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자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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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왕자 존은 1905년 에드워드 7세의 손자이자 조지 5세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폐증과 간질을 앓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격리된 삶을 살았다. 그는 1911년 부모의 대관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1919년 1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삶은 최근 재조명되어 영화와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으며, 영국 왕실의 비극적인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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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자 존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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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 존 찰스 프랜시스 |
출생 이름 | 웨일스 공자 존 |
출생일 | 1905년 7월 12일 |
출생지 | 샌드링엄 하우스 요크 코티지, 잉글랜드 샌드링엄 |
사망일 | 1919년 1월 18일 |
사망지 | 잉글랜드 샌드링엄 우드 팜 |
매장일 | 1919년 1월 21일 |
매장지 | 샌드링엄 세인트 메리 막달렌 교회 |
왕가 | 삭스-코부르크-고타 가문 (1917년까지) 윈저 왕조 (1917년부터) |
아버지 | 조지 5세 |
어머니 | 메리 오브 테크 |
2. 생애
1905년 7월 12일 샌드링엄 하우스에서 태어난 존 왕자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샬롯 "라라" 빌의 보살핌을 받으며 형제들과 함께 샌드링엄에서 보냈다.[2] 아버지 조지 5세는 엄격했지만 자녀들에게 애정을 쏟았고, 어머니 메리 왕비는 자녀들과 가깝게 지냈다.[3]
1909년, 존의 고모할머니인 러시아의 과부 황후는 어린 존과 조지가 모두 매력적이고 재미있다고 언급했다. 존의 이모인 애슬론 백작 부인 앨리스는 그를 "매우 기이하다"고 묘사하며, 조지 5세가 존을 제외한 모든 자녀들이 순종적이라고 말한 일화를 전했다.
존은 네 번째 생일 무렵 간질 발작과 자폐증 또는 학습 장애로 추정되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10] 건강상의 이유로 1911년 부모의 대관식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왕실은 여전히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1912년, 조지 왕자가 학교에 입학했고, 1913년 존은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존은 부모와 형제자매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1916년 발작이 심해지자 우드 농장으로 보내져 라라 빌의 간호를 받았다. 마지막 가정교사가 해고되면서 공식적인 교육은 끝났고, 의사들은 그가 성인이 될 가능성이 낮다고 경고했다.
존은 1918년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냈지만, 1919년 1월 18일 심한 발작 후 우드 농장에서 사망했다.[4] 그의 죽음은 가족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고통을 덜어준 안도감으로 여겨졌다.
2. 1. 출생과 세례
1905년 7월 12일 오전 3시 5분에 요크 코티지에서 조지 5세와 웨일스 공비 메리 사이의 막내이자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2] 존이 태어날 때 어머니 메리가 난산으로 매우 고생했다고 한다. 왕실에 불운한 연관성이 있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존'이라는 이름을 받았지만, 가족들에게는 "조니"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출생 당시 아버지와 네 형에 이어 왕위 계승 서열 6위였다. 남성 혈통으로 현 영국 군주의 손자이자 웨일스 공의 아들로서, 출생부터 공식적으로 ''웨일스 공자 존 전하''로 불렸다.1905년 8월 3일 샌드링엄에 있는 성 메리 매그달렌 교구 교회에서 존 닐 달튼 목사의 집전으로 세례를 받았다.[3] 그의 대부모는 포르투갈 국왕 카를루스 1세, 덴마크의 칼 왕자, 파이프 공작 알렉산더 더프 1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의 요한 왕자, 스파르타 공작과 스파르타 공작부인, 테크의 알렉산더 공주였다. 존의 아버지는 카를루스 국왕, 칼 왕자, 요한 왕자, 파이프 공작을 대리했고, 존의 고모 빅토리아 공주는 스파르타 공작부인과 알렉산더 공주를 대리했다.[3]
2. 2. 유년 시절과 질병
1905년 7월 12일, 노퍽의 샌드링엄 하우스 내 요크 코티지에서 태어났다.[10] 존이 태어날 때 어머니 메리는 난산으로 매우 고생했다고 한다. 같은 해 8월 3일에 세례를 받았으며, 대부모는 포르투갈 왕 카를루스 1세, 그리스 왕세자 부부(후의 콘스탄티노스 1세와 소피아 왕비), 앨리스 오브 올버니, 노르웨이 왕 호콘 7세, 초대 파이프 공작 알렉산더 더프 등이었다. 가족들에게는 "조니(Johnny)"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선천적으로 자폐증이 있었고, 4살 때 처음으로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10] 이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기 때문에, 1911년 부왕의 대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병세가 악화된 만년에는 샌드링엄 하우스 궁전 부지 내 우드 농장에서 유모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형제들과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고, 특히 형 조지와는 자주 놀았다고 한다. 하지만, 원래 아이들에게 그다지 애정을 쏟지 않았던 어머니와의 사이는 평생 좋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유모에게는 자주 의지했다고 한다.
1916년, 발작이 더 잦아지고 심해지자 존은 우드 농장으로 보내져 라라 빌이 그의 간호를 맡게 되었다. 그는 주변 세상에 대한 관심을 유지했고 논리적인 사고와 표현이 가능했지만, 교육적인 진전이 없어 마지막 가정교사가 해고되면서 공식적인 교육은 끝났다. 의사들은 그가 성인이 될 가능성은 낮다고 경고했다.
우드 농장에서 존은 "샌드링엄 영지의 외딴 농장에 작은 가구를 가진 위성"으로 묘사되었다. 그의 할머니인 알렉산드라는 그를 위해 샌드링엄 하우스에 정원을 가꾸었고, 이것은 존의 삶의 큰 즐거움 중 하나가 되었다.
1916년 여름 이후, 존은 샌드링엄 영지 밖에서 거의 보이지 않았고 라라 빌의 보살핌만 받았다. 메리 왕비는 지역 아이들을 데려와 존의 놀이 상대를 만들어주었다. 그 중 한 명은 할리팩스 출신의 어린 소녀인 위니프레드 토마스였는데, 존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몇 년 전에 위니프레드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가까워져 함께 자연 산책을 하고 알렉산드라 여왕의 정원에서 일했다. 존은 또한 형제자매들이 방문했을 때 함께 놀았다.
2. 3. 격리된 삶과 죽음
1919년 1월 18일 오전 5시 30분, 우드 농장에서 13세의 나이로 심한 발작 후 잠자다 사망했다.[4] 메리 왕비는 일기에 이 소식이 큰 충격이었지만, 불쌍한 어린 소년의 불안한 영혼에게 죽음은 큰 안도감을 주었다고 썼다. 메리 왕비는 조지에게 소식을 전했고, 그들은 우드 농장으로 차를 몰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마음이 아프지만 매우 체념한 샬롯 "라라" 빌을 만났고, 어린 존이 매우 평화로워 보였다고 기록했다.메리 왕비는 오랜 친구인 에밀리 알콕에게 보낸 편지에서 존에게는 큰 안도감이며, 그의 질병은 나이가 들수록 악화되었고, 그가 이로써 많은 고통을 겪지 않았다고 썼다. 또한, 그를 그렇게 평화로운 방식으로 데려가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네 살 때부터 큰 불안을 안겨준 영혼에게 평화가 찾아왔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가족의 첫 번째 단절은 견디기 힘들지만, 사람들이 매우 친절하고 동정심이 많았고 이것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조지 5세는 아들의 죽음을 "가능한 가장 큰 자비"라고 묘사했다.

1월 20일, ''데일리 미러''는 "왕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얼굴에는 천사의 미소가 있었다"고 썼고,[4] 이 보고서는 존의 간질에 대한 첫 번째 공개 언급이었다. 그의 장례식은 다음 날 샌드링엄 성 마리아 막달레나 교구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존 닐 달튼이 집전했다.[5]
메리 왕비는 달튼 목사와 브라운힐 박사(존의 의사)가 매우 슬프고 감동적인 장례식을 집전했으며, 가족과 마을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조니에게 매우 친절하고 충실했던 모든 하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명목상으로는 사적이었지만, 샌드링엄 하우스 직원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영지 내의 모든 사람들이 가서 문 주변에 서 있었고 그의 무덤은 꽃으로 완전히 덮여 있었다."[6] 알렉산드라 덴마크 여왕은 메리 왕비에게 "이제 [그들의] 두 사랑스러운 조니가 나란히 누워있다"고 썼다.
2. 4. 재조명과 평가
영국 왕실의 비극적인 존재로 최근 주목받아 그를 주역으로 한 영화도 만들어졌으며, 채널 4에서도 그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방송되었다.[4] 2008년 채널 4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존에 대한 기존 정보의 상당 부분은 "그의 삶과 문제에 대한 세부 사항이 거의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문과 억측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며, 영국 간질 협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왕과 여왕]이 한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간질 환자는 나머지 공동체와 격리되었습니다. 그들은 종종 간질 치료 시설이나 정신 병원에 수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 질환으로 여겨졌습니다...[7]
간질 환자를 가두어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자리 잡는 데까지 20년이 더 걸렸다고 덧붙였다.[8]
한 저자는 왕가가 이러한 질병이 당시 여전히 평민보다 더 순수하다고 여겨졌던 그들의 혈통을 통해 흐를 수 있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존의 질병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이 숨기기를 원했다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들은 존에게 제1차 세계 대전의 "엄격한" 상황에서 가능한 최고의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우드 농장으로 보냈다고 제안했다. 또 다른 저자는 왕가가 "존의 질병에 대해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했다"고 주장했으며, 또 다른 저자는 존의 삶이 "대개 비극이나 음모로 묘사된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8세 (구 에드워드 왕자)가 퇴위했을 때, 존처럼 발작을 겪는다는 암시를 통해 조지 6세로 즉위한 앨버트 왕자를 깎아내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1998년, 두 권의 가족 사진이 발견된 후, 존은 잠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존의 삶에 대한 전기 드라마인 ''잃어버린 왕자''는 스티븐 폴리아코프가 쓰고 연출했으며, 2003년에 개봉했다.[9]
3. 칭호
- 1905년 7월 12일 ~ 1910년 5월 6일: 웨일스 왕자 존 전하(His Royal Highness Prince John of Wales)
- 1910년 5월 6일 ~ 1919년 1월 18일: 존 왕자 전하(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John)
4. 가계
1. 영국 왕자 존 | |||||||
---|---|---|---|---|---|---|---|
2. 조지 5세 | 3. 테크 공녀 빅토리아 메리 | ||||||
4. 에드워드 7세 | 5. 덴마크 공녀 알렉산드라 | 6. 테크 공작 프랜시스 | 7. 캠브리지 공녀 메리 아델레이드 | ||||
8.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 공 | 9. 빅토리아 여왕 | 10. 크리스티안 9세 | 11. 헤센카셀 공녀 루이즈 | 12. 뷔르템베르크 공작 알렉산더 | 13. 클로딘 뢰데이 폰 키슈뢰데 백작부인 | 14. 캠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 15. 헤센카셀 공녀 아우구스타 |
참조
[1]
간행물
London Gazette
1917-07-17
[2]
간행물
London Gazette
1905-07-13
[3]
논문
A Royal Christening
Western Presbyterian Publishing Company
[4]
뉴스
Death of Youngest Son of King and Queen
1919-01-20
[5]
뉴스
The Times
1919-01-22
[6]
문서
As remembered by Winifred Thomas, quoted by her daughter in {{harvnb|Tizley|2008}}.
[7]
뉴스
Photograph Reveals Tragedy of Prince John
https://www.questia.[...]
1998-02-12
[8]
뉴스
Photograph Reveals Tragedy of Prince John
https://www.questia.[...]
1998-02-12
[9]
웹사이트
https://www.stephenp[...]
[10]
서적
Burke’s Peerage, Baronetage & Knightage, Clan Chiefs, Scottish Feudal Barons
Burke's Peerage Lim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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