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스카르 포티오레크는 체코 출신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총독이었다. 황립 군사 기술 연구소와 크리그슐레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시작하여 참모부에서 근무하며 진급을 거듭했다. 1914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으며, 이후 사라예보 반 세르비아 폭동을 조장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발칸 군대의 사령관으로 세르비아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여 해임되었고, 이후 은퇴하여 1933년에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제1차 세계 대전 관련자 - 호르티 미클로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제독 출신인 호르티 미클로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헝가리 왕국의 섭정을 역임했으며, 전쟁 후 정치적 혼란 속에서 섭정으로 선출되었으나 나치 독일과의 동맹,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홀로코스트 책임 논란 등으로 평가가 엇갈린다.
  •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제1차 세계 대전 관련자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참모총장을 역임하며 군 현대화를 추진하고 예방 전쟁을 주장했으나, 전쟁 계획 실패와 인명 피해로 비판받은 사회 다윈주의적 관점의 인물이다.
  • 오스트리아의 장군 - 요한 폰 클레나우
    오스트리아 제국군 장군인 요한 폰 클레나우는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얻었고,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의 공헌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을 수여받았다.
  • 오스트리아의 장군 - 카를 필리프 추 슈바르첸베르크 후작
    카를 필리프 추 슈바르첸베르크 후작은 오스트리아의 육군 원수이자 외교관으로,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며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연합군을 지휘하여 나폴레옹에게 패배를 안겼고 러시아와 프랑스 주재 대사, 빈 회의 참석 등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다.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08년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1908년의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이름오스카르 포티오레크
출생일1853년 11월 20일
출생지바트블라이베르크, 카린티아 공국, 오스트리아 제국
사망일1933년 12월 17일
사망지클라겐푸르트,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소속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 종류육군
복무 기간1867년–1915년
최종 계급포병대장
모교Kriegsschule 사관학교
경력
주요 참전제1차 세계 대전
세르비아 전역 (1914)
체르 전투
드리나 전투
콜루바라 전투
수상헝가리 성 스테판 훈장
레오폴트 훈장
정치 경력
직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총독
임기 시작1911년 5월 10일
임기 종료1914년 12월 22일
전임자마리얀 바레샤닌
후임자스체판 사르코티치
임명자프란츠 요제프 1세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포티오레크 가문은 체코 출신으로, 오스카르 포티오레크가 태어나기 전 보헤미아에서 케른텐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 파울 포티오레크는 바트블라이베르크의 광산 수석 검사관이었다. 오스카르 포티오레크는 1853년 11월 20일 바트블라이베르크에서 태어났다. 1871년 9월 1일, 그는 장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제2 기술 연대에 소위로 입대했으며, 1873년 5월 1일에 중위로 진급했다. 오스카르는 황립 군사 기술 연구소와 비엔나의 ''크리그슐레''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1879년 5월 1일에 대위로 진급했으며, 1883년에는 제17 보병 연대에서 복무했다. 1886년부터 그는 참모부 작전 및 특별 참모 활동 부서에서 근무했다.

1887년 5월 1일에 소령, 1889년 11월 1일에 중령으로 진급했다. 1890년에는 제7 보병 연대로, 1891년에는 다시 참모부로 전출되었으며, 1892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하여 작전 및 특별 활동 부서의 책임자가 되었다. 1898년 5월 1일, 그는 부다페스트에서 제64 보병 여단 사령관(소장)으로 임명되었다. 1902년 프란츠 요제프에 의해 부참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06년 프란츠 콘라트 폰 횓첸도르프에게 참모총장 자리를 내주었다. 포티오레크는 ''야전사령관'' 계급으로 슈타이어마르크그라츠에서 사령관이 되었다. 1910년까지 제3군단을 지휘했다.

포티오레크는 경쟁자였던 콘라트를 대체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 1911년 프란츠 요제프가 콘라트를 참모총장으로 교체했지만, 블라시우스 셰무아 중장을 임명했고, 1912년 12월 12일에 다시 콘라트를 임명했다.

3.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

1914년 6월 28일, 포티오레크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와 함께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이들은 일리자에서 기차를 타고 도착하여 필리포비치 군 캠프에서 병사들을 사열한 뒤, 시청(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립대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왕실 일행은 밀랴츠카 강을 따라 아펠 강변을 따라 이동하는 6대의 차량 행렬로 이동했는데, 포티오레크는 레오폴트 로이카가 운전하는 Gräf & Stift "더블 페이튼"이라는 열린 차량에 하라흐 백작, 왕실 부부와 함께 탑승했다.

오전 10시 10분, 중앙 경찰서를 지날 때 암살범 네델코 차브리노비치가 대공의 차량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로이카가 속도를 높여 피했고, 수류탄은 다음 차 밑에서 폭발하여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라틴 다리, 사라예보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부상자들을 방문하려 했고, 참모 안드레아스 폰 모르세이는 위험을 경고했으나, 포티오레크는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1] 포티오레크는 왕실 차량이 다른 경로를 이용해야 한다고 결정했지만, 운전기사에게 알리지 못했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로이카는 라틴 다리 맞은편에서 우회전했고, 그곳에 있던 공모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차에 두 발의 총을 발사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목에, 소피는 복부에 맞았고, 포티오레크는 무사했다.[1] 프린치프는 나중에 소피를 맞힌 총알이 원래 포티오레크를 겨냥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3. 1. 암살 사건의 경과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는 기차를 타고 일리자에서 사라예보에 도착했다. 대공은 필리포비치 군 캠프에서 병사들을 사열한 후, 포티오레크와 함께 사라예보 시청(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립대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왕실 부부와 포티오레크, 차량 소유주 하라흐 백작은 레오폴트 로이카가 운전하는 Gräf & Stift "더블 페이튼"이라는 열린 차량을 포함한 6대의 차량 행렬의 세 번째 차에 탑승하여 밀랴츠카 강변의 아펠 가를 따라 이동했다.

오전 10시 10분경, 차량 행렬이 중앙 경찰서를 지날 때 암살범 네델코 차브리노비치가 대공의 차량에 수류탄을 던졌다. 로이카는 수류탄을 피하려 속도를 높였으나, 수류탄은 튕겨져 나가 다음 차 밑에서 폭발하여 승객 2명과 구경꾼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분노했지만, 시청 환영 행사를 마친 후 폭탄 테러 부상자들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대공의 참모 안드레아스 폰 모르세이는 위험을 경고했으나, 포티오레크는 "사라예보가 암살범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책임을 지겠습니다"라며 반박했다.[1] 포티오레크는 사라예보 병원으로 가는 다른 경로를 택하기로 결정했지만, 운전기사 로이카에게 알리지 않았다.

병원으로 가던 중, 로이카는 라틴 다리 맞은편에서 우회전했고, 그곳에는 또 다른 암살 공모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있었다. 프린치프는 계획을 포기하려던 찰나, 눈앞에서 차가 후진하는 것을 보고 권총을 꺼내 약 4~5걸음 거리에서 두 발을 발사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목에, 소피는 복부에 총을 맞았다. 포티오레크, 하라흐 백작, 로이카는 부상을 입지 않았다.[1] 프린치프는 나중에 소피를 죽인 총알은 포티오레크를 겨냥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4. 암살 사건 이후

페르디난트 암살 사건에 대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포티오레크는 직책을 유지했다. 암살과 뒤이은 7월 위기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의 원인이 되었고, 포티오레크는 발칸 군대(Balkanstreitkräfte) 사령관이 되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생존자 죄책감"이 포티오레크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이끌고 세르비아를 "처벌"하는 임무를 맡게 된 배경이라고 추측한다. 그는 "나는 사라예보에서 살아남았으니 복수를 위해 죽을 것이다!"라고 여러 차례 주장할 정도로 자신의 임무에 열성적이었으나, 지휘관으로서는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소규모 세르비아 왕립군은 모든 주요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고, 체르 전투와 콜루바라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며 참패했다. 결국 1914년 12월 22일 포티오레크는 지휘관에서 해임되고 오스트리아의 외젠 대공으로 교체되었으며, 이로 인해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4. 1. 사라예보 반 세르비아 폭동 조장

사라예보 반 세르비아 폭력


세르비아로 보내진 동원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


페르디난트 암살 이후, 포티오레크는 사라예보 반 세르비아 폭동을 조직하고 조장했다.[2] 포티오레크는 반 세르비아 탄압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보조 민병대인 슈츠코르프스를 재건했다.[3] 주로 보스니아인으로 구성된 슈츠코르프스는 특히 보스니아 동부의 세르비아인 거주 지역에서 세르비아인 박해에 관여했다.[4][5]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의 세르비아계 주민 탄압
구분내용
체포약 5,500명
감옥에서 사망700명 ~ 2,200명
처형460명
강제 추방약 5,200 세르비아 가정[7]


5.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과 해임



페르디난트 암살 이후, 포티오레크는 사라예보 반 세르비아 폭동을 조직하고 조장했다.[2] 그는 반 세르비아 탄압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보조 민병대인 슈츠코르프스를 재건했다.[3] 주로 보스니아인으로 구성된 슈츠코르프스는 특히 보스니아 동부의 세르비아인 거주 지역에서 세르비아인 박해에 관여했다.[4][5]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약 5,500명의 세르비아계 주민이 체포되었고, 700명에서 2,200명이 감옥에서 사망했으며, 460명이 처형되었다.[6][7] 약 5,200 세르비아 가정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강제 추방되었다.[7]

포티오레크는 암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직에 머물렀다. 암살과 뒤이은 7월 위기로 인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발칸 군대(Balkanstreitkräfte)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러한 "생존자 죄책감"이 포티오레크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지휘하고 세르비아를 "처벌"하기 위한 첫 번째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는 추측이 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매우 열성적이었고(여러 번 "나는 사라예보에서 살아남아 그것을 복수하기 위해 죽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겉보기에는 무능한 지휘관이었다. 소규모의 세르비아 왕립군은 모든 주요 전투에서 무패였고, 체르 전투와 콜루바라 전투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내며 교과서적인 군사적 참패를 겪은 후, 1914년 12월 22일 지휘관에서 해임되었고, 오스트리아의 외젠 대공으로 교체되었는데, 이는 그를 자살 충동에 빠지게 했다고 전해진다.

6. 은퇴와 죽음

포티오레크의 무덤(비너 노이슈타트)


포티오레크는 클라겐푸르트 케른텐으로 은퇴하여 1933년에 사망했다. 그는 비너 노이슈타트에 있는 테레지안 군사 아카데미 묘지에 묻혔다.

7. 서훈

국가훈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8]
독일 제국[8]
페르시아 제국[8]사자 및 태양 훈장 1등급
스페인[8]이사벨라 가톨릭 대십자장


참조

[1] 뉴스 When Sarajevo Triggered a War https://web.archive.[...] Time 1984-01-30
[2] 서적 Istoriski časopis https://books.google[...] 2013-12-07
[3] 서적 The National Question in Yugoslavia: Origins, History, Politics https://books.google[...] Cornell University Press 2013-12-04
[4] 간행물 2001
[5] 서적 Unholy Terror: Bosnia, Al-Qa'ida, and the Rise of Global Jihad https://books.google[...] Zenith Imprint 2007
[6] 서적 Unholy Terror: Bosnia, Al-Qa'ida, and the Rise of Global Jihad https://books.google[...] Zenith Imprint 2007
[7] 서적 Religious Separation and Political Intolerance in Bosnia-Herzegovina https://books.google[...] Texas A&M University Press 2003-02-05
[8] 논문 Hof- und Staatshandbuch der Österreichisch-Ungarischen Monarchie 2020-07-2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