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 모르티에
1. 개요
에두아르 모르티에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의 군인이자 제국 원수였다. 1789년 국민 방위대에 입대하여 혁명 전쟁에 참여했고, 제2차 취리히 전투 등에서 활약하며 사단장으로 진급했다. 1803년 하노버 침공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제국 원수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제국 근위대 보병 사령관, 제8군단 사령관 등을 역임하며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나폴레옹 몰락 후 부르봉 왕정에 합류했으나, 백일천하 당시 나폴레옹에게 복귀했다. 7월 혁명 이후 루이 필리프 왕을 지지했으며, 프랑스 총리 겸 육군 대신을 지냈다. 1835년 7월, 국왕을 수행하던 중 암살 시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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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위 | 트레비소 공작(가칭) |
|---|---|
| 존칭 | 원수 |
| 이름 | 에두아르 모르티에 |
| 전체 이름 | Édouard Adolphe Casimir Joseph Mortier프랑스어 |
| 출생일 | 1768년 2월 13일 |
| 출생지 | 르카토캉브레지, 프랑스 왕국 |
| 사망일 | 1835년 7월 28일 |
| 사망지 | 파리, 7월 왕정 |
| 안장 장소 | 페르 라셰즈 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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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속 | 프랑스 육군 |
|---|---|
| 복무 기간 | 1791년–1835년 |
| 참전 |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
| 지휘 | 제8군단 (대육군) 제5군단 (대육군) |
| 계급 | 사단장 |
| 직책 | 프랑스 총리 |
|---|---|
| 임기 시작 | 1834년 11월 18일 |
| 임기 종료 | 1835년 3월 12일 |
| 군주 | 루이 필리프 1세 |
| 이전 | 위그베르나르 마레 |
| 이후 | 빅토르 드 브로이 |
| 직책 | 전쟁부 장관 |
| 임기 시작 | 1834년 11월 18일 |
| 임기 종료 | 1835년 3월 12일 |
| 이전 | 시몽 베르나르 |
| 이후 | 앙리 드 리니 |
| 훈장 | 레지옹 도뇌르 그랑 코르동 군사 예수 그리스도 대십자 훈장(가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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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주재 프랑스 대사 -
에드몽샤를 주네
에드몽샤를 주네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얻으려다 미국의 중립을 위협하는 행동으로 미국 정부와 갈등을 겪고 미국으로 귀화한 프랑스 외교관이다. -
프랑스의 암살된 정치인 -
장 조레스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치인이자 역사가, 철학자인 장 조레스는 사회주의로 전향하여 프랑스 사회당의 지도자가 되었고, 드레퓌스 사건 옹호, 반전 운동을 펼치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암살당했다. -
프랑스의 암살된 정치인 -
프랑수아 다를랑
프랑수아 다를랑은 프랑스 해군 제독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비시 프랑스 정부에서 요직을 맡아 친독 협력 정책을 펼치다 1942년 알제에서 암살당했다. -
프랑스 제1제국의 원수 -
니콜라 우디노
니콜라 샤를 우디노는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한 프랑스 제국의 원수이자 정치인으로, 마세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딴 척탄병 사단을 이끌었으며, 여러 훈장과 작위를 받았고 부르봉 왕정 하에서도 군복무를 이어가다 파리 앵발리드의 총독으로 생을 마감했다. -
프랑스 제1제국의 원수 -
칼 14세 요한
칼 14세 요한은 프랑스 출신 군인으로 스웨덴 왕세자가 되어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즉위하여 동군 연합을 이루고 중립 외교와 근대화를 추진하며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
2. 초기 생애
모르티에는 1768년 2월 13일 프랑스 북부 르 카토(현재 르 카토-캉브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드레이퍼(포목상)였던 샤를 모르티에(1730–1808)와 그의 아내 마리 안 조제프 본네르(1735년 출생)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도에의 아일랜드 칼리지에서 공부한 후,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자 덩케르크의 국민 방위대에 입대했으며, 1791년 9월에는 자원 부대의 대장으로 선출되었다.
3. 프랑스 혁명 전쟁
1792년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모르티에는 북부군에 배속되었다. 그는 저지대 전역에서 복무하며 제마프 전투, 나뮈르 포위전, 네르윈덴 전투, 플뢰뤼스 전투에서 싸웠다. 이후 삼브르-뫼즈 군의 라인 강 방면으로 전출되어 마스트리흐트 점령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모르티에는 자크 모리스 아트리 장군으로부터 마인츠 요새의 항복 협상을 위임받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발발한 1799년, 모르티에는 준장으로 진급하여 술트 장군 휘하에서 제2차 취리히 전투에 참전, 디에티콘에서 취리히로 공격하는 8,000명의 병력을 이끌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사단장으로 진급했고, 1800년 초 파리로 소환되었다.
4. 나폴레옹 전쟁
1803년, 모르티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하노버 선제후국 침공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성공적인 하노버 점령은 아르텐부르크 협약을 이끌었고, 나폴레옹은 1804년 모르티에를 제국 원수로 임명했다. 1805년, 모르티에는 제국 근위대의 보병 사령관이 되었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 모르티에는 울름 전역에서 그랑 다르메의 군단을 지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도나우 중부 전역에서 나폴레옹은 그를 새롭게 창설된 제8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모르티에는 도나우강 북쪽 해안에서 행군 대열을 지나치게 늘렸고, 미하일 쿠투조프가 이끄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은 모르티에가 테오도르 막심 가잔의 제2사단을 함정에 빠지게 했다. 뒤렌슈타인 전투 (1805년 11월 11일)에서 프랑스군은 피에르 뒤퐁 드 로에탕의 제1사단 지휘 하에 있는 두 번째 사단의 도움으로 구출되었지만,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아우스터리츠 이후, 모르티에는 제5군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1806년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모르티에에게 제8군단 지휘를 맡겼다. 모르티에는 헤세 선제후국을 정복하고 카셀을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1807년, 그는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대의 좌익을 이끌었고, 슈트랄준트와 콜베르크 포위전에 참전했다. 1808년, 나폴레옹은 모르티에에게 트레비소 공작 작위를 수여했다.
1808년 모르티에는 스페인 원정에 파견되어 마드리드 재탈환, 사라고사 2차 포위전을 이끌었다. 그는 아르조비스포 전투, 오카냐 전투에서 활약했고, 스페인 남부에서 복무하며 바다호스 포위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모르티에는 청년 근위대를 지휘했다. 보로디노 전투 후, 그는 프랑스 점령 하의 모스크바 총독이 되었고, 후퇴 시 도시 파괴 명령을 받았다. 크라스노이 전투, 베레지나 전투에서 싸웠고, 1813년 1월 살아남은 제국 근위대를 재편성했다. 모르티에는 1813년 독일 전역의 뤼첸, 바우첸, 드레스덴 전투,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청년 근위대를 지휘했다. 1814년 프랑스 방어전에서 몽미라이 전투, 크론 전투, 라옹 전투, 파리 전투 등에서 구 근위대를 이끌며 후위 부대 및 엄호 부대를 지휘했다.
5. 부르봉 왕정복고와 7월 왕정
모르티에는 마지못해 미셸 네 원수를 재판하는 군사 법정의 일원이 되는 것을 수락했다. 법원이 스스로 무능하다고 선언한 후 한동안 불명예스러운 처지에 놓였지만, 1816년 1월에 지휘권을 받았고, 1819년에는 귀족원에 복귀했다. 1825년에는 왕국의 최고 훈장인 성령 기사단을 받았다. 1830년 7월 혁명을 지지하여 루이 필리프 왕의 즉위에 기여했다. 1830년부터 1831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프랑스 대사를 지냈고, 1834년부터 1834년까지는 육군 장관이자 국무총리를 지냈다.
6. 암살
1835년 7월 28일, 모르티에는 루이 필리프 국왕을 수행하여 7월 혁명을 기념하는 파리 국민 방위군 사열에 참석했다. 왕실 일행은 탕플 대로에서 한 건물 위층 창문에서 발사된 일제 사격에 맞았다. 모르티에를 포함해 18명이 사망하고 22명이 부상당했다. 국왕은 경미한 부상만 입었다.
사용된 무기는 국왕 암살을 목적으로 주세페 마르코 피에스키가 제작하고 발사한 일제 발사총이었다. 피에스키는 25개의 머스킷 총신을 나무틀에 고정하고 동시에 발사할 수 있도록 배열했다. 발사 시 총신 4개가 파열되었고 피에스키는 심하게 부상을 입었다. 그는 즉시 체포되었고 나중에 두 공모자와 함께 재판을 받았다. 1836년 2월, 3명은 단두대로 처형되었다.
7. 가족
모르티에는 에브 안 엠메스(코블렌츠, 1779년 8월 19일 ~ 파리, 1855년 2월 13일)와 결혼하여 여섯 자녀를 두었다.
| 이름 | 출생-사망 |
|---|---|
| 트레비즈의 카롤린 모르티에 | 1800년 ~ 1842년 |
| 소피 말비나 조제핀 모르티에 드 트레비즈 | 1803년 출생 |
| 나폴레옹 모르티에 드 트레비즈 | 1804년 ~ 1869년 |
| 에두아르 | 1806년 ~ 1815년 |
| 루이즈 | 1811년 ~ 1831년 |
| 에브-스테파니 모르티에 드 트레비즈 | 1814년 ~ 1831년 |
* 트레비즈의 카롤린 모르티에(1800년 ~ 1842년): 루미니의 마리-이폴리트 드 게이, 제2대 후작과 결혼하였다.
마리-루이즈 드 게이 드 루미니(1809년 ~ 1886년) x 루도빅-마리, 위르셀 백작
* 위르셀 백작 이폴리트 (1850년 ~ 193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