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 슈나이더
1. 개요
로미 슈나이더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배우로, 1938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1953년 영화 《다시 하얀 라일락이 피면》으로 데뷔했으며, 《프린세스 시시》 시리즈에서 엘리자베트 황후 역을 맡아 유럽 영화계의 톱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프랑스로 건너가 알랭 드롱과 교제하며 프랑스 영화에 출연했고, 할리우드에도 진출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1960년대 후반 프랑스 영화계에 복귀하여 《지난 날들...》, 《세자르와 로잘리》,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며 두 차례 세자르상을 수상했다. 1982년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그녀의 삶과 연기 경력은 유럽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본명 | 로제마리 막달레나 알바흐 |
|---|---|
| 다른 이름 | 로미 슈나이더-알바흐 |
| 출생일 | 1938년 9월 23일 |
| 출생지 | 빈, 독일 제국 |
| 사망일 | 1982년 5월 29일 (43세) |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
| 매장지 | 부아시-상-자부아르, 프랑스 |
| 국적 | 오스트리아, 서독, 프랑스 |
| 직업 | 배우 |
| 활동 기간 | 1953년–1982년 |
| 배우자 | 해리 메옌 (1966년 결혼, 1975년 이혼) 다니엘 비아시니 (1975년 결혼, 1981년 이혼) |
|---|---|
| 파트너 | 알랭 들롱 (1958년–1964년) (1981년–1982년; 그녀의 사망까지) |
| 자녀 | 2명 (사라 비아시니 포함) |
| 부모 | 볼프 알바흐-레티 (아버지) 마그다 슈나이더 (어머니) |
| 친척 | 로사 알바흐-레티 (할머니) |
| 프린세스 시씨 (1955년) (1962년) 태양이 알고 있다 (1969년) 저녁 놀 (1972년) 루트비히 (1972년) 추상 (1975년) 상 수시의 여인 (1982년) |
| 세자르 상 - 여우주연상 | 1975년 - L'important c'est d'aimer 1978년 - 평범한 사랑 이야기 |
|---|---|
| 세자르 상 - 명예상 | 200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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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프랑스로 이민간 사람 -
루트비히 뵈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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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프랑스로 이민간 사람 -
마리 다구
마리 다구는 다니엘 스턴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프랑스의 작가이자 사상가로, 프란츠 리스트와의 관계로도 유명하며 여성의 권리 신장과 사회 참여를 옹호하는 역사 및 사회 관련 저서를 다수 집필했다. -
오스트리아의 여자 영화 배우 -
엘리자베스 트리센나
엘리자베스 트리센나는 1964년 데뷔하여 연극 무대에서 성공을 거두고 영화에도 출연했으며, 1981년 독일 비평가상을 수상한 독일 배우이다. -
오스트리아의 여자 영화 배우 -
나자 틸러
나자 틸러는 1929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미스 오스트리아로 선출된 후 12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으며, 영화 《로즈마리》로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고 배우 발터 길러와 결혼하여 2023년 사망했다. -
1938년 출생 -
백낙청
백낙청은 대한민국의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사회운동가로서, 《창작과비평》 창간, D. H. 로런스 연구, 유신 정권 비판, 남북 화해와 통일 운동 참여, 민족 문학론과 분단 극복론 주창 등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
1938년 출생 -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는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 페루 중앙준비은행 총재, 에너지광산부 장관, 경제재정부 장관, 총리 등을 역임했으며, 2016년 대선에서 당선되었으나 오데브레히트 스캔들로 인해 2018년에 사임했다.
2. 초기 생애
로미 슈나이더는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 제국에 병합(안슐루스)된 지 6개월 후 비엔나에서 로즈마리 막달레나 알바흐(Rosemarie Magdalena Albach)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볼프 알바흐-레티는 비엔나 폴크스테아터의 주연 배우였고, 어머니 마그다 슈나이더는 독일에서 많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였다. 할머니 로자 알바흐-레티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배우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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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가 태어난 지 4주 후, 부모는 그녀를 독일 쾨니히스 호수 인근 쇤아우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그녀와 남동생 볼프-디터(1941년 출생)는 조부모 프란츠 자버와 마리아 슈나이더와 함께 자랐다. 부모는 연기 활동으로 인해 거의 자리에 없었고, 1943년에 별거, 1945년에 이혼했다.
1944년 9월, 슈나이더는 쇤아우의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1949년 7월부터 잘츠부르크 근처 엘스베텐에 있는 아우구스티노 수도원 노트르담 마리아 수녀회의 사립 중등학교인 여자 기숙 학교에 다녔다. 학창 시절, 그녀는 연기에 대한 열정을 발견했고, 기숙 학교의 연극 공연에서 자주 무대에 올랐다. 1953년 7월 12일, 그녀는 미틀레 레페 학위를 받고 골덴슈타인 기숙 학교를 떠났다.
1945년 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 마그다는 슈나이더와 그녀의 남동생을 돌보았고, 그녀의 경력을 감독했으며 종종 딸과 함께 출연했다.
3. 배우 경력
슈나이더는 15세 때 《하얀 라일락이 다시 필 때》(1953)에 출연하며 영화계에 데뷔했고, 1954년에는 Mädchenjahre einer Königin에서 젊은 빅토리아 여왕 역을 맡아 처음으로 왕족을 연기했다. 이후 《시씨》(1955)와 두 편의 속편(1956, 1957)에서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황후 역을 맡아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시씨(Sissi)"는 그녀의 애칭이 되었다. 이 시기 동안 《소녀와 전설》(1957), 《몽피》(1957)에도 출연했다.
1958년, 슈나이더는 영화 크리스틴 촬영 중 만난 알랭 드롱과 사랑에 빠져 파리로 이주했고, 1959년에 약혼을 발표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오슨 웰스의 심판(1962), 루키노 비스콘티의 보카치오 70(1962) 등에 출연했다. 할리우드에서는 잭 레먼과 굿 네이버 샘(1964), 피터 오툴, 피터 셀러스, 우디 앨런과 왓츠 뉴 푸시캣?(1965)에 출연했다.
슈나이더와 드롱은 1964년 12월에 헤어졌지만, 평생 가까운 친구로 남았고 라 피시느(수영장, 1968) 등에서 함께 작업했다.
1970년대에 슈나이더는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하며 클로드 소테 감독과 《삶의 한 방식》(1970), 《막스와 고물상》(1971), 《세자르와 로잘리》(1972) 등 5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비스콘티 감독의 《루트비히》(1973)에서는 더욱 성숙한 엘리자베트 황후를 연기했다. 슈나이더는 《중요한 건 사랑한다는 거야》(1974)와 《단순한 이야기》(1978)로 세자르상 여우주연상을 두 번 수상했다.
1979년 프랑스 국세청으로부터 막대한 추징 과세를 당해 파산하게 된 후, 슈나이더는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1980년 베르트랑 타베르니에의 《죽음의 감시》, 1981년 《가드 아 뷰》에 출연했다. 1981년 아들 다비드가 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지만, 유작 《방랑자》(1982)에서 나치 희생 여성과 현대 여성의 2역을 연기했다.
3.1. 초기 경력 (1953-1957)
슈나이더는 15세 때 《하얀 라일락이 다시 필 때》(1953)에 출연하여 영화계에 데뷔했다. 1954년에는 오스트리아 영화 Mädchenjahre einer Königin에서 젊은 빅토리아 여왕 역을 맡아 처음으로 왕족을 연기했다.
슈나이더는 시씨(1955)와 두 편의 속편 시씨 - 젊은 여왕(1956), 시씨 - 여황제의 운명의 해(1957)에서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황후 역을 맡아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세 편의 영화에는 카를하인츠 뵘이 함께 출연했으며, 그는 슈나이더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 시기에 슈나이더는 호르스트 부흐홀츠와 함께 《소녀와 전설》(1957)과 헬무트 카우트너가 연출하고 부흐홀츠와 다시 함께 출연한 《몽피》(1957)에도 출연했다.
3.2. 프랑스 진출과 알랭 드롱과의 만남 (1958-1964)
슈나이더는 막스 오퓔스의 1933년 영화 사랑의 유희(그녀의 어머니 마그다 슈나이더가 같은 역할을 맡았었다)의 리메이크작인 크리스틴(1958)에 출연했다. 영화 크리스틴 촬영 중, 공동 출연한 프랑스 배우 알랭 드롱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그를 따라 파리로 가기 위해 서독을 떠났고, 1959년에 약혼을 발표했다.
프랑스에서 살면서 활동하기로 결정한 슈나이더는 오슨 웰스 감독의 관심을 얻어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을 바탕으로 한 심판(1962)에 출연했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연출 아래, 존 포드의 연극 아, 불쌍한 창녀(1961)에서 안나벨라 역(드롱은 조반니 역)을 맡았고, 영화 보카치오 70(세그먼트: "직업")에 출연하여 테아트르 모데른에서 공연했다. 1962년, 슈나이더는 사샤 피토에프가 연출한 안톤 체호프의 연극 갈매기에서 안나 역을 맡아 테아트르 모데른에서 공연했다.
1964년 12월, 슈나이더와 드롱은 헤어졌고, 드롱은 나중에 나탈리 드롱과 결혼했다가 1969년에 이혼했다.
3.3. 할리우드 진출과 국제적 명성 (1963-1965)
슈나이더는 할리우드에서 잭 레먼과 함께 코미디 영화 굿 네이버 샘(1964)에 출연했고, 피터 오툴, 피터 셀러스, 우디 앨런과 함께 왓츠 뉴 푸시캣?(1965)에 출연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또한, 《추기경》으로 골든 글로브상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3.4. 프랑스 영화계 복귀와 전성기 (1966-1978)
1970년대에 슈나이더는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클로드 소테 감독과 함께 5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미셸 피콜리와 함께 출연한 첫 작품 《삶의 한 방식》(1970)은 슈나이더를 프랑스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이후 필름 느와르 스릴러 《막스와 고물상》(1971)에 출연했고, 《세자르와 로잘리》(1972)에서는 이브 몽탕과 함께 연기했다.
루트비히 2세의 일생을 다룬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루트비히》(1973)에서 슈나이더는 더욱 성숙하고 현실적인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황후를 연기했다. 슈나이더는 "시시는 오트밀처럼 나에게 달라붙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파리 매치》는 1971년에 "그레타 가르보와 마를레네 디트리히 이후 40년, 마릴린 먼로 이후 15년 만에 스크린에 다시 위대한 스타가 나타났다."라고 평했다.
이 시기 슈나이더는 클로드 샤브롤의 스릴러 《기차》(1973), 로드 스테이거와 함께 출연한 《더러운 손을 가진 순진한 사람들》(1975), 《옛 총》(1975) 등에도 출연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1974)으로 첫 번째 세자르상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5년 후 소테 감독과 마지막으로 함께 작업한 《단순한 이야기》(1978)로 다시 한번 이 상을 받았다.
1974년에는 안제이 줄라우스키 감독의 영화 《중요한 건 사랑한다는 거야》에서 몰락한 여배우를 연기했다. 이 영화로 로미는 제1회 세자르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프랑스 영화계의 톱 여배우가 되었다.
1975년에는 《추억》이 프랑스 전역에서 336만 명을 동원하며, 로미의 후반생에서 최대 흥행작이 되었다.
1978년, 로미 & 클로드 소테 감독 콤비의 마지막 작품이 된 《평범한 사랑 이야기》에서 싱글맘으로 출산을 결심하는 히로인을 연기하여 두 번째 세자르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이탈리아에서는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을 수상했다.
3.5. 후기 활동 (1979-1982)
1979년, 프랑스 국세청으로부터 과거 납세 의무 문제로 막대한 추징 과세를 당해 사실상 파산하게 된다. 어린 나이에 스타가 되어 돈에 무관심했고 늘 남에게 맡겼던 로미는 큰 충격을 받았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까지 더해져 알코올과 약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남편 비아시니(Daniel Biasini)와의 관계도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1980년 베르트랑 타베르니에의 《죽음의 감시》에서 뇌에 카메라를 이식한 저널리스트(하비 케이틀)를 통해 자신의 마지막 날을 국가 텔레비전으로 시청하는 죽어가는 여성을 연기했다. 1981년 미셸 세로와 리노 벤추라와 함께 《가드 아 뷰》에 출연했다.
1981년 5월에는 종양으로 오른쪽 신장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5일, 14세 아들 다비드가 철제 울타리를 넘다 미끄러져 쇠꼬챙이에 몸이 관통되는 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며칠 후 장례는 알랭 드롱이 주선했다.
그녀의 유작은 《방랑자》(1982)로, 나치에 희생당하는 여성과 현대 여성의 2역을 연기했다.
4. 개인사
로미 슈나이더는 1958년 영화 《사랑의 찬가》에서 함께 출연한 알랭 드롱과 사랑에 빠져 약혼했으나, 1964년에 파혼했다. 이들의 약혼과 결별은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다.
1965년 4월, 독일의 연출가 겸 배우 Harry Meyen영어과 연인 관계가 되었고, 1966년 7월에 결혼했다. 1966년 12월, 베를린에서 아들 다비트 크리스토퍼를 출산했다. 그러나 1975년 7월, 로미와 마이엔은 이혼했고, 아들 다비트의 친권은 로미가 가졌다.
1975년 12월, 개인 비서였던 Daniel Biasini프랑스어와 재혼했다. 1977년 7월, 둘째 딸 사라 마그달레나를 출산했다. 그러나 1981년 10월, 두 사람은 이혼했다.
1971년에는 서독 잡지 《슈테른》 표지에 "우리는 낙태를 했다!"(Wir haben abgetrieben!독일어)라는 문구와 함께 낙태 사실을 고백한 28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등장했다.
1981년 7월 5일, 14세의 아들 다비드가 비아시니 부모의 집 울타리를 넘다가 미끄러져 철제 쇠꼬챙이에 몸이 관통되는 사고로 사망했다. 며칠 후 장례는 알랭 드롱이 주선했다.
5. 죽음
슈나이더는 1982년 5월 29일 파리 아파트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수사 판사로랑 다베나프랑스어는 그녀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클로드 페탱은 슈나이더의 심장마비가 몇 달 전에 받은 신장 수술로 인해 약해진 심장 때문이라고 말했다. 슈나이더는 아들의 죽음 이후 과도하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으나, 친구이자 로랑 페탱의 시누이인 클로드 페탱은 사망 당시에는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자연사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이블린 주 부아시상아부아르에 있는 묘비에는 그녀의 출생 이름인 로즈마리 알바흐(Rosemarie Albach)가 새겨져 있다. 장례식에는 장클로드 브리알리, 미셸 피콜리, 장루 다바디, 장 로슈포르가 참석했다. 알랭 드롱은 그녀의 아들 다비드를 같은 묘에 묻도록 조치했다.
6. 유산 및 평가
로미 슈나이더는 뛰어난 연기력과 다채로운 매력으로 유럽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로 평가받는다. 그녀의 이름을 딴 로미 슈나이더상은 1984년 프랑스 언론인 외젠 모이노가 제정하였으며, 프랑스 영화계의 유망한 여배우에게 수여되는 가장 권위 있는 상 중 하나이다. 이 상은 매년 파리에서 패트릭 드와르상(구 장 가뱅상)과 함께 심사위원단에 의해 수여된다. 1990년, 오스트리아 신문 쿠리어는 슈나이더를 기리는 로미 TV상을 제정했다. 2003년, 독일 TV 프로그램 Unsere Besten(100 Greatest Britons의 독일 버전)에서 가장 위대한 독일인 목록 중 78위에 선정되었으며, 이 목록에서 두 번째로 높은 순위의 여배우였다(마를렌 디트리히는 50위). 2002년까지 오스트리아 연방 철도 InterCity 서비스 IC 535는 빈 쥐트반호프에서 그라츠로 운행되었으며 "로미 슈나이더"라는 이름이 붙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은 부분적으로 그녀에게 헌정되었다. 슈나이더의 삶에 대한 영화 Eine Frau wie Romy/Une femme comme Romy(A Woman Like Romy)는 워너 브라더스에서 2009년에 제작될 예정이었으나, 2009년 7월에 취소되었다. 그녀에 관한 뮤지컬 Romy – Die Welt aus Gold(Romy – The Golden World)는 2009년 하일브론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2009년 11월, ARD는 제시카 슈바르츠가 주연을 맡은 장편 영화를 방송했다. 에밀리 아테프의 영화 3일의 키브롱(2018)은 슈나이더의 1981년 프랑스 도시 키브롱에서의 에피소드를 묘사한다.
2020년 9월 23일, 구글은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아이슬란드, 우크라이나에서 그녀의 82번째 생일을 구글 두들로 기념했다. 문화 방송사 아르테는 로미 슈나이더와 알랭 드롱에게 다큐멘터리 Romy and Alain – The Eternal Betrothed(2022)를 헌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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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작품 목록
| 개봉 연도 | 한국어 제목 원제 | 배역 | 비고 |
|---|---|---|---|
| 1953 | 다시 하얀 라일락이 피면 Wenn der weiße Flieder wieder blüht | 에프헨 | 데뷔작 |
| 1954 | 여왕 폐하, 젊으시네 Mädchenjahre einer Königin | 빅토리아 | |
| 1955 | 프린세스 시시 Sissi | 시시 | |
| 1956 | 젊은 황후 시시 Sissi - Die junge Kaiserin | 시시 | |
| 1957 | 몽쁘띠 나의 사랑 Monpti | 안느클레르 | |
| 시시, 어느 황후의 운명의 세월 Sissi - Schicksalsjahre einer Kaiserin | 시시 | ||
| 1958 | 제복의 처녀 Mädchen in Uniform | 마누엘라 폰 마인하르디스 | |
| 사랑은 하나로 Christine | 크리스틴 | ||
| 섹시 걸 Die Halbzarte | 니콜 | ||
| 1960 |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 | 프레디의 연인 | 카메오 출연 |
| 1962 | 보카치오 '70 Boccaccio '70 | 푸페 | 제3화 '일하는 중' |
| The Trial | 레니 | ||
| 1963 | 승리자 The Victors | 레진 | |
| 추기경 The Cardinal | 안네마리 | ||
| 1964 | 안녕, 내 사랑 Good Neighbor Sam | 자넷 | |
| 1965 | 무엇이 새롭냐고 물으신다면 What's New, Pussycat | 캐롤 웰너 | |
| 1966 | 여름 밤의 10시 30분 10:30 P.M. Summer | 클레어 | |
| 트리플 크로스 Triple Cross | 백작 부인 | ||
| 1968 | 지옥의 거래 Otley | 이모젠 | |
| 태양이 알고 있다 La Piscine | 마리안느 | ||
| 1970 | 새벽의 포장 도로 My Son My Lover | 프란체스카 | |
| 지난 날들... Les Choses de la vie | 엘렌 | ||
|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Qui? | 마리나 | ||
| 1971 | 스트라이커/사랑과 영광의 필드 Bloomfield | 니라 | 일본에서는 비디오 출시만 |
| 맥스와 릴리 Max et les Ferrailleurs | 릴리 | ||
| 1972 | 저녁놀 César et Rosalie | 로잘리 | |
| 암살자의 멜로디 The Assassination of Trotsky | 지타 사무엘스 | ||
| 루트비히 Ludwig | 엘리자베트 | ||
| 1973 | 이별 Le Train | 안나 | |
| 1974 | 로미 슈나이더의 정사 Un amour de pluie | 엘리자베트 | 일본에서는 비디오 출시만 |
| 지옥의 귀부인 Le Trio infernal | 필로메나 | ||
| 1975 |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 L'important c'est d'aimer | 나딘 | 세자르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
| 추억 Le Vieux fusil | 클레어 | ||
| 1976 | 한없이 사랑에 불타서 Une femme à sa fenêtre | 마고 산토리니 | |
| 1977 | 눈 속에 핀 장미 Gruppenbild mit Dame | 레니 | 일본에서는 TV 방영만 |
| 1978 | 단순한 사랑 이야기 Une histoire simple | 마리 | 세자르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
| 1979 | 화려한 상속녀 Bloodline | 엘렌 로프-마르탱 | |
| 1980 | 화려한 여 은행가 La Banquière | 엠마 에케르 | |
| La mort en direct | 캐서린 | ||
| 1981 | 억류 Garde à vue | 샹탈 | |
| 1982 | 상수시의 여인 La Passante du Sans-Souci | 엘자/리나 | |
| 2009 | 지옥 L'Enfer d'Henri-Georges Clouzot | 1964년에 제작이 시작되었지만 미완성으로 끝난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의 남겨진 필름과 관계자의 증언으로 구성된 다큐멘터리. |
8. 수상 내역
| 연도 | 상 | 부문 | 작품 | 결과 |
|---|---|---|---|---|
| 1957 | 밤비상 | 시씨 | 후보 | |
| 1957 | 브라보 오토 | 동상 | ||
| 1958 | 금상 | |||
| 1959 | 은상 | |||
| 1963 | Étoile de Cristal프랑스어 | 최우수 외국 여배우상 | 심판 | 수상 |
| 1963 | 골든 글로브상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 | 추기경 | 후보 | |
| 1971 | 브라보 오토 | 은상 | ||
| 1972 | 브라보 오토 | 동상 | ||
| 1975 | 제1회 세자르상 | 세자르상 여우주연상 | 사랑의 선택 | 수상 |
| 1976 | 제2회 세자르상 | 세자르상 여우주연상 | 창가에 앉은 여자 | 후보 |
| 1977 | 브라보 오토 | 동상 | ||
| 1977 | 독일 영화상 | 여우주연상 | 어떤 귀부인의 초상 | 수상 |
| 1978 | 제4회 세자르상 | 세자르상 여우주연상 | 단순한 이야기 | 수상 |
| 1979 | 제5회 세자르상 | 세자르상 여우주연상 | 클레르 드 팜 | 후보 |
| 1979 |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 | 평생 공로상 | 수상 | |
| 1982 | 제8회 세자르상 | 세자르상 여우주연상 | 상수시의 통행인 | 후보 |
| 2008 | 제33회 세자르상 | 명예 세자르상 |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