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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보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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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보어 전쟁은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영국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금광 발견과 영국의 팽창주의 정책, 외국인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했으며, 전쟁 초기 보어인들의 공세로 시작되었으나, 영국의 반격과 게릴라전으로 이어졌다. 영국군은 초토화 작전과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며 보어인과 흑인 아프리카인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1902년 베레니히닝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전쟁 이후 남아프리카는 영국 자치령이 되었으며, 영국은 게릴라전에 대한 교훈을 얻었다. 전쟁 중 영국군의 전쟁 범죄가 발생하여 재판이 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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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보어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 명칭제2차 보어 전쟁
다른 명칭"트베데 프리헤이트소를로흐" (아프리칸스어, 제2차 자유 전쟁)
일부보어 전쟁
발생 시기1899년 10월 11일 - 1902년 5월 31일 (2년 7개월 20일)
위치남아프리카 남부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레소토, 에스와티니)
명분제임슨 습격(1895)
결과영국군 승리
결과 상세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 합병 및 해산
베르니이헝 조약 체결
영토 변화보어 공화국들이 베르니이헝 조약에 따라 영국 제국에 합병됨
제2차 보어 전쟁 콜라주
"시계 방향으로 위쪽 왼쪽부터: 제2차 콜렌소 전투에서 활동 중인 보어인, 엘란즈 강 전투에서 공격을 막고 있는 제17 랭커스, 마페킹 포위전의 보어인, 스피온 콥 전투의 보어 민병대, 파르데베르흐 전투 중인 캐나다 군, 1900년 2월 27일 레이디스미스에 진입하는 레드버스 불러 장군"
교전 세력
교전국 1대영제국
케이프 식민지
나탈 식민지
바수톨란드
베추아날란드
로디지아
영국령 인도 제국
영국령 실론
1868
뉴질랜드
1901
교전국 2남아프리카 공화국
오렌지 자유국
케이프 보어인
외국 자원군네덜란드
독일 제국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
1801
이탈리아 왕국
폴란드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러시아 제국
1896
덴마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지휘관
영국군 지휘관로버트 개스코인세실
조지프 체임벌린
알프레드 밀너
프레더릭 로버츠
윌리엄 로버트슨
폴 메슈언
레드버스 불러
허버트 키치너
루돌프 램버트
로버트 베이든파월
허버트 플러머
프랑수아루이 레사르
월터 턴브리지
보어군 지휘관폴 크뤼거
쿠스 데 라 레이
루이스 보타
스칼크 W. 버거
피트 크로녜
피트 주버트
얀 스뮈츠
마르티누스 테우니스 스테인
크리스티안 데 웨트
병력
영국군영국군: 347,000명
식민지군: 103,000–153,000명
아프리카 보조병: 100,000명
보어군보어 코만도:
트란스발 보어인: 25,000명
자유국 보어인: 15,000명
케이프 보어인: 6,000–7,000명
아프리카 보조병: 10,000명
외국 자원군: 5,400명 이상
사상자
영국군사망: 22,092명 (전투 중 사망 5,774명, 부상으로 사망 2,108명, 질병으로 사망 14,210명)
부상/질병: 75,430명
실종: 934명
총합: ~99,284명
보어군사망: 6,189명 (전투 중 사망 3,990명, 사고 사망 157명, 부상 및 질병 사망 924명, 포로 중 사망 1,118명)
포로: 24,000명 (해외 이송)
항복: 21,256명 (전쟁 종료 시점)
총합: ~51,445명
민간인 사상자사망: 46,370명
보어인 여성 및 어린이 사망 (강제 수용소): 26,370명
아프리카인 사망 (강제 수용소): 20,000명 이상 (총 115,000명 수용)

2. 전쟁의 명칭

이 전쟁은 보통 제2차 보어 전쟁으로 불리는데, 제1차 보어 전쟁(1880년 12월~1881년 3월)이 훨씬 규모가 작은 분쟁이었기 때문이다.[20] "보어"(''Boer'')는 "농부"라는 뜻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희망봉에 정착했던 초기 정착민들의 후손인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는 백인 남아프리카인들을 일컫는 말이다.[20] 일부 남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는 (제2차) 영국-보어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아프리칸스어로는 'Tweede Vryheidsoorlogaf|제2차 자유 전쟁', 'Tweede Boereoorlogaf|제2차 보어 전쟁', Anglo–Boereoorlogaf|영국-보어 전쟁' 또는 Engelse oorlogaf|영국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공식적으로 남아프리카 전쟁이라고 부른다. 2011년 BBC 보도에 따르면 "대부분의 학자들은 1899년~1902년 전쟁을 남아프리카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하는데, 이는 백인과 흑인을 포함한 모든 남아프리카인들이 전쟁의 영향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참전자였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22]

3. 역사적 배경

19세기 아프리카 대륙 남부는 단일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는 여러 갈등으로 지배되었다. 1868년, 영국은 보어인들로부터 보호를 요청한 소토족(Sotho people) 왕 모쇼에슈 1세(Moshoeshoe I)의 요청에 따라 드라켄스베르크(Drakensberg) 산맥의 바수토랜드(Basutoland, 현 레소토)를 병합하였다. 바수토랜드. 1884~1885년 베를린 회의(Berlin Conference)는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식민지 경계를 설정하려고 했지만, 더 많은 쟁탈전의 무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영국은 1880년에 먼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그리고 1899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을 병합하려고 시도했다.

1880년대, 베추아날랜드(Bechuanaland, 현 보츠와나)는 서쪽의 독일, 동쪽의 보어인, 남쪽의 영국의 케이프 식민지 사이의 분쟁 대상이 되었다. 베추아날랜드는 경제적 가치가 없었지만, "선교사의 길(Missionaries Road)"이 더 북쪽의 영토를 향해 이곳을 통과했다. 독일이 1884년에 다마라랜드(Damaraland)와 나마쿠알랜드(Namaqualand, 현 나미비아)를 병합한 후, 영국은 1885년에 베추아날랜드를 병합했다.

1880~1881년 제1차 보어 전쟁(First Boer War)에서 트란스발 공화국의 보어인들은 영국의 병합 시도에 저항하는 숙련된 전투원임을 증명하며 일련의 영국군 패배를 가져왔다.

1881년 제1차 보어 전쟁, 마주바 언덕 전투에서 보어인의 영국군 승리


당시 윌리엄 에워트 글래드스톤의 영국 정부는 당시 미미한 것으로 여겨졌던 대가를 위해 상당한 병력 증강과 비용을 필요로 하는 먼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휴전으로 전쟁이 끝났고, 이후 트란스발 대통령 폴 크루거(Paul Kruger)와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1884년 6월, 프리토리아(Pretoria)의 보어 수도에서 남쪽으로 약 69 km 떨어진 큰 산등성이 절벽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금광 매장량이 발견되었다는 얀 게릿 반트예스(Jan Gerrit Bantjes)의 발견으로 영국 제국의 이익이 자극되었다. 그 산등성이는 현지에서 "휘트워터스랜드(Witwatersrand)"(흰 물 산등성이, 분수령)로 알려져 있었다. 트란스발로의 골드러시는 전 세계와 케이프 식민지(1806년부터 영국의 통제하에 있었다)를 넘어 수천 명의 영국인과 다른 탐광자와 정착민을 불러들였다.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 도시는 거의 하룻밤 사이에 판잣집 마을로 급성장했다. 외국인(Uitlanders)(외국인, 백인 외부인)들이 몰려들어 광산 주변에 정착했다. 유입 속도가 너무 빨라서 외국인들은 요하네스버그와 랜드(Rand) 지역에서 보어인보다 수적으로 우세해졌지만, 트란스발에서는 여전히 소수에 그쳤다. 보어인들은 외국인들의 증가하는 존재에 불안해하고 분개하여 투표권을 얻기 위한 장기간의 거주 자격 기간을 요구하고, 금 산업에 세금을 부과하고, 면허, 관세 및 행정 요건을 통해 통제를 도입함으로써 그들의 영향력을 억제하려고 했다. 한편으로는 트란스발 정부와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인과 영국 이해관계 사이의 긴장을 야기한 문제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 광산 재벌을 포함한 정착 외국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통제를 원했다. 이러한 권리에는 안정적인 헌법, 공정한 선거법, 독립적인 사법부 및 더 나은 교육 제도가 포함되었다. 보어인들은 외국인들에게 더 많은 양보를 할수록 약 3만 명의 백인 남성 보어 유권자와 잠재적으로 6만 명의 백인 남성 외국인으로 인해 트란스발에 대한 그들의 독립적 통제력이 상실되고 영국 제국에 흡수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인식했다.
  • 외국인들은 트란스발 정부가 부과한 세금에 분개했는데, 특히 이 돈이 요하네스버그나 외국인의 이익에 사용되지 않고 트란스발 다른 지역의 프로젝트에 전용될 때 더욱 그러했다. 예를 들어, 지하에서 남쪽으로 금광맥이 기울어짐에 따라 점점 더 많은 폭파가 필요해졌고, 광산에서는 엄청난 양의 폭약을 소비했다. 5파운드짜리 다이너마이트 한 상자에는 5실링의 세금이 포함되었다. 이 세금은 과도한 것으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폴 크루거 대통령이 노벨 회사의 비영국 지사에 폭약 제조 독점권을 부여했을 때 영국 이해관계자들의 감정이 상했다. 영국은 격분했다. 소위 "다이너마이트 독점"은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1894~1895년 크루거가 영국이 통제하는 나탈(Natal)과 케이프타운(Cape Town)의 항구를 우회하고 영국의 관세를 피하기 위해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를 통해 델라고아 만(Delagoa Bay)으로 가는 철도 건설을 제안했을 때 영국 제국의 이익은 경악했다. 당시 케이프 식민지의 총리는 케이프에서 카이로까지 이어지는 영국이 통제하는 아프리카를 건설하는 비전을 가진 세실 로즈(Cecil Rhodes)였다. 어떤 자칭 외국인 대표들과 영국 광산주들은 트란스발 정부와의 거래에 점점 더 좌절하고 분노하게 되었다. 외국인을 대표하기 위해 개혁 위원회(트란스발)가 구성되었다.

3. 1. 케이프 식민지의 형성

17세기 중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희망봉에 보급 기지를 건설하면서 케이프 식민지가 시작되었다. 이후 네덜란드계 이주민(보어인)들이 정착하여 농업과 목축을 기반으로 한 사회를 형성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영국이 케이프 식민지를 점령하면서, 영국과 보어인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1868년, 영국은 보어인들로부터 보호를 요청한 소토족(바수토랜드)을 병합하였다. 1884~1885년 베를린 회의는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식민지 경계를 설정하려고 했지만, 더 많은 쟁탈전의 무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영국은 1880년에 먼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그리고 1899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을 병합하려고 시도했다.

1880년대, 베추아날랜드(현 보츠와나)는 서쪽의 독일, 동쪽의 보어인, 남쪽의 영국의 케이프 식민지 사이의 분쟁 대상이 되었다. 선교사의 길이 이곳을 통과했기 때문에, 영국은 1885년에 베추아날랜드를 병합했다.

1880~1881년 제1차 보어 전쟁에서 트란스발 공화국의 보어인들은 영국의 병합 시도에 저항하는 숙련된 전투원임을 증명하며 일련의 영국군 패배를 가져왔다. 당시 윌리엄 에워트 글래드스톤의 영국 정부는 먼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하지 않아 휴전으로 전쟁이 끝났고, 이후 트란스발 대통령 폴 크루거와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1884년, 얀 게릿 반트예스가 휘트워터스랜드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금광 매장량을 발견하면서 영국 제국의 이익이 자극되었다. 이 발견으로 골드러시가 일어나, 케이프 식민지를 넘어 수천 명의 영국인과 다른 탐광자와 정착민이 트란스발로 몰려들었다. 요하네스버그는 급성장했고, 외국인(Uitlanders)들은 광산 주변에 정착했다. 외국인들의 유입 속도가 너무 빨라서 요하네스버그와 랜드 지역에서 보어인보다 수적으로 우세해졌지만, 트란스발에서는 여전히 소수에 그쳤다.

보어인들은 외국인들의 증가하는 존재에 불안해하고 분개하여 투표권을 얻기 위한 장기간의 거주 자격 기간을 요구하고, 금 산업에 세금을 부과하고, 면허, 관세 및 행정 요건을 통해 통제를 도입함으로써 그들의 영향력을 억제하려고 했다. 외국인들은 트란스발 정부가 부과한 세금에 분개했는데, 특히 이 돈이 요하네스버그나 외국인의 이익에 사용되지 않고 트란스발 다른 지역의 프로젝트에 전용될 때 더욱 그러했다.

광산 재벌을 포함한 정착 외국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통제를 원했다. 보어인들은 외국인들에게 더 많은 양보를 할수록 트란스발에 대한 그들의 독립적 통제력이 상실되고 영국 제국에 흡수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인식했다. 소위 "다이너마이트 독점"은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1894~1895년 폴 크루거가 영국이 통제하는 항구를 우회하고 영국의 관세를 피하기 위해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를 통해 델라고아 만으로 가는 철도 건설을 제안했을 때 영국 제국의 이익은 경악했다. 당시 케이프 식민지의 총리는 케이프에서 카이로까지 이어지는 영국이 통제하는 아프리카를 건설하는 비전을 가진 세실 로즈였다.

3. 2. 대이동과 보어 공화국의 성립

19세기 아프리카 대륙 남부는 단일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는 여러 갈등으로 지배되었다. 1868년, 영국은 보어인들로부터 보호를 요청한 소토족(Sotho people) 왕 모쇼에슈 1세(Moshoeshoe I)의 요청에 따라 드라켄스베르크(Drakensberg) 산맥의 바수토랜드(Basutoland, 현 레소토)를 병합하였다. 바수토랜드. 1884~1885년 베를린 회의(Berlin Conference)는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식민지 경계를 설정하려고 했지만, 더 많은 쟁탈전의 무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영국은 1880년에 먼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그리고 1899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을 병합하려고 시도했다.

1880년대, 베추아날랜드(Bechuanaland, 현 보츠와나)는 서쪽의 독일, 동쪽의 보어인, 남쪽의 영국의 케이프 식민지 사이의 분쟁 대상이 되었다. 베추아날랜드는 경제적 가치가 없었지만, "선교사의 길(Missionaries Road)"이 더 북쪽의 영토를 향해 이곳을 통과했다. 독일이 1884년에 다마라랜드(Damaraland)와 나마쿠알랜드(Namaqualand, 현 나미비아)를 병합한 후, 영국은 1885년에 베추아날랜드를 병합했다.

1880~1881년 제1차 보어 전쟁(First Boer War)에서 트란스발 공화국의 보어인들은 영국의 병합 시도에 저항하는 숙련된 전투원임을 증명하며 일련의 영국군 패배를 가져왔다.

당시 윌리엄 에워트 글래드스톤의 영국 정부는 당시 미미한 것으로 여겨졌던 대가를 위해 상당한 병력 증강과 비용을 필요로 하는 먼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휴전으로 전쟁이 끝났고, 이후 트란스발 대통령 폴 크루거(Paul Kruger)와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1884년 6월, 프리토리아(Pretoria)의 보어 수도에서 남쪽으로 약 69 km 떨어진 큰 산등성이 절벽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금광 매장량이 발견되었다는 얀 게릿 반트예스(Jan Gerrit Bantjes)의 발견으로 영국 제국의 이익이 자극되었다. 그 산등성이는 현지에서 "휘트워터스랜드(Witwatersrand)"(흰 물 산등성이, 분수령)로 알려져 있었다. 트란스발로의 골드러시는 전 세계와 케이프 식민지(1806년부터 영국의 통제하에 있었다)를 넘어 수천 명의 영국인과 다른 탐광자와 정착민을 불러들였다.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 도시는 거의 하룻밤 사이에 판잣집 마을로 급성장했다. 외국인(Uitlanders)(외국인, 백인 외부인)들이 몰려들어 광산 주변에 정착했다. 유입 속도가 너무 빨라서 외국인들은 요하네스버그와 랜드(Rand) 지역에서 보어인보다 수적으로 우세해졌지만, 트란스발에서는 여전히 소수에 그쳤다. 보어인들은 외국인들의 증가하는 존재에 불안해하고 분개하여 투표권을 얻기 위한 장기간의 거주 자격 기간을 요구하고, 금 산업에 세금을 부과하고, 면허, 관세 및 행정 요건을 통해 통제를 도입함으로써 그들의 영향력을 억제하려고 했다. 한편으로는 트란스발 정부와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인과 영국 이해관계 사이의 긴장을 야기한 문제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 광산 재벌을 포함한 정착 외국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통제를 원했다. 이러한 권리에는 안정적인 헌법, 공정한 선거법, 독립적인 사법부 및 더 나은 교육 제도가 포함되었다. 보어인들은 외국인들에게 더 많은 양보를 할수록 약 3만 명의 백인 남성 보어 유권자와 잠재적으로 6만 명의 백인 남성 외국인으로 인해 트란스발에 대한 그들의 독립적 통제력이 상실되고 영국 제국에 흡수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인식했다.
  • 외국인들은 트란스발 정부가 부과한 세금에 분개했는데, 특히 이 돈이 요하네스버그나 외국인의 이익에 사용되지 않고 트란스발 다른 지역의 프로젝트에 전용될 때 더욱 그러했다. 예를 들어, 지하에서 남쪽으로 금광맥이 기울어짐에 따라 점점 더 많은 폭파가 필요해졌고, 광산에서는 엄청난 양의 폭약을 소비했다. 5파운드짜리 다이너마이트 한 상자에는 5실링의 세금이 포함되었다. 이 세금은 과도한 것으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폴 크루거 대통령이 노벨 회사의 비영국 지사에 폭약 제조 독점권을 부여했을 때 영국 이해관계자들의 감정이 상했다. 영국은 격분했다. 소위 "다이너마이트 독점"은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1894~1895년 크루거가 영국이 통제하는 나탈(Natal)과 케이프타운(Cape Town)의 항구를 우회하고 영국의 관세를 피하기 위해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를 통해 델라고아 만(Delagoa Bay)으로 가는 철도 건설을 제안했을 때 영국 제국의 이익은 경악했다. 당시 케이프 식민지의 총리는 케이프에서 카이로까지 이어지는 영국이 통제하는 아프리카를 건설하는 비전을 가진 세실 로즈(Cecil Rhodes)였다. 어떤 자칭 외국인 대표들과 영국 광산주들은 트란스발 정부와의 거래에 점점 더 좌절하고 분노하게 되었다. 외국인을 대표하기 위해 개혁 위원회(트란스발)가 구성되었다.

3. 3. 제1차 보어 전쟁 (1880-1881)

1880년대 트란스발 공화국의 보어인들은 영국의 병합 시도에 저항하여, 마주바 언덕 전투 등에서 승리하였다. 당시 윌리엄 에워트 글래드스톤의 영국 정부는 대가를 위해 상당한 병력 증강과 비용을 필요로 하는 먼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하지 않아 휴전으로 전쟁이 끝났고, 이후 트란스발 대통령 폴 크루거와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결과,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의 독립을 재인정했으나, 외교권 등 일부 권한을 제한했다.

1884년 6월, 프리토리아 남쪽 약 69km 떨어진 곳에서 얀 게릿 반트예스(Jan Gerrit Bantjes)가 세계에서 가장 큰 금광 매장량을 발견하면서 영국의 이익이 자극되었다. 이 금광은 현지에서 "휘트워터스랜드(Witwatersrand)"(흰 물 산등성이, 분수령)로 알려져 있었다. 트란스발로의 골드러시는 전 세계와 케이프 식민지에서 수천 명의 외국인(Uitlanders)(외국인, 백인 외부인)들을 불러들였다. 요하네스버그는 급성장했고, 외국인들은 요하네스버그와 랜드 지역에서 보어인보다 수적으로 우세해졌지만, 트란스발에서는 여전히 소수에 그쳤다. 보어인들은 외국인들의 증가에 분개하여 투표권을 제한하고 금 산업에 세금을 부과하는 등 통제를 도입하려 했다.

외국인들은 트란스발 정부가 부과한 세금에 분개했는데, 특히 이 돈이 요하네스버그나 외국인의 이익에 사용되지 않고 트란스발 다른 지역에 전용될 때 더욱 그러했다. 또한, 폴 크루거 대통령이 노벨 회사의 비영국 지사에 폭약 제조 독점권을 부여하면서 영국은 격분했고, 소위 "다이너마이트 독점"은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1894~1895년 크루거가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를 통해 델라고아 만으로 가는 철도 건설을 제안했을 때, 케이프 식민지의 총리 세실 로즈는 케이프에서 카이로까지 이어지는 영국령 아프리카 건설을 구상하고 있었기에 영국의 이익은 경악했다.

3. 4. 금광 발견과 갈등 심화

1880년대 비트바테르스란트에서 대규모 금광이 발견되면서,[20] 트란스발 공화국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1884년 6월, 얀 게릿 반트예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비트워터스랜드 지역에서 금을 발견했다.[20] 이 금광은 트란스발을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만들었지만, 자체적으로 개발할 인력이나 산업 기반은 부족했다.[20]

금광 개발을 위해 외국인(Uitlanders)이라 불리는 외국인 노동자(주로 영국인)들이 유입되었고,[20] 이들의 증가는 보어인들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트란스발 정부는 외국인들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투표권 획득 조건을 강화하고 금 산업에 세금을 부과했다.[20] 특히, 다이너마이트 독점권 문제는 영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였다.

1894~1895년, 트란스발 대통령 폴 크루거는 영국이 통제하는 항구를 우회하기 위해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를 통해 델라고아 만으로 가는 철도 건설을 제안했다. 이는 케이프 식민지 총리 세실 로즈의 아프리카 종단 정책과 충돌했다.

4. 전쟁의 원인

보어 전쟁의 발발 원인은 복잡하며, 보어인과 영국 사이의 1세기 이상 지속된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당장 중요한 문제는 매우 수익성이 높았던 비트워터스랜드 금광[20] (1884년 6월 얀 게릿 반트예스에 의해 발견됨)의 통제권과 이익을 누가 가져갈 것인가였다.

1652년 희망봉에 네덜란드 케이프 식민지가 설립된 이후,[23] 네덜란드가 직접 통치하였다.[24] 네덜란드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동안 세 차례 케이프를 점령했고, 1806년 영국군이 블라우버그 전투에서 네덜란드군을 물리친 후 점령은 영구화되었다. 당시 식민지는 네덜란드 지배하에 정착한 약 2만 6천 명의 식민 주민이 살고 있었다.[25] 대체로 식민 주민들은 보어인을 포함한 여러 개의 구별되는 하위 집단으로 구성되었다.[27] 보어인은 식민지의 국경 지역에 살면서 가축을 위한 더 나은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는 순회 농부들이었다.[24] 많은 보어인들은 영국 행정의 여러 측면, 특히 1834년 12월 1일 영국의 노예 제도 폐지에 불만을 품었다. 강제 노동을 사용했던 보어인들은 노예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38] 1836년부터 1852년까지 많은 보어인들이 영국 통치에서 벗어나 이주하기로 선택했는데, 이는 이후 대이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약 1만 5천 명의 보어인이 케이프 식민지를 떠나 동쪽 해안을 따라 네이탈로 향했다. 영국이 1843년 네이탈을 병합한 후, 그들은 남아프리카의 광활한 동부 내륙으로 더 북쪽으로 여행했다. 거기서 그들은 두 개의 독립적인 보어 공화국을 세웠다: 남아프리카 공화국(1852년; 트란스발 공화국으로도 알려짐)과 오렌지 자유국(1854년). 영국은 1852년과 1854년에 두 보어 공화국을 인정했지만, 1877년 트란스발을 병합하려는 영국의 시도는 1880년에서 1881년까지 제1차 보어 전쟁으로 이어졌다. 영국이 패배를 당한 후, 특히 마주바 언덕 전투(1881년)에서 패배한 후, 두 공화국의 독립은 특정 조건 하에 회복되었다. 그러나 관계는 불안한 상태로 남았다.

1866년, 킴벌리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어 다이아몬드 러시가 일어났고 오렌지 자유국의 국경으로 많은 외국인이 유입되었다. 그런 다음 1884년 6월, 얀 게릿 반트예스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비트워터스랜드 지역에서 금을 발견했다. 금은 트란스발을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만들었지만, 이 나라는 이 자원을 스스로 개발할 인력이나 산업 기반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트란스발은 불가피하게 ''외국인''(외국인), 주로 영국 출신의 영어권 남성들의 이민을 받아들였는데, 이들은 보어 지역에 재산과 일자리를 찾아왔다. 결과적으로, 트란스발의 1–5/uitlanders}} 수는 보어인 수를 능가할 위협이 되었고, 보어 정착민과 새로운 비보어계 이주민 사이의 대립을 초래했다.

영국의 팽창주의적 사상(특히 세실 로즈에 의해 전파됨)과 외국인의 정치적 및 경제적 권리에 대한 분쟁은 1895년 실패한 제임슨 침공으로 이어졌다. 침공을 이끈 리앤더 스타 제임슨 박사는 요하네스버그의 외국인들의 봉기를 유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외국인들은 지원을 위해 무기를 들지 않았고, 트란스발 정부군은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하기 전에 제임슨의 부대를 포위하고 사로잡았다.[20]{{rpaf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정치적 책략과 협상을 통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내 외국인의 권리, 금광 산업의 통제, 그리고 영국이 트란스발과 오렌지 자유국을 영국 통제하의 연방에 편입하려는 욕망에 대한 타협점을 찾으려고 시도했다. 대다수의 외국인이 영국 출신이고 요하네스버그로 새로운 외국인이 계속 유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보어인들은 외국인에게 완전한 투표권을 부여하면 결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보어인의 민족적 지배력을 상실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1899년 6월 블룸폰테인에서의 협상은 실패했고, 1899년 9월 영국의 식민지 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은 트란스발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 완전한 투표권과 대표권을 요구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폴 크루거는 1899년 10월 9일 최후 통첩을 발표하여 영국 정부에 트란스발과 오렌지 자유국의 국경에서 모든 군대를 철수할 것을 48시간 안에 요구했고, 그렇지 않을 경우 오렌지 자유국과 동맹을 맺은 트란스발이 영국 정부에 선전포고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 크루거는 9월 초에 코만도를 네이탈 국경으로 이동시켰고, 영국은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주둔 도시에만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28] 영국 정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최후 통첩을 거부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은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28]

4. 1. 영국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

19세기 말, 영국은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추진하며 남아프리카 지역 전체를 통합하여 지배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20] 특히 케이프 식민지 총독 세실 로즈는 "케이프에서 카이로까지" 이어지는 광대한 영국령 아프리카 건설을 구상했다.[20] 1884년 6월 얀 게릿 반트예스에 의해 발견된 비트바테르스란트 금광 지대의 경제적 이익 확보 또한 영국의 주요 관심사였다.[20]

1899년 독일 정치 풍자 만화: "전쟁과 자본주의, 또는 인간의 피를 금으로 변환하는 것"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의해 네덜란드 케이프 식민지가 설립된 이후,[23]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영국은 세 차례 케이프를 점령했고, 1806년 블라우버그 전투에서 승리하며 영구 점령했다. 이로 인해 대이동을 통해 많은 보어인이 네이탈로 이주했고, 영국이 1843년 네이탈을 병합하자 더 북쪽으로 이동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을 세웠다.[24] 영국은 이 두 공화국을 인정했지만, 1877년 트란스발 병합 시도는 제1차 보어 전쟁으로 이어졌다.[24]

1866년 킴벌리에서 다이아몬드가, 1884년 비트워터스랜드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많은 외국인들이 유입되었다. 금광 발견은 트란스발을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만들었지만, 자체적인 개발 능력은 부족했다. 이에 따라 영국을 비롯한 외국인들의 이민이 불가피했고, 이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보어인들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20]

세실 로즈로 대표되는 영국의 팽창주의적 사상과 외국인의 정치적, 경제적 권리 문제는 1895년 제임슨 침공으로 이어졌다. 리앤더 스타 제임슨 박사는 요하네스버그의 외국인 봉기를 유도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트란스발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20]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1899년 6월 블룸폰테인에서의 협상이 결렬되었고, 9월 영국 식민지 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은 트란스발 내 외국인에게 완전한 투표권과 대표권을 요구했다. 1899년 10월 9일 폴 크루거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은 영국에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영국 정부는 이를 거부했고, 결국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은 영국에 선전포고했다.[28]

영국군이 제2차 보어 전쟁 중 사용한 영국제 리-메트포드 소총


영국 총리 솔즈베리 경은 영국의 제국적 명성을 유지하고 남아프리카인들에게 의무감을 느끼며 전쟁을 이끌었다.[44] 그는 보어인들이 원주민 아프리카인에 대한 가혹행위를 혐오하며, 1884년 런던 조약을 "사실상 노예 제도의 이익을 위한 협정"이라고 언급했다.[45][45]

4. 2. 외국인 문제

1884년 6월 얀 게릿 반트예스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비트워터스랜드 지역에서 금을 발견하면서,[20] 트란스발은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되었지만, 이 자원을 스스로 개발할 인력이나 산업 기반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트란스발은 금광 개발을 위해 ''외국인''(uitlanders)이라 불리는, 주로 영국 출신의 영어권 남성들의 이민을 받아들였다. 이들의 유입으로 트란스발 내 외국인 수는 보어인 수를 능가할 위협이 되었고, 이는 보어 정착민과 새로운 비보어계 이주민 사이의 대립을 초래했다.[20]

보어인들은 외국인에게 완전한 투표권을 부여하면 결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보어인의 민족적 지배력을 상실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 1899년 6월 블룸폰테인에서의 협상이 실패하고, 1899년 9월 영국의 식민지 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은 트란스발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 완전한 투표권과 대표권을 요구했다.[28]

영국의 팽창주의적 사상과 외국인의 정치적, 경제적 권리에 대한 분쟁은 1895년 실패한 제임슨 침공으로 이어졌다. 리앤더 스타 제임슨 박사는 요하네스버그의 외국인들의 봉기를 유도하려 했으나, 외국인들은 지원하지 않았고, 트란스발 정부군은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하기 전에 제임슨의 부대를 포위하고 사로잡았다.[20]

외국인 거주자(특히 금광 다이너마이트 세금)의 권리 개선에 실패한 것이 전쟁의 구실이 되었고 케이프 식민지에서 대규모 군사력 증강의 정당성으로 작용했다.[43] 케이프 식민지 총독인 알프레드 밀너 경, 세실 로즈, 체임벌린, 그리고 광산 신디케이트 소유주들은 보어 공화국 병합을 지지했다.

4. 3. 제임슨 침공 (1895)

1895년, 케이프 총리 세실 로즈와 요하네스버그 금광 재벌 알프레드 베이트의 묵인 하에 요하네스버그를 장악하고 트란스발 정부의 통제를 종식시키려는 계획이 세워졌다.[20] 세실 로즈가 회장이었던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의 로디지아 관리자 제임슨이 600명의 무장 병력을 이끌고 베추아날란드 국경을 넘어 요하네스버그를 향해 진격했다. 이 부대는 주로 로디지아와 베추아날란드 영국 남아프리카 경찰로 구성되었으며, 맥심 기관총과 일부 포병을 장비하고 있었다.[20]

이 계획은 요하네스버그까지 3일 만에 돌진하여 보어 코만도가 동원되기 전에 요하네스버그 개혁 위원회가 조직한 주로 영국인 추방자 외국인(uitlanders)들의 봉기를 촉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트란스발 당국은 제임슨 침공에 대한 사전 경고를 받고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추적했다. 나흘 후, 지친 부대는 요하네스버그가 보이는 크루거스도르프 근처에서 포위되었다. 부대가 65명의 사상자를 낸 짧은 교전 후(보어 측은 1명만 사상), 제임슨의 부대는 항복하고 보어들에게 체포되었다.[20]

1896년 실패한 급습 이후 체포된 제이미슨을 보여주는 스케치


이 실패한 침공은 남아프리카 전역과 유럽에 파장을 일으켰다. 마타벨레와 마쇼나의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에 대한 반란(제2차 마타벨레 전쟁)이 로디지아에서 일어났다.[20]

침공 며칠 후, 독일 카이저는 크루거 전보를 보내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의 성공을 축하했고, 이는 영국 언론에 공개되어 반독일 감정을 폭발시켰다. 영국은 보어들이 급습 부대의 수하물에서 세실 로즈와 요하네스버그의 다른 음모자들로부터 온 전보를 발견하여 당혹감을 느꼈다. 조지프 체임벌린은 침공을 규탄했지만, 로즈는 케이프 조사와 런던 의회 조사에서 심하게 비난을 받았고, 실패한 쿠데타를 후원한 혐의로 케이프 총리직과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 회장직에서 사퇴해야 했다.[20]

보어 정부는 영국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넘겨 재판에 넘겼고, 제임슨은 영국에서 15개월 형을 선고받았지만, 나중에 케이프 식민지 총리(1904~1908)로 임명되었고 남아프리카 연방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추대되었다.[20] 제임슨과 공모한 외국인 개혁 위원회(트란스발) 회원들은 트란스발 법정에서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네 명의 지도자는 교수형을 선고받았지만 다음 날 15년 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896년 6월, 위원회의 다른 회원들은 각각 2,000파운드의 벌금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는데, 이는 모두 세실 로즈가 지불했다. 개혁 위원회 회원 중 한 명인 프레데릭 그레이는 5월 16일 프레토리아 감옥에서 자살했다.[20]

얀 C. 스무츠는 1906년에 제임슨 침공이 실질적인 전쟁 선포였다고 썼다.[20] 제임슨 침공은 많은 케이프 아프리카너들을 영국으로부터 소외시키고 트란스발 부어들을 크루거 대통령과 그의 정부 뒤에 단결시켰다. 또한 트란스발과 오렌지 자유국(마르티누스 테우니스 슈타인 대통령이 이끌었음)을 영국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결속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1897년, 두 공화국은 군사 협정을 체결했다.[20]

4. 4. 블룸폰테인 회담 (1899)

블룸폰테인에서 열린 회담은 1899년 5월 30일에 시작되었다.[47] 크루거가 의미 있는 양보를 할 의향이 전혀 없었고,[47] 밀너는 그의 평소 지연 전술을 받아들일 의향이 없었기 때문에 협상은 곧 결렬되었다.[48]

5. 전쟁의 발발

1899년 10월 9일, 폴 크루거는 오렌지 자유국을 설득하여 동맹을 맺고 군대를 동원한 후, 영국에 최후통첩을 보냈다.[51] 최후통첩에는 트란스발 국경에서 영국군을 48시간 안에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51] 그렇지 않으면 트란스발은 오렌지 자유국과 연합하여 영국에 선전포고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후통첩 소식은 만료일에 런던에 도착했다. 주요 반응은 분노와 조롱이었다. 《타임스》는 최후통첩을 "터무니없는 희극"이라고 비난했고,[51] 《글로브》는 이를 "하찮은 작은 국가"의 행위라고 비난했다. 대부분의 사설은 《데일리 텔레그래프》와 비슷한 내용이었는데, "물론 이러한 터무니없는 도전에 대한 답은 하나뿐이다. 크루거는 전쟁을 원했고,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영국 정부와 군부의 견해와는 거리가 멀었다. 솔즈베리 경은 놀란 빅토리아 여왕에게 "우리는 2류 대륙 강국에도 맞설 수 있는 군대가 없다"라고 말해야 했다.[45] 영국 정부가 이를 거부하면서, 10월 11일 제2차 보어 전쟁이 발발했다.

6. 전쟁의 경과

6. 1. 제1단계: 보어의 공세 (1899년 10월 ~ 12월)

보어군은 1899년 10월 12일 크라이판 전투를 시작으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레이디스미스, 마페킹, 킴벌리 등 주요 도시를 포위하고 나탈케이프 식민지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51] 보어군의 신속한 동원은 영국군에 대한 초기 군사적 성공으로 이어졌는데, 탈라나 언덕 전투에서 영국군은 보어 포병에 의해 피해를 입었고, 엘란dsl라아그테 전투에서는 전술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조지 화이트 경(George Stuart White)의 우려로 후퇴하면서 레이디스미스가 포위되었다.[51] 로버트 베이든-파웰 대령은 마페킹에서, 로버트 케케위치 중령은 킴벌리에서 도시 방어를 지휘했으며, 포위된 도시의 주민들은 식량 부족과 포격으로 고통을 겪었다. 킴벌리의 킴벌리 광산은 시민들의 대피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네이탈 북부의 전쟁 지역


레드버스 헨리 불러(Redvers Henry Buller) 장군은 콜렌소 전투(Battle of Colenso)에서 패배 후 로버츠 경(Lord Roberts)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영국군은 1899년 10월 말 레드버스 헨리 불러(Redvers Henry Buller) 장군이 도착하여 포위된 지역을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분산 배치했다. 폴 메튜(Paul Methuen, 3rd Baron Methuen) 중장은 킴벌리와 마페킹 구원을, 윌리엄 게이트크리(William Forbes Gatacre) 소장은 스톰버그 철도 교차점 방어를, 불러는 레이디스미스 구원을 담당했다. 그러나 12월 10일부터 15일까지의 '흑주(Black Week)' 동안 영국군은 스톰버그 전투(Battle of Stormberg), 마거스폰테인 전투(Battle of Magersfontein), 콜렌소 제2차 전투(Second Battle of Colenso)에서 연패했다.[45][52] 특히 마거스폰테인 전투에서는 코스 더 레이(Koos de la Rey)와 크론예가 고안한 참호 전술로 인해 영국군이 큰 피해를 입었다.[53] 콜렌소 전투에서는 보타가 이끄는 보어군이 영국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불러는 후퇴 중 많은 병력과 장비를 잃었다.

케이프타운에 도착한 로버츠 경

6. 2. 제2단계: 영국의 반격 (1900년 1월 ~ 9월)

영국 정부는 계속되는 패배와 포위 공격에 큰 충격을 받고, 두 개 사단과 다수의 식민지 자원병을 추가 파병했다.[10] 1900년 1월, 영국군은 약 18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해외에 파병하여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10]

레드버스 불러(Redvers Buller) 장군은 나탈(Natal)에서 직접 지휘를 맡으면서 전쟁 전반의 방향을 놓쳤고, 그의 성과에 대한 우려와 현장의 부정적인 보고로 인해 프레더릭 로버츠(Frederick Roberts) 경에게 총사령관직을 넘겨주었다. 로버츠는 킴벌리(Kimberley)를 구원하기 위한 광범위한 우회 기동을 준비했다. 나탈을 제외하고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로버츠는 1900년 2월 10일 주요 공격을 개시하여 부어군을 우회하는 데 성공했다. 2월 14일, 존 프렌치(John French) 장군이 지휘하는 기병 사단은 킴벌리를 구원하기 위해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고, 2월 15일 기병 돌격이 부어군 방어선을 뚫으면서 124일간의 포위 공격이 종식되었다. 한편, 로버츠는 피에트 크로녜(Piet Cronjé) 장군의 부대를 추격하여 파르데베르크 전투에서 포위했다. 2월 18일부터 27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영국군은 오염된 모더 강을 식수로 사용하면서 티푸스로 많은 병사들이 사망했다. 결국 크로녜 장군은 4,000명의 병력과 함께 항복했다.[55]

레이디스미스 구출. 2월 28일 조지 스튜어트 화이트 경이 허버트 고프 소령을 맞이하는 모습. 존 헨리 프레더릭 베이컨(1868-1914)의 그림.


나탈에서는 투겔라 고지 전투에서 불러 장군이 레이디스미스(Ladysmith) 구출을 시도했다. 증원에도 불구하고, 불러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린 진전을 보였다. 그러나 2월 26일, 불러는 모든 병력을 총력전에 투입하여 투겔라 강을 건너 콜렌소 북쪽의 보타 부대를 격파했다. 118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레이디스미스 구출이 이루어졌지만, 영국군은 총 7,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일련의 패배 후, 부어들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로버츠는 서쪽에서 오렌지 자유국으로 진격하여 포플러 그로브 전투에서 부어군을 격퇴하고 3월 13일 블룸폰테인(Bloemfontein) 수도를 점령했다. 5월 18일 마페킹 구출은 영국에서 큰 축하를 불러일으켰다. 5월 28일, 오렌지 자유국은 합병되어 오렌지 강 식민지로 이름이 바뀌었다.

프레토리아 공략에서 로버츠는 진격을 재개하여 5월 31일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를 점령하고 6월 5일 프레토리아(Pretoria)를 점령했다. 주요 도시들을 점령한 로버츠는 1900년 9월 3일 전쟁 종식을 선언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병합되었다.

세인트헬레나에서 포로로 잡힌 피에트 크로녜 장군(1900~1902). 그는 파르데베르크 전투에서 패배한 후 4,000명의 병사들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보어들은 크로온스타드에서 만나 게릴라전을 계획했다. 이 새로운 형태의 전쟁의 첫 번째 교전은 3월 31일 산나스 포스트에서 있었다.[55] 프레토리아 함락 후 마지막 공식 전투 중 하나는 6월 11일~12일에 다이아몬드 힐 전투였다.

6. 3. 제3단계: 게릴라전 (1900년 9월 ~ 1902년 5월)

1900년 9월, 영국군은 트란스발 북부를 제외한 두 공화국을 명목상 장악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만을 통제하고 있었다.[61] 보어 지휘관들은 게릴라전 전술을 채택하여 영국군의 작전 능력을 방해했다.[61] 각 보어 코만도는 지역 주민의 지원과 지형에 대한 지식을 활용하여 영국군에 최대한 피해를 입히고 철수하는 전술을 사용했다.[61]

크리스티안 드 웻은 오렌지 자유국에서 게릴라전을 주도하며 서부 지역에서 성공적인 공격과 습격을 이끌었다.[61] 1901년 1월, 드 웻은 케이프 식민지에 대한 침략을 이끌었으나, 케이프 부어인들의 봉기가 없어 실패했다.[61] 이후 드 웻은 그로엔코프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영국군의 추격을 피하며 게릴라전을 계속했다.

크리스티안 드 웻(Christiaan De Wet)


서부 트란스발에서는 코스 더 레이가 이끄는 부어 코만도가 활발하게 활동했다. 1901년 9월부터 1902년 3월까지 여러 차례 중요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특히 1902년 2월 아이스터스프루이트에서 영국군 부대를 공격하여 많은 병사와 탄약을 노획했다. 1902년 3월 트위보슈에서는 영국군 제2사령관 미스넌 경을 포로로 잡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2년 4월 루이왈에서 영국군에게 패배하면서 서부 트란스발에서의 전쟁은 종식되었다.

부어 코만도


동부 트란스발에서는 루이스 보타가 이끄는 부대가 철도와 영국군 보급대를 습격하고, 1901년 9월에는 나탈 침략을 감행했다. 블러드 리버 포트 전투(Battle of Blood River Poort)에서 영국 기병을 격파했지만, 폭우로 인해 철수해야 했다. 보타는 바켄라크테에서 영국 습격 부대를 격파했지만, 영국군의 초토화 전술과 원주민 정보원 활용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영국군은 보어 게릴라의 이동을 제한하고 지역 주민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블록하우스를 건설하고 가시철선 울타리로 연결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남아프리카 두 공화국 전역에 약 8,000개의 블록하우스가 건설되었으며, 5만 명이 넘는 영국군과 1만 6천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블록하우스 근무에 참여했다.[61]

키치너는 1900년 11월 로버츠의 뒤를 이어 반게릴라 작전을 시작했다.


케이프 식민지에서는 크리칭거와 기디언 셰퍼스(Gideon Scheepers)가 게릴라전을 지속했다. 요하네스 로터의 부대는 그로엔클루프에서 전멸했고, 로터와 셰퍼스는 영국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얀 크리스티안 스무츠(Jan Christiaan Smuts)는 1901년 9월 케이프를 다시 공격하여 엘란드 강 전투에서 승리하고 병력을 3,000명까지 증강했지만, 전반적인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7. 영국의 강경책

7. 1. 초토화 작전

영국군은 보어 게릴라의 생존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통제 지역 내에서 보어 게릴라에게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표적으로 하는 초토화 작전을 실시했다. 농작물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농가와 농장을 불태우고, 보어인과 아프리카인 남녀노소와 노동자들을 강제 수용소에 수용했다.
게릴라전에 대한 영국군의 한 대응책은 게릴라의 보급과 은신처를 차단하기 위한 초토화 작전이었다. 이 사진에서 보어인 민간인들은 자신의 집이 불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영국군은 청소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자체 기병 기습 부대를 설립했다. 이 부대는 보어군을 신속하게 추격하고 끈질기게 괴롭혀 그들의 진군을 지연시키고 탈출을 차단하는 데 사용되었고, 청소 부대가 따라잡았다. 이러한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영국군이 편성한 약 90개의 기동 부대 중 상당수는 영국군과 식민지군의 혼성 부대였지만, 무장한 아프리카인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부대에서 복무한 무장 아프리카인의 총 수는 2만 명으로 추산된다.

영국군은 또한 편을 바꿔 "국민 정찰대"로 입대하도록 설득된 보어인 보조병을 이용했다. 안드리스 크로녜(Andries Petrus Johannes Cronjé, 1849–1923) 장군의 지휘하에 있던 국민 정찰대는 '가입자'로서 경멸받았지만, 전쟁 말기에는 전투에 참여하는 아프리카인의 5분의 1에 달했다.

영국군은 전쟁 내내 장갑열차를 이용하여 (보어인의 블록하우스와 부대 공격과 같은) 사건에 훨씬 더 신속하게 신속 대응 부대를 투입하거나 후퇴하는 보어 부대 앞에 투하했다.

7. 2. 강제 수용소

블룸폰테인 강제 수용소의 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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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론커스프루이트 수용소에 수감된 아프리카 원주민


"강제 수용소"라는 용어는 1900년부터 1902년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영국이 운영한 수용소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그 용어의 중요성이 커졌다.[13][62][65]

영국군은 보어인 여성과 어린이, 흑인 노동자들을 강제 수용소에 수용했다. 수용소는 처음에는 전쟁으로 집을 떠나야 했던 민간인 가족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기 위해 "난민 수용소"로 설립되었다.[13][62][65] 그러나 1900년 말 키치너가 지휘권을 잡으면서 게릴라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새로운 전술을 도입했고, 그 결과 민간인 유입이 급격히 증가했다. 키치너는 게릴라에게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하여 나라에서 쓸어버리는 민간인 숙청을 시행했다.[20]

보어 농장이 영국의 "초토화 작전"에 따라 파괴되면서 수만 명의 여성과 어린이가 강제로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63] 보어 전쟁 강제 수용소 체계는 전 국민이 체계적으로 표적이 된 최초의 사례이며, 전체 지역이 인구가 감소된 최초의 사례였다.

결국 보어 수감자를 위한 천막 수용소 45개와 흑인 아프리카인을 위한 수용소 64개가 건설되었다. 포로로 잡힌 2만 8천 명의 보어 남성 중 2만 5,630명이 영국 제국 전역의 포로 수용소로 해외로 이송되었고, 현지 수용소에 남은 대부분의 보어인은 여성과 어린이였다. 약 2만 6,370명의 보어 여성과 어린이가 이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12만 명이 넘는 흑인(및 혼혈인) 중 약 2만 명이 사망했다.[64][65][66]

수용소는 처음부터 관리가 부실했고, 과밀 현상이 심해졌다. 방치, 열악한 위생 및 불결한 위생으로 인해 수감자의 건강 상태가 매우 열악했다. 식량 배급량은 적었고, 여전히 싸우고 있는 남성의 가족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배급량이 정기적으로 적은 2단계 할당 정책이 있었다.[20] 부적절한 거처, 열악한 식단, 열악한 위생 및 과밀은 영양실조와 홍역, 장티푸스, 이질과 같은 풍토병을 유발했으며, 특히 어린이들이 취약했다. 열악한 환경과 식량 부족, 질병 등으로 수용소 내에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특히 보어인 여성과 어린이 2만 6천여 명이 사망한 것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타임스''를 포함한 영국 언론의 상당 부분이 수용소의 문제를 축소했지만, 에밀리 홉하우스(Emily Hobhouse)는 영국에서 끔찍한 상황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고 강제 수용소에 구호품을 제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8. 전쟁의 종결

1902년 초, 영국의 억제, 차단, 소모전 전술은 부어 게릴라에게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블록하우스 관측병, 울타리 순찰 부대, "소탕" 작전 부대, 그리고 아프리카 원주민들로부터의 정보 수집 및 조정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부어들과 식량 공급 경쟁을 하게 만들었고, 키치너 군대는 부어들의 전투력과 기동력에 타격을 입히고 생존을 어렵게 만들었다. 영국은 1901년 3월 평화 조건을 제시했지만, 루이스 보타와 "끝까지 싸우는 자들"(Bitter-enders)은 이를 거부했다.

베레니히닝 평화 회담


마지막 부어들은 1902년 5월 항복했고, 1902년 5월 31일 베레니히닝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영국은 부어들에게 재건 비용 300만 파운드를 지급하고, 제한적인 자치 정부를 약속했다. 이 조약으로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은 독립 공화국으로서의 존재를 마감하고 영국 제국에 편입되었다. 남아프리카 연방은 1910년 영국 제국의 자치령으로 설립되었다.

9. 전쟁의 영향

제2차 보어 전쟁은 남아프리카 지역의 역사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전 보어 공화국의 주로 농업 사회는 로버츠와 키치너의 초토화 작전으로 심대하고 근본적인 영향을 받았다. 강제 수용소와 전쟁, 망명을 통해 보어인과 흑인 아프리카인 인구의 황폐화는 그 지역의 인구 통계와 삶의 질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많은 망명자와 포로들은 농장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일부는 돌아가려 했지만 초토화 작전 과정에서 발생한 농장 방화로 인한 피해로 인해 농장을 경작할 수 없어 포기해야 했다. 궁핍해진 보어인과 흑인 아프리카인들은 숙련되지 않은 도시 빈민의 수를 늘려 광산의 "외부인"(uitlanders)과 경쟁했다.

전후 재건 행정은 밀너 경과 그의 주로 옥스퍼드 출신 밀너의 유치원에 의해 주관되었다. 이 소규모 공무원 집단은 그 지역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 결국 남아프리카 연방으로 이어졌다.

일부 학자들은 타당한 이유로 이러한 새로운 정체성이 1910년에 이어진 연합 행위의 부분적 기반이라고 지적한다. 단 4년 후 보어 반란의 도전을 받았지만,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사이 그리고 오늘날까지 남아프리카 정치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알프레드 밀너 경은 남아프리카의 영국 고등판무관이었다. 그는 전쟁 초부터 참여했으며 평화 과정과 남아프리카 연방 건설에 역할을 했다.


보어 전쟁에서 얻은 대게릴라전 전술과 교훈(이동 제한, 공간 봉쇄, 게릴라에게 식량을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 청소 그룹과 신속 대응 부대를 결합한 끊임없는 괴롭힘, 정보 수집 및 조정, 그리고 토착 동맹국의 육성)은 영국(및 다른 군대)이 향후 게릴라 작전에서 사용했으며, 말레이 공산당 반군을 말레이 비상 사태 동안 진압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은 프랑스 함락 후 특수 기습 부대를 편성할 때 보어 코만도의 기습 개념 중 일부를 채택했으며, 이전의 적을 인정하여 영국 코만도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많은 보어인들은 이 전쟁을 두 번째 "자유 전쟁"이라고 불렀다. 가장 저항적인 보어인들은 계속 싸우고자 했고 "''비테레인더s''"(또는 '화해 불가능한 자들')로 알려졌으며, 전쟁이 끝날 무렵 데네이스 라이트와 같은 많은 보어 전투원들은 영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다음과 같은 서약에 서명하기보다는 망명을 선택했다.

:본인, ''<포로 이름>''은 항복 조건을 인정하고 영국 신민이 됨을 서명함으로써 ''<수용소 이름>'' 포로 수용소에서 석방되었습니다.

그 후 1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남아프리카로 돌아왔지만 서약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라이트와 같이 결국 새로운 현상 유지를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9. 1. 남아프리카에 미친 영향

제2차 보어 전쟁은 남아프리카 지역에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20] 로버츠와 키치너의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농업 사회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강제 수용소와 전쟁, 망명은 보어인과 흑인 아프리카인 인구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많은 사람들이 농장을 잃고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여 광산의 "외부인"(uitlanders)과 경쟁해야 했다.

전후 재건 행정은 밀너 경과 그의 밀너의 유치원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남아프리카 연방 수립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새로운 정체성 형성에 기여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정체성이 1910년 연합 행위의 부분적 기반이 되었으며, 마리츠 반란의 도전을 받았지만,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현재까지 남아프리카 정치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지적한다.

전쟁 초기, 영국 관리들은 나탈 식민지의 모든 백인 치안 판사들에게 줄루족 아마코시(족장)들에게 중립을 유지할 것을 촉구했고, 크루거 대통령은 사절을 파견하여 줄루족에게 전쟁에 개입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스와지인과 같은 일부 아프리카인들은 부어인들이 빼앗은 땅을 되찾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아프리카인들의 참여가 증가했고, 많은 수가 영국 측에서 분쟁에 휘말렸다.

홀크란츠에서는 줄루족 일파의 소가 부어인들에게 빼앗기고 여성과 어린이들이 영국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현지 부어인 장교는 그 부족에게 모욕적인 메시지를 보내 소를 되찾으라고 도전했고, 줄루족은 야간 공격을 감행하여 상호 학살이 벌어졌다.[20]

약 1만 명의 흑인 남성이 부어인 부대에 배속되어 야영 업무를 수행했으며, 소수는 비공식적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영국군은 1만 4천 명이 넘는 아프리카인들을 마차 운전사로 고용했고, 더 많은 수가 스파이, 안내자, 병사로서 전투 역할을 수행했다. 1902년까지 영국군에는 약 3만 명의 무장한 아프리카인들이 있었다.

제2차 보어 전쟁에서 전사한 퀘벡 출신 병사들을 위한 기념비, 퀘벡 시티


전쟁은 "백인의 전쟁"이라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지만, 인력 부족으로 인해 양측 모두 비백인의 역할을 최소화하려는 정책은 어려움을 겪었다. 간디는 레이디스미스의 스피온 콥 전투에서 영국군을 지원하는 구급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영국군은 초토화 작전을 실시하면서 부어인과 아프리카인 모두를 강제 수용소에 수용했다. 아프리카인들은 부어인 수용자들과는 별도로 구금되었으며,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2만 명이 사망했다.

가장 저항적인 보어인들은 "''비테레인더s''"(또는 '화해 불가능한 자들')로 알려졌으며, 전쟁이 끝날 무렵 많은 보어 전투원들은 영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에 서명하기보다는 망명을 선택했다. 그 후 1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남아프리카로 돌아왔지만, 서약서에 서명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전쟁 종식 후 10년 동안 남아프리카 연방(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남아프리카 연방은 영국의 자치령으로서 핵심 동맹국임을 증명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루이스 보타가 이끄는 남아프리카 정부와 얀 스무츠와 같은 전 보어 전사들은 영국을 지지하고 독일 남서아프리카(나미비아)를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하기로 합의하면서 위기가 발생했다. 많은 보어인들은 영국을 위해 싸우는 것에 반대했고, 많은 비테렌다이너들과 그들의 동맹자들은 마리츠 반란에 참여했다. 이 반란은 신속하게 진압되었고, 주요 보어 반군들은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9. 2. 영국에 미친 영향

영국은 제2차 보어 전쟁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했다. 전쟁 총비용은 2억 1,115만 6,000파운드로 추산되며,[67] 이는 2022년 기준으로 199억 파운드에 해당한다.[68]

연도당시 비용2022년 기준 상대적 가치
1899–1900£23,000,000£2,180,000,000
1900–1901£63,737,000£6,000,000,000
1901–1902£67,670,000£6,410,000,000
1902–1903£47,500,000£4,450,000,000
소계£201,907,000£19,040,000,000
이자£9,249,000£866,000,000
총계£211,156,000£19,906,000,000



전쟁의 장기화와 초토화 작전, 강제 수용소 운영은 국제적인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보어인들을 자신들과 같은 처지로 여겨 동정심을 가졌고,[96] 일부는 아일랜드 특수부대를 조직해 보어인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영국 내에서도 "보어 지지" 운동이 확산되었고, G. K. 체스터턴과 같은 작가들이 보어 사회를 이상화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전쟁은 영국의 고립을 심화시켰고, 1900년 "카키 선거"에서 보수당이 승리했지만, 전쟁의 장기화와 강제 수용소에 대한 비판 여론은 1906년 보수당의 참패에 기여했다. 또한, 영국군의 낮은 군 복무 적합률은 빈곤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냈다.

전쟁에서 얻은 교훈은 말레이 비상 사태 등 이후 게릴라전에 활용되었고, 영국 코만도 창설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장 저항적인 보어인들은 "''비테레인더s''"로 불렸으며, 일부는 망명을 선택하기도 했다.[97]

9. 3. 국제 관계에 미친 영향

제2차 보어 전쟁은 남아프리카 지역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로버츠와 키치너의 초토화 작전은 보어인과 흑인 아프리카인 인구의 황폐화를 초래하여 인구 통계와 삶의 질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많은 망명자와 포로들은 농장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일부는 돌아가려 했지만 농장 방화로 인한 피해로 인해 경작을 포기해야 했다. 궁핍해진 보어인과 흑인 아프리카인들은 도시 빈민의 수를 늘려 광산의 "외부인"(uitlanders)과 경쟁했다.

전후 재건 행정은 밀너 경과 그의 밀너의 유치원에 의해 주관되었다. 이들은 남아프리카 연방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정체성이 1910년에 이어진 연합 행위의 부분적 기반이라고 지적한다. 보어 반란의 도전을 받았지만,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사이 그리고 오늘날까지 남아프리카 정치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보어 전쟁에서 얻은 대게릴라전 전술과 교훈은 영국(및 다른 군대)이 향후 게릴라 작전에 사용했으며, 말레이 비상 사태 동안 말레이 공산당 반군을 진압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은 프랑스 함락 후 특수 기습 부대를 편성할 때 보어 코만도의 기습 개념 중 일부를 채택했으며, 영국 코만도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많은 보어인들은 이 전쟁을 두 번째 "자유 전쟁"이라고 불렀다. 가장 저항적인 보어인들은 "''비테레인더s''"(또는 '화해 불가능한 자들')로 알려졌으며, 전쟁이 끝날 무렵 데네이스 라이트와 같은 많은 보어 전투원들은 영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에 서명하기보다는 망명을 선택했다.

10. 전쟁범죄 재판

제2차 보어 전쟁 중, 영국군 부시벨트 카빈총병(Bushveldt Carbineers, BVC) 부대원들이 보어인 포로와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 발생했다.[69] 1901년 10월 4일, 포트 에드워드 주둔 BVC 부대원 15명이 서명한 편지가 피에터스부르크의 F.H. 홀 대령에게 비밀리에 발송되었는데, 여기에는 BVC 부대원들의 여섯 가지 "수치스러운 사건"이 고발되어 있었다.[70][71]

주요 사건으로는 1901년 7월 2일 발데지아에서 항복한 아프리카너 남성과 소년 여섯 명을 사살하고 재산을 강탈한 사건,[72] 7월 4일 BVC 병사 B.J. 반 부렌이 피터 핸콕 중위에 의해 사살된 사건,[73] 8월 11일 쿠도스 강 근처에서 부상당한 포로 플로리스 비서가 보복 살해된 사건,[74] 8월 23일 엘림 병원에서 항복한 아프리카너 4명과 네덜란드인 교사 4명이 사살된 사건,[75] 같은 날 다니엘 히스 목사가 매복 살해된 사건,[76] 9월 7일 로엘프 반 스타덴과 그의 두 아들이 살해된 사건[78] 등이 있다.

이 편지는 BVC 사령관 로버트 윌리엄 레네한 소령이 이러한 비행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고 비난했다.[79] 1901년 10월 16일 조사위원회가 소집되었고,[81] 1902년 1월 16일 첫 군사 재판이 시작되었다.[82]

해리 모란트 중위, 피터 핸콕 중위 등은 "현역 복무 중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85][86] 모란트 중위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뉘른베르크 방어를 펼쳤지만,[91] 법원은 이를 불법적인 명령으로 간주하고 유죄를 선고했다.[92] 1902년 2월 27일, 모란트와 핸콕은 아프리카너 포로 8명을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격대에 의해 처형되었다.[94][95] 조지 위튼 중위는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32개월 후 석방되었다.[94]

제임스 프랜시스 토마스(James Francis Thomas) 소령이 1902년 군사재판 후 처형된 브레이커 모란트와 피터 핸콕의 합동묘 앞에 서 있다.


이 사건은 영국 군사 역사상 최초의 전쟁범죄 기소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94]

11. 한국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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