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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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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카로아는 뉴질랜드 남섬 뱅크스 반도에 위치한 마을이다. 1830년 마오리족과 유럽인 간의 사건이 발생한 곳으로, 1840년 프랑스가 이 지역에 정착하려 했으나 영국이 주권을 선포하면서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현재는 프랑스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헥토르 돌고래 관람 등 해양 생태 관광이 발달했다. 2006년 크라이스트처치 시에 편입되었으며, 2023년 기준 약 790명의 인구가 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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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로아 - [지명]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기본 정보
공식 명칭아카로아
다른 이름포트 루이 필리프
면적2.03 km²
인구840명
인구 조사 시점2023년
인구 밀도자동 계산
2004년 아카로아 타운십과 주요 부두
2004년 아카로아 타운십과 주요 부두
위치뉴질랜드 뱅크스 반도
좌표43°48′15″S 172°58′00″E
행정 구역
국가뉴질랜드
지역캔터베리 지역
구역크라이스트처치 시
선거구뱅크스 반도
커뮤니티테 파타카 오 라카이하우투 뱅크스 반도
정치
선거구뱅크스 반도 선거구
테 타이 통가 (마오리)
자치 단체크라이스트처치 시의회
지역 의회환경 캔터베리
시장크라이스트처치 시장
뱅크스 반도 국회의원뱅크스 반도 국회의원
테 타이 통가 국회의원테 타이 통가 국회의원
역사
유럽 정착1840년 8월 18일
설립자장 프랑수아 랑글루아
우편 정보
우편 번호7520
기타
지역 이위응가이 타후
마오리어 이름황가로아

2. 역사

1840년대 프랑스에서 포경을 목적으로 온 이민자들이 정착하면서, 아카로아는 뉴질랜드에서 두 번째로 큰 포경 거점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마을 곳곳에는 프랑스적인 분위기가 남아 있다.

마을에는 미술 공예품을 만드는 공방이나 이를 판매하는 상점, 다양한 레스토랑과 카페, 여행객을 위한 숙박 시설 등이 잘 갖추어져 있다. 2001년 기준으로 상주 인구는 576명이었으나, 여름 휴가철에는 단기 체류자를 포함하여 인구가 3,000명에서 7,000명까지 늘어나는 관광 중심지이기도 하다.

행정적으로는 2006년에 아카로아가 속해 있던 뱅크스반도 지역이 크라이스트처치 시와 합병되면서, 현재는 크라이스트처치 시의 일부가 되었다.

2. 1. 초기 역사와 마오리족 정착지

1830년, 현재 아카로아 마을 동쪽에 위치한 타카푸네케(마오리족 정착지)는 비극적인 사건의 현장이 되었다. 영국 브리그선 엘리자베스(Elizabeth)의 선장 존 스튜어트는 북섬의 응가티 토아(Ngāti Toa)족 추장 테 라우파라하(Te Rauparaha)가 현지 카이타후족(Kāi Tahu) 추장 타마이하라누이(Tama-i-hara-nui)와 그의 아내 테웨(Te Whe), 어린 딸 로이마타(Roimata)를 납치하는 것을 도왔다. 이 사건으로 타카푸네케 정착지는 약탈당했으며, 수백 명의 주민이 살해당하고 수십 명이 노예로 끌려갔다. 당시 뉴질랜드에는 제대로 된 법 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존 스튜어트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 살인죄로 기소되지 않았다. 그의 행동은 당시 뉴질랜드에서 유럽인들이 저지른 여러 무법 행위 중 하나였으며[1], 이는 1832년 뉴질랜드에 공식 영국 거주민으로 제임스 버스비(James Busby)를 임명하게 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1]

이보다 앞선 1832년에는 테 라우파라하가 카이아포이 파(Kaiapoi Pā)를 3개월간 성공적으로 포위 공격한 뒤, 아카로아 항구 입구에 있는 오나웨 반도(Ōnawe Peninsula)의 파(pā, 요새화된 정착지)를 점령하는 사건도 있었다. 당시 파에는 약 400명의 카이타후족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살해당하고 일부 강한 자들만 노예로 끌려갔다.

초기 유럽 정착민들은 아카로아를 포경 기지로 활용했다. 아카로아는 현재까지 마을 형태로 남아 있는 뉴질랜드의 몇 안 되는 포경 기지 중 하나이다.

한편, 아카로아 근처 카이크(Kaiks)에는 역사적인 무교파 교회인 오누쿠 교회가 있다.[33] 1876년 11월 기초석을 놓고 1878년에 완공된 이 교회는 오누쿠 마을회관 부지에 자리 잡고 있다. 목조 건물에 경사진 슁글 지붕을 얹었으며, 종탑을 갖추고 있고 약 60명을 수용할 수 있다. 1939년경 한동안 사용되지 않다가 이후 복원 과정에서 현관에 전통적인 조각 패널이 추가되었으며, 1963년까지 정기적인 예배가 이루어졌다.[34]

2. 2. 프랑스 정착 (1840년)

1830년대 프랑스태평양 지역을 포함한 광범위한 식민지 확장 계획을 세웠으며, 여기에는 뉴질랜드 남섬도 포함되었다. 아카로아 정착은 이 계획의 일부였으나, 결과적으로 더 큰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다.[2] 1838년, 프랑스 포경선 선장 장 프랑수아 랑글루아는 뱅크스반도 전체에 대한 소유권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매매 계약서를 작성했다. 이 계약서에는 12명의 카이 타후 족장들이 각자의 모코(전통 문신)나 십자가 표시를 남겼다.[2][3] 가격은 1,000 프랑(당시 40GBP)이었고, 이 중 150 프랑(6GBP) 상당의 물품(코트, 바지, 모자, 신발, 권총 등)이 보증금으로 먼저 지급되었다.[2][3] 나머지 금액은 랑글루아가 프랑스에서 정착민들과 함께 돌아올 때 지불하기로 약속되었다.[2][3] 그러나 랑글루아와 정착민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영국이 뉴질랜드 전체에 대한 주권을 선포한 후였고, 영국 당국은 영국 법과 마오리족의 증언을 토대로 1838년 매매 계약의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았다.[2]

프랑스로 돌아간 랑글루아는 부유한 사업가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포경 및 식민지 사업을 위한 낭토-보르도 회사를 설립했다. 랑글루아는 자신이 확보했다고 주장한 뱅크스 반도의 소유권을 회사에 넘기고 소액 주주가 되어 사업의 포경 부문을 담당했다.[2] 프랑스 정부도 개입하여, 정착민 수송을 위해 군함을 개조한 콩트 드 파리호를 제공했다.[2] 1840년 3월 9일, 63명의 이민자들이 로슈포르 항구를 출발했다. 이들과 함께 샤를-프랑수아 라부 제독이 지휘하는 코르벳 함선 ''오브''호가 동행했는데, 라부 제독은 뉴질랜드 주변의 프랑스 포경 활동 감독 임무도 맡고 있었다.

샤를 프랑수아 라부(1798–1878)


이 배들은 1840년 7월 11일 북섬의 베이 오브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이들은 항해하는 동안 윌리엄 홉슨이 이미 1840년 5월 21일에 뉴질랜드 전체에 대한 영국의 주권을 선포했으며, 주요 남섬 마오리 족장들이 와이탕이 조약에 서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부총독 윌리엄 홉슨은 프랑스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영국의 주권을 공고히 하고자 HMS 브리토마트호를 아카로아로 급파했다. 브리토마트호는 아카로아에 먼저 도착하여 유니언잭을 게양함으로써, 곧 도착할 프랑스 정착민들에게 이곳이 영국 영토임을 명확히 하고 라부 제독의 잠재적인 주권 주장을 차단하려 했다.[4] 브리토마트호는 1840년 8월 16일에 아카로아에 도착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선장의 항해 일지에는 8월 11일 도착으로 기록되어 있다. 스탠리 선장은 영국 국기를 게양하고 각 정착지에 법정을 열어 영국의 통치권을 확립하려 했다.[3] 마을 동쪽 끝에는 이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프랑스어 지명이 표시된 아카로아의 가로등


1840년 8월 18일, 프랑스 정착민들이 아카로아에 도착하여 정착촌 건설을 시작했다. 도착한 정착민은 57명(항해 중 일부 사망)이었으며, 이 중 12명은 독일인이었다.[5][2] 정착민들에게 할당된 토지는 게르만 만(타카마투아), 프랑스 타운(현재 아카로아 중심부), 그리고 그 뒤편 언덕 지역이었다.[2] 초기 6년간 정착촌에는 정착민보다 프랑스 선원과 해군 장교 수가 더 많았다. 이들은 가톨릭 선교사, 교회, 학교, 프랑스 시장, 병원, 상점 등 상당한 규모의 프랑스 공동체 기반 시설을 구축했으며, 프랑스 법령과 사법 제도도 운영했다.[2] 폼팔리에 주교는 1840년 아카로아에 첫 유럽 기지를 세웠지만, 프랑스 이민자들의 종교적 무관심 때문에 곧 폐쇄했다.[6] 아카로아 지역에는 여전히 많은 프랑스식 지명이 남아 프랑스의 영향을 보여준다.[7]

1840년 이전, 현재의 아카로아 지역은 왕갈로아(Whangaloa)로 알려져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처음 정착지를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리프 1세를 기려 '포르 루이-필리프(Port Louis-Philippe)'라 불렀다.[8]

영국은 낭토-보르도 회사의 토지 소유권 주장을 영국 법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마오리족, 프랑스 측(라부 제독과 회사 대리인 피에르-조제프 드 벨리니), 영국 측 간의 복잡하고 긴 협상을 거친 결정이었다. 토지 소유권 논의는 1849년까지 이어졌으며, 그 사이 양국 정부까지 개입했다. 프랑스 정착민들이 토지 소유를 기대하고 뉴질랜드로 이주했다는 점을 고려하여, 영국 식민청의 스탠리 경은 1845년 뉴질랜드 당국에 낭토-보르도 회사에 30000acre의 토지를 부여하도록 지시했다. 이 지시가 당시에 명확히 이행되지는 않았으나, 관련된 모든 당사자는 회사가 해당 토지를 소유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낭토-보르도 회사는 심각한 재정난에 처해 있었고, 1849년 파산 전에 자금 마련을 위해 토지 매각을 시도했다.[2] 일부 토지는 개별 정착민에게 매각되었으나, 대부분은 당시 정착지를 물색하던 뉴질랜드 회사가 4500GBP에 매입했다.[3][2] 결과적으로 1849년까지 프랑스 정착민들은 영국 식민지 내에서 소수 집단으로 남게 되었다.[2]

프랑스 정착민 도착 이전부터 아카로아에 거주했던 제임스 로빈슨 클러(Jimmy Robinson)는 1840년 영국 국기 게양식에서 오언 스탠리 선장의 통역을 맡았다. 그는 1843년 애번강/오타카로(Avon River / Ōtākaro)를 거슬러 올라간 최초의 유럽인이기도 하다.

이후 영국인과 독일인 이민자들이 아카로아와 게르만 만(타카마투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특히 많은 독일 농부들이 낙농업, 목축, 콕스풋(목초) 재배 등 농업에 종사했다. 1850년 4월, 영국에서 온 배 ''모나크''(Monarch)호가 수리를 위해 아카로아 항구에 들렀을 때, 승객 중 40명이 이곳에 남기로 결정했다.[9] 영국 이민자들은 주로 아카로아 남쪽 끝에 정착했으며, 기존 프랑스인들은 작은 만을 사이에 두고 북쪽 끝에 거주했다.[10]

시간이 흐르면서 아카로아는 점차 영국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1854년에는 '영국의 작은 해변 마을과 매우 흡사하다'고 묘사될 정도였다.[9] 1878년 아카로아 인구 642명 중 프랑스 출신은 마을 내 10명, 외곽 27명에 불과했다.[9] 그럼에도 프랑스 정착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아카로아는 캔터베리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중 하나이자 뉴질랜드의 역사적인 장소 중 하나로 여겨진다.[7] 1883년에는 건축업자 5명, 제과업자 4명, 잡화점 8곳, 우유 판매업자 5명, 구두 장인 4명, 은행가 2명, 모자 장식업자 5명, 대장장이 5명이 활동할 정도로 지역 경제가 성장했다.[9]

프랑스 정착민들의 종교 생활을 위해 1865년 벤저민 마운트포트와 맥스웰 버리의 설계로 가톨릭교회 건물이 세워졌다. 목조 건물인 이 교회에는 이후 현관(1886년)과 종탑(1893년)이 추가되었으며, 1930년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설치되었다.[35]

2. 3. 영국 정착과 주권 선포

프랑스가 아카로아를 식민지로 삼고 포경항으로 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당시 뉴질랜드 부총독이었던 윌리엄 홉슨 선장은 이를 인지하고 영국 왕실의 주권을 선포하기 위해 HMS 브리토마트호를 파견했다.[3] HMS 브리토마트호는 1840년 8월 16일 아카로아에 도착했으나, 선장의 항해 일지에는 8월 11일 도착으로 기록되어 있다. 스탠리 선장은 영국 국기를 게양하고 점령된 정착지마다 법정을 열어, 곧 도착할 프랑스 정착민들에게 해당 지역이 영국의 통치하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3][4] 프랑스 정착선 콩트 드 파리호는 이틀 뒤인 8월 18일에 도착했다.[5] 마을 동쪽 끝에는 영국군의 도착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수년 전 아카로아에 정착했던 제임스 로빈슨 클러(James Robinson Clough, 지미 로빈슨으로도 알려짐)는 1840년 국기 게양식에서 오언 스탠리(Owen Stanley) 선장의 통역을 맡았다. 그는 1843년 애번강/오타카로(Avon River / Ōtākaro)를 거슬러 올라간 최초의 유럽인이기도 하다. 클러의 후손들은 오늘날에도 뱅크스 반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국 이민자들은 아카로아와 게르만 만(타카마투아(Takamatua))에 정착했으며, 많은 독일 농부들도 이곳에 자리 잡아 유제품, 양, 콕스풋 농장을 운영했다. 현재 아카로아 박물관에는 초기 농업 공동체와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1850년 4월, 잉글랜드에서 온 배 ''모나크''(Monarch)호가 수리를 위해 아카로아 항구에 들어왔다. 원래 오클랜드로 향하던 이 배의 승객 중 40명이 아카로아에 남기로 결정했다.[9] 영국 이민자들은 주로 아카로아 남쪽 끝에 정착했고, 기존의 프랑스 정착민들은 작은 만을 사이에 두고 북쪽 끝에 거주했다.[10]

시간이 흐르면서 아카로아는 점차 영국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1854년에는 "전적으로 영국의 작은 해변 마을과 매우 흡사하다"고 묘사될 정도였다. 1878년 아카로아 인구 642명 중 프랑스 출신 거주자는 10명에 불과했으며, 마을 경계 밖에도 27명의 프랑스 출신 주민이 더 있었다.[9]

아카로아의 상업도 발전하여, 1883년에는 건축업자 5명, 제과업자 4명, 잡화점 8개, 우유 판매업자 5명, 구두 장인 4명, 은행가 2명, 모자 장식업자 5명, 대장장이 5명이 활동했다.[9]

달리 부두(Daly's wharf)는 1863년에서 1865년 사이에 건설되었고 1914년에 개조되었다.[11] 뤼 발귀에리(Rue Balguerie) 끝에 위치한 이 부두는 연안선과 어선이 이용했으며, 1932년에는 부두 끝에 팔각형 건물과 탑 모양의 지붕이 추가되었다.[12]

1903년 아카로아는 "뉴질랜드인뿐만 아니라 호주와 구세계 방문객들에게도 오랫동안 인기 있는 휴양지"로 묘사되었다. 당시 마을은 대부분 해안가에 집중되어 있었고 언덕에는 집이 드물었다. 1901년 아카로아의 인구는 559명, 주택 수는 124채였다.[9]

아카로아의 주요 부두는 1887년에 건설되었다.[13] 2022년, 사용 수명이 다해가는 이 부두를 현재 위치에 재건축하는 계획이 세워졌다.[14] 재건축에는 1910.0000000000002만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며, 2025년 6월 30일까지 완료될 예정이다.[15]

성 베드로 성공회(Anglican) 교회는 1863년에 고딕 부흥(Gothic revival) 양식의 목조 건물로 완공되었다. 이는 1852년에 세워진 이전 성공회 교회를 대체한 것이다. 1869년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추가되었고, 1877년에는 벤저민 마운트포트가 트랜셉트(transepts)와 성찬례실(chancel)을 설계하여 증축했다.[36][37]

2. 4.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

1850년 4월, 잉글랜드에서 온 ''모나크''(Monarch)호가 수리를 위해 아카로아 항구에 들어왔다. 배에 타고 있던 승객 중 40명이 오클랜드로 가는 대신 아카로아에 남기로 결정했다.[9] 영국 이민자들은 아카로아 남쪽 끝에 정착했으며, 기존의 프랑스 정착민들은 작은 만을 사이에 두고 북쪽 끝에 거주했다.[10] 이로 인해 1854년 아카로아는 "전적으로 영국의 작은 해변 마을과 매우 흡사하다"고 묘사될 정도로 영국적인 색채가 강해졌다.[9] 반면 프랑스계 주민의 수는 점차 줄어들어, 1878년 아카로아 인구 642명 중 프랑스 출신은 10명에 불과했고, 마을 외곽에 27명이 더 거주하는 정도였다.[9]

독일 출신 농부들도 게르만 만 등에 정착하여 유제품, 양, 콕스풋 농장을 운영하며 지역 농업 발전에 기여했다. 초기 농업 공동체의 생활 모습은 현재 아카로아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마을의 경제 활동도 활발해졌다. 1883년에는 건축업자 5명, 제과업자 4명, 잡화점 8개, 우유 판매업자 5명, 구두 장인 4명, 은행가 2명, 모자 장식업자 5명, 대장장이 5명이 활동하고 있었다.[9] 항만 시설도 확충되어, 달리 부두(Daly's wharf)가 1863년에서 1865년 사이에 건설되었고[11], 1887년에는 아카로아의 주요 부두가 건설되었다.[13] 달리 부두는 뤼 발귀에리(Rue Balguerie) 끝에 위치하며 연안선과 어선이 이용했고, 1914년에 개조되었다.[11] 부두 끝에는 1932년까지 팔각형 건물과 탑 모양 지붕이 있었다.[12]

20세기 초 아카로아는 뉴질랜드인뿐만 아니라 호주와 유럽 방문객들에게도 인기 있는 휴양지로 자리 잡았다. 1903년 기록에 따르면 당시 아카로아의 모습은 대부분 해안가에 집중되어 있었고, 언덕에는 집이 몇 채만 있는 정도였다. 1901년 아카로아의 인구는 559명이었고, 총 124채의 주택이 있었다.[9]

2. 5. 21세기: 크라이스트처치와의 합병

2006년, 아카로아의 행정을 담당하던 뱅크스반도 지역이 크라이스트처치 시와 합병되었다. 이로 인해 아카로아는 현재 크라이스트처치 시의 일부가 되었다.

3. 지리 및 기후

아카로아의 기후는 온화한 해양성 기후의 특징을 보인다. 아래는 1991년부터 2020년까지의 평균값과 1979년부터 현재까지의 극값을 바탕으로 한 아카로아의 기후 자료이다.

아카로아의 기후 (1991년~2020년 평균, 극값 1979년~현재)[41][42]
1월2월3월4월5월6월7월8월9월10월11월12월
최고 기온 기록 (°C)38.035.535.530.027.023.021.623.026.832.031.135.0
평균 최고 기온 (°C)22.722.420.617.615.312.612.013.215.417.519.221.3
일평균 기온 (°C)17.517.215.613.010.88.37.68.710.612.314.016.2
평균 최저 기온 (°C)12.412.110.78.46.24.03.34.25.67.18.811.1
최저 기온 기록 (°C)4.54.40.50.0-5.0-5.5-3.0-3.5-3.0-2.31.02.5
평균 강수량 (mm)46.955.186.472.074.1107.2159.5124.766.679.870.767.5
평균 월간 일조시간 (시간)244.8210.9189.3152.6129.696.0115.2140.6182.8219.7237.2242.2


4. 인구

뉴질랜드 통계청에 의해 농촌 지역으로 분류되며, 면적은 2.03km2이다.[16] 2001년 기준 인구는 576명이었으며, 여름 휴가철에는 단기 체류자를 포함하여 3,000명에서 7,000명 규모로 인구가 증가한다. 2006년 아카로아의 행정을 담당하던 뱅크스반도 지역이 크라이스트처치 시와 합병되어 현재는 크라이스트처치 시의 일부이다.

아카로아 인구 변화[17]
연도인구
2006591
2013645
2018756



2018년 인구 조사 기준 아카로아의 인구는 756명으로, 2013년 인구 조사 이후 111명(17.2%), 2006년 인구 조사 이후 165명(27.9%) 증가했다. 인구 밀도는 약 372명/km2이다.

2018년 조사 기준 가구 수는 288가구이며, 성별로는 남성 375명, 여성 378명으로 여성 1명당 남성 0.99명의 성비를 보인다. 중위 연령은 55.3세로 전국 평균 37.4세보다 훨씬 높다. 연령대별 인구 분포는 15세 미만 63명(8.3%), 15~29세 108명(14.3%), 30~64세 339명(44.8%), 65세 이상 240명(31.7%)이다.

민족 구성은 유럽계/파케하가 82.5%로 가장 많고, 아시아계 11.9%, 마오리 6.0%, 파시피카 0.8%, 기타 민족 2.8% 순이다. 여러 민족으로 응답한 경우도 포함된 수치이다. 해외 출생자 비율은 34.9%로 전국 평균 27.1%보다 높다.

종교에 관한 질문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응답자 중에서는 무종교가 44.4%로 가장 많았고, 기독교 34.9%, 이슬람교 4.8%, 기타 종교 4.0%, 힌두교 1.6%, 불교 1.6%, 마오리 종교 0.4% 순으로 나타났다.

15세 이상 인구 중 학사 학위 이상 소지자는 126명(18.2%)이며, 정규 학력이 없는 사람은 87명(12.6%)이다. 중위 소득은 $31,800으로 전국 평균($31,800)과 같다. 연 소득 $70,000 이상인 사람은 81명(11.7%)으로 전국 평균(17.2%)보다 낮다. 15세 이상 인구의 고용 상태는 정규직 327명(47.2%), 파트타임 111명(16.0%), 실업자 9명(1.3%)이다.[17]

5. 관광

아카로아는 태평양에 접한 뱅크스반도에 위치한 인기 있는 휴양 도시이다. 풍부한 해양 생태계를 바탕으로 다양한 생태관광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며,[18][19] 특히 헥토르 돌고래 서식지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2011년 크라이스트처치 지진 이후 한동안 크루즈 선박의 주요 기항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20][21][22]

5. 1. 주요 관광 명소

태평양에 접하는 뱅크스반도에 위치한 아카로아는 다양한 해양 생물이 서식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는 돌고래 관람 투어, 헥토르 돌고래와 함께 헤엄치는 "돌핀 스윔", 흰날개펭귄 관찰 투어 등 다채로운 생태관광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아카로아는 인기 있는 휴양 도시이며, 항구와 항구 입구의 아카로아 해양 보호구역에서는 많은 헥터 돌고래를 관찰할 수 있다. 특히 '돌고래와 함께 수영하기' 보트 투어는 주요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18][19]

2011년 크라이스트처치 지진으로 리틀턴 항구가 큰 피해를 입으면서 아카로아는 크루즈 선박의 중요한 기항지로 부상했다.

아카로아 크루즈 선박 방문 현황[20][21][22]
기간방문 척수비고
2009년 ~ 2010년 여름7척
2019년 ~ 2020년90척2011년 크라이스트처치 지진 이후 증가
2022년19척리틀턴 크루즈 부두 재개장 영향


6. 교통

크라이스트처치에서 75번 국도(State Highway 75)를 통해 약 82km, 자동차로 9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어 휴양 및 피서지로 인기가 많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출발하는 다양한 투어 버스도 운행된다. 마을 규모가 작아 중심부는 걸어서 이동하기에 충분하다.

7. 유명 인물


  • 제시 버클랜드 (1878–1939), 사진가[43]
  • 존 버클랜드 (1844–1909), 정치인[44][45]
  • 밥 파커 (1953년생), 뱅크스 반도 전 시장, 전 거주민[46]
  • 윌리엄 페닝턴 (1832–1899), 제재소업자, 건축업자, 아카로아 시장[47]
  • 윌리엄 페닝턴 (1890–1982), 교장, 교육자[48]
  • 휴 윌슨 (1945년생), 아카로아 언덕 너머 히네와이 보호구역에 거주하는 식물학자[46]
  • 프랭크 워슬리 (1872–1943), 1914년-1916년 어니스트 섀클턴의 대영 제국 남극 횡단 탐험에 참여했던 선원이자 탐험가, ''인듀어런스''호의 선장[49]

참조

[1] 웹사이트 Captain Stewart and the Elizabeth https://nzhistory.go[...] Ministry for Culture and Heritage 2020-03-07
[2] 웹사이트 French colonists in Akaroa, South Island http://history-nz.or[...] 2018-05-23
[3] 웹사이트 The Mission of the ''Britomart'' at Akaroa, in August, 1840 http://christchurchc[...] The New Zealand Institute 2018-05-23
[4] 서적 The Newest Country in the World - A History of New Zealand in the Decade of the Treaty Penguin 2007
[5] 서적 The Penguin History of New Zealand Penguin
[6] 서적 The Penguin History of New Zealand Penguin
[7] 웹사이트 SettlementatAkaroa http://freepages.gen[...]
[8] 서적 Place Names of New Zealand Raupo
[9] 웹사이트 Akaroa Historical Overview https://ccc.govt.nz/[...] 2023-06-02
[10] 서적 Akaroa John McIndoe
[11] 웹사이트 DALY'S WHARF http://www.akaroaciv[...] 2023-05-22
[12] 웹사이트 DALY'S WHARF, SHELTER AND SETTING 1A RUE BALGUERIE, AKAROA https://districtplan[...] 2015-01-15
[13] 웹사이트 Akaroa Wharf https://ccc.govt.nz/[...] 2023-05-22
[14] 웹사이트 $19.1 million Akaroa Wharf plan progresses https://www.odt.co.n[...] 2022-05-13
[15] 웹사이트 Akaroa Wharf https://ccc.govt.nz/[...] 2023-05-22
[16] 웹사이트 ArcGIS Web Application https://statsnz.maps[...] 2021-10-15
[17] 인구조사 Akaroa (333500)
[18] 뉴스 Swimming with dolphins in Akaroa tops NZ must-dos https://www.odt.co.n[...] ODT 2017-07-11
[19] 뉴스 Ban on new dolphin tourism ventures in Akaroa Harbour http://www.stuff.co.[...] Stuff 2017-07-11
[20] 웹사이트 From 90 to 19: Drop in number of cruise ships returning to Banks Peninsula this summer https://www.rnz.co.n[...] 2022-05-07
[21] 웹사이트 Cruise ship impact on Akaroa needs more research report finds https://www.rnz.co.n[...] 2019-10-13
[22] 웹사이트 Fewer Hector's dolphins in harbour after cruise ship activity ramped up, study finds https://www.stuff.co[...] 2022-10-21
[23] 웹사이트 Brief School History http://akaroa.school[...] Akaroa Area School 2019-08-25
[24] TKI #TKI type is unknown, needs further information.
[25] 웹사이트 Akaroa Museum {{!}} Christchurch NZ https://christchurch[...] 2019-12-02
[26] 웹사이트 Organisation details {{!}} Museums Aotearoa https://www.museumsa[...] 2023-06-09
[27] 웹사이트 Home : Akaroa Museum https://akaroamuseum[...] 2023-06-09
[28] 웹사이트 Tracing a century of photography on Banks Peninsula https://newsline.ccc[...] 2023-04-18
[29] 웹사이트 Akaroa Lighthouse https://www.heritage[...] 2023-05-23
[30] 웹사이트 AKAROA LIGHTHOUSE http://www.akaroaciv[...] 2023-05-23
[31] 웹사이트 Akaroa Head https://www.doc.govt[...] 2023-05-23
[32] 웹사이트 Akaroa Lighthouse Preservation Society » Akaroa & The Bays https://www.akaroa.c[...] 2023-05-23
[33] 논문 Onuku Church, The Kaik, Akaroa New Zealand Historic Places Trust 1988-06-00
[34] 웹사이트 TE WHARE KARAKIA O ŌNUKU AND SETTING – 392 ONUKU ROAD, AKAROA https://districtplan[...] 2023-05-21
[35] 웹사이트 ST PATRICK'S ROMAN CATHOLIC CHURCH http://www.akaroaciv[...] 2023-05-21
[36] 웹사이트 ST PETER'S ANGLICAN CHURCH http://www.akaroaciv[...] 2023-05-21
[37] 웹사이트 St Peter's Church (Anglican) https://www.heritage[...] 2023-05-21
[38] 웹사이트 TRINITY PRESBYTERIAN CHURCH http://www.akaroaciv[...] 2023-05-21
[39] 웹사이트 Trinity Church (Presbyterian) https://www.heritage[...] 2023-05-21
[40] 웹사이트 Where our water comes from https://www.ccc.govt[...] 2024-04-27
[41] 웹사이트 CliFlo -The National Climate Database (Agent numbers: 4951, 36593) https://cliflo.niwa.[...] NIWA 2024-05-20
[42] 웹사이트 Climate and Average Weather Year Round in Christchurch https://weatherspark[...] Weather Spark 2024-12-10
[43] DNZB Jessie Lillian Buckland 2017-04-23
[44] 웹사이트 Buckland, Jessie Lillian https://teara.govt.n[...] 2021-12-13
[45] 웹사이트 Buckland, Jessie Lillian, 1878–1939 https://natlib.govt.[...] 2021-12-13
[46] 뉴스 Kia ora: Akaroa http://www.nzherald.[...] 2014-02-18
[47] Macdonald Dictionary William Penlington 2022-10-05
[48] DNZB William Arthur Greener Penlington 2011-12-10
[49] DNZB Worsley, Frank Arthur 2014-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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