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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나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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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카나리아는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한민국의 여성 가수로, 한국 최초로 예명을 사용했다. 원산 출신으로, 1928년 〈뻐꾹새〉와 〈연락선〉을 발표하며 데뷔했으며, 〈에헤라 좋구나〉, 〈노들강변〉 등 여러 히트곡을 남겼다. 1938년 이후 악극단 공연에 집중했으며, 한국 전쟁 중 탈출 후 위문 공연에 참여했다. 1960년대 대한가수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1970년대에는 다방을 운영하기도 했다. 2002년 가요무대 출연을 마지막으로 은퇴했으며, 2006년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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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나리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신카나리아
본명신경녀
출생1912년 10월 26일
출생지함경남도 원산
사망지서울
직업 및 활동
직업가수
장르트로트
활동 시기1920년대 후반 ~ 1960년대
가족 정보
가족이혜정(딸), 이종광(사위)
웹사이트

2. 생애

신카나리아는 함경남도 원산부 출신으로 원산루씨고등여학교를 중퇴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계속하지 못했으나, 교회를 통해 성악가 이인범의 누나인 이옥현에게 노래를 배웠다. 임서방이 이끄는 조선예술좌가 원산 지역에 순회 공연을 왔을 때 그를 찾아가 가수로 데뷔했고, 이후 임서방과 결혼했다.

1928년 이동극단 막간 가수로 활동을 시작하며 〈뻐꾹새〉와 〈연락선〉을 취입하여 정식 데뷔했다. '신카나리아'라는 예명을 사용하여 한국 최초로 예명을 사용한 가수가 되었다. 곱고 간드러진 목소리는 "산골짝에서 졸졸졸 흐르는 냇물소래"와 같다는 평을 받았다.

1938년 이후 음반 활동보다 악극단 공연에 집중했고, 태평양 전쟁 종전 후 김해송의 KPK악극단에서 활동했다. 이 무렵 임서방과 이혼하고 시나리오 작가 김화랑과 재혼하여 새별악극단을 창립, 순회 공연을 했다.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과 함께 북쪽으로 가던 중 폭격을 틈타 탈출했다. 이후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위문 공연에 참여했고, 1960년대 대한가수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70년대 서울 중구 충무로에서 카나리아 다방을 운영하며 동료 가수들의 만남의 장소를 제공했다. KBS 가요무대에 원로가수 대우를 받으며 출연하는 등 활발한 방송생활을 이어갔다.

2002년 추석특집 가요무대 출연을 마지막으로 은퇴, 노환으로 투병하다 2006년 11월 24일 94세로 사망했다. 11월 26일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경기도 벽제 승화원에서 화장 후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백련리 국립임실호국원에 안장되었다.

2. 1. 데뷔와 초기 활동 (1920년대 후반 ~ 1930년대)

함경남도 원산부 출신으로 원산루씨고등여학교를 중퇴하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계속하지 못했으나, 교회를 통해 성악가 이인범의 누나인 이옥현에게 노래를 배웠다.[2]

임서방이 이끄는 조선예술좌가 원산 지역에 순회 공연을 왔을 때 그를 찾아가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 후에 신카나리아는 임서방과 결혼했다. 이동극단 막간 가수로 가수 활동을 시작한 뒤 1928년에는 〈뻐꾹새〉와 〈연락선〉을 취입하여 정식으로 데뷔했다.[2]

가수 활동을 하면서 신카나리아라는 예명을 사용하여 한국 최초로 예명(예능인이 본명 이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을 사용한 가수가 되었다. 곱고 간드러진 목소리로 "산골짝에서 졸졸졸 흐르는 냇물소래"와 같다는 평을 들었다. 막간 무대에서 부른 〈강남달〉과 〈강남제비〉를 비롯하여 〈나는 열일곱살이예요〉, 〈베니스 노래〉, 〈에헤라 좋구나〉, 〈애수의 부르스〉, 〈노들강변〉, 〈그 님은 떠나고〉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이 가운데 원제가 〈무궁화 강산〉인 전수린 작곡의 〈에헤라 좋구나〉는 신카나리아 자신이 즐겨 부른 애창곡이었다.[2]

2. 2. 전성기 활동 (1930년대 ~ 1940년대)

함경남도 원산부 출신으로 원산루씨고등여학교를 중퇴하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계속하지 못했으나, 교회를 통해 성악가 이인범의 누나인 이옥현에게 노래를 배웠다.[1]

임서방이 이끄는 조선예술좌가 원산 지역에 순회 공연을 왔을 때 그를 찾아가 가수로 데뷔하였다.[1] 이후 임서방과 결혼했다. 이동극단 막간 가수로 활동을 시작한 뒤 1928년에는 〈뻐꾹새〉와 〈연락선〉을 취입하여 정식으로 데뷔했다.[1]

가수 활동을 하면서 신카나리아라는 예명을 사용하여 한국 최초로 예명(예능인이 본명 이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을 사용한 가수가 되었다.[1]

곱고 간드러진 목소리로 "산골짝에서 졸졸졸 흐르는 냇물소래"와 같다는 평을 들었고, 막간 무대에서 부른 〈강남달〉과 〈강남제비〉을 비롯하여 〈나는 열일곱살이예요〉, 〈베니스 노래〉, 〈에헤라 좋구나〉, 〈애수의 부르스〉, 〈노들강변〉, 〈그 님은 떠나고〉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이 가운데 원제가 〈무궁화 강산〉인 전수린 작곡의 〈에헤라 좋구나〉는 신카나리아 자신이 즐겨 부른 애창곡이었다.[1]

1938년 이후로는 음반 활동보다 악극단 공연에 좀 더 집중하였고,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는 김해송의 KPK악극단에서 활동하였다.[1] 이 무렵 첫 남편인 임서방과 이혼하고 시나리오 작가인 이익과 재혼하여 함께 새별악극단을 창립하고 순회 공연을 벌였다.[1]

2. 3. 해방 이후 활동 (1945년 ~ 1960년대)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에 합류하여 북쪽으로 가던 중 폭격을 틈타 탈출했다.[1] 이후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위문 공연에 참여했고, 1960년대에는 대한가수협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1]

2. 4. 만년과 별세 (1970년대 ~ 2006년)

1970년대에는 서울 중구 충무로에서 카나리아 다방을 운영하면서 동료 가수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1] 이후에도 활발한 방송생활을 했고 특히 KBS 가요무대에 원로가수 대우를 받으며 출연하였다.[1]

2002년 추석특집 가요무대에 출연한 것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은퇴하였으며, 고령으로 인한 노환으로 투병생활을 해오다 2006년 11월 24일 만 94세의 나이로 노환으로 사망했다.[1] 고인의 사위 이종광 씨는 "장모님께서는 3년 전부터 중풍으로 인해 거동이 많이 불편하셨다"라고 말했다.[1]

장례식은 11월 26일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장으로 치러졌다.[1] 고인은 경기도 벽제 승화원에서 화장된 후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백련리에 있는 국립임실호국원에 안장되었다.[1]

3. 주요 히트곡

시에론음반에서 "사랑이여 굽히지 마오"를 시작으로 콜럼비아, 빅타, 태평 등 여러 음반사에서 노래를 녹음했다.[2] 음반에 취입한 "뻐꾹새", "연락선" 등도 있지만, 무대에서 부른 "강남달", "강남제비" 등이 더 인기를 얻었다.[2]

일제강점기에 일본 콜럼비아음반에서 "돌려주셔요 그 마음", "멋대강씨", "모던 일경" 등의 유행가와 유행소곡을 취입했고, 태평음반에서는 "달빛", "매암이(매미)", "무궁화강산"(無窮花江山) 등의 유행가를 불렀다.[2] 시에론음반에서는 강금자와 함께 동요 "달빛", "웃는 달림", 유행소패(流行小唄) "연애소패"(戀愛小唄), "웅대한 이상", 동요 "뻐국이", 유행소패 "한숨 고개", 가극소패(歌劇小唄) "사랑아 곡절(曲莭) 없어라", 유행소패 "옛터를 찾아서", "인생은 초로 같다" 등 여러 노래를 취입했는데, 이 노래들은 『三千里』(1932) 4권 7호·8호에 소개되었다.[2] 1933년 6월 16일 동서음악연주회(東西音樂演奏會)에 출연했고, 태평음반에서 유행가 두 곡을 취입했다.[2] "뻐꾹새", "강남 제비", "베니스의 노래" 등을 불러 대중가요 발전에 기여했다.[2]

참조

[1] 뉴스 가수 신 카나리아씨 별세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8-07-18
[2] 서적 한겨레음악대사전 도서출판 보고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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