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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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정일은 1941년 소련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2011년 사망한 북한의 최고 지도자이다. 그는 1974년 김일성의 후계자로 지명된 후,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을 통치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김정일은 1990년대 경제난과 기근 속에서 '선군정치'를 펼쳤으며, 2000년 남북 정상 회담을 개최하는 등 대외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그러나 핵무기 개발, 테러 지원 등으로 국제 사회에서 비판을 받았으며, 2011년 사망 후 아들 김정은에게 권력이 승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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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김성주라는 본명으로 1930년대 항일 무장 투쟁을 했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여 통치했으며, 한국 전쟁을 일으키고 주체사상을 내세워 독재 체제를 강화하고 개인 숭배를 조장한 정치인이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 원수 - 김영남 (19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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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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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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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정일 |
출생 이름 | 유리 이르세노비치 김 |
로마자 표기 | Gim Jeongil |
한글 표기 | 김정일 |
한자 표기 | 金正日 |
출생일 | 1941년 2월 16일 |
출생지 | 프리모르스키 지방,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소비에트 연방 |
사망일 | 2011년 12월 17일 |
사망지 | 평양, 북한 |
안장 장소 | 금수산태양궁전, 평양, 북한 |
국적 | 북한 소련 |
배우자 | 홍일천 (1966년–1969년, 이혼) 김영숙 (1974년~) |
파트너 | 성혜림 (1968년–2002년) 고용희 (1977년–2004년) 김옥 (2004년–2011년) |
자녀 | 김혜경 김정남 김설송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 |
아버지 | 김일성 |
어머니 | 김정숙 |
친척 | 김씨 일가 |
출신 학교 | 김일성종합대학 |
교육 | 만경대혁명학원 |
종교 | 무신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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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 |
직함 | 영원한 총비서 |
최고 지도자 | 북한 최고 지도자 |
총리 | 강성산 홍성남 박봉주 김영일 최영림 |
임기 시작 | 1994년 7월 8일 |
임기 종료 | 2011년 12월 17일 |
선임자 | 김일성 |
후임자 | 김정은 |
임기 시작 | 1997년 10월 8일 |
임기 종료 | 2011년 12월 17일 |
선임자 | 김일성 |
후임자 | 김정은 (제1비서) |
제1부위원장 | 오진우 조명록 |
부위원장 | 최광 김일철 리용무 연형묵 김영춘 오극렬 장성택 |
임기 시작 | 1993년 4월 9일 |
임기 종료 | 2011년 12월 17일 |
선임자 | 김일성 |
후임자 | 김정은 (제1위원장) |
임기 시작 | 1991년 12월 24일 |
임기 종료 | 2011년 12월 17일 |
선임자 | 김일성 |
후임자 | 김정은 |
군사 복무 | |
소속 | 조선인민군 |
복무 기간 | 1991년–2011년 |
계급 | 대원수 (사후 추서) |
지휘 | 최고사령관 |
정당 | |
소속 정당 | 조선로동당 |
기타 정보 | |
중앙기관 구성원 | 1980년–2011년: 조선노동당 제6차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1974년–2011년: 조선노동당 제5차, 6차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1972년–1997년: 조선노동당 비서국 1972년–2011년: 조선노동당 제5차, 6차 중앙위원회 위원 1982년–2011년: 제7차, 8차, 9차, 10차, 11차, 12차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기타 직책 | 1997년–2011년: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1980년–1997년: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1990년–1993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
로마자 표기 (러시아어) | Yuri Irsenovich Kim |
링크 |
2. 생애
김정일은 1941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아들로 태어났다.[7][8][9] 소련 기록에는 유리 김(Yuri Kim)으로 기록되어 있다.[7][8][9] 뱌츠코예 또는 우수리스크 근처 보로실로프 수용소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10][11] 김일성의 전쟁 기록에 따르면 1942년 7월에야 뱌츠코예에 도착했기 때문에 보로실로프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12] 가족 내에서는 "유라"(Yura)라는 애칭으로 불렸다.[13]
김정일의 공식 전기에는 1942년 2월 16일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지만,[15] 실제로는 소련에서 태어났다. 1945년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김정일은 네 살이었다. 그해 9월 아버지가 평양으로 돌아왔고, 11월 말 김정일은 소련 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와 송봉에 상륙했다.[17]
공식 전기에 따르면, 1950년 9월부터 1960년 8월까지 평양의 4번 초등학교와 남산고등중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18] 그러나 외국 학자들은 한국 전쟁 중 그의 안전을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19]
학창 시절 김정일은 조선소년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청년동맹(DYL)에서 활동하며 정치에 참여했다. 1957년 9월, 중학교 DYL 지부의 부위원장이 되어 파벌주의 반대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급우들 사이에서 이념 교육을 장려했다.
김정일은 1970년대 초 몰타에서 돔 미토프 총리의 손님으로 영어 교육을 받기도 했다.[20][21][22] 한편, 김일성은 재혼하여 김평일을 낳았는데, 외국에서는 김일성이 두 아들 사이의 권력 투쟁을 피하기 위해 김평일을 먼 곳으로 보냈다고 의심한다.[23]
김정일은 1964년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고,[299] 1961년 7월 22일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24] 1960년대에 당내에서 빠르게 승진했으며,[25] 1967년 갑산파 사건을 통해 김일성의 통치에 대한 도전을 제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6] 1960년대 후반에는 영화계의 '배신 행위'를 비판하며 북한 영화 제작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29]
1970년대 초, 김일성이 후계 문제를 고려하기 시작하면서 김정일은 유력한 후계자로 떠올랐다.[32] 김정일은 이복형제인 김평일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다.[36] 1972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24] 이듬해에는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김정일은 천리마 운동에 참여하고 3대혁명 소조운동을 이끄는 등 경제 성장에 힘을 보탰다.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위원회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301] 1982년 2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70년대부터 김정일은 숙부 김영주를 밀어냈고,[34] 1990년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식 행사에서 김영주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김일성은 주변에서 후계 논의를 제기할 때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부인 김성애가 압력을 가하자 오진우 등 빨치산 세력들이 반발해 김정일이 후계자로 결정되었다는 주장도 있다.[303]
1974년 당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은 권력자로서 첫 연설을 했다.[28] 김정일의 이름은 공개 문서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는데, 이는 김일성이 이미 김정일을 후계자로 정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28][29]
1980년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 당시 김정일은 이미 당 운영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북한은 심각한 경제 침체를 겪었다. 대한민국은 김정일이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지시했다고 비난했다.[40]
1991년 12월 24일 김정일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42] 1992년 김일성은 공개적으로 아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모든 내정을 담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1993년 4월 9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사실상 군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45]
탈북자 황장엽에 따르면, 북한 정부 체제는 1980년대와 1990년대 김정일 시대에 아버지 시대보다 더욱 중앙 집중화되고 독재적이 되었다.[46]
1972년 10월, 당 제5기 중앙위원회 제5차 총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73년 9월 당 제5기 중앙위원회 제7차 총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서기(당 조직, 선전선동 담당)로 선출되었다.[191] 1974년 2월 13일 조선로동당 제5기 중앙위원회 제8차 총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현: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다음 날인 2월 14일에는 김일성의 후계자로서 “추대”되었다.[191]
후계자 경쟁에서 숙부인 김영주와 싸움을 벌였고,[193] 아버지의 지지 기반인 빨치산파의 지지를 얻어 김일성의 환심을 샀다. 김정일은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제정하여 아버지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강화했다.[194]
후계자 결정은 대외적으로는 발표되지 않았고, 김정일은 “당 중앙”으로서만 언급되었다.[195] 1976년부터 1978년에 걸친 도끼 만행 사건, 요코타 메구미 납치 사건, 최은희 납치 사건 등은 모두 김정일이 후계자로 내정된 후에 발생했으며, 김정일의 지시 없이 이렇게 대담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김정일이 후계자로서 마땅한 실적을 만들려고 서두르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196]
2. 1. 출생과 가정 배경 (1941년 ~ 1945년)
김정일은 1941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아들로 태어났다.[285] 흔히 소비에트 연방(현재의 러시아) 하바롭스크 인근 뱌츠코예에서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Юрий Ирсенович Кимru)이라는 이름으로 출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정확하지 않다.[286] 김일성 일가가 뱌츠코예로 이주한 것은 1942년 7월 중순이므로, 뱌츠코예는 김정일이 태어난 곳이 아니라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286]김정일의 정확한 출생지는 논란이 있으나, 보로실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 B야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0년 10월 23일, 만주에서 일본군의 토벌에 쫓기던 김일성은 김정숙과 함께 소련으로 도주했다.[289] 소련으로 망명한 항일연군들은 보로실로프 근처의 남야영과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A야영) 두 곳에 분산 수용되었는데, 김일성은 남야영에 들어갔고, 김정일은 1941년 2월 16일 그곳에서 태어났다.[290] 남야영은 라즈돌노예 마을에 있었으며, 김정일이 태어난 집은 라조 거리(Lazo St.) 88번지(2층 빨간 벽돌집)로, 지금도 남아있다.[290]
김정일이 태어난 집 위치 (구글맵, 건물 사진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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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즈돌노예 기차역은 1937년 스탈린이 연해주 한인 17만여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출발지로, 고려인들의 한이 맺힌 곳이다.[291] 김일성 가족은 1942년 7월 88여단이 창설되면서 뱌츠코예 마을로 이주했다.[291]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1942년 2월 16일 백두산 근처 밀영에서 태어난 것으로 선전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292] 김일성이 빨치산 활동 당시 백두산 속에 밀영을 가지고 있었다는 근거도 없을 뿐더러, 그러한 곳에서 한겨울에 김정일이 태어났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이는 해방 후 김일성을 항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이미지를 덧붙인 것이며, '백두혈통'이라는 말도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292]
어린 시절 김정일은 러시아어 이름 유리의 애칭인 '유라'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1945년 8·15 광복 이후 북한으로 들어온 후로도 한동안 '김유라'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2. 2. 유년기와 청소년기 (1945년 ~ 1960년)
김정일은 1948년 평양 시내의 남산소학교 인민반에 입학했다. 한국 전쟁 중에는 만경대 혁명자유자녀학원에 편입했으며, 그 후 삼석인민학교로 진학했다.[296]어머니 김정숙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그는 권좌에 오른 뒤 어머니를 '항일의 여성혁명가 백두 여장군'이라는 칭호를 붙이며 영웅화하였고, 북한 여성이 따라야 할 귀감으로 미화시켰다. 김정숙의 출생지인 함경북도 회령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1981년에는 량강도 신파군이 김정숙군으로 지역명을 바꾸기도 했다.[294] 그가 어머니의 우상화에 공을 들인 것은 계모인 김성애와의 권력투쟁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294] 아버지 김일성은 재혼한 김성애와의 사이에 김평일(폴란드 주재 대사)·김영일(사망)·김경진(오스트리아 주재 북한 대사 부인) 등 세 자녀를 뒀는데, 김정일은 후계자 지명 과정에서 이들 및 이들의 후견인격으로 있던 삼촌 김영주와 권력투쟁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294]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김정일은 1950년 9월부터 1960년 8월 사이에 일반 교육 코스를 끝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6·25전쟁 후에 평양 제4인민학교를 졸업하고[296] 1953년 2월 10일 학급 소년단원들과 함께 <김일성장군님의 략전연구소조>를 조직하였다.[297] 남한 정보에 의하면 1954년 평양 남산고급중학교에 입학하여 1960년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296] 성적은 썩 우수한 편은 아니었으나 상위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망과 계모와의 관계 등으로 음울한 유년기를 보냈다. 체육이나 활동적인 것보다는 주로 독서와 시, 작문 등에 심취하였다.
1954년 9월 평양제1중학교에 입학하여 1957년 8월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297] 1956년 5월에는 제1차5개년계획의 전망에 대한 사대주의, 교조주의에 물젖은 어느 노동당 간부를 강연에서 논박하기도 했다 한다.[297] 1955년 4월 만경대와 칠골혁명사적지 참관을 조직하고 1956년 6월 5-14일에는 평양제1중학교 혁명전적지들에 대한 답사행군을 하였다. 1957년 9월 1일부터 평양제1중학교 고급반에 진학하여[297] 1960년 평양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했다.[298] 남산고급중학교 재학 중에 이 학교의 교사로 재직함과 동시에, 교내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296] 1958년 6월 27일에는 종파주의자를 뿌리뽑자는 취지의 학교민청총회를 소집하기도 하였다.[297] 이 시절의 김정일은 감수성이 풍부했고 감정적이었다고 한다.
1945년 11월 25일, 아버지 김일성의 측근 중 한 명인 조명록(趙明禄)의 호위를 받으며[185] 어머니 김정숙(金正淑), 남동생 수라(김만일(金万一))와 함께 소련에서 배편으로 귀국했다.[182] 함경북도 나진(羅先)시의 웅기항(雄基港)에 상륙한 후, 청진(清津)을 거쳐 평양으로 이동하여 먼저 귀국했던 아버지 곁에 정착했다.[182] 1946년에 여동생 김경희(金敬姫)가 태어났지만, 1947년에는 남동생을 사고로, 1949년에는 어머니를 전치태반으로 잃었다. 유년기에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비뚤어진 면이 있었다.[187]
한국 전쟁이 시작된 1950년 9월 중순, 북한군의 형세가 불리해지자 증조부모와 여동생과 함께 평양에서 평안북도(현: 자강도(慈江道)) 장강군(長江郡)으로 피난했지만, 유엔군이 북상하여 중국과 북한의 국경 부근까지 다가오자, 1950년 11월 2일에 중국으로 탈출하여 김일성의 가족 등과 함께 길림시(吉林市)에서 생활했다.
길림시 기록에 따르면 1952년에 피난처인 중국 길림시(吉林市)에 있는 길림시 조선족 소학교에 입학하여 중국소년선봉대에 입대하여 모범 학생으로 선발되었고,[188][189] 이듬해인 1953년 2월에는 길림시로 이전한 만경대혁명학원(万景台革命学院)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7월에 북한으로 귀국했다고 한다.[188] 그러나 1952년 11월에 아버지의 지시로 귀국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90]
2. 3. 청년기와 정치 활동 시작 (1960년 ~ 1974년)
김정일은 1957년 평양제1중학교를 졸업하고 남산고등중학교(남산고급중학교)를 거쳐 1964년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했다.[299] 대학 재학 시절, 소련, 폴란드, 동독, 중화인민공화국 등 공산권 국가들을 여행했고, 비공식적으로는 미국과 프랑스도 방문했다. 또한, 몰타에서 영어 교육을 받기도 했다.[20][21][22]1961년 7월 22일, 김정일은 조선노동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24] 1960년대에 당내에서 빠르게 승진했으며,[25] 1967년경 발생한 갑산파 사건을 통해 아버지 김일성의 통치에 대한 도전을 제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6] 26세의 김정일은 이 사건의 조사와 숙청 과정에 참여하면서 아버지로부터 공식적인 직무를 처음으로 부여받았다.[27]
1960년대 후반, 김정일은 영화계의 '배신 행위'를 비판하며 북한 영화 제작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29] 그는 아버지의 인격숭배를 강화하고 자신을 그 숭배와 연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31]
1970년대 초, 김일성이 후계 문제를 고려하기 시작하면서 김정일은 유력한 후계자로 떠올랐다.[32] 김정일은 이복형제인 김평일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다. 김평일은 난잡한 파티를 열고 "김평일 만세!"를 외치는 사건으로 인해 실각했고,[36] 1979년 이후 유럽에서 외교 임무를 맡으며 북한 정치에서 멀어졌다.[37]
1972년,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24] 이듬해에는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2. 4. 후계자 지위 확립과 권력 장악 (1974년 ~ 1994년)
김정일은 천리마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경제 성장에 힘을 보탰다. 1973년부터 시작된 3대혁명 소조운동을 직접 이끌었고, 1970년대 말부터는 3대 붉은 기 쟁취 운동을 주도했다.[301]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위원회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 대회에서 김정일은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301] 1982년 2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이후 사망할 때까지 대의원 직을 연임했다.1984년 5월 18일에는 로작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를 발표하였다.[302]
1970년대부터 김정일은 자신의 경쟁자이자 잠재적 후계자였던 숙부 김영주를 밀어냈다. 이후 1990년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식 행사에서 김영주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김영주는 김정일의 배다른 동생 김평일과 김영일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김일성은 주변에서 후계 논의를 제기할 때 “10년은 더 할 수 있다”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일성의 부인 김성애가 압력을 가하자 오진우 등 빨치산 세력들이 반발해 김정일이 후계자로 일찍 결정되었다[303]는 주장도 있다. 김정일 집권 이후 김성애 역시 공식 석상에서 제외되었고, 김평일은 외교관으로 전임되었다.
김정일은 1961년 7월 공식적으로 조선로동당에 입당했다.[24] 1960년대에 당내에서 꾸준히 승진했으며,[25] 1967년경 발생한 갑산파 사건으로 큰 이득을 보았다. 이 사건은 김일성 통치에 대한 마지막이자 강력한 도전이었다.[26] 26세의 김정일은 아버지로부터 공식적인 임무를 처음으로 부여받았으며, 이 사건 이후 진행된 조사와 숙청에 참여했다.[27]
김정일은 당 전원회의에서 연설을 했는데, 이는 권력자로서 그의 첫 연설이었다. 김정일의 이름은 공개 문서에도 처음으로 언급되었는데, 이는 김일성이 이미 김정일을 후계자로 정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28][29]
6개월 후, 예정에 없던 당 회의에서 김일성은 영화계의 배신 행위에 대해 충성을 촉구했다. 김정일은 스스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선언했고, 이로써 북한 영화 제작에서 그의 영향력 있는 경력이 시작되었다.[29] 그는 아버지의 개인숭배를 더욱 강화하고 자신을 그 숭배에 연결시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31]
김정일은 1972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에는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다.[24]
그러나 김일성이 1970년대 초반 후계 문제를 고려하기 시작했을 때,[32] 김정일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지 않았다.[30] 김일성의 숙부인 김영주는 한때 김일성의 후계자로 여겨졌지만,[33] 권력 투쟁에서 여러 실수를 저질렀고, 심각한 결점이 있었으며,[30] 점점 주변부로 밀려났다.[34] 그리고 그의 계모인 김성애의 자녀들, 특히 장남인 김평일이 더 큰 위협이 되었다.[30]
결국 김정일이 승리했다. 김영주는 최고직에서 물러나 부총리로 강등되었다.[34] 김성애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여성동맹 의장직을 잃었는데, 이는 그녀의 중요한 권력 기반이었다.[35] 김평일은 여러 긍정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지만,[30] 난잡한 파티를 열고 참석자들이 "김평일 만세!"를 외치는 사건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김정일은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보고했는데, 이는 자신을 둘러싼 개인숭배에 대한 위협으로 묘사될 수 있었다. 김일성은 격분했고, 김평일은 실각하여 김정일의 입지를 강화했다.[36] 1979년 김평일은 유럽에서 일련의 외교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북한 정치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37] 김평일은 2019년에야 북한으로 돌아왔다.[38]
김정일의 공식 전기에는 중앙위원회가 이미 1974년 그를 김일성의 후계자로 임명했다고 적혀 있다. 김정일의 후계자 지위가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확인된 것은 1977년 소책자에서 그가 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지정되었을 때였다.[32]
1980년 10월 제6차 당 대회 당시 김정일은 이미 당 운영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국 상무위원회, 중앙군사위원회 및 당 비서국의 고위직을 맡았다. 1982년 2월 제7기 최고인민회의 의원이 되면서 국제 사회는 그를 북한의 차기 지도자로 여기게 되었다. 1980년 이전에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단지 "당 중앙"으로만 언급되었다. 이때 김정일은 "친애하는 지도자"(친애하는 지도자|mr=ch'inaehanŭn jidoja한국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39] 정부는 그의 아버지인 "위대한 수령"을 본뜬 개인숭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언론에 의해 꾸준히 "용감한 지도자"이자 "혁명 위업의 위대한 계승자"로 칭송받았다. 그는 북한에서 아버지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인물로 부상했다.
1980년대에 북한은 심각한 경제 침체를 겪기 시작했다. 김일성의 '주체'(자력갱생) 정책으로 인해 북한은 소련과 중국과 같은 전통적인 파트너 국가를 포함한 거의 모든 해외 무역이 단절되었다. 대한민국은 김정일이 버마에서 열린 1983년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남한 고위 관료 17명, 내각 구성원 4명 사망)와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탑승객 115명 전원 사망)을 지시했다고 비난했다.[40] 북한 요원인 김현희는 두 번째 사건에서 폭탄 설치를 자백하며 김정일의 지시에 따른 작전이었다고 진술했다.[41]
1991년 12월 24일 김정일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42] 김일성의 가장 충실한 부하 중 한 명인 국방부 장관 오진우는 군 복무 경험이 없는 김정일을 북한의 차기 지도자로 받아들이도록 군부를 설득했다. 1992년 김일성은 공개적으로 아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모든 내정을 담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1992년부터 라디오 방송에서 김정일을 "친애하는 지도자" 대신 "친애하는 아버지"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그의 지위 상승을 암시했다. 1992년 2월 김정일의 50번째 생일은 대규모 축하 행사가 열린 날이었으며, 같은 해 4월 15일 김일성의 80번째 생일 축하 행사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1992년 김정일은 조선인민군 창건 60주년을 기념하는 군사 퍼레이드에서 첫 공개 연설을 하며[43] "영웅적인 조선인민군 장교와 병사들에게 영광을!"[44]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 이어 평양의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퍼레이드에 참석한 군중들은 큰 박수를 보냈다.
김정일은 1993년 4월 9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사실상 군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45]
탈북자 황장엽에 따르면, 북한 정부 체제는 1980년대와 1990년대 김정일 시대에 아버지 시대보다 더욱 중앙 집중화되고 독재적이 되었다. 황장엽이 설명한 한 가지 예로, 김일성은 장관들에게 충성을 요구했지만 의사 결정 과정에서 자주 그들의 조언을 구했다. 반면 김정일은 장관과 당 간부들에게 절대적인 복종과 동의를 요구했고, 어떤 의견 차이도 불충성의 징후로 간주했다. 황장엽에 따르면, 김정일은 당 서기의 집 크기나 부하들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것과 같은 국가 업무의 사소한 세부 사항까지 직접 지시했다.[46]
1972년 10월, 당 제5기 중앙위원회 제5차 총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73년 9월의 당 제5기 중앙위원회 제7차 총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서기(당 조직, 선전선동 담당)로 선출되었다.[191] 1974년 2월 13일의 조선로동당 제5기 중앙위원회 제8차 총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현: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다음 날인 2월 14일에는 김일성의 후계자로서 “추대”되었다.[191] 같은 시기에 북한판 문화대혁명이라고 불리는 삼대혁명붉은기획운동을 제창하여 권력을 확립해 나갔다.[192]
후계자 경쟁에서는 숙부인 김영주와 싸움을 벌였고, 아버지의 지지 기반인 빨치산파의 지지를 얻어 김일성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193] 김정일은 후계자로 결정된 직후인 1974년 2월 19일부터 20일 동안 진행된 강습회에서 숙부인 김영주를 “반당분자”라고 칭하며, “김영주 동지는 병을 핑계로 우리 당의 조직 지도 사업을 게을리하여 조직을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김영주 동지가 당에 미친 해독을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비판하고, 북한 사회를 후세에 이르기까지 규제하게 되는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제정하여 아버지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강화하며, “말단에서 중앙에 이르는 모든 조직에 새로운 당 사업 기풍을 확립하기 위해 사상 투쟁을 무자비하게 전개해야 합니다.”라고 선언했다.[194]
하지만 후계자 결정은 대외적으로는 발표되지 않았고, 김정일은 “당 중앙”으로서만 언급되었다.[195] 1976년부터 1978년에 걸친 도끼 만행 사건, 요코타 메구미 납치 사건, 최은희 납치 사건 등은 모두 김정일이 후계자로 내정된 후에 발생했으며, 김정일의 지시 없이 이렇게 대담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김정일이 후계자로서 마땅한 실적을 만들려고 서두르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196] 공작 부문을 이끌게 된 김정일은 1976년의 대남공작 부문 간부 회의에서 공작원의 현지화 교육을 도모하고, 그러기 위해 외국인을 적극적으로 납치하도록 지시했다. 1977년, 김정일은 북한의 공작원들에게 “막가파식”(닥치는 대로)으로 외국인을 유괴하라고 명령했다.[197]
3. 집권 시기 (1994년 ~ 2011년)
김정일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북한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김일성종합대학 재학 중이던 1961년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그는, 대학 졸업 후 당 평당원으로 활동하다 1964년 조직지도부 지도원이 되었다.[299] 이후 조직지도부 부부장, 선전선동부 부장, 중앙당 문화예술부장, 중앙당 조직 및 선전비서, 정치위원회 위원 등을 거쳤다.[299] 1974년에는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300] 2003년과 2009년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되었고,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당 총비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 정치국 위원, 당 중앙군사위 위원장, 당 중앙위 위원 등에 선임되었다.
2000년 6월 15일, 김정일은 평양에서 김대중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을 갖고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218][219][220] 이 선언으로 남북 간 긴장이 완화되고 경제 교류가 활성화되었으며,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남북 선수단이 동시 입장하기도 했다. 또한 1998년 시작된 금강산 관광 사업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2007년에는 노무현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두 번째 남북 정상 회담을 갖고 10·4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2001년에는 러시아를 여러 차례 방문하여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회담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 시행 이후, 북한의 소프트웨어 산업 발전을 위한 기술 수입 및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그 결과 2003년 개성공단이 건설되었다.[58]
1994년 북한과 미국은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 동결 및 해체, 발전용 원자로 생산 지원, 재침략 방지 등을 약속했다.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와의 회담 후에는 미사일 건설 중단에 동의했다.[59][60] 그러나 2002년 김정일 정권은 1994년 합의 이후에도 핵무기를 생산해왔다고 인정했다.[61]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지하 핵실험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고 발표했다.[62]
2000년 5월, 취임 후 첫 해외 방문으로 17년 만에 중국을 방문하여 장쩌민 중국 공산당 총서기와 회담하며 남북정상회담 사전 협의를 진행했다.[218][219][220]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의 일조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은 일본인 납치를 인정하고 사과했으며, 양국 간 현안 해결과 국교 정상화를 위한 일조평양선언을 발표했다.
2010년 5월, 전용 열차를 이용해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 다롄에 머물렀다.[109] 8월에는 아들 김정은과 함께 다시 중국을 방문했다.[111] 같은 해 중국 방문에서 김정일은 6자 회담 재개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으나, 중국 측은 북한의 강경 행위에 불신감을 드러냈다.[244] 김정일이 요청한 대규모 경제 지원은 원자바오 총리에게 거부되었고, 김정일은 이후 일정을 취소하고 조기 귀국했다.[245]
2011년 김정일은 중국, 러시아와의 외교에 힘썼다. 5월 중국 방문에서 후진타오 주석과 회담했고,[251][252] 8월에는 러시아를 방문하여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회담했다.[253] 10월에는 리커창 중국 국무원 부총리가 방북했을 때 김정은을 동석시켜 접견하고 경제기술협력협정을 체결했다.[254][255]
2008년 9월 9일 9·9절 행사에 불참하면서 김정일의 건강 이상설이 제기되었다.[335][336][337] 8월 15일경 뇌졸중과 뇌일혈 증세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졌다.[338][339]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김정일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고 언급했다.[340] 그러나 김정일은 80일 만에 공식 활동을 재개했다.[341] 2009년 3월 19일 공개된 사진에서 김정일은 수척한 모습이었다.[344]
2011년 12월 17일 오전 8시 30분, 김정일은 희천발전소 현지 지도를 위해 탑승한 열차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사망했다.[348][349] 그의 나이 71세였다. 사망 사실은 이틀 후인 12월 19일 조선중앙방송 리춘히 아나운서를 통해 공식 발표되었고,[350] 시신은 금수산태양궁전에 안치되었다.[351]
3. 1. 권력 승계와 선군정치
김정일은 천리마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1973년부터 3대혁명 소조운동을 직접 지도했으며, 1970년대 말부터는 3대 붉은 기 쟁취 운동을 이끌었다. 1980년 10월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위원회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후계자로서의 지위가 확정되었고, 이때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301] 1982년 2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에 선출된 후, 사망할 때까지 대의원직을 연임했다.1980년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 당시 김정일은 이미 당 운영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국 상무위원회, 중앙군사위원회, 당 비서국의 고위직을 맡았다. 1982년 2월 제7기 최고인민회의 의원이 되면서 국제사회는 그를 북한의 차기 지도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1980년 이전에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단지 "당 중앙"으로만 언급되었다. 이때부터 김정일은 "친애하는 지도자"(친애하는 지도자|ch'inaehanŭn jidoja한국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39] 정부는 그의 아버지인 "위대한 수령"을 본뜬 개인숭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언론에서 "용감한 지도자", "혁명 위업의 위대한 계승자"로 칭송받으며, 북한에서 아버지 다음으로 강력한 인물로 부상했다.
1980년대 북한은 심각한 경제 침체를 겪었다. 김일성의 '주체'(자력갱생) 정책으로 인해 북한은 소련, 중국 등 전통적인 파트너 국가를 포함한 거의 모든 해외 무역이 단절되었다. 대한민국은 김정일이 1983년 랑군 폭파 사건(남한 고위 관료 17명, 내각 구성원 4명 사망)과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탑승객 115명 전원 사망)을 지시했다고 비난했다.[40] 북한 요원 김현희는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에서 폭탄 설치를 자백하며 김정일의 지시에 따른 작전이었다고 진술했다.[41]
1991년 12월 24일, 김정일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42] 김일성의 가장 충실한 부하 중 한 명인 국방부 장관 오진우는 군 복무 경험이 없는 김정일을 북한의 차기 지도자로 받아들이도록 군부를 설득했다. 1992년 김일성은 공개적으로 아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모든 내정을 담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1992년부터 라디오 방송에서 김정일을 "친애하는 지도자" 대신 "친애하는 아버지"로 부르기 시작했다. 2월 김정일의 50번째 생일은 대규모 축하 행사가 열렸으며, 같은 해 4월 15일 김일성의 80번째 생일 축하 행사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1992년 김정일은 조선인민군 창건 60주년을 기념하는 군사 퍼레이드에서 첫 공개 연설을 하며[43] "영웅적인 조선인민군 장교와 병사들에게 영광을!"[44]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 이어 평양의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퍼레이드에 참석한 군중들은 큰 박수를 보냈다.
1993년 4월 9일 김정일은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사실상 군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45]
탈북자 황장엽에 따르면, 북한 정부 체제는 1980년대와 1990년대 김정일 시대에 아버지 시대보다 더욱 중앙 집중화되고 독재적이 되었다. 황장엽이 설명한 한 가지 예로, 김일성은 장관들에게 충성을 요구했지만 의사 결정 과정에서 자주 그들의 조언을 구했다. 반면 김정일은 장관과 당 간부들에게 절대적인 복종과 동의를 요구했고, 어떤 의견 차이도 불충성의 징후로 간주했다. 황장엽에 따르면, 김정일은 당 서기의 집 크기나 부하들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것과 같은 국가 업무의 사소한 세부 사항까지 직접 지시했다.[46]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은 82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김정일은 이미 1974년부터 아버지의 지정된 후계자였고, 1991년에는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아버지의 사망 후 최고지도자가 되었다.[47] 1997년 10월 8일 공식적으로 아버지의 직책인 조선로동당 총비서직을 이어받았다. 1998년에는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선되었고, 헌법 개정을 통해 그 직책이 "국가 최고 직책"으로 선포되었다. 또한 1998년, 최고인민회의는 헌법에서 주석직을 삭제하고 김일성을 그의 업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국가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했다.
공식적으로 김정일은 최용림 총리와 김영남(김정일과는 친척 관계가 아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함께 북한 정부의 행정부를 이끄는 삼두정치의 일원이었다. 김정일은 무장력을 지휘했고, 최용림은 정부를 이끌고 내정을 담당했으며, 김영남은 외교를 담당했다. 그러나 실제로 김정일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정부와 국가를 절대적으로 통제했다. 주요 직책에 대해 인민의 선거를 거칠 필요는 없었지만, 인민군 최고사령관 겸 국방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매 5년마다 군부 선거구를 대표하여 최고인민회의에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48]
김정일은 1990년 5월 24일 제9기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선출되어 군사를 완전히 장악하였다.[204] 이듬해인 1991년 12월 24일 제6기 당중앙위원회 제19차 총회에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었고,[205][206][201][207] 1992년 4월 20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칭호를 받았다.[208] 1972년 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1972년 헌법)에서는 군의 통수권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에게 있었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국방위원장을 국가주석이 겸임하는 것이 규정되어 있었기에, 김정일의 최고사령관 취임은 “초헌법적인 조치”였다.[209] 그러나 1992년 4월 9일 동헌법이 개정되면서 최고사령관 규정은 삭제되고 군의 통수권은 국가주석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국방위원장에게 이양되었다.[201] 그리고 1993년 4월 9일 제9기 최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어[210] 김정일은 군의 통수권을 장악하게 되었다.[211][201]
이 시기,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북한 쿠데타 음모 사건을 알게 된 김정일은 많은 소련 유학 경험자들을 구 KGB의 스파이로 숙청하였다.[212]
3. 2. 경제난과 고난의 행군
1990년대 내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제는 잘못된 관리로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0년대 중반에 심각한 홍수를 겪었는데, 이는 열악한 토지 관리로 인해 악화되었다.[49][5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작지의 18%에 불과하다는 사실[51]과 산업 유지를 위해 필요한 물품을 수입할 수 없다는 사실[52]이 더해져 심각한 기근으로 이어져 경제는 황폐화되었다. 붕괴 직전의 국가에 직면한 김정일은 국가를 강화하고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선군 정치"를 채택했다.[53] 일본 외무성은 2002년 "획기적인 사회주의적 시장 경제 관행"의 시행과 함께 1996년 이후 긍정적인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식량에 대한 지속적인 외국 원조 의존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유지했다고 인정한다.[54]1990년대의 파괴 이후 정부는 소규모 물물교환과 무역 활동을 공식적으로 승인하기 시작했다. 스탠퍼드대학교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연구 부소장인 Daniel Sneider는 이 자본주의와의 짧은 관계는 "꽤 제한적이었지만 특히 과거와 비교했을 때 자유 시장 시스템과 비슷한 시장이 놀랍게도 나타났다"라고 언급했다.[55]
2002년 김정일은 "돈은 모든 상품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선언했다.[56] 이러한 경제 개혁을 향한 제스처는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 중국의 덩샤오핑이 취한 유사한 조치를 반영한다. 2006년 드문 방문 중 김정일은 중국의 급속한 경제 발전에 대한 감탄을 표명했다.[57]
김정일이 직접 시작하거나 승인한 200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의 실패한 평가절하는 짧은 경제적 혼란을 야기했고, 위기에 직면한 국가 사회 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김정일은 사망 직전까지 김정은과 함께 경제 개혁 준비를 착수하였는데, 12월 14일까지의 연구 결론은 생산 공장 및 서비스업의 임대 정책을 기본으로 한다는 요건으로 한다는 것을 명확히 규정하고 특히 로두철을 TF의 위원장으로 삼아 중국으로 파견을 나갔다.
그리하여 4월경에 경제개혁을 하려고 하였고, 이때 중국처럼 개인이 아닌 기관의 명의를 쓴 투자자에게 임대 및 이관의 권한을 주고 대신 조세를 달러나 유로화로 환전하여 받겠다는 계획을 세웠다.[34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7.1 경제개혁조치'''의 연장선상에서 행하려고 하던 것을 결국 3일 뒤에 김정일이 사망하여 김정은에게로 승계가 되었다. 실제 4월에 준비까지 마쳤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으로 인하여 무위로 돌아갈 뻔 하였다.[347]
3. 3. 남북 관계와 대외 관계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김대중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을 가진 뒤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218][219][220] 이 선언은 분단 52년 동안 서로 대립하고 있었던 남북의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 경제교류 활성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금석이 되었다. 이에 따라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남북선수들이 동시 입장하였고, 1998년 시작된 금강산 관광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정몽헌 회장을 만나 성사시킨 것이다.2001년에는 여러 번 러시아를 방문하여 당시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 등과 회담하였고, 푸틴이 답방하여 회담을 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10월 2일부터 10월 4일에 걸쳐 노무현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두 번째 남북 정상 회담을 가졌다. 회담의 결과는 남북간 신뢰 구축, 협력 강화 등의 목표를 담은 10·4 남북 공동선언(정식 명칭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으로 발표되었다. 김대중의 평양 방문 때 다음번 회담에는 서울에 답방하겠다고 하였으나 방문하지 않았다.
김정일은 능숙하고 교활한 외교관으로 알려져 있었다. 1998년,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은 남북 관계 개선과 북한 내 남한 기업의 사업 진출을 허용하기 위해 "햇볕정책"을 시행했다. 김정일은 북한의 초기 소프트웨어 산업 발전을 위해 새로운 기술을 수입하고 개발할 계획을 발표했다. 이 새로운 정책의 결과로, 개성공단이 2003년 비무장지대 바로 북쪽에 건설되었다.[58]

1994년, 북한과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궁극적으로 해체하는 대가로 2개의 발전용 원자로 생산 지원과 재침략 방지 보장을 약속하는 제네바 합의에 서명했다.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와의 회담 후, 그는 미사일 건설 중단에 동의했다.[59][60] 2002년, 김정일 정권은 1994년 합의 이후 핵무기를 생산해왔다고 인정했다. 김정일 정권은 미국이 한국에 보유한 핵무기와 조지 W. 부시 대통령 하에서 미국과의 새로운 긴장 고조를 언급하며, 안보를 위해 비밀 생산이 필요했다고 주장했다.[61] 2006년 10월 9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지하 핵실험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고 발표했다.[62]
2010년 5월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5월 3일 전용 열차를 이용해 중국에 입국하여 다롄의 한 호텔에 머물렀다.[109] 2010년 5월,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커트 캠벨은 입수한 의료 정보에 따르면 김정일의 수명이 3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국 관리들에게 밝혔다.[110] 김정일은 2010년 8월 아들과 함께 다시 중국을 방문했는데, 이는 그가 아들 김정은에게 권력을 넘길 준비가 되었다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111]
2011년 5월 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친선, 협력 및 상호원조 조약 체결 50주년을 기념하여 다시 중국을 방문했다.[112] 2011년 8월 말에는 열차를 타고 러시아 극동 지역으로 이동하여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회담을 가졌다.[113]

2000년 5월, 취임 후 첫 해외 방문으로 17년 만에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 공산당 총서기 장쩌민(江澤民)과의 회담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사전 협의를 진행했다고 알려진다.[218][219][220]
2002년 9월 17일, 일본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와의 일조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실을 인정하고 구두로 사과하였다. 범인에 대해서는 “특수 기관의 일부 맹동주의자들이 영웅주의에 빠져 행한 행위라고 생각한다”라고 하며, 관련자들은 모두 처벌했다고 밝혔다. 또한, 양국 간 현안 해결과 국교 정상화를 위한 노력을 담은 ‘일조평양선언’을 발표하였다.

2010년 5월, 중국을 방문하여 김정일은 6자 회담 재개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에 중국 측은 “중조 우의를 시대와 함께 전진, 발전시킨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이는 중국 공산당 내에서는 관계 재검토를 의미하는 관용구이며, 북한의 반복적인 독단적 강경 행위에 중국 측이 불신감을 키우고 있다고 여겨지며, 거리를 두는 형태가 되었다.[244] 또한 김정일이 요청한 대규모 경제 지원도 국무원 총리(총리)인 원자바오에게 거부되었고, 김정일이 그 이후의 일정을 취소하고 일찍 귀국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건국 이래의 우방이었던 중국에도 버림받은 꼴이 되었다.[245] 같은 해 8월, 다시 중국을 방문하여 길림성 등을 방문하였다.[246]
2011년에 들어 김정일은 우방과의 외교에 힘썼다. 같은 해 5월 다시 중국을 방문하여 국가주석 후진타오(胡錦濤) 등과 회담하였고,[251][252] 같은 해 8월에는 러시아를 방문하여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와 회담하였다.[253] 같은 해 10월 중국 국무원 부총리 리커창이 방북했을 때 김정은을 동석시켜 직접 접견하고 경제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는 등[254][255] 우방과의 관계 유지와 지원을 요청하였다.
3. 4. 건강 이상과 사망
2008년 9월 9일, 김정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 기념 9·9절 행사에 불참하여 건강 이상설이 제기되었다.[335][336][337] 미국 언론을 중심으로 건강 이상설이 확산되던 중, 김정일은 8월 15일경 뇌졸중과 뇌일혈 증세를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다.[338][339]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김정일의 입원 사실을 언급하며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했다.[340]그러나 김정일은 80일 만에 공식 활동을 재개했다.[341] 한편, 일본 언론은 미국 정부가 김정일의 건강 악화와 실각 및 사망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342][343] 2009년 3월 19일,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사진에서 김정일은 수척한 모습으로 나타나 건강 이상설을 뒷받침했다.[344]
2009년 3~4월경, 김정일은 김정은을 국가안전보위부장에 임명하여 엘리트 감시를 맡기고, 자신의 사후에도 김정은의 권력 장악을 돕도록 했다.[345] 이 과정에서 국가안전보위부 우동측 부부장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345]
2011년 12월 17일 오전 8시 30분, 김정일은 희천발전소 현지 지도를 위해 탑승한 열차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사망했다.[348][349] 그의 나이 71세였다. 사망 사실은 이틀 동안 비밀에 부쳐졌다가, 12월 19일 정오 조선중앙방송 리춘히 아나운서를 통해 공식 발표되었다.[350] 시신은 금수산태양궁전에 안치되었다.[351]
4. 사후
김정일의 영결식은 12월 28일 평양시에서 거행되었고, 다음 날인 29일에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추모 대회가 열렸으며 추모곡이 작곡되었다.[352] 일각에서는 김정일이 열차가 아닌 평양 교외 별장에서 사망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353]
김정일은 2011년 12월 17일 오전 8시 30분 평양 외곽으로 열차를 타고 이동 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115][116] 그의 뒤를 이어 막내아들 김정은이 조선중앙통신에 의해 "위대한 계승자"로 칭송받으며 권력을 승계했다.[117][118][119] 조선중앙통신(KCNA)에 따르면, 그의 사망 당시 맹렬한 눈보라가 "멈추었고" "신성한 백두산 위로 하늘이 붉게 물들었으며" 유명한 호수의 얼음이 크게 갈라져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했다고 한다.[120]
김정일의 장례식은 12월 28일 평양에서 거행되었고, 다음 날까지 조문 기간이 이어졌다. 북한 내 정치적 움직임이 지역 안정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로, 사망 발표 직후 한국군은 즉각 경계 태세에 들어갔고 국가안전보장회의가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비슷한 우려로 발표 직후 아시아 증시가 하락했다.[115]
2012년 1월 12일, 북한은 김정일을 "영원한 지도자"로 선포하고 그의 시신을 보존하여 평양의 금수산태양궁전에 안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정부는 또한 전국에 그의 동상, 초상화 및 불멸탑을 건립할 계획을 발표했다.[121][122] 그의 생일인 2월 16일은 "나라의 가장 위대한 경사스러운 명절"로 선포되어 빛나는 별의 날로 명명되었다.[123]
2012년 2월, 김정일의 71번째 생일을 맞아 그는 사후에 최고 군사 계급인 대원수(일반적으로 '원수'로 번역되지만, 문자 그대로는 대원수임)로 추대되었다. 그는 북한의 창건자 김일성이 대원수로 승격되었던 1992년에 원수로 임명된 바 있다.[124] 또한 2012년 2월, 북한 정부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김정일훈장을 제정하고 "번영하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 및 국방력 증강에 기여한 132명에게 훈장을 수여했다.[125]
5. 평가와 비판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에게서 계승된 인격숭배의 중심에 있었다. 북한에서 그의 공식적인 생일인 환갑에는 대규모 축하 행사가 열렸고,[63] 2010년 북한 언론은 김정일의 독특한 의상이 전 세계적인 유행을 선도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64] 그러나 이러한 인격숭배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존경심이라기보다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65] 북한 외부의 언론 및 정부 기관들은 대체로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반면,[66][67][68][69][70] 북한 정부는 이것이 진정한 영웅 숭배라고 주장한다.[71] 조선인민군 공훈합창단이 부른 "당신 없이는 조국 없다"는 김정일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로, 평양 거리에서 자주 방송된다.[72]
김정일은 김일성과 함께 신격화되어 국영방송인 조선중앙방송에서 사용되는 호칭은 100개가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북한 매체에서는 "'''백전백승의 강철의 영장'''" 등으로 찬양하지만, 실제로는 전투 지휘 경험은 없다. 국민들에게는 "장군님"이라고 불리며, 모든 곳에 초상화가 걸려 있다. 대표적인 호칭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이지만, "김정일 동지", "김정일 총서기" 등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조선인민군 내부에서는 "최고사령관 동지"라고도 불린다. 북한 교재에는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시절 활동에 대해 순간이동을 사용했다는 기술이 있으며, 김정일 또한 『장군님은 순간이동을 하신다』라는 선전가요를 통해 신비주의적으로 우상화되었다.[261] 그러나 2019년경부터 김정은의 의향으로 이러한 신격화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261][262]
김정일의 건강 이상설은 2008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2008년 8월, 와세다대학교 시게무라 도시미쓰 교수는 김정일이 2003년 당뇨병으로 사망했고, 이후 대역이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77][78] 2008년 9월에는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보도가 나왔고,[79] 이후에도 건강 이상설은 끊이지 않았다.
김정일은 슬랙스와 점퍼를 즐겨 입었으며, 공식 선전에서는 검소한 복장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고급 맞춤복이었다. 선글라스를 착용한 모습이 자주 방영되었고, 외국 원수와 회담할 때는 인민복과 비슷한 옷을 입기도 했다.
조총련 웹사이트에는 김정일을 위인으로 칭송하는 글이 게재되어 있다. 또한, 통일교 문선명과 관계가 있어 경제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도 했으나,[265] 김정일·문선명 사후 2012년 통일교는 북한 사업에서 철수했다.[265] 김정일은 장남 김정남에게 자산을 맡겨 비밀 계좌를 통해 사치품을 구입하고, 유럽 은행에 거액의 비밀 자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267][268] 한편, 전속 일본 요리사 후지모토 켄지는 김정일이 개인적으로 세심한 배려를 하는 면모도 있었다고 증언했다.[269][270]
5. 1. 부정적 평가
김정일은 자신의 독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범 수용소를 운영하고 인권 탄압을 자행했다는 비판을 받는다.[354][355] 휴먼 라이츠 워치는 2004년 보고서에서 김정일 정권 하의 북한을 "세계에서 가장 억압적인 정부 중 하나"라고 평가하며, 최대 20만 명의 정치범을 수용하고 언론, 종교의 자유, 정치적 반대 등을 억압했다고 비판했다.[73] 국제앰네스티 또한 김정일을 비난하며 '수백만 명의 북한 주민들을 빈곤 속에 방치하고 수십만 명을 수용소에 수감했다'고 규탄했다.[75]김정일 정권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기근 발생 및 장기화에 대한 책임으로 "반인도 범죄" 혐의를 받기도 한다.[49][50] 1980년대 농업생산력 저하로 고생하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이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해 생산성 향상을 이룬 반면, 북한은 체제 보장을 우려하여 협동농장을 유지함으로써 농업생산력이 더욱 떨어졌다. 1995년과 1996년 대홍수로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했고,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는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김정일이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했다고 증언했다.
김정일은 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과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등 테러를 배후 조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54][355] 이로 인해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고,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되어 제재를 받았다. 냉전 종식 후 미국 중심의 새로운 경제 질서에서 완전히 소외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2010년 발생한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의 배후로도 김정일이 지목된다. 북한은 군 지휘통제 시스템을 2중으로 관리, 통제하기 때문에 최고지휘자의 허가 없이 이러한 도발을 실행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2004년 4월 22일 평안북도 룡천역에서 발생한 폭발 사건은 김정일의 열차 통과 30분 전에 발생하여 암살 시도 의혹이 제기되었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외교 전문에 따르면, 김정일은 이 사건을 자신에 대한 암살 시도로 인정했으며, 암살과 쿠데타를 우려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낸 것으로 드러났다.[358]
2010년 9월 28일, 북한이 김정일의 셋째 아들 김정은에게 인민군 대장 칭호를 부여하며 후계 구도를 공식화하자, 대한민국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일"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356]
1980년대 남포시에 건설된 남포갑문과 순천시의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건설은 김정일의 정치적 선전을 위한 사업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남포갑문은 완공 후에도 부실시공으로 유지보수가 필요했고, 오히려 대동강 유역의 기후 변화로 농업 및 어업 생산량이 감소했다.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는 경제 논리를 배제하고 계획되어 1994년에 가동이 중지되었고, 2010년 재가동되었지만 결국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두 사업에 투여된 자본은 150억달러에 가까운데, 이는 북한의 자본 여력 대부분을 산업 시설이 아닌 정치 선전물 건설에 사용한 것이다.
김정일은 여성 관계가 문란했다는 비판을 받는다.[263] 탈북자 이한영은 저서에서 김정일을 위해 외국 여성들이 납치되었다고 주장했다. 여자 문제로 인해 후계자 김정은의 미움을 받았고, 2019년에는 김정일의 신격화가 우회적으로 부정당했다.
김정일은 테러를 두려워하여 비행기를 싫어했고, 외국 방문 시 전용 장갑열차를 이용했다.[264]
6. 가족 관계
김정일은 공식적으로 두 번 결혼했고, 세 명의 정부(情婦, 첩)를 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26] 슬하에 알려진 세 명의 아들(김정남, 김정철, 김정은)과 두 명의 딸(김설송, 김여정)이 있다.[127][128]
- 홍일천: 김일성이 선택한 첫 번째 부인으로, 한국 전쟁 중 사망한 순직자의 딸이다. 1966년에 결혼하여 1968년에 딸 김혜경을 낳았으나, 1969년에 이혼했다.
- 성혜림: 김정일의 첫 번째 정부로, 북한 영화 배우였다. 김정일을 만났을 당시 이미 결혼하여 아이가 있었으나,[129] 김정일은 그녀의 남편에게 이혼을 강요했다고 알려져 있다. 1970년에 관계를 시작하여 1971년 아들 김정남을 낳았으나,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김정일은 1994년 집권할 때까지 이 관계와 아들의 존재를 비밀로 했다.[129][130] 성혜림은 수년간 소원한 관계 끝에 2002년 모스크바 중앙임상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31]
- 김영숙: 김일성이 선택한 공식 부인으로, 고위 군 관계자의 딸이었다. 김정일의 사망 전 두 사람은 수년간 소원한 관계였다. 슬하에 딸 김설송(1974년생)을 두었다.[128]
- 고용희: 일본 출신의 재일 한국인이자 무용수로, 김정일의 두 번째 정부였다. 2004년 암으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사실상의 영부인 역할을 했다. 슬하에 아들 김정철(1981년생), 김정은(1983년생)과 딸 김여정(2012년 당시 약 23세)을 두었다.[130][132][127][133]
- 김옥: 1980년대부터 김정일의 비서로 일했던 세 번째 정부이다. "사실상 북한의 영부인 역할"을 했으며, 김정일이 군 기지를 방문하거나 외국 고위 인사들을 만날 때 자주 동행했다. 2006년 1월 김정일과 함께 중국으로 비밀리에 여행을 갔는데, 중국 관리들로부터 김정일의 부인으로 대우받았다.[134]
김정일: 북한의 '최고 존엄'의 저자 마이클 브린에 따르면, 김정일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여성들은 어떤 권력이나 영향력도 얻지 못했다. 그는 그들의 역할이 연애와 가정생활에 국한되었다고 설명한다.[135]
김정일에게는 여동생 김경희가 있었다. 김경희는 2013년 12월 평양에서 반역 및 부패 혐의로 처형된 장성택과 결혼했다.[136]
김정일의 선조는 현재의 전라북도 전주시 출신이다. 본관은 전주 김씨이다.[279][280]
부인 | 자녀 | 비고 |
---|---|---|
홍일천 | 김혜경 (딸) | 1966년 결혼, 1969년 이혼 |
성혜림 | 김정남 (아들) | 정부, 1970년 관계 시작, 공식 인정 X |
김영숙 | 김설송 (딸), 김춘송 (딸) | 공식 부인, 김일성이 선택 |
고용희 | 김정철 (아들), 김정은 (아들), 김여정 (딸) | 정부, 사실상 영부인 |
김옥 | 정부, 비서 출신 |
7. 기타
김정일은 청소년기부터 문학, 시, 영화, 역사학 등에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처럼 시와 노래를 짓는 것을 좋아했으며, 특히 영화에 대한 관심이 커서 "민족과 운명", "조선의 별" 등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신상옥 감독을 통해 불가사리를 제작하는 등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 연출을 하기도 했다.[144] 시와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으며, 1952년 8월에는 가요 <조국의 품>을 작사, 작곡하기도 했다.[359]
《주체사상에 대하여》, 《건축예술론》, 《문화예술론》, 《미술론》, 《김정일저작선집》 등 200여 편이 넘는 저작을 집필했다. 역사학에도 관심이 있어 단군릉을 수시로 살펴보고 정비를 지시하기도 했다.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특별한 신앙을 가졌다는 기록은 없다.
김정일은 음식과 요리에 조예가 깊어 지도자들 사이에서 미식가로 알려졌다. 초밥을 좋아하여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를 전속 요리사로 채용했다. 후지모토 겐지가 만든 초밥의 설탕량이 조금만 달라져도 바로 알아챌 정도로 미각이 뛰어났으며, 비둘기 간장찜, 스테이크, 삼계탕, 야자상어 날개탕, 죽생상어날개탕 등 다양한 음식을 즐겼다.[151]
후지모토 겐지는 2001년 일본으로 귀국 후 2003년 《김정일의 요리사》를 통해 김씨 일가의 식생활을 공개했다. 2012년 김정은 집권 이후 김정은의 사면으로 다시 평양을 찾아 김정은과 회담 후 평양에 정착해 일식집을 운영하고 있다.
일부 간부들 사이에서는 김정일의 어눌하고 빠른 말투가 알려져 '떼떼'(말을 더듬는다는 북한 은어)라고 불리기도 했다.[366]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당시 김대중 전 대한민국 대통령을 직접 공항까지 마중 나가 영접했고, 2002년에는 박근혜의 예방을 받기도 했다.[367]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에서는 육로로 방북하는 노무현 전 대한민국 대통령을 직접 영접했으나, 하루 더 묵고 가라는 제안은 거절당했다.
김정일의 이름을 딴 꽃으로 김정일화(Kimjongilia)가 있다. 1988년 2월 김정일의 46회 생일에 처음 소개되었으며, 라틴아메리카가 원산지인 이 꽃은 일본인 가모 모토데루가 20년 동안 품종을 개량하여 김정일에게 선물한 것이다.[368]
구글의 슈미트 회장이 김정일의 시신에 참배하여 화제가 되었으며, 당시 그의 딸 소피 슈미츠는 김정일이 가장 좋아했던 컴퓨터가 맥북 프로 15인치라고 전했다.[370]
후지모토 겐지에 따르면 김정일은 엄청난 미식가이자 미각의 달인으로, 후지모토 겐지가 실수로 설탕을 10g 정도 덜 넣었을 때 유일하게 알아차렸다고 한다.
2004년 4월 22일 발생한 룡천 열차 폭발 사고는 김정일의 전용열차가 룡천역을 통과한 지 15분 뒤에 발생했다. 김정일은 이를 자신에 대한 암살 시도로 여겨 북한 내 이동통신 서비스 중단을 지시했다.
남일 장군의 교통사고 사망과 동생 김만일의 익사가 김정일의 뒷공작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김정일은 다음 작품들에서 묘사되거나 언급되었다.
- 사우스 파크
- 팀 아메리카: 세계 경찰
- 심슨가족 - 시즌17 에피소드16
- 1980년 - 민욱, KBS 드라마 《붉은 왕조》
- 1983년~1985년 - 김병기, KBS 드라마 《지금 평양에선》
- 1986 - 이희도, MBC 드라마 《북으로 간 여배우》
- 1995 - 이희도, SBS 드라마 《해빙》
- 1995년 - 김윤형, MBC 드라마 《제4공화국》
- 2006년 - 백일섭, 영화 《한반도》
- 2018년 - 기주봉, 영화 《공작》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비행공포증[137]을 앓아 러시아와 중국 방문 시 항상 개인 경호 열차를 이용했다.[138] BBC는 김정일과 함께 러시아를 기차로 여행한 러시아 사절 콘스탄틴 풀리코프스키(Konstantin Pulikovsky)가 매일 살아있는 바닷가재를 기차로 공수해 은수저로 먹었다고 보도했다.[139]
김정일은 2만 개가 넘는 비디오테이프와 DVD를 소장한 영화광으로 알려져 있다.[140][141] ''13일의 금요일'', ''고질라'', 홍콩 액션 영화, ''인디아나 존스'', ''제임스 본드'', ''남자는 힘들어'', ''람보'' 등을 좋아했으며,[141][142][143][144] 숀 코네리(Sean Connery)와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를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꼽았다.[141][145] 이링 코미디(Ealing comedies)의 팬이었으며,[141] ''꽃 파는 소녀'' 제작을 감독했다.[146] ''영화예술론''을 저술하기도 했다. 1978년 김정일의 지시로 납치된 신상옥과 최은희는 1986년 북한의 통제에서 벗어날 때까지 김정일 감독하에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이 영화들 중 마지막 작품은 1985년 ''고질라''에서 영감을 받은 서사시 ''풀가사리''였는데, 김정일은 이를 걸작으로 여겼다.[144][148] 2006년에는 주체 사상을 기반으로 한 영화 ''소녀의 일기'' 제작에 참여했다.[149]
김정일은 많은 외국 오락물을 즐겼지만, 전 경호원이자 이영국에 따르면 프랑스 와인을 제외하고는 북한에서 생산되지 않은 음식이나 음료는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150]
농구를 즐겼으며,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는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을 마치며 NBA 전설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의 사인이 담긴 농구공을 선물했다.[152] 공식 전기에는 김정일이 6개의 오페라를 작곡하고 정교한 뮤지컬을 기획하는 것을 즐겼다고 나와 있다.[153]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와의 정상회담에 참여했던 한국 평화 회담 특사 찰스 카트먼(Charles Kartman)은 김정일을 협상에서 합리적이고, 명확하며, 유머 감각이 있고 자신이 접대하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세심한 사람으로 묘사했다.[154] 그러나 심리적 평가는 제재와 처벌에 대한 그의 두려움이 없는 등 김정일의 반사회적 특징이 협상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고 결론 내렸다.
심리학 분야는 오랫동안 독재자의 성격 평가에 매료되어 왔으며, 김정일에 대한 광범위한 성격 평가가 이루어졌다. 프레드릭 L. 쿨리지(Frederick L. Coolidge)와 다니엘 L. 시걸(Daniel L. Segal)이 작성한 보고서는 아돌프 히틀러, 요셉 스탈린, 사담 후세인이 공유하는 "빅 식스" 성격 장애 집단(가학적, 편집증적, 반사회적, 자기애적, 피해망상형, 분열형)을 김정일도 공유한다고 결론지었는데, 이는 주로 사담 후세인의 프로필과 일치한다.
이 평가는 김정일이 북한 주민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는 것처럼 보이는 극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독립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그의 반사회적 성격 패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탈북자들은 김정일이 백두산 근처의 개인 휴양지, 원산시의 해변 별장, 평양 북동쪽에 여러 울타리, 벙커, 대공포로 둘러싸인 궁전 단지인 룡성 별장을 포함해 북한 전역에 17개의 다른 궁전과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155]
김정일은 아내와 애인 5명을 두었고, 그중 4명과 사이에 자녀가 있으며, 여성 관계가 화려하고 문란했다고 알려져 있다.[263] 여자 문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후계자 김정은의 미움을 받았고, 2019년에는 자신이 이룩한 지도자의 신격화를 우회적으로 부정당했다.
사망 당시 직책은 다음과 같았다.
구분 | 직책 |
---|---|
국가 | 국방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공화국 원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당 | 조선로동당 총비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
사실상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호칭은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국방위원장(혹은 위원장)이 정식이지만, 일본 매스미디어는 당의 최고 직책인 총비서로만 표기하고 있다.
동독국가인민군의 제복을 본뜬 것으로 알려진 슬랙스와 점퍼를 애용했다. 공식 선전에서는 검소한 복장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캐시미어 실크 소재의 맞춤복이었고, 신발도 옷과 색깔을 맞춘 주문 제작품이었다. 선글라스를 착용한 모습이 자주 방영되었다. 외국의 원수와 회담할 때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복과 비슷한 옷을 입기도 했다. 초상화에는 군복을 착용한 모습도 있지만, 실제로 군복 차림으로 공개석상에 나선 적은 없는 것 같다. 김일성은 정장을 자주 착용했지만, 김정일이 정장을 착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테러를 두려워했던 것일까, 아버지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비행기를 싫어했으며, 철도로 연결된 중화인민공화국이나 러시아 등 외국을 방문할 때는 전용 장갑열차를 이용했다.
조총련 웹사이트에는 "명언록"이나 "일화집" 등을 게재한 김정일 총비서 특집이 있으며, 그중에서는 김정일을 위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통일교(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의 문선명과 관계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1992년에 문선명과 회담하여 35억달러의 지원을 약속받고, 경제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1994년 7월 아버지 김일성이 사망한 직후에는 문선명의 측근 박보희와 회담했다. 통일교 간부 박상권이 사장을 역임한 한국의 "평화자동차"와의 합작회사 "평화자동차총회사"를 설립하여 자국의 남포(남포) 공업단지에서 자동차 생산을 하거나, 국영의 "보통강호텔" 경영을 통일교 관계자에게 맡겼지만, 김정일·문선명 사후 2012년에 통일교는 북한에서의 자동차 사업에서 철수했다.[265]
2002년에는 문선명의 80세를 축하하며, 한국의 요인들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축하 메시지와 선물을 보냈다. 북한과의 파이프를 만든 통일교는 계열사인 "워싱턴타임스"의 주동문(Chu Dong-mun) 사장이 2006년에 방미한 야마자키 타쿠와 면회하고, 이듬해 2007년 1월 10일 야마자키의 방북 루트를 준비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통일교 간부를 스파이 혐의로 체포한 이후 감시 대상으로 삼았다고 한다.[266]
장남 김정남에게 자산을 맡겨 마카오에 사치품 구입에 사용하는 비밀 계좌를 가지고 있었던 것 외[267], 장래 북한의 체제가 붕괴되어 만약 해외 탈출을 강요당하더라도 계속 사치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3600억엔의 비밀 자금을 유럽 은행에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 자금은 핵이나 미사일 기술의 매각으로 얻은 자금이라고 한다.[268]
해외 언론에서 보도되는 거만한 이미지와 달리, 개인적으로는 타인에게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자신에게 대해서도 자성적인 면도 보고되고 있다. 전속 일본 요리사 후지모토 켄지에 따르면 평양의 8번 연회장에서 그가 처음 김정일을 만났을 때, 김정일이 그의 발밑에 팁을 던져 주었다. 이러한 무례한 태도에 후지모토 켄지는 분노하여 그것을 줍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에 같은 장소에서 재회했을 때 김정일은 후지모토 켄지 곁으로 스스로 다가와 "후지모토, 지난번에는 미안했다, 용서해 달라"고 일부러 사과했다. 후지모토 켄지는 이에 감격하여 이후 김정일에 대한 평생의 존경으로 이어졌다고 한다.[269][270]
김정일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이다.[271] 김정일의 애독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Mein Kampf)이며, 이 책을 베고 잠자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271] 아돌프 히틀러가 즐겨했다고 알려진 야간 횃불 행진은 김정일도 정치 행사 연출의 하나로 매우 즐겨 사용했다.[271]
김일성(金日成), 김정일(金正日)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인쇄물에서 굵은 글씨로 표기된다. 북한의 문자 코드인 KPS 9566에는 일반적인 조선글(한국에서의 한글)과 다른 위치(4행 72열 - 4행 77열)에 전전 지도자 김일성(김일성), 전 지도자 김정일(김정일)의 이름 전용으로 사용되는 조선글이 등록되어 있으며, 일반 조선글과 달리 항상 굵은 글씨로 표기된다.
1979년 10월부터 한국의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하여 KBS를 즐겨 보았다.[272][273]
인터넷에 열심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하루에 수 시간씩 정보 수집 등에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평양 중심부의 고지대에 "국가영화문헌고"[274]라는 영화 문헌고를 (사실상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약 2만 권의 비디오테이프를 소유할 정도로 영화 매니아였다. 일본영화에서는 『고질라』 외에도 『남자는 괴로워』 팬이었으며, 1985년에는 도호의 특촬 스태프를 초청하여 『불가사리 전설의 대괴수』라는 괴수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또한, 북한 영화 산업을 위해 한국 영화 감독 신상옥과 그의 아내이자 여배우인 최은희를 납치하여 위의 『불가사리 전설의 대괴수』 제작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두 사람은 나중에 다시 망명하였고, 그 영향으로 세계 공개를 목표로 했던 『불가사리 전설의 대괴수』는 "정치적인 이유"로 공개가 중단되었다.
스포츠는 농구를 좋아했다. 춤 감상도 많은 취미 중 하나였다. WUSA 팬이었으며, 마들린 올브라이트로부터 축구공을 선물받은 적이 있다.
메르세데스-벤츠 애용자였으며, 공용차는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의 방탄 리무진 사양 차량이었다. S클래스는 역대 모든 모델을 소유했다. 특히 W126은 고위 간부에게 선물할 정도로 아끼는 차였다. 게다가 2006년에 폭스바겐 파에톤을 구입했다고도 한다. 미국산 링컨 컨티넨탈 리무진을 아버지 대부터 공용차로 사용했다. 오토바이는 할리 데이비슨을 소유했다.
1994년, 회원제 평양 골프장(파72, 약 7040.88m)에서 처음으로 골프를 라운딩하여 "18홀에서 11개의 홀인원을 기록하고, 어떤 홀도 최악이 "버디"였으며, 스코어는 38언더파 34를 기록하여 세계 기록을 세웠다"는 놀라운 기록을 주장했지만,[275] 진위 여부는 불명확하다. 그 외에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평양 골프장에 온 적이 없다", "평양 골프장 최고 기록은 현지 선수가 기록한 1오버다", "이 이야기는 북한 국영 언론이 보도한 정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서구 언론의 날조다" 등의 이야기도 있다.[276][277]
김정일의 요리사였던 일본인 후지모토 켄지에 따르면, 미식가였으며, 상어 지느러미 요리와 일본 음식으로는 스시와 스키야키, 장어덮밥 등도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닛신식품의 컵라면인 라왕도 좋아했다. 마요네즈는 큐피, 간장은 키코만에 고집했다. 틀니가 3개 있었고, 딱딱한 것은 먹지 않았다. 또 매운 음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스시의 와사비는 받아들였다. 식재료는 일본 등 외국에서 고급 식재료를 들여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2006년 10월 15일에 유엔에서 결정된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의 사치품 금수 조치로 인해 구입이 어려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헤비 스모커였으며, 특히 영국의 로스만을 애용했지만, 20년에 걸쳐 금연에 성공했다. 자신의 금연 성공 후, 북한 국민에게 금연을 강요했다.[278]
김정일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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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録金正日(33)】叔父を「害毒」「反党分子」呼ばわり 自分の権勢のため、父を「現人神」に仕立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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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録金正日(47)】中国の改革解放を「共産主義捨てた」と一蹴 鄧小平は「なんてばかなやつだ」と激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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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新聞
201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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厳しい「孤立化・経済困難」脱出作戦 - 1990年の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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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북한군최고사령관 승계 외 1건
{{KBS NEWS|3711072|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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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労働党中央委員会第6期第19回総会に関する報道――『労働新聞』(1991年12月25日号)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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対外政策転換で突破口を模索 - 1991年の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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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일에 원수칭호
{{KBS NEWS|3715401|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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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 군 완전 장악
null # KBS NEWS ID만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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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入門
null # 페이지 정보만 제공됨. [...]
null # 출판사 정보 없음. 추가 정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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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북한, 김정일 권력승계위한 분위기 조성작업 시작
null # KBS NEWS ID만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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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金正日書記を朝鮮労働党総書記に推戴することを決定――朝鮮労働党平安南道代表会(1997年9月21日) / 朝鮮労働党平安南道代表会
null #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
朝鮮問題研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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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労働党中央委員会、朝鮮労働党中央軍事委員会特別報道 / 朝鮮労働党中央委員会 ; 朝鮮労働党中央軍事委員会
null #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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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총비서 베이징 방문
null # KBS NEWS ID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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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正日総書記訪中日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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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正日の訪中の目的が以前とは正反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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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首脳会談の際、北に4億ドル送金」波紋呼ぶ疑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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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北朝鮮・韓国そして日本 歴史的必然と日本の選択
null # ISBN만 제공됨.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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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材日記】マカオの金正男に注目する理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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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中政権が北へ送った秘密資金は核開発などに使わ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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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정일 위원장 극비리 중국 방문
null # KBS NEWS ID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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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위원장 중국 왜 갔나?
null # KBS NEWS ID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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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正日の長男がIT政策の最高責任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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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新義州(シンウィジュ)特区’霧散 9年ぶりに経済協力 再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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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ll # 제목 없음
null # 추가 정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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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ll # 추가 정보 필요
일본 참의원
null # 날짜 정보 없음. 추가 정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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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향 석유 중국 3일간 정지
null # 추가 정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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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지도자는 국방위원장 북한, 개정 헌법에 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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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썽꾸러기 김정일은 어떻게 최고통치자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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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蘇), [[6.25 남침]](南侵) 비밀 문건(文件)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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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구름(雲, 운)' 대신 '빛나는 銀(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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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승계 캠페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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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로작 제111회: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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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김성애 치맛바람에 빨치산파, 김정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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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첨단기술 연구 개발 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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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주민 기대수명 남한보다 11세 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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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고난의 행군’ 5년 동안 주민 33만 명 굶어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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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경제개혁조치 이후 북한의 체제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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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수입지표에 대한 소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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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경제개혁의 실태와 전망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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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시장가격 도입, 계획경제 포기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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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최근 경제개혁의 진행 동향의 대한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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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손전화기공장 연간 수십 만대 생산능력 갖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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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지문 인식도 가능" 북한 스마트폰 살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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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화폐개혁 실패… 박남기 黨재정부장 해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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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식량배급 포기… 장마당 전면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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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제철기업소 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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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영농전투에 진입한 사리원시 3중3대혁명붉은기 미곡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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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9.9절 불참...중병설 분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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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전부터 이상징후… 정부 “계산된 행보 아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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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찮은 ‘김정일 건강이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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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핵심관계자 "김정일 신변이상 확실"(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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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뇌졸중-반신불수說의 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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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총리 "김정일 입원 정보…상황 좋지 않은듯"(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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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김정일 '80일만의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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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김정일 건강 예상보다 훨씬 나빠…실각 및 사망 전제 대책 착수"…日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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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사진정치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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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척해진 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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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권력 군부 핵심 4인방이 떠받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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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군사/외교 > 언론보도주요뉴스 > [코나스] 北, 금년 4월부터 중국식 경제개혁 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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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일 사망 직전 경제 개혁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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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위원장, 심근경색과 심장쇼크로 인해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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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사망> 北매체 보도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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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위원장, 17일 오전 8시 30분 열차서 과로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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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28일 영결식…29일까지 애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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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북한 김정일 장군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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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정부, 김정일 위원장, 사망 시각·장소 조작 됐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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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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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北 3대 권력세습 한목소리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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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자랑 '대계도간석지'…김정은 아이콘 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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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정일, "용천역 폭발사고 자신의 암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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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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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ODAY - 기사내용 - 김일성-김정일은 변태성욕자?...中,日 인터넷 '검증샷' 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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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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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북한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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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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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시리즈> 김정일의 여인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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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한국 {{!}} NewsHankuk.com - “北 차기후계 김정은…고영희 아닌 김옥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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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장군님은 '떼떼'…신년사도 못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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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의원, 북한방문 마치고 서울로 귀환 - 2002-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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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일성·김정일 시신 참배한 ‘구글 회장’, 방명록에 글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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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北 김정일, 가장 좋아했던 컴퓨터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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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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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뉴스 따라잡기] 김정일이 곁에 둔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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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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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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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北김정일 이복동생 김현 8년 전 처형돼” 소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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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통신 베일 벗은 김일성 가계도…'김정일, 다섯 부인에 일곱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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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6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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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정은, 신고식 차 2010년 방중'설에 정보당국 "사실 아냐"
9살 깜짝 등장·12살 방중…김주애의 3년 돌아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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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김정은, 전용열차 타고 평양 떠났다···베이징까지 20~24시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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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조용필 노래에 반응 없던 북한 관객들…20년 만에 공개된 평양 공연의 진실
다자 외교무대 첫 선…정부 "방중 미리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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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중 전승절 참석, 북한판 ‘안러경중’…‘대미 협상 염두’ 중국과 관계 회복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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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광복절 첫 연설…“북·러, 역사에 전무한 동맹관계”
김정은, 광복절 맞아 공개 연설…"북러 친선, 투쟁 속에 공고화"
평양의 대표 ‘맛집 기지’ 창광 음식점 거리 40주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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