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스윈튼
1. 개요
어니스트 스윈턴은 영국의 군인이자 작가로, 제1차 세계 대전 중 전차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68년 인도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2차 보어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종군 기자로 활동하며 전차 개발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전차 부대를 창설하고 훈련시키는 데 기여했다. 전후에는 민간 항공 및 기업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 치첼 군사사 교수를 역임했다. 스윈턴은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쳤으며, 1951년 옥스퍼드에서 사망했다.
-
영국의 종군 기자 -
존 F. 번스
존 F. 번스는 《뉴욕 타임스》 외신 기자로 활동하며 모스크바, 베이징 등 주요 지국장을 역임하고 보스니아 전쟁, 탈레반 정권 보도로 퓰리처상을 두 차례 수상한 캐나다 출신의 저명한 언론인이다. -
영국의 종군 기자 -
존 캔틀리
존 캔틀리는 1990년대 초 비디오 게임 테스터로 시작하여 ISIL에 의해 납치되어 선전 영상에 출연했으며, 2017년 모술 전투 중 사망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2022년 가족이 장례식을 치렀다. -
벵갈루루 출신 -
린지 앤더슨
영국의 영화 감독이자 평론가, 연극 연출가인 린지 앤더슨은 영화 잡지 《시퀀스》 공동 창간을 통해 평론가로 활동하다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을 거쳐 《고독의 대가》로 장편 극영화 감독 데뷔 후, 《만약에....》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국제적 명성을 얻고 "믹 트래비스 3부작" 등 사회 비판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
벵갈루루 출신 -
아누슈카 샤르마
아누슈카 샤르마는 2008년 데뷔 후 여러 흥행작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은 인도의 배우이자 영화 제작자로, 2015년에는 제작사를 설립하여 영화 제작 및 주연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
군사사학자 -
하타 이쿠히코
하타 이쿠히코는 일본의 역사학자로, 일본 근현대사와 군사 및 전쟁사를 연구하며 난징 대학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실증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다수의 저서를 저술하여 일본 내외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여러 상을 수상했다. -
군사사학자 -
한스 델브뤼크
한스 델브뤼크는 독일의 군사 역사가이자 이론가, 정치인으로서, 군사사를 일반 역사의 틀 안에서 이해하려 노력했으며, 특히 고대 전쟁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2. 초기 생애와 군 경력
어니스트 스윈튼은 1868년 영국령 인도 제국 벵갈루루에서 태어나 1874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스쿨 등 여러 학교와 울리치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받은 후, 1888년 로열 엔지니어 부대 소위로 임관했다. 영국령 인도에서 복무하며 1891년 중위로, 1899년 대위로 진급했다.
제2차 보어 전쟁 (1899–1902)에 참전하여 우수 서비스 훈장을 받았으며, 철도 건설뿐 아니라 전술, 요새, 기관총 등 현대 무기에 관심을 가졌다. 전쟁 후 소부대 전술에 관한 책 더퍼스 드리프트 방어를 저술했는데, 이는 캐나다군, 영국 육군, 미국 육군 등 여러 나라 군대의 소규모 전술 훈련에 활용되는 고전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에는 참모 장교로 복무하며 러일 전쟁의 공식 역사학자로 활동했다.
2.1. 인도에서의 출생과 성장
어니스트 스윈튼은 1868년 영국령 인도 제국 벵갈루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드라스 민사 행정부의 판사였다. 가족은 1874년 영국으로 돌아왔고, 스윈튼은 유니버시티 칼리지 스쿨, 럭비 스쿨, 첼튼햄 칼리지, 블랙히스 프로프리에터리 스쿨, 울리치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888년 2월 17일 로열 엔지니어 부대에서 소위로 임관했으며, 영국령 인도에서 복무하면서 1891년 2월 17일 중위로, 1899년 2월 17일 대위로 진급했다.
2.2. 왕립 공병대 임관 및 초기 군 생활
스윈튼은 1868년 영국령 인도 제국 벵갈루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드라스 민사 행정부의 판사였다. 가족은 1874년 영국으로 돌아왔고, 스윈튼은 유니버시티 칼리지 스쿨, 럭비 스쿨, 첼튼햄 칼리지, 블랙히스 프로프리에터리 스쿨, 울리치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888년 2월 17일 왕립 공병대 소위로 임관했으며, 영국령 인도에서 복무하면서 1891년 2월 17일 중위로, 1899년 2월 17일 대위로 진급했다.
제2차 보어 전쟁 (1899–1902)에 대위로 참전했으며, 종전 두 달 뒤인 1902년 9월 귀국했다. 1901년 9월 남아프리카 명예 수여 목록에서 우수 서비스 훈장 (DSO)을 받았으며(훈장은 1900년 11월 29일 자), 주로 철도 건설에 관여했지만, 전술, 요새, 그리고 최근에 도입된 기관총을 포함한 현대 무기의 효과에 큰 관심을 보였다. 전쟁 후 소부대 전술에 관한 책인 더퍼스 드리프트 방어를 썼는데, 이 책은 캐나다군과 영국 육군이 부사관과 장교를 훈련시키고, 미국 군대가 장교를 훈련시키는 데 사용한 소규모 전술에 관한 군사 고전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 몇 년 동안, 참모 장교로 복무했고 러일 전쟁의 공식 역사학자로 활동했다.
2.3. 제2차 보어 전쟁 참전
스윈튼은 제2차 보어 전쟁 (1899–1902)에 대위로 참전했으며, 전쟁이 끝난 지 두 달 후인 1902년 9월에 귀국했다. 그는 주로 철도 건설에 관여했지만, 전술, 요새, 그리고 최근에 도입된 기관총을 포함한 현대 무기의 효과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1901년 9월 남아프리카 명예 수여 목록에서 우수 서비스 훈장 (DSO)을 받았다(훈장은 1900년 11월 29일 자). 전쟁 후 그는 소부대 전술에 관한 책인 더퍼스 드리프트 방어를 썼는데, 이 책은 캐나다군과 영국 육군이 부사관과 장교를 훈련시키고, 미국 육군이 장교를 훈련시키는 데 사용한 소규모 전술에 관한 군사 고전이다.
2.4. 러일 전쟁 종군 및 참모 장교 복무
제2차 보어 전쟁에 대위로 참전한 스윈튼은 전쟁이 끝난 지 두 달 후인 1902년 9월에 귀국했다. 1901년 9월 남아프리카 명예 수여 목록에서 우수 서비스 훈장(DSO)을 받았다. 그는 주로 철도 건설에 관여했지만, 전술, 요새, 그리고 최근에 도입된 기관총을 포함한 현대 무기의 효과에 큰 관심을 보였다. 전쟁 후 그는 소부대 전술에 관한 책인 더퍼스 드리프트 방어를 썼는데, 이 책은 캐나다군과 영국 육군이 부사관과 장교를 훈련시키고, 미군이 장교를 훈련시키는 데 사용한 소규모 전술에 관한 군사 고전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 몇 년 동안, 스윈튼은 참모 장교로 복무했고 러일 전쟁의 공식 역사학자로 활동했다.
3. 제1차 세계 대전
키치너 경은 스윈턴을 영국군의 공식 종군 기자로 서부 전선에 임명했다. 그러나 기자들은 전선 접근이 제한되었고, 스윈턴의 보고는 검열을 거쳐 객관적이지만 논란의 여지가 없는 수준으로 보도되었다.
스윈턴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참호전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고자 전차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종군기자로 활동하며 전선의 참상을 목격했고, 새로운 무기 체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14년 11월, 제국 방위 위원회 서기 모리스 헨키에게 기관총을 파괴할 수 있는 방탄 추적 차량 건설을 제안했고, 이는 랜드십 위원회 설립으로 이어졌다. 스윈턴은 이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전차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16년 중령으로 진급한 스윈턴은 최초의 전차 부대 훈련을 맡았고, 기갑전에 대한 최초의 전술 지침을 만들어 전차 운용의 기틀을 마련했다. 비록 발명가에 대한 왕립 위원회는 윌리엄 트리튼과 월터 고든 윌슨을 전차 발명가로 결정했지만, 스윈턴의 공헌은 매우 컸다.
3.1. 종군기자 활동
전시 장관 키치너 경은 스윈턴을 영국군의 공식 종군 기자로 서부 전선에 임명했다. 기자들은 전선에 접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스윈턴의 보고서는 검열을 거쳐 논란의 여지가 없는, 그러나 객관적인 보도를 낳았다.
3.2. 전차 개발
어니스트 스윈턴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참호전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전차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이다. 그는 종군기자로 활동하면서 전선의 상황을 직접 목격했고, 이를 통해 새로운 무기 체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스윈턴은 1914년 11월, 제국 방위 위원회 서기 모리스 헨키에게 기관총을 파괴할 수 있는 방탄 추적 차량의 건설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랜드십 위원회의 설립으로 이어졌고, 스윈턴은 이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전차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16년, 스윈턴은 중령으로 진급하여 최초의 전차 부대를 훈련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기갑전에 대한 최초의 전술 지침을 만들어 전차 운용의 기틀을 마련했다. 비록 발명가에 대한 왕립 위원회는 윌리엄 트리튼과 월터 고든 윌슨을 전차의 발명가로 결정했지만, 스윈턴의 공헌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는 전차 개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전차 부대 창설과 훈련을 주도하며 초기 전차전에 필요한 전술을 개발하는 등 다방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3.2.1. 전차 개발의 영감
어니스트 스윈턴은 저서 "아이위트니스(Eyewitness)"에서 1914년 10월 19일 프랑스에서 차를 몰던 중 전차 개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회고한다. 1914년 7월, 남아프리카에서 만난 광산 기술자 휴 F. 매리엇에게서 받은 편지에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본 미국산 홀트 캐터필러 트랙터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스윈턴은 이 정보를 군과 정치 인사들에게 전달했지만, 전쟁 발발 전이라 운송 효율성 문제로만 여겨졌다. 10월 19일 아침, 생토메르에서 칼레로 운전하던 중 전투 차량의 기반으로 캐터필러 트랙을 떠올렸다.
영국에서는 리처드 혼스비 & 선즈의 데이비드 로버츠가 1911년부터 추적 차량에 대한 영국 군 관계자들의 관심을 끌려 했으나 실패했다. 홀트 제조 회사의 벤자민 홀트는 1914년 리처드 혼스비 & 선즈로부터 "체인 트랙" 궤도식 트랙터 관련 특허를 4000GBP에 매입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참호전의 문제와 물자 수송의 어려움으로 크롤링 방식 트랙터의 견인력이 군의 주목을 받았다. 영국 육군은 앨더숏에서 홀트 트랙터 시험을 실시했지만, 중(重)포병 견인에만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육군 종군기자였던 스윈턴 소령은 1914년 11월, 제국 방위 위원회 서기 모리스 헨키 경에게 기관총을 파괴할 수 있는 방탄 추적 차량 건설을 제안했다.
1915년 7월, 스윈턴은 전시성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 해군성의 랜드십 위원회를 알게 되어 위원회 서기 앨버트 제럴드 스턴과 우호적 관계를 맺었다. 스윈턴은 총리에게 1915년 8월 28일 부처 간 회의를 소집하도록 설득했고, 육군 요구 성능 사양을 작성한 것도 스윈턴이었다.
1916년 중령으로 진급한 스윈턴은 최초의 전차 부대 훈련 책임을 맡아 기갑전에 대한 최초의 전술 지침을 만들었다. 발명가에 대한 왕립 위원회는 전쟁 후 전차 발명가가 포스터의 전무이사 윌리엄 트리튼 경과 월터 고든 윌슨 소령이라고 결정했지만, 스윈턴은 기여에 대한 대가로 1000GBP를 받았다. 1918년까지 전시성은 2,100대의 홀트 트랙터를 받았다.
1918년 4월, 스윈턴은 미국 순방 중 캘리포니아주 스톡턴을 방문하여 벤자민 홀트와 그의 회사가 전쟁에 기여한 공로를 공개적으로 치하하고, 발명가에게 영국의 감사를 전했다. 벤자민 홀트는 스톡턴에서 열린 공개 회의에서 장군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3.2.2. 전차 개발 제안 및 추진
어니스트 스윈턴은 저서 "아이위트니스(Eyewitness)"에서 1914년 10월 19일 프랑스에서 차를 몰던 중 전차 개발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회고한다. 1914년 7월,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만난 광산 기술자 휴 F. 매리엇으로부터 홀트 캐터필러 트랙터에 대한 편지를 받았다. 당시 전쟁 발발 전이라 이 아이디어는 운송 문제로만 여겨졌으나, 10월 19일 생토메르에서 칼레로 가던 중 전투 차량에 캐터필러 트랙을 활용하는 방안을 떠올렸다.
영국에서는 리처드 혼스비 & 선즈의 데이비드 로버츠가 1911년부터 추적 차량을 홍보했으나 실패했다. 홀트 제조 회사의 벤자민 홀트는 1914년 리처드 혼스비 & 선즈로부터 관련 특허를 4000GBP에 매입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참호전과 물자 수송 문제로 크롤링 방식 트랙터가 주목받았다. 영국 육군은 앨더숏에서 홀트 트랙터 시험 후 중(重)포병 견인에만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스윈턴 소령은 종군기자로 프랑스에 파견되었고, 1914년 11월 제국 방위 위원회 서기 모리스 헨키에게 기관총 파괴용 방탄 추적 차량 건설을 제안했다.
1915년 7월, 스윈턴은 전시성에서 해군성 통제 하의 랜드십 위원회를 알게 되었고, 위원회 서기 앨버트 제럴드 스턴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스윈턴은 총리에게 1915년 8월 28일 부처 간 회의를 소집하도록 설득하여 육군 협력을 보장받았고, 육군 요구 성능 사양을 작성했다.
1916년 중령으로 진급한 스윈턴은 최초 전차 부대 훈련과 기갑전 전술 지침을 만들었다. 발명가에 대한 왕립 위원회는 전차 발명가를 윌리엄 트리튼 경과 월터 고든 윌슨 소령으로 결정했지만, 스윈턴은 기여에 대한 1000GBP를 받았다. 1918년까지 전시성은 2,100대의 홀트 트랙터를 받았다.
1918년 4월, 스윈턴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톡턴을 방문하여 벤자민 홀트와 그의 회사의 전쟁 기여에 감사를 표했다. 벤자민 홀트는 스톡턴 공개 회의에서 장군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3.2.3. 전차 부대 창설 및 훈련
어니스트 스윈턴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참호전의 교착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전차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1914년 10월 19일 프랑스에서 차를 몰던 중 전차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회고했다. 그해 7월 남아프리카에서 만난 광산 기술자로부터 홀트 캐터필러 트랙터에 대한 편지를 받았고, 이 트랙터가 군사적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리처드 혼스비 & 선즈의 데이비드 로버츠가 1911년부터 추적 차량 개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홀트 제조 회사의 벤자민 홀트는 1914년 리처드 혼스비 & 선즈로부터 관련 특허를 4000GBP에 매입했다. 전쟁 발발 후, 크롤링 방식 트랙터의 견인력이 주목받았고, 영국 육군은 앨더숏에서 홀트 트랙터 시험을 실시했지만 중(重)포병 견인에만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스윈턴은 종군기자로 프랑스에 파견되었고, 1914년 11월 제국 방위 위원회 서기인 모리스 헨키에게 기관총을 파괴할 수 있는 방탄 추적 차량 건설을 제안했다. 1915년 7월, 전시성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된 스윈턴은 랜드십 위원회를 알게 되었고, 위원회 서기인 앨버트 제럴드 스턴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는 1915년 8월 28일 부처 간 회의를 소집하여 육군이 랜드십 위원회에 협력하도록 하고, 육군이 요구할 성능 사양을 작성했다.
1916년 중령으로 진급한 스윈턴은 최초의 전차 부대 훈련을 맡아 기갑전에 대한 최초의 전술 지침을 만들었다. 발명가에 대한 왕립 위원회는 전차 발명가가 윌리엄 트리튼 경과 월터 고든 윌슨 소령이라고 결정했지만, 스윈턴은 기여에 대한 대가로 1000GBP를 받았다. 1918년까지 전시성은 2,100대의 홀트 트랙터를 받았다.
1918년 4월, 스윈턴은 미국 순방 중 캘리포니아주 스톡턴을 방문하여 벤자민 홀트와 그의 회사가 전쟁에 기여한 공로를 치하하고, 발명가에게 영국의 감사를 전달했다. 벤자민 홀트는 스톡턴에서 열린 공개 회의에서 장군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4. 전후 활동
1919년 스윈턴은 소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항공부의 민간 항공 부서에서 근무했고, 1922년 시트로엥 이사로 합류했다. 1925년부터 1939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 치첼 군사사 교수이자 올 소울스 칼리지, 옥스퍼드 옥스브리지 펠로우였다. 1934년부터 1938년까지 왕립 전차 군단 단장을 역임했다. 1938년 조지 뉴네스 리미티드에서 발행한 20년 후: 1914-18년 전장의 현재와 과거를 편집했는데, 이 간행물은 20부로 발행될 예정이었으나 결국 42부로 늘어났다. 잡지 형식의 이 간행물에는 전쟁 당시 프랑스와 현재(약 1938년)의 사진이 실렸다.
4.1. 민간 항공 및 기업 활동
1919년 스윈턴은 소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그는 항공부의 민간 항공 부서에서 근무했다. 1922년 시트로엥의 이사로 합류했다. 1925년부터 1939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 치첼 군사사 교수이자 올 소울스 칼리지, 옥스퍼드의 옥스브리지 펠로우였다. 1934년부터 1938년까지 왕립 전차 군단의 단장이었다. 1938년 조지 뉴네스 리미티드에서 발행한 20년 후: 1914-18년 전장의 현재와 과거를 편집했는데, 이 간행물은 20부로 발행될 예정이었으나 결국 42부로 늘어났다. 잡지 형식의 이 간행물에는 전쟁 당시 프랑스와 현재(약 1938년)의 사진이 실렸다.
4.2.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
스윈턴은 1919년 소장으로 예편한 후, 항공부의 민간 항공 부서에서 근무했고, 1922년에는 시트로엥의 이사로 합류했다. 1925년부터 1939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 치첼 군사사 교수이자 올 소울스 칼리지, 옥스퍼드 옥스브리지 펠로우였다. 1934년부터 1938년까지 왕립 전차 군단의 단장을 역임했다. 1938년에는 조지 뉴네스 리미티드에서 발행한 20년 후: 1914-18년 전장의 현재와 과거를 편집했는데, 이 간행물은 원래 20부로 발행될 예정이었으나 42부로 늘어났다. 잡지 형식의 이 간행물에는 전쟁 당시와 현재(약 1938년)의 프랑스 사진이 실렸다.
4.4. 저술 활동
스윈턴은 1919년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이후 항공부의 민간 항공 부서에서 근무했으며, 1922년에는 시트로엥의 이사로 합류했다. 1925년부터 1939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의 치첼 군사사 교수이자 올 소울스 칼리지, 옥스퍼드의 옥스브리지 펠로우였다. 1934년부터 1938년까지 왕립 전차 군단의 단장을 역임했다. 1938년에는 조지 뉴네스 리미티드에서 발행한 20년 후: 1914-18년 전장의 현재와 과거를 편집했는데, 이 간행물은 당초 20부로 발행될 예정이었으나 42부로 늘어났다. 잡지 형식의 이 간행물에는 전쟁 당시 프랑스와 현재(약 1938년)의 사진이 실렸다.
5. 가족 관계
스윈턴은 1897년 그레이스 루이스 클레이턴과 결혼하여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의 딸 마가렛 엘리자베스는 1944년 자전거를 타다 미국 육군 차량에 치여 40세의 나이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검시 결과 사고사로 판결되었다.
6. 사망
스윈턴은 1951년 1월 15일 옥스퍼드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7. 서훈
* 우수 서비스 훈장 동반 기사(DSO) - 1900년 11월 29일 - 남아프리카 작전 중 공로
* 바스 훈장 동반 기사(CB) - 1917년 2월 12일 - 전쟁 중 공로
* 대영 제국 훈장 사령관 기사(KBE) - 1923년 6월 2일 - 국왕 탄신일 훈장 수여
*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기사 십자장 - 1916년 - 작전 중 뛰어난 공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