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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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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찬은 오호 십육국 시대 후량의 인물로, 여광의 아들이자 여소의 형이다. 그는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지만, 아버지 여광 사후 권력을 찬탈하고 폭정을 일삼았다. 여찬은 여광 사후 동생 여소와 왕위 다툼을 벌여 여소를 살해하고 황제가 되었으나,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했다. 결국 401년 사촌 여초에게 살해당했으며, 그의 죽음 이후 후량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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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찬
기본 정보
칭호천왕
왕조후량
재위 기간400년 – 401년
여찬 (Lǚ Zuǎn)
영서 (Yǒngxù)
시호영제 (靈皇帝)
묘호없음
연호함녕
능묘백석릉 (白石陵)
계보
부황의무제
모후조숙원
배우자양황후
즉위 및 계승
전임자여소
후임자여륭

2. 초기 생애와 군사적 활약

여찬은 후량의 초대 천왕 여광의 아들이자 여소의 형이다. 젊은 시절부터 궁술과 기마술에 능했으며, 전진의 수도 장안에서 유학했지만 학업에 열중하지는 않았다. 384년 전진이 붕괴되자, 아버지를 따라 상규(오늘날의 톈수이시)를 거쳐 고장(姑臧, 오늘날의 우웨이시)으로 피신했고, 이곳에서 여광이 후량을 건국하고 수도로 삼는 데 기여했다.

392년, 여광의 장군으로서 서진의 왕자 저거강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397년, 여광의 명으로 숙부 여연과 함께 저거강귀를 다시 공격, 금성을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숙부가 전사하면서 철수했다.

2. 1. 여광의 신임과 후계 구도

여찬은 여광의 아들이자 여소의 형이다. 여광 재위 시기에는 태원공(太原公)에 책봉되었고,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397년 서진 정벌에 참여했고, 이후 후량에서 반란이 일어나 남량, 북량 등이 건국되자 이에 맞서 싸웠다.

여광의 통치 기간 동안, 여찬은 그의 가장 신뢰받는 장군이었다. 397년, 흉노족 출신 장군 거거몽손이 반란을 일으키자 여광은 여찬을 보내 진압하게 했다. 여찬은 초기에 거거몽손을 격파하여 도주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거거몽손의 사촌 거거남성이 관료 단업을 설득하여 반란에 합류하고 북량을 건국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여광은 고장(姑臧)에서 장군 양궤와 마법사 곽눈의 반란에 직면했고, 여찬은 단업의 수도 건강(建康, 오늘날의 간쑤성 장예시)을 포위하던 중 이들과 싸우기 위해 회군해야 했다. 이로 인해 단업의 신생 국가는 존속할 수 있었다. 398년, 여찬은 형제 여홍과 함께 양궤와 곽눈을 격파하여 각각 남량과 서진에 항복시켰다.

399년, 여찬은 형제 여소와 함께 북량을 공격하여 초반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남량의 왕자 저발오고가 양궤와 그의 형제 저발리록고를 보내 북량을 지원하자 철수해야 했다.

3. 왕위 찬탈과 폭정

399년, 여광이 병이 깊어지자 적자인 여소에게 천왕위를 물려주고, 여찬과 여홍(呂弘)에게 여소를 보좌하도록 유언했다. 그러나 여찬은 여홍의 부추김을 받아 여소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 즉위 후에는 자신을 도운 여홍마저 살해하고,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여찬은 남량, 북량 등을 정벌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군대를 동원하였으나, 남량과 북량의 공조로 인해 번번히 실패하였다.

이러한 과정과 관련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3. 1. 친족 살해와 권력 투쟁

여찬은 여광의 아들이자 여소의 형으로, 여광 재위 시기에는 태원공(太原公)에 책봉되었다. 399년 여광이 사망하면서 여소에게 천왕위를 물려주고, 여찬은 태위(太尉)에 임명되었다. 여광은 여소에게 여찬, 여홍(呂弘)과 힘을 합쳐 나라를 다스릴 것을 유언했다. 여소가 즉위 후 여찬의 권력을 두려워하여 왕위를 양보하려 하였으나 여찬이 거부하였다. 얼마 후 여홍이 여찬에게 왕위를 찬탈할 것을 권하자 여찬은 여홍과 함께 궁궐로 난입하여 여소를 살해하고 천왕에 즉위하였다.

여소의 측근이었던 여초(呂超)는 여소에게 여찬을 체포하고 처형하라고 은밀히 제안했지만, 여소는 거절했다. 여찬이 여소를 공격할 때 여초도 여소를 도우려 했지만, 군대는 여찬을 두려워하여 무너졌다. 여찬은 즉위 후, 도망쳤던 여초를 충신이라고 칭하며 불러들였다.

여찬은 자신의 즉위를 도운 여홍을 중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여홍의 공명을 경계하여 그를 살해했다.

3. 2. 실정과 주변국과의 갈등

여찬은 남량과 북량을 정벌하려 했으나, 두 나라의 협공으로 번번이 실패했다. 400년, 남량을 공격했으나 투발루탄에게 패배했다. 같은 해 여름, 북량을 공격하여 처음에는 성공하여 수도 장액(張掖, 현재 장예시, 간쑤성)을 포위했지만, 남량의 투발루탄이 후방을 공격하여 고장성(姑臧城) 안으로 진입하기까지 하자, 여찬은 북량에 대한 원정을 끝내야 했다.

이러한 군사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찬은 주색과 사냥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했다. 관료 양영(楊穎)이 그에게 생활 방식을 바꿀 것을 설득했을 때, 여찬은 감사하고 사과했지만, 자신의 방식을 바꾸지 못했다. 여찬의 폭정으로 인해 후량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4. 죽음

401년, 여찬은 사촌 여초(呂超)에게 살해당했다. 여초는 여찬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의심하여, 여초 등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는데, 술에 취한 여찬을 칼로 찔러 죽였다. 여찬의 죽음 이후, 후량은 급격히 쇠퇴하여 결국 멸망했다.

4. 1. 여초의 반란과 최후

401년, 여찬의 사촌 여초(呂超)는 여찬에게 책망을 받자, 여찬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의심했다. 여찬은 여초와 선비족 추장 사판(思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그들을 고장(姑臧)으로 소환했다. 여찬은 여초와 사판을 위해 잔치를 열어 그들 사이에 평화를 조성하려 했다.

잔치에서 여초의 형 여룡은 여찬에게 계속 술을 권했고, 여찬은 곧 술에 취했다. 여찬은 사람이 끄는 수레에 앉아 여초와 사판에게 궁궐을 구경시켜 주었다. 수레가 두 궁궐 사이의 문지방에 이르렀을 때, 수레는 문지방을 넘어갈 수 없었고, 여찬의 경비병 두천(竇川)과 낙등(駱騰)은 수레를 들어 넘기기 위해 칼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들이 그러는 동안, 여초는 그들의 칼을 빼앗아 여찬을 공격했다. 여찬은 무방비 상태로 여초와 싸우려 했지만, 여초는 재빨리 칼로 그를 찔렀다. 두천과 낙등은 여초와 싸우려 했지만 그 역시 그에게 살해당했다.

여찬의 아내 양황후는 경비병들을 동원하여 여초와 싸우려 했지만, 경비병들은 곧 그녀를 버렸고, 여초는 자신의 형 여룡을 여찬의 뒤를 잇는 황제로 세웠다. 여찬의 머리는 잘려 백성들에게 보여졌지만, 여찬은 나중에 그다지 좋지 않은 시호를 받았다. 여룡이 잠시 후량을 통치했으나, 곧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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