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상드르 밀랑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알렉상드르 밀랑은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변호사, 국회의원, 장관, 총리,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급진 사회주의자로 정계에 입문하여 상무부 장관과 공공 사업, 우편 및 전신부 장관을 지냈으며, 두 차례 전쟁 장관을 역임했다. 이후 보수주의 성향으로 전환하여 총리, 그리고 1920년에는 프랑스 대통령이 되었으나, 좌익 연합의 승리 후 사임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프랑스의 대통령 - 에마뉘엘 마크롱
에마뉘엘 마크롱은 프랑스의 정치인이자 "앙 마르슈!(En Marche!)"를 창당하여 중도주의 정책을 표방하며 2017년과 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프랑스의 현직 대통령이다. - 프랑스의 대통령 - 샤를 드골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장군이자 정치가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자유 프랑스 운동을 이끌고 전후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프랑스 해방과 재건에 기여했으나, 독단적인 성격과 국수주의적 경향으로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 프랑스의 외무장관 - 폴 레노
폴 레노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대의원으로 활동하며 독일 배상금 문제에 관여했고, 세계 대공황 시기에는 영국과의 동맹을 지지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총리로 임명되었으나 독일의 침공으로 사임하고 수감되었다가 해방된 후 유럽 연합 구성을 지지했다. - 프랑스의 외무장관 - 에두아르 에리오
에두아르 에리오는 프랑스의 급진사회당 정치인으로, 리옹 시장과 세 차례의 총리를 역임하며 초기에는 독일과의 협력, 소비에트 연방과의 외교 관계 강화를 추구했고, 인민전선에 참여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비시 정권의 협력 제안을 거부하고 제4공화국에서 국민의회 의장을 맡기도 했다. -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 피에르 모루아
피에르 모루아는 릴 시장, 프랑스 총리, 상원 의원을 역임했으며, 주 40시간 근무제 단축 등 노동자 중심의 정책을 시행하고 사회당 제1서기 및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의장으로 활동한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치인이다. -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 모리스 메를로퐁티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20세기 프랑스의 현상학자이자 철학자로, 신체성과 지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정신-신체 이원론을 넘어서는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구축하여 현상학, 인지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알렉상드르 밀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직책 | |
프랑스 대통령 | 제12대 |
임기 시작 | 1920년 9월 23일 |
임기 종료 | 1924년 6월 11일 |
총리 | 조르주 레그 아리스티드 브리앙 레몽 푸앵카레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마르살 |
이전 | 폴 데샤넬 |
다음 | 가스통 두메르그 |
프랑스 총리 | 역임 |
임기 시작 | 1920년 1월 20일 |
임기 종료 | 1920년 9월 23일 |
대통령 | 레몽 푸앵카레 폴 데샤넬 |
이전 | 조르주 클레망소 |
다음 | 조르주 레그 |
외무부 장관 | 역임 |
임기 시작 | 1920년 1월 20일 |
임기 종료 | 1920년 9월 23일 |
총리 | 본인 |
이전 | 조르주 클레망소 |
다음 | 조르주 레그 |
국방부 장관 | 역임 |
임기 시작 | 1914년 8월 26일 |
임기 종료 | 1915년 10월 29일 |
총리 | 르네 비비아니 |
이전 | 아돌프 메시미 |
다음 | 조제프 갈리에니 |
임기 시작 | 1912년 1월 14일 |
임기 종료 | 1913년 1월 12일 |
총리 | 레몽 푸앵카레 |
이전 | 아돌프 메시미 |
다음 | 알베르 르브룅 |
공공 사업부 장관, 우정통신부 장관 | 역임 |
임기 시작 | 1909년 7월 24일 |
임기 종료 | 1910년 11월 3일 |
총리 | 아리스티드 브리앙 |
이전 | 루이 바르투 |
다음 | 루이 퓌에슈 |
상업부 장관, 산업부 장관, 우정통신부 장관 | 역임 |
임기 시작 | 1899년 6월 22일 |
임기 종료 | 1902년 6월 7일 |
총리 | 피에르 발데크-루소 |
다음 | 조르주 트루이요 |
개인 정보 | |
출생 | 1859년 2월 10일 |
출생지 | 파리, 프랑스 |
사망 | 1943년 4월 6일 |
사망지 | 베르사유, 독일 점령 프랑스 |
배우자 | 잔 밀랑 (1898년 결혼, 1943년 사망) |
자녀 | 장 (1899–1972) 앨리스 (1902–80) 자크 (1904–79) 마르트 (1909–75) |
모교 | 파리 대학교 |
직업 | 변호사 언론인 |
정당 | |
소속 정당 | 프랑스 사회당 (1902–1904) 공화사회당 (1911–1912) 무소속 (1912–1940) |
![]() |
2. 생애
알렉상드르 밀랑은 파리에서 태어나 변호사가 되었으며, 파리 변호사 협회의 서기로 선출되었다. 1883년 데카즈빌 파업을 주도한 에르네스트 로슈와 뒤크-케르시를 장 앙리 조르주 라게르와 함께 변호하면서 명성을 얻었다.[4] 이후 조르주 클레망소의 신문인 ''라 쥐스티스(La Justice)''에서 라게르의 자리를 대신했다. 1883년부터 1905년까지 프리메이슨이었다.[4]
1885년 센 데파르트망의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카르모 파업(1892년)에서 조르주 클레망소, 카미유 펠르탕과 함께 중재자로 활동했다. 그는 사회 입법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파나마 스캔들 이후 많은 정치인들이 신뢰를 잃은 후 그의 영향력은 커졌다. 1896년까지 독립 사회주의 파벌의 기관지인 ''라 프티트 레퓌블리크(La Petite République)''를 편집했으며, 생산 수단의 공공 소유와 국제적인 노동 운동 노동 조합을 주장했다.
1899년 피에르 발데크-루소의 "공화국 방어" 내각에 상무부 장관으로 입각하여 상선, 무역 발전, 기술 교육, 우편 시스템 개선, 노동 조건 개선에 힘썼다. 1902년에는 장 조레스와 함께 프랑스 사회당을 결성하지 않았지만, 1907년 소규모 독립 사회당을 결성했고, 이는 1911년에 공화 사회당 (PRS)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면서 극좌파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이미 감소했다.[1] 1909년부터 1910년까지는 공공 사업, 우편 및 전신부 장관을 역임했다.[1]
노동부 장관으로서, 그는 1904년 최대 근무 시간을 11시간에서 10시간으로 단축, 우편 노동자에게 8시간 노동 시간 도입, 공공 기관이 수행하는 모든 작업에 대한 최대 노동 시간 및 최저 임금 규정, 노동자 대표의 노동 최고 위원회 참여, 중재 재판소 및 노동 감독관 설립, 사회 보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무부 내에 노동 부서 신설 등 광범위한 개혁을 도입하는 데 책임을 졌다.[1] ''최고 노동 위원회''에 노동 조합 대표를 참여시키고, 지역 노동 위원회를 조직했으며, 공장 감독관에게 노동 조합 위원회와 소통하도록 지시한 것은 노동계에 대한 가치 있는 양보였다. 그는 또한 노동 계급 보호를 위해 고안된 이전 법률의 엄격한 시행을 보장했다. 그의 이름은 1905년에 법으로 제정된 연금 제정 계획과 특히 관련되었다. 1898년, 그는 ''라 랑테른''의 편집자가 되었다.[1]
1912년부터 1913년까지,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인 1914년부터 1915년까지 두 번 전쟁 장관을 역임했다.[1] 그는 계속해서 우익으로 이동하여, 보수주의 성향의 대통령 폴 데샤넬에 의해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밀랑의 국무총리 재임 기간 동안, 1920년 2월의 법령으로 선원들의 8시간 노동제가 도입되었다.
1920년 말, 폴 데샤넬이 정신 질환으로 사임해야 하자, 밀랑은 국민 블록과 좌익 블록 잔당 사이에서 대통령직을 위한 절충 후보로 부상했다. 밀랑은 오랜 기간 각료직을 역임한 정치인 조르주 레그를 총리로 임명하고 대통령의 행정 권한을 강화하려 했다. 이 시도는 하원과 프랑스 상원에서 반대에 부딪혔고, 밀랑은 더 강력한 인물인 아리스티드 브리앙을 임명해야 했다. 브리앙의 임명은 좌우 모두에게 환영받았지만, 사회주의자와 급진당의 좌파는 그의 내각에 참여하지 않았다.[1] 그러나 밀랑은 불과 1년 만에 브리앙을 해임하고, 보수 공화주의자인 레몽 푸앵카레를 임명했다.[1]
1922년 7월 14일, 밀랑은 젊은 프랑스 아나키스트인 귀스타브 부베의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다. 2년 후인 1924년 6월 11일, 밀랑은 좌익 연합의 승리 이후, 선출된 의회와 대통령직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사임했다.[1]
2. 1. 초기 생애와 종교
밀랑은 파리에서 장-프랑수아 밀랑과 알자스 유대인 출신인 아멜리-멜라니 카앵 사이에서 자랐으며, 그의 부계 가족은 프랑슈콩테 출신이다.[2]1860년에 밀랑은 세례를 받았고, 그의 어머니는 가톨릭교로 개종했다.[2] 그러나 밀랑은 훗날 불가지론자가 되었으며, 시민 결혼식에 참여하기도 했다. 밀랑의 자녀들은 세례를 받지 않았다.[3]
2. 2. 초기 정치 활동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았으며, 파리 변호사 협회의 서기로 선출되었다. 1883년 데카즈빌에서 발생한 파업을 주도한 에르네스트 로슈와 뒤크-케르시를 장 앙리 조르주 라게르와 함께 변호하면서 명성을 얻었다.[4] 이후 그는 조르주 클레망소의 신문인 ''라 쥐스티스(La Justice)''에서 라게르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는 1883년부터 1905년까지 프리메이슨이었다.[4]1885년 센 데파르트망의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카르모 파업(1892년)에서 조르주 클레망소 및 카미유 펠르탕과 함께 중재자로 활동했다. 그는 오랫동안 사회 입법 문제에 관해 하원의 의견을 경청했으며, 파나마 스캔들로 인해 많은 정치인들이 신뢰를 잃은 후 그의 영향력은 커졌다.
그는 당시 60명의 의원을 거느린 독립 사회주의 파벌의 지도자였다. 1896년까지 이들의 기관지인 ''라 프티트 레퓌블리크(La Petite République)''를 편집했다. 그의 강령에는 생산 수단의 공공 소유와 국제적인 노동 운동 노동 조합이 포함되었다.
2. 3. 장관 시절
1899년 6월, 밀랑은 피에르 발데크-루소의 "공화국 방어" 내각에 상무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이전과는 달리, 그는 실질적인 개혁에 힘을 쏟아 상선, 무역 발전, 기술 교육, 우편 시스템 개선, 그리고 노동 조건 개선에 노력했다. 노동 문제는 별도의 부서인 ''노동국''(Direction du Travail)에 위임되었고, 연금 및 보험 사무소도 "국"(direction)의 지위로 격상되었다.[1]1902년, 그는 동료 무소속 사회주의자인 장 조레스와 함께 프랑스 사회당을 결성하지 않았지만, 1907년에는 소규모 독립 사회당을 결성했고, 이는 1911년에 공화 사회당 (PRS)이 되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극좌파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이미 감소했다.[1]
1909년부터 1910년까지는 공공 사업, 우편 및 전신부 장관을 역임했다.[1]
노동부 장관으로서, 그는 1904년 최대 근무 시간을 11시간에서 10시간으로 단축, 우편 노동자에게 8시간 노동 시간 도입, 공공 기관이 수행하는 모든 작업에 대한 최대 노동 시간 및 최저 임금 규정, 노동자 대표의 노동 최고 위원회 참여, 중재 재판소 및 노동 감독관 설립, 사회 보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무부 내에 노동 부서 신설 등 광범위한 개혁을 도입하는 데 책임을 졌다.[1]
''최고 노동 위원회''에 노동 조합 대표를 참여시키고, 지역 노동 위원회를 조직했으며, 공장 감독관에게 노동 조합 위원회와 소통하도록 지시한 것은 노동계에 대한 가치 있는 양보였다. 그는 또한 노동 계급 보호를 위해 고안된 이전 법률의 엄격한 시행을 보장했다. 그의 이름은 1905년에 법으로 제정된 연금 제정 계획과 특히 관련되었다. 1898년, 그는 ''라 랑테른''의 편집자가 되었다.[1]
밀랑은 1912년부터 1913년까지,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인 1914년부터 1915년까지 두 번 전쟁 장관을 역임했다.[1]
2. 4. 총리 시절
밀랑은 계속해서 우익으로 이동하여, 보수주의 성향의 대통령 폴 데샤넬에 의해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밀랑의 국무총리 재임 기간 동안, 1920년 2월의 법령으로 선원들의 8시간 노동제가 도입되었다.2. 5. 대통령 시절
1920년 말, 폴 데샤넬이 정신 질환으로 사임해야 하자, 밀랑은 국민 블록과 좌익 블록 잔당 사이에서 대통령직을 위한 절충 후보로 부상했다. 밀랑은 오랜 기간 각료직을 역임한 정치인 조르주 레그를 총리로 임명하고 대통령의 행정 권한을 강화하려 했다. 이 시도는 하원과 프랑스 상원에서 반대에 부딪혔고, 밀랑은 더 강력한 인물인 아리스티드 브리앙을 임명해야 했다. 브리앙의 임명은 좌우 모두에게 환영받았지만, 사회주의자와 급진당의 좌파는 그의 내각에 참여하지 않았다.[1]그러나 밀랑은 불과 1년 만에 브리앙을 해임하고, 보수 공화주의자인 레몽 푸앵카레를 임명했다.[1]
밀랑은 프랑스 대통령의 전통적인 중립성 및 의회의 구성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를 편애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1922년 7월 14일, 밀랑은 젊은 프랑스 아나키스트인 귀스타브 부베의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다. 2년 후인 1924년 6월 11일, 밀랑은 좌익 연합의 승리 이후, 선출된 의회와 대통령직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사임했다. 당시 상원 의장이었던 가스통 두메르그가 6월 13일 밀랑을 대신하여 선출되었다.[1]
3.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20년 선거 | 대통령 | 12대 | 무소속 | 88.42% | 695표 | 1위 |
참조
[1]
서적
Bell
[2]
서적
Alexandre Millerand: The socialist years
2018-12-03
[3]
서적
Alexandre Millerand: The socialist years
https://books.google[...]
Mouton
2022-06-29
[4]
서적
Histoire de la Franc-maçonnerie en France
1967
[5]
서적
Slava i čast: Odlikovanja među Srbima, Srbi među odlikovanjima
Službeni Glasnik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