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락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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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담 락스만은 18세기 후반 러시아가 일본과의 통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파견한 사절이다. 1789년 일본인 표류자들을 만난 락스만은 러시아 최초로 일본에 파견되어 표류민 송환과 통상 요구를 시도했다. 1792년 네무로에 도착하여 에도 막부와 교섭했으나, 시베리아 총독의 신서는 수리되지 않았고, 나가사키 입항 허가증을 받는 데 그쳤다. 그의 파견은 일본의 쇄국 정책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러시아의 대일 관계 노력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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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락스만 - [인물]에 관한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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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러시아의 대일 파견 배경
18세기 후반, 러시아는 동방 진출을 꾀하며 일본과의 통상 관계 수립에 관심을 가졌다. 표류한 일본인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것은 양국 관계 개선의 좋은 기회로 여겨졌다.[4]
1789년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시베리아 이르쿠츠크로 파견된 락스만은 다이코쿠야 고다유 등 일본인 표류자들을 만났다. 락스만은 예카테리나 2세의 명을 받아 고다유 등 3명의 표류민 송환과 시베리아 총독의 통상 요구를 전달하기 위해 일본으로 향하는 러시아 최초의 사절이 되었다.
1789년, 아담 락스만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파견되어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에 체류 중, 이세국 출신의 대흑야 고다유 등 표류민 6명을 만났다. 예카테리나 2세를 알현하고 고다유의 송환 허가를 얻은 락스만은 여제의 명으로 고다유, 코이치, 이소키치 3명의 송환과 이르쿠츠크 총독 이반 필의 통상 요구를 담은 국서를 전달하기 위한 러시아 최초의 대일 사절이 되었다.[4] 1792년 9월 24일 에카테리나호를 타고 오호츠크를 출발, 10월 20일 네무로에 도착했다.[5][6]
네무로에 번사(藩士)가 주재하고 있던 마쓰마에 번은 즉시 에도 막부에 보고했다. 막부는 락스만이 에도로 와서 표류민을 인도하고 통상 교섭을 할 의향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로쥬(老中)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등은 표류민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총독 필의 국서는 수리하지 않고, 만약 꼭 통상을 원한다면 나가사키항으로 돌려보내도록 지시했다.[4] 그를 위한 선유사(宣諭使)로 메쓰케(目付) 이시카와 다다후사, 무라카미 요시노리를 파견했다.[7]
막부는 사절을 정중히 대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고, 겨울이 다가왔기 때문에 마쓰마에 번사는 동계 주둔을 위한 건물 건설에 협력하여 함께 월동했다.[7][8]
이시카와 다다후사는 이듬해 1793년 3월 마쓰마에에 도착했다. 막부는 락스만 일행을 육로로 마쓰마에로 가서 협상할 방침이었지만, 육로를 러시아 측이 거부했기 때문에 일본 측 배가 동행하여 사하라까지 배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에카테리나호는 짙은 안개로 동행하던 정상환(貞祥丸)과 엇갈려 단독으로 6월 8일 하코다테에 입항했다.[7]
락스만 일행은 하코다테에서 육로로 마쓰마에로 향해 6월 20일 마쓰마에에 도착했다. 이시카와 다다후사는 나가사키 이외에서는 국서를 수리할 수 없다며 퇴거하라고 전달하는 한편, 대흑야 고다유와 이소키치 2명을 인계받았다. 락스만 등이 작별 인사를 하러 갔을 때, 선유사 두 명의 서명이 있는 「'''러시아의 배 한 척이 나가사키에 이르기 위한 표시에 관한 일'''」이라는 제목의 나가사키 입항 허가증(信牌)을 받았다. 6월 30일에 마쓰마에를 떠나 7월 16일에 하코다테를 출항했다.[7] 나가사키로 향하지 않고 오호츠크로 귀항했다.
귀국 후 1794년, 락스만은 여제에게 일본에 관한 여러 서적과 명품을 헌상한 것을 칭찬받아 대위로 승진했다. 1796년 예카테리나 2세의 죽음으로 몰락했는지 이후 행적은 불명이나, 1806년에 『라크스만 일본 도항 일기』(ラクスマン日本渡航日記)를 완성했던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때까지는 생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3. 락스만의 일본 파견 (1792년)
1792년 락스만은 홋카이도에 상륙하여 마쓰마에 씨족을 만났고, 에도로 가서 표류민을 인도하고 통상 교섭을 할 의향이 있음을 밝혔다.[1]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를 비롯한 막부는 락스만의 요구에 따라 표류민은 인도받되, 통상 문제는 나가사키에서 논의하도록 결정했다.
이후 락스만은 나가사키로 가지 않고 오호츠크로 귀항했다. 비록 락스만은 통상 조약 체결에는 실패했지만, 중국, 조선, 네덜란드 외 국가와 무역을 허가하는 최초의 공식 일본 문서를 얻는 성과를 거두었다.[3]
3. 1. 네무로 도착과 막부의 반응
1792년 9월 오호츠크해를 출발한 락스만은 네무로국에 도착했다. 마쓰마에번은 락스만 일행을 맞이하고 즉시 에도 막부에 보고했다.[5][6][4] 막부는 락스만이 에도로 와서 표류민을 인도하고 통상 교섭을 할 의향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로주인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등은 표류민은 받아들이되, 시베리아 총독의 국서는 수리하지 않고, 만약 꼭 통상을 원한다면 나가사키항으로 보내도록 지시했다.[4]
3. 2. 하코다테로의 회항과 협상
1792년 9월 오호츠크해를 출발하여 네무로국에 도착한 락스만 일행은 마쓰마에번을 통해 에도로 표류민을 인도하고 일본과의 통상을 위한 교섭을 원한다는 의사를 막부에 전달했다. 로주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를 비롯한 막부 고위층은 락스만을 하코다테로 회항시켜 표류민을 인도받는 대신, 시베리아 총독의 신서는 수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통상을 강력히 원했기 때문에 나가사키로 회항할 것을 지시하고, 메쓰케인 이시카와 다다후사를 파견하여 협상을 진행했다.[4]
락스만은 육로 이동을 거부했고, 결국 1793년 6월 일본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하코다테 항에 입항했다.[7] 마쓰마에에서 락스만은 다이코쿠야 고다유와 기타하마 이소키치 두 명[9]을 일본 측에 인도하고, 나가사키 입항 허가증[10]을 받았다. 6월 30일 마쓰마에를 떠나 7월 16일 하코다테에서 퇴거한 락스만은 나가사키로 향하지 않고 오호츠크로 귀항하였다.[7]
3. 3. 마쓰마에에서의 협상과 나가사키 입항 허가증
1792년 9월 오호츠크해를 출발하여 네무로국에 도착한 락스만 일행은 마쓰마에번을 통해 에도로 표류민을 인도하는 조건으로 일본과의 통상을 위한 교섭을 강력히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로주인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를 비롯한 막부의 고위층 인사들은 락스만을 하코다테로 회항시켜 표류민의 신병을 담당하도록 하는 대신, 시베리아 총독의 신서는 수리하지 않았다.[4]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통상을 원한다면 나가사키로 갈 것을 지시하였고, 메쓰케인 이시카와 다다후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7]
1793년 6월, 락스만 일행은 하코다테에 입항하여 상륙하고 마쓰마에로 향했다. 락스만은 일본 측에 다이코쿠야 고다유와 기타하마 이소키치 2명을 인도했다.[9] 교섭 끝에 락스만은 나가사키 입항 허가증[10]을 받았다. 6월 30일에 마쓰마에를 떠나, 7월 16일에 하코다테에서 퇴거한 락스만은 나가사키로 향하지 않고 오호츠크로 귀항하였다.
일본 법에 따라 모든 외국 무역은 나가사키에서 이루어져야 했다.[2] 락스만이 무역 협정 없이 떠나기를 거부하자, 일본 측은 나가사키가 러시아 선박 한 척을 환영할 것이며, 외국 선박은 다른 곳에서는 정박할 수 없고, 기독교 또한 일본 어디에서도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을 명시한 문서를 제공했다.[2]
락스만은 빈손으로 러시아로 돌아왔지만, 중국, 한국 또는 네덜란드 이외의 국가와 무역을 허가하는 최초의 공식 일본 문서를 가지고 있었다.[3]
4. 락스만의 귀국과 그 이후
1793년 6월, 하코다테에 입항하여 상륙한 락스만 일행은 마쓰마에로 향해 다이코쿠야 고다유와 기타하마 이소키치 2명을 일본 측에 인도했다. 교섭 끝에 락스만은 나가사키 입항을 허용하는 허가증[10]을 교부받았다. 6월 30일에 마쓰마에를 떠나, 7월 16일에 하코다테에서 퇴거한 락스만은 나가사키로 향하지 않고 오호츠크로 귀항하였다.
귀국 후인 1794년 락스만은 예카테리나 2세에게 일본에 관한 여러 책이나 명품을 헌상한 것을 칭찬받아 대위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1796년에 예카테리나 2세가 사망하는 바람에 실각하고 만다. 이후의 소식은 알 수 없지만, 1806년 《락스만 일본 도항 일기》를 완성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그때까지는 생존해 있었다고 여겨진다.
5. 평가 및 영향
아담 락스만의 일본 방문은 여러 가지 평가와 영향을 남겼다. 락스만은 1792년 홋카이도에 상륙하여 에도(현재의 도쿄)로 가 통상을 교섭하려 했으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통상 요구를 거절하고 나가사키로 갈 것을 지시했다.[4] 락스만은 이를 거부했지만, 결국 일본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하코다테 항구를 거쳐 마쓰마에 성으로 이동했다.[7]
일본 측은 모든 외국 무역은 나가사키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법을 설명했고, 락스만에게 나가사키에서 러시아 선박 한 척을 환영하며 다른 곳에서는 정박할 수 없고 기독교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문서를 제공했다.[2] 락스만은 무역 협상을 맺지 못하고 귀국하였으나, 중국, 한국, 네덜란드 외 국가와 무역을 허가하는 최초의 공식 일본 문서를 소지하게 되었다.[3]
락스만이 귀국 후 9년 뒤인 1804년~1805년에 니콜라이 레자노프가 나가사키에서 무역을 시도했지만, 일본은 외국 무역에 폐쇄적이라며 거절했다.
5. 1. 일본의 쇄국 정책 유지
1792년 10월 9일 홋카이도에 상륙한 락스만은 마쓰마에 씨족을 만났고, 에도(현재의 도쿄)로 가 표류민을 직접 인도하고 통상을 교섭하려 했다.[1] 그러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표류민은 받되 통상 요구는 거절하고, 락스만에게 나가사키로 갈 것을 지시했다.[4] 락스만은 이를 거부했고, 결국 일본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하코다테 항구로 항해한 후, 마쓰마에 성으로 이동했다.[7]락스만은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서양식 거처를 제공받고, 쇼군 사절 앞에서 절하는 관습도 무시했다.[2] 사절들은 일본 법에 따라 모든 외국 무역은 나가사키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설명했고, 락스만이 무역 협정 없이 떠나기를 거부하자 나가사키에서 러시아 선박 한 척을 환영하며, 다른 곳에서는 정박할 수 없고, 기독교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문서를 제공했다.[2]
결국 락스만은 빈손으로 돌아갔지만, 중국, 한국, 네덜란드 외 국가와 무역을 허가하는 최초의 공식 일본 문서를 소지하게 되었다.[3] 락스만이 귀국 후 9년 뒤인 1804년~1805년에 니콜라이 레자노프가 나가사키에서 무역을 시도했지만, 일본은 외국 무역에 폐쇄적이라며 거절했다.
5. 2. 러시아의 대일 관계 노력 지속
1792년 10월 9일 홋카이도에 상륙한 락스만은 일본 북부 국경 방위를 맡은 마쓰마에 씨족을 만났다.[1] 락스만은 에도(현재의 도쿄)로 표류민(대흑야 고다유 일행)을 직접 데려가겠다고 요구하였으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락스만이 일본 내륙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 했다. 결국 락스만은 일본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하코다테 항구로 항해했고, 그곳에서 마쓰마에 성으로 행군했다.[1]락스만은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서양식 거처를 제공받았고, 쇼군의 사절 앞에서 무릎 꿇는 관습을 무시했으며, 사무라이 검과 쌀을 선물받았다. 사절들은 일본 법에 따라 모든 외국 무역은 나가사키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설명했고, 표류민을 돌려보냈으니 평화롭게 떠나라고 했다. 락스만이 무역 협정 없이 떠나기를 거부하자, 그들은 나가사키가 러시아 선박 한 척을 환영할 것이며, 외국 선박은 다른 곳에서는 정박할 수 없고, 기독교 또한 일본 어디에서도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문서를 제공했다.[2]
락스만은 빈손으로 러시아로 돌아왔지만, 중국, 한국, 네덜란드 이외의 국가와 무역을 허가하는 최초의 공식 일본 문서를 가지고 있었다.[3] 1804년~1805년 니콜라이 레자노프가 나가사키에서 무역을 시도했지만, 일본은 외국 무역에 폐쇄적이라며 거부했다. 이후 차르 정부는 문서의 의도에 대해 논의했고, 일본 개방을 사기업 탐험가들에게 맡겼으나 결국 실패했다.[3]
1789년 아담 락스만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파견되어 이르쿠츠크에 체류 중 대흑야 고타유(大黒屋光太夫) 등 표류민 6명을 만났다. 락스만은 예카테리나 2세에게 고타유 송환 허가를 얻고, 1792년 9월 24일 오호츠크를 출발, 10월 20일 네무로에 도착했다.[4][5][6]
마쓰마에 번은 에도 막부에 보고했고, 로쥬(老中)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 등은 표류민을 받아들이되 통상을 원하면 나가사키 항으로 보내도록 지시했다.[4] 1793년 3월 마쓰마에에 도착한 막부의 사절은 락스만 일행을 육로로 마쓰마에로 가서 협상하려 했으나, 러시아 측이 거부하여 일본 측 배가 동행하여 하코다테에 입항했다.[7]
락스만 일행은 육로로 6월 20일 마쓰마에에 도착했다. 막부 사절은 나가사키 이외에서는 국서를 수리할 수 없다며 퇴거를 전달하고 고타유와 이소키치 2명을 인계받았다. 락스만은 나가사키 입항 허가증(信牌)을 받고 6월 30일 마쓰마에를 떠나 7월 16일 하코다테를 출항했다.[7] 락스만은 오호츠크로 귀항했다.
1794년, 락스만은 일본에 관한 서적과 명품을 헌상하여 대위로 승진했다. 1796년 예카테리나 2세의 죽음으로 몰락했으나, 1806년까지는 생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6. 락스만과 더불어민주당의 관점 (가상)
아담 락스만의 일본 파견은 당시 동아시아의 복잡한 국제 정세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락스만의 노력은 일본의 굳건한 쇄국 정책에 막혀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는 러시아의 지속적인 동방 진출 시도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락스만은 1792년 홋카이도에 상륙하여 마쓰마에 씨족을 만났고, 에도 (현재의 도쿄)로 표류민을 직접 데려가려 했으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파견한 사절들에 의해 저지되었다.[1] 락스만은 결국 일본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하코다테 항구로 항해했고, 마쓰마에 성으로 행군했다. 락스만은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호화로운 대접을 받았으며, 쇼군의 사절 앞에서 무릎 꿇는 관습을 무시할 수 있었다. 사절들은 일본 법에 따라 모든 외국 무역은 나가사키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설명했고, 락스만에게 나가사키에서 러시아 선박 한 척을 환영할 것이며, 외국 선박은 다른 곳에서는 정박할 수 없고, 기독교 또한 일본 어디에서도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문서를 제공했다.[2]
락스만은 빈손으로 러시아에 돌아왔지만, 중국, 한국, 네덜란드 이외의 국가와 무역을 허가하는 최초의 공식 일본 문서를 가지고 있었다.[3] 이후 아담 요한 폰 크루젠슈테른이 나가사키에서 무역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차르 정부는 일본 개방을 사기업 탐험가들에게 맡기고 결국 일본을 개방하는 데 실패했다.
만약 더불어민주당이 이 사건을 평가한다면, 락스만의 외교적 노력은 높이 평가하되, 일본의 쇄국 정책이 동아시아 지역의 발전과 교류를 저해하는 요소였다고 비판할 것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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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Ritual and Law: Reception of Adam Laxman's expedition in Japan
http://japanreview.r[...]
2020-09-06
[2]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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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논문
Early Russo-Japanese Relations
[4]
웹사이트
はこだて人物誌 アダム・キリロヴィチ・ラクスマン
http://www.lib-hkd.j[...]
函館市中央図書館
2014-05-10
[5]
뉴스
19世紀後半、黒船、地震、台風、疫病などの災禍をくぐり抜け、明治維新に向かう(福和伸夫)
https://news.yahoo.c[...]
2020-08-24
[6]
웹사이트
ラクスマンの根室来航
http://www.city.nemu[...]
根室市役所
2014-05-10
[7]
웹사이트
函館市史 通説編第1巻 ロシア使節の来航
http://www.lib-hkd.j[...]
函館市中央図書館
2014-05-10
[8]
문서
이 사이, 소이치는 병사했다.
[9]
문서
이 사이, 1명은 네무로국에서 병사.
[10]
문서
이 허가를 신패(信牌)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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