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택
1. 개요
여택은 유방을 따라 한나라 건국에 기여한 인물이다. 유방이 거병했을 때부터 그를 따랐으며, 홍문지회를 거쳐 한왕에 봉해졌을 때 후가 되었다. 삼진 평정전에서 활약하고 팽성 전투 이후 남부 전선에서 초군을 방어했다. 기원전 201년에 주려후에 봉해졌으며, 고조와 혜제 시기에 여씨 중 유일하게 열후에 봉해졌다. 기원전 199년에 사망했으며, 사후 령무후와 도무왕으로 추존되었다.
| 이름 | 려택 |
|---|---|
| 한자 표기 | 呂澤 |
| 출생 | 불명 |
| 사망 | 기원전 199년 |
| 사망 장소 | 불명 |
| 시대 | 전한 |
| 직함/칭호 | 주려후 |
| 아버지 | 여공 |
| 형제자매 | 려택、여석지、여치、여후 |
| 자녀 | 여대、여산 |
-
기원전 198년 사망 -
이척 (전한)
이척은 전한 시대 문위로 고제를 도와 삼진 평정과 항우 공격에 공을 세워 망후에 봉해진 인물이며, 《사기》 기록 누락으로 《한서》에서 행적 확인이 가능하다. -
전한 사람 -
전한 무제
전한의 제7대 황제인 전한 무제는 54년간 재위하며 유교 기반 중앙집권 강화, 흉노 정벌을 통한 영토 확장, 소금과 철의 전매제 등 경제 개혁을 추진하여 전한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으나, 과도한 군사 지출, 사치스러운 생활, 무고의 난 등 부정적인 면모도 보였다. -
전한 사람 -
구독
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전한의 은택후 -
곽거병
곽거병은 전한 무제 시대 흉노 정벌에 큰 공을 세운 명장으로, 젊은 나이에 표기장군과 대사마에 오르며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24세에 병사했으며, 그의 묘는 흉노를 짓밟는 말의 석상으로 유명하다. -
전한의 은택후 -
여록
여록은 전한 고황후 시기에 고황후의 신임을 받아 군권을 장악하고 조왕에 봉해지는 등 막강한 권력을 누렸으나, 고황후 사후 여씨 일족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주살된 여씨 일족의 핵심 인물이다.
2. 가계
3. 약력
유방이 거병했을 때부터 객(客)으로서 따랐으며, 홍문지회를 거쳐 유방이 한왕(漢王)에 봉해졌을 때 후(侯)가 되었다. 고조 원년(기원전 206년) 8월부터 삼진 평정전에서 4개의 방면군 중 하나를 맡아 적(翟) 공략을 지휘했다. 고조 2년(기원전 205년) 4월, 팽성 전투에서 항우에게 대패한 유방은 하읍(下邑)에서 여택이 이끌고 온 군대를 흡수하여 서쪽으로 철수했고, 5월 형양에 도착했다. 6월, 유방은 관중에서 유영을 태자로 세우고 장한을 무너뜨린 후 형양으로 돌아갔다. 여택은 남부 전선에서 초군 방위선에 있었다.
고조 6년(기원전 201년) 정월, 여택은 항우를 멸망시키고 한 황제가 된 유방으로부터 주려후(周呂侯)에 봉해졌다. 고조와 혜제 시기에 여씨 중에서 열후(列侯)에 봉해진 것은 여택과 그의 동생 여석지뿐이었으며, 모두 그 군공에 의한 것이었다.
고조 8년(기원전 199년)에 사망했으며, 고조 9년(기원전 198년)에 아들 여대가 려후(酈侯)에 봉해졌다. 혜제 원년(기원전 194년) 여름에 령무후(令武侯)로 시호되었다. 고후 원년(기원전 187년) 11월에는 도무왕(悼武王)으로 추존되었는데, 이는 여후가 여택의 아들 여대를 여왕(呂王)에 봉하기 위해 먼저 그의 아버지인 여택을 왕으로 봉하여 그 명목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3.1. 한나라 건국 이전
유방이 거병했을 때부터 객(客)으로서 따랐으며, 홍문지회를 거쳐 유방이 한왕(漢王)에 봉해졌을 때 후(侯)가 되었다.
고조 원년(기원전 206년) 8월부터 장한, 사마흔, 동예의 삼진(三秦) 평정전에서 여택은 4개의 방면군 중 하나를 맡아 정복, 곽정, 곽몽, 주진, 고봉, 풍무택 등의 장교를 이끌고 적(翟) 공략을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고조 2년(기원전 205년) 4월, 팽성 전투에서 항우에게 대패한 유방은 하읍(下邑)에서 여택이 이끌고 온 군대를 흡수하여 서쪽으로 철수했고, 5월 형양에 도착했다.
3.2. 한나라 건국과 활약
유방이 거병했을 때부터 객(客)으로서 따랐으며, 홍문지회를 거쳐 유방이 한왕(漢王)에 봉해졌을 때 후(侯)가 되었다.
고조 원년(기원전 206년) 8월부터의 삼진(옹왕 장한, 새왕 사마흔, 적왕 동예) 평정전에서 여택은 4개의 방면군 중 하나를 맡아, 정복, 곽정, 곽몽, 주진, 고봉, 풍무택 등의 장교를 이끌고 적 공략을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고조 2년(기원전 205년) 4월, 팽성 전투에서 항우에게 대패한 유방은 하읍(下邑)에서 여택이 이끌고 온 군대를 흡수하여 서쪽으로 철수했고, 5월 형양에 도착했다. 6월, 유방은 관중까지 돌아와 유영을 태자로 세우고 폐구에서 장한을 무너뜨리는 등의 일을 한 후에 형양으로 돌아갔다. 한군은 그 후 한신이 이끄는 북부 공략과 형양, 오창, 성고 등 남부 방위에 전선이 나뉘었지만, 여택은 남부 전선에서 초군 방위선에 있었다.
고조 6년(기원전 201년) 정월, 여택은 항우를 멸망시키고 한 황제가 된 유방으로부터 주려후(周呂侯)에 봉해졌다. 고조, 혜제 시기에 여씨 중에서 열후(列侯)에 봉해진 것은 여택과 그의 동생 여석지뿐이었으며, 모두 그 군공에 의한 것이었다.
3.3. 주려후 책봉과 사망
기원전 201년 정월, 항우를 멸망시키고 한나라 황제가 된 유방으로부터 주려후(周呂侯)에 봉해졌다. 고조와 혜제 시기에 여씨 중에서 열후(列侯)에 봉해진 것은 여택과 그의 동생 여석지뿐이었으며, 모두 그 군공에 의한 것이었다.
기원전 199년에 사망했으며, 기원전 198년에 아들 여대가 려후(酈侯)에 봉해졌다.
혜제 원년(기원전 194년) 여름에 영무후(令武侯)로 시호되었다. 고후 원년(기원전 187년) 11월에는 도무왕(悼武王)으로 추존되었는데, 이는 여후가 여택의 아들 여대를 여왕(呂王)에 봉하기 위해 먼저 그의 아버지인 여택을 왕으로 봉하여 그 명목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