 인해 알베르투스 마그누스토마스 아퀴나스 등 당대 주류 신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3. 1. 이중 진리설 논란

시제루스는 "이중 진리", 즉 이성을 통해 옳다고 하는 것과 믿음을 통해 반대되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는 혐의를 받았다.[1] 그러나 시제루스는 스콜라 철학자였기 때문에, 이중 진리를 문자 그대로 가르치지 않았고,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를 찾으려 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1]

1277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금지령에는 다키아의 보에티우스와 브라반트의 시제루스에 대한 특별 조항이 포함되었다. 시제루스와 베르니에 드 니벨은 특히 의 존재에 대해 논의하는 '불가능한 것들'과 관련하여 이단 혐의로 다시 소환되었다. 그러나 시제루스와 보에티우스는 이탈리아로 도망친 것으로 보이며, 캔터베리 대주교인 존 펙햄에 따르면 비참하게 죽었다고 한다.

4. 저작


  • 《지성적 영혼에 관하여》(1270)
  • 《논리적 의문》
  • 《자연적 의문》
  • 《세계의 영원성에 관하여》
  • 《이것이 참인가에 대한 의문: 인간은 어떤 인간도 존재하지 않을 때 동물이다》
  • 《불가능한 것들》

5. 영향

단테 알리기에리신곡에서 시제루스는 천국의 4구에 등장하며, 사려분별, 정의, 절제, 추기경 덕의 긍정적인 예시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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