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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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는 프랑스 출신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로, 조선의 제2대 사도 대목구장이자 캡사 명목 주교였다. 1819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1836년 조선 사도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한국에 입국했다. 기해박해 당시 체포되어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했으며, 1925년 시복,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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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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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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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접두사 | 성인 |
이름 | 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 |
존칭 접미사 | M.E.P. |
한국어 이름 | 범세형 라우렌시오 |
한글 | 범세형 라우렌시오 |
한자 | 范世亨 라우렌시오 |
로마자 표기 | Beom Sehyeong Raurensio |
출생일 | 1796년 3월 23일 |
출생지 | 마리냐네, 부슈뒤론, 프랑스 |
사망일 | 1839년 9월 21일 |
사망지 | 조선 새남터 |
기념일 | 9월 21일 |
2023년 한국 순교자 대축일 | 9월 20일 (한국 순교자들과 함께) |
숭경 대상 | 로마 가톨릭교회 (한국과 파리 외방전교회) |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
시복 장소 | 바티칸 시국, |
시복자 | 교황 비오 11세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 장소 | 서울, 대한민국, |
시성자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주요 성지 | 새남터 기념 성당, 서울, 대한민국 |
직업 | |
직함 | 프랑스 선교사, 주교 및 순교자 |
한국어 이름 정보 | |
한국어 이름 | 한국어 이름 |
한글 | 범세형 |
한자 | 范世亨 |
로마자 표기 | Beom Sehyeong |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 Pŏm Sehyŏng |
서품 정보 | |
사제 서품 | 알 수 없음 |
주교 서품 | 알 수 없음 |
위치 정보 |
2. 생애
1836년 4월 26일, 앵베르는 조선 사도 대목구장 및 캡사의 명목 주교로 임명되었다. 1837년 5월 14일 주교 서품을 받고[3] 그 해에 만주에서 조선으로 비밀리에 입국하였다. 당시 조선은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진행 중이었다.
1839년 8월 10일, 비밀리에 선교 활동을 하던 앵베르는 배신당했다. 체포되어 처형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미사를 집전하고 자신을 체포하러 온 사람들에게 항복했다. 앵베르는 서울로 압송되어 외국인 선교사들의 위치를 밝히라는 고문을 받았다. 그는 다른 선교사들이 자수하면 개종자들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고, 동료 선교사인 피에르 모방과 자크 샤스탕에게도 조선 당국에 항복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앵베르, 모방, 샤스탕 세 명은 함께 투옥되어 심문을 받았다. 고문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굴복하지 않자,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다. 이들의 시신은 며칠 동안 공개된 채로 방치되었다가 노고산에 매장되었다. (기해박해)
세 명은 1925년 시복된 79명의 한국 순교자 중 한 명이었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에서 시성된 103명의 한국 순교자 중 한 명이었다.
2. 1. 출생과 성장

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는 1796년 3월 23일 프랑스 남부 마리냐느의 칼라스(Callas) 마을에서 태어났다.[2]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신앙심이 깊었으며, 엑상프로방스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학업 중에는 묵주를 만들어 팔아 생활비를 충당하기도 했다.[2]
2. 2. 사제 서품과 해외 선교
1818년 10월 8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2] 1819년 3월 5일 파리 대교구에 편입되었으며, 그해 12월 18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2] 1820년 3월 20일, 중국 선교를 위해 프랑스를 떠났다.1821년 4월부터 1822년 1월까지 말라야 페낭의 칼리지 제너럴(College General)에서 강의를 맡았다. 1821년 12월 11일에는 싱가포르에 일주일간 머물면서 싱가포르에서 천주교 미사를 올린 최초의 천주교 성직자가 되었다.
1822년 마카오로 향했으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통킹에서 2년간 머물렀다. 이후 중국 쓰촨성에서 12년간 지내면서 신학교를 설립했다.
2. 3. 동남아시아에서의 활동
1819년 12월 18일 사제로 서품된 앵베르는 1820년 중국 선교사로 파견되기 전, 말레이시아 페낭의 콜레주 제네랄(College General)에서 1821년 4월부터 1822년 1월까지 강의를 맡았다.[2]1821년 시암 대목구장이었던 에스프리 마리 조제프 플로랑 주교의 요청으로 앵베르는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플로랑 주교는 싱가포르에 천주교회의 선교 거점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앵베르는 1821년 12월 11일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일주일간 머물며 싱가포르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미사를 집전한 사제가 되었다.[2]
2. 4. 중국 선교
1822년 앵베르는 마카오로 향했으나, 바로 그곳에 도착할 수 없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통킹에서 2년간 머물렀다. 이후 중국에 도착하여 쓰촨성에서 12년간 지내면서 신학교를 설립했다.[2]3. 조선 선교
1818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공부한 앵베르는 1819년 12월 18일 사제 서품을 받고, 1820년 중국으로 파견되었다. 1821년 4월부터 1822년 1월까지 말라야 페낭의 대신학교에서 가르쳤다.
1821년, 샴의 사도좌 대리는 앵베르에게 싱가포르를 방문하여 선교 가능성을 확인하도록 요청했다. 앵베르는 12월 11일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일주일간 머물며 미사를 집전했는데, 이는 싱가포르에서 최초로 미사를 집전한 사제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1822년, 마카오로 가려 했으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통킹에서 2년을 보냈다. 이후 중국 쓰촨 성에서 12년간 머물며 바오싱 현(Moupin)에 신학교를 설립했다.
1836년 4월 26일, 조선 사도좌 대리 및 캡사(Capsa) 명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1837년 5월 14일 주교 서품을 받았다. 그해 만주를 통해 조선으로 잠입했다. 당시 조선은 기독교 박해 시기였다.
1839년 8월 10일, 앵베르는 배신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고문을 받았고, 다른 선교사들의 안전을 위해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도 자수를 권하는 편지를 썼다.
세 명은 함께 투옥되어 심문을 받았고,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다. (기해박해) 그들의 시신은 며칠 동안 방치된 후 노고산에 매장되었다.
3. 1. 조선교구장 임명
1836년 4월 26일, 앵베르는 천주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및 카프사(Capsa) 명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는 천주교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을 앞두고 선종한 후였다. 1837년 5월 14일 주교 서품을 받고, 만주를 통해 조선으로 잠입했다. 그는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주교로, 조선대목구 설정 6년 만이며, 조선 천주교 창설 53년 만의 일이었다.[2]3. 2. 사목 활동과 한국인 사제 양성 노력
앵베르는 조선에서 피에르 모방 신부와 자크 샤스탕 신부를 만나 함께 사목 활동을 펼쳤다. 1836년 모방 신부 부임 당시 6천 명이었던 조선의 천주교 신자 수는 1839년 9천 명으로 증가했다.[2]앵베르 주교는 한국인 사제 양성을 위해 정하상, 이문우 등 모범적인 평신도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쳤으나, 1839년 기해박해로 인해 중단되었다.[2]
3. 3. 기해박해와 순교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앵베르 주교는 김여상(김순성)의 밀고로 1839년 8월 10일 체포되었다.[4] 앵베르 주교는 경기도 수원에 있는 손경서 안드레아의 집에 숨어 있었다. 김여상은 관리들과 짜고 포도대를 꾸려놓고는 한 순진한 천주교인 농부를 현혹해서, "관리들이 천주교를 허락하여 고위 관리들까지도 입교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한양으로 가서 그분들을 개종시켜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 농부는 교우들과 함께 포졸들 보다 먼저 앵베르 주교를 찾아가서 김여상에게 들은 이야기를 했다. 사목 경험이 많은 앵베르 주교는 손경서가 하는 말이 잘못된 정보인 줄을 알면서도 교우들의 안전을 위해 자수를 결심했다. [4] 또한 그는 체포당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시간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미사를 올린 뒤 그를 기다리던 관리들에게 가서 자수했다. 그는 한양으로 보내져 해외 선교의 거처를 알기 위해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4] 다른 선교사들과 신자들의 안전을 위해 자수하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도 자수를 권고하는 서한을 보냈다.[4]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좋은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프랑스어
세 명의 성직자는 함께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그들이 개종시킨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과 행방에 대해 3일 동안 심문을 받았다. 계속된 고문에도 자백하지 않은 그들은 다른 감옥에 수감된 뒤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참수당했다. (기해박해)[4]
앵베르 주교의 유해는 길에 방치되어 있었다가, 약 20일이 지나서야 서강대학교 노고산 성지에 묻혔다. 그러다가 1843년에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과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에 걸쳐 위치한 삼성산으로 이장되었으며, 1901년 지금의 명동 대성당의 지하실에 있는 그로토로 이장되었다.[4]일부 유해는 절두산순교성지에도 모셔져 있으며 최초의 매장지였던 삼성산 성지에도 세분의 성인을 모시고 1989년 축성식을 가졌다. 성지 본당인 삼성산 성당에 의해 성지가 관리되고 있다.[4]
4. 시복과 시성
앵베르 주교와 모방 베드로 신부,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다.[5][6] 이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특별시 여의도를 방문하여 집전한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5. 유산과 평가
앵베르 주교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회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신앙의 굳건함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여겨진다. 특히, 한국인 사제 양성을 위한 그의 노력은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가 뿌리내리는 데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 앵베르 주교는 순교자들의 전기를 기록한 《기해일기》를 저술했으며, 이 책은 1858년 파리시에서 간행되었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이전에는 6월 10일)이다.
앵베르 주교의 유해는 처음에 노고산 성지에 묻혔다가 1843년 삼성산 성지로 이장되었으며, 1901년 명동 대성당 지하실의 그로토로 옮겨졌다.[4] 절두산 순교성지와 삼성산 성지에도 앵베르 주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Roman Martyrology
https://www.vatican.[...]
The Vatican
[2]
웹사이트
Laurent Joseph Marius Imbert
https://web.archive.[...]
2012-12-30
[3]
웹사이트
Bishop St. Laurent-Joseph-Marius Imbert, M.E.P.
http://www.catholic-[...]
2012-12-30
[4]
웹사이트
가톨릭 사전
http://info.catholic[...]
[5]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4-10-26
[6]
뉴스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https://web.archive.[...]
평화방송
201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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