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오성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성술은 1884년 전라남도 광산에서 태어난 의병으로, 최익현의 영향을 받아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 1907년 가산을 정리해 의병 기금을 마련하고 김태원과 연합하여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했다. 일본군 지휘관 요시다를 사살하는 등 활약했으나, 기삼연과 김태원의 사망으로 의진을 수습했다. 군자금 마련을 위해 일본인 농장 지배인, 밀정, 일본인 지주 등을 공격하며 활동하다가 1909년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생애 및 의병 활동

오성술은 1907년 가산을 정리해 의병 기금을 마련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김태원의 제안으로 두 의병 부대를 합쳤으며,[4][1] 1907년 9월 기삼연을 중심으로 한 호남 의병 연합 부대인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했다.[1]

1908년 1월 창평 무동촌 전투에서 일본군 지휘관 요시다를 사살했으나,[2] 기삼연김태원이 순국하면서 전해산과 함께 의병 부대를 수습했다.[1][2]

이후 군자금 모금을 위해 일본인 농장과 밀정을 습격하여 재산을 탈취하고 무기를 획득했다.[4][1] 1909년 1월 30일에는 광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지주 모리의 집을 습격하여 2500JPY 상당의 물품을 탈취하였다.[4]

1909년 8월, 영산포 헌병대 요시무라 중위가 이끌던 ‘폭도토벌대’의 추격을 받다가 교전 끝에 체포되었다.[1]

2. 1. 초기 생애

1884년 5월 15일 전라남도 광산군 삼도면 송산리 죽산마을에서 오영선(吳榮善)과 나주 임(林)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하였고, 지역 인사들의 추천으로 1905년 7월 21세의 나이에 종9품 충의참봉에 제수되었다.[1]

1906년 1월 면암 최익현의 시국 강연을 듣고 최익현을 만나 의병을 일으킬 뜻을 밝혔다. 최익현은 “나는 이미 늙은 몸, 그대와 같은 열혈 청년들이 나서겠다니 마음 든든하네. 천하대세와 국세민계(國勢民計)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일사보국(一死報國)할 기회가 온 것 아니겠는가. 한시도 지체하지 말기 바란다.”라며 격려하였다.[1]

2. 2. 의병 투쟁

1906년 1월 면암 최익현의 시국 강연을 듣고 최익현을 만나 의병을 일으킬 의사를 밝혔다. 최익현은 “나는 이미 늙은 몸, 그대와 같은 열혈 청년들이 나서겠다니 마음 든든하네. 천하대세와 국세민계(國勢民計)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일사보국(一死報國)할 기회가 온 것 아니겠는가. 한시도 지체하지 말기 바란다.”고 격려하였다.[1]

1907년 가산을 정리하고 의병기금을 마련하여 거병하였다. 의병장 김태원이 합진을 제의해 와 두 진영을 합치기로 결의하였다.[4][1] 1907년 9월 기삼연을 창의대장으로 하여 편성된 호남 의병 연합부대인 호남창의회맹소에도 참여하였다.[1] 호남창의회맹소를 중심으로 한 의병항쟁이 격화하자 일본 군경은 1908년 초부터 대대적인 탄압 작전을 감행하였다.[1]

1908년 1월에 일본군 수비대 지휘관 요시다를 창평 무동촌 전투에서 사살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2] 2월 기삼연이 순창에서 체포되어 광주에서 총살되었고, 4월에는 김태원이 광주 어등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1] 오성술은 전부터 함께 전투에 참여한 바 있던 전해산과 더불어 의병 부대를 수습하고, 일부의 잔병은 조경환이 인솔하였다.[2]

오성술은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1908년 1월 10일 광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농장 지배인 사이토(齊藤)의 집을 습격하여 일본인 3명을 살해하고, 소총·일본도 등 무기를 탈취하였다.[4] 1908년 12월 나주에서 밀정 황도현(黃道玄)의 재산을 탈취하고 그를 살해하였다.[4][1] 1909년 1월 30일에는 광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지주 모리(森十內)의 집을 습격하여 2500JPY 상당의 물품을 탈취하였다.[4]

1909년 8월 영산포 헌병대 요시무라 중위가 이끌던 ‘폭도토벌대’의 추격을 받다가 교전 끝에 결국 체포되었다.[1]

2. 3. 체포 및 순국

1909년 8월 영산포 헌병대 요시무라 중위가 이끌던 ‘폭도토벌대’의 추격을 받다가 교전 끝에 체포되었다.[1] 오성술은 16세에 금성 나씨와 결혼하여 26세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이 태어난 지 석 달 뒤에 일본군 헌병대에 붙들린 것이었다.[3]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이 언도되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어 대구감옥에서 26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4]

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가 오성술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4]

참조

[1] 웹인용 오성술 https://terms.naver.[...] 국가보훈처 2020-02-14
[2] 간행물 오성술 https://e-gonghun.mp[...] 공훈전자사료관 2020-02-14
[3] 뉴스 한말 의병장들은 어떻게 대를 이었을까 http://www.ohmynews.[...] 《OhmyNews》 2020-02-14
[4] 백과사전 오성술 http://encykorea.aks[...] 한국학중앙연구원 2020-02-1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