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투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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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투 칸은 1205년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주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몽골 제국의 군주이자 킵차크 칸국의 창시자이다. 1236년 오고타이 칸의 명으로 서방 원정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유럽을 침략하여 헝가리, 폴란드 등지를 점령하고, 1240년에는 키예프를 파괴했다. 이후 몽골 제국 내 권력 투쟁에서 툴루이 가문과 연대하여 몽케 칸의 즉위를 돕고, 킵차크 칸국의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그는 1256년 사망했으며, 몽골인들에게는 자비로운 군주로, 유럽인들에게는 잔혹한 정복자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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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투 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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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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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칸 |
재위 기간 (서부 절반, 청장 칸국) | 1227년–1255년 |
대관식 | 1224/25년 또는 1227년 |
이전 통치자 | 조치 |
후임 통치자 | 사르타크 |
배우자 | 보라크친 카툰 |
자녀 | 사르타크 토코칸 에브겐 우라크치 |
왕가 | 보르지긴 |
가문 | 조치 가문 |
아버지 | 조치 |
어머니 | 옹기라트 부족의 우카 우진 |
출생일 | 년 |
출생지 | 카마그 몽골 |
사망일 | 1255년 (추정 나이 50세) |
사망지 | 황금 Orda, 사라이 바투 |
종교 | 텡그리 신앙 |
이름 | |
몽골어 | (Bat haan) |
타타르어 (키릴 문자) | Бату хан |
중국어 | 拔都汗 (Bádū Hán) |
러시아어 | хан Баты́й |
2. 생애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에 따르면, 바투는 "자기 백성들에게는 친절하지만, 그들에게 매우 두려움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싸움에 있어서는 매우 잔인하며, 전쟁에 매우 영리하고 교활하다. 그는 오랫동안 전쟁을 수행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마르코 폴로에 의해 언급된 '사얀'(좋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 윌리엄 드 루브룩은 그를 그의 군주인 존 드 보몽과 키가 비슷하며 얼굴 전체가 붉은 반점으로 덮여 있다고 묘사했다.
2. 1. 생애 초반
1205년에 태어났으며, 생일에 대해서는 8월 18일 또는 8월 7일이라는 설이 있다. 1207년, 1208년, 1209년 출생설도 존재하는데, 1209년생 설은 귀위크나 몽케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기록과 다소 맞지 않는다. 아버지는 칭기즈 칸의 아들 주치이고, 어머니는 우기 우진(또는 우카 우진)으로 옹기라트부 출신 알티 노얀의 딸이다. 알티 노얀은 데이 세첸의 아들이자 보르테 카툰의 친정 오빠였다. 바투의 어머니 외가 쪽이 나이만족이었다는 설도 있으며, 이 설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나이만족 출신 소르칵타니 베키와 이종사촌 관계가 된다. 이름 '바투'는 몽골어로 '박쥐'를 뜻하며, '강하고, 튼튼한, 신뢰할 수 있는'이라는 의미도 가진다. 라시드 웃딘의 저서 집사를 비롯한 페르시아어 계통 사서에는 '바토(باتو)'로 기록되어 있다. 별칭은 '사인 칸(撒因汗 Сайн хаан)'으로, 몽골어로 '자비롭고 선한 칸'이라는 뜻이며, 몽골인과 투르크인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바투의 아버지 주치는 할머니 보르테가 임신 중 메르키트 부족에게 납치되었다가 풀려난 뒤 태어났기 때문에, 평생 메르키트의 사생아라는 의심을 받았다. 특히 동생 차가타이로부터 공개석상에서 사생아로 지목되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바투의 어린 시절과 초기 삶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아버지를 홀대한 삼촌 차가타이와 그의 후손들에게 앙심을 품고 오랫동안 보복할 기회를 노렸다. 처음에는 오고타이 칸에게 원한을 품지 않았으나, 1236년부터 1241년까지 이어진 2차 서방 원정 중 오고타이 칸의 맏아들 귀위크가 바투를 "늙은 여자 같다"고 비웃은 일로 오고타이 가문에게도 앙심을 품게 되었다. 또한, 1240년 키예프 점령 승전 축하연에서 건배 순서를 놓고 귀위크가 자신이 대칸의 아들이라며 이의를 제기한 일, 차가타이 가문의 부리가 바투를 비웃을 때 귀위크가 부리의 편을 든 일 등도 귀위크를 비롯한 오고타이 가문에 대한 악감정의 원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바투는 차가타이 가문 및 오고타이 가문과 모두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반면, 이복형 오르다와는 사이가 좋았다. 오르다는 자신의 킵차크 한국 총괄 칸 지위를 바투에게 양보했으며, 바투를 주군으로 추대하고 그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1221년부터 1223년까지 할아버지 칭기즈 칸의 서방 원정에 참여하여 장군 수부타이 휘하에서 소규모 부대를 이끌었다.
1224년 아버지 주치가 사망하자, 바투는 조치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비록 차남이었지만, 이복 형 오르다가 지지하고 어머니 가문의 배경이 좋았던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오르다의 어머니와 바투의 어머니 모두 같은 콩기라트 씨족 출신이었지만, 아마도 바투의 가독 상속에는 그의 어머니가 콩기라트 부족의 종주인 알치 노얀의 딸이었던 것도 크게 관계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227년 칭기즈 칸이 사망하자, 주치의 영지는 그의 아들들에게 분배되었다. 대칸은 바투를 킵차크 칸국(조치 울루스)의 칸으로 임명했다. 주치의 장남 오르다 역시 바투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 한다고 동의했다. 칭기즈 칸의 막내 동생 테무게는 칭기즈 칸의 공식 대표로서 바투의 대관식에 참석했다.[2] 칭기즈 칸은 사망 시 4,000명의 몽골 병사를 주치 가문에 남겼다. 주치의 영토는 바투와 그의 형 오르다 사이에서 나뉘었다. 오르다의 백장 칸국은 볼가강과 발하슈 호수 사이의 땅을, 바투의 킵차크 칸국은 볼가강 서쪽 땅을 통치하게 되었다.
1229년, 오고타이 칸은 쿠크데이와 순데이가 지휘하는 세 개의 투멘을 하우랄강 유역의 부족들을 정복하기 위해 파견했다. 아불가지의 기록에 따르면, 바투는 오고타이의 금나라(1115년~1234년) 공격 군사 작전에 참여했으며, 그의 남동생들은 서쪽에서 바슈키르인, 쿠만인, 불가르인, 알란인 등과 싸웠다. 적들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몽골군은 여진족의 주요 도시들을 정복하고 바슈키르인을 동맹으로 만들었다. 1230년대에 오고타이는 산시성과 대호라산의 땅을 바투와 조치 가문에게 분배했지만, 이 지역의 관리는 제국 총독의 감독 하에 임명되었다.[3]
2. 2. 주치 울루스 계승

1225년 혹은 1226년 초, 아버지 주치가 할아버지 칭기즈 칸보다 먼저 사망하자, 바투는 칭기즈 칸으로부터 아버지 몫의 울루스를 물려받았다. 주치의 장남이자 이복형인 오르다가 있었으나, 바투가 주치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이는 오르다가 병약했다는 설도 있지만[2], 바투의 어머니 우키 우진이 옹기라트 부족 내에서도 유력 가문인 데이세첸(혹은 알치 노얀)의 딸이었던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오르다 역시 바투의 계승에 동의했다.[2] 칭기즈 칸은 1227년 사망 시, 주치 가문에 4,000명의 몽골 병사를 남겼다.[2]
주치의 영지는 바투와 오르다에게 분할되었다. 오르다는 볼가강과 발하슈 호수 사이의 땅을 다스리는 백장 칸국을 형성했고, 바투는 볼가강 서쪽의 영토를 기반으로 킵차크 칸국(주치 울루스)을 다스렸다.[2] 바투의 초기 영토는 이르티쉬 서쪽의 세미팔라틴스크, 악몰린스크, 투르가이, 우랄스크 등과 호레즘 본토(히바), 킵차크 평원, 그리고 제베와 수베에테이의 서방 원정으로 확보한 볼가 강 서쪽 정복지를 포함했다. 그는 마자르인, 킵차크인, 폴란드인 등으로 구성된 군대를 유지했다.
1227년 8월 18일 칭기즈 칸이 서하 원정 중 사망하자, 바투는 형 오르다, 동생 베르케, 샤이반 등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후 열린 쿠릴타이에서 툴루이 지지파와 우구데이 지지파 간의 논의가 있었으나, 바투는 별다른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 1229년 쿠릴타이에 참여하여 오고타이 칸 선출에 참여했다. 칭기즈 칸의 막내 동생 테무게는 칭기즈 칸의 공식 대표 자격으로 바투의 칸 즉위식에 참석하기도 했다.[2]
1229년, 오고타이 칸은 쿠크데이와 순데이가 지휘하는 세 투멘을 하우랄강 유역 부족 정복에 파견했다.[3] 아불가지의 기록에 따르면, 바투는 북중국에서 진행된 금나라와의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시기 몽골군은 여진족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바슈키르인을 동맹으로 삼는 성과를 거두었다.[3] 1230년대에 오고타이 칸은 산시성과 대호라산의 일부 영지를 바투와 주치 가문에 분배했으나, 관리 임명 등은 제국 총독의 감독하에 이루어졌다.[3]
칭기즈 칸 사후, 주치의 혈통 문제가 다시 불거지면서 바투와 다른 칭기즈 칸의 손자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났다. 훗날 오고타이 칸은 서방 원정 중 바투를 모욕한 자신의 아들들을 꾸짖기도 했지만, 이러한 갈등은 바투가 1237년 이후 킵차크 칸국을 사실상 독립적인 세력으로 만들고 몽골 본국과의 관계를 점차 멀리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후 바투는 1236년 2월, 오고타이 칸에 의해 유럽 원정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규모 원정을 이끌게 된다.
2. 3. 2차 유럽 원정 지휘
몽골-금나라 전쟁이 끝난 후 1235년 몽골 제국의 쿠릴타이에서 대칸 오고타이는 바투에게 서방 원정을 명령했다. 이전 크림반도 정복을 지휘했던 바투는 유럽 침공을 위해 약 13만 명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게 되었다. 이 원정은 단순한 군사 작전을 넘어, 몽골 제국의 차세대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하는 국가적 사업이었다. 『원조비사』에 따르면, 각 왕가의 장자급 황자들과 여러 부족의 노얀(지휘관)들이 자신의 장자를 출정시켜야 했다.원정군에는 총사령관 바투 외에도 칭기스 칸의 사구 중 한 명인 수부타이, 오고타이의 아들 귀위크와 카단, 툴루이의 아들 몽케와 보추크, 차가타이의 손자 부리와 아들 바이다르, 그리고 칭기스 칸의 다른 아들인 콜겐 등 황족들이 부사령관 및 지휘관으로 참여했다. 숙장 수부타이가 실질적인 작전 지휘를 맡았고, 보르추의 후계자인 보로르타이가 바투의 본영을 이끌었다. 바투가 직접 지휘한 병력은 4개 천인대(약 1만 명)로 추정된다. 원정의 목표는 조치 울루스 영토 서쪽의 아스, 불가르, 킵차크, 루스, 폴란드, 헝가리 등이었으며, 더 서쪽의 독일, 프랑스 방면까지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가문 | 이름 | 비고 |
---|---|---|
총사령관 | 바투 | 조치 울루스 |
조치 가문 | 오르다, 베르케, 시반, 탕구트 | 바투의 형제들 |
차가타이 가문 | 부리, 바이다르 | 차가타이 칸의 손자, 아들 |
오고타이 가문 | 귀위크, 카단 | 오고타이 칸의 아들들 |
툴루이 가문 | 몽케, 보추크 | 툴루이 칸의 아들들 |
기타 황족 | 콜겐 | 칭기스 칸의 아들 (쿠란 후진 소생) |
주요 장수 | 수부타이, 보로르타이 | 사준사구, 보르추의 후계자 |
1236년 가을, 원정군은 볼가강을 건너 볼가 불가르를 침공했다. 수부타이는 불가르 시를 공격하고 저항하는 지도자들을 복속시켰다. 1237년 봄에는 킵차크 초원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벌여, 몽케가 이끄는 좌익군이 카스피해 연안에서 킵차크의 유력 수장 바추만과 아스 수장 카찰 오글라를 사로잡아 처형했다. 이 과정에서 카스피해 북부와 코카서스 북방의 여러 부족들이 몽골에 항복하거나 정복되었다.
1237년 가을, 몽골군은 루스 공국들로 방향을 돌렸다. 11월, 바투는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대공 유리 2세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12월, 몽골군은 랴잔을 6일간의 격전 끝에 철저히 파괴했고, 콜롬나를 약탈했다. 콜롬나 전투에서 황족 콜겐이 전사하기도 했다. 1238년 2월에는 블라디미르-수즈달의 수도 블라디미르를 포위하여 3일 만에 함락시키고 불태웠으며, 왕족 대부분이 사망했다. 3월 4일, 북쪽으로 후퇴하여 군대를 재정비하려던 유리 2세는 시트강 전투에서 몽골군에게 완패하고 전사했다.
이후 바투는 군대를 여러 부대로 나누어 로스토프, 수즈달, 야로슬라블, 트베리 등 루스의 14개 도시를 차례로 약탈하고 파괴했다. 작은 도시 코젤스크는 7주 동안 끈질기게 저항하기도 했다. 당시 루스의 주요 도시 중 스몰렌스크는 몽골에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하여 파괴를 면했고,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는 원정 경로에서 벗어나 있었고 주변 습지 지형 덕분에 침략을 피할 수 있었다. 1238년 여름에는 크림 반도를 황폐화시키고 모르도비아와 폰토스-카스피해 스텝의 킵차크 세력을 평정했다. 1239년 겨울에는 체르니고프와 페레야슬라프를 약탈했다.
이 시기 원정군 내부에서는 갈등이 불거졌다. 승리 기념 연회에서 바투가 먼저 술을 마시자, 차가타이의 손자 부리는 바투가 넓은 영토를 차지하는 것에 불만을 표했고, 귀위크 등과 함께 바투를 "수염 난 늙은 여자"라고 조롱하며 연회장을 떠났다. 바투는 이들의 무례함을 오고타이에게 보고했고, 격노한 오고타이는 부리와 귀위크를 소환했다. 이 일로 귀위크와 몽케는 1239년 가을 원정군을 떠나 몽골 본토로 돌아갔다.
1240년 초, 몽골군은 남부 루스로 진격하여 키예프를 포위했다. 당시 키예프 대공위를 둘러싼 내부 분쟁으로 루스 공국들은 몽골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1240년 12월,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키예프는 함락되어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로 인해 루스인들의 중심지는 점차 키예프에서 모스크바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후 할리치와 볼로디미르 등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의 주요 도시들도 점령당했고, 루스 공국들은 몽골 제국의 봉신이 되었다.
루스 공국들을 황폐화시킨 후, 수부타이와 바투는 폴란드와 헝가리는 물론 오스트리아까지 첩자를 보내 중앙 유럽 침공을 준비했다. 1240년 봄, 바투는 카르파티아산맥 앞에서 원정군을 5개 부대로 나누었다. 오르다가 이끄는 부대는 폴란드 왕국을 침공하여 1241년 3월 크라쿠프를 점령했다. 바이다르가 이끄는 선봉대는 1241년 4월 9일 레그니차 전투에서 실레지아 공작 헨리크 2세가 이끄는 폴란드-독일 연합군을 격파하고 헨리크 2세를 전사시켰다. 바이다르는 헨리크 2세의 목을 베어 창에 매달고, 전사한 폴란드 병사들의 귀를 잘라 두 자루의 포대에 담아 공포심을 조장했다. 이후 실레지아와 모라바 지역을 약탈했다. 다른 부대들은 카르파티아 산맥 주변의 작센인과 왈라키아인들을 격파했다.
한편, 1241년 3월 바투가 이끄는 본대는 트란실바니아를 거쳐 헝가리 왕국으로 진입했다. 바투는 쿠만족 난민을 받아들인 헝가리 왕 벨러 4세에게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항복과 쿠만족 송환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침공을 개시했다. "쿠만족이 도망가는 것보다 당신이 도망가는 것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당신은 집에 살고, 고정된 도시와 요새가 있는데, 어떻게 나를 피할 수 있겠는가?"[4] 몽골군은 페슈트 시를 함락시킨 후, 4월 11일 티서강 유역의 모히 평원에서 벨러 4세의 헝가리-크로아티아 연합군과 모히 전투를 벌였다. 수부타이와 시반이 이끄는 부대가 야간 기습을 감행하여 헝가리군을 대파했고, 벨러 4세는 소수의 병력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거쳐 아드리아해 연안으로 도주했다. 바투는 카단에게 벨러 4세를 추격하게 했으나 잡지는 못했다. 이로써 몽골군은 헝가리 전역을 장악하고 파괴했으며, 점령지에 다루가치(총독)를 임명하고 카간의 이름으로 화폐를 주조하기도 했다.[7] 몽골군은 그 직후 불가리아 제2제국의 이반 아센 2세에게 패배하기도 했다.[6]
1241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바투의 본대는 다뉴브강변에 머물렀고, 겨울에는 얼어붙은 다뉴브 강을 건너 에스테르곰을 포위 공격했다. 몽골군은 1242년 봄에는 오스트리아와 달마티아까지 진격하여 빈 근교의 비너노이슈타트에 육박하기도 했다.[8] 바투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 항복을 요구하며 "나는 당신 대신 당신의 왕위를 찬탈하러 왔다"고 전했으나, 황제는 자신은 새를 잘 다루니 (몽골 황제의) 매사냥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응수하며 이를 비웃었다.[9] 황제와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몽골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호소했지만, 유럽 내부의 분열로 실현되지 못했다.
1241년 말, 바투와 수부타이는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독일 침공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1241년 12월 대칸 오고타이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차기 대칸 선출을 위한 쿠릴타이가 카라코룸에서 열리게 되면서, 야사(몽골 법전)에 따라 황족들은 귀환해야 했다. 바투는 원정을 계속하고 싶어했지만, 수부타이의 설득과 귀환 명령에 따라 1242년 늦봄, 몽골군은 중앙 유럽에서 철수했다. 에스테르곰을 함락시킨 직후였으며, 철수 과정에서 도나우강 유역을 거쳐 킵차크 초원으로 돌아갔다. 바투는 쿠릴타이에 참석했지만 대칸위에 오르지는 못했고, 이후 볼가강 하류에 사라이를 수도로 정하고 조치 울루스(훗날 킵차크 칸국 또는 금장 칸국)의 기반을 다지는 데 집중했다. 이 원정으로 카르파티아 산맥 동쪽의 루스 공국들을 포함한 동유럽 지역은 조치 울루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2. 4. 귀위크와의 대립과 원정 취소
유럽 원정 과정에서 귀위크와 바투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귀위크는 바투 형제들의 실책을 목격하고 그들의 지휘 능력, 특히 바투의 역량을 불신하게 되었다.[17] 1240년 키예프 점령 직후 열린 승전 축하연에서 이 갈등은 표면화되었다. 총사령관인 바투가 먼저 건배를 제의하고 술을 마시자, 귀위크는 자신이 칸의 아들이므로 먼저 건배를 제의하거나 잔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는 곧 언쟁으로 번졌고, 이 사건은 우구데이 카안에게 보고되었다. 우구데이는 귀위크가 칸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주군이자 형인 바투를 능멸했다며 분노했고 바투를 지지했다.[18]이에 불만을 품은 귀위크는 전쟁 중 자신의 병력을 슬그머니 뒤로 빼거나 지원을 주저하는 등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한번은 차가타이 가문의 부리가 바투를 공격했을 때 귀위크는 이를 방관했으며, 술자리에서 바투를 비웃다가 시비가 붙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원조비사와 『집사』(集史)에 따르면, 원정 중 부리가 주치 가문 왕자들과 말다툼을 벌였을 때 귀위크도 부리의 편을 들었다고 한다. 귀위크는 공개적으로 바투를 "화살통을 들고 다니는 늙은 여자일 뿐"이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19][20][21]
이러한 갈등과 귀위크의 태도는 몽골 본국에 알려졌고, 우구데이 카안은 격분했다. 우구데이는 귀위크와 몽케에게 맡겨졌던 우익군의 지휘권을 카단과 부첵에게 넘기고 즉시 귀환하라고 명령했다.[22] 몽골비사에 의하면, 우구데이는 서신을 보내 귀위크가 러시아인이나 킵차크인을 정복하는 동안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음을 질책하며 속히 돌아오라고 다그쳤다. 귀위크는 1240년 가을에 회군길에 올랐다.
귀위크 등이 돌아간 후, 바투는 수부타이와 함께 이탈리아, 체코, 남부 독일 등을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1241년 12월, 우구데이 카안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1242년 3월, 바투는 오고타이의 사망에 따른 원정군 전군 귀환 명령을 받았다. 그는 에스테르곰을 함락시킨 후, 카단에게 헝가리의 벨러 4세를 추격하도록 명령하고 도나우강 유역을 거쳐 킵차크 초원으로 철수했다. 이로써 몽골 제국의 유럽 원정은 중단되었고, 헝가리 지배는 포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카르파티아산맥 동쪽의 루스 지역은 이후 조치 울루스의 기반이 되었다.
오고데이 사후, 바투는 자신과 사이가 틀어진 귀위크가 제3대 카안이 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며 몽케를 지지했다. 귀위크의 어머니이자 당시 섭정을 맡고 있던 퇴레게네는 귀위크를 옹립하기 위해 쿠릴타이 개최를 추진했으나, 바투는 오고데이가 후계자로 시레문을 지명했다는 점을 내세우며 불참 의사를 밝혀 이를 견제했다. 이로 인해 몽골 제국은 거의 5년 동안 카안 자리가 비어있는 상태가 되었다.
1246년, 툴루이 가문의 소르칵타니 베키와 동방의 테무게 옷치긴 등이 퇴레게네의 쿠릴타이 개최 요청을 수락하자 바투도 뒤늦게 참가를 표명했다. 그러나 코코노르에서 열린 쿠릴타이에 바투는 도착하지 못했고, 조치 가문에서는 이미 몽골 본토에 와 있던 오르다, 시반, 베르케, 토카 테무르 등 형제들만 참석한 가운데 귀위크가 제3대 카안으로 선출되었다.
바투는 쿠릴타이 결과에 불만을 품고, 카안으로 즉위한 귀위크의 거듭된 소환 명령에도 병 치료를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귀위크의 숙적으로 몰려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으나, 소르칵타니 베키 등이 몽골 중앙의 동정을 계속 알리며 대처 방안을 조언해주었다.
1248년, 귀위크는 류머티즘 치료를 명분으로 에밀 근처로 이동한다고 알린 바투를 토벌하기 위해 직접 원정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귀위크가 비슈발리크 부근에서 갑자기 사망하면서 제국은 내전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집사』는 귀위크의 사인을 과도한 주색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사망 시점이 조치 가문과 툴루이 가문에 매우 유리했기 때문에 바투에 의한 암살설도 제기되고 있다.
2. 5. 몽골 제국 내 권력 투쟁과 킵차크 칸국 건설
1241년 12월 21일 우구데이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1242년 3월 몽골 사신을 통해 공식 사망 소식을 접한 바투는 유럽 원정군 전군의 귀환을 명령했다. 이로써 제2차 유럽 원정은 중단되었다. 귀환 직전 바투는 에스테르고름을 함락시키고 카다안에게 헝가리의 벨러 4세를 추격하게 했다.
1242년 늦봄 혹은 여름, 바투는 카라코룸에서 열릴 쿠릴타이에 참석하여 대칸 자리를 노렸으나, 몽골 본국 내 지지 기반 부족과 섭정 퇴레게네 카툰의 견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서쪽으로 돌아왔다. 그는 수부타이를 동행시키지 않았으며, 귀위크가 최종적으로 대칸으로 선출되자 불만을 품었다.
칭기즈 칸 가문의 최고 연장자 중 한 명으로서, 바투는 제국 대칸 자리를 둘러싼 권력 투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대칸 옹립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우구데이 칸 사후, 그의 아들 귀위크와 바투 사이에 대칸 자리를 두고 분쟁이 발생했다. 바투는 루스 원정 중 사이가 나빠진 귀위크를 퇴레게네 카툰이 제3대 대칸으로 추대하려 하자 강하게 반대하며, 여러 차례 열린 쿠릴타이에 불참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바투는 우구데이가 후계자로 지명한 것은 시레문이라고 주장하며 제국 서방의 중진으로서 불참을 표명하여 퇴레게네의 움직임을 견제했다. 이 때문에 몽골 제국은 약 5년간 대칸 자리가 공석인 상태였다.
1246년, 마침내 소르칵타니 베키를 비롯한 툴루이 가의 황자들과 동방의 테무게 옷치긴 등이 퇴레게네의 쿠릴타이 개최 요청을 수락하자, 바투도 쿠릴타이 참가를 표명했다. 그러나 코코 노르에서 개최된 쿠릴타이에 늦어, 조치 가문은 이미 몽골 본토에 도착해 있던 오르다, 시반, 베르케, 토카 테무르 등 바투의 형제들만 참석했고, 당주 바투는 부재한 채 귀위크가 제3대 대칸으로 추대되었다. 바투는 이 결정에 불만을 품고 귀위크의 즉위식에도 불참했으며, 즉위 후 귀위크가 여러 차례 소환했으나 병 치료를 핑계로 계속 거부했다. 이 시기 소르칵타니 베키는 바투에게 몽골 중앙의 동향을 알리고 귀위크에 대한 대처 방안을 조언하며 바투와 연합했다.
귀위크 칸 즉위 이후 바투는 몽골 제국 본국과의 교류를 줄이며 자신의 영지인 조치 울루스를 반독립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귀위크와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1248년에는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다. 귀위크는 류머티즘 치료를 핑계로 에밀 근처 오고데이의 방목지로 이동하는 바투를 직접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으나, 같은 해 4월 비슈발리크 부근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귀위크의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알콜 중독으로 인한 병사였으나, 당시의 긴박한 상황과 바투에게 유리한 죽음이었기에 바투에 의한 암살설도 제기된다. 윌리엄 루브루크와 한 무슬림 연대기에서는 바투의 형제 중 한 명이 귀위크를 살해하거나 독살했다고 기록했지만, 다른 주요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귀위크 사후, 바투는 오굴 카이미쉬가 섭정을 맡는 것을 용인하는 듯 보였으나, 오고타이 가문을 몰아내고 툴루이 가문의 몽케를 새로운 대칸으로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1250년 바투는 자신의 영지인 이식쿨 호수 북쪽 지역에서 쿠릴타이 개최를 제안했다. 이 쿠릴타이에서 바투에게 왕위가 제안되었으나 그는 거절하고 대신 몽케를 지명했다. 그러나 오굴 카이미쉬를 비롯한 우구데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 왕족들은 쿠릴타이 장소가 멀고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참석을 거부했다.
1251년 몽골 본토의 코드 아랄에서 다시 열린 쿠릴타이에서 바투는 동생 베르케와 투크테무르, 아들 사르타크의 군사적 지원 아래 마침내 몽케를 제4대 대칸으로 추대했다. 이 과정에서 바투는 차가타이 한국의 군사적 움직임에 대비하여 동생 베르케에게 10만 명의 병력을 주어 오르타르(현 카자흐스탄 남부)에 배치하기도 했다. 몽케 즉위 후, 바투는 몽케를 도와 반대 음모를 꾸민 오고타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 왕족들을 숙청하는 데 협력했다. 부리를 비롯한 반대파 왕족들이 처형되었다.
몽케 칸 시대에 바투는 '왕위 제정자'이자 제국 서부의 총독으로서 최고의 권위를 누렸다. 그는 볼가강 하류에 킵차크 칸국(조치 울루스)의 수도인 사라이를 건설하고 영토 통치에 힘썼다. 기욤 드 루브루크의 기록에 따르면, 바투의 궁정은 계절에 따라 이동했으며, 봄에는 북쪽의 불가르 방면, 8월 이후에는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일부 후대 기록에서는 바투가 청장 칸국(Kök Orda|쿄크 오르다mn, 우익/서부), 그의 형 오르다가 백장 칸국(Aq Orda|아크 오르다mn, 좌익/동부)을 맡아 통치를 분담했다고 하나, 동시대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아 후대의 정치 상황을 소급 적용했을 가능성이 있다.[15]

바투는 킵차크 칸국의 칸으로서 키예프 루스 공국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그는 블라디미르의 야로슬라프 2세를 다른 루스 공후들의 종주권자로 인정하고 키예프에 대한 권한을 부여했으나, 야로슬라프는 1246년 카라코룸에서 열린 귀위크 칸의 즉위식에 참석했다가 귀국길에 독살되었다. 체르니고프의 미하일 공작은 몽골 사절을 살해하고 바투 앞에서 몽골 전통 의식(불 사이 통과, 칭기스 칸 신상 숭배)을 거부하여 처형당했다. 갈리치아의 다니일 공작은 바투에게 굴복하여 아이락을 함께 마시며 충성을 맹세했다. 바투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1252년 블라디미르의 대공으로 임명했다. 반면, 안드레이 2세가 반항적인 서부 루스 공작들과 동맹을 맺자 네브류이가 이끄는 징벌 원정을 보내 진압했다. 안드레이는 스웨덴으로 도망쳤다가 1256년 사라이로 돌아와 용서를 받았다. 또한 조지아 왕위 계승 문제에도 개입하여 다비트 6세 나린을 지지했으나, 귀위크는 다비트 7세 울루를 선임 왕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바투는 몽케 칸의 인구 조사 사업에 협조했으며, 이슬람 연대기 및 《원사》(元史)에 따르면 제국 재정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다고 한다.[10] 그는 칭기즈 칸의 손자들 중 몽케와 더불어 가장 유능하고 몽골 법(야사)을 충실히 따른 인물로 평가받는다.[11]
바투는 훌라구의 중동 원정을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조치드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했으나, 동생 베르케의 설득으로 파견을 늦추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1255년 바투는 사망하기 전에 아들 사르타크에게 국정을 맡겼다.
1256년 바투는 볼가강변의 수도 사라이에서 사망했다. 향년 48세였다. 그의 부고가 몽케 칸에게 전해지자 몽케는 사르타크를 후계자로 임명했으나, 사르타크는 킵차크 칸국으로 귀환하던 중 병사했다. 이후 몽케가 후계자로 인정한 우라크치마저 요절하면서, 최종적으로 바투의 둘째 동생인 베르케가 칸위를 계승했다.
2. 6. 사망과 유산
몽케 칸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몽케 칸은 바투에게 킵차크 한국의 자치권을 허용해주었다. 이후 바투는 조치 울루스의 영토 통치에 힘썼고, 볼가강 하류 유역의 옛 이틸 주변에 겨울 야영지 사라이를 수도로 정했다.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기욤 드 루브루크에 따르면, 바투의 궁정은 계절에 따라 남북으로 이동했으며, 봄에는 볼가강 동쪽 기슭을 따라 북상하여 볼가 불가르 방면에 머물렀고, 8월에는 남쪽으로 돌아갔다고 한다.주치의 영지를 놓고 바투는 형제들과 상의하여, 바투가 서부(우익)의 청장 한국을, 맏형 오르다가 킵차크 한국의 동부(좌익)의 백장 한국을 맡았다. 형식적인 킵차크 한국의 대칸은 우선 청장 한국의 칸이 겸하는 것으로 했다. 또한 청장 한국의 서북방 영역은 각각 노가이, 샤이반 등에게 울루스로 주어 자체적으로 다스리게 했다. 다만, 청장 칸국과 백장 칸국의 분할 통치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13-14세기 몽골 제국 시대 자료에는 보이지 않으며, 이는 바투 가문이 단절된 후 조치 울루스가 정치적으로 나뉜 후대의 상황을 바투 시대에 소급하여 적용한 것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15]
말년에 키예프 공국의 대공 다닐리 칼리스키는 바투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보냈으나, 1254년 조공을 거절하고 킵차크 한국에서 보낸 징세관(바스카크)을 추방했다. 같은 해 다닐리 칼리스키는 바투가 보낸 오르다의 아들 쿠레무사가 이끄는 몽골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당시 바투는 병중이라 직접 개입할 수 없었지만, 몽골 본국에서 병력을 지원받아 결국 키예프는 다시 킵차크 한국의 종주권을 인정해야 했다.
바투는 1256년 1월 30일 또는 1257년 1월 18일에 볼가강 하류의 수도 사라이에서 사망했다. 향년 48세였다. 사망 전 해인 1255년 봄, 몽케 칸이 쿠릴타이 개최를 알리자 아들 사르타크를 대표로 파견했다. 바투의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독살설과 류마티스 질환으로 인한 사망설 등이 있다.
바투가 누구를 후계자로 내정했는지는 불확실하다. 몽케 칸은 쿠릴타이에 파견되었던 사르타크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사르타크는 유럽 원정을 포기하고 조치 울루스로 귀환하던 중 병으로 사망했다. 몽케가 다시 후계자로 추인한 바투의 다른 아들(혹은 손자) 울라그치 역시 약 반년 뒤 사망하면서, 결국 울루스는 바투의 동생 베르케에게 계승되었다.
베르케는 바투와 달리 유럽 정벌에 큰 관심이 없었으며,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독실한 무슬림이 되었다. 그는 바그다드를 함락시킨 사촌 훌라구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었고, 이로 인해 킵차크 한국과 일 한국은 일 한국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적인 갈등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베르케는 몽골 가문의 다른 칸들과의 통합보다는 독자적인 세력 구축에 힘썼으며, 훌라구 칸과 전쟁을 벌이면서도 형식적으로는 몽케 칸과 대칸을 군주로 인정했다. 그러나 사실상 베르케는 독립적인 통치자였다. 그는 바투와 달리 정복 전쟁에는 소극적이었지만, 헝가리의 벨라 4세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장군 보롤다이를 보내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를 공격하기도 했다.
킵차크 칸국은 루스와 유럽에서 금장 칸국 (Золотая Орда|졸로타야 오르다ru)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칸의 텐트가 금색이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황금색'이 '왕족'을 의미하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 등이 있다. 몽골어 '오르다(ordu)'는 야영지 또는 군사 본부를 의미한다. 모든 칸국 중에서 금장 칸국은 가장 오랫동안 존속했다. 원나라가 중국에서 몽골 초원으로 물러나고 일 칸국이 중동에서 멸망한 후에도, 바투 칸의 후손들은 현재의 우크라이나, 러시아, 카자흐스탄 지역의 초원을 계속 통치했다. 바투의 직계 후손들은 베르케가 사망한 지 약 100년 후인 1360년까지 조치 울루스를 통치했으며, 그 이후에는 그의 형제 오르다와 투카 티무르의 후손들이 금장 칸국의 왕위를 차지했다.
바투 칸은 키가 약 1.7m였으며, 그의 어머니 우카 우진은 몽골 옹기라트 부족 출신이었고[13], 그의 주요 부인인 보라크친은 알치-타타르 출신이었다. 바투에게는 적어도 네 명의 자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름 | 설명 |
---|---|
사르타크 | 1255년부터 1256년까지 금장 칸국의 칸. 바투 칸과 보라크친의 아들. |
토코칸 | 바투 칸의 아들.[12] |
안데완 | 바투 칸의 아들. |
울라그치 | 바투 칸의 아들 또는 손자 (사르타크의 아들일 가능성 있음). 줄라이벡(주 라이)이라고도 불림. 1257년 잠시 칸위에 오름. |
몽골 제국의 제2대 오고데이 칸 시대에 결정된 서방 원정은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시작되었다. 이 대규모 원정은 조치 가문의 영토를 서쪽으로 확장하고, 볼가 불가르, 킵차크, 루스, 폴란드, 헝가리 등 유럽 동부 및 중부 지역을 정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원정에는 수부타이, 몽케, 구육 등 몽골 제국의 주요 황족과 장군들이 대거 참여하여, 제국의 차세대 지도자들이 경험을 쌓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3. 몽골 제국의 서방 원정과 킵차크 칸국
원정군은 먼저 볼가 불가르와 킵차크 초원을 성공적으로 정복한 후, 루스 지역으로 진격하여 여러 공국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복속시켰다. 랴잔, 블라디미르, 키예프와 같은 주요 도시들이 몽골군의 공격 앞에 함락되고 파괴되었다. 루스 지역을 장악한 몽골군은 서쪽으로 더 나아가 폴란드와 헝가리를 침공했다. 1241년 레그니차 전투와 모히 전투에서 폴란드-독일 연합군과 헝가리 연합군을 각각 격파하며 중부 유럽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1241년 말, 오고타이 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원정은 중단되었다. 몽골 제국의 칸 계승 문제를 위해 쿠릴타이가 소집되었고, 바투는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철수하여 볼가강 하류 유역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이곳에 새로운 수도 사라이를 건설하고, 훗날 킵차크 칸국으로 알려지게 될 국가의 기초를 마련했다. 바투는 몽골 제국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며 루스 공후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고, 몽케 칸이 새로운 대칸으로 즉위한 이후에는 킵차크 칸국의 자치권을 확립하여 사실상 독립적인 세력의 통치자로서 자리매김했다. 바투가 세운 킵차크 칸국은 이후 약 250년간 동유럽의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며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1. 몽골의 볼가 불가르 및 킵차크 초원 정복
1236년 2월, 몽골 제국 제2대 황제 오고데이의 명을 받아 바투는 유럽 원정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사구 중 한 명인 수부타이, 칭기즈 칸의 넷째 아들 툴루이의 장남인 몽케, 그리고 오고데이의 장남인 구육 등이 부사령관으로 함께 출정했다.
『원조비사』에 따르면, 이 원정은 각 왕가의 장자급 황자들과 영지를 갖지 않은 황자들, 그리고 만호장, 천호장, 백호장, 십호장 등 각급 노얀들의 장자, 왕녀와 사위들의 장자까지 참여하는 대규모 원정이었다.
:만(호)의, 천(호)의, 백(호)의, 십(호)의 노얀들, 많은 사람들은 누구든
:자기 아들의 형인 자(장자)를 출정시키라. 왕녀들, (그) 사위들은 마찬가지로
:자기 아들의 형인 자(장자)를 출정시키라.
이는 차세대 몽골 제국의 핵심 인물들이 대거 참여했음을 의미한다. 바투는 원정군에 참전한 황자들을 총괄하고, 구육은 황제 오고데이의 본영군에서 선발된 부대를 통솔하도록 임명되었다. 또한, 『집사』에 따르면 칭기즈 칸의 최고 공신 보르추의 후계자 보로르타이가 바투의 본영인 중군(qol)의 숙장으로서 군대를 이끌었다.
이 원정에는 다음과 같이 각 왕가의 주요 황자들이 참여했다.
가문 | 참여 황자 |
---|---|
조치 가문 | 바투(총사령관), 오르다, 베르케, 시반, 탕구트 |
차가타이 가문 | 브리, 바이달 |
오고데이 가문 | 구육, 카다안 오굴 |
툴루이 가문 | 몽케, 보추크 |
기타 | 콜겐 (칭기즈 칸과 쿠란 후진의 아들) |
이때 바투가 직접 이끈 병력은 약 4개의 천인대(약 1만 명)로 추정된다. 원정군의 정복 목표는 조치 가문 영토 서쪽의 여러 민족, 즉 아스, 불가르, 킵차크, 루스, 폴란드, 헝가리 등이었으며, 더 서쪽의 '케랄'이라 불린 독일, 프랑스 방면까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원정군은 1236년 여름 동안 이동하여 가을에는 당시 조치 울루스의 오르도(궁정)가 있던 일리 방면에 도착했다. 1236년부터 1237년 겨울까지 원정군은 먼저 아스인과 불가르인 정복에 나섰다. 숙장 수부타이는 볼가 불가르 지역으로 진격하여 수도 불가르를 공격했다. 불가르의 수장 바얀과 지크 등이 잠시 몽골 왕족들에게 항복 의사를 밝혔으나 곧바로 배반하자, 수부타이가 이들을 다시 복속시키는 임무를 맡아 완수했다.
1237년 봄, 원정군은 킵차크 초원 전체를 포위하는 작전을 개시했으며, 좌익은 몽케가 지휘했다. 몽케의 좌익군은 카스피해 연안을 따라 진군하여 킵차크의 유력 수장 바추만과 아스 수장 카찰 오글라와 싸워 이들을 생포하고 살해했다. 이후 원정군은 카스피해 연안 지역에서 여름을 보냈다. 이 시기에 카스피해 연안부터 캅카스 북방 지역에 있던 불타스족, 체르케스족, 사크신인(현재의 아스트라한 주변) 등이 몽골군에 항복하거나 정복되었다.
3. 2. 루스 정복
몽골-금나라 전쟁이 끝난 후 몽골의 쿠릴타이에서 대칸 오고타이는 바투에게 서방 원정을 명령했다.[1][2] 1235년, 이전에 크림반도 정복을 지휘했던 바투는 약 13만 명으로 추정되는 대군을 이끌고 유럽 침공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원조비사』에 따르면, 이 원정은 제국의 각 왕가 장남급 황자들과 영지를 갖지 못한 황자들, 만호장, 천호장, 백호장, 십호장의 아들들까지 참여하는 대규모 원정으로, 차세대 몽골 제국의 핵심 인물들이 대거 참여했다. 바투는 원정군에 참여한 황자들을 총괄했으며, 오고타이의 장남 구유크는 황제 본영군(qol)에서 선발된 부대를 통솔하도록 임명되었다. 칭기즈 칸의 공신 보르추의 후계자인 보로르타이가 바투 본영의 중군(qol)을 이끌었다. 원정군의 정복 목표는 조치 가문 영토 서쪽의 여러 민족, 즉 아스, 불가르, 킵차크, 루스, 폴란드, 헝가리 등이었으며, 더 서쪽의 "케랄"이라 불린 독일, 프랑스 방면까지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가문 | 참여 황자 |
---|---|
조치 가문 | 총사령관 바투, 오르다, 베르케, 시반, 탕구트 |
차가타이 가문 | 부리, 바이달 |
오고데이 가문 | 구유크, 카단 |
툴루이 가문 | 몽케, 보추크 |
기타 | 콜겐 (칭기즈 칸과 쿠란 후진의 아들) |
실질적으로 수부타이가 지휘한 군대는 1236년 볼가강을 건너 볼가 불가르를 침공하여, 1년간의 전투 끝에 볼가 불가르인, 킵차크인, 알란인의 저항을 진압했다.[1]
1237년 가을, 몽골군은 루스 방면으로 침공을 시작했다. 11월, 바투 칸은 블라디미르-수즈달의 대공 유리 2세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1] 12월, 몽골군은 랴잔을 6일간의 격전 끝에 함락시키고 완전히 파괴했으며[1][3], 콜롬나 전투에서는 유리 2세의 아들들이 이끄는 군대를 격파했다.[1] 이 콜롬나 포위전에서 칭기즈 칸의 아들 콜겐이 전사했다.[3] 이후 몽골군은 모스크바를 불태우고, 1238년 2월 4일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수도 블라디미르를 포위하여 사흘 만에 함락시키고 불태웠다. 왕족은 화재로 사망했고, 대공 유리 2세는 북쪽으로 후퇴하여 군대를 모았으나, 3월 4일 시트강 전투에서 몽골군에게 전멸당하고 자신도 전사했다.[1][3]
이후 바투 칸은 군대를 나누어 로스토프, 우글리치, 야로슬라블, 코스트로마, 카신, 크스냐틴, 고로데츠, 갈리치, 페레슬라블-잘레스키, 유리예프-폴스키, 드미트로프, 볼로콜람스크, 트베리, 토르조크 등 14개의 루스 도시를 약탈했다.[1] 작은 도시 코젤스크는 소년 영주 티투스와 주민들이 7주 동안 몽골군에 격렬히 저항하여 함락시키기 가장 어려웠던 곳으로 기록되었다.[1] 루스 북부 제국의 대부분이 정복되었으나, 노브고로드 공국의 알렉산드르 넵스키나 할리치 공 다니일 등 일부는 몽골에 귀순했다.[3] 스몰렌스크는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하여 파괴를 면했고,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는 거리와 습지 때문에 몽골군이 도달하지 못했다.[1] 이후 원정군은 남쪽으로 진로를 바꿔 코젤스크를 함락시키고, 코카서스 북부 방면으로 일시 철수하여 군대를 휴양시켰다.[3] 1238년 4월부터 1239년에 걸쳐 코카서스 북부의 여러 종족을 정복했다.[3]
이 무렵 총사령관 바투는 구유크, 부리 등과 논공행상 문제로 심하게 대립했다.[3] 바투가 승리 연회에서 다른 황자들보다 먼저 술을 마시자 부리는 바투가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는 것이 불공정하다고 불평했고, 구유크 등과 함께 바투를 "수염 난 늙은 여자"라고 조롱하며 연회장을 떠났다.[1] 바투는 이들의 무례함을 삼촌 오고타이에게 보고했고, 분노한 오고타이는 부리와 구유크를 소환했다.[1] 이 일로 구유크와 몽케는 1239년 가을, 원정군을 떠나 몽골 본토로 귀환했다.[3]
1238년 여름, 바투 칸은 크림을 황폐화시키고 모르도비아와 킵차크가 지배하던 폰토스-카스피해 스텝을 평정했다.[1] 1239년 겨울에는 체르니고프와 페레야슬라프를 약탈했다.[1] 1240년 초봄, 몽골군은 루스 남부로 다시 침공하여 며칠간의 포위 공격 끝에 12월, 키예프를 함락시키고 파괴했다.[1][3] 당시 키예프는 키예프 대공 자리를 둘러싼 루스 제후들의 내분으로 몽골의 침공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3] 할리치-볼히니아의 다니일이 격렬하게 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바투 칸은 그의 주요 수도인 할리치와 볼로디미르마저 점령했다.[1] 이로써 루스의 공국들은 몽골 제국의 봉신이 되었다.[1]
3. 3. 헝가리, 폴란드, 중부 유럽 침공
쿠만족 난민들이 헝가리 왕국으로 피신하자, 바투는 헝가리 왕 벨라 4세에게 최소 다섯 차례 사절을 보내 쿠만족 송환을 요구했으나 모두 살해되었다. 바투는 벨라 4세에게 "쿠만족이 도망가는 것보다 당신이 도망가는 것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당신은 집에 살고, 고정된 도시와 요새가 있는데, 어떻게 나를 피할 수 있겠는가?"[4]라고 경고하며 최후통첩을 보냈다. 바투 칸은 몽골군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 즉 "궁극의 바다"에 도달하기로 결심했다.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바투가 주로 몽골 제국의 서쪽 측면을 유럽 세력의 간섭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고 추가 정복의 발판을 마련하려 했다고 추측한다. 반면,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바투가 측면의 안전을 확보하고 군대가 준비되는 대로 유럽 전역을 정복하려 했다고 본다.다양한 루스 공국들을 황폐화시킨 후, 수부타이와 바투는 폴란드, 헝가리, 그리고 오스트리아까지 첩자를 보내 유럽 중심부로의 공격을 면밀히 준비했다. 바투 칸이 총사령관이었지만, 실제 야전 지휘는 루스 침공 당시 북부와 남부 전선 모두에서 활약했던 수부타이가 맡았다.
1235년 쿠릴타이에서 결정된 서방 원정에는 몽골 제국 각 왕가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는 제국의 차세대 지도자들을 포함하는 대규모 원정이었다.
가문 | 참여 인물 |
---|---|
총사령관 | 바투 |
부사령관 및 주요 지휘관 | 수부타이, 몽케, 구유크, 보로르타이 |
조치 가문 | 오르다, 베르케, 시반, 탕구트 |
차가타이 가문 | 부리, 바이다르 |
오고데이 가문 | 구유크, 카단 |
툴루이 가문 | 몽케, 보추크 |
기타 황족 | 콜겐 (칭기즈 칸과 쿠란 후진의 아들) |
원정군의 목표는 조치 가문의 영토 서쪽에 위치한 아스, 불가르, 킵차크, 루스, 폴란드, 헝가리 등이었으며, 더 서쪽의 독일, 프랑스 방면까지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1240년 봄, 바투는 카르파티아 산맥 앞에서 원정군을 5개 부대로 나누어 폴란드, 왈라키아, 트란실바니아를 경유하여 헝가리 왕국으로 침공했다. 몽골군은 크게 세 방향으로 중앙 유럽을 침략했다.
- 북부군 (폴란드 방면): 오르다가 이끄는 부대는 폴란드 왕국을 침공하여 3월에 크라쿠프를 점령했다. 이어서 바이다르가 이끄는 선발대는 1241년 4월 9일 레그니차 전투에서 실레지아 공작 헨리크 2세가 이끄는 폴란드-독일-튜튼 기사단 연합군을 격파하고 헨리크 2세를 전사시켰다. 실레지아와 모라비아 지방 역시 몽골군의 침략을 받았다.
- 중부군 (카르파티아 방면): 카단과 부리가 이끄는 군대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사산인(아마도 작센인)을 격파했고, 보추크의 군대는 왈라키아인으로 추정되는 집단을 격파했다.
- 남부군 (헝가리 방면): 구육 또는 부리가 이끄는 군대가 트란실바니아에서 승리했다. 바투의 본대는 1241년 3월 트란실바니아를 통해 헝가리로 진입하여 벨라 4세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이후 모라비아에서 바이달, 카단, 수부타이 군대와 합류하여 페슈트 시를 함락시켰다.
1241년 4월 11일, 수부타이가 지휘하는 몽골군은 티서 강 유역의 모히 전투에서 벨라 4세가 이끄는 마자르족, 크로아티아인, 템플 기사단 연합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벨라 4세는 오스트리아를 거쳐 아드리아 해 연안으로 도주했다. 몽골군은 헝가리 전역을 장악하고 파괴했으며, 점령지에 ''다루가치''(총독)를 임명하고 카간의 이름으로 동전을 주조했다.[7] 바투는 벨라 4세를 추격하기 위해 카단을 파견했고, 벨라 4세는 크로아티아로 후퇴했다.
몽골군은 여름 동안 헝가리 평원을 휩쓸었고, 1242년 봄에는 다시 공세를 펼쳐 오스트리아와 달마티아까지 통제 범위를 넓혔으며, 모라비아도 침략했다. 몽골군은 신성 로마 제국과 바벤베르크 오스트리아 군대의 저항을 저지했다.[8] 중앙 유럽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바투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 항복을 요구하며 "나는 당신 대신 당신의 왕위를 찬탈하러 왔다"고 전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은 새를 잘 이해하므로 좋은 매 사냥꾼이 될 것이라고 응수했다고 전해진다.[9] 황제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몽골 제국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요청했지만, 당시 유럽은 내부 분쟁으로 인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한편, 부예크(부체크, 보추크)가 이끄는 몽골군은 카라 울라그("검은 발라흐") 산을 넘어 왈라키아인과 그 지도자 중 한 명인 미슬라브를 격파했으나[5], 직후 불가리아 제2제국의 이반 아센 2세에게 패배했다.[6]
1241년 말, 바투와 수부타이는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독일 침공 계획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1241년 12월, 오고타이 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투는 원정을 계속하려 했으나, 수부타이는 몽골 제국의 대법인 야사(Их Засаг)에 따라 카라코룸에서 열릴 쿠릴타이에 참석해야 함을 상기시켰다. 결국 몽골군은 1242년 늦봄, 에스테르곰을 함락시킨 후 철수를 시작했다. 몽골군의 일부는 빈 근교의 노이슈타트까지 도달했으나, 이 지역 정복은 포기하고 도나우강 유역을 따라 킵차크 초원으로 철수했다.
이 철수로 인해 헝가리에 대한 몽골의 지배는 단명으로 끝났지만, 카르파티아 산맥 동쪽의 루스 지역을 포함한 동유럽 영토는 이후 조치 울루스의 핵심 기반이 되었다. 바투는 쿠릴타이에서 잠재적인 대칸 후보였으나 계승에 실패하자, 이후 아시아와 우랄 산맥 지역에서의 정복 활동을 공고히 하는 데 집중했다.
3. 4. 킵차크 칸국의 성립과 발전
유럽 원정에서 돌아온 바투는 볼가 강 하류 유역에 자신의 본거지인 사라이를 건설했다. 이는 훗날 킵차크 칸국의 수도가 되었다.주치 사후 그의 영지는 형제들 간의 합의를 통해 분할되었다. 바투는 서부 지역인 청장 한국(Blue Horde)을 통치하게 되었고, 그의 형 오르다는 동부 지역인 백장 한국(White Horde)을 맡았다. 형식상 킵차크 칸국 전체의 칸은 청장 한국의 칸이 겸임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또한, 청장 한국 내 서북방의 일부 영역은 노가이나 샤이반 등에게 울루스(영지)로 분배되어 자체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바투는 1242년 이후 몽골 제국의 서방 영토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 그는 구유크 칸이 대칸으로 선출된 1246년의 쿠릴타이에는 직접 참석하지 않았으나, 형제들을 보내 조치 가문을 대표하게 했다. 칭기스 칸 가문의 최고 연장자 중 한 명인 바투는 제국 서부 전체의 총독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루스 공국들의 문제 처리, 이란 지역 총독 임명, 코카서스 지역 유력자들과의 관계 설정 등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대칸의 권위에 공개적으로 도전하지는 않았다.
바투는 자신에게 복속한 루스 공후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블라디미르의 야로슬라프 2세를 소환하여 다른 루스 공후들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하고 키예프 통치권을 부여했으며, 다른 공후들도 이를 따랐다. 그는 루스 공후들이나 다른 복속 지역 지도자들이 머무는 여러 도시에 자신의 사절을 파견하여 관리했다. 체르니고프의 미하일 공작은 몽골 사절 살해 및 몽골 전통 의식 거부를 이유로 바투의 명령에 의해 처형되었다. 갈리치아의 다닐로 공작 역시 사라이로 소환되어 바투에게 복종해야 했다.
바투는 조지아의 왕위 계승 문제에도 개입하여 다비드 6세 나린을 지지했으나, 이는 당시 대칸이었던 구유크 칸과의 갈등 요인이 되기도 했다. 구유크 칸은 다비드 7세 울루를 선임 왕으로 인정하고 바투가 지지한 다비드 나린에게 그를 섬기도록 명령했다. 바투와 구유크 칸 사이의 긴장은 점차 고조되었으며, 구유크 칸이 서쪽으로 이동하려 할 때 톨루이 가문의 소르칵타니 베키는 바투에게 이것이 그를 겨냥한 움직임일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몽케 칸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바투는 킵차크 칸국의 자치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는 킵차크 칸국이 사실상 독립적인 세력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키예프의 다닐로 대공은 1254년 조공을 거부하고 몽골의 바스카크(세금 징수관)를 추방하며 반기를 들었으나, 바투가 보낸 쿠룸시가 이끄는 몽골군의 공격과 본국의 지원으로 인해 결국 다시 킵차크 칸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바투는 1256년 또는 1257년에 볼가강 하류의 수도 사라이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으로는 독살설과 류마티스 질환설 등이 전해진다. 그의 사후 몽케 칸은 바투의 아들 사르타크를 후계자로 승인했다. 그러나 사르타크가 곧 사망하면서 바투의 동생인 베르케가 칸위를 계승했다. 베르케는 훌라구가 이끄는 일 칸국과 전쟁을 벌이는 등 다른 몽골계 국가들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며 킵차크 칸국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는 명목상 원나라의 카안을 상위 군주로 인정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적인 군주로 통치했다.
4. 평가와 영향
바투 칸에 대한 평가는 그가 직접적인 위협을 가했던 유럽 및 조치 울루스의 지배를 받았던 러시아와, 그가 속했던 몽골 제국 내부에서 크게 엇갈린다. 유럽과 러시아 기록에서는 바투 칸을 적에게 무자비하고 잔혹한 폭군이자 '타타르의 멍에'를 상징하는 인물로 묘사하는 경향이 강하다. 교황 사절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 역시 그의 양면성을 지적한 바 있다.
반면, 군사적으로는 어려운 전투들을 승리로 이끌며 몽골 제국이 단기간에 유럽까지 세력을 확장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의 과단하고 가혹한 일면은 칭기스 칸이 강조한 몽골 군주의 덕목, 즉 동족에게는 관대하되 적에게는 가차 없는 원칙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6]. 이러한 면모와 더불어 백성에 대한 관용과 종교적 융화 정책 덕분에 몽골인들에게는 '위대한 현군'이라는 의미의 '''사인 칸'''(Sāyin khān/Sain qan)으로 칭송받았다.
이처럼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유럽 원정 중 오고타이 가문의 구육 칸이나 차가타이 가문의 후예들과 불화를 겪은 것은 훗날 몽골 제국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4. 1. 평가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에 따르면, 바투는 "자기 백성들에게는 친절하지만, 그들에게 매우 두려움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싸움에서는 매우 잔인하며, 오랫동안 전쟁을 수행해 왔기에 전쟁에 매우 영리하고 교활했다." 그는 마르코 폴로에 의해 언급된 сайн|사얀mn(좋은 의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 윌리엄 드 루브룩은 그를 그의 군주인 존 드 보몽과 키가 비슷하며 얼굴 전체가 붉은 반점으로 덮여 있다고 묘사했다.바투 칸의 원정군에 직접적인 위협을 받았던 유럽 국가들의 기록과, 특히 조치 울루스의 지배를 받은 러시아에서는 바투 칸의 성격이 매우 격렬하고, 적에게는 용서 없는 잔혹성을 가진 인물로 여겨졌다. 정적을 암살하고, 전장에서 적을 몰살하며, 항복한 적의 귀부인 300명을 처형하는 등 수많은 잔혹 행위를 자행한, 이른바 "타타르의 멍에"를 체현하는 인물로서, 바투 칸은 악독하고 비도덕적인 폭군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13세기 중반 트란실바니아에서 러시아 초원을 거쳐 바투 칸의 궁정과 카라코룸을 방문한 교황 사절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도 "위대한 군주이지만, 도시를 용서 없이 파괴하는 폭군이기도 하다"라고 평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는 수많은 어려운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몽골 제국이 단기간에 유럽까지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투 칸의 공적이 크다. 바투 칸은 전장에서 매우 과단하고 가혹했지만, 이는 『몽골 비사』, 『집사』 등에서 칭기스 칸이 설파한 몽골 제국 군주의 덕목, 즉 동포와 아군에게는 관대하고 보상을 아끼지 않으며, 항복을 거부하거나 반역하는 적에게는 가차 없는 섬멸을 미덕으로 삼는 것에 충실했던 결과로 볼 수 있다.[16] 이에 더해 뛰어난 인물로, 백성에게는 관대하고 종교에 대해서도 융화적인 정책을 채택하여 국가의 안정을 도모했으며, 몽골인에게는 "사인 칸" (Sāyin khān/Sain qan, 위대한 현군)이라고 칭송받았다. 몽골인 이외의 역사가들로부터도 바투 칸은 군인으로서, 정치가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다만, 유럽 원정 중에 오고타이 가문의 구육 칸과 차가타이 가문의 여러 자손들과 사이가 틀어진 것은, 훗날 몽골 제국 분열의 한 원인이 되었다.
현대 매체에서도 바투 칸은 복합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2017년 러시아 영화 《퓨리어스: 쌍검의 전사》(Легенда о Коловрате)에 등장하는 바투는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의 기록처럼 복종하는 이에게는 자비롭지만 반항하는 이에게는 가차 없는 인물로 묘사된다. 영화는 랴잔 공국을 포위한 바투가 항복을 권유하지만, 주인공 예브파티 콜로브라트의 저항으로 랴잔을 공격하고, 이후 콜로브라트의 게릴라전에 맞서 싸우는 과정을 그린다. 마지막에는 콜로브라트의 용맹을 인정하며 예를 갖춰 매장하라고 명령한다. 2018년 우크라이나 영화 《글래디에이터: 희망을 위한 탈환》(Король Данило)에도 바투가 등장한다.
4. 2. 영향
바투 칸과 그의 아들 사르타크가 사망한 후, 울라그치를 위한 보라크친의 짧은 섭정 기간을 거쳐 바투의 동생 베르케가 금장 칸국을 상속받았다. 베르케는 사촌인 훌라구 칸과 전쟁을 벌이는 등 다른 몽골 가문과의 단결에는 소극적이었으나, 공식적으로는 몽케 칸과 대칸 제국을 군주로 인정했다. 그러나 사실상 베르케는 독립적인 통치자였다. 그는 바투와 달리 정복에 큰 관심은 없었으나, 헝가리 왕국의 벨라 4세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장군 보롤다이를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로 파견하기도 했다.킵차크 칸국은 루스와 유럽에서 금장 칸국(''Zolotaya Orda'')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칸의 천막이 금색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호르드(Horde)'는 몽골어 '오르다(orda/ordu)', 즉 야영지에서 유래했으며, '황금색'은 '왕족의'라는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여겨진다. 모든 칸국 중에서 금장 칸국은 가장 오랫동안 존속했다. 원나라가 중국에서 몽골 지역으로 물러나고 일 칸국이 중동에서 멸망한 이후에도, 바투 칸의 후손들은 현재의 우크라이나, 러시아, 카자흐스탄 지역의 초원을 계속 지배했다. 바투의 직계 후손들은 베르케가 사망한 지 약 100년 후인 1360년경까지 조치 울루스를 통치했으며, 이후에는 그의 형제 오르다와 투카티무르의 후손들이 금장 칸국의 왕위를 이었다.
바투 칸에 대한 평가는 지역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그의 원정으로 직접적인 위협을 받았던 유럽 국가들과, 특히 16세기 후반 중앙아시아로 진출하기 전까지 조치 울루스의 지배 아래 있었던 러시아에서는 바투 칸을 매우 격렬하고 잔혹한 인물로 기억한다. 정적을 암살하고, 전장에서는 적을 몰살했으며, 항복한 귀부인들을 처형하는 등 수많은 잔혹 행위를 저지른 인물로 묘사되며, 이른바 '타타르의 멍에'를 상징하는 악독한 폭군으로 여겨졌다. 13세기 중반 바투 칸의 궁정과 카라코룸을 방문했던 교황 사절 플라노 카르피니 역시 그를 "위대한 군주이지만, 도시를 용서 없이 파괴하는 폭군이기도 하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몽골 내부에서는 그를 다르게 평가한다. 군사적으로 수많은 어려운 전투에서 승리하며 몽골 제국이 단기간에 유럽까지 세력을 확장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전장에서의 과단함과 가혹함은 『몽골 비사』, 『집사』 등에서 강조하는 칭기스 칸의 군주 덕목, 즉 동족과 아군에게는 관대하고 보상을 아끼지 않되, 저항하거나 반역하는 적에게는 가차 없는 처단을 내리는 것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16]. 또한 백성에게 관대하고 종교적으로 융화 정책을 펼쳐 국가 안정을 도모했으며, 이로 인해 몽골인들에게는 "Sāyin khān|사인 칸mn(Sain qan)", 즉 '위대한 현군'으로 칭송받았다.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바투 칸은 몽골인 외 역사가들에게도 높이 평가받지만, 유럽 원정 중 오고타이 가문의 구육 칸 및 차가타이 가문의 여러 후손들과 관계가 틀어진 것은 훗날 몽골 제국 분열의 한 원인이 되었다.
5. 가족 관계
바투 칸의 키는 약 1.7m였다.[12] 그의 아버지는 칭기즈 칸의 장남인 조치이고, 어머니는 옹기라트 부족 출신의 우카 우진(오키 푸진)이다.[13] 우카 우진은 옹기라트 부족 수장 데이 세첸의 아들인 알치 노얀의 딸이었으며, 칭기즈 칸의 정비인 보르테는 알치 노얀의 여동생이었다. 따라서 바투의 어머니 우카 우진은 아버지 조치에게 사촌 누이가 된다.
1224년 아버지 조치가 사망하자 바투는 조치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바투의 이복 형인 오르다가 있었으나, 바투가 차남임에도 당주가 된 데에는 그의 어머니 우카 우진이 옹기라트 부족 종주 알치 노얀의 딸이었던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 칭기즈 칸의 명에 따라 손자 세대를 총괄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조치에게는 40명 이상의 아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그중 바투를 포함하여 14명의 이름과 행적이 알려져 있다. 바투의 주요 형제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설명 |
---|---|
오르다 | 이복 형. 이르티시강 유역에서 조치 울루스 좌익(동부)을 지배. |
베르케 | 바투 사후 조치 울루스를 계승. |
베르케체르 | |
시반 | 샤이반 왕조의 조상. |
탕구트 | |
보알 | 아들 타타르를 통해 노가이의 할아버지가 됨. |
치라우칸 | |
싱쿨 | 오르다 휘하의 좌익 울루스로 편입. |
친바이 | |
보라(무함마드) | |
우두르 | 오르다 휘하의 좌익 울루스로 편입. |
토카 테무르 | 아스트라한 칸국, 카잔 칸국, 크림 칸국의 하지 기레이 가문 등의 조상. 오르다 휘하의 좌익 울루스로 편입. |
센굼 | 오르다 휘하의 좌익 울루스로 편입. |
바투에게는 많은 아내(하툰)와 첩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동서양 문헌 모두에서 이름이 확인되는 인물은 정비인 보라크친 하툰뿐이다. 그녀는 알치-타타르 부족 출신이었다. 그 외에 오이라트 부족 수장 토렐치의 딸인 베키 하툰이 있었다. 베키 하툰의 자매로는 차가타이 칸국의 카라 훌레구에게 시집간 오르크나, 훌라구의 넷째 정비 올제이 하툰, 바투의 차남 토쿠칸에게 시집가 몽케 테무르와 토다 몽케를 낳은 코추 하툰이 있다.
바투 칸은 적어도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설명 |
---|---|
사르타크 | 장남 (어머니: 보라크친 하툰). 1255년부터 1256년까지 금장 칸국의 칸. 바투 사후 칸위를 계승했으나 몽골 제국 수도에서 귀환하던 중 병사. |
토쿠칸 | 차남. 그의 아들 몽케 테무르가 숙부 베르케 사후 금장 칸국을 계승. 또 다른 아들로 토다 몽케가 있음 (어머니: 코추 하툰). |
에브겐 (안데완) | 삼남. |
울라그치 | 막내아들. 형 사르타크 사후 칸위를 계승했으나 곧 요절. 사르타크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
바투와 그의 아들 사르타크가 사망하자, 울라그치를 위한 보라크친 하툰의 짧은 섭정 기간 후 바투의 동생 베르케가 금장 칸국을 상속받았다. 베르케 사후에는 바투의 손자이자 토쿠칸의 아들인 몽케 테무르가 칸위를 계승하여 바투의 직계 후손이 다시 칸위를 잇게 되었다.[12] 바투의 후손들은 1360년까지 조치 울루스를 통치했으며, 그 이후에는 그의 형제인 오르다와 토카 테무르의 후손들이 금장 칸국의 칸위를 차지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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