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샤프들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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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귀스트 샤프들랭은 프랑스 출신의 가톨릭 선교사로, 1852년 중국 광시 성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기독교인에 대한 의심이 커진 상황에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1856년 처형당했다. 샤프들랭의 죽음은 제2차 아편 전쟁의 발발에 영향을 미쳤으며, 1900년 시복, 2000년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중국 측의 비판적 시각과 역사적 해석의 다양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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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샤프들랭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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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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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오귀스트 샤프들랭 |
원어 이름 | Auguste Chapdelaine |
중국어 이름 | 마뢰 (馬賴 / 马赖, Mǎ Lài) |
직함 | 파리 외방전교회 사제 |
생애 | |
출생일 | 1814년 2월 6일 |
출생지 | 프랑스 제국, 노르망디, 라 로셸-노르망드 |
사망일 | 1856년 2월 29일 (42세) |
사망지 | 청나라 광시성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광시 좡족 자치구) |
사제 서품 | |
서품일 | 1843년 6월 10일 |
기념 | |
기념일 | 2월 27일 |
숭배 | 가톨릭교회 |
성인 | |
칭호 | 순교자, 성인 |
시복일 | 1900년 5월 27일 |
시복 장소 | 로마 |
시복 집전자 | 교황 레오 13세 |
시성일 | 2000년 10월 1일 |
시성 장소 | 로마 |
시성 집전자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2. 생애
오귀스트 샤프들랭은 1856년 2월 25일 중국 광시 성에서 체포되어 4일 후 처형되었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기독교인들이 반란 세력으로 의심받았고, 외국인들의 입국이 금지되어 있었다.[5]
1900년 5월 27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순교자로 시복되었고, 2000년 10월 1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2. 1. 초기 생애
오귀스트 샤프들랭은 프랑스 라로셸노르망디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20세에 쿠탕스 신학교에 입학하여 1843년 쿠탕스 교구를 위해 사제 서품을 받았다. 1851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합류했고, 1852년 4월 앤트워프를 출발하여 중국 광시 성의 가톨릭 선교에 합류했다.[1]광저우에서 잠시 머문 후 1854년 봄에 구이저우 성의 성도인 구이양으로 이주했다. 12월에 그는 뤼 팅메이와 함께 광시성 시린 현 야오산 마을로 가서 약 300명의 현지 가톨릭 신자들을 만났다. 1854년 12월 8일에 그곳에서 첫 미사를 집전했다. 그는 도착 열흘 만에 체포되어 시린 현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16일 또는 18일 만에 풀려났다.[2]
개인적인 위협을 받은 샤프들랭은 1855년 초에 구이저우로 돌아갔고, 같은 해 12월에 광시로 다시 돌아왔다.[3][4]
2. 2. 중국 선교
1852년 4월, 오귀스트 샤프들랭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중국 광시 성에 파견되었다.[1] 당시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기독교인에 대한 의심이 커졌고, 외국인의 해당 지역 출입이 금지된 상황이었다.1854년 봄, 샤프들랭은 광저우에 잠시 머문 후 구이저우 성의 성도인 구이양으로 이동했다. 그해 12월, 그는 뤼 팅메이와 함께 광시 성 시린 현의 야오산 마을로 가서 약 300명의 현지 가톨릭 신자들을 만났고, 12월 8일에 그곳에서 첫 미사를 집전했다. 그러나 도착 열흘 만에 체포되어 시린 현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16일 또는 18일 만에 풀려났다.[2]
1855년 초, 샤프들랭은 개인적인 위협을 느껴 구이저우로 돌아갔다가 같은 해 12월에 광시로 다시 돌아왔다.[3][4] 1856년 2월 22일, 그는 새 신자의 친척인 바이 산의 고발로 인해 현지 재판소에 고발되었다. 당시 재판소는 휴가 중이었으나, 2월 25일 새로운 현지 만다린인 장 밍펑의 명령에 의해 다른 중국인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야오산에서 체포되었다.[5]
샤프들랭은 반란을 선동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뇌물 지불을 거부했다. 그는 우리 고문(''zhanlong'')을 선고받아 가죽 끈으로 뺨을 백 번이나 맞아 이가 부러지고 얼굴이 훼손되었으며 턱이 찢어졌다. 그는 작은 쇠창살 안에 갇혔고, 이 쇠창살은 감옥 문에 매달렸다. 그가 서 있던 판자는 점차 제거되어 목 근육에 압박을 가했고, 질식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5] 그는 이미 참수되었을 때 사망했으며, 그의 머리카락에 매달린 그의 머리는 나무에 걸렸다. 아이들이 샤프들랭의 머리에 돌을 던졌고, 그의 머리가 땅에 떨어져 길거리 개와 돼지에게 잡아먹혔다고 한다.[6][7]
2. 3. 체포와 순교
1854년 봄, 오귀스트 샤프들랭은 광저우에서 잠시 머문 후 구이저우 성의 성도인 구이양으로 이주했다. 그해 12월, 그는 뤼 팅메이와 함께 광시성의 시린 현, 야오산 마을로 가서 약 300명의 현지 가톨릭 신자들을 만났다. 그는 1854년 12월 8일에 그곳에서 첫 미사를 집전했다. 그러나 도착 열흘 만에 체포되어 시린 현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16일 또는 18일 만에 풀려났다.[2]개인적인 위협을 느낀 샤프들랭은 1855년 초에 구이저우로 돌아갔고, 같은 해 12월에 광시로 다시 돌아왔다.[3][4] 1856년 2월 22일, 그는 새 신자의 친척인 바이 산에게 고발당했다. 당시 현지 재판소는 휴가 중이었으나, 1856년 2월 25일, 새로운 현지 만다린인 장 밍펑의 명령에 의해 다른 중국인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야오산에서 체포되었다. 샤프들랭은 반란을 선동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뇌물 지불을 거부했다. 그는 우리 고문(''zhanlong'')을 선고받아 먼저 가죽 끈으로 뺨을 백 번이나 맞아 이가 부러지고 얼굴이 훼손되었으며 턱이 찢어졌다. 그는 작은 쇠창살 안에 갇혔고, 이 쇠창살은 감옥 문에 매달렸다. 그가 서 있던 판자는 점차 제거되어 목 근육에 압박을 가했고, 질식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이어졌다.[5] 그는 이미 참수되었을 때 사망했다. 그의 머리카락에 매달린 그의 머리는 나무에 걸렸다. 아이들이 샤프들랭의 머리에 돌을 던졌고, 그의 머리가 땅에 떨어져 길거리 개와 돼지에게 잡아먹혔다고 한다.[6][7]
3. 외교적 파장과 제2차 아편 전쟁
오귀스트 샤프들랭 신부의 죽음은 단순한 종교적 박해 사건을 넘어,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야망과 맞물려 복잡한 외교적 파장을 일으켰다. 프랑스는 샤프들랭 사건을 제2차 아편 전쟁 참전의 구실로 이용했고, 이는 결국 중국의 반식민지화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857년 프랑스 전권 대사 드 부르불론은 홍콩에 도착하여 샤프들랭 처형에 대한 배상과 조약 개정을 협상하려 했으나, 엽명침과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8] 엽명침은 샤프들랭이 아닌 다른 인물이 처형되었다고 주장하며 프랑스 측의 요구를 회피했다.[8]
결국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제2차 아편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결과 체결된 베이징 조약과 톈진 조약은 서양 열강에게 중국 내에서의 선교 자유와 재산 소유권을 보장하는 등 중국 사회에 대한 개입을 더욱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톈진 조약 제13조는 기독교인에게 선교와 자산 보유 권리를 부여하여, 서양 열강이 중국 사회에 개입할 수 있는 또 다른 통로를 제공했다.
이 사건은 태평천국 운동 기간에 발생하여, 청나라 관리들이 기독교에 대해 더욱 경계하게 만들었다. 샤프들랭 신부의 체포와 처형은 지방 관리들이 기독교 선교 활동을 반란으로 오해한 결과였다.[12]
3. 1. 프랑스의 항의와 엽명침의 대응
오귀스트 샤프들랭의 죽음은 1856년 7월 12일 홍콩 주재 프랑스 선교부 책임자에 의해 보고되었다. 마카오에 있던 임시 대리 대사 드 쿠르시는 7월 17일에 처형 사실을 알게 되었고, 7월 25일 중국 제국 총독 엽명침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7월 30일, 드 쿠르시는 프랑스 외무부에 처형 관련 보고서를 보냈다.[8]엽명침은 샤프들랭이 내륙에서 기독교를 전파함으로써 이미 중국 법을 위반했다고 지적하며 드 쿠르시에게 응답했다. 당시 프랑스와 체결된 1844년 조약은 프랑스에 개방된 5개의 조약 항구에서만 기독교 전파를 허용했다. 또한 엽명침은 샤프들랭이 반란 지역에 있었고 그의 개종자 중 많은 수가 이미 반역 행위로 체포되었다고 주장하며, 샤프들랭의 선교 활동이 종교 전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8]
프랑스의 외교적 압력으로 샤프들랭의 죽음을 명령한 만다린(관리)은 나중에 좌천되었다. 같은 해 영국이 중국과 제2차 아편 전쟁 (1856–60)을 시작했을 때, 프랑스는 처음에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드 쿠르시는 샤프들랭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의 동정심이 영국에 있다는 것을 알렸다.[8]
3. 2. 제2차 아편 전쟁의 발발
그의 죽음은 1856년 7월 12일 홍콩 주재 프랑스 선교부 책임자에 의해 보고되었다. 마카오에 있던 임시 대리 대사 드 쿠르시는 7월 17일에 처형 사실을 알게 되었고, 7월 25일 중국 제국 총독 엽명침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7월 30일, 그는 프랑스 외무부에 처형 관련 보고서를 보냈다.[8]총독은 샤프들랭이 내륙에서 기독교를 전파함으로써 이미 중국 법을 위반했다고 지적하며 드 쿠르시에게 응답했다. 당시 프랑스와 체결된 1844년 조약은 프랑스에 개방된 5개의 조약 항구에서만 기독교 전파를 허용했다. 그는 또한 사제가 반란 지역에 있었고 그의 개종자 중 많은 수가 이미 반역 행위로 체포되었다고 주장했으며, 총독은 샤프들랭의 선교 활동이 종교 전파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8]
프랑스의 외교적 압력으로 그의 죽음을 명령한 만다린은 나중에 좌천되었다. 같은 해 영국이 중국과 전쟁(제2차 아편 전쟁)을 시작했을 때(1856–60), 프랑스는 처음에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드 쿠르시는 샤프들랭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의 동정심이 영국에 있다는 것을 알렸다.[8]
1857년, 프랑스 전권 대사 드 부르불론이 홍콩에 도착하여 샤프들랭의 처형에 대한 배상과 조약 개정을 협상하려 했다. 그는 엽명침과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8]
협상은 그해 12월까지 계속되었다. 12월 14일, 엽명침 총독은 살해된 사람이 샤프들랭과 비슷한 중국 이름을 가진 삼합회 회원이며 3월에 반란군으로 처형되었다는 보고서를 받았고, 이는 샤프들랭과 동일한 인물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과거에 많은 프랑스 시민들이 내륙으로 들어가 설교를 했으며, 체포되어 프랑스 측에 넘겨진 6명의 선교사 사례를 인용했다.[8] 프랑스 대사관은 엽명침의 답변이 회피적이고 조롱적이며 프랑스 요구에 대한 공식적인 거부라고 판단했다.
역사학자 앤서니 클라크에 따르면, "샤프들랭의 죽음은 제국주의적 이득을 위해 의심할 여지 없이 이용되었다."[6] 프랑스 제국은 선교사들의 죽음을 여러 차례 겪었지만, 이에 대한 군사적 보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국이 승리할 것이 불가피하다는 정치적 상황과 프랑스가 중국에서 자체적인 제국주의적 이득을 얻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프랑스가 다른 곳에서는 선교사의 죽음에 대한 보복을 위한 징벌적 군사 원정을 벌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많은 역사학자들이 샤프들랭의 죽음이 프랑스가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전쟁을 선포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고 결론 내리게 했다.[9][10][11]
영국 주재 중국 고등판무관 엘긴 경은 프랑스의 전쟁 참전 이전에 제시된 프랑스 최후통첩에 대해 논평했다.
중불 베이징 조약의 제6조 중국어 버전(전쟁 종결과 함께 서명됨)은 기독교인에게 중국에서 신앙을 전파할 권리와 프랑스 선교사에게 재산을 소유할 권리를 부여했다. 프랑스의 외교적 압력으로 장명봉은 면직되었다. '마뢰 신부 사건'(혹은 '서림교안')은 프랑스에 영국의 애로우 전쟁(제2차 아편 전쟁)에 개입할 구실을 제공했다(1856-1860). 전쟁 후에 체결된 톈진 조약 제13조는 기독교인에게 선교와 자산 보유 권리를 부여했고, 이로 인해 서양 열강에게 중국 사회에 개입할 또 다른 루트를 제공하게 되었다.
서림교안은 태평천국 기간 중에 발생했으며, 태평천국 역시 광서성에서 봉기했다. 태평천국은 '상제를 숭배하는 가르침'을 믿었는데, 그 가르침은 기독교에서 유래했다. 청나라 관리들은 기독교에 대해 매우 경계하며 엄중히 대비했다. 샤프들랭 신부는 법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 광서성 내륙 깊숙한 서림현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을 모아 포교했다. 지방 관리는 이를 조직적인 반란으로 오해하여 체포했고, 이로 인해 사건이 발생했다.[12]
3. 3. 베이징 조약과 선교의 자유
역사학자 앤서니 클라크는 "샤프들랭의 죽음은 제국주의적 이득을 위해 의심할 여지 없이 이용되었다."라고 평가했다.[6] 프랑스 제국은 선교사들의 죽음을 여러 차례 겪었지만, 이에 대한 군사적 보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국이 승리할 것이 불가피하다는 정치적 상황, 프랑스가 중국에서 자체적인 제국주의적 이득을 얻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프랑스가 다른 곳에서는 선교사의 죽음에 대한 보복을 위한 징벌적 군사 원정을 벌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많은 역사학자들이 샤프들랭의 죽음이 프랑스가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전쟁을 선포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고 결론 내리게 했다.[9][10][11]영국 주재 중국 고등판무관 엘긴 경은 프랑스의 전쟁 참전 이전에 제시된 프랑스 최후통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 그로 [프랑스 대사]는 며칠 전 내가 그를 방문했을 때 ''초안 각서''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매우 길고, 매우 잘 쓰여졌다. 사실, 그는 우리보다 훨씬 더 좋은 싸움의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수사학적으로 훨씬 더 나은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8]
전쟁의 종결과 함께 서명된 중불 베이징 조약의 제6조 중국어 버전은 기독교인에게 중국에서 신앙을 전파할 권리와 프랑스 선교사에게 재산을 소유할 권리를 부여했다.
프랑스의 외교적 압력으로 장명봉은 면직되었다. '마뢰 신부 사건'(혹은 '서림교안'이라고 부른다)은 프랑스에 영국의 1856년부터 1860년까지의 애로우 전쟁(혹은 제2차 아편 전쟁)에 개입할 구실을 제공했다. 전쟁 후에 체결된 톈진 조약 제13조는 기독교인에게 선교와 자산 보유 권리를 부여했고, 이로 인해 서양 열강에게 중국 사회에 개입할 또 다른 루트를 제공하게 되었다.
서림교안은 태평천국 기간 중에 발생했으며, 태평천국 역시 광서성에서 봉기했다. 태평천국은 '상제를 숭배하는 가르침'을 믿었는데, 그 가르침은 기독교에서 유래했다. 청나라 관리들은 기독교에 대해 매우 경계하며 엄중히 대비했다. 샤프들랭 신부는 법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 광서성 내륙 깊숙한 서림현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을 모아 포교했다. 지방 관리는 이를 조직적인 반란으로 오해하여 체포했고, 이로 인해 사건이 발생했다.[12]
4. 시복과 시성
오귀스트 샤프들랭은 1900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복되었고,[2] 2000년 10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7세기에서 20세기 사이에 중국에서 사망한 120명의 기독교 순교자들과 함께 시성되었다.
4. 1. 중국 측의 비판적 시각
2000년 9월 26일부터 중국의 공식 매체인 신화사는 샤프들랭 신부 등이 "중대한 죄"를 범했다고 비난하는 기사를 발표했다. 서림 사람들은 당시 토비 마즈농의 악행과 샤프들랭을 혼동하여 논했으며, 양광총독 예밍천은 이미 이 점을 지적했다.[13] 그러나 신화사의 기사는 여전히 사실을 오도하여 중국 대륙 밖의 중국인 교회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14][15][16] 허베이성, 산시성, 산시성 등지의 성직자 및 신자들은 정치 회의에 참여하여 성인 추대를 비판했으며, 이 자리에서 한 사람이 정부 입장에 반박하며 관원과 논쟁을 벌였다고 전해진다.[17]4. 2. 역사적 해석의 다양성
역사학자 앤서니 클라크는 "샤프들랭의 죽음은 제국주의적 이득을 위해 의심할 여지 없이 이용되었다"라고 주장한다.[6] 프랑스 제국은 선교사들의 죽음을 여러 차례 겪었지만, 이에 대한 군사적 보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국이 승리할 것이 불가피하다는 정치적 상황과 프랑스가 중국에서 자체적인 제국주의적 이득을 얻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프랑스가 다른 곳에서는 선교사의 죽음에 대한 보복을 위한 징벌적 군사 원정을 벌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많은 역사학자들이 샤프들랭의 죽음이 프랑스가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전쟁을 선포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고 결론 내리게 했다.[9][10][11]영국 주재 중국 고등판무관 엘긴 경은 프랑스의 전쟁 참전 이전에 제시된 프랑스 최후통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로 [프랑스 대사]는 며칠 전 내가 그를 방문했을 때 ''초안 각서''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매우 길고, 매우 잘 쓰여졌다. 사실, 그는 우리보다 훨씬 더 좋은 싸움의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수사학적으로 훨씬 더 나은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그로 프랑스 대사는 며칠 전 내가 그를 방문했을 때 '초안 각서'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매우 길고, 매우 잘 쓰여졌다. 사실, 그는 우리보다 훨씬 더 좋은 싸움의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수사학적으로 훨씬 더 나은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영어[8]
앤서니 클라크는 중국의 역사 버전은 "대부분 조작된 것"이며 전혀 근거가 없으며, 샤프들랭이 "음탕한 여자 사냥꾼"이자 스파이라는 생각은 "어떤 역사 기록에서도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6]
2000년9월 26일부터 중국의 공식 매체인 신화사는 신문 기사를 발표하여 샤프들랭 신부 등을 비난하며 그들이 "중대한 죄"를 범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신화사의 신문 기사는 여전히 사실을 오도하여 중국 대륙 밖의 중국인 교회의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켰다.[14][15][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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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eum praises murderers of a Catholic saint, 'enemy of the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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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뉴스
China demonizes French saint in patriotic propaga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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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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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Viceroy Yeh Ming-Ch'en and The Canton Episode (1856-1861): 4. The Canton Epis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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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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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1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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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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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谢铭:《太平天国初期清朝的基督教政策对西林教案发生的影响》《广西社会科学》2005年第11期
[13]
문서
《清末教案》(一),頁167-168:「...当時の両広総督葉名琛は、ある人が馬頼神父と西林県一帯で活躍していた土匪の馬子農を混同して論じていたと既に分かっていた。従って、葉名琛は特別に上奏文の中で2人に触れ、『名は同じではなく、姓もまた一致していない』と間違った見解をただそうと...」
[14]
웹사이트
《我們還以為這類「運動」已成歷史》
http://www.cathli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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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列聖殉道者不應受誣衊》
明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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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웹사이트
《批判宣聖的背後》
http://www.catholic.[...]
[17]
뉴스
《中国天主教徒不滿官方教会組織譴責十月一日宣聖禮》
http://www.ucanews.c[...]
天主教亞洲通訊社
2000-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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