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고 요시히사
1. 개요
아마고 요시히사는 센고쿠 시대 이즈모국의 센고쿠 다이묘 아마고 하루히사의 차남으로, 1561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독을 상속받았다. 그는 모리씨와의 분쟁 속에서 가신단의 동요와 국인들의 반발에 직면했으며, 모리 모토나리의 계략으로 세력이 붕괴되는 과정을 겪었다. 만년에는 모리 가문의 객빈으로 대우받았으며, 1610년 사망했다. 그는 외교적 실책에도 불구하고 모리씨에게 끝까지 저항했으며, 명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이즈모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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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아마고 요시히사 |
|---|---|
| 일본어 이름 | 尼子 義久 |
| 로마자 표기 | Amago Yoshihisa |
| 다른 이름 | 사부로시로 |
| 출생 | 1540년 |
|---|---|
| 사망 | 1610년 10월 14일 |
| 어린 시절 이름 | 조도시 사부로시로 |
| 법명 | 유리 |
| 계명 | 대각사전대원심각대거사 부춘원전천복우림대선정문 |
| 묘소 | 대각사 (야마구치현아부군아부정 소재) 융흥사 (시마네현하마다시가나기정구사 소재) |
| 관위 | 우위문독 |
|---|
| 씨족 | 아마고 씨 |
|---|---|
| 아버지 | 아마고 하루히사 |
| 어머니 | 아마고 구니히사의 딸 |
| 형제자매 | 지토세 (요절) 요시히사 미치히사 히데히사 |
| 배우자 | 교고쿠 씨 딸 (정실) |
| 자녀 | 미아키 히로토모 (서자) 양자: 모토토모 |
| 섬긴 주군 | 아시카가 요시테루 모리 데루모토 |
|---|---|
| 직책 | 이즈모국 슈고 |
| 아마고 씨 당주 (6대) | 임기: 1560년 ~ 1596년 전임자: 아마고 하루히사 후임자: 아마고 모토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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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 번사 -
모리 히데카네
모리 히데카네는 모리 모토나리의 아홉 번째 아들로 태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인물이다. -
조슈 번사 -
아마노 모토마사
아마노 모토마사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모리 모토나리의 아들이며 아마노 가문의 양자가 되어 모리 가문의 일원으로서 여러 전투에 참전했고, 이후 미기타 모리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
아마고씨 -
아마고 쓰네히사
아마고 쓰네히사는 센고쿠 시대 이즈모국의 슈고다이 아마고 씨 당주로, 교고쿠 씨 가신에서 시작하여 세력을 확장, 이즈모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며 주변 지역으로 영향력을 넓히려 혼인 정책을 펼쳤으나, 후일 가문 내 내분으로 이어졌다. -
아마고씨 -
갓산토다성 전투
갓산토다성 전투는 1542년부터 1566년까지 오우치, 모리, 아마고 가문 간의 세력 다툼으로, 모리 가문이 승리하여 아마고 가문을 멸망시킨 일련의 전투이다. -
1610년 사망 -
마테오 리치
마테오 리치는 16세기 예수회 선교사이자 학자로, 중국에서 유교적 가치관에 기반한 선교와 저술 활동을 통해 서양 학문과 기독교를 소개하고 중국 문화를 유럽에 알리는 데 기여했으며, 가경자로 선포되었다. -
1610년 사망 -
앙리 4세
앙리 4세는 위그노 전쟁 시대를 살며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프랑스 왕위에 오른 후 낭트 칙령으로 종교 전쟁을 종식시키고 경제 성장을 이끌었으나 암살당한 프랑스이자 나바라의 왕이다.
2. 생애
2.1. 가독 상속
덴분 9년(1540년), 이즈모국의 센고쿠 다이묘 아마고 하루히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사부로시로였으며, 후에 무로마치 막부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헤미 (아시카가 쇼군 가문의 통자인 '義'의 글자)를 받아 요시히사라고 불렸다.
에이로쿠 3년(1561년) 12월, 아버지 아마고 하루히사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가독을 잇게 되었다. 이와미 오모리 은광을 둘러싼 모리씨와의 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아마고 가신단의 동요와 함께 겟산토다 성 내에서 밀장하게 되었다. 또한 신궁당 숙청으로 유력한 친족들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당주를 잇게 되었고, 게다가 아마고 씨에게서 추방, 숙청 처분을 받는 등 억압받아온 국인들의 불만이 일시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모리씨는 이와미국으로 침공을 시작했고, 요시히사는 아버지와는 달리 모리씨와의 화평을 추진하려 했지만 모리 모토나리는 이를 역이용하여 이와미국에 대한 불간섭을 화평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운게 화의]]) 요시히사가 이 조건을 수락하면서, 모리씨에 반란을 일으킨 후쿠야 씨가 고립되었고, 후쿠야 씨에게 군사 원조를 하려던 아마고 가신과 국인들도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아마고 세력의 붕괴로 이어지게 된다. 한편, 당시 규슈의 거대 다이묘였던 오토모 소린과 동맹 관계를 맺어 모리 씨의 군사력을 양면으로 분산시키기도 했다.
2.2. 모리 가문과의 전쟁
2.3. 만년
덴쇼 17년(1589년), 모리 테루모토로부터 모리 씨의 객빈으로 대우받아 아키 국 시도에 거관을 하사받았다. 게이초 원년(1596년), 나가토 국 아부 군 카요의 곡곡선사(현・극락사)에서 삭발하고 출가하여 유린이라고 칭했다.
게이초 15년(1610년) 8월 28일, 나가토 국 아부 군 나고에서 사망했다. 향년 71세. 모리 가문의 뜻에 따라 조카(동생・노리히사의 장남)인 아마고 모토토모가 양자로 들어가 아마고 씨를 이었다.
그러나 요시히사에게는 친아들 히로토모가 있었고, 켄메이 씨가 그 직계이다(켄메이 가문 과거장). 켄메이 씨의 자손 하야시 도모유키는 메이지 유신에서 활약하여 원로원 의관, 귀족원 의원, 추밀원 고문관을 역임하고,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백작의 영예를 받았다. 켄메이 씨의 현재 당주 켄메이 아키라는 이즈모 아마고 일족회의 명예 회장이다.
요시히사・히로토모 부자는 병기 제조를 가업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4. 인물 평가
아마고 요시히사는 외교적인 실책도 있었지만, 오토모 씨와 연합하는 등 모리 씨에 끝까지 저항했다. 모리 모토나리가 요시히사의 목숨을 살려준 것은 이즈모국 통치를 위한 정치적 판단으로 보인다. 항복 후에는 아마고 가쓰히사나 야마나카 유키모리 등과 달리 아마고 가문 재건 운동을 일으키지 않고 모리 가문에 충성을 다했다. 한편, 아버지 대부터 명나라와의 무역을 활발히 추진하여 이즈모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5. 아마고 가신단의 말로
이즈모에서 추방되었던 국인들은 모리 가문이 아코 씨를 멸망시킨 덕분에 본래 영지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시히사가 유폐된 장소에 동행한 우야마 세이메이나 혼다 이에요시 등의 직신을 제외한, 아코 씨를 섬기던 가신들은 소령과 지위를 박탈당하고 유랑 생활을 해야 했다.
아마고 가신단 하부에 속했던 가신들이 본령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아코 씨의 복권이 필요했다. 이들 중에는 다치하라 히사쓰나, 아키가미 무네노부, 야마나카 유키모리 등 비교적 지위가 낮았던 가신이나 중신의 서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생활 기반을 보장했던 아코 씨의 복권을 노리고 아마고 가쓰히사를 옹립하여 재흥군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