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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하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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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싱하푸라는 고대 도시로, 스리랑카의 비자야 왕자의 전설과 관련된 장소이다. 마하밤사 연대기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사자(싱하)와 여인 수파데비의 이야기에서 유래되었으며, 비자야는 이곳에서 추방되어 스리랑카에 탐바파니 왕국을 세웠다. 싱하푸라의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하며, 다양한 학설에 따라 인도, 특히 칼링가, 구자라트, 벵골 지역, 또는 동남아시아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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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하푸라
싱하푸라
다른 이름싱하푸라 (Siṃhapura)
유형도시
위치인도 아대륙
관련 민족싱할라족
관련 인물싱하바후 왕
관련 장소라타 주
종교불교
역사적 맥락
건립 시기기원전 6세기경
건설 이유싱하바후 왕이 건설
전설적 중요성싱할라 왕조의 기원지로 여겨짐
문화적 중요성
언급마하밤사, 딥밤사
중요성싱할라족의 정체성 및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장소
현대적 중요성
현재현재 위치는 불명확함. 라타 주와 관련되었다고 여겨짐

2. 전설

마하밤사에 따르면 방가의 왕은 칼링가 왕의 딸과 결혼했다. 이들 부부에게는 수파데비라는 딸이 있었는데, 이 딸은 짐승의 왕과 교미할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성인이 된 수파데비 공주는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며 방가를 떠났다. 그녀는 마가다로 향하는 대상 일행에 합류했지만, 라라(또는 라다) 지역의 숲에서 싱하("사자")의 공격을 받았다. 랄라는 라르흐(방가-칼링가 지역의 한 지역) 또는 라타(오늘날 구자라트주의 일부)로 다양하게 식별된다.[18][25][3][4]

수파데비는 공격 중에 도망쳤지만 다시 사자를 만났다. 사자는 그녀에게 매력을 느꼈고, 예언을 생각하며 그를 애무하기도 했다. 사자는 수파데비를 동굴에 가두었고 그녀와 함께 아들 싱하바후와 딸 싱하시발리를 낳았다. 아이들이 자랄 때 그녀는 자식들과 함께 방가로 탈출했다. 그들은 우연히 수파데비의 사촌이었던 장군을 만났고 나중에 그녀와 결혼했다. 한편 사자는 실종된 가족을 찾기 위해 마을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방가의 왕은 사자를 죽일 수 있는 사람에게 보상을 발표했다. 싱하바후는 보상을 받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 싱하바후가 수도로 돌아올 무렵 방가의 왕은 죽었다. 싱하바후는 장관들에 의해 새로운 왕으로 선포되었지만 나중에 왕권을 어머니의 남편인 장군에게 넘겼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라라로 돌아가 싱하푸라라는 도시를 세웠다.[18][17][3][5]

싱하바후는 그의 여동생 싱하시발리와 결혼했으며 그 부부는 16쌍의 쌍둥이 형태로 32명의 아들을 두었다. 비자야는 그 중 장남이었고 그의 쌍둥이 수미타가 뒤를 이었다. 비자야와 그의 추종자들은 시민들에 대한 폭력 행위로 인해 싱하푸라에서 추방되었다. 망명 기간 동안 그들은 현재의 스리랑카에 도착하여 탐바판니 왕국을 세웠다. 한편 싱하푸라에서는 수미타가 그의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었다. 상속자가 없는 비자야가 랑카에서 죽기 전에 그는 수미타에게 편지를 보내 랑카로 와서 새 왕국을 다스릴 것을 요청했다. 수미타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랑카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막내아들 판두바스데바를 보냈다.[18][3]

2. 1. 수파데비와 사자

마하밤사에 따르면 방가의 왕은 칼링가 왕의 딸과 결혼했다. 이들 부부에게는 수파데비라는 딸이 있었는데, 이 딸은 짐승의 왕과 교미할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성인이 된 수파데비 공주는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며 방가를 떠났다. 그녀는 마가다로 향하는 대상 일행에 합류했지만, 라라(또는 라다) 지역의 숲에서 싱하("사자")의 공격을 받았다. 랄라는 라르흐(방가-칼링가 지역의 한 지역) 또는 라타(오늘날 구자라트주의 일부)로 다양하게 식별된다.[18][25][3][4]

수파데비는 공격 중에 도망쳤지만 다시 사자를 만났다. 사자는 그녀에게 매력을 느꼈고, 예언을 생각하며 그를 애무하기도 했다. 사자는 수파데비를 동굴에 가두었고 그녀와 함께 아들 싱하바후와 딸 싱하시발리를 낳았다. 아이들이 자랄 때 그녀는 자식들과 함께 방가로 탈출했다. 그들은 우연히 수파데비의 사촌이었던 장군을 만났고 나중에 그녀와 결혼했다. 한편 사자는 실종된 가족을 찾기 위해 마을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방가의 왕은 사자를 죽일 수 있는 사람에게 보상을 발표했다. 싱하바후는 보상을 받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 싱하바후가 수도로 돌아올 무렵 방가의 왕은 죽었다. 싱하바후는 장관들에 의해 새로운 왕으로 선포되었지만 나중에 왕권을 어머니의 남편인 장군에게 넘겼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라라로 돌아가 싱하푸라라는 도시를 세웠다.[18][17][3][5]

싱하바후는 그의 여동생 싱하시발리와 결혼했으며 그 부부는 16쌍의 쌍둥이 형태로 32명의 아들을 두었다. 비자야는 그 중 장남이었고 그의 쌍둥이 수미타가 뒤를 이었다. 비자야와 그의 추종자들은 시민들에 대한 폭력 행위로 인해 싱하푸라에서 추방되었다. 망명 기간 동안 그들은 현재의 스리랑카에 도착하여 탐바판니 왕국을 세웠다. 한편 싱하푸라에서는 수미타가 그의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었다. 상속자가 없는 비자야가 랑카에서 죽기 전에 그는 수미타에게 편지를 보내 랑카로 와서 새 왕국을 다스릴 것을 요청했다. 수미타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랑카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막내아들 판두바스데바를 보냈다.[18][3]

2. 2. 싱하바후의 성장과 귀환

마하밤사에 따르면, 방가의 왕은 칼링가 왕의 딸과 결혼하여 수파데비라는 딸을 낳았는데, 그녀는 짐승의 왕과 교미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18][25][3][4] 수파데비는 독립적인 삶을 찾아 방가를 떠나 마가다로 향하던 중 라라(또는 라다) 지역의 숲에서 신하("사자")의 공격을 받았다.[18][25] 라라는 라르흐(방가-칼링가 지역의 한 지역) 또는 라타(오늘날 구자라트주의 일부)로 다양하게 식별된다.[18][25] 수파데비는 사자와의 사이에서 아들 싱하바후와 딸 싱하시발리를 낳았다.[18][3]

아이들이 자라자 수파데비는 방가로 탈출했고, 그곳에서 자신의 사촌인 장군과 결혼했다. 한편, 사자는 가족을 찾기 위해 마을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방가의 왕은 사자를 죽이는 자에게 보상을 내걸었다. 싱하바후는 보상을 위해 아버지를 죽였다.[18][17][3][5] 싱하바후는 방가의 왕위를 장군에게 넘기고 라라로 돌아가 싱하푸라를 세웠다.[18][17][3][5]

싱하바후는 여동생 싱하시발리와 결혼하여 32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비자야였다.[18][3] 비자야와 그의 추종자들은 폭력 행위로 인해 싱하푸라에서 추방되어 스리랑카탐바판니 왕국을 세웠다.[18][3] 싱하푸라에서는 수미타가 왕위를 이었고, 비자야는 상속자가 없자 수미타에게 랑카를 다스릴 것을 요청했다. 수미타 대신 그의 막내아들 판두바스데바가 랑카로 갔다.[18][3]

2. 3. 비자야와 스리랑카

마하밤사에 따르면, 방가 왕국(역사적 벵골 지방)의 왕은 칼링가 왕의 딸과 결혼하여 수파데비라는 딸을 얻었다. 수파데비는 짐승의 왕과 교접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고 자랐으며, 성인이 되자 독립적인 삶을 찾아 방가를 떠났다. 그녀는 마가다로 향하던 중 라라 지역의 숲에서 신하(사자)의 공격을 받았다. 라라는 라르 또는 라타로 비정된다.[18][25][3][4]

수파데비는 사자와 다시 마주쳤고, 사자는 그녀에게 매혹되었다. 수파데비는 예언을 떠올리며 사자를 어루만졌고, 결국 사자는 그녀를 동굴에 가두었다. 이후 수파데비는 신하바후와 신하시발리를 낳았다. 아이들이 자란 후, 수파데비는 아이들과 함께 방가로 탈출했고, 그곳에서 자신의 사촌인 장군과 결혼했다. 한편, 가족을 잃은 사자는 마을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방가 왕은 사자를 죽이는 자에게 보상을 내걸었다. 결국 신하바후는 보상을 받기 위해 아버지를 죽였다. 신하바후는 방가의 왕이 되었으나, 왕위를 어머니의 남편에게 넘기고 라라로 돌아가 싱하푸라를 세웠다.[18][17][3][5]

신하바후는 여동생 신하시발리와 결혼하여 32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장남이 비자야였다. 비자야와 그의 추종자들은 폭력적인 행위로 인해 싱하푸라에서 추방되었고, 스리랑카에 도착하여 탐바파니 왕국을 세웠다. 싱하푸라에서는 수미타가 왕위를 계승했다. 비자야는 상속자 없이 죽기 전 수미타에게 랑카를 다스려 달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수미타는 너무 늙어 막내아들 판두바스데바를 대신 보냈다.[18][3]

3. 역사성

마하밤사/Mahavamsasa는 싱하푸라가 랄라에서 설립되었다고 언급하지만 랄라의 정확한 위치는 언급하지 않는다. 비자야 왕자의 전설을 반(半) 역사적인 것으로 믿는 학자들은 전설적인 싱하푸라를 인도 내 여러 현대 도시와 동일시하려 했다.

한 이론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칼링가에 있었다. 심하푸라("사자 도시"의 또 다른 변형)라는 도시는 마타라, 피트루바크타 및 바시슈타 왕조 시대에 칼링가 지역의 수도였다.[19][20] 찬다바르만, 우마바르만, 아난타 삭티바르만 등 3명의 칼링가 왕의 비문이 심하푸라에서 발행되었다. 아난타 삭티바르만의 비문은 고고학적 근거에 따라 서기 5세기경으로 추정된다.[23] 또한 서기 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산스크리트어 동판 비문에는 사트루다마데바라는 봉신 왕이 심하푸라에서 발행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 비문은 안드라프라데시주 스리까꿀람 구 잘루무루 만달에 있는 페다 두감에서 발견되었다.[21] 심하푸라는 늦어도 서기 12세기까지 칼링가 지역의 왕국의 수도였다.[23] 니스산카 말라 스리랑카 왕의 기록에는 그가 서기 1157/8년에 칼링가의 싱하푸라에서 태어났으며 비자야의 후손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기록은 과장된 것으로 여겨진다.[22]

R. C. 마줌다르는 칼링가의 수도 심하푸라와 ''마하밤사''의 싱하푸라가 동일했을 수 있지만 "전체 이야기는 너무 전설적이어서 진지하게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언급한다.[23] 싱하푸라를 칼링가의 심하푸라와 동일시하는 사람들도 정확한 위치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 한 자료는 고대 도시를 안드라프라데시 스리까꿀람 근처의 싱구푸람 마을과 동일시한다.[24] 또 다른 자료는 싱하푸라를 현재 오디샤주에 있는 자지푸르 근처의 싱푸르 타운과 동일시한다.[25]

만마쓰 나스 다스 교수는 ''마하밤사''에 따르면 랄라(따라서 싱하푸라)는 방가(현재의 벵골)에서 마가다(현재의 비하르주)로 가는 길에 위치해 있었다고 지적한다. ''마하밤사''가 옳다면 싱하푸라는 오늘날의 오디샤나 안드라프라데시에 위치할 수 없는데, 이 지역은 비하르에서 멀리 떨어진 벵골 남쪽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마하밤사''의 싱하푸라는 칼링가 통치자들의 기록에 언급된 수도와는 다르며, 아마도 오늘날의 초타 나그푸르 지역에 위치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26] S. 크리슈나스와미 아이양가르 역시 랄라와 싱하푸라가 방가에서 마가다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에 위치해 있다고 믿었다. 그에 따르면 이 지역은 칼링가 왕국의 일부이거나 그 경계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27]

A. L. 바샴과 세나라트 파라나비타나와 같은 역사가들은 랄라 왕국이 방가-칼링가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현재의 구자라트주에 위치해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현재의 시호르에 위치해 있었다.[28]

헴 찬드라 레이차우두리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방가의 라르 지역에 있었다. 그는 그것을 현재 웨스트 벵골의 싱구르와 동일시한다.[29]

다른 학자들은 이 도시가 동남아시아에 위치했다고 주장한다. 파라나비타나는 간접적으로 이 도시가 말라야에 위치해 있다고 주장했고, 로하나데라는 이 도시가 싱부리에 있으며, 당시 크메르 제국 내에 위치했던 롭부리 시(나중에는 태국 왕국이 통치) 근처에 있었다고 주장했다.[30]

3. 1. 칼링가 지역설

마하밤사/Mahavamsasa는 싱하푸라가 랄라에서 설립되었다고 언급하지만 랄라의 정확한 위치는 언급하지 않는다. 비자야 왕자의 전설이 반역사적이라고 믿는 학자들은 전설적인 싱하푸라를 인도의 여러 현대 장소와 동일시하려고 노력해 왔다.

한 이론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칼링가에 있었다. 심하푸라("사자 도시"의 또 다른 변형)라는 도시는 마타라, 피트루바크타 및 바시슈타 왕조 동안 칼링가 지역의 수도였다.[19][20] 세 명의 칼링가 왕(칸다바르만, 우마바르만, 아난타 사크티바르만)의 비문은 심하푸라에서 발행되었다. 아난타 사크티바르만의 비문은 고문서학적 근거로 볼 때 대략 서기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23] 역시 약 5세기경의 산스크리트어 비문에는 이 판이 심하푸라시의 사트루다마나데바라는 제후왕이 발행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비문은 안드라프라데시주 스리카쿨람구의 잘루무루 테실에 있는 페다 두감에서 발견되었다.[21] 심하푸라는 서기 12세기 말까지 칼링가 지역 왕국의 수도였다.[23] 니샨카 카말라의 비문에는 그가 1157/8년에 칼링가의 싱하푸라에서 태어났으며 비자야의 후손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기록은 과장된 과장으로 평가된다.[22]

R. C. 마줌다르는 칼링가의 수도 심하푸라와 ''마하밤사''의 싱하푸라가 동일했을 수 있지만 "전체 이야기는 너무 전설적이어서 심각하게 고려할 수 없다"라고 언급한다.[23] 싱가푸라를 칼링가의 심하푸라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조차도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한 자료는 고대 도시가 안드라 프라데시주 스리카쿨람 근처의 싱구푸람 마을임을 확인한다.[24] 또 다른 자료에서는 싱하푸라를 오늘날 오디샤주 자즈푸르 근처의 싱푸르 마을과 동일시한다.[25]

만마트 나트 다스 교수는 ''마하밤사''에 따르면, 랄라(그리고 따라서 싱하푸라)는 방가(오늘날의 벵골)에서 마가다(오늘날의 비하르주)로 가는 길에 위치했다고 지적한다. ''마하밤사''가 맞다면, 이곳들은 비하르주에서 떨어진 벵골의 남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오디샤주나 안드라프라데시주에 위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하밤사''의 싱하푸라가 칼링가 통치자들의 기록에 언급된 수도와 달랐으며, 아마도 오늘날의 초타 나그푸르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26] S. 크리슈나스와미 아이얀가르 또한 랄라와 싱하푸라가 방가와 마가다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에 위치해 있다고 믿었다. 그에 따르면 이 지역은 칼링가 왕국의 일부이거나 국경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27]

A. L. 바샴 및 세나라트 파라나비타나와 같은 역사가들은 랄라 왕국이 오늘날 구자라트주의 방가-칼링가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현재 시호르에 위치했다.[28]

헴 찬드라 라이차우드리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방가의 라르흐 지역에 있었다. 그는 그것을 오늘날 서벵골주의 싱구르와 동일시한다.[29]

또 다른 학자들은 이 도시가 동남아시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파라나비타나는 도시가 말라야에 위치했다고 간접적으로 주장했고 로하나디라는 그 도시가 당시 크메르 제국 내에 있었고 나중에 타이 왕국이 통치했던 롭부리 인근에 위치한 싱부리라고 주장했다.[30]

3. 1. 1. 심하푸라 비문

마하밤사/Mahavamsasa는 싱하푸라가 랄라에서 설립되었다고 언급하지만 랄라의 정확한 위치는 언급하지 않는다. 비자야 왕자의 전설을 반(半) 역사적인 것으로 믿는 학자들은 전설적인 싱하푸라를 인도 내 여러 현대 도시와 동일시하려 했다.

한 이론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칼링가에 있었다. 심하푸라("사자 도시"의 또 다른 변형)라는 도시는 마타라, 피트루바크타 및 바시슈타 왕조 시대에 칼링가 지역의 수도였다.[19][20] 찬다바르만, 우마바르만, 아난타 삭티바르만 등 3명의 칼링가 왕의 비문이 심하푸라에서 발행되었다. 아난타 삭티바르만의 비문은 고고학적 근거에 따라 서기 5세기경으로 추정된다.[23] 또한 서기 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산스크리트어 비문에는 사트루다마데바라는 봉신 왕이 심하푸라에서 발행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 비문은 안드라프라데시주 스리카쿨람구 잘루무루 테실에 있는 페다 두감에서 발견되었다.[21] 심하푸라는 늦어도 서기 12세기까지 칼링가 지역의 왕국의 수도였다.[23] 니스산카 말라 스리랑카 왕의 기록에는 그가 서기 1157/8년에 칼링가의 싱하푸라에서 태어났으며 비자야의 후손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기록은 과장된 것으로 여겨진다.[22]

R. C. 마줌다르는 칼링가의 수도 심하푸라와 ''마하밤사''의 싱하푸라가 동일했을 수 있지만 "전체 이야기는 너무 전설적이어서 진지하게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언급한다.[23] 싱하푸라를 칼링가의 심하푸라와 동일시하는 사람들도 정확한 위치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 한 자료는 고대 도시를 안드라프라데시 스리카쿨람 근처의 싱구푸람 마을과 동일시한다.[24] 또 다른 자료는 싱하푸라를 현재 오디샤주에 있는 자지푸르 근처의 싱푸르 타운과 동일시한다.[25]

만마쓰 나스 다스 교수는 ''마하밤사''에 따르면 랄라(따라서 싱하푸라)는 방가(현재의 벵골)에서 마가다(현재의 비하르주)로 가는 길에 위치해 있었다고 지적한다. ''마하밤사''가 옳다면 싱하푸라는 오늘날의 오디샤나 안드라프라데시에 위치할 수 없는데, 이 지역은 비하르에서 멀리 떨어진 벵골 남쪽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마하밤사''의 싱하푸라는 칼링가 통치자들의 기록에 언급된 수도와는 다르며, 아마도 오늘날의 초타 나그푸르 지역에 위치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26] S. 크리슈나스와미 아이양가르 역시 랄라와 싱하푸라가 방가에서 마가다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에 위치해 있다고 믿었다. 그에 따르면 이 지역은 칼링가 왕국의 일부이거나 그 경계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27]

A. L. 바샴과 세나라트 파라나비타나와 같은 역사가들은 랄라 왕국이 방가-칼링가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현재의 구자라트주에 위치해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현재의 시호르에 위치해 있었다.[28]

헴 찬드라 레이차우두리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방가의 라르 지역에 있었다. 그는 그것을 현재 웨스트 벵골의 싱구르와 동일시한다.[29]

다른 학자들은 이 도시가 동남아시아에 위치했다고 주장한다. 파라나비타나는 간접적으로 이 도시가 말라야에 위치해 있다고 주장했고, 로하나데라는 이 도시가 싱부리에 있으며, 당시 크메르 제국 내에 위치했던 롭부리 시(나중에는 태국 왕국이 통치) 근처에 있었다고 주장했다.[30]

3. 1. 2. 니산카 말라 왕의 기록

마하밤사는 싱하푸라가 랄라에서 설립되었다고 언급하지만 랄라의 정확한 위치는 언급하지 않는다. 비자야 왕자의 전설을 반(半) 역사적인 것으로 믿는 학자들은 전설적인 싱하푸라를 인도 내 여러 현대 도시와 동일시하려 했다.

한 이론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칼링가에 있었다. 심하푸라("사자 도시"의 또 다른 변형)라는 도시는 마타라, 피트루바크타 및 바시슈타 왕조 시대에 칼링가 지역의 수도였다.[19][20] 찬다바르만, 우마바르만, 아난타 삭티바르만 등 3명의 칼링가 왕의 비문이 심하푸라에서 발행되었다. 아난타 삭티바르만의 비문은 고고학적 근거에 따라 서기 5세기경으로 추정된다.[23] 또한 서기 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산스크리트어 비문에는 사트루다마데바라는 봉신 왕이 심하푸라에서 발행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 비문은 안드라프라데시주 스리카쿨람구 잘루무루 테실에 있는 페다 두감에서 발견되었다.[21] 심하푸라는 늦어도 서기 12세기까지 칼링가 지역의 왕국의 수도였다.[23] 니샨카 카말라 스리랑카 왕의 기록에는 그가 서기 1157/8년에 칼링가의 싱하푸라에서 태어났으며 비자야의 후손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기록은 과장된 것으로 여겨진다.[22]

R. C. 마줌다르는 칼링가의 수도 심하푸라와 ''마하밤사''의 싱하푸라가 동일했을 수 있지만 "전체 이야기는 너무 전설적이어서 진지하게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언급한다.[23] 싱하푸라를 칼링가의 심하푸라와 동일시하는 사람들도 정확한 위치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 한 자료는 고대 도시를 안드라프라데시주 스리카쿨람 근처의 싱구푸람 마을과 동일시한다.[24] 또 다른 자료는 싱하푸라를 현재 오디샤주에 있는 자지푸르 근처의 싱푸르 타운과 동일시한다.[25]

만마쓰 나스 다스 교수는 ''마하밤사''에 따르면 랄라(따라서 싱하푸라)는 방가(현재의 벵골)에서 마가다(현재의 비하르주)로 가는 길에 위치해 있었다고 지적한다. ''마하밤사''가 옳다면 싱하푸라는 오늘날의 오디샤나 안드라프라데시에 위치할 수 없는데, 이 지역은 비하르에서 멀리 떨어진 벵골 남쪽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마하밤사''의 싱하푸라는 칼링가 통치자들의 기록에 언급된 수도와는 다르며, 아마도 오늘날의 초타 나그푸르 지역에 위치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26] S. 크리슈나스와미 아이양가르 역시 랄라와 싱하푸라가 방가에서 마가다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에 위치해 있다고 믿었다. 그에 따르면 이 지역은 칼링가 왕국의 일부이거나 그 경계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27]

A. L. 바샴과 세나라트 파라나비타나와 같은 역사가들은 랄라 왕국이 방가-칼링가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현재의 구자라트주에 위치해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현재의 시호르에 위치해 있었다.[28]

헴 찬드라 레이차우두리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방가의 라르 지역에 있었다. 그는 그것을 현재 웨스트 벵골의 싱구르와 동일시한다.[29]

다른 학자들은 이 도시가 동남아시아에 위치했다고 주장한다. 파라나비타나는 간접적으로 이 도시가 말라야에 위치해 있다고 주장했고, 로하나데라는 이 도시가 싱부리에 있으며, 당시 크메르 제국 내에 위치했던 롭부리 시(나중에는 태국 왕국이 통치) 근처에 있었다고 주장했다.[30]

3. 2. 벵골-비하르 지역설

마하밤사는 싱하푸라가 랄라에서 설립되었다고 언급하지만 랄라의 정확한 위치는 언급하지 않는다. 비자야 왕자의 전설이 반역사적이라고 믿는 학자들은 전설적인 싱하푸라를 인도의 여러 현대 장소와 동일시하려고 노력해 왔다.[19][20]

한 이론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칼링가에 있었다. 심하푸라("사자 도시"의 또 다른 변형)라는 도시는 마타라, 피트루바크타 및 바시슈타 왕조 동안 칼링가 지역의 수도였다.[23] 세 명의 칼링가 왕(칸다바르만, 우마바르만, 아난타 사크티바르만)의 비문은 심하푸라에서 발행되었다. 아난타 사크티바르만의 비문은 고문서학적 근거로 볼 때 대략 서기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21] 심하푸라는 서기 12세기 말까지 칼링가 지역 왕국의 수도였다.[9] 니샨카 카말라의 비문에는 그가 1157/8년에 칼링가의 싱하푸라에서 태어났으며 비자야의 후손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기록은 과장된 과장으로 평가된다.[10][22]

RC 만줌다르는 칼링가의 수도 심하푸라와 마하밤사의 싱하푸라가 동일했을 수 있지만 "전체 이야기는 너무 전설적이어서 심각하게 고려할 수 없다"라고 언급한다.[23] 싱가푸라를 칼링가의 심하푸라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조차도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한 자료는 고대 도시가 안드라 프라데시주 스리카쿨람구 근처의 싱구푸람 마을임을 확인한다.[24] 또 다른 자료에서는 싱하푸라를 오늘날 오디샤주 자즈푸르 근처의 싱푸르 마을과 동일시한다.[25]

만마트 나트 다스 교수는 마하밤사에 따르면, 랄라(그리고 따라서 싱하푸라)는 방가(오늘날의 벵골)에서 마가다(오늘날의 비하르주)로 가는 길에 위치했다고 지적한다. 마하밤사가 맞다면, 이곳들은 비하르주에서 떨어진 벵골의 남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오디샤주나 안드라프라데시주에 위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하밤사의 싱하푸라가 칼링가 통치자들의 기록에 언급된 수도와 달랐으며, 아마도 오늘날의 초타 나그푸르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26] S. 크리슈나스와미 아이얀가르 또한 랄라와 싱하푸라가 방가와 마가다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에 위치해 있다고 믿었다. 그에 따르면 이 지역은 칼링가 왕국의 일부이거나 국경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27]

AL 바샴 및 세나라트 파라나비타나와 같은 역사가들은 랄라 왕국이 오늘날 구자라트주의 방가-칼링가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현재 시호르에 위치했다.[28]

헴 찬드라 라이차우드리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방가의 라르흐 지역에 있었다. 그는 그것을 오늘날 서벵골주의 싱구르와 동일시한다.[29]

또 다른 학자들은 이 도시가 동남아시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파라나비타나는 도시가 말라야에 위치했다고 간접적으로 주장했고 로하나디라는 그 도시가 당시 크메르 제국 내에 있었고 나중에 타이 왕국이 통치했던 롭부리 인근에 위치한 싱부리라고 주장했다.[30]

3. 3. 구자라트 지역설

마하밤사는 싱하푸라가 랄라에서 설립되었다고 언급하지만 랄라의 정확한 위치는 언급하지 않는다. 비자야 왕자의 전설이 반역사적이라고 믿는 학자들은 전설적인 싱하푸라를 인도의 여러 현대 장소와 동일시하려고 노력해 왔다.[19][20]

한 이론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칼링가에 있었으며, 심하푸라("사자 도시"의 또 다른 변형)라는 도시는 마타라, 피트루바크타 및 바시슈타 왕조 동안 칼링가 지역의 수도였다.[6][7] 세 명의 칼링가 왕(칸다바르만, 우마바르만, 아난타 사크티바르만)의 비문은 심하푸라에서 발행되었고, 아난타 사크티바르만의 비문은 고문서학적 근거로 볼 때 대략 서기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9] 역시 약 5세기경의 산스크리트어 비문에는 이 판이 심하푸라시의 사트루다마나데바라는 제후왕이 발행했다고 언급되어 있으며, 안드라프라데시주 스리카쿨람구의 잘루무루 테실에 있는 페다 두감에서 발견되었다.[8] 심하푸라는 서기 12세기 말까지 칼링가 지역 왕국의 수도였다.[9] 스리랑카 왕 니샨카 카말라의 비문에는 그가 1157/8년에 칼링가의 싱하푸라에서 태어났으며 비자야의 후손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그의 기록은 과장된 과장으로 평가된다.[10]

RC 만줌다르는 칼링가의 수도 심하푸라와 마하밤사의 싱하푸라가 동일했을 수 있지만 "전체 이야기는 너무 전설적이어서 심각하게 고려할 수 없다"라고 언급한다.[9] 싱가푸라를 칼링가의 심하푸라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조차도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한 자료는 고대 도시가 안드라 프라데시주 스리카쿨람구 근처의 싱구푸람 마을임을 확인하고,[11] 또 다른 자료에서는 싱하푸라를 오늘날 오디샤주 자즈푸르 근처의 싱푸르 마을과 동일시한다.[4]

만마트 나트 다스 교수는 마하밤사에 따르면, 랄라(그리고 따라서 싱하푸라)는 방가(오늘날의 벵골)에서 마가다(오늘날의 비하르주)로 가는 길에 위치했다고 지적한다. 마하밤사가 맞다면, 이곳들은 비하르주에서 떨어진 벵골의 남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오디샤주나 안드라프라데시주에 위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하밤사의 싱하푸라가 칼링가 통치자들의 기록에 언급된 수도와 달랐으며, 아마도 오늘날의 초타 나그푸르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12] S. 크리슈나스와미 아이얀가르 또한 랄라와 싱하푸라가 방가와 마가다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에 위치해 있다고 믿었으며, 그에 따르면 이 지역은 칼링가 왕국의 일부이거나 국경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13]

AL 바샴 및 세나라트 파라나비타나와 같은 역사가들은 랄라 왕국이 오늘날 구자라트주의 방가-칼링가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현재 시호르에 위치했다.[14]

헴 찬드라 라이차우드리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방가의 라르흐 지역에 있었고, 그는 그것을 오늘날 서벵골주의 싱구르와 동일시한다.[15]

또 다른 학자들은 이 도시가 동남아시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파라나비타나는 도시가 말라야에 위치했다고 간접적으로 주장했고 로하나디라는 그 도시가 당시 크메르 제국 내에 있었고 나중에 타이 왕국이 통치했던 롭부리 인근에 위치한 싱부리라고 주장했다.[1]

3. 4. 벵골 라르흐 지역설

마하밤사는 싱하푸라가 랄라에서 설립되었다고 언급하지만 랄라의 정확한 위치는 언급하지 않는다. 비자야 왕자의 전설이 반역사적이라고 믿는 학자들은 전설적인 싱하푸라를 인도의 여러 현대 장소와 동일시하려고 노력해 왔다.[19][20]

한 이론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칼링가에 있었다. 심하푸라("사자 도시"의 또 다른 변형)라는 도시는 마타라, 피트루바크타 및 바시슈타 왕조 동안 칼링가 지역의 수도였다.[23] 세 명의 칼링가 왕(칸다바르만, 우마바르만, 아난타 사크티바르만)의 비문은 심하푸라에서 발행되었다. 아난타 사크티바르만의 비문은 고문서학적 근거로 볼 때 대략 서기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21] 심하푸라는 서기 12세기 말까지 칼링가 지역 왕국의 수도였다.[23] 스리랑카 왕 니샨카 카말라의 비문에는 그가 1157/8년에 칼링가의 싱하푸라에서 태어났으며 비자야의 후손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기록은 과장된 과장으로 평가된다.[22]

RC 만줌다르는 칼링가의 수도 심하푸라와 마하밤사의 싱하푸라가 동일했을 수 있지만 "전체 이야기는 너무 전설적이어서 심각하게 고려할 수 없다"라고 언급한다.[23] 싱가푸라를 칼링가의 심하푸라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조차도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한 자료는 고대 도시가 안드라 프라데시주 스리카쿨람구 근처의 싱구푸람 마을임을 확인한다.[24] 또 다른 자료에서는 싱하푸라를 오늘날 오디샤주 자즈푸르 근처의 싱푸르 마을과 동일시한다.[25]

만마트 나트 다스 교수는 마하밤사에 따르면, 랄라(그리고 따라서 싱하푸라)는 방가(오늘날의 벵골)에서 마가다(오늘날의 비하르주)로 가는 길에 위치했다고 지적한다. 마하밤사가 맞다면, 이곳들은 비하르주에서 떨어진 벵골의 남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오디샤주나 안드라프라데시주에 위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하밤사의 싱하푸라가 칼링가 통치자들의 기록에 언급된 수도와 달랐으며, 아마도 오늘날의 초타 나그푸르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26] S. 크리슈나스와미 아이얀가르 또한 랄라와 싱하푸라가 방가와 마가다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에 위치해 있다고 믿었다. 그에 따르면 이 지역은 칼링가 왕국의 일부이거나 국경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27]

AL 바샴 및 세나라트 파라나비타나와 같은 역사가들은 랄라 왕국이 오늘날 구자라트주의 방가-칼링가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현재 시호르에 위치했다.[28]

헴 찬드라 라이차우드리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방가의 라르흐 지역에 있었다. 그는 그것을 오늘날 서벵골주의 싱구르와 동일시한다.[29]

또 다른 학자들은 이 도시가 동남아시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파라나비타나는 도시가 말라야에 위치했다고 간접적으로 주장했고 로하나디라는 그 도시가 당시 크메르 제국 내에 있었고 나중에 타이 왕국이 통치했던 롭부리 인근에 위치한 싱부리라고 주장했다.[30]

3. 5. 동남아시아 지역설

마하밤사는 싱하푸라가 랄라에서 설립되었다고 언급하지만 랄라의 정확한 위치는 언급하지 않는다.[19][20] 비자야 왕자의 전설이 반역사적이라고 믿는 학자들은 전설적인 싱하푸라를 인도의 여러 현대 장소와 동일시하려고 노력해 왔다.

한 이론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칼링가에 있었다. 심하푸라("사자 도시"의 또 다른 변형)라는 도시는 마타라, 피트루바크타 및 바시슈타 왕조 동안 칼링가 지역의 수도였다.[19][20] 심하푸라는 서기 12세기 말까지 칼링가 지역 왕국의 수도였다.[23] 스리랑카 왕 니샨카 카말라의 비문에는 그가 1157/8년에 칼링가의 싱하푸라에서 태어났으며 비자야의 후손이라고 명시되어 있다.[22] 그러나 그의 기록은 과장된 과장으로 평가된다.[22]

RC 만줌다르는 칼링가의 수도 심하푸라와 마하밤사의 싱하푸라가 동일했을 수 있지만 "전체 이야기는 너무 전설적이어서 심각하게 고려할 수 없다"라고 언급한다.[23] 싱가푸라를 칼링가의 심하푸라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조차도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한 자료는 고대 도시가 안드라 프라데시주 스리카쿨람구 근처의 싱구푸람 마을임을 확인한다.[24] 또 다른 자료에서는 싱하푸라를 오늘날 오디샤주 자즈푸르 근처의 싱푸르 마을과 동일시한다.[25]

만마트 나트 다스 교수는 마하밤사에 따르면, 랄라(그리고 따라서 싱하푸라)는 방가(오늘날의 벵골)에서 마가다(오늘날의 비하르주)로 가는 길에 위치했다고 지적한다.[26] AL 바샴 및 세나라트 파라나비타나와 같은 역사가들은 랄라 왕국이 오늘날 구자라트주의 방가-칼링가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현재 시호르에 위치했다.[28]

헴 찬드라 라이차우드리에 따르면 싱하푸라는 방가의 라르흐 지역에 있었다. 그는 그것을 오늘날 서벵골주의 싱구르와 동일시한다.[29] 다른 학자들은 이 도시가 동남아시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파라나비타나는 도시가 말라야에 위치했다고 간접적으로 주장했고 로하나디라는 그 도시가 당시 크메르 제국 내에 있었고 나중에 타이 왕국이 통치했던 롭부리 인근에 위치한 싱부리라고 주장했다.[30]

4. 결론

참조

[1] 서적 Nagapattinam to Suvarnadwipa : reflections on the Chola naval expeditions to Southeast Asia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2] 뉴스 Sinhalese, Sri Lankan Tamils share striking genetic similarity, study finds https://www.newsdrum[...]
[3] 서적 The story of the Sinhalese from the most ancient times up to the end of "the Mahavansa" or Great dynasty https://books.google[...] Asian Educational Services 1997-01-01
[4] 서적 Ancient Jaffna https://books.google[...] Asian Educational Services
[5] 웹사이트 The Coming of Vijaya http://mahavamsa.org[...] 2015-10-16
[6] 서적 The Orissa Historical Research Journal https://books.google[...] Superintendent of Research and Museum
[7] 서적 Inscriptions of Orissa: Circa 5th–8th centuries A.D. https://books.google[...] Motilal Banarsidass 1997-01-01
[8] 서적 Inscriptions of Orissa: Circa 5th–8th centuries A.D. https://books.google[...] Motilal Banarsidass 1997-01-01
[9] 서적 Outline of the history of Kaliṅga https://books.google[...] Asian Educational Services
[10] 서적 Short History of Ceylon https://books.google[...] Asian Educational Services 1994-01-01
[11] 서적 Economic History of Orissa https://books.google[...] Indus Publishing
[12] 서적 Sidelights on History and Culture of Orissa https://books.google[...] Vidyapuri
[13] 서적 Some Contributions of South India to Indian Culture https://books.google[...] Asian Educational Services 1995-01-01
[14] 서적 Pre-historic Lanka to end of Terrorism https://books.google[...] Trafford
[15] 서적 Professor H. C. Raychaudhuri, as a Historian https://books.google[...] Northern Book Centre
[16] 뉴스 Sinhalese, Sri Lankan Tamils share striking genetic similarity, study finds https://www.newsdrum[...]
[17] 웹인용 The Coming of Vijaya http://mahavamsa.org[...] 2015-10-16
[18] 서적 The story of the Sinhalese from the most ancient times up to the end of "the Mahavansa" or Great dynasty https://books.google[...] Asian Educational Services
[19] 서적 The Orissa Historical Research Journal https://books.google[...] Superintendent of Research and Museum
[20] 서적 Inscriptions of Orissa: Circa 5th–8th centuries A.D. https://books.google[...] Motilal Banarsidass
[21] 서적 Inscriptions of Orissa: Circa 5th–8th centuries A.D. https://books.google[...] Motilal Banarsidass
[22] 서적 Short History of Ceylon https://books.google[...] Asian Educational Services
[23] 서적 Outline of the history of Kaliṅga https://books.google[...] Asian Educational Services
[24] 서적 Economic History of Orissa https://books.google[...] Indus Publishing
[25] 서적 Ancient Jaffna https://books.google[...] Asian Educational Services
[26] 서적 Sidelights on History and Culture of Orissa https://books.google[...] Vidyapuri
[27] 서적 Some Contributions of South India to Indian Culture https://books.google[...] Asian Educational Services
[28] 서적 Pre-historic Lanka to end of Terrorism https://books.google[...] Trafford
[29] 서적 Professor H. C. Raychaudhuri, as a Historian https://books.google[...] Northern Book Centre
[30] 서적 Nagapattinam to Suvarnadwipa : reflections on the Chola naval expeditions to Southeast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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