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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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참호전은 해자, 호, 구와 같은 방어 시설을 활용한 전투 방식으로, 627년 중동의 한닥 전투가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초로 여겨진다. 화기의 발달과 함께 참호는 공격과 방어 양측 모두에게 사용되었으며, 17세기 이후 요새 공략의 주요 전술이 되었다.
1차 세계 대전에서 참호전은 전례 없는 규모로 확대되어, 기관총과 포병의 발달로 인해 보병의 돌격이 어려워지면서 장기간의 소모전을 야기했다. 참호 내 생활은 열악했으며, 질병과 해충, 포격과 총격의 위험이 상존했다. 참호전은 소모전, 독가스, 갱도전, 전차, 침투 전술 등 다양한 전술과 무기를 사용했으며, 1918년 기동전의 부활로 중요성이 감소했지만,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국지전에서 나타났다. 현대전에서도 참호는 방어 거점으로 활용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참호전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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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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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개요 | |
유형 | 육상전 |
특징 | 참호를 이용한 고정 방어선 구축 공격과 방어의 제한된 기동 지속적인 소모전 |
역사적 배경 | |
기원 | 17세기 이전의 공성전에서 참호 사용 미국 남북 전쟁, 러일 전쟁에서의 초기 참호전 |
주요 발전 시기 |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선 고착화와 함께 본격화 서부 전선에서 대규모 참호망 구축 제2차 세계 대전까지도 일부 활용 |
참호전의 종식 | 기동전의 발달과 함께 참호전의 중요성 감소 전차, 항공기, 화학 무기 등의 발달로 참호 방어력 약화 |
참호전의 특징 | |
참호 구조 | 교통호, 전방 참호, 후방 참호 등 다양한 형태 철조망, 벙커, 기관총 진지 등의 방어 시설 보강 위생 및 안전 문제 (물, 진흙, 질병, 쥐 등) |
전투 방식 | 제한적인 기동과 소모전 포격, 저격, 돌격 등의 전투 방식 공격과 방어의 어려움 인명 피해 극심 |
심리적 영향 | 참호 생활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 지속적인 공포와 불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 심각한 정신 질환 유발 |
주요 사례 | |
제1차 세계 대전 | 서부 전선 (프랑스, 벨기에)의 광범위한 참호망 베르됭 전투, 솜 전투 등의 대규모 소모전 전쟁 장기화의 주요 원인 |
기타 | 미국 남북 전쟁, 러일 전쟁, 한국 전쟁 등 일부 전역에서 활용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제한적으로 사용됨 |
주요 무기 | |
화기 | 소총 기관총 박격포 수류탄 화염방사기 |
포병 | 대포를 이용한 포격전 참호 파괴 및 살상에 활용 |
기타 | 독가스 전차 |
평가 | |
전략적 의미 | 전쟁의 고착화 및 장기화 대규모 인명 손실 및 소모전 기동전의 중요성 부각 |
역사적 교훈 |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 부각 새로운 기술 발전 및 전쟁 방식 변화의 필요성 평화와 국제 협력의 중요성 강조 |
관련 용어 | |
여우굴 (foxhole) | 개인용 간이 참호 |
노 맨즈 랜드 (no man's land) | 참호와 참호 사이의 위험 지역 |
소모전 (attrition warfare) | 적의 자원을 고갈시켜 승리하는 전략 |
돌격 (over the top) | 참호에서 나와 적 참호로 공격하는 것 |
문화적 영향 | |
문학 및 예술 | 반전 문학, 전쟁 예술에 큰 영향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등 |
영화 | 1917 워 호스 패신데일 등 |
기타 | |
관련 문서 | 참호 제1차 세계 대전 전쟁 |
2. 역사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해 해자(垓子)나 도랑(호, 壕)을 파는 것은 고대부터 있었으며, 일본의 환호취락이나 고대 로마의 야영지 구축이 그 예이다.
본격적인 참호전은 627년 중동의 한닥 전투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메디나 방어를 위해 페르시아인 기술자 살만 알 파르시의 조언으로 참호(خندق|한닥ara)를 활용했다. 당시 아라비아 반도의 전투 방식에 익숙하지 않던 메카 연합군은 참호 공략에 어려움을 겪었다.
화승총 등 화기가 보급되면서 공격측도 방어측의 사격을 피하기 위해 참호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체리뇨라 전투(1503년)에서는 참호에 의지한 스페인군 화승총병이 프랑스군 기병과 스위스 용병의 돌격을 격퇴했으며, 일본의 나가시노 전투(1575년)에서도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이 화승총병 방어선 앞에 '카와키보리(乾堀)'라 불리는 토루를 쌓아 활용했다는 기록이 있다.[103]
근세에는 대포와 축성술 발달에 따라 요새 공략을 위한 공성술의 일환으로, 요새를 포위하고 평행호(平行壕)와 지그재그 형태의 접근호(接近壕, 사참호)를 파며 접근하는 방식이 발전했다. 이는 이후 참호전의 기본적인 형태로 이어지게 된다.
2. 1. 초기 형태

야전에서의 굴착 작업은 군대가 존재한 이래로 계속되어 왔다. 고대부터 마을이나 성채, 군영 등을 보호하기 위해 해자(垓子)나 도랑을 파는 경우가 많았으며, 일본의 환호취락 유적이 대표적인 예시다. 고대 로마의 군단은 적과 마주쳤을 때 이동 중에도 매일 밤 야영지 주변에 해자를 구축했으며, 로마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다라 전투(530년)에서 병사들에게 참호를 파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본격적인 참호전은 627년 중동에서 벌어진 한닥 전투에서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메디나로 침공해 오는 메카 연합군의 기병 부대를 막기 위해, 페르시아인 기술자 살만 알 파르시의 제안에 따라 메디나 주변에 참호(خندق|한닥ara)를 파서 방어했다. 당시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기병 중심의 전투가 일반적이었고 공성전 개념이 희박했기에, 참호에 막힌 메카 연합군은 공략에 어려움을 겪다 결국 철수했다. 이 공로로 살만 알 파르시는 아랍 세계 최초의 공병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중세 유럽에서도 피에몬테 내전(1640년)과 같이 방어 수단으로 참호를 판 사례가 있다.[4] 화승총 등 화기가 보급되면서부터는 방어측뿐만 아니라 공격측도 적의 사격을 피하기 위해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전쟁 중 체리뇨라 전투(1503년)에서는 스페인군 화승총병이 참호에 의지하여 프랑스군 기병과 스위스 용병 창병 부대의 돌격을 격퇴하고 승리했다. 일본의 전국 시대에 벌어진 나가시노 전투(1575년)에서도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이 화승총병의 방어선 앞에 '카와키보리(乾堀)'라 불리는 토루를 쌓아 다케다 가쓰요리 군대의 돌격을 저지하는 데 활용했다는 기록이 있다.[103]
근세에는 대포의 발달과 함께 축성술도 발전하여 거대한 요새가 등장했고, 이에 맞서는 공성술 역시 발달했다. 17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공성술은 요새를 포위한 뒤, 요새 성벽과 평행하게 해자(평행호)를 파고, 이를 기점으로 다시 요새를 향해 지그재그 형태의 참호(접근호)를 파며 접근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군대는 예상되는 적의 진격로를 차단하기 위해 대규모 야전 굴착 작업을 통해 방어선을 구축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초기에 건설된 스톨호펜 방어선[5],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비야르 공작의 명령으로 건설된 바이센부르크 방어선, 네 플러스 울트라 방어선, 그리고 반도 전쟁 중 건설된 토레스 베드라스 방어선 등이 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전쟁의 양상이 변화하고 화기의 성능이 향상됨에 따라 참호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뉴질랜드 전쟁(1845~1872)에서 마오리족은 '파(Pā)'라고 불리는 요새 시스템의 일부로 정교한 참호와 벙커를 구축했다.[6][7] 이 시스템에는 사격 참호, 통신 참호, 터널, 대포 방어용 벙커 등이 포함되었으며, 이를 통해 영국군의 포격을 효과적으로 견뎌냈다.[8] 게이트 파 전투(1864년)나 오헤아와이 전투(1845년) 등에서 영국군이 입은 상당한 피해는 당시 머스킷이나 대포로는 참호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어려웠음을 보여준다.[10] 역사가 제임스 벨리치는 마오리족이 사실상 참호전을 발명했다고 주장했으나, 다른 학자들은 이를 역사 수정주의로 비판하기도 했다.[11] 최근에는 마오리족이 독자적으로 참호 기반 방어 시스템을 개발했으며, 이것이 후대의 참호 설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12][13]
크림 전쟁(1853~1856)에서도 대규모 참호 작업과 참호전이 벌어졌지만,[14] 당시 사람들은 이것이 미래 전쟁의 중요한 특징이 될 것이라고는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다.[15] 미국 남북 전쟁(1861~1865)에서는 양측 모두 광범위한 야전 굴착과 참호 시스템을 활용했는데, 특히 빅스버그 포위전(1863)과 피터스버그 포위전(1864~1865)이 대표적이다. 피터스버그 포위전에서는 연방군이 속사가 가능한 개틀링 건을 처음으로 사용하기도 했다.[16] 이 외에도 파라과이 전쟁(1864년 시작), 제2차 보어 전쟁(1899~1902), 러일 전쟁(1904~1905) 등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의 여러 전쟁에서 참호가 중요한 방어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군사 기술은 전쟁의 양상을 극적으로 바꾸었지만, 주요 참전국들은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소총의 사거리와 발사 속도가 크게 향상되었고, 프랑스 75mm 야포와 같은 속사 포병 무기와 고폭탄, 파편탄이 등장하면서, 엄폐물 없이 개활지를 통해 공격하는 것은 극도로 위험해졌다. 방어자는 참호나 건물 등 엄폐물 뒤에서 공격해오는 적 다수를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즉, 화력의 발전 속도가 보병이나 기병의 기동 능력, 그리고 장갑의 방호 능력을 압도하게 된 것이다.[17]
프랑스와 독일군은 서로 다른 전술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속도와 기습을 활용한 공격을 중시한 반면, 독일군은 화력 우위를 바탕으로 곡사포와 기관총에 집중 투자했다. 영국군은 특정 이론보다는 실용주의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 군대들은 참호와 엄폐물을 사용할 것은 예상했지만, 여러 겹의 방어선을 구축하는 심층 방어의 효과는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 적진 돌파를 위한 빠른 기동보다는, 다음 공격 단계를 위한 화력 지원 위치를 확보하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지만, 당시에는 포병 화력만으로도 참호 속 병사들을 제압하거나 아군 보병/기병이 기동할 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과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전쟁 초기, 정면 공격은 막대한 손실을 초래할 위험이 컸기에, 참호에 있는 적을 공격할 때는 측면을 우회하는 작전이 선호되었다. 그러나 1914년 9월 제1차 앵 전투 이후, 양측이 서로의 측면을 노리며 방어선을 계속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바다로의 경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남쪽의 스위스 국경에서부터 벨기에의 북해 연안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참호선이 서부 전선에 형성되었다. 1914년 10월 말에는 벨기에와 프랑스의 전 전선이 참호로 뒤덮였고, 이 상태는 전쟁 막바지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강력한 포격과 속사 소총, 기관총 앞에서 대규모 보병 돌격은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양측 모두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아군을 보호하기 위해 땅을 파고 들어가는 데 집중했다. 1915년 이후 서부 전선은 비슷한 전력을 가진 양측이 서로를 소모시키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열린 측면이 없었기 때문에 정면 공격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엄청난 사상자를 낳았다. 공격 측뿐만 아니라 방어 측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예비 병력은 값비싼 반격 작전이나 적의 집중 포격으로 소모되었다. 솜므 전투와 같이 일시적으로 참호선이 무너진 경우도 있었지만, 전선 자체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서부 전선에서는 마지막 남은 예비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쪽이 승리하게 되는 소모전 양상이 굳어졌다. 이러한 참호전은 1918년 3월 21일 독일군이 봄 공세를 시작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참호전은 서부 전선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선이나 갈리폴리 전투 등 다른 전선에서도 벌어졌다.
반대편 참호 사이의 공간은 "무인지대"라고 불렸으며, 그 폭은 전장에 따라 다양했다. 서부 전선에서는 보통 90m에서 275m 정도였지만, 비미 능선과 같이 좁은 곳에서는 25m에 불과하기도 했다. 1917년 3월 독일군이 힌덴부르크 선으로 후퇴한 후에는 무인지대의 폭이 1km 이상 벌어지기도 했다. 반면 갈리폴리 전투의 안작(Anzac) 전구에 있는 "퀸스 포스트(Quinn's Post)"와 같이 극도로 비좁은 지역에서는 참호 간 거리가 불과 15m밖에 되지 않아, 양측 병사들이 끊임없이 서로에게 수류탄을 던지며 싸워야 했다. 동부 전선과 중동 전선에서는 전선이 매우 넓고 보급선이 길었기 때문에, 서부 전선과 같은 형태의 고착된 참호전은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참호는 더욱 정교하게 발전했다. 적을 향한 참호 가장자리의 흙더미는 파라펫이라 불렸고, 이곳에 사격 위치를 마련했다. 참호 뒤쪽의 흙더미는 파라도라고 하여, 후방에서 날아오는 포탄 파편으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했다. 참호 벽면은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모래주머니, 철조망, 나무틀 등으로 보강했으며, 때로는 지붕을 덮기도 했다.[21] 바닥에는 보통 나무 판자를 깔았고, 후기에는 배수를 위해 바닥을 나무틀 위에 설치하기도 했다. 포탄 파편으로 인한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골판지 금속 지붕으로 임시 방호벽을 만들기도 했다.[22]

참호전의 정적인 특성과 저격수의 위협 때문에, 안전하게 외부를 관측하고 사격할 수 있는 사격구멍(embrasures)이 필수적이었다.[23] 강철판으로 만든 사격구멍 덮개가 사용되기도 했는데, 사용하지 않을 때는 회전시켜 구멍을 막는 방식이었다.[23] 독일 저격수들은 이 강철판을 관통할 수 있는 철갑탄을 사용하기도 했다. 파라펫 위로 몸을 노출시키지 않고 전방을 관측하는 또 다른 방법은 잠망경이었다. 이를 응용한 잠망경 소총도 등장했는데, 병사가 참호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사격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정확도는 다소 떨어졌다. 이 장치는 특히 고지를 점령한 오스만 제국군과 대치해야 했던 갈리폴리 전투의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 군대가 많이 사용했다.

지원 참호 후방에는 다양한 수준의 편의 시설을 갖춘 참호피난처(dugout)가 건설되었다. 영국군의 참호피난처는 보통 2.5m에서 5m 깊이였다. 반면 러일 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방어 시설 구축에 뛰어났던 독일군은[24]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깊고 포탄에도 잘 견디며 환기 시설까지 갖춘 참호피난처와 전략적 요새를 건설했다. 독일군의 참호피난처는 일반적으로 훨씬 깊어서 최소 약 3.66m 깊이에 달했으며, 때로는 3층 구조로 지어져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기도 했다.
참호는 직선으로 파지 않고 지그재그 형태나 계단식으로 팠는데, 이는 적 포탄이나 수류탄이 참호 안에 떨어졌을 때 폭발의 충격파가 참호 전체로 퍼지는 것을 막고, 적군이 참호의 한 지점을 점령하더라도 참호 전체를 따라 사격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각 직선 구간은 보통 12m 미만으로 유지되었다. 이후에는 전투 참호를 구역별 화력 배치 지역으로 나누고 이를 횡단 참호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전쟁 초기 영국군의 방어 교리는 전방 참호, 지원 참호, 예비 참호의 세 개 평행선을 상호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전방 참호에서 약 약 64.01m에서 약 91.44m 뒤에 지원 참호를 두어, 전방 참호가 포격받을 때 병사들이 후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보다 더 뒤인 약 91.44m에서 약 274.32m 지점에는 예비 참호를 두어, 전방 참호가 함락될 경우 예비 병력이 반격을 준비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포병 화력이 강력해지면서 이러한 배치는 점차 효용성을 잃었다. 때로는 지원 참호를 일부러 눈에 띄게 만들어 적의 포격을 유도하는 미끼로 사용하기도 했다.
대규모 공격을 앞두고는 전방 참호 근처에 임시로 집결 참호를 파서 공격 부대가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또한 "사프(sap)"라고 불리는 임시 참호는 적진 근처의 감시 초소로 이동하거나 기습 공격을 위한 전진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아군 전선이 적진 쪽으로 돌출된 돌출부(salient)는 세 방향에서 공격받을 수 있어 방어에 불리했고, 반대로 아군 전선이 움푹 들어간 곳은 재진입부(re-entrant)라고 불렸다.
전방 참호 체계가 무너질 경우를 대비해 후방 수 킬로미터 지점에는 예비 참호 체계가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독일군은 여러 겹의 중복된 참호 체계를 구축하는 데 능했는데, 1916년 솜므 전투 당시 독일군은 1km 간격으로 완벽하게 구축된 참호 체계 두 개를 갖추고 있었고, 그 뒤로 세 번째 참호 체계까지 부분적으로 건설해 놓았다. 이러한 철저한 방어 체계는 결정적인 돌파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만약 첫 번째 참호 체계의 일부가 점령당하면, 즉시 두 번째 참호 체계와 연결되는 "전환 참호"를 파서 방어선을 유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은 발달된 철도망을 통한 신속한 증원과 보급[112], 그리고 기관총의 대량 운용[111]으로 인해 더욱 고착화되었다. 보병이나 기병의 정면 돌격은 기관총 화망 앞에서 무력화되었고, 철도를 통해 병력과 물자가 계속 보충되면서 어느 한쪽도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기 어려웠다. 또한, 전쟁 초기의 "바다로의 경쟁" 결과 서부 전선 전체가 참호로 뒤덮이면서 측면을 우회하는 기동전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방어 위주의 전황은 전선의 교착을 가져왔고, 양측은 막대한 인명 손실을 감수하며 참호를 파고 장기간 대치하는 총력전 양상으로 흘러갔다. 전쟁의 중심은 기존의 야전에서 적의 참호를 점령하는 참호전으로 완전히 이동했으며, 이는 독일의 슐리펜 계획 실패 이후 더욱 명확해졌다. 참호 파기는 보병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되었다.
군수 물자의 제약 또한 참호전을 고착시킨 요인이었다. 특히 포병의 집중적인 운용으로 탄약 소모량이 이전 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증했다. 하지만 당시 주요 수송 수단이었던 말과 마차로는 대량의 탄약을 전선 깊숙이 운반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이는 군대가 철도 종착점에서 멀리 벗어나 작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어느 쪽도 결정적인 돌파를 이루지 못하고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으며, 이러한 상황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면서 비로소 변화하게 된다.[18][19]
2.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기동전이 다시 중요해지면서 참호전의 중요성은 감소했다. 방어자들은 빠르게 변화하는 전략적 상황에 맞춰 신속하게 재배치해야 했기 때문에, 정교한 방어 시설을 구축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나 이동성이 제한되거나, 전선이 고정되거나, 우회할 수 없는 중요한 목표 주변에서는 참호 시스템이 여전히 효과적이었다. "긁어 만든 참호"나 여우굴과 같이 임시로 만든 방어 전투 진지는 모래주머니, 현지 자재, 파편 등으로 보강되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진지는 시간과 자원이 허락한다면 방어자에 의해 개선되고 확장되어 완전한 참호 시스템으로 발전하기도 했다.최근의 전쟁에서 대규모 참호전은 드물게 나타났다. 대규모 기갑 부대가 맞붙는 경우,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발전한 것과 같은 기동전이 주로 벌어졌다. 그러나 중국 내전(화이하이 전역)과 한국 전쟁(1951년 7월부터 종전까지) 후반기에는 참호전이 다시 등장했다.
냉전 시대에 나토(NATO)군은 "소련식 참호 시스템"이라 불리는 광범위한 시설을 통과하는 전투 훈련을 정기적으로 실시했다. 이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복잡한 야전 방어 시스템에서 유래한 것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동부 전선에서 소련이 보여준 야전 참호 구축 관행의 연장선이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는 양측 모두 합동 작전 훈련이 부족하여 참호 방어 진지와 터널망을 구축하여 도시와 기지를 보호하고 보급했다. 이로 인해 군사 기동성은 크게 감소했으며, 매복한 대전차 지뢰나 불안정한 지반 때문에 위장된 대전차 참호에 빠지거나 매몰되기 쉬웠다. 사용된 전술에는 참호전, 기관총 진지, 백병전, 함정, 참호와 무인지대에 걸쳐 설치된 철조망, 이란의 인해전술, 그리고 이라크의 겨자 가스와 같은 화학무기의 광범위한 사용이 포함되었다.[83]
이라크는 1991년 걸프 전쟁에서도 참호를 사용하려 시도했다. 쿠웨이트 침공 후, 사담 후세인은 연합군을 제1차 세계 대전 시대의 값비싼 참호전에 끌어들이기 위해 사우디-쿠웨이트 국경에 참호선, 기름으로 채워 공격 시 점화하는 "화염 참호", 토루, 참호 시설, 대전차 도랑, 철조망, 지뢰밭으로 구성된 대규모 방어선, 이른바 사담 라인 건설을 명령했다.[84][85][86] 그러나 쿠웨이트 해방 작전이 시작되자, 미군은 지뢰 제거 장비와 M728 전투 공병 차량으로 개조된 M1 에이브람스 전차를 사용하여 이라크군의 참호선을 매몰시켰고, 이 과정에서 일부 이라크 병사들이 생매장되기도 했다.[86] 초기 공격 후 3시간도 채 되지 않아 미국과 연합군은 사담 라인을 돌파하고 우회했으며, 이후 전쟁은 이라크군에 대한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한 고도의 기동전으로 전개되었다.[87][86] 참호 매몰 작전은 그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이어진 사라예보 포위전 기간 동안 도시 안팎에는 광범위한 참호 시스템이 존재했다. 이는 주로 전선으로 이동하거나 도시 내 저격수를 피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기존 구조물, 예를 들어 트레베비치산의 봅슬레이 경기장 등도 참호로 활용되었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벌어진 에리트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과 비교될 정도로 광범위한 참호가 사용되었다.[88] 일부 보고에 따르면, 참호전으로 인해 "에리트리아군의 진지에 대한 인해전술 공격에서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89] 에리트리아 방어선은 결국 서부 전선에서 에티오피아의 기습적인 집게형 공격에 의해 함락되었는데, 이 공격은 지뢰가 매설되었지만 방어가 허술한 산악 지대(참호 없음)를 공격하여 바렌투를 점령하고 에리트리아군의 후퇴를 초래했다. 이 공격은 당나귀를 이용한 보급과 보병 위주의 전투가 특징이었으며, 전차는 이후 지역 확보를 위해 투입되었다.[90]
한국 비무장지대(DMZ)와 파키스탄과 인도 사이 카슈미르의 통제선(Line of Control)은 언제든지 격전지가 될 수 있는 경계선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지역은 요새화된 거점을 연결하는 수 킬로미터의 참호로 구성되며, 특히 한국 DMZ는 수백만 개의 지뢰로 둘러싸여 있다. 인도군은 통제선을 900개의 고정형 전차 포탑으로 요새화했다.[91] 현재 진행 중인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 중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의 국경 또한 참호와 철조망으로 엄중하게 요새화되어 있으며, 양측은 정기적으로 교전하고 있다.[92]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대리 세력 모두 영토를 방어하고 주장하기 위해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과 유사한 방식으로 소규모 참호망을 구축하고 전투를 벌였다. 군인들은 참호에서 장시간을 보내고, 시멘트 믹서와 굴착기를 사용하여 터널망과 심층 벙커를 건설하여 추가적인 보호를 확보했다.[93] 민스크 협정 이후 양측 모두 방어를 위해 정교한 참호망과 심층 벙커를 구축하고 주로 박격포와 저격수 사격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전선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까지 크게 이동하지 않았다.[94]
2022년 러시아의 전면 침공 이후, 특히 초기 러시아 공세가 둔화되면서 양측은 참호선과 유사한 방어 시설을 건설했으며, 도네츠크주 등지에서 느린 진격과 포격전이 벌어지는 소모전 양상이 나타났다.[95] 진흙탕 참호, 포탄으로 훼손된 땅의 나무 그루터기 등의 모습은 바흐무트 전투를 상징하게 되었으며, 이 전투에서는 매일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어느 쪽도 큰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는 참호전 상황이 연출되었다.[96][97] 현대 기술, 특히 드론과 이동 통신망의 활용이 참호전에 접목되어, 전장은 "21세기 정보, 감시 및 정찰 기술이 결합된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98]

현대전에서도 보병은 거점 장악 및 방어에 필수적인 병과로 운용된다. 거점을 정밀하게 공격하는 무기의 등장으로, 좋은 표적이 되기 쉬운 요새나 토치카의 중요성은 과거에 비해 감소했다. 반면, 넓게 분산되어 참호에 숨은 보병 부대는 이러한 정밀 무기로 큰 피해를 주기 어렵다고 여겨진다.
건설기계 기술의 발전은 현대적인 참호 구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육상자위대의 엄폐호 굴착기와 같이 토목 중기 기술을 응용한 장비나, 1970년대 소련에서 개발되어 현재 러시아군에서도 운용 중인 BTM-3과 같은 참호 굴착 전용 장비를 통해 기계화 부대의 침공 속도에 대응할 수 있을 만큼 빠르게 참호와 엄폐호를 포함한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핵무기조차도 방호복을 입고 넓게 분산된 참호에 흩어진 보병을 완전히 제거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분산된 보병 대대를 제압하기 위해 여러 개의 전술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비용 대비 효과가 낮고, 사용 후 방사능 오염 문제로 해당 지역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든다. 또한 핵무기의 실전 사용은 국제 사회의 격렬한 비난을 초래할 수 있다.
한편, 고위력이면서 방사능 오염이 없고 전술 핵무기보다 저렴한 연료 기화 폭탄의 등장은 참호의 존재 의의를 위협하고 있다. 이 폭탄은 광범위한 지역에 급격한 기압 변화를 동반하는 충격파를 발생시켜 참호 내 병사를 압사시킬 수 있으며, 근거리에서는 막대한 열량으로 인한 피해도 크다.
3. 참호의 구조 및 건설
참호 속 보병에게 가장 큰 위협은 적 보병의 돌격보다는 포탄이나 수류탄 파편이었다. 이러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참호는 직선이 아닌 지그재그 형태로 파거나, 던져진 수류탄을 처리하기 위한 수류탄 구덩이나 홈을 만들었다. 수류탄의 위력은 주로 파편에 의한 것이므로, 구덩이에 떨어뜨리면 주변 병사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여겨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서부 전선에서는 양측 모두 적에게 후방을 노출시키지 않으려 참호를 계속 연장하여, 결국 스위스 국경에서 영국 해협까지 거대한 참호망이 형성되었다.
참호 벽면은 포격 진동으로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보강되었다. 독일군은 러일 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24] 철근, 콘크리트 등으로 견고하게 구축한 반면, 연합국은 주로 목재를 사용하여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참호 바닥에는 지하수에 대비해 배수로를 파고 통로에는 발판을 깔기도 했다.
하지만 비가 오면 참호에 물이 고이기 일쑤였고, 병사들은 오염된 물이 찬 진흙탕에 발을 담근 채 전투를 치러야 했다. 한 영국 병사는 "진흙, 진흙, 진흙…. 나는 매일 진흙 참호 속에 있습니다…. 참호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최악의 적은 비입니다. 수일, 수주 동안 젖은 진흙 위에 웅크리고 앉아 적의 포탄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을 것입니다. 두꺼운 부츠를 신고 있지만, 차가운 진흙 때문에 발은 얼음 덩어리 같습니다. 몇 개의 발가락은 움직이지 않습니다…."[113]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위생적인 환경은 전염병을 유발했으며, 참호구내염이나 참호족(심각한 무좀이나 동상으로 발을 절단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음)과 같은 참호 특유의 질병을 낳았다. 특히 추운 지역에서는 피해가 커서 전후 복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참호 안에는 쥐와 바퀴벌레 같은 위생 해충이 들끓어 전염병을 옮기고 식량에 피해를 주기도 했다.
일본 제국 육군의 경우, 참호를 깊이에 따라 입사용, 릎사용, 복사용 등으로 구분하고, 사격 효율성을 고려하여 가슴벽, 팔걸이 등의 세부 구조를 설계했다.
3. 1. 구조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였으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참호는 점차 깊고 복잡하게 서로 연결된 방어 시설로 발전했다. 강철, 콘크리트, 철조망 등으로 강화된 참호망은 이전의 요새보다 훨씬 강력한 방어력을 제공했으며, 때로는 4~5개의 평행선이 서로 연결되기도 했다. 이는 포격과 대규모 보병 공격 모두에 효과적으로 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20] 잘 구축된 참호는 병사들이 똑바로 서서 이동할 수 있도록 최소 2.5m 깊이로 파였다.
참호는 적 포탄이나 수류탄 파편 피해를 줄이기 위해 직선이 아닌 지그재그 형태로 건설되었다. 또한 던져진 수류탄을 처리하기 위한 구멍이나 홈(수류탄 구덩이)을 만들기도 했다. 참호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
- 파라펫 (Parapet): 적을 향한 참호 앞쪽의 흙둑으로, 병사들이 몸을 숨기고 사격할 수 있는 사격단 역할을 했다.
- 파라도 (Parados): 참호 뒤쪽의 흙둑으로, 후방에서 날아오는 포탄 파편으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했다.
- 벽면 보강: 참호 벽이 포격 진동 등으로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모래주머니, 철망, 나무틀 등으로 보강했다.[21] 연합군은 주로 목재로 보강하여 흙이 드러난 부분이 많았지만, 독일군은 철근, 콘크리트, 벽돌 등을 사용하여 더 견고하게 만들었다. 때로는 파편 방어를 위해 골판지 금속 지붕을 씌우기도 했다.[22]
- 바닥: 습기를 막고 이동을 편하게 하기 위해 바닥에는 나무 판자(발판)를 깔았다. 후기 설계에서는 배수로를 만들기 위해 바닥을 나무틀 위에 설치하기도 했다.
참호를 파는 방법은 주로 세 가지가 있었다.
- 참호 파기 (Trenching): 지표면에서 아래로 파 내려가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지만, 작업자가 적에게 노출될 위험이 있어 주로 후방 지역이나 야간에 진행되었다.
- 삽질 (Sapping): 참호의 끝부분을 파서 확장하는 방식으로, 작업자는 비교적 안전했지만, 한 번에 한두 명만 작업할 수 있었다.
- 터널링 (Tunneling): 삽질과 유사하지만 흙 지붕을 남겨두고 파다가 마지막에 제거하는 방식으로, 더욱 안전한 방식이었다.
영국군 지침에 따르면 450명의 병력이 하룻밤(6시간) 동안 250m 길이의 전선 참호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완성된 참호도 포격이나 날씨 때문에 계속 손상되었으므로 지속적인 유지보수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참호병'이라는 특수 부대가 동원되었다. 이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참호를 파거나 수리하도록 훈련받았지만, 전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아 동료 병사들에게 멸시를 받기도 했다.

참호 내부에는 전투와 생존을 위한 다양한 시설이 마련되었다. 저격수의 위협 속에서 안전하게 외부를 관측하고 사격하기 위해 총안구(Loopholes)가 설치되었다.[23] 이 구멍은 사용하지 않을 때 덮을 수 있는 회전식 강철판으로 보호되기도 했다.[23] 잠망경은 병사들이 몸을 노출시키지 않고 파라펫 너머를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군대는 갤리폴리 전투에서 고지를 점령한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하기 위해 잠망경 소총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는 안전하게 저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사격 정확도는 떨어졌다.
후방 지원 참호에는 병사들이 쉬거나 포격을 피할 수 있는 대피호(Dugout)가 건설되었다. 영국군의 대피호는 보통 2.5m에서 5m 깊이였던 반면, 러일 전쟁의 경험을 연구한 독일군은[24] 참호 건설에 과학적으로 접근했다. 독일군은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깊고 포탄에도 견딜 수 있는 환기가 잘되는 견고한 대피호와 전략적 요새를 만들었다. 이들의 대피호는 보통 최소 약 3.66m 깊이였으며, 때로는 3층까지 파고 콘크리트 계단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참호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전방에는 철조망 장애물이 여러 겹으로 설치되었다. 철조망은 적 보병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늦추고, 병사들의 몸을 얽히게 하여 기관총 등의 집중 사격에 노출시키는 치명적인 역할을 했다. 철조망은 주로 야간에 특수 철조망 설치반이 콘서티나 철조망이나 독일군이 발명한 소음이 적은 나사말뚝을 이용하여 설치했다. 철조망을 제거하기 위해 장기간 포격을 가하거나 방갈로르 어뢰와 같은 폭파 장치를 사용했다.[25] 독일군이 사용한 철조망은 영국군이 사용하던 것보다 굵어서 영국제 철조망 절단기로는 자르기 어려웠다.[26]
참호는 지형에 따라 다른 형태로 구축되기도 했다. 지하수면이 높은 플랑드르 저지대에서는 땅을 파는 대신 모래주머니를 쌓아 올린 거대한 토루(흉벽) 형태로 참호를 건설하기도 했다. 반면, 알프스 산맥에서는 해발 3900m 고지대의 단단한 암석이나 빙하 속에 참호를 파기도 했다.
일본 제국 육군의 경우, 참호는 깊이에 따라 입사용(서서 쏘기), 릎사용(무릎 쏘기), 복사용(엎드려 쏘기) 등으로 구분했으며, 참호 앞의 가슴벽(흉벽), 참호 본체, 참호 뒤의 뒷벽(배벽)으로 구성되었다. 사격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조준 높이, 팔걸이 등의 세부 규격을 정해두기도 했다.
3. 2. 건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참호는 비교적 단순한 형태였다. 당시 교리에 따라 병사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참호에 들어섰기 때문에, 포격에 매우 취약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러한 취약성과 방어해야 할 전선의 길이 때문에 참호는 점차 더 적은 병력으로 유지되었고,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참호 앞에 철조망을 설치하여 적의 이동을 방해했다. 병사들은 매일 밤 철조망을 보수하고 강화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전쟁 초기 몇 달간 임시로 만들어졌던 참호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 깊고 복잡한 구조로 발전하여, 포격과 대규모 보병 공격에도 견딜 수 있는 광대한 상호 연결 방어 시설이 되었다. 특히 포탄 파편 등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방탄 참호피난처 건설이 중요해졌다. 잘 만들어진 참호는 사람이 똑바로 서서 이동해도 안전할 수 있도록 최소 2.5m 깊이로 파였다.

참호를 파는 데는 주로 세 가지 방법이 사용되었다.
- 참호 파기 (Trenching): 지표면에 서서 아래로 파 내려가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다. 많은 인원이 동시에 작업할 수 있어 효율적이지만, 작업 중인 병사들이 적에게 노출될 위험이 커서 주로 후방 지역이나 야간에만 가능했다.
- 삽질 (Sapping): 이미 만들어진 참호의 끝부분에서부터 옆으로 파 나가는 방식이다. 작업자가 적에게 노출될 위험은 적지만, 한 번에 한두 명만 작업할 수 있어 시간이 오래 걸렸다.
- 터널링 (Tunneling): 갱도전처럼 땅속으로 굴을 파 들어가는 방식이다. 삽질과 유사하지만 흙으로 된 지붕을 남겨두었다가 참호가 완성될 때 제거한다.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작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작업 속도는 느렸다.
영국군의 참호 건설 지침에 따르면, 450명의 병사가 야간에 6시간 동안 작업하면 250m 길이의 전선 참호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참호는 비나 눈 등 날씨 변화나 적의 포격으로 인해 계속 손상되었기 때문에 지속적인 유지보수가 필수적이었다.
참호 건설과 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참호병이라는 특수 부대도 있었다. 이들은 보통 4명이 한 조를 이루어 작업했으며, 2명의 무장 병사가 이들을 호위했다. 참호병은 M1911 권총 하나로만 무장했고, 전투보다는 참호 건설에 집중했다. 이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참호를 팔 수 있도록 훈련받아, 3~6시간의 작업으로 일반 보병들이 이틀에 걸쳐 할 작업을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위험 상황 시 후퇴하도록 지시받았기 때문에, 동료 병사들에게는 종종 멸시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훈련된 참호병은 전쟁 기간 동안 약 1,100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령부에서는 이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참호의 구조는 방어 효율을 높이기 위해 여러 요소로 구성되었다. 적을 향한 참호 앞쪽의 흙벽은 파라펫 (Parapet)이라 불렀고, 이곳에 병사들이 몸을 숨기고 사격할 수 있는 사격단(firing step)을 만들었다. 참호 뒤쪽의 흙벽은 파라도 (Parados)라고 불렀는데, 이는 참호 뒤쪽으로 떨어지는 포탄 파편으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참호의 양쪽 벽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주머니 (sandbags), 철조망, 나무틀 등으로 보강했으며, 때로는 지붕을 덮기도 했다.[21] 참호 바닥에는 보통 나무 판자 (duckboards)를 깔아 진흙탕이 되는 것을 막았다. 후기 설계에서는 바닥을 나무틀 위에 올려 배수로를 만들기도 했다. 간접 사격으로 인한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일부 참호는 골판지 금속 지붕으로 보강하여 임시 방호책으로 삼기도 했다.[22]
참호전의 정적인 특성과 저격수의 위협 때문에, 안전하게 외부를 관측하고 사격할 수 있는 사격구멍 (Loopholes)이 필수적이었다.[23] 이 구멍에는 종종 "열쇠구멍" 모양의 강철판이 사용되었는데, 사용하지 않을 때는 회전식 덮개로 구멍을 막을 수 있었다.[23] 독일 저격수들은 이 사격구멍을 관통할 수 있는 특수 장갑 관통탄을 사용하기도 했다. 파라펫 너머를 안전하게 관측하는 또 다른 방법은 잠망경 (Periscope)이었다. 가장 간단한 형태는 막대기 양 끝에 거울 조각을 비스듬히 붙인 것이었다. 많은 군대에서는 잠망경 소총 (Periscope rifle)을 사용했는데, 이를 통해 병사들은 참호 밖으로 몸을 드러내지 않고도 적을 저격할 수 있었다. 다만, 일반 소총보다 사격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장치는 특히 갈리폴리 전투 당시 고지대를 점령한 오스만 제국 군대에 맞서 싸웠던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군대가 많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원 참호 후방에는 다양한 수준의 편의 시설을 갖춘 참호피난처 (Dugouts)가 건설되었다. 영국군의 참호피난처는 보통 2.5m 에서 5m 깊이였다. 반면, 러일 전쟁의 경험을 통해 방어 시설 구축에 대한 지식을 쌓은 독일군은[24] 참호 건설을 과학적으로 접근했다. 이들은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깊고 포탄에도 잘 견디며 환기 시설까지 갖춘 참호피난처와 전략적 요새를 건설했다. 독일군의 참호피난처는 일반적으로 훨씬 더 깊어서 최소 약 3.66m 깊이에 달했으며, 때로는 3층 구조로 만들어져 콘크리트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3. 3. 배치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참호는 비교적 단순한 형태였으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점차 깊고 복잡하게 상호 연결된 광대한 방어 시스템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참호망은 강력한 포격과 대규모 보병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참호는 직선으로 파지 않고 지그재그나 계단식 패턴으로 구축되었는데, 이는 적의 포탄이나 수류탄이 참호 안에 떨어졌을 때 폭발 피해가 참호 전체로 퍼지는 것을 막고, 적군이 참호 일부를 점령하더라도 전체 참호선에 사격을 가하기 어렵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일반적으로 직선 구간은 12미터 미만으로 유지되었고, 이후에는 전투 참호를 구역별 화력 배치 지역으로 나누고 횡단 참호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적을 향한 참호 가장자리에는 흙을 쌓아 만든 파라펫이 있었고, 참호 후면에는 파라도를 만들어 후방에서 날아오는 포탄 파편으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했다. 참호 벽면은 포격 진동으로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보강되었는데, 러일 전쟁의 경험을 연구한 독일군은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깊고 견고한 참호를 구축한 반면, 연합군은 주로 목재로 보강하여 상대적으로 취약한 경우가 많았다.[24]
전쟁 초기 영국군의 방어 교리는 일반적으로 세 개의 평행한 참호선으로 구성된 시스템을 제안했다.
- 전방 참호 (Front line trench): 최전선에 위치하며 적과 직접 대치하는 참호이다. 이곳에는 경계 병력이 배치되었고, 주로 새벽과 황혼 시간에 대규모 병력이 배치되어 적의 기습에 대비했다. 방어력 강화를 위해 참호 앞에는 철조망 지대가 설치되었다.
- 지원 참호 (Support trench): 전방 참호 후방 약 약 64.01m 에서 약 91.44m 거리에 위치했다. 전방 참호가 포격을 받거나 적에게 점령당했을 때 병사들이 후퇴하거나, 반격을 준비하는 거점 역할을 했다. 때로는 적 포격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로 사용되기도 했다.
- 예비 참호 (Reserve trench): 지원 참호 후방 약 약 91.44m 에서 약 274.32m 거리에 위치했다. 예비 병력이 대기하며 전방 참호가 돌파당했을 경우 즉각적인 반격을 준비하는 곳이었다.
이 세 종류의 참호는 통신 참호 (Communication trench)를 통해 서로 연결되었다. 통신 참호는 병력과 보급품을 안전하게 이동시키는 통로 역할을 했으며, 전방 참호와 교차하는 지점은 특히 중요한 방어 거점으로 요새화되었다.
이러한 기본적인 참호 시스템 외에도 필요에 따라 임시 참호가 구축되었다. 대규모 공격 시에는 병력 집결을 위해 전방 참호 근처에 집결 참호가 파였고, 적진 정찰이나 기습 공격을 위한 전초기지로 사프(sap)라는 임시 참호가 활용되기도 했다. 지형에 따라서는 특정 방향으로 돌출된 돌출부나 반대로 오목하게 들어간 재진입부(re-entrant)가 형성되기도 했는데, 특히 돌출부는 여러 방향에서 공격받기 쉬워 방어에 불리했다.
전방 참호 체계 뒤에는 수 킬로미터 후방에 예비적인 참호선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독일군은 여러 겹의 중복된 참호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뛰어났다. 1916년 솜므 전투 당시 독일군은 1킬로미터 간격으로 완벽하게 구축된 두 개의 참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고, 그 뒤에는 세 번째 참호선이 부분적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이러한 철저한 중첩 방어선은 연합군의 결정적인 돌파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만약 첫 번째 참호선의 일부가 점령되면, 즉시 전환 참호(switch trench)를 파서 두 번째 참호선과 연결하여 방어선을 재정비했다.
참호 배치는 지형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플랑드르와 같이 저지대이고 지하수면이 높은 지역에서는 땅을 파는 대신 모래주머니를 쌓아 토루 형태의 참호를 구축해야 했다. 반면 알프스 산맥과 같은 고산 지대에서는 해발 3900m까지 참호가 구축되었으며, 단단한 암석 지형과 혹독한 기후 조건에 맞춰 참호의 구조와 배치가 조정되었다.
4. 참호전의 전술 및 무기
중세에 발명된 총은 개량을 거듭했지만, 근세까지도 머스켓총은 명중률이 낮고 장전 시간이 길어 백병전이 여전히 중요했다.[104] 당시 총은 전장식이었기 때문에 장전에 시간이 걸려, 보병끼리의 총격전만으로는 승패를 가르기 어려웠다. 근대 초기까지도 대열을 갖춘 전열보병이 근접 거리까지 행진하여 일제 사격을 가한 후, 총검을 꽂은 소총으로 돌격하여 승패는 백병전으로 결정되었다. 이 때문에 참호는 주로 공성전에서 포격으로부터 공격측을 보호하는 등 제한적인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남북 전쟁이나 크림 전쟁을 거치며 전쟁의 양상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화기의 유효 사거리가 크게 늘어나면서 병사들은 총탄으로부터 몸을 숨길 필요성이 커졌고, 참호나 엄폐호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105] 또한 기존의 흑색화약[106]보다 위력이 강하고 연기가 적어 시야를 방해하지 않는 무연화약[107]이 개발되고, 후장총[108]과 볼트액션 방식의 연발 소총이 보급되면서[110] 화력의 밀도와 명중률이 급격히 증가했다.[109] 명중률 높은 라이플총이 보급되면서 원거리 저격의 위협도 커졌다.[110]
이러한 무기 기술의 발달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대량으로 운용된 기관총은 보병이나 기병의 정면 돌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강력한 화선을 구축했다.[111] 여기에 발달된 철도망을 통한 신속한 병력 증원과 보급[112]까지 더해지면서, 기존 전술로는 견고하게 구축된 참호 지대를 돌파하기 매우 어려워졌다.
전쟁 초기, 독일의 슐리펜 계획 실패 이후 서부 전선에서는 양측 군대가 서로의 측면을 우회하려는 시도가 이어졌으나(이른바 "바다로의 경쟁"), 결국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참호선이 형성되었다. 이로 인해 참호 지대를 우회하는 기동이 불가능해지면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전쟁은 장기적인 소모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 방어측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 속에서, 전쟁의 중심은 기존의 회전에서 적 참호를 제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참호전으로 전환되었다. 수년에 걸친 참호전 동안 수천에서 수십만 명에 이르는 희생을 치렀지만, 양측 모두 결정적인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4년간 참호전이 지속되었다.
참호전이 일반화되면서, 참호를 파는 작업은 보병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무렵에는 "보병의 일은 8할이 참호 파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4. 1. 전술
제1차 세계 대전 참호전의 기본 전략은 자신의 위치를 강력하게 방어하면서 동시에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후방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술 발전은 전쟁의 양상을 크게 바꾸었다. 소총의 사거리와 발사 속도 증가는 참호나 엄폐물 뒤에 숨은 방어자에게 압도적인 우위를 제공했다.[17] 프랑스 75mm 야포와 같은 속사 포병과 고폭탄, 파편탄의 등장은 엄폐 없는 공격을 더욱 위험하게 만들었다. 화력의 증가는 보병이나 기병의 기동 능력과 장갑의 방호 능력을 압도했다. 이러한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기동성의 혁명이 필요했다.[17]
초기 주요 교전국들은 이러한 변화의 의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프랑스와 독일군은 서로 다른 전술 교리를 채택했다. 프랑스는 속도와 기습을 이용한 공격을 중시한 반면, 독일은 화력에 의존하여 곡사포와 기관총에 많은 투자를 했다. 영국군은 명확한 전술 교리 없이 실용주의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군대들은 참호와 은폐물을 사용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심층 방어의 효과는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포병이 참호 속 병력을 제압하여 보병과 기병이 기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앵 전투 이후 "바다로의 경쟁"을 거치며 서부 전선에는 스위스 국경에서 북해까지 이어지는 연속적인 참호선이 구축되었다. 이로 인해 측면을 우회하는 기동은 불가능해졌고, 정면 공격은 막대한 사상자를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양측 모두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병력을 보호하기 위해 참호를 파는 데 집중했다. 1915년 이후 서부 전선은 소모전 양상으로 굳어졌고, 전선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전쟁의 승패는 마지막 예비군을 투입할 수 있는 쪽에 달려있게 되었다. 이러한 참호전 양상은 1918년 3월 독일군의 봄 공세가 시작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참호전은 이탈리아 전선이나 갈리폴리 등 다른 전선에서도 나타났다.
물류 역시 중요한 제약 요소였다. 포병의 집중적인 사용은 막대한 양의 탄약 소모를 의미했고, 말과 수레만으로는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군대는 철도 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보급품을 운송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이는 대규모 진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18][19]
=== 공격 전술 ===
참호 돌격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는 총검을 꽂은 병사들의 물결이 무인지대를 가로질러 적의 총탄 속으로 행진하는 것이지만, 이는 전쟁 초기에나 사용되었고 성공률은 매우 낮았다. 기관총과 철조망의 결합은 보병의 정면 돌격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리델 하트는 기동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가시철조망과 기관총이라는 요소를 극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격 시 포병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포격은 적의 방어 시설을 파괴하고, 참호 속 병력을 살상하거나 사기를 꺾어 보병의 돌격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또한 적의 대포병 사격을 제압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포탄으로는 주로 파편탄, 고폭탄, 파편탄이 사용되었고, 후기에는 독가스탄도 사용되었다. 영국군은 테르밋 소이탄을 실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군대는 포탄 소모량을 과소평가하여 전쟁 초기 포탄 부족을 겪었다.

보병 돌격에 앞서 이루어지는 준비 포격은 때로는 수일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독일군의 견고한 벙커나 철조망을 효과적으로 파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공격을 예고하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솜 전투 시작 전 8일간의 영국군 포격은 독일군의 방어 시설에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37]
보병 공격을 보호하기 위해 포병은 탄막을 형성했다. 초기에는 "상승 방벽" 전술이 시도되었는데, 특정 목표 지점에 포격을 집중한 후 다음 목표 지점으로 포격을 옮기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보병의 진격 속도와 맞추기 어려워 효과적이지 못했다. 이후 "크리핑 방벽" 전술이 개발되어 1916년 후반부터 표준적인 공격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포탄의 장막을 천천히 전진시키며 공격하는 보병 바로 앞의 지역을 제압하는 방식으로, 적을 살상하기보다는 억제하여 보병의 진격을 엄호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참호전에서 수류탄은 보병의 주요 무기 중 하나가 되었다. 수류탄은 참호에 숨어있는 적을 직접 노출 없이 공격할 수 있었고, 정확한 조준 없이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양측 모두 전문 수류탄 투척병 부대를 신속하게 양성했다. 독일군과 오스만 제국군은 초기부터 수류탄을 잘 갖추고 있었지만, 영국군은 부족하여 잼 캔 수류탄과 같은 급조 폭탄을 사용하기도 했다. 1915년 말 밀스 수류탄이 보급되면서 상황이 개선되었다.
참호 내 근접 전투를 위해 참호 습격용 곤봉, 삽, 참호용 단검 등 다양한 즉석 무기가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날카롭게 간 삽은 총검보다 참호의 좁은 공간에서 사용하기 용이하고 적에게 걸리지 않아 선호되기도 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펌프 액션 산탄총(특히 미군의 "참호총")이나 기관단총(독일의 MP 18, 이탈리아의 베레타 M1918)과 같이 근접 전투에 특화된 무기들이 개발되어 사용되었다.

1915년, 독일군은 새로운 침투 전술을 도입했다. 이는 프로이센 군의 전통적인 기동 및 집중 교리를 소부대 단위에 적용한 것으로, 특별히 훈련된 돌격대( Stoßtrupp|슈토스트룹de )가 적 방어선의 취약점을 파고들어 강력한 거점은 우회하고 후방으로 깊숙이 침투하는 방식이었다. 이 전술은 현장 지휘관의 주도적인 판단을 중시했다.[64][66] 독일군은 카포레토 전투와 1918년 독일 봄 공세 등에서 이 전술을 성공적으로 활용하여 상당한 진격을 이루었다. 특히 봄 공세 당시 오스카르 폰 후티어 장군이 이끈 제18군의 성공으로 "후티어 전술"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침투 부대의 보급과 통신 능력의 한계로 결정적인 돌파에는 실패했고, 결국 연합군의 반격으로 공세는 좌절되었다. 유사한 전술이 프랑스 대위 앙드레 라파르그(André Laffargue)나 러시아 장군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에 의해 독자적으로 개발되기도 했으나, 군사 교리로 채택되지는 못했다.[65]


지뢰 전술 역시 참호 돌파를 위해 사용되었다. 전문 터널 공병대가 적진 아래로 갱도를 파고 폭발물을 설치하여 폭파시키는 방식이다. 폭발로 생긴 거대한 탄흔은 적 참호를 파괴하고, 공격 부대가 점령하여 전진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엄폐물을 제공했다.[67][68] 솜 전투 첫날 영국군은 19개의 지뢰를 폭파했으며,[69][70] 메시느 전투에서는 총 455톤에 달하는 폭발물을 터뜨려 독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71] 그러나 갱도 굴착에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어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널리 사용되기 어려웠다.


전차는 참호전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가 개발한 새로운 무기였다. 기관총이나 경포로 무장하고 장갑으로 보호받으며 궤도로 철조망과 참호를 돌파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1916년 솜 전투에 처음 투입되었으나 초기 모델은 기계적 결함과 지형 극복 능력 부족으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1917년 캉브레 전투에서 개선된 전차가 대량 투입되어 잠재력을 보여주었지만, 독일군 역시 대전차포 등을 이용한 대전차 전술로 대응했다. 1918년에는 성능과 전술이 향상된 전차들이 연합군의 백일 공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독일군을 격퇴하고 전쟁을 종결시키는 데 기여했다. 전차의 등장은 참호전의 종말을 예고하는 중요한 변화였다.[72]
=== 방어 전술 ===

참호전에서 방어는 공격보다 유리한 경우가 많았다. 기관총은 방어의 핵심 무기였다. 독일군은 전쟁 초기부터 기관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배치했지만, 영국 지휘부는 기관총을 과소평가하여 도입이 늦어졌다.[31] 더글러스 헤이그 원수는 기관총을 "과대평가된 무기"라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3] 그러나 솜 전투 첫날 영국군의 막대한 사상자는 기관총의 가공할 방어력을 증명했다.[34] 이후 영국군도 기관총 부대를 창설하고 루이스 경기관총 등을 배치하여 화력을 강화했다. 캐나다군은 간접 사격과 같은 새로운 기관총 운용 전술을 개발하기도 했다.
참호 자체도 정교하게 구축되었다. 단순한 직선이 아닌 지그재그나 계단식으로 파서 포탄이나 수류탄의 폭발 피해를 국한시키고, 적에게 점령당하더라도 전체 참호선이 무력화되는 것을 방지했다. 일반적으로 전방 참호, 지원 참호, 예비 참호의 3중 구조로 구성되었으며, 각 참호선은 교통호로 연결되었다.
독일군은 특히 방어선 구축에 뛰어났다. 그들은 힌덴부르크 방어선과 같이 여러 개의 중복된 참호 체계를 준비하여 결정적인 돌파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 "심층 방어" 개념을 도입하여, 연속적인 참호선 대신 상호 지원 사격이 가능한 일련의 요새를 구축했다. 공격자는 요새 사이를 통과할 수는 있지만 강력한 측면 사격에 노출되었다. 독일군은 또한 불리할 경우 더 견고하게 준비된 후방 방어선으로 전략적으로 후퇴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영국군도 유사한 방식을 채택하려 했으나, 1918년 독일군의 봄 공세 당시에는 불완전하게 시행되어 효과를 보지 못했다.
철조망은 참호 방어에서 필수적인 요소였다. 여러 겹으로 설치된 철조망 지대는 보병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지연시켰고, 기관총의 사격과 결합될 경우 치명적인 살상 지대를 형성했다. 철조망 설치와 제거는 주로 야간에 은밀하게 이루어졌으며, 방갈로르 어뢰와 같은 특수 장비가 개발되기도 했다.[25][26]
참호를 성공적으로 점령하더라도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공격 부대는 즉시 점령한 참호를 모래주머니, 삽, 철조망 등을 이용해 강화하고 예상되는 적의 반격에 대비해야 했다. 독일군은 잃어버린 지역을 즉시 반격하여 되찾는 것을 중시했지만, 이는 때때로 큰 손실을 초래했다. 반면 영국군은 1917년부터는 예상되는 반격을 유리한 위치에서 격퇴할 수 있도록 진격 목표를 제한하는 전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4. 2. 무기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표준 보병의 주요 무기는 소총과 총검이었다. 그러나 참호전이 본격화되면서 무기 체계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참호의 정적인 특성과 저격수로부터 몸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병사들은 참호 벽의 사격구멍(총안구)을 통해 사격하거나 잠망경을 이용해 외부를 관측했다.[23] 특히 잠망경 소총은 병사가 몸을 노출하지 않고 사격할 수 있게 해주었으나 정확도는 다소 떨어졌다. 이 장치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고지를 점령한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해야 했던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군대가 주로 사용했다.
참호전에서는 수류탄이 주요 보병 무기로 떠올랐다. 수류탄은 적에게 직접 노출되지 않고도 참호 안의 적을 공격할 수 있었으며, 정확한 조준 없이도 효과를 발휘했다. 독일군과 터키군은 전쟁 초기부터 수류탄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으나, 영국군은 준비가 부족하여 병사들이 직접 잼 캔 수류탄 같은 급조 폭탄을 만들어 사용해야 했다. 1915년 말 영국제 밀스 수류탄이 널리 보급되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7천5백만 개가 사용되었다. 소총 수류탄도 개발되어 활용되었다. 적 참호에 수류탄을 더 멀리 던지기 위해 독일군은 스프링식 투척 장치인 Wurfmaschinede을 사용했고,[29] 프랑스군은 Sauterelle|사우테르프랑스어라는 석궁 형태의 투척기를, 영국군은 리치 참호 발사대와 웨스트 스프링 건 등을 사용했다. 하지만 1916년 이후 이러한 투척기들은 대부분 소총 수류탄과 박격포로 대체되었다.[30]
참호 내 근접 전투를 위해 병사들은 종종 참호 습격용 곤봉, 창, 도끼, 망치, 삽, 참호용 단검, 너클과 같은 즉석 무기를 사용했다. 특히 날카롭게 간 삽은 총검보다 참호의 좁은 공간에서 사용하기 편리하고 적에게 박히는 문제도 적어 선호되기도 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더 나은 장비가 보급되어 즉석 무기 사용은 줄어들었다. 점령한 적 참호를 소탕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은 특수 전투원 그룹인 "참호 청소부"(Nettoyeurs de Tranchées프랑스어 또는 Zigouilleurs프랑스어)는 수류탄, 단검과 함께 권총을 선호했다. FN M1900, 콜트 모델 1903 포켓 해머리스, 새비지 모델 1907, 스타 보니파시오 에체베리아, 루비 권총 등이 사용되었다.[28]
독일군은 1915년 처음으로 Flammenwerfer|플라멘베르퍼de(화염방사기)를 사용했다. 초기에는 기술적 한계가 있었으나, 1917년 말 휴대성과 신뢰성이 향상되면서 300회 이상 전투에 사용되었고, 특히 독일 돌격대(Stoßtruppende)의 주요 무기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서부 전선에서 미군이 사용한 펌프 액션 산탄총은 근접 전투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독일은 1918년 산탄총 사용에 대해 공식 항의하며 포로 처형 위협까지 했으나, 실제 실행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군은 배럴이 짧고 방열판과 총검 부착 돌기가 있는 "참호총" 모델을 지급했다. 안작과 일부 영국군도 비공식적으로 절단형 산탄총을 참호 습격에 사용했다.
기관총은 참호전에서 가장 치명적인 무기 중 하나였다. 독일군은 일찍부터 기관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운용했다. 1914년 독일 보병 대대는 6정의 기관총을 보유했지만, 영국군은 2정에 불과했다.[31] 미군 보병 부대에 기관총이 보급된 것은 1917년 이후였다.[32] 영국 고위 지휘부, 특히 더글러스 헤이그 원수는 기관총을 "과대평가된 무기"로 여기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는 독일군에 비해 기관총 채택이 늦어지는 결과를 낳았다.[33] 이러한 판단 착오는 솜므 전투 첫날 영국군이 6만 명의 사상자를 내는 참사로 이어졌는데, 대다수가 독일군의 기관총 사격에 희생되었다.[34] 이후 영국은 기관총 부대를 창설하고 빅커스 기관총과 루이스 경기관총 보급을 늘려 화력을 강화했다. 기관총은 철조망 뒤에 배치되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간접 사격과 같은 새로운 전술도 개발되었다. 그러나 중기관총은 운용에 많은 인원이 필요하고 이동이 어려워 공세 작전에는 한계가 있었다.[35]
참호 내 근접전을 위해 기관단총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무기가 등장했다. 독일군은 1918년 참호 전투 전문 부대인 돌격대의 주요 무기로 MP 18을 배치했다. 이탈리아 역시 베레타 M1918을 개발하여 사용했다.
포병은 참호전의 전장을 지배했다. 포병은 적 참호에 대한 직접적인 포격 외에도 보병 진격을 지원하는 탄막 사격, 적 포병을 무력화하는 대포병 사격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야포는 주로 파편탄을 발사하거나 철조망을 제거하는 데 사용되었고, 곡사포는 포탄을 높은 각도로 발사하여 참호나 벙커를 파괴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독일군의 420mm 구경 곡사포는 1톤짜리 포탄을 10km 이상 날려 보낼 수 있었다. 유압식 반동 장치의 도입으로 포의 발사 속도가 크게 향상되었고, 전쟁 후반에는 사전 측량 없이도 정확한 포격이 가능해져 기습 효과를 높였다. 그러나 모든 군대는 포탄 소모량을 과소평가하여 전쟁 초기에 심각한 포탄 부족을 겪었다.
박격포는 비교적 짧은 거리에 포탄을 높은 각도로 발사하여 참호 안의 적을 직접 공격하거나 철조망, 벙커 등을 파괴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특히 영국의 스토크스 박격포는 가볍고 발사 속도가 빨라 현대 박격포의 시초가 되었다. 독일군은 수류탄을 발사하는 Granatenwerfer|그라나텐베르퍼de 16부터 중(重)박격포인 Minenwerfer|미넨베르퍼de, 약 90.72kg의 폭약을 약 914.40m까지 날리는 Ladungswerfer|라둥스베르퍼de까지 다양한 박격포를 운용했다. 박격포는 포병과 달리 참호 안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운용할 수 있고, 참호 속 표적을 직접 타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36]
독가스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대규모로 사용된 또 다른 무기였다. 초기에는 최루탄이나 염소 가스처럼 효과가 제한적이거나 탐지가 쉬운 가스가 사용되었으나, 점차 포스겐과 같이 더 치명적이고 탐지가 어려운 가스가 등장했다. 1917년 독일군이 도입한 겨자 가스는 치사율은 상대적으로 낮았지만, 피부에 닿기만 해도 심각한 화상을 입히고 실명까지 유발했으며, 전장에 오래 남아 지속적인 피해를 주었다. 초기에는 바람을 이용해 가스를 살포했지만,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나중에는 포탄에 담아 발사하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다. 가스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각국은 방독면을 개발하여 보급했고, 전쟁 말기에는 가스 공격의 효과가 상당히 감소했다.
전차는 철조망과 기관총 진지를 돌파하여 참호전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개발되었다. 초기 모델은 1916년 솜므 전투에 투입되었으나 기계적 결함과 운용 미숙으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1917년 캉브레 제1차 전투에서 개선된 전차가 대량으로 투입되어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독일군 역시 대전차포와 대전차 참호 등으로 대응했다. 1918년에는 성능이 향상된 전차들이 연합군의 공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기여했고, 참호전의 종식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72] 전차의 등장은 이후 전격전과 같은 새로운 군사 전술의 발전을 이끌었다.[73]
5. 참호전의 생활과 위험 요소
참호 사이의 공간은 "무인지대"라 불렸으며, 그 폭은 전장에 따라 다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서부 전선에서는 일반적으로 90m에서 275m 정도였으나, 비미 능선처럼 25m에 불과한 곳도 있었고, 갈리폴리 전장처럼 15m 거리에서 서로 수류탄을 던지는 극단적인 경우도 존재했다. 서부 전선에서는 양측이 측면으로 참호를 계속 파 나가면서 스위스 국경에서 영국 해협까지 광대한 참호망이 형성되었다.
참호에 있는 보병에게 가장 큰 위협 중 하나는 적의 돌격보다도 포탄이나 수류탄 파편이었다. 이러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참호를 지그재그 형태로 파거나, 던져진 수류탄을 처리하기 위한 구멍(수류탄 구덩이)을 만들기도 했다. 참호 벽면은 포격 진동에 무너지지 않도록 보강되었는데, 독일군은 철근, 콘크리트 등으로 깊고 튼튼하게 구축한 반면, 연합국 측은 목재로만 얕게 보강하여 흙이 드러나고 진흙투성이인 경우가 많았다. 지하수에 대비해 바닥에 배수로를 파고 통로에 발판을 깔기도 했지만, 비가 오면 참호에 물이 고여 진흙탕이 되는 일이 잦았다. 이러한 열악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은 각종 전염병과 참호족 같은 질병의 원인이 되었으며, 쥐와 같은 해충 문제도 심각했다.
5. 1. 생활





전선 참호에서 개별 부대가 머무는 시간은 보통 짧았다. 교대되기 전까지 하루에서 길게는 2주 정도 머물렀다. 오스트레일리아 제31대대는 한때 빌레르브르토뇌에서 53일 동안 전선에 머물렀지만, 이는 매우 드문 예외였다. 캐나다 육군 제10대대는 1915년과 1916년에 평균 6일 동안 전선 투입 임무를 수행했다.[38]
그러나 포르투갈 원정군은 예외적으로 오랫동안 전선 참호를 지켰다. 포르투갈 본국에서의 병력 부족으로 전선 부대를 교체하기 어려웠고, 소모된 인력을 대체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병사들은 휴가를 받지 못했고, 일부 부대는 최대 6개월 동안 거의 휴가 없이 전선에서 복무해야 했다.[39]
개인적인 수준에서 보면, 전형적인 영국 병사의 1년은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었다.
- 전선: 15%
- 후방 지원선: 10%
- 예비선: 30%
- 휴식: 20%
- 기타(병원, 이동, 휴가, 훈련 과정 등): 25%
전선에 있더라도, 전형적인 대대는 1년에 몇 번만 공격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공격, 방어, 또는 기습 공격 참여가 전부였다. 전투 빈도는 "정예" 전투 사단, 예를 들어 연합군 측의 영국 정규 사단, 캐나다 군단, 프랑스 제20군단, ANZAC 등에게는 더 높았다.
전선의 일부 지역은 전쟁 내내 거의 활동이 없어 참호 생활이 비교적 수월하기도 했다. 1916년 4월 제1 ANZAC 군단이 프랑스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들은 "적응"을 위해 아르망티에르 남쪽의 비교적 평화로운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반대로, 이프르와 같이 끊임없이 격렬한 활동이 벌어지는 지역도 있었다. 특히 노출되고 험난한 돌출부에 있던 영국군에게 이프르는 항상 위험한 곳이었다. 그러나 조용한 지역조차도 저격수의 사격, 포격, 질병 및 독가스로 인해 매일 사상자가 발생했다. 솜므 공세가 시작되기 전인 1916년 상반기, 영국군은 서부 전선 자국 지역에서 중요한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107,776명의 사상자를 냈다.
낮에는 기구에 있는 저격수와 포병 관측병 때문에 이동이 위험했기 때문에 참호는 대부분 조용했다. 병사들은 낮 시간 동안 참호 잡지를 읽거나 만들고, 편지를 쓰거나 카드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낮 활동의 위험성 때문에 참호는 밤에 가장 분주했다. 어둠 속에서 병력과 보급품 이동, 철조망과 참호 시스템의 유지 보수 및 확장, 적 방어 정찰이 이루어졌다. 무인지대에 있는 감시 초소의 보초는 적 순찰이나 작업반, 또는 공격 준비 징후를 감시했다.
참호 급습은 1915년 2월 캐나다 왕립 경보병 제1대대가 처음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40] 포로와 문서 같은 "전리품"을 확보하여 적 부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수행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급습은 영국군의 일반적인 정책이 되었고, 군대의 투지를 유지하고 무인지대를 장악하며, 적에게 증원을 강요하여 포격에 노출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40] 그러나 이러한 급습은 적의 포격 반격을 유발하여 큰 대가를 치렀으며,[40] 전후 영국 분석에 따르면 그 이점이 비용에 비해 크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초기에는 기습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점차 경계가 강화되어 기습 성공이 어려워졌다. 1916년경에는 급습이 보병과 포병 간의 긴밀한 협력을 필요로 하는 신중하게 계획된 합동 작전이 되었다. 급습은 보통 참호 수비대를 몰아내거나 사살하고 철조망을 절단하기 위한 고강도 포격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포격은 급습 부대가 철수하는 동안 적의 반격을 막기 위해 특정 지역 주위에 "상자 포격"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포격은 적에게 공격 위치를 미리 알리는 역효과도 가져왔다.
참호 안에는 수백만 마리의 쥐가 들끓었으며, 이들은 종종 질병을 퍼뜨리는 원인이 되었다. 병사들은 총검 등으로 쥐를 잡으려 했지만, 쥐의 번식 속도가 훨씬 빨랐다.[55] 그럼에도 병사들은 오락 삼아 쥐 사냥을 하기도 했다. 쥐들은 병사들이 남긴 음식 찌꺼기나 시체를 먹고 살았다. 많은 병사들은 참호에서 마주치는 다른 어떤 공포보다도 쥐를 더 두려워했다.[56]
5. 2. 위험 요소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모든 군인 중 약 10~15%가 사망하였다.[42] 참호 생활은 극도로 위험했으며, 병사들은 다양한 위협에 끊임없이 노출되었다.
참호에서 주요 사망 원인은 포격과 총격이었지만, 질병과 감염 또한 만연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의료 기술은 과거보다 발전했지만 항생제가 없었기 때문에, 참호에서 발생한 감염은 치료되지 않고 악화되어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참호전에서 가장 큰 사망 원인은 포격으로, 알려진 사상자의 약 75%를 차지했다.[41] 포탄에 직접 맞지 않더라도, 폭발 시 발생하는 파편과 잔해는 주변 병사들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 전쟁 중 포병의 중요성은 크게 증가하여, 프랑스군의 경우 포병이 차지하는 비율이 1914년 20%에서 1918년 38%로 늘어났다.[41] 두 번째 주요 사망 원인은 총격(소총과 기관총)으로, 프랑스군 사상자의 34%를 차지했다.[42]
전쟁이 참호전 양상으로 굳어지면서 파편으로 인한 치명적인 머리 부상이 급증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1915년 여름부터 강철 헬멧을 도입하여 기존의 케피 모자를 대체했고, 이는 벨기에, 이탈리아 등 다른 군대에도 채택되었다. 영국군 역시 자체적으로 브로디 헬멧을 개발하여 사용했다. 이 헬멧은 넓은 챙으로 낙하물로부터 보호했지만 목 부분 보호는 미흡했다. 미국은 전쟁 참전 시 브로디 헬멧을 주로 사용했으나 일부 부대는 프랑스 아드리앙 헬멧을 쓰기도 했다.
참호의 비위생적인 환경은 각종 질병의 온상이 되었다.
- 참호열: 참호에 들끓던 이의 배설물을 통해 전파되는 흔한 질병이었다. 두통, 정강이 통증, 비장 비대, 발진, 재발열 등을 유발하며 수개월간 병사를 무력화시켰다.[43] 1915년 처음 보고된 이후 환자가 급증하여[44], 전쟁 중 100만 명 이상의 연합군 병사가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45]
- 가스괴저: 특히 전쟁 초기에 큰 상처에서 흔히 발생했다. 원인균인 ''클로스트리디움''은 퇴비로 비옥해진 농경지 토양(프랑스, 벨기에 등)에 널리 분포하여[46], 흙이 상처에 들어가 감염을 일으켰다. 1914년 부상당한 영국군의 12%가 감염되었고, 독일군 10만 명 이상이 이로 인해 사망했다.[47] 의료 기술 발전으로 1918년에는 발생률이 1%로 감소했다.[48]
- 장내 기생충: 제대로 된 하수 처리 시설이 없는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회충, 편충, 촌충 등이 병사들 사이에 흔하게 퍼졌다. 오염된 배급품이나 식수를 통해 감염되었다.[49]
- 참호족괴저: 추운 겨울철에 특히 많이 발생한 환경 질환으로, 발이 차고 축축한 환경에 장시간 노출되어 발생했다. 발의 마비와 통증을 동반하며 심한 경우 조직 괴사로 이어져 절단해야 할 수도 있었다. 영국군 7만 5천 명, 미군 2천 명이 이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50] 동료 병사에 의한 정기적인 발 검사, 비누 사용, 양말 교체 등 체계적인 관리를 통해 발생률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51] 1918년 미 육군은 방수 기능이 개선된 '참호화'를 지급하기도 했다.
- 티푸스: 서부 전선에서는 드물었지만[52], 동부 전선에서는 크게 유행하여 세르비아에서 15만~20만 명이 사망했다.[53] 러시아에서도 전쟁 말기에 대규모 유행이 발생하여 약 250만 명이 사망했다(붉은 군대 10만 명 포함).[54] 티푸스는 이를 통해 전파되며, 고열( 39°C ), 두통, 기침, 근육통, 발진 등의 증상을 보이고 치사율은 10~60%에 달했다.
참호에는 수백만 마리의 쥐가 들끓으며 질병을 옮기고 식량을 축내는 골칫거리였다. 병사들은 쥐를 잡는 것을 오락 삼기도 했지만, 쥐의 번식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55] 쥐는 먹다 남은 음식뿐 아니라 시체까지 먹어치웠으며, 많은 병사들은 다른 어떤 공포보다 쥐를 더 두려워했다.[56]
끊임없는 포격과 밀폐된 참호 환경은 병사들에게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었다. 신경쇠약과 정신 붕괴("쇼크", "전쟁 신경증", "전투 최면")가 흔하게 발생했다.[57][58] 쇼크 상태에 빠진 병사들은 움직이지 못하고 참호 속에 웅크린 채 기본적인 방어 반응조차 보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참호는 포격과 총격으로부터 몸을 숨길 피난처였지만, 동시에 포격이 쏟아질 때 벗어날 수 없는 폐쇄된 공간이라는 점이 심리적 충격을 증폭시켰다.[59] 심각한 쇼크 증상을 보이는 병사들은 후방으로 후송되어 입원 조치되었지만[60], 일부 지휘관들은 이들을 단순히 "겁쟁이"로 간주하여 책임을 묻는다는 명목으로 처형하기도 했다.[61] 처형은 종종 같은 부대 동료들로 구성된 총살대에 의해 집행되었다.[62] 당시에는 이들이 극심한 정신적 충격(쇼크)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전쟁 중 영국군에서만 306명의 병사가 이러한 이유로 자국군에 의해 공식적으로 처형되었다.[63]
포탄이나 수류탄 파편 역시 보병에게 큰 위협이었다.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참호를 지그재그 형태로 파거나, 던져진 수류탄을 처리하기 위한 구멍(수류탄 구덩이)을 만들기도 했다. 강우 시 참호에 물이 고이는 문제도 심각했다. 병사들은 오염된 물이 고인 진흙탕 속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이는 참호족괴저와 같은 질병의 원인이 되었다. 한 영국 병사는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진흙, 진흙, 진흙…. 나는 매일 진흙 참호 속에 있습니다…. 참호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최악의 적은 비입니다. 수일, 수주 동안 젖은 진흙 위에 웅크리고 앉아 적의 포탄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을 것입니다. 두꺼운 부츠를 신고 있지만, 차가운 진흙 때문에 발은 얼음 덩어리 같습니다. 몇 개의 발가락은 움직이지 않습니다….[113]
이처럼 참호는 적의 공격뿐 아니라 열악한 환경과 질병, 정신적 고통 등 다양한 위험 요소가 도사리는 죽음의 공간이었다.
6. 참호전의 종식과 영향
참호전은 전쟁의 무의미함을 보여주는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99] 참호의 측벽(파라페트)을 넘어 적 참호선을 공격하기 위해 "정상을 넘어"(over the top) 돌격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거의 확실한 죽음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포화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는 솜므 전투 첫날(영국군이 거의 6만 명의 사상자를 낸 날)이나 파스샹다르 전투의 진흙탕 속에서의 끔찍한 학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미지이다. 프랑스인들에게는 베르됭 전투에서 38만 명이 넘는 전투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 그에 해당하는 사례이다.[100]
참호전은 끔찍한 상황 속에서의 대량 학살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많은 비평가들은 능력 부족하고 편협한 사령관들이 참호전이라는 새로운 전쟁 양상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수많은 용감한 병사들이 무의미하게 희생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부 후진적인 장군들은 낡은 공격 제일주의에 사로잡혀, 우월한 사기와 기세만으로 방어측의 강력한 화력과 참호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영국 여론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빗대어 자국 병사들을 "당나귀가 이끄는 사자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 총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헤이그 경은 파스샹다르 전투와 같이 승산 없는 공격을 무모하게 반복하며 엄청난 인명 손실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소모전 외에 다른 뚜렷한 목표를 상실한 후에도 전투를 계속하도록 허용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한다. 물론 헤이그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독일군의 전력을 소진시키기 위해 소모전이 불가피했다고 반박하기도 한다.[101]
참호전의 문제점은 당시에도 인식되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야포 운용 방식의 개선, 새로운 보병 전술 개발, 그리고 전차와 같은 신무기 개발 등이 포함된다. 1918년에 이르러 독일군의 사기가 저하되자 연합군의 공격은 이전보다 성공적인 경우가 많아졌고 사상자 수도 줄어들었다. 특히 100일 공세에서는 교착 상태를 벗어나 다시 기동전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참호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양측이 비슷한 수준의 장비, 능력, 그리고 지형 조건을 갖춘 상황이라면 현대전에서도 여전히 참호는 유효한 방어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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