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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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는 프랑스 출신으로, 한국 천주교의 선교사이자 제5대 조선교구장이었다. 1818년 프랑스 아미앵에서 태어나 사제 서품을 받은 후, 1844년 조선에 입국하여 한국어에 능통하며 문서 선교에 힘썼다. 1855년 악카의 명의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 그는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고 알리는 데 기여했으며, 1984년 성 김대건 신부 등과 함께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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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
| 로마자 표기 | Marie-Nicolas-Antoine Daveluy |
| 한국어 표기 | 안敦伊 (안토니) |
| 출생일 | 1818년 3월 16일 |
| 사망일 | 1866년 3월 30일 (47세) |
| 출생지 | 프랑스 아미앵 |
| 사망지 | 조선 충청도 보령 갈매못 |
| 직업 | 조선교구장, 순교자 |
| 축일 | 3월 30일 9월 20일 (다른 한국 순교자들과 함께) |
| 교파 | 로마 가톨릭 교회 |
| 시복일 | 1968년 10월 6일 |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 시성 장소 | 서울, 대한민국 |
| 시성자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 매장지 | 절두산 순교성지 |
| 주요 성지 | 갈매못 순교 성지, 보령, 대한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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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정보 | |
| 존경 받는 곳 | 로마 가톨릭교회 |
| 칭호 | 순교자 |
| 참고 자료 | |
2. 생애

앙투안 다블뤼는 1818년 3월 16일 프랑스 아미앵(Amiens)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그의 형제 두 명은 사제가 되었다. 1843년 10월 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합류한 그는 1844년 2월 6일 동아시아로 떠났다.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새로 임명된 한국의 사도구장 페레올 주교를 만나 그와 함께 한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김대건 안드레아와 합류하여 상하이로 이동한 이들은, 1845년 8월 17일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김대건 신부의 사제 서품식을 거행했다. 이후 세 명의 사제는 배를 타고 한국으로 향하여 10월에 충청도에 도착했다.[2] 다블뤼 신부는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여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고, 한불 사전과 한국 가톨릭 교회와 그 역사에 관한 책들을 저술했다. 황석두의 도움을 받아 「짧은 반성 기록」과 「하느님의 삶에서의 첫 여정」을 목판 인쇄로 출판하기도 했다.[3]
1855년 11월 13일, 교황 비오 9세는 그를 악카의 명의 주교이자 베르뇌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했다.[4] 1857년 3월 25일에는 베르뇌 주교에게 주교 서품을 받았다.[5]
조선의 기독교인 탄압 중에 베르뇌 주교가 처형되자, 다블뤼 주교는 1866년 3월 8일 사도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곧 3월 11일에 체포되어 투옥과 고문을 받았지만, 그는 굳건히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지켰다.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성금요일인 3월 30일에 처형될 것을 요청했고, 현재 보령 근처 갈매못(갈매못)에서 다른 프랑스인 사제들과 평신도 교리교사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다블뤼, 김대건, 베르뇌 주교, 그리고 다른 96명의 한국 순교자들은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었다. 베르뇌, 다블뤼 그리고 다른 한국 가톨릭 선교사들의 죽음은 프랑스의 한국 원정으로 이어졌고, 이는 한국의 쇄국 정책을 강화시켰다.
2. 1. 프랑스에서의 초기 생애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는 1818년 3월 16일 프랑스 아미앵(Amiens)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공장주이자 시 의회 의원, 정부 관리였다. 그의 가족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그의 두 형제도 사제가 되었다. 다블뤼는 농민의 아들인 모방 신부처럼 대다수의 가톨릭 선교사들이 프롤레타리아 출신이었던 것[8]과 달리 부르주아지 계급 출신이었다.7세에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1827년 예수회 학교에 다녔다. 1834년 10월, 사제가 되기를 원하여 고향 인근의 생 쉴피스(St. Sulpice)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836년 파리의 생 쉴피스 신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였고, 1841년 본당 사제로 임명되었다. 1843년 10월까지 본당 사제로 사목한 뒤,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했다.
1834년 10월 이시 레 뮬리노(Issy-les-Moulineaux)의 생 술피스 신학교에 입학하여 1841년 12월 18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의 첫 임무는 로이의 보좌 신부였다.
2. 2. 조선 입국 및 사목 활동
1844년 마카오에 도착한 다블뤼는 천주교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요청으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결심한다. 이들은 상하이에서 라파엘 호라는 작은 나무배를 타고 긴 항해 끝에 1845년 10월 충청남도 강경에 도착하여 조선에서의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2]다블뤼는 1846년부터 조선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여 2년 만에 17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라틴어를 가르치고, 한국어-프랑스어 사전과 여러 천주교 서적을 집필하는 등 (문서선교)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조선 순교사를 집필하고 조선 천주교 역사를 연구하였다.[2] 그는 초기 선교 사제 중 가장 학식이 풍부했다.[2] 황석두의 도움을 받아 「짧은 반성 기록」과 「하느님의 삶에서의 첫 여정」을 목판 인쇄로 출판했다.[3]
1855년 11월 13일, 교황 비오 9세는 다블뤼를 악카의 명의주교이자 조선교구 부교구장 주교로 임명하였다.[4] 1857년 3월 25일에는 베르뇌 주교에게 주교 서품을 받았다.[5]
2. 3. 병인박해와 순교
1866년 병인박해 때, 12월 11일 다블뤼 주교는 그를 돕던 황석두 루카와 함께 체포되었다.[2] 12월 14일,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는 한양의 감옥으로 압송되어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고종이 병을 앓고 있어 수도에서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한양에서 100km 떨어진 갈매못에서 사형을 받게 되었다.[2]조선 정부의 기독교인 탄압 중에 베르뇌 주교가 처형되자, 다블뤼 주교는 1866년 3월 8일 제5대 조선교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곧 3월 11일 체포되었다. 투옥과 고문에도 불구하고, 다블뤼 주교는 굳건히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지켰다.[2]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3월 30일 성금요일에 처형될 것을 요청했다. 그는 현재 보령 근처 갈매못(갈매못)의 한국 해군 기지에서 프랑스인 사제인 피에르 오메트르와 마르탱 뤼크 위앵, 그리고 평신도 교리교사인 루카스 황석두(다블뤼 주교의 개인 비서)와 요셉 장주기와 함께 참수되었다.[2]
3. 유해 이장 및 시성
다블뤼 주교는 순교 후 가톨릭 신자들에 의해 홍산 석죽골(현재 서짓골 성지)에 안장되었다.[12] 그의 유해는 여러 번 이장되었는데, 1882년 나가사키로 옮겨졌다가 1894년 5월 22일 용산신학교로, 1900년 9월 10일에는 명동대성당으로 옮겨졌다. 현재 유해는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치되어 있다.
1968년 10월 6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고,[13]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4. 한국 문화 존중과 업적
다블뤼 주교는 한국어에 능통했으며,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라파엘 호를 타고 입국하여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할 때까지 21년 동안 조선에서 생활하며 조선을 사랑했다.[9] 그는 판소리와 공동체가 서로 돕고 사는 한민족의 전통을 존중했다.[10]
다블뤼 주교는 조선의 여성들이 신던 종이신발,[9] 부채, 산삼 등을 프랑스에 보내 한민족의 전통을 널리 알렸다.[10] 그가 남긴 기록들은 샤를 달레 신부가 한국 천주교회사를 저술할 때 중요한 자료로 사용될 정도로 가치가 있었다.[11] 다블뤼 주교는 조선 사람들이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 문화에 감동하여 "이 나라에는 이상한 풍속이 있다. 밥을 나누어 먹는다."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11]
다블뤼 신부는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면서 한국어에 능통해졌으며, 한불 사전과 한국 천주교회와 그 역사에 관한 책들을 저술했다.[2] 황석두의 도움을 받아 「짧은 반성 기록」과 「하느님의 삶에서의 첫 여정」을 목판 인쇄로 출판하기도 했다.[3] 또한 조선 순교사를 집필하고 조선 천주교의 역사를 연구하는 업적을 남겼다.
5. 영향
베르뇌 주교, 다블뤼 주교 및 다른 한국 가톨릭 선교사들의 죽음은 프랑스의 한국 원정으로 이어졌고, 이는 조선의 쇄국 정책을 강화시켰다.[2]
참조
[1]
웹사이트
Roman Martyrology
https://www.vatican.[...]
The Vatican
[2]
서적
Korea: A Historical and Cultural Dictionar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Durham
[3]
서적
Christianity in Kore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4]
서적
(Title not specified)
[5]
서적
(Title not specified)
[6]
웹사이트
Martyrs of Korea
http://newsaints.fai[...]
[7]
웹사이트
절두산 순교성지 성인유해실
http://www.jeoldusan[...]
[8]
웹인용
GoodNews 가톨릭정보
http://maria.catholi[...]
2018-01-22
[9]
웹인용
한옷과 전통문화가 숨쉬는 공간
http://blog.daum.net[...]
2018-01-13
[10]
뉴스
[내가 만든 아까운 책]150년 전 편지의 충청도∼파리 여정
http://weekly.khan.c[...]
경향신문
2013-07-15
[11]
웹인용
경향신문
http://news.khan.co.[...]
khan
2018-01-13
[12]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5-02-01
[13]
뉴스
[교황 방한] 1925년·1968년·2014년…로마에서 서울까지 3번의 시복식
http://news1.kr/arti[...]
뉴스1
201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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