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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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월 봉기는 1863년 1월 폴란드에서 발발한 러시아 제국에 대한 봉기이다. 크림 전쟁 이후 러시아 제국의 약화와 폴란드 사회의 동요 속에서, 1830년 이전 헌법적 지위 회복을 주장하는 보수 세력과 농민, 노동자를 아우르는 민주 세력 간의 갈등이 봉기의 배경이 되었다. 봉기는 폴란드 임시정부 수립과 농민 토지 소유 선언으로 시작되었으나, 국제적인 지원 부족, 내부 분열, 러시아군의 강경 진압으로 이듬해 실패로 끝났다. 봉기 이후 러시아는 가혹한 탄압과 러시아화 정책을 시행했으며, 1월 봉기는 폴란드 민족주의 운동과 문화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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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봉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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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 1월 봉기 |
일부 | 폴란드-러시아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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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863년 1월 22일 – 1864년 6월 18일 (마지막 반군 스타니스와프 브조스카는 1865년까지 전투를 이어감) |
장소 | 폴란드,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라트비아, 우크라이나,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 |
원인 | 차르 군대에 강제 징집 임박 |
결과 | 러시아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 러시아 제국' '[[File:Lesser Coat of Arms of Russian Empire.svg|15px]] 바르샤바' '[[File:Lesser Coat of Arms of Russian Empire.svg|15px]] 빌나' '[[File:Lesser Coat of Arms of Russian Empire.svg|15px]] 키예프' 지원 세력: '' |
교전국 2 | ' 폴란드 국민 정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분할 이전 영토 출신 반군' ' 가리발디 군단' '해외 자원 봉사자:' ' 프랑스 자원 봉사자' ' 영국 자원 봉사자' ' 헝가리 자원 봉사자' 지원 세력: ' 토지와 자유' ' 지알린스키 위원회' |
지휘관 | |
지휘관 1 | ' 알렉산드르 2세' ' 프리드리히 폰 베르크' ' 미하일 무라비요프' |
지휘관 2 | ' 스테판 보브로프스키 ' ' 로무알트 트라우구트 ' ' 콘스탄티 칼리노프스키' ' 루드비크 미에로스와프스키' ' 마리안 랑기에비치' |
병력 | |
병력 1 | 1864년 6월까지 최소 220,000명 |
병력 2 | 봉기 기간 동안 약 200,000명. 가리발디 군단 약 20명 |
사상자 | |
사상자 1 | 러시아 추정: 사망, 부상, 실종 4,500명 폴란드 추정: 사망, 부상, 실종 10,000명 |
사상자 2 | 폴란드 추정: 10,000명 ~ 20,000명 러시아 추정: 30,000명 (사망 및 부상 22,000명, 포로 7,000명) |
2. 역사적 배경
1861년 계엄령 선포 이후, 폴란드 민중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비밀리에 조직된 저항 세력은 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바르샤바, 빌뉴스, 파리, 런던 등지에서 모임을 갖고 봉기 계획을 구체화했다. 이 과정에서 폴란드 민족주의 운동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뉘었다.
- '''백색당''': 안제이 자모이스키를 중심으로 지주, 지식인 등 자유주의적 보수주의 세력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1830년 이전의 헌법적 지위로 복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 '''적색당''': 농민, 노동자, 일부 성직자 등 민주주의적 세력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러시아의 지배를 타도하고 농민의 완전한 해방을 이루고자 했다.
이러한 가운데, 1861년 10월에는 도시 "운동 위원회"(Komitet Ruchu Miejski)가, 1862년 6월에는 중앙 국가 위원회(CNC)가 설립되었다. 스테판 보브로프스키, 야로스와프 덤브로프스키, 지그문트 파들레프스키, 아가톤 길레르, 브로니스와프 슈바르체 등이 중앙 국가 위원회의 지도부를 구성하여 비밀리에 폴란드 국가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을 이끌었다. 중앙 국가 위원회는 1863년 봄에 봉기를 일으킬 계획이었으나, 알렉산데르 비엘로폴스키가 1월 중순에 러시아군 징집을 시작하면서 1863년 1월 22일부터 23일 밤에 봉기를 시작하게 되었다.[4]
2. 1. 러시아 제국의 약화와 폴란드 사회의 동요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이 패배하면서 경제적, 정치적으로 약화되자, 알렉산드르 2세는 1856년 "어떤 꿈도 잊어라"라며 더 이상의 양보를 경고했다. 그러나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영토의 사회 정세는 불안정해졌다.[4]폴란드 왕국 주민들 사이에는 두 가지 주요 사상이 있었다. 안제이 자모이스키를 중심으로 한 지주 계급과 지식인 계층의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적 애국심은 1830년 이전의 헌법적 지위로 질서있게 복귀하기를 희망했으며, 이들은 ''백색''으로 특징지어졌다. 다른 경향은 ''적색''으로 특징지어지는 민주 운동으로, 농민, 노동자, 일부 성직자를 통합했다. 두 사상 모두에게 핵심적인 딜레마는 ''농민 문제''였다. 지주들은 보상을 받는 대신 농노 해방을 선호했지만, 민주 운동은 러시아 지배의 타도가 농민의 무조건적인 해방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4]
주세페 가리발디, 칼 마르크스, 미하일 바쿠닌 등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소작농과 학생들은 조직적인 시위 행동을 시작했다. 1861년 빌뉴스에서만 116차례의 데모 행진이 있었다. 민주주의자들이 1860년에 최초의 종교적 애국적 시위를 조직한 것처럼, 교육받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비밀 저항 단체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861년 2월 그로후프 전투 기념일에 러시아군이 왕궁 광장에서 시위대를 공격하면서 5명이 사망, 바르샤바에서 첫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자발적인 불안의 확산을 우려하여 통치 체제 변경 청원을 마지못해 수락했다. 결국 알렉산데르 비엘로폴스키를 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종교 의식과 공교육 조사 위원회를 이끌게 하고, 주 의회와 도시 및 자치에 대한 지방 자치 설립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양보는 추가적인 시위를 막지 못했다. 4월 8일 러시아군이 발포하여 200명이 사망하고 500명이 부상당했다. 바르샤바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바르샤바와 빌뉴스의 조직자들을 러시아 깊숙한 곳으로 추방하는 등 잔혹한 탄압 조치가 취해졌다.[8]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임명한 폴란드 부왕 카를 람베르트 장군은 잇따른 애국자들의 폭동에 1861년 10월 14일 폴란드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집회는 금지되었고 일부 민중 지도자들의 행동이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그해 가을 러시아는 빌뉴스 주, 코브노 주, 그로트노 주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8]
이러한 사건들은 저항의 통합을 가속화시켰다. 봉기의 미래 지도자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바르샤바, 빌뉴스, 파리, 런던에서 비밀리에 모였다. 그러한 협의에서 두 개의 기구가 등장했다. 1861년 10월 도시 "운동 위원회"(Komitet Ruchu Miejski)가 설립되었고, 1862년 6월 중앙 국가 위원회(''CNC'')가 설립되었다. 스테판 보브로프스키, 야로스와프 덤브로프스키, 지그문트 파들레프스키, 아가톤 길레르, 브로니스와프 슈바르체가 지도부에 포함되었다.
2. 2. 폴란드 민족주의 운동의 성장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이 패배하고 경제적, 정치적으로 약화되자,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영토의 사회는 불안정한 정세에 놓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1856년 "어떤 꿈도 잊어라"라며 추가적인 양보는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폴란드 왕국 주민들 사이에서는 두 가지 주요 사상이 존재했다.- '''백색파(Biali)''' : 안제이 자모이스키를 중심으로, 1830년 이전의 헌법적 지위로 질서있게 복귀하기를 희망하는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적 애국심을 가진 보통 지주 계급과 지식인 계층이었다.
- '''적색파(Czerwoni)''' : 농민, 노동자 및 일부 성직자를 통합한 민주 운동 세력이었다.
두 세력 모두에게 '농민 문제'는 핵심적인 딜레마였다. 지주들은 보상을 받는 대신 농노 해방을 선호했지만, 민주 운동 세력은 러시아의 지배를 타도하는 것이 농민의 무조건적인 해방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보았다.[4]
주세페 가리발디, 카를 마르크스, 미하일 바쿠닌 등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소작농과 학생들은 조직적인 시위 행동을 시작했다. 1861년에는 빌뉴스에서만 116차례의 데모 행진이 있었다. 애국자들에 의한 폭동이 잇달아 일어난 후, 알렉산드르 2세가 임명한 폴란드 부왕 카를 람베르트 장군은 1861년 10월 14일 폴란드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집회가 금지되고 일부 민중 지도자들의 행동이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1861년 2월 그로후프 전투 기념일에 러시아군이 왕궁 광장에서 시위대를 공격하여 5명이 사망했다. 자발적인 불안의 확산을 우려한 알렉산드르 2세는 통치 체제 변경 청원을 수락하고, 알렉산데르 비엘로폴스키를 임명하여 종교 의식과 공교육 조사 위원회를 이끌게 했다. 또한 주 의회와 도시 및 지방 자치를 위한 자치 설립을 발표했지만, 이러한 양보는 추가적인 시위를 막지 못했다. 4월 8일 러시아군의 발포로 200명이 사망하고 500명이 부상당했으며, 바르샤바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바르샤바와 빌뉴스의 조직자들을 러시아 깊숙한 곳으로 추방하는 등 잔혹한 탄압 조치가 취해졌다. 그 해 가을 러시아는 빌뉴스 주, 코브노 주 및 그로트노 주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8]
이러한 사건들은 저항의 더 빠른 통합으로 이어졌다. 봉기의 미래 지도자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바르샤바, 빌뉴스, 파리, 런던에서 비밀리에 모였다. 1861년 10월 도시 "운동 위원회"(Komitet Ruchu Miejski)가 설립되었고, 1862년 6월에는 중앙 국가 위원회(''CNC'')가 설립되었다. 스테판 보브로프스키, 야로스와프 덤브로프스키, 지그문트 파들레프스키, 아가톤 길레르, 브로니스와프 슈바르체가 지도부에 포함되었다. 이 기구는 새로운 비밀 폴란드 국가가 될 새로운 국가 구조의 창설을 지휘했다.
2. 3. 봉기 직전의 상황
러시아 제국이 크림 전쟁에서 패배하여 경제적, 정치적으로 약화되자,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영토의 사회 정세는 불안정해졌다. 주세페 가리발디, 칼 마르크스, 미하일 바쿠닌 등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소작농과 학생들은 조직적인 시위 행동을 시작했다. 1861년에는 빌뉴스에서만 116차례의 데모 행진이 있었다. 애국자들에 의한 폭동이 잇달아 일어난 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임명한 폴란드 부왕 카를 람베르트 장군은 1861년 10월 14일 폴란드에 계엄령을 선포했다.[8] 집회가 금지되고 일부 민중 지도자들의 행동이 불법으로 규정되었다.봉기의 지도자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바르샤바, 빌뉴스, 파리, 런던에 은밀히 모여들었다. 이들이 서로 접촉하고 회합을 거듭하면서, '''적색당'''과 '''백색당'''이라는 두 개의 주요 당파가 형성되었다. 소작농, 노동자, 일부 성직자는 적색당에, 지주와 지식인은 백색당에 각각 모였다. 1862년에는 이 두 지도적 그룹이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지 세력을 구성하고 있었다.
3. 봉기의 발발과 전개
1863년 1월, 폴란드에서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이 봉기는 알렉산데르 볘로폴스키 백작이 러시아군 징집 명령을 내린 것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다. 봉기 지도자들은 징집을 피해 숲에 숨어 있던 청년들에게 무기와 장비를 제공할 방도를 찾지 못했지만, 약 1만 명의 사람들이 혁명의 깃발 아래 모였다. 이들은 주로 도시 노동자와 젊은 사무직원, 빈곤한 슈략타 출신의 젊은이들과 하급 성직자들이었다.
봉기는 당시 유럽에 새로운 소란을 가져왔다. 폴란드인을 지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했지만,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등 열강들은 정치적 안정기가 깨진 것을 우려했다. 봉기군은 제대로 무장하지 못한 채 람제이 장군이 이끄는 9만 명의 러시아군에 맞서 게릴라 전술을 펼치며 80여 회의 격전을 벌였다.
한편, 봉기군은 폴란드 임시정부를 세우고 “신념, 신분, 계층의 구별 없이 자유롭고 평등한 모든 폴란드의 아들들”에게 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문은 소작농이 경작하는 토지는 무조건 그들의 재산이 되고, 영주가 잃게 될 토지 보상금은 국립 중앙은행이 부담한다고 명시했다. 이 선언문은 서유럽 국가들에게도 발표되었고, 많은 지역에서 진심 어린 동정을 받았다. 비오 9세 교황은 폴란드를 위해 특별 기도를 바치도록 촉구하기도 했다.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라트비아, 우크라이나 북부 및 러시아 서부에서도 1863년 2월 1일에 봉기가 시작되었다. 지그문트 셰라코프스키, 안타나스 마츠케비추스, 콘스탄티 칼리노프스키 등이 지도한 이 봉기는 폴란드 봉기군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리투아니아에는 13만 5천 명의 러시아 군대와 6천 명의 코사크 병력이, 볼리니아에는 4만 5천 명의 러시아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 봉기군은 수적으로 열세였다.
봉기 초기, 리투아니아 전역의 무기 공장이 점령되고 많은 러시아 관리들이 처형되었다. 1863년 2월 2일, 마리암폴레 근교 치스타 부다에서 러시아군 기병대와 리투아니아 농민 간의 첫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지만, 준비 부족한 농민들의 학살로 끝났다. 이후 봉기군은 결집하여 더 큰 부대를 만들고 새로운 참여자를 모집했다. 4월 7일, 지그문트 셰라코프스키는 2500명의 무장 병력을 모아 복고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셰라코프스키가 이끄는 농민군은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5월 8일 구디슈키스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했다.
봉기군은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과 나폴레옹 3세의 지원을 기대했다. 당시 프로이센은 알벤슬레벤 협정을 통해 러시아에 접근하여 폴란드 봉기 진압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는 여러 정부의 항의와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샀다. 그 결과, 비교적 사소한 봉기는 러시아에 대한 "민족 전쟁"으로 변모했다. 아담 예지 차르토리스키 공작의 아들 브와디스와프 차르토리스키 공작의 조언에 따라 모든 국민이 무기를 들었고, 바르샤바 대주교 지그문트 펠린스키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러시아 정부의 직책을 사임하고 봉기군에 합류했다.
스웨덴 국왕 카를 15세는 폴란드의 상황에 동정하며 러시아에 대한 십자군을 계획했지만, 덴마크 전쟁 대책과 중립주의적 성향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에서 폴란드 민족 운동을 탄압하지 않았지만, 민족주의의 표면화는 러시아 급진파 그룹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러시아는 봉기 진압에 더욱 노력을 기울였다. 미하일 무라비요프 장군은 많은 반란자를 처형하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냈으며, 그의 잔혹함은 유럽 전역에서 비난을 받았다. 표도르 베르크 백작도 무라비요프와 마찬가지로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1863년 10월, 롬왈트 트라우구트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국민정부 측에 희망이 보였지만, 1864년 4월 트라우구트와 다른 국민정부 구성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면서 봉기는 급속히 종결되었다.
봉기는 8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650여 회의 전투와 소규모 충돌이 벌어졌고, 약 2만 5000명의 폴란드인이 희생되었다. 사모기티아와 포들라시에 두 지역이 가장 오랫동안 봉기를 지지했다. 봉기 이후 가혹한 보복이 이어졌고, 많은 이들이 처형되거나 시베리아, 카프카스 지방, 우랄 지방 등 러시아 내륙으로 추방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폴란드 의회 왕국과 구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지를 몰수하고, 고액의 세금을 부과했다. 또한, 교회의 영지와 자금을 몰수하고 수도원을 폐쇄했으며, 학교에서의 수업과 연구를 러시아어로 강제했다. 폴란드 의회 왕국의 흔적은 모두 지워졌고, 10개 지역으로 분할되어 각 지역에 군정관이 배치되었다.
3. 1. 폴란드 왕국에서의 봉기
1863년 1월 22일, 폴란드에서 봉기가 시작되자 중앙국민위원회(CNC)는 임시 정부를 선언하고 "모든 폴란드의 아들들은 신앙, 신분, 계급의 차이 없이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다"라고 선포했다. 임시 정부는 농민이 경작하는 토지는 무조건 그들의 재산이 되며, 토지 보상은 국가가 지주들에게 지급할 것이라고 밝혔다.[9]
초기 봉기군은 주로 도시 노동 계급, 하급 사무원, 가난한 슈와흐타(szlachta)(귀족) 출신 젊은이들과 하급 성직자들로 구성된 약 1만 명의 자원병이었다. 이들은 알렉산데르 비엘로폴스키(Alexander Wielopolski)의 러시아군 징집을 피해 숲에 숨어 있다가 봉기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들은 제대로 무장하지 못하고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2월 한 달 동안 러시아군과 80여 차례의 전투를 벌이며 게릴라 전술에 의존해야 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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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 첫 24시간 동안 전국 각지의 무기고가 약탈되었고, 많은 러시아 관리들이 처형되었다. 2월 2일에는 마리얌폴레(Marijampolė) 근처 치스타 부다(Čysta Būda)에서 낫으로 무장한 리투아니아 농민들과 러시아 용기병 부대 간의 첫 주요 군사 충돌이 발생했지만, 준비되지 않은 농민들의 학살로 끝났다.[9]
한편, 중앙국민위원회는 서유럽 국가들에 지원을 요청했고, 노르웨이에서 포르투갈에 이르기까지 많은 국가에서 지지를 받았다. 미합중국 남부 연합도 폴란드-리투아니아 반군에 동정심을 표했다.[9] 이탈리아, 프랑스, 헝가리 장교들이 참전했으며, 교황 비오 9세는 폴란드를 위한 특별 기도를 지시했다.[10]
그러나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와 같은 강대국들은 국제적인 평화를 깨뜨리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극적인 지원을 꺼렸다. 당시 폴란드 왕국에는 3만 5천 명의 폴란드군이 14만 5천 명의 러시아군과 대치하고 있었다.[10]
3. 2.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로의 확산
1863년 2월 1일, 리투아니아 대공국 옛 지역에서 봉기가 발발했다. 4월과 5월에는 디나부르크, 라트비아와 비쳅스크, 벨라루스, 키예프 주, 우크라이나 북부, 그리고 볼리니아 현으로 확산되었다. 갈리치아(오스트리아 분할 지역)와 프로이센 분할 지역에서 자원병들과 무기, 보급품이 국경을 넘어왔고, 이탈리아, 헝가리, 프랑스와 러시아 자체에서도 자원병들이 도착했다.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라트비아, 우크라이나 북부 및 러시아 서부에서의 봉기는 지그문트 셰라코프스키, 안타나스 마츠케비추스, 콘스탄티 칼리노프스키 등의 지도 아래 1863년 2월 1일에 시작되었다. 이들 지도부는 폴란드 동지들을 전적으로 지지하였고, 폴란드 반란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봉기가 시작된 지 24시간 만에 리투아니아 전역의 무기 공장이 점령되었고, 많은 러시아 관리들이 공개 처형되었다. 1863년 2월 2일, 마리암폴레 근교 치스타 부다 전투에서 러시아군 기병대와 대부분 낫으로 무장한 리투아니아 농민 간의 첫 대규모 전투가 발생했다. 이 전투는 준비 부족한 농민들이 학살당하는 형태로 끝났다.
4월 7일, 2500명의 무장 병력을 모으는 데 성공한 지그문트 셰라코프스키는 복고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셰라코프스키가 이끄는 농민군은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4월 21일 라그바 전투, 5월 2일 빌니우스 전투, 5월 7일 메디케이 전투), 수주간에 걸친 행군과 전투에 지쳐 5월 8일 구디슈키스 전투에서 패배하였다.[3]
3. 3. 국제 사회의 반응과 외교적 노력
알벤슬레벤 협정이 체결되면서 폴란드 봉기는 국제적인 사건으로 비화되었고, 서구 열강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외교적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11]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라인 강 유역의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 프로이센을 압박하고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추구했다. 반면 영국은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의 전쟁을 막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동맹을 저지하려 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 경쟁했지만 프랑스의 동맹 제의를 거절했다.[4]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는 폴란드의 권리 옹호를 위한 외교적 개입에 합의하여 4월에 외교적 노트를 발표했지만, 그 내용은 설득적인 수준에 그쳤다. 폴란드 측은 서구 열강의 무력 개입을 기대했지만, 전쟁 위협이 사라지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서구 열강의 무력 충돌에 대한 권리를 거부했다. 1863년 6월 서구 열강은 반란군 사면, 국가 대표 구조 창설, 자치권 확대, 빈 회의 서명국 회의 소집 및 휴전 등을 제시했지만, 알렉산드르 2세는 이를 거부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추가적인 개입을 하지 않았고, 러시아는 1863년 9월 협상을 결렬시켰다.
브와디스와프 차르토리스키는 아담 차르토리스키 공작의 아들로, 나폴레옹 3세의 약속에 용기를 얻어 모든 국민이 무기를 들도록 조언했다.
4. 봉기의 진압과 결과
1월 봉기는 내부 분열과 러시아의 강력한 탄압, 외세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실패했다. 미하일 무라비요프는 '교수대의 무라비요프'로 불릴 정도로 잔혹하게 봉기를 진압했으며, 수많은 사람이 처형되거나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12] 역사가 노먼 데이비스는 시베리아 유형자 수가 8만 명에 달한다고 추정한다.[12]
봉기 진압 과정에서 마을과 도시들이 불타고, 경제 및 사회 활동이 중단되었으며, 슈략타는 재산 몰수와 과도한 세금으로 몰락했다. 러시아군의 잔혹 행위는 유럽 전역에서 비난받았다.[13]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초기에는 봉기군 지원을 약속했으나, 프로이센과의 관계 악화 등을 우려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스웨덴의 카를 15세는 폴란드를 지원하려 했으나, 덴마크 전쟁 발발과 중립주의 정책으로 인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봉기 실패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에 대한 가혹한 탄압과 러시아화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표도르 베르크 백작은 폴란드인들에 대한 가혹한 조치를 지속하고, 폴란드 전통과 문화를 근절하려는 노력을 강화했다.
4. 1. 러시아군의 진압 작전
미하일 무라비요프는 '교수대의 무라비요프'라고 불릴 정도로 잔혹하게 진압을 주도하여, 그의 감독 아래 128명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9,423명이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12] 노먼 데이비스는 유형된 사람의 수가 8만 명에 달하며, 이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강제 이주였다고 주장한다.[12] 이로 인해 마을과 도시들이 불타고, 모든 경제 및 사회 활동이 중단되었으며, ''슈략타''는 재산 몰수와 과도한 세금으로 파산했다.이러한 러시아군의 잔혹 행위는 유럽 전역에서 비난을 받았다.[13] 무라비요프의 후임으로 폴란드 총독에 부임한 표도르 베르크 백작 역시 가혹한 조치를 이어가며, 체계적인 러시아화를 강화했다.
1863년 10월, 롬왈트 트라우구트가 봉기군 지도자가 되어 소작농에게 토지를 주는 등 모든 계급의 투쟁을 실현하려 했으나, 너무 늦은 조치였다. 러시아 정부는 이미 소작농들에게 자유 소유 토지의 청구권을 부여하며 선수를 쳤다. 1864년 4월, 트라우구트와 다른 봉기 지도부 4명이 체포되어 처형되면서 봉기는 급속히 종결되었다.
봉기 진압 이후, 러시아는 공식 기록에 따르면 396명을 처형하고 1만 8672명을 시베리아로 유배하는 등 가혹한 보복을 가했다. 많은 사람들이 카프카스 지방, 우랄 지방 등 러시아 내륙으로 보내졌고, 약 7만 명이 폴란드 국외로 추방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폴란드 의회 왕국과 구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많은 영지를 몰수하고 고액의 세금을 부과했으며, 교회 영지와 자금 몰수, 수도원 폐쇄, 학교에서의 러시아어 수업 강제 등 폴란드 의회 왕국의 자치를 완전히 없앴다.
4. 2. 봉기 실패의 원인
폴란드 지주(슈략타)가 루스(루테니아) 농민들에게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적은 수의 농민들이 1월 봉기에 참여했다.[16] 어떤 경우에는 러시아군이 반군을 잡는 것을 돕기도 했다.[16] 이는 봉기 실패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거론된다. 봉기 첫 24시간 동안 전국 각지의 무기고가 약탈되었고, 많은 러시아 관리들이 현장에서 처형되었다. 1863년 2월 2일, 주로 낫으로 무장한 리투아니아 농민들과 러시아 용기병 부대 간의 첫 주요 군사 충돌이 마리얌폴레 근처 치스타 부다(Čysta Būda)에서 발생했는데, 이는 준비되지 않은 농민들의 학살로 끝났다.[16]반란군의 국민정부는 귀족 지배에 대한 불만이 확산되고 있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또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적극적인 지원도 기대하고 있었다. 러시아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폴란드에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하는 것을 지원하겠다고까지 약속했던 프로이센과 프랑스와의 전쟁은 당시 불가피해지고 있었고, 폴란드와 프랑스는 공통의 적을 가진 동맹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민족 전쟁을 시작한 폴란드를 구하기 위한 내정 간섭을 지속한 강대국은 스웨덴뿐이었다. 스웨덴 국왕 카를 15세는 폴란드의 비참한 상황에 동정을 표하며 러시아에 대한 십자군을 계획했지만, 동시에 발생한 덴마크 전쟁 대책에 쫓기고, 또한 봉기군에 대한 지원은 스웨덴의 중립주의적 성향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롬왈트 트라우구트는 소작농에게 토지를 주고 그들을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킴으로써 모든 계급의 투쟁을 실현하려고 했다. 소작농들의 반응은 좋았지만, 광범위한 운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훌륭한 정책이었지만, 시기가 너무 늦었던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선수를 치고 폴란드의 귀족 영지 소작농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에게 자유 소유 토지의 청구권을 부여했던 것이다.
4. 3. 가혹한 탄압과 러시아화 정책
1월 봉기 실패 이후, 러시아 제국은 폴란드에 대한 가혹한 탄압과 러시아화 정책을 시행했다.[13]미하일 무라비요프는 '교수대의 무라비요프'라고 불릴 정도로 잔혹한 탄압을 주도했다. 전투에서 사망한 수천 명 외에도, 무라비요프의 직접 감독하에 128명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러시아 자체 추산에 따르면 9,423명의 남녀가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12] 역사가 노먼 데이비스는 그 수치를 8만 명으로 제시하며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강제 이주였다고 언급했다.[12]

러시아 공식 정보에 따르면 396명이 처형되고 18,672명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수많은 남녀가 러시아 내륙과 코카서스, 우랄 및 기타 오지로 보내졌다. 총 6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투옥된 후 폴란드에서 추방되어 러시아의 먼 지역으로 보내졌다.[20] 마을과 도시들이 불태워졌고, 모든 경제적, 사회적 활동이 중단되었다. ''슈략타''(폴란드 귀족)는 재산 몰수와 과도한 세금으로 파산했다.
1864년 초의 농노 해방은 의도적으로 ''슈략타''를 파산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러시아 정부는 폴란드에서 1,660개, 리투아니아에서 1,794개의 영지를 몰수했다. 모든 영지에 전쟁 배상금으로 10%의 소득세가 부과되었으며, 1869년에야 5%로 감세되었다.
정부는 교회 영지와 기금을 인수하고 수도원을 폐지했다. 종교 교육을 제외한 모든 학교의 교육은 러시아어로 이루어지도록 명령되었다. 러시아어는 국가의 공식 언어가 되어 중앙 및 지방 정부의 모든 사무실에서 독점적으로 사용되었다. 이전 폴란드 자치의 모든 흔적이 제거되었고, 왕국은 10개 주로 나뉘었으며, 각 주에는 바르샤바 주지사의 통제하에 임명된 러시아 군사 주지사가 있었다. 모든 이전 폴란드 정부 관리들은 직책에서 해임되고 러시아 관리들로 대체되었다.[21]
4. 4. 로무알트 트라우구트의 최후
트라우구트는 1864년 4월 10일 밤 러시아군에 체포되었다. 함께 체포된 국민평의회 마지막 구성원은 안토니 예지오란스키, 라파우 크라예프스키, 요제프 토치스키, 로만 주린스키(Roman Żuliński)였다. 이들은 바르샤바 요새(Warsaw Citadel)에 투옥되었다가 8월 5일 교수형에 처해졌다.[18][19] 이는 1월 봉기의 상징적인 종식이었다.5. 1월 봉기의 유산과 영향
1월 봉기는 폴란드에 큰 상처를 남겼다. 봉기 실패 후, 러시아 제국은 가혹한 보복을 가했다. 공식 기록으로만 396명이 처형되었고, 18,672명이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러시아 내륙, 코카서스, 우랄 등지로 추방되었다.[20]
러시아는 폴란드 귀족 세력인 슈략타를 약화시키기 위해 1864년 농노 해방을 단행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수많은 영지가 몰수되었고, 높은 소득세가 부과되었다. 농민들은 토지를 비싼 값에 사야 했으며, 슈략타에게는 토지를 팔 수 없었다. 이러한 조치는 슈략타에 대한 처벌이자, 폴란드 경제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었다.
또한, 러시아는 폴란드 문화 말살 정책을 펼쳤다. 교회 재산과 기금을 몰수하고, 수도원을 폐쇄했다. 학교 교육은 러시아어로만 진행되었고, 폴란드어 사용은 제한되었다. 폴란드 왕국의 자치 흔적은 모두 제거되었고, 러시아 관리가 폴란드를 통치했다. 조지 케넌에 따르면, 수천 명의 폴란드인들이 네르친스크 은광 지역으로 강제 이송되었다.[21]
5. 1. 폴란드 민족주의 운동에 미친 영향
1월 봉기는 수 세기 동안 이어진 폴란드 봉기 중 하나였다. 러시아가 봉기를 진압한 지 41년 후인 1905년, 차세대 폴란드인들이 다시 한번 로츠 봉기를 일으켰지만 역시 실패했다.봉기의 여파로 다음 세기의 정치적 의제를 설정한 두 가지 새로운 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리투아니아인의 후손인 유제프 필수츠키가 이끈 폴란드 사회당이었다. 다른 하나는 로만 드모프스키가 이끌었고 민족민주주의 운동(Endecja라고도 불림)이었는데, 그 뿌리는 분할된 영토의 폴란드화를 통해 강제적인 러시아화와 독일화를 되돌리고 국가 주권을 추구하는 가톨릭 보수주의에 있었다.[22]
5. 2. 문화 예술에 미친 영향
1월 봉기는 폴란드 낭만주의 시대에 발생하여 이후 폴란드 실증주의와의 경계를 긋는 계기가 되었다. 아르투르 그로트거, 율리우스 코삭, 미하우 엘위로 안드리올리 등 많은 폴란드 화가들이 봉기에서 영감을 받았다.[22]치프리안 노르비트는 "쇼팽의 피아노"라는 시에서 1863년 1월 봉기 당시 러시아 군인들이 바르샤바 건물 2층에서 프레데릭 쇼팽의 피아노를 던져버린 사건을 묘사했다. 쇼팽은 11월 봉기 직전 폴란드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폴란드 실증주의 작가이자 노벨 문학상 후보였던 엘리자 오르제슈코바는 1863년 1월 봉기 이후 그로드노를 배경으로 한 소설 『네임넘 위』를 썼다.
요제프 야젬보프스키는 봉기를 겪은 무명의 사람들로부터 자료를 모아 『1863년 사람들이 말한다: 알려지지 않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당대 사람들의 목소리 모음집』을 편찬했다.
쥘 베른의 『해저 2만리』 초고에는 네모 선장이 1863년 1월 봉기 때 러시아인들에게 가족을 잃은 폴란드 귀족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은 직후였기 때문에, 편집자 피에르-쥘 에첼은 네모 선장의 동기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기 드 모파상의 소설 『피에르와 장』에서 주인공 피에르는 조국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 이후 프랑스로 온 늙은 폴란드 화학자 친구가 있는데, 이는 1월 봉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6. 주요 인물
1월 봉기에는 봉기를 주도하거나 참여한 폴란드 측 인물과 이를 진압하려 한 러시아 측 인물이 있었다.
폴란드 측 | 러시아 측 |
---|---|
6. 1. 폴란드 측 인물
로무알트 트라우구트(Romuald Traugutt) (1826–1864)는 독일계 중령 출신으로, 1월 봉기에서 장군으로 승진하여 지도자가 되었고 지하 정부에서 외교를 담당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러시아군에게 고문을 당하고 교수형에 처해졌다.[17][18][19]지그문트 시에라코프스키(Zygmunt Sierakowski)는 '붉은색'과 '흰색'으로 구성된 "가상 연립 정부"인 라다 나로도바(RN, 국가평의회)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마리안 랑기에비치(Marian Langiewicz) (1827–1887)는 1월 봉기의 군 사령관이었다.
안나 헨리카 프스토보이토브나(Anna Henryka Pustowójtówna) (1838–1881)는 "미하우 스목(Michał Smok)"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한 마리안 랑기에비치의 부관이었다. 러시아-폴란드계 출신으로 1861년부터 활동했으며, 이후 파리 코뮌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도 참여했다.
스타니스와프 브조스카(Stanisław Brzóska) (1832–1865)는 폴란드 사제이자 1월 봉기 말기 지휘관이었다.
프란치삭 바후셰비치(Francišak Bahuševič) (1840–1900)는 벨라루스 시인이자 작가로, 현대 벨라루스 문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성 알베르트흐미엘로브스키(Albert Chmielowski) (1845–1916)는 알베르티누스 형제회와 자매회 설립자이다.
야로스와프 덤브로브스키(Jarosław Dąbrowski) (1836–1871)는 러시아 군 장교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장교 "비밀 위원회"의 좌익 구성원이었다. 그는 파리 코뮌을 위해 싸우다 파리에서 사망했다.
빈첸티 칼리노프스키(Wincenty Kalinowski) (1838–1864)는 리투아니아 민족 부흥의 지도자 중 한 명이자 벨라루스 민족주의 창시자였다.
성 라파엘 칼리노프스키(Raphael Kalinowski) (1835–1907)는 리투아니아 출신으로, 러시아 군에서 대위직을 사임하고 폴란드 반란군의 전쟁 장관이 되었다.
아폴로 코르제니오프스키(Apollo Korzeniowski) (1820–1869)는 폴란드 극작가이자 조지프 콘래드의 아버지였다.
안타나스 마체케비치우스(Antanas Mackevičius) (1828–1863)는 리투아니아 사제였다.
우와디스와프 니에골레프스키(Władysław Niegolewski) (1819–1885)는 자유주의적 폴란드 정치인이자 국회의원이었다.
프란체스코 눌로(Francesco Nullo) (1826–1863)는 가리발디 군단(폴란드)(Garibaldi Legion (Poland))을 이끈 이탈리아 장군이었다.
볼레스와프 프루스(Bolesław Prus) (1847–1912)는 역사 소설의 폴란드 대표 작가였다.
프랑수아 로슈브뤼느(François Rochebrune) (1830–1870)는 죽음의 주아브(Zouaves of Death)라는 폴란드 반군 부대를 편성하고 이끌었으며 장군으로 승진했다.
알렉산데르 소하체프스키(Aleksander Sochaczewski) (1843–1923)는 폴란드 화가였다.
레온 프자노프스키(Leon Przanowski) (1844-1924)는 1월 봉기 중 참모총장에 해당하는 직책을 맡았던 국가 정부의 구성원이었다.
6. 2. 러시아 측 인물
- -는 러시아 제국의 황제로, 1월 봉기 진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는 1월 봉기 진압에 참여한 러시아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은 1월 봉기 진압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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