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산토다성 전투
1. 개요
갓산토다성 전투는 1542년부터 1566년까지 일어난 일련의 전투로, 오우치 가문, 모리 가문과 아마고 가문 간의 세력 다툼을 보여준다. 1542년에서 1543년까지의 제1차 전투는 오우치-모리 연합군의 패배로 끝났고, 1562년부터 1563년까지의 시라가성 전투에서는 모리 가문이 승리하여 갓산토다성을 고립시키려 했다. 1565년부터 1566년까지의 제2차 갓산토다성 전투에서 모리 가문이 승리하여 아마고 가문을 멸망시켰다. 이후 아마고 가문의 부흥 운동이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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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2년 분쟁 -
아즈키자카 전투
센고쿠 시대 아즈키자카에서 오다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 사이에 벌어진 전투는 오다 노부히데의 세력 확장에 맞선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마쓰다이라 씨 지원으로 1542년과 1548년에 두 차례 발생했으며, 1542년 전투에서는 오다 군이 승리하고 '아즈키자카 7본창'이 등장했으나, 1548년 전투에서는 패배했고, 이후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사망으로 마쓰다이라 가문이 부흥하는 계기가 되었다. -
1543년 일본 -
덴분의 난
덴분의 난은 1542년부터 1548년까지 다테 가문의 당주 다테 다네무네와 그의 아들 다테 하루무네 사이에서 벌어진 오슈 지방의 대규모 내전으로, 다네무네의 세력 확장에 대한 하루무네의 반발, 주변 다이묘들의 개입,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중재를 거쳐 다테 가문의 쇠퇴와 오슈 지역 정치적 판도 변화를 야기했다. -
1543년 분쟁 -
니스 포위전
니스 포위전은 1543년 프랑수아 1세와 쉴레이만 1세의 동맹으로 오스만 함대가 프랑스 함대와 함께 사보이 공국의 니스를 공격한 사건으로, 니스 시는 함락되었으나 시미에 성은 점령하지 못했으며 프랑스-오스만 동맹의 대표적 사례로서 유럽 사회에 논란을 일으키고 니스 지역 요새화에 영향을 주었다.
2. 제1차 갓산토다성 전투 (1542년 ~ 1543년)
1542년부터 1543년까지 벌어진 제1차 갓산토다성 전투는 오우치 요시타카가 이끄는 오우치, 모리 연합군이 아마고 하루히사의 갓산토다 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퇴각한 전투이다.
모리 모토나리는 아마고 가문 영토 깊숙이 침투했지만, 보급선이 끊기고 깃카와 오키쓰네가 배신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모리 군은 갓산토다 성을 포위했지만, 결국 오우치 군은 퇴각했다. 퇴각 도중 모토나리는 거의 죽을 뻔했으나, 그의 장군 와타나베 하지메의 희생으로 무사히 아키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전투의 결과 아마고 하루히사는 승리했고, 오우치 가문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2.1. 배경
덴분 10년(1541년), 아마고 하루히사가 이끄는 아마고 군이 모리 가문의 본거지 아키국 요시다고리야마성을 공격하였으나, 모리 군과 오우치 가문의 원군에 의해 격퇴되었다(요시다코리야마성 전투).
이 아키 원정의 실패 후, 은거하던 아마고 가문의 전 당주 아마고 쓰네히사가 사망하였다. 이듬해 덴분 11년 1월 11일(1542년 1월 26일)에 오우치 요시타카는 이즈모 출병을 결정하였다. 아키와 빈고의 국인중은 아마고 측이었던 국인 영주들을 포함하여 오우치 측에 붙는 자들이 속출했다. 또한 아키·빈고·이즈모·이와미의 주요 국인들로부터 아마고 가문 토벌을 요구하는 연서장이 오우치 가문에게 제출되었고, 스에 다카후사를 시작으로 하는 무단파는 이즈모 원정을 주장했다. 사가라 다케토나 레이제이 다카토요 등의 문치파는 이에 반대했다.
2.2. 경과
1542년 (덴분 11년) 1월 26일, 오우치 요시타카가 이끄는 오우치, 모리 연합군이 아마고 쓰네히사가 사망한 이즈모를 향해 출진하였다. 오우치 요시타카는 직접 총대장이 되어 스에 다카후사, 스기 시게노리, 나이토 오키모리, 히로나카 다카카네 등과 함께 출병하였고, 모리 모토나리는 고바야카와 마사히라, 마스다 후지카네 등을 이끌고 출병하였다.
오우치·모리 연합군은 4월에 이즈모에 침입하였으나, 아카나 성 공략에 3개월이나 소요되었다. 이후 갓산토다 성이 보이는 교라기 산(京羅木山)까지 진군하여 1543년 3월에 공방전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보급로에서 아마고 군이 게릴라 전술을 펼쳐 병참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또한 미토야 히사스케, 깃카와 오키쓰네 등 고쿠진들이 아마고 가문으로 이반하여 오우치·모리 연합군은 열세에 놓였다.
결국 오우치 군은 1543년 5월 7일 퇴각을 시작하여 5월 25일에 야마구치로 귀환하였다. 퇴각 중 오우치 하루모치는 배가 전복되는 사고로 익사하였다. 모리 군은 아마고 군의 추격과 토잇키의 매복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모리 모토나리는 와타나베 도오루의 희생으로 요시다코리야마성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2.3. 결과
1542년부터 1543년까지 1년 4개월에 걸쳐 진행된 갓산토다성 전투에서 오우치 요시타카와 모리 모토나리가 이끄는 오우치·모리 연합군은 패배하여 철수하였다. 오우치 요시타카는 이 원정에서 양자이자 후계자인 오우치 하루모치를 잃고 정무 의욕을 상실하였고, 이는 오우치 가문의 쇠퇴로 이어졌다.
반면, 승리한 아마고 가문은 아마고 하루히사의 통치 아래 세력을 회복하며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후 오우치 가문이 멸망하면서 이와미국을 둘러싼 모리 가문과 아마고 가문 간의 분쟁이 격화되었다.
3. 시라가성 전투 (1562년 ~ 1563년)
1562년 모리 모토나리는 아들 깃카와 모토하루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2만 군세를 주어 이즈모국을 침공하게 하였다. 아마고 가문은 전년도에 아마고 하루히사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아마고 요시히사가 가독을 이었으나, 가신단 내부의 불화와 운케이 화의(雲芸和議)로 인한 불만으로 이즈모 서부와 남부의 고쿠진(国人) 대부분이 모리 가문으로 넘어갔다.
모리 군은 아마고 십기(尼子十旗) 중 하나인 시라가 성(白鹿城)을 공격하였다. 시라가 성은 갓산토다성의 동해 쪽 관문 역할을 하는 성으로, 모리 군은 이 성을 함락시켜 아마고 군의 동해 병참선을 차단하고 갓산토다 성을 고립시키려 했다. 1563년 10월, 아마고 도모히사(尼子倫久)가 이끄는 1만여 명의 아마고 구원군이 도착했으나 전황은 불리했고, 결국 시라가 성은 함락되었다.
모리 군은 갓산토다 성 부근에 진을 치고 지구전을 준비하였다.
3.1. 배경
오우치 가문이 멸망한 후, 모리 가문은 이와미 은광을 두고 아마고 가문과 대립하였다. 1561년 12월, 아마고 하루히사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아마고 요시히사가 가독을 이었다. 운게 화의 이후, 이즈모 서부와 남부의 고쿠진(国人)들 다수가 모리 측으로 이반했다.
3.2. 경과
1562년 모리 모토나리는 아들 깃카와 모토하루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이즈모 침공을 지시했다. 모리 군은 우선 아마고 십기(尼子十旗) 중 하나인 시라가 성(白鹿城)을 공격했는데, 이 성은 갓산토다성의 동해 쪽 현관 역할을 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모리 군은 시라가 성을 함락시켜 아마고 군의 동해 병량 수송을 차단하고 갓산토다 성을 고립시키는 작전을 펼쳤다.
1563년 시라가 성 공방전 중, 모리 모토나리의 장남 모리 다카모토가 급사했다. 모토나리는 슬픔을 감추고 "아마고 가문을 격멸하는 것 외에 다카모토의 명복을 빌 방도가 없다"며 장병들을 독려했고, 평소 인망이 높았던 다카모토의 죽음에 모리 군의 사기는 크게 올랐다. 모토나리는 이와미 은광 광부들을 동원해 갱도를 파서 시라가 성의 우물을 제압하여 물 보급을 끊었다. 아마고 요시히사는 동생 아마고 도모히사(尼子倫久)에게 구원병을 파견하도록 지시했지만, 전세를 뒤집지 못하고 1563년 10월 시라가 성은 함락되었다.
4. 제2차 갓산토다성 전투 (1565년 ~ 1566년)
1565년부터 1566년까지 모리 모토나리는 아마고 가문의 본거지인 갓산토다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이즈모 아마고 가문을 멸망시켰다. 모리 군은 갓산토다 성을 포위하고 병량 공격을 감행하여, 성 안의 식량이 바닥나게 만들었다.
아마고 요시히사는 가신 우야마 히사카네의 도움으로 병량을 확보하여 저항했으나, 참언을 믿고 우야마 히사카네를 살해하는 실책을 저질러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다. 결국 1566년 11월 21일, 아마고 가문은 모리 가문에 항복하였다. 모리 가문은 아마고 요시히사 등 아마고 일족의 생명은 살려두었지만, 아키국으로 압송하여 유폐시켰다.
이 전투는 모리 데루모토와 깃카와 모토나가가 처음으로 참전한 전투(초진)이기도 하다.
4.1. 경과
1565년 모리 모토나리는 시라가 성을 제압하고 아마고 가문의 거점을 차례로 점령한 뒤 갓산토다 성을 포위하여 보급로를 차단하고 병량 공격을 시작했다. 같은 해 4월, 모리 군은 세 방향에서 갓산토다 성을 공격했으나, 요시히사를 비롯한 아마고 군의 저항으로 전황이 불리해져 아라이 성으로 철수했다.
같은 해 9월, 모리 군은 재차 갓산토다 성을 포위하여 지구전을 펼쳤다. 모리 군은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고립된 성내 병사들이 병량을 소진하게 만드는 작전을 썼다. 병량이 부족해지자 모리 군은 항복을 허용했고, 아마고 군 병사들은 무리를 지어 투항했다.
한편, 요시히사는 우야마 히사카네를 살해하여 수비병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1566년 11월 21일, 아마고 가문은 결국 항복했다. 모리 군은 요시히사 등 아마고 일족을 아키국으로 유폐시켰다. 모리 데루모토와 깃카와 모토나가는 이 전투로 첫 출진을 했다.
4.2. 결과
1566년 11월 21일, 아마고 요시히사가 항복하면서 갓산토다 성이 함락되고 이즈모 아마고 가문은 멸망했다. 모리 모토나리는 아마고 요시히사 등 아마고 일족의 목숨은 빼앗지 않았지만, 일족을 모두 아키국으로 데려가 유폐시켰다.
이 전투의 승리로 모리 가문은 주고쿠 지방 최대의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했다. 후방의 걱정을 덜게 된 모리 가문은 1568년에 고노 씨를 지원하여 이요국으로 출병하고, 1569년에는 오토모 씨와의 전투를 본격화하는 등 세력을 더욱 확장해 나갔다.
한편, 아마고 가문의 항복에 불만을 품은 야마나카 유키모리는 숙부인 다치하라 히사쓰나 등과 함께 아마고 가문 재건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5. 아마고 가문 부흥 운동 (1569년 ~ 1578년)
1569년, 야마나카 유키모리를 중심으로 아마고 가쓰히사 등은 모리 씨에게서 갓산토다성을 되찾고 이즈모 국에서 모리 세력을 몰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갓산토다 성의 견고한 수비에 막혀 실패했다.
1571년 후베야마 전투에서 유키모리가 깃카와 모토하루에게 사로잡혔으나, 가쓰히사와 교토로 탈출해 오다 노부나가에게 의탁했다.
1577년, 하시바 히데요시가 하리마국 히메지성에 오면서 유키모리는 고즈키 성에 들어가 아마고 가문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미키 전투로 히데요시의 지원이 끊기면서 고즈키 성 전투에서 가쓰히사 등이 자결하고 항복했다. 유키모리는 호송 중 살해되어 아마고 가문 부흥 운동은 끝났다.
5.1. 경과
야마나카 유키모리는 아마고 가쓰히사를 옹립하여 아마고 가문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1568년 다지마 국에서 출진하여 이즈모, 이나바 등지에서 전투를 벌여 아마고 가문 재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569년 5월, 모리 모토나리가 나가토국으로 출진하여 주고쿠 지방의 모리 영지 경비가 허술해지자, 유키모리는 니코 재흥군을 이끌고 이즈모 국으로 침공했다. 이들은 시마네 반도에 상륙하여 츄야마 요새를 점거하고, 격문을 통해 구신들을 모아 3,000여 명의 군세를 확보했다. 이후 신야마 성을 공략하고 스에츠기 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같은 해, 아마고 가쓰히사 등은 갓산토다 성을 공격하여 이즈모에서 모리 가문을 몰아내려 하였으나, 갓산토다 성의 견고한 수비에 막혀 실패하고 철수하였다. 1571년 후베야마 전투에서 유키모리가 깃카와 모토하루에게 사로잡혔으나, 가쓰히사와 함께 교토로 도주하여 오다 노부나가에게 의탁하였다.
1577년, 하시바 히데요시가 하리마국 히메지성으로 진출하자, 유키모리는 고즈키 성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미키 성 전투가 발발하면서 히데요시의 후원이 중단되었고, 고즈키 성 전투에서 아마고 가쓰히사 등이 자결하고 항복하였다. 유키모리는 호송 중 살해되었고, 아마고 가문 부흥 운동은 종결되었다.
5.2. 갓산토다성 포위전 (15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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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고 재흥군은 스에쓰기성을 거점으로 삼아, 과거 아마고 씨의 본거지였던 갓산토다성을 공략하고자 했다. 시마네 현 야스기 시 히로세정 우파, 야마사, 누노베, 마루세 등 갓산토다성 주변 10여 곳에 보조 성을 쌓고, 모리 측 성 8곳을 함락시켜 갓산토다성을 고립시켰다.
1569년 8월 하순(에이로쿠 12년 7월 중순), 아마고 재흥군은 갓산토다성 공격을 개시했다. 당시 모리 모토나리의 명령으로 주고쿠 지방의 모리 군 대부분이 규슈로 출정했기 때문에, 갓산토다성에는 아마노 다카시게 등이 이끄는 소수의 병력만 남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주 다카시게는 아마고 재흥군에게 "갓산토다성을 내어주고 항복하겠다"는 거짓 서신을 보냈다. 진의를 알 수 없었던 아마고 재흥군은 아키가미 무네노부에게 병사를 주어 갓산토다성으로 보냈다.
갓산토다성에 도착한 아마고 재흥군은 다카시게의 서신대로 별다른 저항 없이 성 안 깊숙이 들어갔으나, 7굽이 부근(산노마루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리 군의 기습을 받았다. 다카시게의 항복은 거짓이었던 것이다. 다카시게의 서신을 믿고 방심했던 무네노부는 모리 군의 조총과 활 공격을 받고 부대가 혼란에 빠져, 많은 사상자와 부상자를 내고 스에쓰기성으로 물러났다.
이후, 아마고 재흥군은 야마나카 유키모리와 다치하라 히사쓰나 등에게 1,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다시 갓산토다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퇴각할 때 성 안에서 진다이 오이노스케가 70~80명의 병사를 이끌고 추격해 왔지만, 우시오 단조추가 후위가 되어 이를 막아내고 무사히 귀환했다.
5.2.1. 배경
모리 씨는 주고쿠 지방을 거의 손에 넣은 뒤, 다음 목표로 북규슈를 다스리는 오토모 씨를 토벌하고자 했다.
1568년 7월, 모토나리는 이요 국에 출병했던 깃카와 모토하루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를 아키 국으로 귀환시키고, 같은 해 8월에 이들을 북규슈로 파견하여 오토모 씨 토벌을 시작했다. 1569년 5월에는 모토나리도 요시다 고리야마 성을 떠나 나가토 국으로 출진하여 조후에 본진을 구축하고 오토모 씨 토벌의 거점으로 삼았다. (다타라하마 전투). 이때 산인 지방의 많은 고쿠진들에게도 규슈 출병이 명령되어, 산인 지방의 모리 영지 경비는 허술해졌다.尼子氏と戦国時代の鳥取일본어 80쪽.
한편, 멸망한 아마고 씨의 가신이었던 야마나카 유키모리는 아마고 가문 재흥을 목표로 하는 중심 인물이었다.尼子氏と戦国時代の鳥取일본어 80쪽.
1568년, 유키모리는 각지를 방랑한 뒤 교토의 도후쿠지에서 승려가 된 아마고 씨 일문인 아마고 마사히사의 아들 아마고 가쓰히사를 환속시켜, 아마고 재흥군의 대장으로 옹립한다. 그리고 각지의 아마고 가문 유신들을 집결시켜 몰래 가문 재흥을 위한 싸움을 계획했다.
1569년 8월 6일, 모리 씨가 오토모 씨를 공격하기 위해 북규슈로 군대를 파견하자, 거병의 기회를 엿보던 유키모리 등 아마고 재흥군은 이즈모국으로 침공을 시작한다.
아마고 재흥군은 단바국에서 수백 척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시마네반도에 상륙한 뒤, 가까운 곳에 있던 츄야마(忠山)의 요새를 점거한다. 가쓰히사 등 아마고 재흥군이 여기서 재흥의 격문을 발표하자, 국내에 잠복해 있던 옛 신하들이 속속 집결하여 5일 만에 3,000여 명의 군세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달 하순, 유키모리 등 아마고 재흥군은 타가 모토류가 농성하는 신야마 성을 공략하고, 이어서 시나지호 북안에 위치한 스에츠기(시마네현 마쓰에시 스에츠기 정, 현재의 마쓰에성 건설지)에 성을 쌓아 이곳을 거점(스에츠기 성)으로 삼았다. (아마고 재흥군의 운슈 침공)
5.2.2. 경과
아마고 재흥군은 스에쓰기성으로 본진을 옮긴 뒤, 과거 아마고 씨의 거점이었던 갓산토다성 공략에 나섰다. 이들은 시마네 현 야스기 시 히로세정 우파, 야마사, 누노베, 마루세 등 갓산토다성 주변 10여 곳에 향성을 구축하고, 모리 씨 측 성 8곳을 공략하여 갓산토다성을 고립시켰다.
에이로쿠 12년 7월 중순(1569년 8월 하순), 아마고 재흥군은 갓산토다성 공격을 시작한다。당시 모리 모토나리의 명으로 주고쿠 지방의 모리 군 다수가 규슈로 출진한 상황이었기에, 갓산토다성에는 아마노 다카시게 등이 이끄는 소수의 병사만이 남아 있었다.
이러한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성주 다카시게는 계책을 내어 아마고 재흥군에게 "갓산토다성을 열고 항복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웠던 아마고 재흥군은 아키가미 무네노부에게 병사를 이끌게 하여 갓산토다성으로 향하게 했다.
갓산토다성에 도착한 아마고 재흥군은 다카시게의 서신대로 저항 없이 성 안으로 진입했지만, 7굽이 부근(산노마루 앞)에서 매복한 모리 군의 급습을 받았다. 다카시게의 항복은 거짓이었던 것이다. 다카시게의 서신을 믿고 방심한 무네노부는 모리 군의 조총과 활 공격에 혼란에 빠져, 반격할 틈도 없이 많은 사상자와 부상자를 내고 스에쓰기성으로 후퇴했다。
이후, 아마고 재흥군은 야마나카 유키모리와 다치하라 히사쓰나 등에게 1,000명의 병사를 이끌게 하여 다시 갓산토다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퇴각할 때 성내에서 진다이 오이노스케가 70~80명의 병사를 이끌고 추격했지만, 우시오 단조추가 후위가 되어 공격을 막아 무사히 귀환했다。
5.2.3. 결과
아마고 재흥군은 갓산토다성 공략에 실패한 뒤, 이즈모국 내 16개 성을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1569년 7월 하순(9월 중순)경에는 이즈모국 대부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모리의 구원군과의 전투(하라테 전투)와 내부 반란(미호노세키 전투) 등으로 갓산토다성 공략은 지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고 재흥군은 갓산토다성을 지속적으로 포위, 압박하여 성내 병량 부족을 야기했고, 유리한 정세 속에서 공략을 진행했다.
한편, 모리 군은 오토모 군과의 전투에서 다치바나 성을 탈환했지만, 오토모 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어 군을 움직일 수 없었다. 1569년 10월 11일(11월 19일)에는 오우치 테루히로가 오우치 야시키 터를 습격하는 사건(오우치 테루히로의 난)까지 발생하여, 모리 씨는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모리 모토나리는 북규슈 주둔 모리 군의 철수를 결정, 1569년 10월 15일(11월 23일)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11월 21일(12월 28일)에는 모지 성을 제외한 북규슈 전 지역에서 철수했다.
1569년 10월 18일(11월 26일), 기가와 모토하루·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 모리 군은 규슈에서 철수하여 10월 25일(12월 3일)경 오우치 재흥군의 반란을 진압했다. 오우치 테루히로는 자결했고, 오우치 재흥의 난은 단기간에 종결되었다. 모리 군은 1569년 12월 23일(1570년 1월 29일)에 철수하여 요시다 코리야마 성으로 귀환했다.
1570년 1월 6일(2월 10일), 모리 데루모토, 기가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대군을 이끌고 아마고 재흥군 진압을 위해 출진했다. 모리 군은 북상하여 이즈모국 내 아마고 측 성들을 공략하며 갓산토다성으로 진격했다.
1570년 2월 14일(3월 20일), 모리 군은 누노베 전투에서 아마고 재흥군에 승리했다. 다음 날인 2월 15일(3월 21일), 병량이 고갈되어 함락 직전이었던 갓산토다성을 구원했다. 이로써 아마고 재흥군은 쇠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