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헌용
1. 개요
양헌용은 서진 혜제의 황후이자, 오호 십육국 시대 전조의 황후였다. 서진 혜제가 즉위한 후 가남풍이 폐위되자 황후가 되었으나, 팔왕의 난으로 인해 여러 차례 폐위와 복위를 반복했다. 이후 전조의 유요에게 시집가 황후가 되었으며, 유요가 황제가 되면서 헌문황후로 불렸다. 유요의 총애를 받으며 정치에도 관여했으나, 전조 멸망 후 묘소가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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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년 사망 -
동진 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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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년 사망 -
장빈 (후조)
장빈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후조의 모사이자 정치가로, 석륵을 섬겨 후조 건국에 큰 공을 세우고 재상에 이르러 내정과 외교에서 활약하며 후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
서진의 황후 -
가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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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의 황후 -
무원황후
무원황후 양염은 서진 무제의 황후로, 총명하고 아름다워 사마염과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으며, 태자 옹립에 기여했지만 질투심으로 후궁 선발에 영향을 주고 가남풍을 태자비로 추천하여 서진 멸망에 간접적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2. 생애
2.1. 서진 황후 시절
양헌용은 유명한 명문 집안인 태산 양씨 집안의 양현지(羊玄之)의 딸로 태어났으며, 혜제 사마충(晋 惠帝 司馬衷)의 황후였다. 300년 4월, 혜제의 황후 가남풍이 폐위된 후 주살되자, 그해 12월 가남풍의 뒤를 이어 황후가 되었다.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사마륜 조왕의 책략가 손수의 먼 친척인 장군 손기(孫旂)였는데, 사마륜과 손수가 가남풍을 몰아낸 후, 손수가 양헌용을 새로운 황후로 선택했다.
팔왕의 난 동안 혜제가 왕자들의 꼭두각시로 남아 있었기에, 양황후는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특정 음모자들의 행동에 대한 구실로 자주 이용되었고, 304년부터 306년까지 4번 폐위되고 4번 복위되었다.
301년 1월, 사마륜이 황제 자리를 찬탈하여 혜제가 금용성에 유폐되자, 양헌용 또한 황후 자리에서 폐위되었다. 같은 달, 삼왕(제왕 사마경,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이 사마륜 토벌을 명분으로 거병했고, 4월에는 좌장군 왕여가 낙양성 내에서 정변을 일으켜 혜제를 복위시키고 양헌용 또한 다시 황후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외가 일족은 손수와 동족이었기 때문에 모두 주살되었다.
304년 2월, 업을 통치하던 사마영이 조정을 전횡하게 되자, 그의 뜻에 따라 양헌용은 다시 황후에서 폐위되어 금용성에 유폐되었다. 같은 해 7월, 동해왕 사마월이 낙양에서 사마영 토벌을 명분으로 거병하여 양헌용을 세 번째 황후로 복위시켰다. 그러나 탕음(현재 허난성 안양시 탕음현)에서 사마영에게 크게 패했다. 같은 해 8월, 장안을 통치하는 사마옹은 장군 장방을 낙양으로 보내 양헌용을 폐위시켰다. 같은 달, 사마영과 대립하던 왕준과 사마등이 업으로 침공하자, 사마영은 혜제를 데리고 낙양으로 도주하여 장방의 보호를 받았다. 11월, 장방은 장안으로 천도를 강행하며 혜제를 강제로 연행했다. 낙양에는 류대가 설치되었고, 낙양 조정의 의향에 따라 양헌용은 네 번째 황후로 옹립되었다.
305년 4월, 장안으로 귀환한 장방은 낙양 조정에 명령을 내려 양헌용을 폐위하고 금용성에 감금했다. 같은 해, 양편과 황보창이 공모하여 양헌용을 해방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같은 해 11월, 주권 또한 사마월로부터의 명령이라고 속여 양헌용을 다섯 번째 황후로 세웠으나, 하교가 주권을 공격하여 살해하고 양헌용을 폐위시켰다. 같은 해, 사마옹은 가짜 조서를 내려 양헌용에게 자결을 명했으나, 유돈 등의 반대로 죽음을 면했다.
306년 5월, 사마월 휘하의 장군들이 장안을 공략하여 혜제를 탈환했다. 6월, 혜제가 낙양으로 귀환하자 양헌용은 황후로 복위했다. 306년, 팔왕의 난이 끝나가고 사마월 동해왕이 사마옹을 격파한 후 혜제가 낙양으로 돌아오는 것이 허용되자, 양헌용을 황후로 맞이했다. 그러나 307년 1월에 혜제가 독살당하자, 양황후는 자신의 시동생이 왕위를 계승하면 태후로 존경받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다른 황족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사마월에게 거절당했고, 황태제 치는 회제로 즉위했다. 회제는 그녀를 "혜황후"로 존경했지만, 태후로 존경하지는 않았다.
2.2. 전조 황후 시절
유연이 전조를 세우고 황제를 칭하며 진나라를 공격하였다.(영가의 난) 311년 낙양성이 함락되었고, 유연의 양자인 유요는 양헌용을 부인으로 취했다. 양헌용은 유요와의 사이에서 유희를 비롯한 3명의 자녀를 낳았다. 318년 유요가 황제로 즉위하자 양헌용은 전조의 황후가 되었고, 헌문황후(獻文皇后)라는 시호를 받았다.
유요는 양헌용을 총애하여 후궁 관리뿐 아니라 정치에도 참여하게 하였다. 유요가 "짐과 사마씨의 남자(진 혜제)를 비교하면 어떻소?"라고 묻자, 양헌용은 "폐하는 개업의 성주이시지만, 그(혜제)는 망국의 암부에 지나지 않으니, 비교할 것도 없습니다. 그는 제왕이면서도 한 부인과 한 자식은커녕 자신의 몸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첩(저)은 당시 천하의 남자는 모두 이와 같다고 생각하고, 살아갈 희망조차 잃었습니다. 폐하에게 시집온 뒤에야 비로소 천하에 대장부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로 인해 유요는 더욱 양헌용을 총애하게 되었다고 한다.
양헌용은 322년에 사망했고, 유요는 그녀를 현평릉(顯平陵)에 장사지냈다. 양황후는 자주 정치에 깊이 간섭할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되었지만, 군신 중에는 이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유요와 유희는 모두 329년 전조가 후조에 멸망한 후 석륵의 후조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유요가 석륵에게 죽자 그녀가 묻혔던 현평릉은 표적이 되어 도굴되고 철저하게 파괴당했다.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3.2. 부정적 평가
4. 가족 관계
* 시아버지(서진): 세조 무황제 사마염
* 시어머니(서진): 무원황후 양씨 양염, 무도황후 양씨 양지
* 남편(서진): 서진 혜제 사마충
* 정후: 혜문황후 가씨 가남풍
* 딸: 청하공주 - 혜제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태평어람』)
* 후궁: 부인 사씨 사구
* 시아버지(전조): 고조 광문황제 유연
* 시어머니(전조): 광헌황후 장씨
* 남편(전조): 유요
* 아들: 유희, 유습, 유천 - 모두 유요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