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틀란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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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틀란트 전투는 1807년 6월 14일, 프랑스 제1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했으며, 이 전투의 결과로 러시아는 틸지트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와 협력하게 되었다. 틸지트 조약으로 프로이센은 영토를 잃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폴란드는 바르샤바 공국으로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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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틀란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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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전투 정보 | |
전투 이름 | 프리틀란트 전투 |
관련 전쟁 | 제4차 대프랑스 동맹 |
![]() | |
시기 | 1807년 6월 14일 |
장소 | 프로이센 왕국 프리틀란트 (프라브딘스크) |
결과 | 프랑스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제1제국 + 작센 왕국 |
교전국 2 | 러시아 제국 |
지휘관 | |
프랑스 제1제국 | 나폴레옹 1세, 장 란,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 미셸 네, 클로드 빅토르페랭, 에두아르 모르티에, 니콜라 우디노, 에마뉘엘 드 그루시, 알렉상드르앙투안 위로 드 세나르몽,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
러시아 제국 | 레온티 레온티예비치 베니히센, 표트르 바그라티온,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고르차코프, 마트베이 플라토프 |
병력 규모 | |
프랑스 제1제국 | 80,000명 (65,000명 교전), 대포 118문 |
러시아 제국 | 46,000–60,000명, 대포 120문 |
피해 규모 | |
프랑스 제1제국 | 8,000–10,000명 |
러시아 제국 | 20,000–40,000명 (사망, 부상, 포로), 대포 80문 |
추가 정보 | |
영향 | 틸지트 조약 체결 러시아 내 반프랑스 감정 감소 러시아의 대륙 봉쇄 참여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종결 |
2. 배경
1805년, 유럽은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 휘말렸다. 같은 해 12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한 후, 1806년 프로이센은 자국의 중앙 유럽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전쟁에 돌입했다.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동프로이센으로 도망쳤다. 러시아군이 프로이센을 구원하러 와, 1807년 2월 7일-2월 8일, 프랑스군과 아이라우 전투를 벌였으나 양군 모두 큰 손실을 입고 결판이 나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일단 후퇴하여, 르페브르를 지휘관으로 삼아 3월 18일부터 단치히 포위전을 시작, 5월 27일에 프로이센군 수비대가 항복했다. 그 사이에 러시아군은 프로이센의 임시 수도가 된 쾨니히스베르크를 거점으로 재편성을 마쳤다.
6월에 러시아군은 활동을 재개하여, 6월 10일 하일스베르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전술적 승리를 거두고, 동프로이센을 남북으로 흐르는 알레 강(Łynapl, Alle프랑스어) 동쪽으로 후퇴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을 추격하는 대신, 그 출격 거점을 공격할 것을 꾀하여 쾨니히스베르크로 군대를 향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군은, 프랑스군 중 가장 동쪽으로 진격하고 있던 장 란 군단을 포착, 격멸하기 위해 쾨니히스베르크 남동쪽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프리틀란트에서 다시 알레 강을 건넜다.
2. 1. 제3차 대프랑스 동맹과 프로이센의 패배
1805년, 유럽은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 휘말렸다. 같은 해 12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한 후, 프로이센은 중앙 유럽의 주도국 지위를 되찾기 위해 1806년에 전쟁을 시작했다.[15]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후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의 긴장이 점차 고조되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이 영국 경제 봉쇄에 참여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는 독일 상인 계급에 악영향을 미쳤다. 1806년 8월, 나폴레옹은 반나폴레옹 서적을 판매하던 요한 필리프 팔름을 체포하기 위해 급습을 명령했고, 영국에 하노버를 제공하여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나, 이는 프로이센을 격분시켰다.[15]
프로이센은 1806년 8월 9일 동원령을 시작했고, 8월 26일 최후통첩을 발했다. 최후통첩은 프랑스군이 10월 8일까지 라인강 서쪽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16]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이 도착하기 전에 프로이센군을 격파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려 했다.[1] 1806년 10월 2일, 18만 명의 프랑스군은 어떤 방향에서든 위협에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된 바타이용-카레(사각 대형) 시스템으로 배치되어 프랑코니아 숲을 건너기 시작했다.[17] 10월 14일 프랑스군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추격전이 이어졌고, 캠페인이 끝날 무렵 프로이센은 25,000명의 전사자와 부상자, 14만 명의 포로, 2,000문 이상의 대포를 잃었다.[18]
몇몇 프로이센 부대는 오데르강을 건너 폴란드 땅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프로이센은 군대의 대부분을 잃었다. 이제 러시아는 프랑스와 단독으로 맞서야 했다. 11월 18일, 루이 니콜라 다부 휘하의 프랑스군은 에일라우에서 바르샤바를 향해 진군했고, 사기는 높았다. 피에르 프랑수아 샤를 오제루, 카스틸리오네 공작의 병력은 브롬베르크에 근접했고, 제롬 보나파르트의 군대는 칼리슈 근처에 도착했다.[19]
2. 2. 러시아의 참전과 아이라우 전투
프랑스군이 폴란드에 도착했을 때, 지역 주민들은 그들을 해방자로 환영했다.[20] 러시아 장군 베니히센은 프랑스군이 북스호브덴의 군대와 자신을 차단할까 우려하여 바르샤바를 포기하고 비스툴라 강 우안으로 퇴각했다. 1806년 11월 28일 뮈라 휘하의 프랑스군이 바르샤바에 입성했다. 프랑스군은 도주하는 러시아군을 추격했고, 12월 26일 푸워투스크 부근에서 상당한 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다. 결과는 불확실했지만, 베니히센은 차르에게 6만 명의 프랑스군을 격파했다고 보고했고, 그 결과 폴란드 주둔 러시아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 시점에서 네 원수는 식량 보급을 위해 병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베니히센은 고립된 프랑스 군단을 공격할 좋은 기회를 포착했지만, 나폴레옹의 기동이 그의 군대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임을 깨닫고 계획을 포기했다.[21] 러시아군은 알렌슈타인(2월 3일 알렌슈타인 전투)을 거쳐 아이라우로 물러났다.1807년 2월 7일, 러시아군은 아이라우를 차지하기 위해 술트의 군단과 교전했다. 2월 8일 새벽, 44,500명의 프랑스군이 67,000명의 러시아군에 맞서 싸웠지만,[1] 증원을 받은 후 프랑스군은 75,000명, 러시아군은 76,000명이었다.[22][23] 나폴레옹은 네와 다부의 군대가 러시아군을 포위할 수 있도록 베니히센의 군대를 충분히 오랫동안 묶어두기를 희망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전장에는 눈보라가 몰아쳐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프랑스군은 심각한 상황에 처했지만, 80개 기병대로 구성된 10,700명의 기병 돌격[24]이 중앙에 가해지던 압박을 완화시켰다. 다부의 도착은 러시아 좌익에 대한 공격이 시작될 수 있음을 의미했지만, 레스토크 휘하의 프로이센군이 갑자기 전장에 나타나 러시아군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군을 격퇴하면서 공격은 무력화되었다. 네는 의미 있는 결정을 내리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고, 베니히센은 퇴각했다. 이 격렬했던 아이라우 전투에서 양측 사상자는 모두 25,000명 정도였다.[25]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은 계속될 것이었다.
2. 3. 하일스베르크 전투와 러시아군의 전략
예라우 전투 이후 몇 달 동안 회복 기간을 거친 나폴레옹은 다시 한번 그랑 다르메에게 이동 명령을 내렸다. 러시아군이 알레 강가에 있는 하일스베르크 마을의 작전 기지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의 후위 부대라고 생각했던 부대를 몰아내기 위해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프랑스군은 5만 명 이상의 병력과 150문의 포를 갖춘 러시아군 전체와 맞닥뜨렸다.[26] 프랑스군의 거듭된 맹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나폴레옹이 시도하려던 강 도하를 정확히 막도록 설계된 정교한 토루 안에서 전투를 벌이며 굳건히 버텼다.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1만 명으로 치솟았고, 러시아군은 약 6,000명의 손실을 입었다.[26] 러시아군은 결국 하일스베르크에서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철수했고, 나폴레옹은 다시 한번 그들을 추격했다. 프랑스군은 추가 보급품을 확보하기 위해 쾨니히스베르크 방향으로 향했다.6월 13일, 란 원수의 선봉대는 프리틀란트 마을에서 많은 수의 러시아군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양측은 별다른 성과 없이 그날 나머지 시간 동안 서로 교전했다. 결정적으로 베니그센은 다음 날 알레 강을 건너 란 부대의 고립된 부대를 파괴하고 프랑스 주력군과 마주치지 않고 강을 다시 건너 철수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믿었다.
3. 전투 과정
표트르 바그라티온 공이 지휘하는 러시아군은 알레 강 서안으로 건너가 6월 14일 새벽에 프랑스의 장 란 원수를 공격했고, 2:1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란 원수는 9시간을 버텼다. 오후 5시경 나폴레옹이 6만 5000명을 이끌고 러시아군을 공격했고, 저녁 7시경에는 러시아군을 프리틀란트 마을로 몰아넣었다. 마을에 밀집된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대포 세례로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1만 9000명에 달하는 러시아군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프랑스군이 끊어놓은 다리를 건너다 강에 빠져 익사하기도 했다.[28]
6월 13일 심야, 러시아군은 알레강 서안의 프리틀란트 시가지를 점령하고, 그곳으로 진출해 있던 란 군단의 선견 부대를 몰아냈다. 14일 오전 9시 시점에서 러시아군은 45,000명을 알레강 서안에 투입했지만, 전장의 프랑스군은 란 지휘 하의 9,000명과 그루시 지휘 하의 8,000명에 불과했다. 란은 코사크 기병의 침투를 받으면서도 교묘하게 지휘하여 후퇴하며 시간을 벌었다.
당시 러시아군은 두 가지 실책을 범했다. 첫째, 하일스베르크에서 프리틀란트까지 50킬로미터 이상을 단시간에 돌파해 왔기 때문에 14일 오전에는 충분한 전투 태세가 갖춰지지 않았다. 둘째이자 더 치명적인 실책은 알레강에서 주력 부대와 예비 병력이 분단되었으며, 서안의 주력 부대도 프리틀란트 시내를 흐르는 용수로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네 군단과 빅토르 군단이 전장에 도착하면서 프랑스군은 80,000명 가까이 집결하였다. 뮈라 군단과 다부 군단도 다음날 도착할 예정이었기에, 나폴레옹의 막료들은 반격에 반대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의 허점을 간파하고 즉시 공격을 결심했다. 그는 네에게 프리틀란트의 거리를 가리키며 "저것이 골이다. 앞만 보고 전진하라."라고 명령했다.[27]
오후 5시, 용수로 남쪽의 러시아군 좌익을 향해 맹렬한 포격과 함께 네 군단이 공격을 개시했다. 러시아군은 예비 기병을 투입하여 저항했으나, 뒤퐁 사단과 근위 포병대의 지원으로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을 격퇴했다. 오후 8시까지 러시아군 좌익은 붕괴되었고, 네는 용수로 남쪽을 제압했다. 알레강의 교량이 불타면서, 용수로 북쪽에 있던 러시아군 우익은 퇴로를 잃었다.[28]
이 과정에서 란과 모르티에는 러시아군 중앙과 우익을 견제하며 포병으로 큰 피해를 입혔다. 프리틀란트가 불타는 것을 본 두 원수는 보병 공격을 시작했고, 뒤퐁은 제분소를 건너 러시아군 중앙의 좌익을 공격하여 프랑스군이 전선을 밀어붙이는 데 기여했다.
러시아군은 강을 건너 퇴각하면서 많은 병사가 익사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북쪽의 알렌부르크 길을 통해 철수한 우익은 여전히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프랑스 좌익은 추격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약 10,0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러시아군은 최소 20,0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3. 1. 러시아군의 프리틀란트 점령과 초기 교전
골리친 휘하의 러시아군이 프랑스 기병 초소를 격퇴한 후, 1807년 6월 13일 밤 베니히센의 주력 부대가 프리틀란트 마을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프리틀란트로 진군했지만, 여러 경로로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초기 교전은 즉흥적인 전투가 되었다. 란은 나폴레옹이 지원 가능한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도움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가진 기병 부관을 급파하고 베니히센을 제자리에 묶어두기 위한 지연 작전을 펼쳤다. 란은 26,000명 미만의 병력으로 베니히센에게 알레 강을 건너 병력을 점진적으로 투입하게 하여 격파했다.[27]프랑스군은 1807년 6월 14일 초 Sortlack 숲과 Posthenen 앞에서 러시아군과 처음 교전했다. 란은 프랑스군이 강 서쪽에 80,000명의 병력을 집결할 때까지 베니히센을 제자리에 묶어두었다. 양측 모두 기병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전투 대형을 갖추었고, 하인리히스도르프 점령을 위한 경쟁은 그루시와 낭수티 휘하의 프랑스군에게 유리하게 끝났다. 베니히센은 갇혀서 싸워야 했고, 프리틀란트 마을 근처의 병목 지점에 모든 부교를 설치하여 의도치 않게 서쪽 강둑에 병력을 가두었다.

란은 베니히센을 붙잡아두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이 다시 그를 피하려 한다고 우려했지만, 오전 6시까지 베니히센은 강을 건너 프리틀란트 서쪽에 거의 50,000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다. 두 줄로 편성된 그의 보병은 하인리히스도르프-프리틀란트 도로와 포병과 함께 강 상류 굽이 사이로 뻗어 있었다. 보병 우측 너머로 기병과 코사크는 하인리히스도르프 북동쪽 숲까지 전선을 확장했다. 소규모의 코사크 부대는 심지어 슈보나우까지 침투했다. 좌익에도 기병이 있었고, 알레 강 너머에는 포대가 작전에 투입되어 이를 엄호했다. Sortlack 숲에서 러시아 산병과 란의 일부 병력 사이에 격렬하고 결정적이지 않은 총격전이 벌어졌다.
모르티에 군단의 선두가 하인리히스도르프에 나타나 코사크를 슈보나우에서 몰아냈다. 란은 자신의 입장을 지켰고, 정오 무렵 나폴레옹은 40,000명의 프랑스군과 함께 전투 현장에 도착했다.[27]
1807년 6월 13일 심야, 러시아군은 알레강 서안의 프리틀란트 시가지를 점령하고, 그곳으로 진출해 있던 란 군단의 선견 부대를 몰아냈다. 란 군단 주력은 아직 프리틀란트로 가는 도중에 있었다. 급히 그루시의 기병 부대가 프리틀란트 북서쪽 약 3킬로미터에 있는 하인리히스도르프 마을을 확보했고, 6월 14일 새벽, 프리틀란트-하인리히스도르프 간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14일 오전 9시 시점에서 러시아군이 45,000명을 알레강 서안에 투입한 데 반해, 전장의 프랑스군은 란 지휘 하의 9,000명과 그루시 지휘 하의 8,000명에 불과했다. 란은 코사크 기병의 침투를 받으면서도, 교묘한 지휘로 후퇴하며 시간을 벌었다.
이때까지 러시아군은 두 가지 실책을 범하고 있었다. 첫째는 하일스베르크에서 프리틀란트까지 50킬로미터 이상을 단시간에 돌파해 왔기 때문에 1807년 6월 14일 오전에는 충분한 전투 태세가 갖춰지지 않았다는 점, 둘째이자 더 치명적인 실책은 알레강에서 주력 부대와 예비 병력이 분단되었으며, 게다가 서안의 주력 부대도 프리틀란트 시내를 흐르는 용수로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3. 2. 프랑스군의 집결과 나폴레옹의 전략
6월 13일 심야, 러시아군은 알레강 서안의 프리틀란트 시가지를 점령하고, 그곳으로 진출해 있던 란 군단의 선견 부대를 몰아냈다. 란 군단 주력은 아직 프리틀란트로 가는 도중에 있었다. 그루시의 기병 부대가 프리틀란트 북서쪽 약 3킬로미터에 있는 하인리히스도르프 마을을 확보했고, 6월 14일 새벽, 프리틀란트-하인리히스도르프 간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14일 오전 9시, 러시아군은 45,000명을 알레강 서안에 투입했지만, 전장의 프랑스군은 란 휘하의 9,000명과 그루시 휘하의 8,000명에 불과했다. 란은 코사크 기병의 침투를 받으면서도, 교묘하게 지휘하며 후퇴하여 시간을 벌었다.[27]
이때까지 러시아군은 두 가지 실책을 범했다. 첫째는 하일스베르크에서 프리틀란트까지 50킬로미터 이상을 단시간에 돌파해 왔기 때문에 14일 오전에는 충분한 전투 태세가 갖춰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는 알레강에서 주력 부대와 예비 병력이 분단되었고, 서안의 주력 부대도 프리틀란트 시내를 흐르는 용수로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었다는 점인데, 이는 더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정오까지 모르티에의 증원 부대가 코사크 기병을 격퇴했고, 나폴레옹도 전장에 도착했다. 오후 4시까지 네 군단과 빅토르 군단도 전장에 도착하여 프랑스군은 80,000명 가까이 집결했다. 다음 날에는 뮈라 군단과 다부 군단도 전장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나폴레옹의 막료는 14일 중의 반격 개시에 반대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의 치명적인 실책과 그로 인해 생긴 순간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네를 향해 프리틀란트의 거리를 가리키며 "저것이 골이다. 앞만 보고 전진하라."라고 말했다.
오후 5시, 용수로 남쪽의 러시아군 좌익을 공격 목표로 하여, 맹렬한 포격과 함께 네 군단이 전진을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예비 기병을 투입했고, 한때 네 군단이 밀리는 국면도 있었지만, 뒤퐁 사단과 근위 포병대가 증원에 달려와 이를 격퇴했다. 오후 8시까지 러시아군 좌익은 붕괴되었고, 네는 용수로 남쪽을 제압했다. 알레강에 걸린 교량이 불타면서, 용수로 북쪽에 남아 있던 러시아군 우익은 퇴로를 잃었다.
3. 3. 프랑스군의 공격과 러시아군의 붕괴
네 군단과 빅토르 군단이 전장에 도착하면서 프랑스군은 80,000명 가까이 집결하였다. 뮈라 군단과 다부 군단도 다음날 도착할 예정이었기에, 나폴레옹의 막료들은 반격에 반대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의 허점을 간파하고 즉시 공격을 결심했다. 그는 네에게 프리틀란트의 거리를 가리키며 "저것이 골이다. 앞만 보고 전진하라."라고 명령했다.[27]오후 5시, 용수로 남쪽의 러시아군 좌익을 향해 맹렬한 포격과 함께 네 군단이 공격을 개시했다. 러시아군은 예비 기병을 투입하여 저항했으나, 뒤퐁 사단과 근위 포병대의 지원으로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을 격퇴했다. 오후 8시까지 러시아군 좌익은 붕괴되었고, 네는 용수로 남쪽을 제압했다. 알레강의 교량이 불타면서, 용수로 북쪽에 있던 러시아군 우익은 퇴로를 잃었다.[28]
이 과정에서 란과 모르티에는 러시아군 중앙과 우익을 견제하며 포병으로 큰 피해를 입혔다. 프리틀란트가 불타는 것을 본 두 원수는 보병 공격을 시작했고, 뒤퐁은 제분소를 건너 러시아군 중앙의 좌익을 공격하여 프랑스군이 전선을 밀어붙이는 데 기여했다.
러시아군은 강을 건너 퇴각하면서 많은 병사가 익사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북쪽의 알렌부르크 길을 통해 철수한 우익은 여전히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프랑스 좌익은 추격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약 10,0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러시아군은 최소 20,0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3. 4. 러시아군의 패퇴와 피해
표트르 바그라티온 공이 지휘하는 러시아군은 알레 강 서안으로 건너가 6월 14일 새벽에 프랑스의 장 란 원수를 공격했고, 2:1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란 원수는 9시간을 버텼다. 오후 5시경 나폴레옹이 6만 5000명을 이끌고 러시아군을 공격했고, 저녁 7시경에는 러시아군을 프리틀란트 마을로 몰아넣었다. 마을에 밀집된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대포 세례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만 9000명에 달하는 러시아군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프랑스군이 끊어놓은 다리를 건너다 강에 빠져 익사하기도 했다.[28]베니히센 장군의 군대는 완전히 궤멸되었고, 다음 날인 6월 15일 프로이센군을 이끌고 온 안톤 레스토크 장군은 2만 5000명을 이끌고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를 포기하고 틸지트(지금의 러시아 소베츠크)로 퇴각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했다.
6월 13일 심야, 러시아군은 알레강 서안의 프리틀란트 시가지를 점령하고, 그곳으로 진출해 있던 란 군단의 선견 부대를 몰아냈다. 14일 오전 9시 시점에서 러시아군은 45,000명을 알레강 서안에 투입했지만, 전장의 프랑스군은 란 지휘 하의 9,000명과 그루시 지휘 하의 8,000명에 불과했다. 란은 코사크 기병의 침투를 받으면서도 교묘하게 지휘하여 후퇴하며 시간을 벌었다.
당시 러시아군은 두 가지 실책을 범했다. 첫째, 하일스베르크에서 프리틀란트까지 50킬로미터 이상을 단시간에 돌파해 왔기 때문에 14일 오전에는 충분한 전투 태세가 갖춰지지 않았다. 둘째이자 더 치명적인 실책은 알레강에서 주력 부대와 예비 병력이 분단되었으며, 서안의 주력 부대도 프리틀란트 시내를 흐르는 용수로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오후 8시까지 러시아군 좌익은 붕괴되었고, 네는 용수로 남쪽을 제압했다. 알레강에 걸린 교량이 불타면서, 용수로 북쪽에 남아 있던 러시아군 우익은 퇴로를 잃었다. 러시아군은 강을 건너 궤주하는 과정에서 많은 병사가 익사하며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28] 북쪽의 알렌부르크 길을 통해 철수한 우익은 여전히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프랑스 좌익은 정연하게 추격을 진행했지만 아직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프랑스군의 피해는 대략 10,000명이었지만, 러시아군은 적어도 20,000명의 피해를 입었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6월 19일, 알렉산드르 황제는 프랑스와의 휴전을 모색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다. 나폴레옹은 그 사절에게 비스툴라강이 유럽에서 프랑스와 러시아의 영향력 사이의 자연스러운 경계를 나타낸다고 확신시켰다. 그 바탕으로, 두 황제는 네만강의 상징적인 뗏목에서 만난 후 틸지트에서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29]
틸지트에서의 협상은 화려함과 외교적 예절을 많이 보여주었지만, 가혹한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알렉산드르는 동생인 콘스탄틴 대공으로부터 나폴레옹과 평화 조약을 맺으라는 압력을 받았다. 막 승리한 프랑스 황제는 러시아에게 비교적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다. 러시아가 대륙 체제에 가입하고,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이오니아 제도를 프랑스에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다.[30] 반대로, 나폴레옹은 루이제 여왕의 끊임없는 간청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에게 매우 가혹한 평화 조항을 강요했다. 프로이센 영토의 절반을 지도에서 지워버린 나폴레옹은 베스트팔렌이라는 1,100평방 마일의 새로운 왕국을 만들고 그의 어린 동생 제롬을 새로운 군주로 임명했으며, 작센의 왕을 공작으로 하는 40,000평방 마일의 폴란드 국가인 바르샤바 공국을 만들었다.[30]
틸지트에서 프로이센이 겪은 굴욕적인 대우는 나폴레옹 시대가 진행되면서 깊고 씁쓸한 적대감을 야기했다. 게다가 알렉산드르의 나폴레옹과의 우호적인 태도는 나폴레옹이 러시아 상대방의 진정한 의도를 심각하게 잘못 판단하게 만들었고, 그는 향후 몇 년 동안 조약의 수많은 조항을 위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틸지트는 마침내 나폴레옹에게 전쟁의 휴식을 주었고, 그가 300일 넘게 보지 못했던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30] 그의 도착은 파리에서 엄청난 축하를 받았다.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은 끝났다.
반도 전쟁은 같은 해 1807년 11월 19일에 시작되었다.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은 1809년에 시작되었다.
네만강은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건너게 되었다.
4. 1. 쾨니히스베르크 함락과 틸지트 조약
6월 16일, 술트는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했고 프로이센은 완전히 패배했다.[49] 6월 19일,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에 사절을 보내 프랑스와의 휴전을 모색했다.[29] 나폴레옹은 비스툴라강이 프랑스와 러시아의 유럽 영향력을 미치는 자연 국경이라고 사절에게 단언했다. 이 원칙에 따라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1세는 틸지트 시의 네만강 뗏목 위에서 휴전 협상을 시작했다.[49]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먼저 "나는 당신만큼이나 영국을 싫어합니다"라고 말했고,[49] 나폴레옹은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휴전하고 있는 셈이오."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두 황제는 며칠 동안 서로의 군대를 검토하고, 훈장을 주고받으며, 정치와는 무관한 이야기도 종종 나누었다.틸지트 조약은 화려하고 외교적으로 우아했지만, 잔혹한 정치학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알렉산드르는 동생 콘스탄틴 파블로비치로부터 나폴레옹과 휴전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7월 7일, 나폴레옹과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틸지트 조약에 합의했다. 조약에 의해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는 협조 관계가 성립되었다. 폴란드는 바르샤바 공국으로 독립을 회복했고, 프로이센은 엘베강 서쪽의 영토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거액의 배상금을 부과받았다.
5. 평가
프리틀란트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전투의 결과로 여러 정치적, 외교적 변화가 일어났다.
5. 1. 정치적, 외교적 측면
알렉산드르 1세는 1807년 6월 19일, 프랑스와의 휴전을 모색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다. 나폴레옹은 그 사절에게 비스툴라강이 유럽에서 프랑스와 러시아의 영향력 사이의 자연스러운 경계를 나타낸다고 확신시켰다. 그 바탕으로, 두 황제는 네만강의 상징적인 뗏목에서 만난 후 틸지트에서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알렉산드르가 나폴레옹에게 가장 먼저 한 말은 "나는 당신만큼이나 영국을 싫어합니다."[29]였고, 나폴레옹은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평화를 이룬 셈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29] 두 황제는 며칠 동안 서로의 군대를 검토하고, 훈장을 수여하며, 정치와 관련 없는 주제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틸지트에서의 협상은 화려함과 외교적 예절을 많이 보여주었지만, 가혹한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알렉산드르는 동생인 콘스탄틴 대공으로부터 나폴레옹과 평화 조약을 맺으라는 압력을 받았다. 승리한 프랑스 황제는 러시아에게 비교적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다. 러시아가 대륙 체제에 가입하고,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이오니아 제도를 프랑스에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다.[30] 반면, 나폴레옹은 루이제 여왕의 끊임없는 간청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에게 매우 가혹한 평화 조항을 강요했다. 프로이센 영토의 절반을 지도에서 지워버린 나폴레옹은 베스트팔렌이라는 약 2848.97km2의 새로운 왕국을 만들고 그의 어린 동생 제롬을 새로운 군주로 임명했으며, 작센의 왕을 공작으로 하는 약 103599.01km2의 폴란드 국가인 바르샤바 공국을 만들었다.[30]
6. 대중문화 속의 프리틀란트 전투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서 프리틀란트 전투는 직접 묘사되지는 않지만, 중요한 사건으로 언급된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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