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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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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드레이 2세는 야로슬라프 2세 대공의 아들로, 1200년부터 1205년까지, 1207년부터 1210년까지 노브고로드 공작을 역임했다. 1240년 튜턴 기사단의 침공으로 알렉산드르 넵스키를 대신해 노브고로드로 파견되었고, 1241년 프스코프를 탈환하고 페이푸스 호 전투에 참여했다. 1249년부터 1252년까지 블라디미르 대공을 지냈으나, 몽골에 저항하여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이후 수즈달 공작으로 돌아와 니즈니노브고로드 등을 영토로 받았으며, 1250년 또는 1251년 갈리치아의 다니엘의 딸 우스티니아와 결혼하여 바실리, 콘스탄틴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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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2세
기본 정보
블라디미르의 안드레이 2세
블라디미르의 안드레이 2세
출생대략 1222년
사망1264년
배우자우스티냐
자녀유리 안드레예비치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바실리 안드레예비치
아버지야로슬라프 2세
어머니로스티슬라바 미스티슬라보브나
공작
블라디미르의 대공1249년 ~ 1252년
키예프의 대공1248년 ~ 1249년
인물 정보
러시아어 표기안드레이 야로슬라비치

2. 생애

야로슬라프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200년부터 1205년까지, 1207년부터 1210년까지 노브고로드 공작을 역임했다.

1240년 튜턴 기사단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침공하자 형 알렉산드르 넵스키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으며, 1242년 페이푸스 호 전투에 참전했다. 1249년부터 1252년까지 블라디미르 대공을 역임했다.[1]

2. 1. 초기 생애 및 군사 활동 (1240년대)

야로슬라프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240년 튜턴 기사단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침공하자, 노브고로드인들은 그의 형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를 추방하고 야로슬라프 2세에게 다른 지휘관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안드레이가 알렉산드르를 대신하여 파견되었다.

1241년, 안드레이는 수즈달 군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르의 군대와 합류하여 프스코프를 탈환하고 에스토니아(추드) 지역을 습격했다. 1242년 페이푸스 호 전투(얼음 전투)에도 참전했다.

2. 2. 블라디미르 대공 (1249년 ~ 1252년)

야로슬라프 2세 대공의 아들 안드레이 2세는 1249년부터 1252년까지 블라디미르 대공을 역임했다.[1]

루스 연대기에는 안드레이가 블라디미르의 대공이 된 시기와 방법에 대한 여러 기록이 전해진다. 한 기록에 따르면, 1247년 아버지 야로슬라프 프세볼로도비치가 사망하자 안드레이와 알렉산드르몽골카라코룸으로 가서 귀위크 칸으로부터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임명받는 ''자르릭''을 받았다.[1] 2년 후(1249년) 블라디미르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수도가 어린 동생 미하일 호로브리트에게 점령당한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몇 달 후 리투아니아와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안드레이가 1248년에 숙부 스뱌토슬라프 프세볼로도비치로부터 블라디미르의 왕좌를 빼앗았다고 한다. 1년 후, 스뱌토슬라프는 블라디미르에서 쫓겨난 것에 분개하여 왕좌를 되찾기 위해 호르데로 갔지만, 그의 여정은 알려지지 않았고, 1253년 2월 블라디미르를 되찾지 못한 채 사망했다.

1250년에서 1251년 겨울, 블라디미르의 왕좌를 차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안드레이는 갈리치-볼히니아의 다니일의 딸 우스티니아와 결혼했다. 이는 1245년에 바투 칸에게 복종하여 사라이에서 좋은 대접을 받았던 안드레이가[1] 1251년에는 반 몽골 연합을 형성하려 했던 장인의 의도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블라디미르의 안드레이와의 결혼 동맹 외에도, 최근 과부가 된 다니일 자신도 같은 해 리투아니아 왕 민도우가스의 조카와 결혼했다. 그러나 귀위크 칸이 1251년에 사망하고 안드레이가 사라이로 돌아가 새로운 몽케 칸의 이름으로 바투로부터 블라디미르 대공으로서의 자르릭 갱신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을 때, 안드레이는 그의 형제 알렉산드르 넵스키가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거부했다. 금장 호르데는 그의 거부를 몽골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했고, 바투 칸의 아들 사르타크는 블라디미르에 대한 징벌 원정을 명령하는 한편, 또 다른 징벌 원정이 갈리치-볼히니아의 다니일을 상대로 파견되었다. 안드레이는 전투에서 패배하여(페레슬라블 근처) 노브고로드를 거쳐 스웨덴으로 도망쳤다. 그의 형제 안드레이가 추방되자,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몽케 칸에게 복종했고, 금장 호르데에 대한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 몽골로부터 블라디미르의 왕좌를 받았다(1252).

현대 학자들은 초기 자료에 묘사된 이 사건들을 안드레이와 알렉산드르 형제 간의 경쟁으로 해석하여 안드레이는 다니일과 반 몽골 동맹을 형성하려 했고 알렉산드르는 '자신의 백성을 상대로 몽골과 협력'하는 것을 기뻐했다고 평가한다.

2. 3. 수즈달 공작 및 사망 (1255/6년 ~ 1264년)

1255년 안드레이는 망명에서 돌아와 사라이로 가서 이전의 배신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1] 그는 수즈달을 받았다.[1] 블라디미르로 돌아온 그는 알렉산드르로부터 볼가강 유역의 니즈니노브고로드와 고로데츠를 포함한 블라디미르의 최동단 영토를 받았다. 1263년 알렉산드르가 죽은 후, 안드레이는 블라디미르를 자신의 영토에 추가하려 했지만, 그의 동생인 트베르의 야로슬라프 3세에 의해 좌절되었다.

3. 가족

안드레이 2세는 1250년 또는 1251년에 갈리치아의 다니엘의 딸 우스티니아와 결혼하여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

이름비고
바실리
콘스탄틴수즈달의 드미트리의 아버지이자, 차르 바실리 4세의 8대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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