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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코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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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토니오 코레아는 임진왜란 시기 일본으로 끌려가 노예가 된 한국인으로, 이후 이탈리아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를 만나 유럽으로 함께 여행했다. 그의 삶과 관련하여, 1932년 이탈리아 알비 지역에 코레아의 후손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루벤스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가 코레아를 모델로 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현재는 중국 상인 이퐁을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 안토니오 코레아는 1979년 김성우 기사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으며, 뮤지컬, 소설 등으로 재해석되어 한국 문화 콘텐츠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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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코레아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안토니오 코레아
원어명Antonio Corea
거주지조선
로마

2. 임진왜란과 노예 무역

19세기 후반 이전에는 비교적 소수의 한국인만이 한반도를 떠났다.[1] 그러나 1592년~1598년 임진왜란 동안 수만 명의 한국 노예들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끌려갔으며, 첫 번째 선적은 1592년 10월에 이루어졌다. 그곳에서 그들은 주로 아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는 이 시기에 서쪽으로 지구를 일주하는 여정을 밟고 있던 피렌체 출신 상인이자 여행가였다.

2. 1. 조선인 노예의 발생

1592년~1598년 임진왜란 동안 수만 명의 한국 노예들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끌려갔으며, 첫 번째 선적은 1592년 10월에 이루어졌다.[1] 그곳에서 그들은 주로 아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는 이 시기에 서쪽으로 지구를 일주하는 여정을 밟고 있던 피렌체 출신 상인이자 여행가였다.

2. 2. 일본과 포르투갈의 노예 무역

1592년~1598년 임진왜란 동안 수만 명의 한국 노예들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끌려갔으며, 첫 번째 선적은 1592년 10월에 이루어졌다.[1] 그곳에서 그들은 주로 아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는 이 시기에 서쪽으로 지구를 일주하는 여정을 밟고 있던 피렌체 출신 상인이자 여행가였다.

3. 안토니오 코레아의 생애

안토니오 코레아(그의 유럽식 이름)는 임진왜란 동안 포로로 잡혀 나가사키로 끌려가 노예가 된 한국인이었다.[2] 1597년 6월, 카를레티는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결국 코레아와 다른 한국인 4명을 구매했다.[2] 카를레티는 자신의 여행기 ''나의 세계 일주 여행''에서 이 사실을 간략하게 기록했다.

카를레티의 여행 지도. 코레아는 1598년 3월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1602년 7월 젤란트에 도착하기까지 카를레티와 함께 여행했다.


카를레티와 코레아는 유럽에 도착할 때까지 함께 여행했다. 그들은 1598년 3월 일본을 떠나 마카오에 상륙했다. 1599년 12월 그곳을 출발하여 20일 후 말라카에 도착했다. 그들은 코친을 거쳐 1600년 3월경 고아에 도착했다. 그들은 1601년 12월 25일 갤리온 ''생 제임스''를 타고 출발했다.[3] 카를레티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 나는 그 배의 선장과 계약을 맺었고, 그는 희망봉을 18번 또는 20번이나 항해했고, 리스본에 도착할 때까지의 모든 여행 경비를 나에게 제공하기로 약속했으며, 내가 데려가는 세 명의 하인, 즉 한 명의 일본인, 한 명의 한국인, 그리고 다른 한 명의 모잠비크 이었다.

> 조선의 더 많은 해안 지방에서, 그들은 모든 연령대의 무수히 많은 남녀, 소년 소녀들을 데려왔고, 그들은 모두 매우 낮은 가격에 노예로 팔렸다. 나는 그들 중 다섯 명을 12 에스쿠도 남짓한 가격으로 샀다. 그들에게 세례를 받게 한 후, 나는 그들을 데리고 인도 고아로 가서 그들을 해방시켰다. 나는 그들 중 한 명을 데리고 피렌체로 갔고, 오늘날 그는 로마에서 발견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곳에서 안토니오로 알려져 있다.

3. 1. 프란체스코 카를레티와의 만남

안토니오 코레아(유럽식 이름)는 임진왜란 동안 포로로 잡혀 나가사키로 끌려가 노예가 된 한국인이었다.[2] 1597년 6월, 카를레티는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코레아와 다른 한국인 4명을 구매했다.[2] 카를레티는 자신의 여행기 ''나의 세계 일주 여행''에서 조선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팔렸으며, 자신도 그들 중 다섯 명을 12 에스쿠도 남짓한 가격으로 샀다고 기록했다.[2]

카를레티와 코레아는 함께 유럽으로 향했다. 1598년 3월 일본을 떠나 마카오에 상륙했고,[3] 1599년 12월에는 말라카에 도착했다.[3] 1600년 3월경 고아를 거쳐,[3] 1601년 12월 25일 갤리온 ''생 제임스''를 타고 희망봉을 돌아 리스본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카를레티는 이 배의 선장과 계약하여 자신이 데려가는 세 명의 하인(일본인, 한국인, 모잠비크 )의 모든 여행 경비를 제공받기로 했다고 기록했다.[3]

3. 2. 유럽으로의 여정



카를레티와 코레아는 유럽에 도착할 때까지 함께 여행했다. 그들은 1598년 3월 일본을 떠나 마카오에 상륙했다. 1599년 12월 그곳을 출발하여 20일 후 말라카에 도착했다. 그들은 코친을 거쳐 1600년 3월경 고아에 도착했다. 그들은 1601년 12월 25일 갤리온 ''생 제임스''를 타고 출발했다.[3] 카를레티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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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봉을 돌고 난 후, 그 배는 승객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향했다. 16세기 초 유럽인에 의해 발견된 이후, 이 섬은 아프리카를 도는 유럽 선박들에게 귀중한 기착지였다. 그러나 이곳은 선박들이 서로를 공격하면서 점점 더 위험해졌다.[4] 1602년 3월 14일, 그들은 세인트헬레나에 도착했지만, 두 척의 네덜란드 선박이 그들에게 접근했다. 그 선박들을 의심한 '생 제임스' 호의 선원들은 전투를 시작했다. 며칠 간의 싸움 끝에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하자 '생 제임스' 호는 항복했다.

네덜란드 측은 사과하며 자신들은 싸울 의도가 없었지만 '생 제임스' 호가 먼저 공격했기 때문에 대응했다고 주장했다. 네덜란드 측은 손상된 배를 수리하는 것을 도왔지만, 그 과정은 며칠이 걸렸고 배는 계속 침몰 위험에 놓여 있었다. 카를레티는 많은 귀중품을 가지고 있었기에 네덜란드 배에 탑승할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처음에 뒤에 남으라는 말을 들었다. 카를레티에 따르면, 네덜란드 측은 그 후 '생 제임스' 호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갈취하기 위한 함정을 팠다. 네덜란드 측은 생존자들에게 안전을 위해 자신들의 보트로 헤엄쳐 오라고 요청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익사했고, 헤엄쳐 온 사람들은 칼에 베여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측에 귀중품을 제공한 헤엄치는 사람들은 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카를레티는 이 맥락에서 코레아를 다시 언급한다.

카를레티와 네덜란드 배에 탑승한 다른 사람들은 인질이 되었다. 그들은 열악하고 비좁은 환경에서 갇혀 있었으며, 이로 인해 여러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들은 4월 6일 페르난두 데 노로냐 섬에 도착하여 '생 제임스' 호를 추가로 수리한 후 5월 2일에 다시 출발했다. 네덜란드 측은 많은 포르투갈 사람들을 비교적 황량한 섬에 남겨두었다.

그들은 1602년 7월 6일 또는 7월 7일, 네덜란드 제란트주 미델부르흐에 도착했다. 카를레티는 파리, 리옹, 토리노, 밀라노, 볼로냐를 거쳐 마침내 1606년 7월 12일 피렌체에 도착했다.

3. 2. 1. 세인트헬레나에서의 납치 사건

희망봉을 돌아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향한 '생 제임스' 호는 1602년 3월 14일 섬에 도착했지만, 두 척의 네덜란드 선박과 마주쳤다. 네덜란드 선박을 의심한 '생 제임스' 호의 선원들은 전투를 시작했고, 며칠 간의 싸움 끝에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하자 항복했다.[4] 네덜란드 측은 자신들은 싸울 의도가 없었지만 '생 제임스' 호가 먼저 공격했기 때문에 대응했다고 주장하며 사과했다. 네덜란드 측은 손상된 배를 수리하는 것을 도왔지만, 그 과정은 며칠이 걸렸고 배는 계속 침몰 위험에 놓여 있었다.

카를레티에 따르면, 네덜란드 측은 '생 제임스' 호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갈취하기 위한 함정을 팠다. 네덜란드 측은 생존자들에게 안전을 위해 자신들의 보트로 헤엄쳐 오라고 요청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익사했다. 헤엄쳐 온 사람들 중 귀중품을 제공한 사람들은 배에 탑승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칼에 베여 죽임을 당했다.

안토니오 코레아는 헤엄치는 법도 몰랐고, 네덜란드인들이 자신과 같은 하인이나 노예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속임수를 썼다. 그는 목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그려진 그림과 ''에케 호모'' 그림 두 개를 걸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 선원들은 그에게 큰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여 재빨리 그를 붙잡았다. 그림을 확인한 후, 그들은 그림을 돌려주고 이미 배에 있었던 코레아를 배에 머물게 했다.

이후 카를레티와 네덜란드 배에 탑승한 다른 사람들은 인질이 되어 열악하고 비좁은 환경에 갇혔으며, 이로 인해 여러 명이 사망했다.

3. 3. 유럽에서의 삶

안토니오 코레아(유럽식 이름)는 임진왜란 동안 포로로 잡혀 나가사키로 끌려가 노예가 된 한국인이었다. 1597년 6월, 카를레티는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코레아와 다른 한국인 4명을 구매했다.[2] 카를레티는 자신의 여행기 ''나의 세계 일주 여행''에서 조선에서 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팔렸으며, 자신도 그들 중 다섯 명을 12 에스쿠도 남짓한 가격으로 샀다고 기록했다. 카를레티는 이들에게 세례를 받게 한 후, 인도 고아로 데려가 해방시켰고, 그중 한 명(안토니오 코레아)을 데리고 피렌체로 갔다고 언급했다.

카를레티와 코레아는 함께 여행하며 1598년 3월 일본을 떠나 마카오에 상륙했다. 1599년 12월 마카오를 출발하여 20일 후 말라카에 도착했고, 코친을 거쳐 1600년 3월경 고아에 도착했다. 1601년 12월 25일, 코레아는 카를레티, 그리고 한 명의 일본인, 한 명의 모잠비크 흑인과 함께 갤리온 ''생 제임스''를 타고 고아를 출발했다.[3]

4. 안토니오 코레아에 대한 여러 이론들

20세기 초부터, 언론과 학계에서 코레아에 대한 많은 이론들이 반복적으로 언급되었으나, 현재 알려진 코레아에 대한 부족한 증거들로는 뒷받침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5] 이러한 이론들의 확산과 지속성은 코레아의 흥미로운 이야기, 그리고 언론과 일부 학자들의 부실한 사실 확인으로 인해 악화된 것으로 여겨진다.[5][6]
이탈리아 정착설과 후손1932년, 일본 역사학자 야마구치 마사유키(山口正之)는 이탈리아 칼라브리아주 카탄차로 인근 알비(Albi) 마을에 코레아라는 성을 가진 500명 이상이 살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안토니오 코레아의 후손들이 1620년경 이탈리아에 정착했다고 주장했다.[7][5] 1979년, 로마 거주 한국인 기자 김성우(김성우한국어)는 안토니오 코레아가 아눈치 이타라는 이탈리아 여성과 결혼했다고 추론하는 기사를 발표했다.[7]

1989년, 알비 시장은 코레아 광장에 안토니오 코레아와 아눈치 이타의 만남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설치했다.[5] 1992년 11월 초,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는 안토니우 코레아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한국 문화 단체 대표를 포함, 코레아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과 알비 시장을 한국으로 초청했다.[5]

1993년 9월 30일, MBC TV는 다큐멘터리 《안토니오 꼬레아》(안토니오 꼬레아한국어)를 방영했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알비 주민들에 대한 유전자 연구 결과가 한국인 후손임을 크게 시사하지 않는다는 점을 언급했다. 다만, 코레아의 생애 이후 수백 년이 흘렀기 때문에 현재 한국인 후손임을 감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덧붙였다.[5]

그러나 2004년, 곽차섭(곽차섭한국어)은 《조선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조선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한국어)라는 책을 통해 "코레아"라는 성을 가진 유럽인들이 안토니오 코레아의 후손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전자 검사 결과와 "코레아"라는 성이 "큐리아"라는 성에서 유래되었거나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5] 또한 "코레아"라는 성은 스페인에도 존재하여, 알비가 스페인 통치하에 있었을 때 코레아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도 제기되었다.[8]
출신지와 기타 정보김성우는 코레아가 남원시 출신이라고 주장했고, 이 주장은 수십 년 동안 반복되었지만, 이에 대한 알려진 증거는 없다.[5] 코레아가 이탈리아에서 가톨릭 성직자가 되었다는 이론도 있지만, 이 역시 알려진 증거는 없다.[5] 1965년 진단학회에서 편찬한 역사책에는 역사학자 이상백이 코레아가 노예가 되었을 당시 어린아이였다고 주장하는 기사가 실려 있는데, 이 주장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역사학자와 기자들에 의해 반복되었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5]

4. 1. 이탈리아 정착설과 후손

1932년, 일본 역사학자 야마구치 마사유키(山口正之)는 이탈리아 칼라브리아주 카탄차로 인근 알비(Albi) 마을에 코레아라는 성을 가진 500명 이상이 살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안토니오 코레아의 후손들이 1620년경 이탈리아에 정착했다고 주장했다.[7][5] 1979년, 로마 거주 한국인 기자 김성우(김성우한국어)는 안토니오 코레아가 아눈치 이타라는 이탈리아 여성과 결혼했다고 추론하는 기사를 발표했다.[7]

1989년, 알비 시장은 코레아 광장에 안토니오 코레아와 아눈치 이타의 만남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설치했다.[5] 1992년 11월 초,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는 안토니우 코레아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한국 문화 단체 대표를 포함, 코레아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과 알비 시장을 한국으로 초청했다.[5]

1993년 9월 30일, MBC TV는 다큐멘터리 《안토니오 꼬레아》(안토니오 꼬레아한국어)를 방영했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알비 주민들에 대한 유전자 연구 결과가 한국인 후손임을 크게 시사하지 않는다는 점을 언급했다. 다만, 코레아의 생애 이후 수백 년이 흘렀기 때문에 현재 한국인 후손임을 감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덧붙였다.[5]

그러나 2004년, 곽차섭(곽차섭한국어)은 《조선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조선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한국어)라는 책을 통해 "코레아"라는 성을 가진 유럽인들이 안토니오 코레아의 후손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전자 검사 결과와 "코레아"라는 성이 "큐리아"라는 성에서 유래되었거나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5] 또한 "코레아"라는 성은 스페인에도 존재하여, 알비가 스페인 통치하에 있었을 때 코레아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도 제기되었다.[8]

4. 2. 출신지와 기타 정보

김성우는 코레아가 남원시 출신이라고 주장했고, 이 주장은 수십 년 동안 반복되었지만, 이에 대한 알려진 증거는 없다.[5] 코레아가 이탈리아에서 가톨릭 성직자가 되었다는 이론도 있지만, 이 역시 알려진 증거는 없다.[5] 1965년 진단학회에서 편찬한 역사책에는 역사학자 이상백이 코레아가 노예가 되었을 당시 어린아이였다고 주장하는 기사가 실려 있는데, 이 주장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역사학자와 기자들에 의해 반복되었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5]

5. 《한복 입은 남자》와 안토니오 코레아

파울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 안토니오 코레아를 그린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중국 상인 이퐁을 그린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1983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17세기 벨기에 화가 폴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 스케치가 미국 폴 게티 박물관에 팔렸을 때, 언론들은 그림 속 주인공이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한국 사람이라고 보도했다.[9] 1934년, 영국의 미술사학자 클레어 스튜어트 워틀리는 코레아가 루벤스의 스케치, ''한복 입은 남자''의 모델이라고 주장했다.[6] 워틀리는 모델의 의상이 중국이 아닌 한국의 것이라고 제안했고,[6] 곽차섭도 2004년 저서에서 모델의 의상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를 지지했다.[7][5]

하지만 뚜렷한 이목구비 때문에 조선인이 아닐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으며,[9] 1930년대 영국의 한 전문지에 실린 그림 속 모자의 형태가 조선의 그것이라는 기사를 근거로, 조선인이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엇갈렸다.[9] 2015년 대한민국의 미술사학자 노성두는 옷이 중국의 것으로 보이며, 1606–1608년의 연대가 초상화가 1617년에 그려졌다는 설과 상충된다고 지적했다.[5][6]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교 베스트 베스트테인 교수는 2016년 《네덜란드 미술사 연보》에 발표한 논문에서 루벤스가 그린 《한복을 입은 남자》는 조선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했다.[11] 이 학자들은 루벤스의 그림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책에서 매우 유사한 그림을 발견했고, 루벤스가 자신의 스케치를 그 원본 그림을 바탕으로 했다고 제안했다. 그림의 텍스트는 그림의 모델을 이퐁이라는 중국 상인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학자들은 이퐁이 아시아에서 네덜란드 선원들을 만나 몇 달 동안 네덜란드를 방문했다는 정보를 추론할 수 있었다.[6] 국민일보 2018년 12월 27일자 보도에 따르면, 루벤스가 그린 그림은 안토니오가 아닌 중국 명나라 상인인 이퐁(Yppong, 興浦)를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11]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스케치(별칭 ''한복 입은 남자'')는 서양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6] 1934년, 영국의 미술사학자 클레어 스튜어트 워틀리는 이 그림의 모델이 안토니오 코레아일 것이라고 주장했다.[6] 워틀리는 모델의 의상이 중국이 아닌 한국의 것이라고 제안했으며,[6] 만약 이 초상화가 한국인을 그린 것이라면, 서양 화가가 그린 최초의 한국인 묘사가 될 가능성이 있다.[7][8] 이 초상화는 1983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324,000에 판매되어, 이러한 스케치로는 최고가를 기록하며 주목을 받았다.[6]

곽차섭은 2004년 저서에서 모델의 의상 분석을 바탕으로 이 이론을 지지하며, 코레아가 1606년 7월부터 1608년 10월경 로마에서 루벤스를 만났을 가능성을 제기했다.[7][5] 그러나 2015년 대한민국의 미술사학자 노성두는 초상화의 잘린 상단과 하단을 복원한 감식을 근거로 옷이 중국의 것으로 보이며, 1606–1608년의 연대가 초상화가 1617년에 그려졌다는 설과 상충된다고 지적하며 이의를 제기했다.[5][6]

2016년 Weststeijn과 Gesterkamp의 논문은 모델에 대한 또 다른 이론을 제시했다.[6] 이들은 루벤스의 그림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책에서 매우 유사한 그림을 발견하고, 루벤스가 자신의 스케치를 그 원본 그림을 바탕으로 했다고 제안했다. 그림의 텍스트는 모델을 이퐁이라는 중국 상인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퐁이 아시아에서 네덜란드 선원들을 만나 몇 달 동안 네덜란드를 방문했다는 정보를 추론했다.[6] 코레아는 이퐁이 아시아로 돌아간 지 1년이 조금 넘어서 네덜란드에 도착했다.[6]

5. 1. 그림의 모델 논란



1983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17세기 벨기에 화가 폴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 스케치가 미국 폴 게티 박물관에 팔렸을 때, 언론들은 그림 속 주인공이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한국 사람이라고 보도했다.[9] 1934년, 영국의 미술사학자 클레어 스튜어트 워틀리는 코레아가 루벤스의 스케치, ''한복 입은 남자''의 모델이라고 주장했다.[6] 워틀리는 모델의 의상이 중국이 아닌 한국의 것이라고 제안했고,[6] 곽차섭도 2004년 저서에서 모델의 의상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를 지지했다.[7][5]

하지만 뚜렷한 이목구비 때문에 조선인이 아닐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으며,[9] 1930년대 영국의 한 전문지에 실린 그림 속 모자의 형태가 조선의 그것이라는 기사를 근거로, 조선인이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엇갈렸다.[9] 2015년 대한민국의 미술사학자 노성두는 옷이 중국의 것으로 보이며, 1606–1608년의 연대가 초상화가 1617년에 그려졌다는 설과 상충된다고 지적했다.[5][6]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교 베스트 베스트테인 교수는 2016년 《네덜란드 미술사 연보》에 발표한 논문에서 루벤스가 그린 《한복을 입은 남자》는 조선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했다.[11] 이 학자들은 루벤스의 그림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책에서 매우 유사한 그림을 발견했고, 루벤스가 자신의 스케치를 그 원본 그림을 바탕으로 했다고 제안했다. 그림의 텍스트는 그림의 모델을 이퐁이라는 중국 상인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학자들은 이퐁이 아시아에서 네덜란드 선원들을 만나 몇 달 동안 네덜란드를 방문했다는 정보를 추론할 수 있었다.[6] 국민일보 2018년 12월 27일자 보도에 따르면, 루벤스가 그린 그림은 안토니오가 아닌 중국 명나라 상인인 이퐁(Yppong, 興浦)를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11]

5. 2. 미술사적 의의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스케치(별칭 ''한복 입은 남자'')는 서양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6] 1934년, 영국의 미술사학자 클레어 스튜어트 워틀리는 이 그림의 모델이 안토니오 코레아일 것이라고 주장했다.[6] 워틀리는 모델의 의상이 중국이 아닌 한국의 것이라고 제안했으며,[6] 만약 이 초상화가 한국인을 그린 것이라면, 서양 화가가 그린 최초의 한국인 묘사가 될 가능성이 있다.[7][8] 이 초상화는 1983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324,000에 판매되어, 이러한 스케치로는 최고가를 기록하며 주목을 받았다.[6]

곽차섭은 2004년 저서에서 모델의 의상 분석을 바탕으로 이 이론을 지지하며, 코레아가 1606년 7월부터 1608년 10월경 로마에서 루벤스를 만났을 가능성을 제기했다.[7][5] 그러나 2015년 대한민국의 미술사학자 노성두는 초상화의 잘린 상단과 하단을 복원한 감식을 근거로 옷이 중국의 것으로 보이며, 1606–1608년의 연대가 초상화가 1617년에 그려졌다는 설과 상충된다고 지적하며 이의를 제기했다.[5][6]

2016년 Weststeijn과 Gesterkamp의 논문은 모델에 대한 또 다른 이론을 제시했다.[6] 이들은 루벤스의 그림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책에서 매우 유사한 그림을 발견하고, 루벤스가 자신의 스케치를 그 원본 그림을 바탕으로 했다고 제안했다. 그림의 텍스트는 모델을 이퐁이라는 중국 상인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퐁이 아시아에서 네덜란드 선원들을 만나 몇 달 동안 네덜란드를 방문했다는 정보를 추론했다.[6] 코레아는 이퐁이 아시아로 돌아간 지 1년이 조금 넘어서 네덜란드에 도착했다.[6]

6. 안토니오 코레아에 대한 논란과 진실



1983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17세기 벨기에(당시 플랑드르) 화가 폴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 스케치가 미국 폴 게티 박물관에 팔렸는데, 당시 언론들은 그림 속 주인공이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한국 사람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 보도는 아직 진위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 뚜렷한 이목구비 때문에 조선인이 아닐 것이라는 의견과 1930년대 영국의 한 전문지에 실린 그림 속 모자의 형태가 조선의 그것이라는 기사를 근거로, 조선인이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9]

1989년 당시 한국일보 특파원이었던 김성우 씨가 안토니오 꼬레아의 후예들이 사는 집성촌이 이탈리아 남부에 있다고 보도하면서 그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했으며, 집성촌으로 지목된 알비 마을은 시칠리아 섬 맞은편에 있는 해발 1천 미터의 외딴 마을이다.[10]

하지만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교 베스트 베스트테인 교수가 연구한 논문을 2016년 《네덜란드 미술사 연보》에서 발표함으로써 루벤스가 그린 《한복을 입은 남자》는 조선사람이 아닌 것으로 즉 한국사람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11] 국민일보 2018년 12월 27일자 보도에 따르면, 안토니오라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살았던 조선인이 있던 것은 맞지만, 루벤스가 그린 그림은 안토니오가 아닌 중국 명나라 상인인 이퐁(Yppong, 興浦)를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11]

6. 1. 실존 여부 논란



1983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17세기 벨기에(당시 플랑드르) 화가 폴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 스케치가 미국 폴 게티 박물관에 팔렸는데, 당시 언론들은 그림 속 주인공이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한국 사람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 보도는 아직 진위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 뚜렷한 이목구비 때문에 조선인이 아닐 것이라는 의견과 1930년대 영국의 한 전문지에 실린 그림 속 모자의 형태가 조선의 그것이라는 기사를 근거로, 조선인이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9]

1989년 당시 한국일보 특파원이었던 김성우 씨가 안토니오 꼬레아의 후예들이 사는 집성촌이 이탈리아 남부에 있다고 보도하면서 그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했으며, 집성촌으로 지목된 알비 마을은 시칠리아 섬 맞은편에 있는 해발 1천 미터의 외딴 마을이다.[10]

하지만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교 베스트 베스트테인 교수가 연구한 논문을 2016년 《네덜란드 미술사 연보》에서 발표함으로써 루벤스가 그린 《한복을 입은 남자》는 조선사람이 아닌 것으로 즉 한국사람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11] 국민일보 2018년 12월 27일자 보도에 따르면, 안토니오라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살았던 조선인이 있던 것은 맞지만, 루벤스가 그린 그림은 안토니오가 아닌 중국 명나라 상인인 이퐁(Yppong, 興浦)를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11]

6. 1. 1. 루벤스의 그림과 관련된 논란



1983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17세기 벨기에(당시 플랑드르) 화가 폴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 스케치가 미국 폴 게티 박물관에 팔렸는데, 당시 언론들은 그림 속 주인공이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한국 사람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 보도는 아직 진위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 뚜렷한 이목구비 때문에 조선인이 아닐 것이라는 의견과 1930년대 영국의 한 전문지에 실린 그림 속 모자의 형태가 조선의 그것이라는 기사를 근거로, 조선인이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9]

1934년, 영국의 미술사학자 클레어 스튜어트 워틀리는 코레아가 플랑드르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스케치, 비공식적으로 ''한복 입은 남자한국어''의 모델이라고 주장했다.[6] 모델의 정체성과 민족조차 확실하지 않지만, 워틀리는 모델의 의상이 중국이 아닌 한국의 것이라고 제안했다.[6]

곽차섭은 2004년 저서에서 이 이론에 대해 언급하며, 모델의 의상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바탕으로 이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또한 코레아가 1606년 7월부터 1608년 10월경 로마에서 루벤스를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하지만 여전히 불확실하다).[7][5] 2015년, 대한민국의 미술사학자 노성두는 이러한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옷이 중국의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으며, 1606–1608년의 연대가 일반적으로 초상화가 1617년에 그려졌다는 설과 상충된다고 지적했다.[5][6]

하지만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교 베스트 베스트테인 교수가 연구한 논문을 2016년 《네덜란드 미술사 연보》에서 발표함으로써 루벤스가 그린 《한복을 입은 남자》는 조선사람이 아닌 것으로 즉 한국사람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11] Weststeijn과 Gesterkamp의 논문은 모델에 대한 또 다른 이론을 제시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6] 이 학자들은 루벤스의 그림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책에서 매우 유사한 그림을 발견했다. 그들은 루벤스가 자신의 스케치를 그 원본 그림을 바탕으로 했다고 제안했다. 그림의 텍스트는 그림의 모델을 이퐁이라는 중국 상인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학자들은 이퐁이 아시아에서 네덜란드 선원들을 만나 몇 달 동안 네덜란드를 방문했다는 정보를 추론할 수 있었다. 코레아는 이퐁이 아시아로 돌아간 지 1년이 조금 넘어서 네덜란드에 도착했다.[6] 국민일보 2018년 12월 27일자 보도에 따르면, 안토니오라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살았던 조선인이 있던 것은 맞지만, 루벤스가 그린 그림은 안토니오가 아닌 중국 명나라 상인인 이퐁(Yppong, 興浦)를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11]

7. 안토니오 코레아의 유산

안토니오 코레아의 이야기는 김성우의 1979년 기사 이후 대한민국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5] 코레아에 대한 관심은 일본 침략 시작 400주년이 되는 1992년에 절정에 달했다. 그 해, 코레아의 이야기에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뮤지컬 ''불멸의 피리''가 제작되었다. 1993년, 작가 오세영은 코레아의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을 출판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94년까지 2백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이 무렵, 또 다른 소설 ''안토니오 꼬레아''가 출판되었다.[5] 2015년, 박근혜 대한민국 대통령은 ''한국 의상을 입은 남자'' 초상화가 소장된 J. 폴 게티 미술관을 방문했다.[6]

참조

[1] 논문 Migration and the Korean Diaspora: A Comparative Description of Five Cases https://www.tandfonl[...] 2012-03
[2] 웹사이트 포르투갈에 끌려온 조선인 노예를 생각하다 https://www.pressian[...] 2024-02-26
[3] 서적
[4] 웹사이트 The Early Years ⋅ Saint Helena Island Info ⋅ About St Helena, in the South Atlantic Ocean https://sainthelenai[...] 2024-04-25
[5] 웹사이트 루벤스 作 〈한복 입은 남자〉로 본 神話의 탄생과 소멸 http://monthly.chosu[...] 2024-04-14
[6] 웹사이트 "[단독] \"루벤스 '한복 입은 남자' 주인공은 조선인 아닌 중국상인 이퐁\"" https://www.kmib.co.[...] 2024-02-09
[7] 웹사이트 Following the trail of "The Korean Man" https://koreajoongan[...] 2024-02-09
[8] 웹사이트 The Secret of Korean Man Painted by Rubens https://www.donga.co[...] 2024-02-09
[9] 웹인용 드로잉 명화전-한국방송 뉴스, 최서희 기자, 2003년 12월 24일자. https://web.archive.[...] 2008-04-23
[10] 간행물 물랭칼럼 : 안토니오 코레아의 미소, 신근수 프랑스 물랭호텔대표,〈파리 에세이〉 2006년 5월 4일자 http://www.francezon[...]
[11] 웹인용 "[단독] “루벤스 ‘한복 입은 남자’ 주인공은 조선인 아닌 중국상인 이퐁”" http://news.kmib.co.[...] 2020-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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