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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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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해송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전쟁 시기까지 활동한 대한민국의 작곡가, 가수, 연주자이다. 1930년대 중반부터 '재즈의 귀재'로 불리며, 〈연락선은 떠난다〉, 〈오빠는 풍각쟁이〉, 〈선창〉 등 다수의 히트곡을 작곡했다. 일제강점기 말 친일 가요 작곡으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심의에서는 기각되었다. 광복 후 KPK악극단을 결성하여 뮤지컬 형식을 시도하고 대중음악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나,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사망했다. 가수 이난영의 남편이며, 김시스터즈와 김브라더즈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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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송 - [인물]에 관한 문서
음악가 정보
이름김해송
원어 이름金海松
본명김송규
출생일1910년 12월
출생지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개천
사망일1950년? (39/40세?)
장르트로트
악기기타, 지휘
활동 시기1935년 ~ 1950년
학력도요 대학교 법학과
배우자이난영
가족아내와 4남 3녀
형제자매는 형 4명, 누나 7명
손윗처남 이봉룡(가수 겸 작곡가)
직업작곡가
가수
작사가
기타 연주자
뮤지컬 연출가

2. 생애

평안남도 개천에서 태어나 충청남도 공주에서 성장했다. 공주고등보통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고, 학창 시절부터 기타 연주에 재능을 보였다. 1930년대 중반부터 대중음악계에서 천재로 불리며[2] 작곡, 가수, 편곡, 연주, 지휘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재즈를 도입하여 "재즈의 귀재"로 불리기도 했다. 1935년 오케레코드에서 자작곡 〈항구의 서정〉과 손목인 작곡의 〈웃지를 마서요〉로 데뷔했다.

연락선은 떠난다〉, 〈오빠는 풍각쟁이〉, 〈역마차〉, 〈선창〉 등 많은 히트곡을 작곡했고, 장세정, 박향림, 이난영 등 당대 인기 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불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친일 가요를 작곡하여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작곡가의 낮은 사회적 위상이 참작되어 기각되었다.[3]

광복 후에는 KPK악극단을 결성하여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오페라를 원용한 뮤지컬 형식을 시도했다. 대중음악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투란도트》(1948), 《카르멘환상곡》(1949) 등을 작곡했다.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3] 김시스터즈 관련 다큐 영화 <다방의 푸른꿈>(2015)에는 납북 당시 상황과 사망 경위에 대한 증언이 나온다.

1937년 인기 가수 이난영과 결혼했다. 자녀들은 김시스터즈와 김브라더즈를 결성해 가수 활동을 했다. 이난영은 남편이 납북된 이후 남인수의 도움으로 KPK 악단을 부활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5]

2. 1. 유년기 및 학창 시절

평안남도 개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평안남도 평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훗날 충청남도 공주에서 성장하였다. 공주고등보통학교와 숭실전문학교에서 수학했다. 학생 시절부터 기타 연주 등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2]

2. 2. 음악 활동 (일제강점기)

1930년대 중반부터 김해송은 대중음악계의 천재로 불렸다.[2] 타고난 재능으로 작곡은 물론 가수, 편곡, 연주, 지휘 등을 모두 능숙하게 해냈다. 재즈 음악을 도입해 "재즈의 귀재"로 불리기도 했다. 가수로서의 데뷔곡은 오케레코드에서 1935년에 자작곡으로 부른 〈항구의 서정〉과 손목인 작곡의 〈웃지를 마서요〉이다. 가수로서는 김해송, 작곡가로서는 김송규라는 이름을 사용하다가 1940년대부터는 주로 예명 김해송으로 활동했다. 만요풍의 가사를 얹은 노래에 능했다.

작곡자로서는 〈연락선은 떠난다〉, 〈오빠는 풍각쟁이〉, 〈역마차〉, 〈울어라 문풍지〉, 〈화류춘몽〉, 〈선창〉, 〈울어라 은방울〉, 〈청춘계급〉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장세정, 박향림, 이난영, 고운봉, 이화자 등 당대의 인기 가수들이 부른 노래들이다. 서양 대중음악에 능통하여 재즈나 블루스, 스윙과 같은 그 시기에 흔치 않은 음악 장르를 섭렵했다. 김해송은 뛰어난 연주자로서 무대 연출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무대 활동의 특성상 자취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이난영과 남인수가 함께 부른 〈이천오백만 감격〉, 〈참사랑〉, 〈봄날의 화신〉, 〈그대와 나〉, 〈총후의 기원〉과 같은 친일 가요 작곡 사실이 알려져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김해송을 손목인과 함께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명시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심의 대상자 명단에 올렸지만 작곡가가 갖고 있던 당시의 사회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기각했다.[3]

2. 3. 음악 활동 (광복 이후)

광복 후 김해송은 KPK악극단을 결성하여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오페라를 원용하여 음악의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뮤지컬 형식을 시도함으로써 전위적이고 다채로운 무대 예술을 선보였다.[3] 또한 대중음악협회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작곡한 작품으로는 《투란도트》(1948), 《카르멘환상곡》(1949), 《로미오와 줄리엣》(1950) 등이 있다.

2. 4. 한국전쟁과 납북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으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군 부대 활동을 이유로 납치되어 가던 중 총살되었다는 설 등 월북 및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3] 2015년 EBS다큐멘터리페스티발EIDF에서 상영된 김시스터즈 관련 다큐 영화 <다방의 푸른꿈>(김대현 감독, 2015년)에서는 다동 집에서 납북될 때의 상황과 납북 과정 중 노래를 시켰다는 증언, 비행기 공습 과정 중에 사망했다는 증언이 나온다.

3. 가족 관계

1937년 이난영과 결혼했으며,[4] 자녀들은 김해송이 실종된 후 김시스터즈와 김브라더즈를 결성해 가수 활동을 했다.[5]

4. 주요 작품

김해송은 가수, 작곡, 편곡, 연주, 지휘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특히 재즈를 한국 대중음악에 도입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2] 1930년대 중반부터 "대중음악계의 천재", "재즈의 귀재" 등으로 불렸다.[2] 일제 강점기에는 만요풍의 노래를 주로 작곡하여 인기를 얻었다.

4. 1. 대표곡

1935년 오케레코드에서 자작곡으로 부른 〈항구의 서정〉과 손목인 작곡의 〈웃지를 마서요〉가 가수로서의 데뷔곡이다.[2] 작곡가로서는 〈연락선은 떠난다〉, 〈오빠는 풍각쟁이〉, 〈역마차〉, 〈울어라 문풍지〉, 〈화류춘몽〉, 〈선창〉, 〈울어라 은방울〉, 〈청춘계급〉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2] 장세정, 박향림, 이난영, 고운봉, 이화자 등 당대의 인기 가수들이 김해송의 노래를 불렀다.

4. 2. 악극 (광복 이후)

광복 후 김해송은 KPK악극단을 결성해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오페라를 원용하여 음악의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뮤지컬 형식을 시도함으로써 전위적이고 다채로운 무대 예술을 선보였고, 대중음악협회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3] 이 시기의 작품으로 《투란도트》(1948), 《카르멘환상곡》(1949), 《로미오와 줄리엣》(1950) 등이 있다.[3] 이난영도 남인수의 도움으로 KPK 악단을 다시 부활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5]

5. 평가 및 유산

김해송은 1930년대 중반부터 대중음악계의 천재로 불렸다.[2] 타고난 재능으로 작곡, 가수, 편곡, 연주, 지휘 등을 모두 능숙하게 해냈다. 재즈 음악을 도입해 "재즈의 귀재"로 불리기도 했다. 가수, 작곡가, 무대 연출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무대 활동의 특성상 많은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다.

일제 강점기 말기 〈이천오백만 감격〉, 〈참사랑〉, 〈봄날의 화신〉, 〈그대와 나〉, 〈총후의 기원〉 등 친일 가요를 작곡한 사실이 알려져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김해송을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심의 대상자로 올렸으나, 당시 작곡가의 사회적 위상이 낮았다는 점을 인정하여 기각했다.[3]

광복 후 KPK악극단을 결성해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오페라를 원용하여 음악의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뮤지컬 형식을 시도, 전위적이고 다채로운 무대 예술을 선보였다. 대중음악협회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으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5년 EBS다큐멘터리페스티발EIDF에서 상영된 김시스터즈 관련 다큐영화 "다방의 푸른꿈"에서 납북 당시 상황과 과정에 대한 증언이 나온다.

이난영의 남편으로도 유명하며,[4] 두 사람 사이의 자녀들은 김시스터즈와 김브라더즈를 결성해 가수 활동을 했다.

6. 학력

참조

[1] Youtube 1952년 발매된〈연락선은 떠난다〉의 일본어판,〈連絡線の唄〉의 앨범 https://www.youtube.[...]
[2] 뉴스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4] 서민적 삶을 노래에 담은 '천재음악가' 김용환" http://www.yeongnam.[...] 영남일보 2007-09-06
[3] 서적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Ⅱ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4] 뉴스 "〈목포의 눈물〉 여가수 이난영 평전 ⓛ - 가수 '이난영'을 이야기하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6-03-09
[5] 뉴스 "[이야기로 듣는 옛노래] 다방(茶房)의 푸른 꿈 ④ - 이난영-남인수 시련 함께하며 사랑 싹틔워" http://www.cctoday.c[...] 충청투데이 2007-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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