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라코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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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부라코지 사건은 1867년 신선조가 고료에지를 결성한 이토 가시타로를 암살하고, 시신을 수습하러 온 고료에지 잔당을 숙청한 사건이다. 이토 가시타로는 신선조에 의해 암살되었으며, 이후 시신을 수습하러 온 고료에지 잔당과의 교전에서 도도 헤이스케 등 3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신선조 내부의 권력 투쟁과 이념 대립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신선조 몰락과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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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라코지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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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사건명 | 아부라코지 사건 (油小路事件) |
로마자 표기 | Aburakōji Jiken |
발생일 | 1867년 11월 15일 (게이오 3년 10월 20일) |
장소 | 일본 교토 아부라노코지 (油小路) |
원인 | 신센구미 내부 항쟁 |
교전 세력 | 신센구미 고료에지 잔당 |
주요 인물 | 곤도 이사미 히지카타 도시조 미토 주자부로 이토 가시타로 사사키 다다사부로 |
결과 | 이토 가시타로, 핫타 오모키, 모토야마 쓰구오, 가이에 나오자에몬 사망 |
배경 | |
시대적 배경 | 막말 |
관련 단체 | 신센구미 고료에지 |
사건 전개 | |
이토 가시타로의 이탈 | 이토 가시타로가 신센구미를 이탈하여 고료에지를 결성 |
암살 계획 | 신센구미가 이토 가시타로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 수립 |
암살 실행 | 곤도 이사미의 주도 하에 이토 가시타로 암살 실행 |
사건 결과 및 영향 | |
신센구미 내부 숙청 | 고료에지 잔당 숙청 |
신센구미의 약화 | 내부 분열 심화 및 조직 약화 |
막부 붕괴 가속화 | 막말 정세 불안정 심화 |
2. 이토 가시타로 암살
게이오 3년(1867년) 3월 10일, 신선조에서 이탈하여 고료에지를 결성한 이토 가시타로는 존왕양이 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사쓰마 번과 연계했다. 이는 신선조 첩자 사이토 하지메에 의해 밝혀졌다. 이토는 대화를 중시하고 사람을 벤 경험이 적었으며, 곤도 이사미 암살 계획의 증거가 불충분하여 암살 계획 자체가 없었다는 설도 있다. 고료에지가 조슈 번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주장하는 건백서를 제출한 것이 곤도 이사미의 분노를 사 아부라코지 사건의 배경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1867년 11월 18일, 곤도 이사미는 이토 가시타로를 술자리로 유인하여 암살한다. 오이시 구와지로 등이 매복하여 귀가하는 이토를 창으로 공격했고, 이토는 "간적들아!"라고 외치며 사망했다. 곤도 이사미와 히지카타 도시조는 북진일도류 검술의 달인이었던 이토의 실력을 경계하여 암살을 계획했다고 알려져 있다.
2. 1. 암살 실행 부대
게이오 3년(1867년) 11월 18일(12월 13일), 곤도 이사미는 이토 가시타로를 시치조(七条)의 첩 집에 초대하여 술을 대접했다. 곤도는 자금 마련과 국사에 대한 상담을 구실로 이토를 불렀다. 귀가하는 이토를 오이시 구와지로 등 여러 명이 매복하여 창으로 암살했다. 이토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반격했고, "간적(奸賊) 놈들"이라고 외치며 혼코지(本光寺)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암살에는 하라다 사노스케, 나가쿠라 신파치, 시마다 가이, 오이시 구와지로, 기시지마 요시타로, 요코쿠라 진고로, 미야가와 신키치, 마쓰바라 이쿠타로, 소마 가즈에, 미우라 츠네지로, 시바오카 고조, 사이토 하지메 등 신선조 대원들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외 다른 국장 부속도 출동한 것으로 보인다.
3. 아부라코지 사건 (고료에지 잔당 숙청)
게이오 3년(1867년) 11월 18일, 곤도 이사미는 이토 가시타로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술을 대접하고, 귀가하는 이토를 암살했다. 오오이시 쿠와지로가 잠복하고 있다가 창으로 공격했고, 이토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이 간적들아!"라고 외치며 쓰러졌다고 한다. 곤도와 히지카타는 북진일도류 검술의 달인이었던 이토의 실력을 경계하여 이러한 암살을 계획했다고 한다.
신선조는 이토의 시신을 아부라코지 시치조 사거리에 방치하고, 시신을 수습하러 오는 고료에지 잔당을 숙청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신선조의 초기 멤버이자 8번대 대장이었던 도도 헤이스케를 포함하여 핫토리 다케오, 모나이 아리노스케 3명이 사망했다. 구와나 번사 고야마 마사타케의 기록(사담회속기록)에 따르면, 신선조 대원 40~50명이 도도 헤이스케, 시노하라 다이노신, 스즈키 미키사부로, 핫토리 다케오, 모나이 아리노스케, 가노 와시오, 도야마 야헤이 등 고료에지 7명을 포위하여 격전을 벌였다고 한다.
3. 1. 고료에지 잔당의 저항과 최후
신선조는 아부라코지시치조 교차로에 이토 가시타로의 유해를 방치하고 주변에 매복하여, 유해를 수습하러 온 고료에지들을 숙청하려 했다. 유해를 수습하러 온 고료에지는 도도 헤이스케, 시노하라 야스노신, 스즈키 미키사부로, 핫토리 다케오, 모나이 아리노스케, 가노 미치노스케, 토야마 야헤이 7명이었다. 이 전투로 신선조 결성 초기 멤버이자 전 8번대 대장이었던 도도 헤이스케 외에 핫토리 다케오, 모나이 아리노스케 3명이 사망했다.우연히 현장을 지나가던 구와나 번사 고야마 마사타케의 담화(사담회 속기록)에 따르면, 신선조 대원 40~50명이 고료에지 7명을 포위하여, 먼저 도도가 쓰러졌고, 다음으로 모나이가 쓰러졌으며, 마지막으로 핫토리가 분투했으나 끝내 쓰러졌다고 한다.
- 도도 헤이스케는 곤도 이사미와 오랜 동료였던 나가쿠라 신파치와 하라다 사노스케가 도주를 권유했으나, 다른 대원에게 살해당했다.
- 모나이 아리노스케의 유해는 온몸이 토막 나는 참혹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돗토리 번 게이오 정묘 필기)
- 핫토리 다케오는 이도류 검술의 달인으로, 신선조에 많은 부상자를 내며 분투했으나, 하라다 사노스케의 창에 의해 최후를 맞이했다.
스즈키 미키사부로, 가노 와시오, 토야마 야헤이는 도망친 뒤, 다음날 19일 오전 4시경, 이마데가와 사쓰마 번 저택에 은닉되었다. 그 뒤, 아부라코지에서 도망친 시노하라 야스노신과 부재중이던 간부 우치미도 이마데가와 사쓰마 번 저택에 합류한 뒤, 후시미 사쓰마 번 저택으로 옮겨졌다.
3. 2. 생존자와 이후 행적
스즈키 미키사부로, 가노 미치노스케, 토야마 야헤이는 도주하여 다음날 19일 오전 4시가 지나, 이마데가와 사쓰마 번 저택에 은닉되었다. 그 후 아부라코지에서 도망친 시노하라 다이노신과 부재중이던 간부 우치미도 이마데가와 사쓰마 번 저택에 합류한 뒤, 후시미 사쓰마 번 저택으로 옮겨갔다.이토 가시타로 등의 시신은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코엔사(광연사)에 매장되었다. 그 뒤 게이오 4년 2월 스즈키 미키사부로 등에 의해 센뉴지(천용사)의 탑두 게이코 사(계광사)에 개장되었다.
4. 후일담
게이오 4년 1월, 아부라코지 사건 1개월 후, 시노하라 다이노신 등 살아남은 고료에지 대원들은 후시미 가도 민가에 잠복하고 있다가 니조 성에서 돌아오던 곤도 이사미를 저격하여 오른쪽 어깨에 중상을 입혔다.
보신 전쟁에서 곤도 이사미는 신정부군에 투항했으나, 고료에지 출신 가노 와시오에게 정체가 발각되어 체포, 처형되었다.
이토 가시타로 등 4명의 유해는 센뉴지 탑두 게이코 사에 다시 매장되었으며, 장례는 다이묘 장례에 비견될 정도로 성대하게 치러졌고, 신정부군 참모 관청에서 비용을 지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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