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카라코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카라코룸은 13세기 몽골 제국의 수도로, 칭기즈 칸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오고타이 칸 시대에 궁궐과 성벽이 축조되었다. 몽골 제국 시대에는 세계 정치의 중심지였으나, 쿠빌라이 칸이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긴 후에는 몽골 본토의 중심 도시로 남았다. 이후 북원의 수도가 되었으나 16세기 말 에르데네 조 사원 건설을 위한 자재 조달로 쇠퇴했다. 19세기 말 유적 발견 이후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현재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오르혼 계곡의 문화적 경관 구성 자산이다. 2023년 몽골 대통령은 카라코룸 재건 계획을 발표했으며, 가상 복원 프로젝트도 진행되었다.

2. 역사

카라코룸은 흉노, 돌궐, 위구르 제국의 중심지였다. 특히 돌궐에게 항가이 산맥은 권력의 중심지인 오투켄이 있던 곳이었고, 위구르의 수도 카라발가숨은 카라코룸이 세워질 곳에서 북서쪽으로 27km 떨어진 오르혼 강 하류에 있었다. 이 지역은 몽골에서 가장 오래된 농업 지역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

1218년에서 1219년 사이, 칭기즈칸은 카라코룸에서 호라즘 샤 왕조 정벌을 위한 군대를 소집했다.[2] 그러나 도시 건설은 1220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35년까지 카라코룸은 유르트 마을 정도였으나, 오고타이 칸이 금나라 정복 후 성벽과 궁궐을 건설하면서 몽골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쿠빌라이 칸이 수도를 대도(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로 옮긴 후에도 카라코룸은 몽골 본토의 중심 도시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명나라 건국 후 주원장의 북벌로 몽골족이 북쪽으로 쫓겨난 뒤에는 북원의 수도가 되었다.

16세기 말, 티베트 불교 사원 에르데네 조 건설 자재 조달로 카라코룸은 황폐해졌다. 이후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19세기 말 러시아 학자 니콜라이 야드린체프가 유적을 발견했다. 1933년부터 1934년까지 소비에트 연방과 몽골 인민 공화국의 공동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고,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소련 고고학자 세르게이 키세료프 등이 몽골과 공동으로 궁전의 존재를 확인하는 조사를 진행했다.[17] 1976년부터 1985년까지 몽골 과학 아카데미 역사 연구소가 조사를 실시했고, 몽골 민주화 이후 1995년부터 일본, 1999년부터 독일 등이 몽골과 공동 조사를 이어오고 있다.[18]

2. 1. 몽골 제국 시대

오고타이 칸은 금나라를 정복한 다음 해인 1235년에 '투멘 아말간 오르드'(만안궁(萬安宮)) 건설을 명령했고, 1년 만에 완공되었다. 『원사』(元史) 태종(太宗) 오고타이 칸의 기록에는 "7년(1236년), 푸른 양의 해에 만안궁(萬安宮)이 합린(和林, 카라코룸)에 세워졌다"라고 적혀 있다.[4][5] 칭기즈칸의 9명의 장관 중 한 명인 엘류 추차이(1190~1244)는 투멘 아말간 오르드 상량식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잘 맞춰진 용마루와 돌 기초, 웅장한 궁궐이 병렬로 세워졌네, 주상과 관리들의 종과 북소리가 즐겁게 울려 퍼질 때, 저무는 해는 산봉우리에서 전쟁의 말들을 부른다."

카라코룸의 은나무. 18세기 네덜란드 상상화.


오고타이 칸과 그의 후계자들 치하에서 카라코룸은 세계 정치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다. 몽케 칸은 궁전을 확장하고, 거대한 사원을 완공했다.[3] 그는 파리 출신의 금세공인 기욤 부시에[6][7][8]에게 도시 중심부를 위한 카라코룸의 은나무를 디자인하도록 했다.[9] 은과 기타 귀금속으로 조각된 거대한 나무가 안뜰 한가운데에서 솟아올라 궁전 위로 우뚝 섰고, 나무 가지는 건물 안으로 뻗어 있었다. 가지에는 은으로 된 과일이 달려 있었고, 줄기에는 네 마리의 금뱀이 엮여 있었으며, 나무 꼭대기에는 나팔을 부는 천사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칸의 즐거움을 위한 자동 인형들이었다. 칸이 손님들을 위해 술을 가져오라고 하면, 기계 천사는 나팔을 입술에 대고 나팔을 불었고, 그러자 뱀의 입에서 알코올 음료 분수가 솟아나 나무 기둥 아래에 놓인 큰 은 쟁반에 쏟아졌다.[10]

빌럼 루브룩은 플랑드르 출신의 프란체스코회 선교사이자 교황 특사로 1254년 카라코룸에 도착했다. 그는 카라코룸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파리 근교의 생드니 마을과 비교하며 다소 불리하게 묘사했고, 생드니 대수도원이 몽골 칸의 궁궐보다 열 배나 더 웅장하다고 여겼다. 반면에 그는 카라코룸을 매우 국제적이고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곳으로 묘사했으며, 몽케 칸 궁궐의 일부였던 은나무가 카라코룸의 상징이 되었다고 기술했다.[11] 그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네 방향을 향한 네 개의 문, 고정된 집들이 있는 두 개의 구역(하나는 사라센(Saracen)을 위한 곳, 다른 하나는 카타이(Cathay)를 위한 곳), 12개의 이교도 사원, 두 개의 모스크, 그리고 네스토리우스교(Nestorianism) 교회가 있다고 묘사했다.[3]

칭기즈칸이 대서정의 보급 기지로 이곳에 건설하였고, 2대 카안인 오고타이가 1235년에 궁전과 성벽을 쌓고 몽골 제국의 수도로 정하였다. 오고타이 시대에 점치(역전 제도)가 정비되면서 몽골 제국 각지와의 유대가 강화되었다.

2. 2. 원나라 시대

1260년 쿠빌라이 칸이 동생 아릭 보케와의 몽골 제국 칸위 계승 다툼에서 수도를 상도로 옮겼고, 이후 칸발릭(대도, 오늘날의 베이징)으로 다시 천도하면서, 카라코룸은 1271년 원나라의 변방 행정 중심지로 격하되었다. 톨루이 왕위 계승 전쟁과 카이두와의 전쟁은 도시에 큰 타격을 주었다. 1260년 쿠빌라이는 도시의 곡물 공급을 차단했고, 1277년 카이두가 카라코룸을 점령했으나 이듬해 원나라 군대와 바얀에게 격퇴되었다.[12] 1298~99년에는 울루스 부카 왕자가 시장과 곡물 창고를 약탈하기도 했다. 그러나 14세기 전반기에 카라코룸은 다시 번영을 맞이했다. 1299년 도시가 동쪽으로 확장되었고, 1311년과 1342년부터 1346년까지 스투파 사원이 재건되었다.[3]

2. 3. 북원 시대와 쇠퇴

1368년 원나라 멸망 후, 카라코룸은 1370년 빌리그트 칸의 거주지가 되었다. 1372년 리원중(李文忠) 장군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카라코룸을 점령하여 도시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1380년 명나라 군대는 다시 카라코룸을 점령하여 파괴했다.[3] 사간 세첸의 『원조비사』에 따르면, 1415년 쿠릴타이에서 카라코룸을 재건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러한 시도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16세기 초 바투 멩케 다얀 칸이 다시 수도로 삼았을 때 카라코룸에는 사람이 살았다. 그 후 수년 동안 카라코룸은 오이라트와 칭기스 칸의 후예 사이에서 여러 번 손바뀜이 있었고, 결국 영구적으로 버려졌다.[3]

16세기 말, 티베트 불교 사원 에르데네 조 건설을 위한 자재 조달 때문에 카라코룸은 황폐해졌다.[18]

2. 4. 발굴 및 연구

19세기 말 러시아 학자 니콜라이 야드린체프가 카라코룸 유적을 발견하고 오르혼 문자를 발견하여 그 위치를 확인했다.[13] 빌헬름 라들로프가 야드린체프의 결론을 확인했다.

1933년-1934년 드미트리 부키니치의 지휘 아래 최초의 발굴이 이루어졌다.[13] 1948년-1949년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키셀료프가 이끄는 소련-몽골 공동 발굴팀은 오고타이 칸 궁전 유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했으며,[13] 1953년 키세료프는 이 업적으로 소련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2000년-2004년 독일-몽골 공동 발굴팀은 오고타이 궁전이 아닌 거대한 스투파 사원의 유적임을 밝혀냈다.[13]

발굴 결과, 포장 도로, 벽돌 건물, 진흙 벽돌 건물, 바닥 난방 시스템, 온돌, 구리, 금, 은, 철 가공 흔적, 유리, 보석, 뼈, 자작나무 껍질,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도자기와 동전, 네 개의 가마 등이 발견되었다.[14][15]

1976년부터 1985년까지 몽골 과학 아카데미 역사 연구소가 조사를 실시하였고, 몽골의 민주화 이후 1995년부터는 일본, 1999년부터는 독일 등이 몽골과의 공동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18]

3. 주요 유적 및 건축물

몽케 칸은 카라코룸의 궁전을 확장하고 거대한 사원을 완공했다.[3] 그는 파리 출신의 금세공인 기욤 부시에[6][7][8]에게 도시 중심부에 설치할 카라코룸의 은나무를 디자인하도록 했다.[9] 은과 기타 귀금속으로 만든 이 거대한 나무는 궁전 안뜰 한가운데에 솟아 있었고, 가지는 건물 안으로 뻗어 있었다. 가지에는 은으로 된 과일이 달려 있었고, 줄기에는 네 마리의 금뱀이 엮여 있었으며, 나무 꼭대기에는 나팔을 부는 천사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칸의 즐거움을 위한 자동 인형이었다. 칸이 손님에게 술을 대접하라고 하면, 기계 천사는 나팔을 불었고, 뱀의 입에서는 술이 뿜어져 나와 큰 은 쟁반에 쏟아졌다.[10]

2020년 가상 카라코룸(Virtual Kharakhorum) 프로젝트는 최신 고고학 연구를 바탕으로 도시를 360도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보여주었다.

3. 1. 만안궁 (투멘 아말간 오르드)

오고타이 칸은 금나라를 정복한 다음 해인 1235년에 '투멘 아말간 오르드'(만안궁(萬安宮), 중국어) 건설을 명령했고, 1년 만에 완공되었다. 『원사』(元史) 태종(太宗) 오고타이 칸의 기록에는 "7년(1236년), 푸른 양의 해에 만안궁(萬安宮)이 합린(和林, 카라코룸)에 세워졌다"라고 적혀 있다.[4] 칭기즈 칸의 9명의 장관 중 한 명인 엘류 추차이(1190~1244)는 투멘 아말간 오르드 상량식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잘 맞춰진 용마루와 돌 기초, 웅장한 궁궐이 병렬로 세워졌네, 주상과 관리들의 종과 북소리가 즐겁게 울려 퍼질 때, 저무는 해는 산봉우리에서 전쟁의 말들을 부른다." 몽골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Tsogtslon tavih nuruu chuluun tulguur, Zeregtsen zogsoh surleg asriig bosgovoi, Ezen tushmediin honh hengereg ayataihan hanginan duursahad, Echih naran uuliin tolgoigoigoos dainii agtadiig ugtnam''.[5]

투멘 아므갈란 오르드(만 가지 평화의 궁전)는 독자적인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남쪽 끝에 위치했다. 이전에는 에르데네주 사원의 북서쪽에 있는 대형 건물이 칸의 궁전으로 여겨졌으나, 후속 연구에 따르면 그 건물은 실제로 높이 90m의 정자였다고 한다. 현재 칸의 궁전은 에르데네주 사원이 있던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궁전의 북쪽 벽은 도시와 궁전을 분리했으며, 위성 이미지에서 그 윤곽을 확인할 수 있다. 사원의 현재 성벽 아래에서 13세기 성벽이 발굴되었다.

빌럼 루브룩은 "몽케는 카라코룸에 도시 성벽 옆에 위치한, 우리 수도원의 수도원장 관사를 둘러싼 것과 같은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궁전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기록했다. 13세기 성벽 아래에서는 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더 오래된 지층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에르데네주 사원 건립과 관련된 몽골 연대기에 언급된 타카이 발가스(타카이 시)일 것이라는 이론이 제기되었다. 『원사』와 『1342년 카라코룸 중몽고 비문』에는 징기스칸이 1220년에 카라코룸에 수도를 건설했고, 오고타이 칸이 1236년에 도시 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쌌다고 명시되어 있다. 징기스칸 시대에 이미 소규모의 오래된 성벽의 일부 잔해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의 궁전은 만 가지 평화의 궁전이 있던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빌헬름 루브룩은 카라코룸의 칸 궁전 내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두 줄의 기둥 너머에 중앙 통로와 양쪽이 있는 교회와 같고, 남쪽에 세 개의 문이 있으며, 안쪽 중앙 문 너머에는 나무가 서 있고, 칸은 북쪽 높은 곳에 앉아 모두에게 보일 수 있도록 하며, 두 줄의 계단이 그에게 이어진다. 한쪽 계단은 그의 술잔을 나르는 사람이 올라가는 계단이고, 다른 쪽 계단은 그가 내려오는 계단이다. 나무와 그에게 이르는 계단 사이의 중앙 공간은 비어 있다. 그곳에는 그의 술잔을 나르는 사람과 선물을 가져온 사절들이 서 있으며, 그는 거기서 신처럼 앉아 있다. 그의 오른쪽, 즉 서쪽에는 남자들이, 왼쪽에는 여자들이 있다." 이는 빌헬름 루브룩이 별도로 언급한 몽골 게르의 내부 배치와 일치한다.[11]

카라코룸에는 상설 궁전 외에도 칸의 이동식 궁전이 있었는데, 이 궁전은 도시 주변을 정기적으로 이동하며, 정지할 때는 고리 모양(후리예 또는 원형 울타리)으로 정착했다.

빌헬름 루브룩은 카라코룸 궁전 안에 "그의 식량과 보물이 저장된 헛간만큼 긴 건물들이 많다"라고 말했다. 카라코룸에 거주했던 아타말릭 주바이니는 『세계 정복자의 역사』에서 오고타이 칸이 이 보물 건물의 개방된 마당으로 사람들을 초대하여 정해진 시간 안에 가져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져가도록 했으며, 칸이 이 보물에서 도시 빈민에게 자주 기부했다고 전한다. 궁전은 흉노 시대부터 그 지역에서 일반적이었던 중국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예률추재의 시에 언급된 것처럼 세 개의 주요 궁전 건물이 평행하게 나란히 서 있었다. 에르데네주 사원의 세 주요 건물도 평행하며 이전 궁전처럼 높은 플랫폼 위에 있다. 1342년 중몽고 비문의 조각들이 에르데네주 사원 벽 곳곳에 박혀 있는 것이 발견되어, 사원이 주로 카라코룸의 돌과 벽돌을 사용하여 건설되었다는 증거를 뒷받침한다. 주요 궁전 내부의 주요 특징은 파리의 윌리엄이 만든 은나무였다.

3. 2. 카라코룸의 은나무

몽케 칸은 궁전을 확장하고, 거대한 사원을 완공했다.[3] 그는 파리 출신의 금세공인 기욤 부시에[6][7][8]에게 도시 중심부에 설치할 카라코룸의 은나무를 디자인하도록 했다.[9] 은과 기타 귀금속으로 만든 거대한 나무가 안뜰 한가운데에서 솟아올라 궁전 위로 우뚝 섰고, 나무 가지는 건물 안으로 뻗어 있었다. 가지에는 은으로 된 과일이 달려 있었고, 줄기에는 네 마리의 금뱀이 엮여 있었으며, 나무 꼭대기에는 나팔을 부는 천사가 놓여 있었는데, 이 모두는 칸의 즐거움을 위한 자동 인형이었다. 칸이 손님들을 위해 술을 가져오라고 하면, 기계 천사는 나팔을 입술에 대고 나팔을 불었고, 그러자 뱀의 입에서 알코올 음료 분수가 솟아나 나무 기둥 아래에 놓인 큰 은 쟁반에 쏟아졌다.[10]

4. 현대의 카라코룸

카라코룸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오르혼 계곡의 문화 경관"의 일부이다.

4. 1. 관광

할호린(카라코룸)은 온천 휴양지로 알려져 있으며, 에르데네 조 사원, 오르혼 계곡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전 스모 선수 아사쇼류 아키노리의 친척이 운영하는 리조트 시설도 있다.

4. 2. 재건 계획

몽골 대통령 후렐수흐는 2023년 역사적인 수도를 재건할 계획을 발표했다.[16]

4. 3. 가상 복원

2020년 카라코룸 건도 800주년을 기념하여 "가상 카라코룸" 프로젝트가 공개되었다.[19] 최신 고고학 연구를 바탕으로 360도 형식으로 도시를 재구성하여 가상 체험을 제공한다.

참조

[1] 서적 Ein idealer Ort für ein festes Lager. Zur Geographie des Orchontals und der Umgebung von Charchorin (Karakorum)
[2] 서적 Geschichte der Mongolen Stuttgart 2004
[3] 서적 Karakorum – Eine historische Skizze
[4] 서적 Mongol nuudel soyoliin tuuhen murdul (Historical investigation of Mongolian nomadic culture) Uvur Mongoliin surgan humuujliin hevleliin horoo (Educational Printing Committee of Inner Mongolia) 2001
[5] 웹사이트 Clarification of the 'Tumen Peace' palace in Karakorum https://web.archive.[...] 2014-03-30
[6] 웹사이트 Genghis Khan's Treasures https://www.smithson[...] 2009-03-24
[7] 웹사이트 The Pax Mongolica http://www.silk-road[...] 2000
[8] 서적 The History of the Great and Mighty Kingdom of China and the Situation Thereof, Volume 1 (of 2) https://books.google[...] Litres 2021-12-02
[9] 서적 Mongolia, Land of Inspiration Irmuun Press 2008
[10] 서적 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11] 서적 Der Silberbaum im Palast des Ögedei Khan
[12] 서적 Die Yüan-Dynastie Darmstadt 1986
[13] 서적 Der Palast des Ögedei Khan – Die Ausgrabungen des Deutschen Archäologischen Instituts im Palastbezirk von Karakorum
[14] 서적 Die Brennöfen im Palastbezirk von Karakorum
[15] 서적 Aus der Mitte der Hauptstadt – Die Ausgrabungen der Universität Bonn im Zentrum von Karakorum
[16] 웹사이트 Revitalizing Mongolia's Heritage: President Announces Plans to Rebuild Karakorum https://www.mongolia[...] 2023-08-26
[17] 서적 Der Palast des Ögedei Khan - Die Ausgrabungen des Deutschen Archäologischen Instituts im Palastbezirk von Karakorum
[18] 웹사이트 カラコルム博物館建設計画(JICA) https://www.jica.go.[...]
[19] 웹사이트 "バーチャル・カラコルム"の都市・建築景観の復元について https://ja-ms.org/ja[...]
[20] 문서 성호사설 권15, 화령
[21] 웹사이트 태조실록 (1413) 2권, 태조 1년 11월 29일 병오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22] 문서 우리나라의 국호를 중국에게 정해달라고 한 이 사건은 근현대에 들어 지나친 사대라고 두고두고 비판 받았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