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원 (18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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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태원(1870년)은 나주 출신의 의병으로, 별명은 김준 또는 김참봉이었다. 순릉참봉을 지냈으며,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했으나 실망하여 귀향했다. 이후 고을 아전들의 횡포를 고발하여 해결하고 칭송을 받았다. 1906년 동생 김율과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했으며,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1908년 요시다 가쓰사부로를 사살하고, 기삼연의 죽음 이후 호남의소로 부대 이름을 바꾸어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같은 해 장성 전투와 광주 어등산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태원 (18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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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전라남도 나주 출신으로, 별명은 김준(準) 또는 김참봉이었다. 의병장 김율의 형이며, 조선 말기에 순릉참봉(順陵參奉) 벼슬을 지냈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운동 방향에 실망하여 잠시 수원에 머물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향 후에는 지역 아전들의 부당 행위를 바로잡아 주민들의 신망을 얻었다.

1906년, 동생 김율과 함께 호남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고창, 영광 등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했으며, 나주, 함평 등지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기삼연 순국 후에도 의병 활동을 지속하다가 1908년 5월 광주 어등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1. 동학 농민 운동 참여와 좌절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부 동학군의 행태에 실망하여 운동에서 벗어나 잠시 수원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는 지역 아전들의 부당한 행위를 바로잡기 위해 관찰사에게 직접 호소하여 문제를 해결하였고, 이로 인해 주민들의 신망을 얻었다.

2.2. 의병 투쟁

1906년 동생 김율과 함께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고창, 영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듬해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가담하여 선봉장이 되어 나주, 함평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2.2.1. 호남창의회맹소 활동

1907년, 김태원은 기삼연이 이끄는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가담하여 선봉장이 되어 나주, 함평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1월에는 동생 김율의 부대와 합류하여 동복(同福) 무동산(舞童山)에서 일본군 吉田勝三郎일본어가 이끄는 기병 부대 150명과 격전을 벌여 요시다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담양 추월산성(秋月山城)에서 총상을 치료하던 기삼연이 일본군에게 붙잡혀 광주에서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김태원은 부대 이름을 호남의소(湖南義所)로 바꾸었다. 이후 친일 단체인 일진회 회원, 밀정, 자율단원 등을 처단하며 항일 투쟁을 이어갔고, 납세 거부 투쟁을 유도하며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도 저항했다.

2.2.2. 요시다 가쓰사부로 처단

1908년 1월, 김태원은 동생 김율과 힘을 합쳐 동복 무동산(舞童山)에서 일본군 기병대와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김태원은 吉田勝三郎일본어가 이끄는 기병 150명과 맞서 싸워, 적장 요시다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2.2.3. 호남의소 결성과 항일 투쟁

1908년, 함께 의병 활동을 하던 기삼연이 담양 추월산성에서 총상 치료 중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광주에서 총살당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이에 김태원은 자신이 이끌던 의병 부대의 이름을 '호남의소'로 바꾸고 더욱 적극적인 항일 투쟁에 나섰다. 그는 일진회 회원, 밀정, 자율단원 등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 협력하는 세력을 처단하는 데 앞장섰으며, 민중들에게 일제의 부당한 세금 요구에 저항하는 납세 거부 투쟁을 이끌었다.

1908년 5월, 장성 토물 뒷산에 성을 쌓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이후 광주 어등산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하며 생을 마감했다.

2.3. 최후

1908년 5월, 장성 토물(土泉) 뒷산에 성을 쌓고 전투를 벌였으며, 이후 광주 어등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